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성장 잠재력 그리고 삼바와 축구의 나라 브라질 연방 공화국
[세계지역문화탐방]
브라질 연방 공화국은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나라이고, 세계에서 다섯 번째의 대국이다. 또 이 대륙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며,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국가 가운데 면적이 가장 넓고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이다. 흔히 삼바와 카니발의 나라로 알려져 있고, 전통적인 축구 강국으로서 펠레와 호나우두라는 걸출한 스타를 배출하였으며 2014년 6월 FIFA 월드컵을 개최한 나라이기도 하다. GDP 규모가 세계 7위에 해당하는 브라질은 브릭스BRICS 구성국의 한 축으로 세계 경제의 성장에서 잠재력이 가장 큰 나라 중 하나이고, 무한대의 자원과 농산물의 보고, 또 엄청난 산소 생산량 등 미래의 성장 잠재력을 갖춘 나라로 평가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와도 끊지 못할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코르코바도 산에서 본 리우데자네이루 시내 전경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브라질Brazil(Brasil)이라는 국명은 원래 ‘브라질’이라는 나무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이 나무는 붉은 색깔을 내는 염료로 사용되는데, 이 때문에 ‘불타는 숯처럼 붉은 나무’라는 뜻의 ‘파우-브라질’(pau-brasil)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브라질 나무를 유럽으로 대량 수출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지역은 언제부터인지 브라질이라 불리게 되었다. 브라질 연방은 약 850만㎢의 면적에 약 2억의 인구를 가진 대국이다. 이 나라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약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남미에서 에콰도르와 칠레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브라질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보통 한자문화권에서는 파서국巴西國으로도 불리는 이 나라는 남미 대륙 최대의 국가로 대륙의 약 48%를 차지하며,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나라이다. 북부는 아마존 강Amazon River이 흐르는 세계 최대의 열대우림, 남부는 브라질 고원이 자리한다. 최근에는 아마존 유역의 삼림을 개발해 농토를 만들면서 환경 파괴로 인한 사막화가 사회적인 문제, 지구적인 문제로 급부상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와의 국경과 북부 기아나 고지의 피고 다 네블리나Pico da Neblina 산은 3,014m로 이 나라의 최고봉을 이룬다. 열대지역은 케라도Cerrado라 불리는 광대한 초원이 펼쳐지며, 이곳에는 에마스 국립공원Emas National Park이 위치한다. 북동부는 건조한 셀 톤이 펼쳐져 가뭄에 시달리는 곳이다. 남서부의 파라과이와의 국경 부근에는 남미 최대의 이구아수 폭포Iguazu Falls가 있고, 라플라타강으로 흘러드는 파라나 강Paraná River이 흐른다. 또 네그로 강Negro River, 상프란시스쿠 강São Francisco River, 싱구 강Xingu River, 마데이라 강Madeira River, 타파조스 강Tapajós River이 있다. 볼리비아 및 파라과이와의 국경 부근에는 세계 최대의 열대 습지인 판타날Pantanal 자연 보전 지역이 있다. 남부의 세 개 주는 브라질 고원에서 우르과이 및 아르헨티나로 이어지는 대평원 팜파스Pampas와 마이그레이션이 있고, 예로부터 목축업이 성행하고 있다. 국토의 93%는 열대지역이고, 남회귀선이 지나는 상파울루São Paulo 이남은 온대 기후에 속한다. 그리고 열대 기후도 다시 적도, 열대, 스텝, 고지대성, 아열대 등으로 나뉜다. 기온은 열대지역에서 연중 25도 이상이 유지되며 기온의 변화가 뚜렷하지 않다. 강우량은 연중 1,000~1,500㎜이며, 대부분 여름인 9월에서 이듬해 4월까지 내린다. 그러나 아마존 지역은 연중 2,000㎜, 벨렘 지역은 3,000㎜에 이른다. 한편 브라질은 콜룸비아, 멕시코, 인도네시아보다 훨씬 풍부한 동식물의 종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약 5만 5천 종의 식물, 3천 종 이상의 민물고기, 921종의 수륙양생 동물, 749종의 파충류, 51종의 영장류가 발견되었다. 숲이 지속적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이 종들이 급속히 줄어들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우리나라는 브라질보다 12시간이 빠르며, 일광절약 시간이 실시되는 10월 중순부터 익년 2월 중순까지는 11시간 빠른 시차를 보인다. 마나우스 등 서쪽에 위치한 지역과 동부 지역 간에는 1시간의 시차가 있으며, 북동부 일부 주는 일광절약시간제를 실시하지 않는다.브라질의 역사
브라질의 원주민브라질 지역의 원주민은 BCE 11000년 경 베링해를 건너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베링해를 건너 온 그들은 BCE 8000년 경 현재의 브라질 지역에 도착했다. 그들은 주로 해안 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은 잉카Inca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에 아직 원시적인 농경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두나무를 경작한 것은 약 8500년 경이며, 진정한 농업은 기원전 6000년에서 2700년 경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 유럽인들이 보통 인디오라고 부른 원주민들이 이곳에 살고 있었다. 16세기 전반에는 이러한 원주민들이 해안에만 약 200만 명이 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이주하기 이전까지 이곳 원주민들의 구체적인 삶의 행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브라질 원주민들은 언어 사용 형태에 따라 투피어계, 알아크어계, 카브리어계 등으로 나뉘는데, 포르투갈인들은 처음 접촉한 투피어Tupian language가 브라질어의 근본이라고 여겨 그 말을 원주민들에게 가르쳤다.
