STB다시보기 | [인터뷰] 일본 속의 신라사 5회
[STB하이라이트]
- 5회 신불습합神佛習合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처럼 일본은 우리와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면서도 동시에 감정의 골이 깊은 나라입니다. 그중에서도 한국과 일본이 공유하고 있는 한일 고대사의 문제는 아직도 다 풀리지 않은 채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일본 속의 신라사〉를 통해 고대 한국과 일본의 올바른 역사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사회자: 김철수 중원대학교 종교문화학과 교수
출연자: 홍윤기 왕인학회장, 국제뇌과학대학원 석좌교수
오사카大阪와 백제의 왕인 박사
Q.김철수 교수: 이번에는 오사카에 대해서 말씀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교수님께서는 “오사카는 고대 백제인들이 개척한 도시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신데요, 이 부분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A.홍윤기 교수: 고대 한반도로부터 백제인들이 오사카 앞바다인 ‘난바難波’로 들어오게 됩니다. 지금은 ‘난바’가 오사카의 번화가이지만 예전에는 바닷가였습니다. ‘난바’라는 지역 명칭도 백제인 왕인 박사가 지은 명칭입니다. 그리고 ‘난바진가難波津歌’라는 일본 최초의 와카和歌를 지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시가를 ‘와카’라고 합니다.
※와카和歌: 5음과 7음으로 구성된 일본의 전형적인 시가
Q.김철수 교수: 오사카라는 지역은 왕인 박사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A.홍윤기 교수: 네 그렇습니다. 왕인 박사는 6세기 말에서 7세기에 백제인들과 함께 건너온 오사카 최고의 학자이자 시인이었습니다. 왕인 박사가 일본으로 건너온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일본 왕은 15대 응신왕이었는데, 응신왕의 요청으로 왕인 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와서 왕자들을 가르치게 됩니다. 이 응신왕의 후계자가 된 인덕왕의 왕릉이 오사카에 있습니다. 인덕왕의 왕릉이 1920년대 홍수로 일부 무너지게 되어 도굴을 당하게 되는데요, 도굴꾼들을 통해 인덕왕릉의 큰 칼(환두대도)의 손잡이에 삼족오가 새겨져 있는 것이 알려지게 됩니다. 이를 통해 인덕왕이 백제 계열의 왕이라는 학설이 지배적으로 생기게 됩니다.
신도와 불교 사찰의 융합
Q.김철수 교수: 백제인들이 개척한 오사카에 재일 한국인이 20만 명 정도 살고 있는데요, 이러한 곳에 신라신을 모신 신사가 있다고 하지요. 그 발자취가 궁금합니다.
A.홍윤기 교수: 오사카에 신라신을 모신 신사가 스미요시대사住吉大社라는 곳인데요 신라의 해신海神을 모신 신사입니다. 백제인이 개척한 오사카 땅이지만 신라인들도 끈질기게 진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신을 모시는 가문이 신라로부터 해신을 모셔왔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 발자취는 스미요시대사의 역사가 담긴 스미요시신대기란 문서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스미요시신대기住吉神代記라는 것이 8세기 초엽(731년)에 등장하게 됩니다. 여기에 신라의 바다신을 모셨다고 나오는데요, ‘바다 위의 신, 바다 속의 신, 바다 밑의 신’ 이렇게 삼신을 모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후나기무라지’라고 하는 신라인 가문이 있습니다. 일본의 선박 건조 가문이 되었는데요. 일본 고대사를 보게 되면 신라인의 건축술이 뛰어났습니다. 목조 건축술이 뛰어난 신라인으로부터 선박과 사찰 건조술이 전해졌다는 것을 일본 사학계에서도 인정해오고 있습니다.
Q.김철수 교수: 스미요시신대기에 시라기데사(신라사新羅寺)와 관련된 이야기도 적혀있는지 궁금합니다.