포르투갈 식민지 시대
1494년 포르투갈Portugal과 스페인Spain은 미지의 신세계 탐험 지역들에 대한 소유권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바다의 국경선을 정한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에 따라 남아메리카를 분할하기로 약정했다. 이 조약을 중재한 교황 알렉산더 6세Alexander VI는 오늘날의 브라질과 나머지 남아메리카의 분할을 확정했다. 1500년에 포르투갈 항해사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Pedro Alvares Cabral이 브라질의 남부에 도착하여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된다. 그런데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무시하고 인디안들과 목재를 위한 상품 교환을 행한 프랑스인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서 포르투갈 왕국은 유럽인들을 브라질로 보내기로 했다. 또한 1549년 초대 브라질 총독으로 토메 데 수자Thome de Souza가 부임했다. 1580년 포르투갈이 스페인과 연합하자 네덜란드의 서인도회사는 브라질을 공격하여 북동부의 일부를 점령했다.
브라질을 대표하던 파우 브라질Pau Brasil이 고갈되자 북동부에 사탕수수가 도입되어 인디오들이 설탕 농장에서 일하는 인부가 되었고, 브라질 서부와 앙골라Angola, 모잠비크Mozambique에서 흑인들을 대량 유입하여 노예로 혹사를 시켰다.
1680년 포르투갈 식민지 정부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무시하고 라플라타강 하구의 좌안에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의 맞은편에 콜로니아 델 세크라멘토Colonia del Sacramento라는 식민 정착지를 건설했기 때문에 이후 반다 오리엔탈Banda Oriental 지역(당시에는 아르헨티나의 일부였던 식민 시대의 ‘우루과이’ 지역)에서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의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18세기에는 미나스 제라이스Minas Gerais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골드러시가 일어나 브라질의 중심부가 북동부에서 남서부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로 이동했다. 이 금광은 18세기에만 무려 30만 명의 포르투갈인을 브라질로 이주하도록 했고, 금광 개발을 위한 노예를 더 많이 유입하도록 했다.
이즈음 미국 독립의 영향을 받아 브라질 식민지 사회에서도 독립 운동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1789년 민병대의 장교인 티라덴테스Tiradentes를 중심으로 하여 브라질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시켜 공화국으로 만들려는 운동이 추진되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이 일은 브라질 독립운동의 선구가 된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아이티 혁명의 영향을 받아 사회적으로 독립운동이 진행되었지만, 식민지 시대 브라질에는 대학이 설립되지 않아 지적 환경이 조성되지 못한 관계로 대중적인 기반을 가진 독립운동의 추동력을 갖지는 못하였다.
제정 및 독립왕국시대
1807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포르투갈로 진군하자 포르투갈 왕인 동 주앙 6세Dom João VI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로 피신하여 수도를 그곳으로 옮기게 된다. 이로써 브라질은 모국 포르투갈과 같은 지위를 가지게 된다. 또한 수도 리우데자네이루는 당시 포르투갈제국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된다. 그러나 1821년 나폴레옹이 포르투갈에서 철수하자 포르투갈왕은 본국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철수하면서 브라질을 자신의 아들인 페드루 1세Dom Pedro I에게 맡겼고, 그는 1822년 본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여 스스로 최초의 브라질왕국 황제가 된다. 1828년 3년에 걸친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이 끝난 뒤 우루과이Uruguay 지방이 독립을 선언했다. 얼마 후 군인들의 반란으로 황제는 자리에서 물러나 자신의 아들인 페드루 2세Dom Pedro Ⅱ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1864년에는 파라과이Paraguay가 브라질에 전쟁을 선언했고, 개전 5년 후 브라질은 우루과이Uruguay, 아르헨티나Argentina와 연합(삼국동맹)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브라질의 독립은 황제라는 구심점으로 인하여 공화제와 입헌군주제 사상이 충돌하지 않음으로써 가능했다. 또 세계 탄성고무 생산의 독점으로 경제적인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대농장의 노예제도가 문제였다. 미국 남북전쟁 이후 노예제가 남은 나라는 브라질이 유일하였기 때문에 삼국동맹전쟁 후 지식인들에 의해서 노예제가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1888년 이른 바 “황금법”이 공포되어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페드루 2세는 대농장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이듬해 다 폰세카Manuel Deodoro da Fonseca 장군의 쿠데타로 인해 제정이 붕괴되면서 브라질 왕정시대는 종료되었다.
공화정과 세계대전 시대, 군정에서 민정으로
1889년 브라질은 연방헌법을 갖춘 연방공화국으로 출범을 하였고 다 폰세카는 브라질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브라질이 제정에서 공화국 체제로 바뀐 이후, 초기 브라질 제1공화국 시기의 정치는 대농장주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커피 재배를 주된 산업으로 삼는 상파울루São Paulo 주州와 목축업을 주로 하는 미나스제라이스Minas Gerais 주의 대농장주들 영향력이 가장 커서, 이 두 주에서 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정치적 관행이 생겨났다. 이는 커피와 목축업을 주로 영위하면서 영향력을 키운 이 두 주州의 대농장주들이 정치 권력을 행사하면서 생겨난 관행이었으며, 이렇게 두 주가 브라질 정치의 흐름을 주도해 나간 관행을 커피와 우유라는 뜻을 가진 ‘카페 콩 레이치Café com leite’ 체제라 불렀다. 당시에는 커피와 고무 수출이 브라질 경제를 지탱하는 주력 산업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정치 관행이 가능한 측면이 있었다. 또한 브라질은 농장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제정시대부터 유럽으로부터 이민을 받아들여 왔지만, 노예제가 폐지된 이후에는 유럽 외에 아시아로부터도 이민자들의 유입이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브라질은 공식적으로 연합국의 편에서 독일에 대항했으나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전쟁과 세계대공황을 거치면서 브라질은 커피 수출에 많은 차질이 생겼고, 기존의 카페 콩 레이치 체제에 대한 여론의 비판이 높아지면서 1920년대에 청년 장교들이 각지에서 반란을 기도하는 등 많은 국민들은 과두정치의 종식을 요구했다. 그러던 차에 1930년 히우그란지두술Rio Grande do Sul 주의 주지사였고 ‘군軍의 아버지’라 불렸던 제툴리우 바르가스Getúlio Vargas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고, 이로써 카페 콩 레이치 체제는 붕괴되었다. 1932년에 반 바르가스 혁명이 일어났으나 이를 진압한 바르가스는 브라질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했다. 그는 1937년 쿠데타를 통해서 이탈리아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 국가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대학의 정비, 국가 주도의 공업화, 민족주의의 추진과 이민자 동화 정책, 중앙 집권 체제의 확립 등이 이루어졌다. 1942년 바르가스는 제2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이탈리아 전선에 참여했으나 군사독재에 대한 국민과 군 자체의 반발, 그리고 1945년의 군사쿠데타로 실각하고 말았다. 그러나 실각한 지 5년 후, 국민은 다시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에 바르가스는 사회주의 정치를 내세우면서 국가 경제의 국민화를 도모했으나 미국이 이를 반대하고, 군이 그의 퇴임을 요구하자 1954년에 자살하고 말았다.
후임자 쥬세리노 쿠비셰키Juscelino Kubitschek 대통령은 브라질 경제를 살리기 위하여 외자를 유치하려고 노력했고, 이후 1961년 취임한 새 대통령 콰드루스Quadros는 미국으로부터의 자립을 추구하고 국가 재정을 견고히 하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새 수도가 된 브라질리아로 천도한지 몇 달이 되지 않아 부통령 골라르Goulart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골라르 역시 새 수도 건설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극복하지 못하였고 1964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카스텔로 브랑코Castelo Branco 장군의 쿠데타로 실각하고 말았다. 브랑코는 새 대통령이 되어 군사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친미반공 정책과 외자 도입을 통해 급속한 공업화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1967년 브랑코가 갑자기 사임을 하면서 코스타Artur da Costa e Silva 장군이 새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는 외자를 유치하여 브라질 경제를 활성화시키려 노력했고 이듬해인 1968년에 학생 운동과 파업이 일어나자 정치 정화작업과 검열을 실시했다. 그러나 1969년 코스타가 축출되고 가라스타추 메디치Garrastazu Me’dici 장군이 후임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는 압제를 강화함으로써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군정軍政의 시대는 ‘브라질의 기적’이라고 했을 정도의 고도 경제 성장이 가능했지만, 1973년 오일쇼크 이후 경제 성장은 추락하고, 소득 격차의 증가로 인해 범죄 발생 비율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또한 군사 정권에 의한 인권 침해도 큰 문제가 되었다. 그동안 각지에서 카를로스 마리게라의 민족해방행동(ALN)과 10월 8일 혁명운동 등 도시 게릴라가 무장 투쟁을 전개하여 외국대사를 납치하는 등 여러 차례에 걸친 납치 사건이 발생했다. 1974년 대통령에 취임한 에르네스투 가이세우Ernesto Geisel 장군은 국민적인 불만이 팽배해지자 군정의 노선을 전환했고, 1979년 대통령이 된 주앙 피게이레두João Baptista Oliveira Figueiredo는 군정의 민정 이관을 약속했으며, 1985년 탄크레두 네베스Tancredo Neves가 간접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비로소 민정이 부활했다. 그런데 네베스가 취임 전에 종양으로 갑자기 서거함으로써 부통령 당선자인 사르네이José Sarney가 대통령직에 취임했으나 인플레이션의 확대로 인해 경제는 악화되었고, 사르네이 정권은 국내에서 큰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라울 아르혼신Raúl Alfonsín 정권과의 사이에서 브라질-아르헨티나의 관계는 이 시기에 크게 개선되었고, 오랫동안 계속된 양국의 적대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1989년에는 29년 만에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되어 1990년 국가재건당 후보인 페르난도 콜로르Fernando Collor de Mello 대통령이 취임했지만, 경제 문제에 대처하지 못해 수많은 부패와 각종 기행을 남기고, 1992년에 의회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고 부통령인 이타마루 프랑코Itamar Franco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이어 1995년 집권한 사회민주당PSDB의 페르난도 엔리케 카르도조Fernando Henrique Cardoso 대통령 재임시에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4개국이 무역장벽을 전면 철폐하면서 메르코수르Mercosur(남미 남부 공동 시장)를 발족시켰다.
2003년 노동자당의 룰라 다 실바Luiz Inácio Lula da Silva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세계 경제가 호조를 보이자 브라질 경제 역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룰라는 두 번의 연임을 했고, 2010년 10월 실시된 대선에서 여당인 노동자당PT의 지우마 호세프Dilma Vana Rousseff 국무부 장관이 당선되어 2011년 대통령에 취임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치 및 행정
브라질연방은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와 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그 임기는 각각 4년이다. 의회는 상하원으로 구성된다. 현재 대통령은 지우마 호세프Dilma Vana Rousseff 여성 대통령으로 노동자당PT 출신이다. 현행 브라질 헌법은 1988년 제정된 것이며, 1985년까지의 군사정권에서 관행이 되어 온 부정부패가 정치와 행정에 만연되어 있는 상태이다. 1964년부터 1985년까지 군사통치를 받은 기간에 인디오들은 인권을 침해당했고, 경제는 유지되었으나 성과 부풀리기가 많았다. 그 결과 공공연한 과오와 실익 없는 욕망만이 난무했다.