A.홍윤기 교수: 네. 신사 안에 사찰이 세워진 것인데요. 신사와 불사가 함께 존재하는 ‘신불습합’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일본 왕실에서 사찰에도 불교의 신이 계시다고 해서 신불습합이라는 일본 왕가의 주장들이 있어서 일본의 고대 천신 신도와 함께 신라의 불교 사찰인 신라사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고대 일본 왕실에서는 원래 처음에 섬긴 종교가 천신 신앙인 신도인데요, 이 신도도 사실 한민족의 신교 신앙에서 유래가 된 것입니다. 신라의 왕자였던 천일창 왕자가 일본에 한민족의 신교를 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 와카사만의 게히신궁에서는 천일창 왕자를 주신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일본은 신라로부터 신도가 전래되고, 백제로부터는 불교가 전래된 것입니다. 일본이 초기에는 신도와 불교의 갈등이 있었으나 8세기로 접어들면서 일본에서 신불습합으로 신도와 불교가 공존하게 됩니다.
종교라는 것이 일본 왕가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불보살佛菩薩도 신으로 나타난다.”는 주장이 일본 왕가로부터 대두되면서 신궁사라는 것도 만들어지게 됩니다. 신궁사는 신사에 사찰이 들어서는 것을 말합니다.
※신불습합神佛習合: 일본에서 신도와 불교가 융합하여 나타난 신앙 형태
스미요시대사住吉大社와 신궁사神宮寺
Q.김철수 교수: 일본에서의 신도와 불교를 이야기할 때 6세기 말 일본 31대 용명왕이 숭불 정책을 펴면서 일단 불교가 우세했었는데요. 8세기로 접어들면서 교수님 말씀대로 습합이 되는 형태가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에 스미요시대사에 신궁사가 설립된 것이죠?
A.홍윤기 교수: 스미요시신대기를 보게 되면 신라로부터 고겐왕 2년에 신라국에서 본존 불상인 약사여래상과 십이지신장과 사천왕상을 우리 조정에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Q.김철수 교수: 신도와 불교가 같이 어우러지는 독특한 일본의 종교 문화인 것 같습니다. 스미요시대사에서는 그럼 어떻게 신라의 바다신과 신라의 불상을 함께 모시게 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A.홍윤기 교수: 신궁에 사찰을 세우는 것을 ‘신궁사’라고 하는데요. 천일창天日槍 신라 왕자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보면 ‘신라 천일창 왕자는 고조선 태양신의 사자로서 고대 일본 선주민의 절대적 존숭의 대상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일본은 선박 사고로 인한 인명 피해가 잦았기에 신라의 우수한 선박술이 필요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천일창 왕자와 신라인의 역할이 컸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또 일본의 태양신 신앙도 천일창 왕자에 의해서 이뤄진 것입니다.
Q.김철수 교수: 교수님께서는 스미요시대사의 마유미 궁사와 상당히 인연이 깊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분이신지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홍윤기 교수: 마유미 궁사님은 훌륭한 고대 신도학자입니다. 이세신궁 근처에 있는 고가쿠칸 대학 신도학과 명예교수님입니다. 일본 신화를 가장 많이 연구한 분이기도 합니다. 이분과 교류한 지 30여 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이 교수님이 스미요시신대기 문서를 저에게 직접 보여주셨어요. 이 문서를 통해 스미요시대사의 역사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교수님이 “사실은 저도 신라 후손입니다”라고 그러더라고요. 신사의 궁사들이 입는 흰색의 신관복을 시라기유후白木綿라고 하는데요 이 시라기유후가 ‘신라의 흰 면복’이란 의미라고 말씀하시면서 신라의 베틀 기술에 대해서도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
일본의 신라사가 담긴, 스미요시명승도회住吉名勝圖會
Q.김철수 교수: 스미요시대사에는 공식 문서로서 ‘스미요시명승도회住吉名勝圖會’(5권 5책, 1794년)라는 그림으로 된 문서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내용들이 들어있는지 궁금합니다.
A.홍윤기 교수: ‘스미요시명승도회’라는 문서를 보면 신라 스님이 일본에 와서 신라사를 세운 발자취가 그림으로 그려진 내용도 있습니다. 이 그림 문서를 보면 신라를 아주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고대 신라와 고대 일본과의 연구가 거의 없어서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많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철수 교수: 오늘은 백제인들이 개척한 오사카에 남아 있는 신라의 흔적인 ‘스미요시대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고대의 신라와 일본의 관계를 이해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몰랐던 역사들을 밝혀나가는 즐거움이 큰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스미요시대사’에 남아 있는 신라와 관련된 흔적들이 어떻게 지워졌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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