1988년의 신新헌법은 연방정부에 광범한 권능을 수여했다. 대통령은 4년의 임기로 직선제에 의해서 선출되고 1998년 이래 연임이 가능하게 되었다. 대통령은 포괄적 권력을 소유하고 국가를 대표하며 정부 수반으로서 내각을 구성하게 된다. 1993년부터는 국가 형태나 정부 형태에 관한 국민투표는 금지되고 있는데, 브라질 국민들은 정부 형태로서 공화제와 내각제를 선택했다.
브라질의 정치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확립된 프로그램이 없는 정당들이 많다는 데 있다. 주요 정당들이 정강정책으로 중도 좌파적 이념을 내세우고 있으나 뚜렷한 차이가 없다. 1979년 민주화가 시작되면서 양당제가 폐지되고 다당제의 근거가 마련되었으나 정당정치의 전통이 없어 선거 때마다 새로운 정당이 탄생하거나 기존 정당이 이합집산을 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지금까지 짧게 일시적으로만 유지되는 연정이 이루어진 결과 대부분의 법률들이 거부되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많은 군소 정당과 부패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황을 조장했고, 거의 무기력한 통치를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단순한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룰라 다 실바 전 대통령도 의회를 이끌면서 부패했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현재 집권 여당은 노동자당PT과 브라질 최대 정당인 브라질 민주운동당PMDB를 주축으로 연합하고, 야당은 브라질 사회민주당PSDB과 민주당DEM을 주축으로 여야 대립 구도가 형성되어 있다.
행정부
브라질 연방 행정부의 수장은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국가원수이고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법률공포권, 주요인사 임면권, 군통수권, 조약체결권, 의회소집 및 해산권, 비상사태 선포권, 사면권 등의 권한을 갖는다. 현행 대통령 선거는 국민의 보통 및 직접선거제이며, 임기는 4년이고 중임이 가능하다. 또한 지방(주)정부의 수장인 주지사도 임기 4년에 중임이 가능하게 되어 있다.
브라질은 연방주의 및 3권 분립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연방정부와 주정부에 통치권한을 분배하고 있으며 각기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가 존재한다. 연방정부의 주요 권한은 외국과의 외교관계, 국제교역, 이민정책수립, 국경획정, 국제기구 참여, 전쟁선포 및 강화, 국방, 계엄령 선포, 화폐 발행, 국가경제 및 사회발전 계획수립, 각 주간의 통상관계 조정 등이며, 주정부는 연방헌법을 침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체의 주 헌법을 제정할 수 있다.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공동으로 다루어야 할 노사관계, 환경, 조세문제 등은 연방법과 주법이 공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입법부(연방의회)
연방 의회Congresso National는 상하 양원으로 구성된다. 상원Senado Federal(원로원)은 각 주 및 연방특별구에서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직접·비밀선거에 의해 3명씩 선출한 총 81명의 의원으로 구성되고 8년의 임기가 주어진다. 하원은 각 주별로 정당 명부 비례 대표제(open list 제도)를 적용하여 직접·비밀선거에 의해 선출(최소 8, 최대 70명)된 513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4년이다. 상원은 외교정책 검토, 주요인사 임명 사전승인, 대통령의 전쟁선포에 대한 사전승인, 군대의 해외파견 승인, 조약의 비준 등을 의결하며, 하원은 법률제안 등 입법 활동, 대통령의 전쟁선포 사전승인, 국가예산의 심의 및 승인 등을 의결한다. 2012.10월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인 노동자당PT은 압도적인 승리를 통해 2014년 10월 대선에서 지우마 대통령의 재선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주의회는 인구비례에 의한 비밀·직접선거로 의원을 선출하고 임기는 4년이며, 주운영에 관한 입법 활동과 대정부 질의, 토론, 정부불신임권, 국정감사권, 예산안 승인 등의 안건을 처리한다.
사법부
브라질의 사법부는 지방법원, 고등법원, 연방대법원의 3심제로 운영되고 있다. 사법제도의 특징으로는 헌법재판소 역할을 수행하는 연방최고법원 외 최종심 기관으로 대법원, 최고노동법원, 최고 선거법원, 최고군사법원이 각각 존재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연방최고법원(STF: Supreme Federal Court)은 법률의 위헌 여부를 판단 및 행사하는 헌법재판소 기능, 중앙정부와 주정부간의 분쟁 및 주정부 상호간의 분쟁에 대한 배타적 관할권을 갖고 있으며, 상원의 승인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는 대법원장과 10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된다. 대법원(STJ: Superior Court of Justice)은 연방법상 헌법과 무관한 사건에 대한 최종 판결을 담당하는 일반 사건 최고법원이며, 고등법원은 과거에 존재했던 연방 고등법원(TFR)을 1988년 헌법개정시 철폐하고 전국에 5개의 신 연방고등법원(Federal Regional Courts) 창설해 운영하고 있다. 그밖에 특수법원으로 노동, 선거, 군사에 대해서는 각각 별도의 심리 법원인 최고 노동법원, 최고선거법원, 최고군사법원이 설치되어 있다.
행정구역
광활한 브라질 국토는 26개 주 및 1개 연방특별구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어지는데, 자연조건 등 지역적 차이에 따라 크게 북부 지역(전 국토 면적의 45%), 북동부지역(18%), 남동부지역(11%), 남부지역(7%), 중서부지역(19%)의 5개 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경제
브라질은 건국 이래 오랫 동안 영국, 미국, 일본 등 선진국들의 주요 채무국이었고, 1970년대 경제 정책의 잘못으로 채무가 급증했다. 1980년대에는 멕시코, 아르헨티나, 페루와 마찬가지로 재정 파탄 국가였으며, 인플레이션과 막중한 국가 채무를 안고 있었다. 1980년대 초반 세계적인 금리 상승으로 브라질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해외 자본의 유입은 정지했고, 국내 투자도 둔화되었다. 그리고 대외 채무의 부담으로 공공부문의 적자가 증가하여 인플레이션을 심화시켰다. 1980년대 후반에는 인플레이션이 100% 이상이었고, 1992년에는 물가 상승률이 1175%에 달했으며, 1993년에는 2500%라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결국 통화는 휴지조각이 되었다.
고심 끝에 브라질은 크루화를 4회에 걸쳐 개혁하여 그 가치를 무려 2조 7500분의 1로 인하하여 헤알화라는 새로운 통화로 교체했다. 1994년 이 헤알화를 기반으로 ‘헤알 플랜’이라는 달러 PEG제(고정환율제)를 도입하여 가까스로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막는 데 성공했다. 1998년에는 IMF의 구제 금융을 받는 등 경제 위기를 맞았으며, 세계 최고의 채무국이라는 오명을 안고 있었다. 드디어 1999년 외환위기로 국가 부도 직전까지 갔으나 IMF와 미국의 긴급 구제 금융으로 파탄은 막았다.
2003년부터 룰라Lula가 이끄는 노동자당 정권은 개도국에 무역을 확대했고, 이에 지속된 채무 문제를 해결하고자 팔을 걷었다. 천연자원 개발과 제조업의 약진으로 경제가 안정되면서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연평균 4.7%의 경제성장을 달성하였으며 2005년에는 국내 총생산이 전년도 대비 31%가 증가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IMF에 채무를 청산하고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되었다. 2010년도에는 소비 및 투자확대에 힘입어 7.6%의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나 유로존 위기, 중국으로부터의 원자재 수요 감소 등의 대외 요인과 함께 브라질 경제의 고질적 문제인 생산성 대비 높은 임금, 구조적으로 높은 이자율, 복잡한 조세 시스템, 인프라 부족 등에 의한 산업 경쟁력 취약성 누적 등의 산업경쟁력 저하로 인한 수출 부진 등이 맞물려, 2011년 이후 저성장 기조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브릭스BRICS의 일원인 브라질은 커다란 잠재력을 가진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으로서 향후의 성장에 있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철강업이 산업의 30%를 차지하며, 제조업 기술은 남미 최고를 자랑하고 있으며, 최근 성공적으로 마친 2014년 월드컵 행사와 2016년 올림픽 개최 등도 브라질이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삼는 정책의 일환이다.
한편 여객과 화물 수송은 주로 도로에 의존하고 있는데, 국토가 넓어 항공 운송도 성행하며, 긴 해안선과 풍부한 하천을 바탕으로 수상 교통도 성행하고 있다. 중공업, 특히 항공 산업이 발달했고, 국책 회사인 엥브라에르Embraer는 현재 소형 제트기 시장의 절반 가까운 점유율을 자랑하며 유럽이나 일본 등 세계 여러 나라에 수출되고 있다. 공공 서비스의 수준은 선진국에 비해 낮은 편이고, 해안과 대륙 내부의 경제 격차와 빈부 격차가 심한 편이지만 경제 호전을 배경으로 최근 급속히 개선되고 있으며, 빈곤층의 생활 수준이 올라가 내수 증가에 기여하고 있다.
농업인이 경제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26%로서 아직 중요한 역할을 하나 생산성이 비교적 낮은 편이다. 한때 파우 브라질Pau Brasil이라는 적갈색의 나무와 고무를 주로 하는 농업이 발달했다. 파우 브라질은 붉은 염료의 원료로서 경제적 가치가 높았으며, 지금도 이 원료로 토산품을 만들어 현지에서 판매하고 있다. 19세기까지 브라질은 고무 재배를 독점하다시피 했으나 이후 페루와 볼리비아를 비롯한 주변 국가들에 고무 재배가 확대됨으로써 고무 재배는 크게 퇴색했다.
도시 근교의 목축업과 상파울루 등 대도시 주변의 양계업 등은 현대적 시스템으로 이루어지며, 가공육을 중심으로 외국에 수출하고 있다. 북동부에서는 사탕수수의 재배가 활발하다.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받아들였으나 1888년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커피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커피 수출량은 세계 1위이다. 커피 역시 노동집약적 농업이지만 값싼 노동력을 쉽게 얻을 수 있고, 재배에 적합한 고산지대가 많아서 비교적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커피 가격의 폭락으로 커피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옥수수와 콩, 사탕수수 등의 재배를 장려하고 있다. 커피 산업은 19세기 이후 브라질 경제를 뒷받침했다.
지하자원으로는 금, 은, 다이아몬드, 철광석, 크롬 등이 있고, 석유와 천연가스도 풍부하다. 아마존에서 연간 60여 만 톤의 목재를 생산하는 임업 대국이기도 하다. 한편 사탕수수에 의한 바이오 에탄올 생산은 2007년 현재 내수를 감당하고도 남아 수출을 할 수 있는 품목이다. 브라질이 차지하는 세계 시장에서 바이오 에탄올 생산은 약 7% 이상에 이른다. 또한 수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수력 발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한편 브라질의 금융 시장은 점차 국제 금융 시스템 안으로 편입되고 있다. 브라질 금융의 중심은 국제은행, 국내은행 그리고 주식시장이다. 특히 주식시장은 매우 투명하고 국제적 투자자의 높은 참여를 보여준다. 현재 브라질 중앙은행은 ‘Banco Central do Brasil’이다. 과거의 중앙은행은 1986년부터 그 기능을 상실했다. 또한 국제 자금은 브라질로 쉽사리 들어올 수 있다. 브라질 헤알화는 자유롭게 다른 통화와 환전할 수 있으나 정부는 중앙은행의 기능을 통해서 환전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사회와 문화
사회
브라질은 유럽계 백인, 혼혈인종, 아프리카계 흑인 및 기타 동양계 이민과 브라질 원주민으로 구성된 대표적인 다인종 국가이며, 인종간의 혼혈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 보편화되어 있어 인종적 편견이 상대적으로 적다. 백인은 포르투갈계와 기타 유럽계로 구분한다. 포르투갈계는 식민지시절부터 이주를 계속했으며, 브라질이 독립한 이후에도 상당히 많이 이주해 왔다. 독립 이후에는 포르투갈만이 아니라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많이 이주했는데, 특히 이탈리아에서 가장 많이 들어왔다. 흑인은 식민지시절 들어온 노예의 후손이 많다. 그 밖에 중국계와 한국계도 있다. 2005년 정부 통계에 의하면 백인이 50%, 흑인이 6%, 혼혈인이 43%, 기타 1%이다. 브라질은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나라이다. 하지만 주변에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나라가 많아서인지 최근 스페인어 사용이 늘고 있으며, 이탈리어나 독일어도 쓰이고 있다.브라질은 부의 불균등한 분배가 심한 나라이다. 이것은 토지의 불균등한 분배와 연관되어 있다. 1998년에 이르기까지 농부의 2.8%가 농토의 57%를 소유한 대지주인데 반해서 농부의 90%는 농토의 22%를 소유할 뿐이다. 약 500만 가구의 농가가 소작농인 셈이다. 브라질에서 재생에너지의 이용을 위한 연구, 예컨대 수력발전소 건립에 이용되는 연구는 유명하며 자동차 공장도 매우 중요하다. 브라질 최초의 자동차는 1979년 알콜엔진을 단 것이었고, 엔지니어 빈센트 캄아르구Vincente Camargo는 2005년 최초의 알콜엔진을 비행기에 장착했다. 항공 연구는 브라질에서 특별한 관심을 받는 분야이다. 빈부 격차가 심한 브라질의 범죄율은 세계 평균을 상회하며 전쟁 중인 국가와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이다. 경찰은 특히 도시에서 살인, 납치, 강도, 조직적인 마약범 및 범죄단체와 싸워야 하는데, 경찰에 대한 처우가 매우 낮기 때문에 부패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문화
브라질의 문화는 근본적으로 투피 과라니계의 원주민인 인디오와 유럽 및 아프리카, 아시아의 이민자 등이 유입되어 만들어 낸 다양한 모자이크라고 표현되곤 한다. 예로부터 음악과 건축, 스포츠 등의 분야에서 세계적인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으며 세계적인 뮤지션이나 스포츠 선수, 예술가를 많이 배출하고 있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광고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2002년 헌법은 국내 매체에 대한 외국 기획의 비율을 30%가 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또한 브라질에는 약 650만부를 가진 530여 개의 일간지가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폴리아 지 상파울루Folha de São Paulo, 에시타우 지 상파울루Esta de São Paulo, 오 지아O Dia, 오 글러부O Globo 등이다. 오 글로부는 글로보그룹에 속하는데, 브라질의 매체를 지배하며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선호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1997년에는 국영 라디오방송국이 세워졌는데, 2,900여 개의 사설 중개소 이외에 전 브라질에 7,000만 대의 라디오 수신기가 있다. 그 밖에 19개의 국영 및 250개의 민영 텔레비전 방송사가 있다. 텔레비전 보급률은 비교적 높은 편이어서 2003년 기준으로 약 90.3%의 가정이 텔레비전을 가지고 있다.
브라질의 미술은 종교에서 발생했다. 식민시절에는 성당 미술이 지배적이었다. 다양한 미사를 드리는 수많은 교회가 예술적으로 형성되었다. 목공, 석공, 화가 사이의 공동 작업이 매우 긴밀하게 이루어져서 색상의 선택도 서로 조화를 이루며 오늘날 교회 건물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평이 있다. 유럽에서 이미 19세기 말에 나타난 인상주의가 점점 의미를 얻어가고 있다. 이 시기에 유명한 미술가는 아니타 말파티Anita Malfatti, 마누에우 산치아구Manuel Santiago, 죠세 판세티Jos’e Pancetti, 그리고 칸지두 포르치나리Candido Portinari 등이다. 포르치나리는 20세기 브라질의 최고 미술가로 여겨진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사회적 사실주의가 발달했다. 사회적 테마를 갖춘 포르치나리의 미술 작품이 이런 경향을 보여준다. 오늘날 상파울루 비엔날레Biennale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제미술전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전시회의 주안점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미술가들의 회화에 있다. 리우데자네이루도 미술의 중심도시다. 인디안 미술은 매우 무상한 형태를 취한다. 보통 작품에서 형태에 색칠을 하는 데 며칠을 요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게 칠한 색채는 그리 오래 유지되지 못한다. 모자로 쓰이는 깃털 장식은 드물게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다.
브라질의 음악은 포르투갈, 아프리카, 인디언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식민시대 이전의 인디언 음악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1568년에야 이에 관한 서술이 보인다. 당시 프랑스의 한 신부가 어떤 책에서 그곳으로 여행을 하다가 원주민의 춤과 노래를 들었다고 썼다. 음악은 유럽인 거주자들과 아프리카 노예들의 영향을 받아 변화되었다. 19세기 중반 이래 음악 생활은 브라질을 향한 유럽 이민자들의 러시에 의해서 새롭게 전개된다. 1930년대 다양한 음악 그룹이 결성되고 한 음악당이 리우에 세워짐으로써 대도시에는 많은 극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수도 리우에는 유럽적, 특히 이탈리아적 오페라가 공연되었다. 가장 잘 알려진 브라질의 음악 형태는 삼바samba다. 그것은 아프리카 원주민 스타일의 음악에서 유래했다. 삼바는 매년 열리는 리우 카니발에 의해서 대중화되었다.
브라질 문학이라 할 수 있는 최초의 문서는 페루 파즈 지 카미냐Pero Vas de Caminha가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에게 쓴 편지이다. 여기에는 1500년 경의 브라질이 그려져 있는데 이 시기에는 단순 조잡한 형식으로 역사를 다룬 무정형의 문학 시대였다. 1600년대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바로크 주의 영향으로 바로크문학이 유행하였고, 1768년부터는 전원주의 문학이 유행하였다. 이후 18세기와 19세기에 여행자들이 ‘포르투갈적 아메리카’와 그 주민들에 관하여 서술한 것이 식민시대의 브라질 문학을 형성하였다. 1822년 브라질 독립 전까지는 민족주의와 독립정신이 문학에도 반영되었으며, 정치적 독립을 쟁취한 후인 1836년부터 유럽의 낭만주의가 브라질 문학에 영향을 끼쳤는데 이 시기에 향토문학의 기준이 되는 작품이 나왔다. 그리고 낭만주의에 이어 사실주의가 나왔고 상징주의와 모더니즘, 후기 모더니즘의 흐름을 거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브라질의 건축은 포르투갈을 모방하여 브라질 자연조건에 맞게 개조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였으며, 1930년 이후 근대 건축이 도입된 이래 리오데자네이로시의 문교부 건물에 새로운 조형 미술을 결합하였다. 또한 수도 브라질리아의 도시계획 및 건축 설계, 근대미술관 설립 등을 통해 근대건축이 발전되어 왔으며, 브라질의 세계적인 건축가로는 유엔본부 건물설계 등을 맡은 오스카르 니에메예르Oscar Niemeyer가 있다.
브라질의 스포츠는 축구와 배구, 모터 스포츠와 브라질 유술 등 격투기가 강하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는 역시 축구다. 최초의 축구 경기는 1894년 열렸으며, 약 10년 후부터 최초의 선수들이 축구를 했는데, 유색인이었다. 브라질의 대표 축구팀은 월드컵 대회에서 5회 우승했으며, 이로써 세계 최고의 강팀으로 인정받고 있다. 제1회부터 본선에 연속 출전한 유일한 대표 국가이다. 1950년 FIFA 월드컵을 개최한 데 이어 2014년 6월에도 월드컵대회를 개최하였고, 2016년에는 리우 하계올림픽을 개최한다. 축구 선수도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와 레오, 자갈로, 가린샤, 펠레, 토스탄, 지코, 소크라치스, 호마리우, 카푸, 히바우두, 호베르투 카를로스, 호나우두, 호나우지뉴, 카카 등 수많은 선수를 배출하고 있다. 많은 축구 펜들은 펠레를 전무후무한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의 한 사람으로 여긴다.
브라질의 음식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의 식사였다는 페이조아다와 목동의 고기 요리였다는 슈하스코, 바이아 지방의 무케카, 바타바, 카루루, 미나스 지방의 투투아 미네이라 등이 있다. 그 밖에 러시아 계열의 요리인 비프 스트로카노프도 브라질 풍의 요리다.
브라질의 종교에는 특이한 것이 없다. 2010년 통계에 의하면 국민의 약 64.6%가 로마 가톨릭 신자이고 세계에서 가톨릭 신자가 가장 많은 나라이다. 그러나 이 수치는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데, 1960년에는 91%, 1985년에는 83%, 2003년에는 73.6%였다. 브라질 가톨릭은 아프리카의 종교적 전통의 강한 영향을 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건너온 흑인들의 영향으로 아프리카 토착 종교가 광범하게 융합되어 있다. 국교는 없으며,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브라질 성공회, 개신교, 불교, 이슬람교 신자들도 있다. 최근 개신교도의 숫자가 급속히 늘어나는데, 성령 운동을 강조하는 오순절 교회가 최대의 교파다. 이는 대부분 중남미 개신교회들의 특징이다. 개신교는 약 22.2%를 차지한다. 이 종파는 19세기 이래 독일의 방랑객과 더불어 유입되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특히 북미의 선교 교회가 세력을 떨치고 있다. 오늘날 브라질에는 약 35000개의 자유 교회가 있고, 약 0.3%는 칸돔블Candomble이나 움반다Umbanda와 같은 아프리카의 영향을 받은 종교도 있다. 그 밖에 약 140만 명의 여호와 증인, 22만 5천명의 몰몬교도, 24만 5천 명의 불교도, 10만 7천 명의 유대교도, 3만 5천 명의 무슬림, 5500명의 힌두교도, 8%는 종교를 믿지 않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한국과 브라질의 관계
한국과 브라질은 1959년 10월 31일에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브라질은 한국에 대해 전통적으로 우호적인 정책을 취해 왔다. 한국의 경제발전상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양국 간 보완적인 산업구조에 기초하여 실질적인 협력관계 증진을 희망하고 있다. 브라질은 한반도 평화 정착과 궁극적 통일을 위한 한국의 적극적 자세를 지지하고 있다.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는 남한과 북한 당사자 간의 대화를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한국의 국제적인 지위가 향상되고, 한국의 2002년 월드컵 개최와 2004년과 2005년에 이루어진 양국 정상의 상호 방문 등으로 대對한국 인식이 제고되었다. 특히 교육과 경제 및 과학기술 발전에 관심이 많으며 상호보완적인 교류 증대를 희망하고 있다.
2013년 기준 우리나라의 대對브라질 수출은 전년대비 5.8% 감소한 96억 8천만불을 기록했고, 수입도 전년대비 8.4% 감소한 55억 7천만불을 기록해 41억 1천만불의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브라질은 우리나라의 12위 수출대상국이며, 20위 수입대상국이다. 대브라질 주요 수출 품목은 자동차부품, 전자제품, 철강제품, 석유화학제품, 기계류, 섬유류 등이고, 주요 수입 품목은 농·축산물, 금속광물, 철강제품, 제지, 석유화학제품, 가죽제품, 전자부품, 임산물, 수산물, 화학제품, 기계류 등이다.
한국인의 브라질 이민 역사는 1918년, 재일교포 4세대 6명이 일본인 신분으로 브라질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1956년에는 반공포로 50명이 인도를 거쳐 브라질에 도착했으며, 1961년에는 한백협회가 구성되어 이민을 추진했다. 1963년 2월, 한백협회의 주선으로 제1차 이민자 103명이 브라질에 도착한 것을 시작으로 1970년 한국개발공사의 주선에 의해 제6차로 기술고용이민 허가 210세대 1,200명이 상파울루를 중심으로 정착하기까지 일련의 이민 과정들이 이어졌다. 1970년도 이후에는 단체이민은 끝이 나고 개별적으로 기술, 취업, 초청 이민 등으로 1976년 말까지 상당한 숫자의 교민 이주가 성사되었다. 1976년 이후로는 브라질 정부의 이민법 강화로 인하여 직접이민이 대폭 감소했다. 현재 브라질은 기술 이민과 직계 초청 이민만을 허가하고 있다. 1980년도 이후에는 인접국인 볼리비아, 칠레, 파라과이, 수리남 등의 교민들이 남아메리카 최대 상업 도시인 상파울루로 재이주하고 있다. 2004년 10월 15일, 브라질 노동고용부 산하 국가이민위원회는 외국인 이민투자 한도액을 종전 미화 20만 달러에서 5만 달러로 하향 조정하는 법령을 발효시켰다. 이에 따라 향후 브라질로의 투자이민 증가가 예상된다.
브라질 교민사회의 주요 행사는 1996년 9월, 김영삼 대통령이 상파울루를 방문하여 브라질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을 격려한 것이 시초다. 2003년 2월에는 브라질 한인 이민 제40주년 행사가 치러졌다. 2004년 11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8년 11월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각각 상파울루를 방문하여 동포사회를 격려했다. 2009년 3월에는 브라질 한인 이민 제45주년 행사가 거행되었으며, 10월 1일에는 브라질 한인회 문화의 날 행사가 치러졌다. 2010년 1월 12일에는 브라질에 코리아타운이 공식 지정되었고, 2010년 5월에는 코리아타운 지정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다. 2011년 5월에는 한국 문화의 날 행사가 열렸으며, 2013년 3월에는 브라질 한인 이민 제50주년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2012년 기준 브라질 재외동포 수는 총 49,511명(상파울루 지역 46,600여 명, 리오데자네이로 360여 명, 브라질리아 150여 명, 여타 지역 약 2,400여 명)이며, 우리 기업이 진출한 지역(삐라시까바, 마나우스, 포르탈레자 등)은 일시 출장자 등으로 인해 유동인구가 많은 상황이다.
브라질은 전통적으로 실용주의적 외교노선에 따라 우리나라와의 실질협력 증진을 중시하고 북한의 수교 제의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등 남북관계 변화에 따라 한반도 내 평화정착을 지원한다는 차원에서 2001년 3월 북한과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브라질과 북한은 경제·통상 분야에서 실적 및 협력이 미미하며, 인적교류면에서 브라질 정부 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한 사례가 수 건에 지나지 않으나 북한은 주로 외무성 및 노동자당 대표단을 빈번히 파견하여 브라질과 협력 강화를 추진했다. 브라질은 남북한 문제가 당사국간의 대화를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 북한의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 시험 시에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규정을 준수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에 필요한 협상에 적극 나설 것을 요청하며 대화를 통한 해결을 강조했다. 브라질-북한 간 정상 교류는 전무하며, 양국 정책협의회가 2008년 평양, 2010년 브라질리아에서 개최된 바가 있다. 2013년 브라질의 대북한 교역은 수출 1,645만 달러, 수입 6,875만 달러이며, 2011년 6월 브라질 정부는 북한 등을 인도적 지원 목적의 식량 공여 대상 국가로 포함하는 법령을 공표하고, 2012년 WFP(유엔세계식량계획)를 통해 옥수수 16000톤, 콩 4600톤을 지원하였다.
브라질의 카니발Carnival 문화
정열의 나라 브라질을 상징하는 문화 코드 중 하나는‘ 카니발 Carnival’이다. 카니발이란 흔히‘ 축제’와 동의어로 인식되고 있으나, 본래는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부활절까지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고 회개하며 금식을 행하는 40일간의 사순절四旬節 직전 3~7일에 걸쳐 행하는 제전祭典, 즉‘ 사육제謝肉祭’를 뜻하는 말이었다. 사육제란 라틴어‘ 카르네 발레Carne Vale(고기여 안녕)’ 또는 ‘카르넴 레바레carnem levare(고기를 먹지 않다)’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순절 기간 동안 못 먹는 고기를 그 전에 마음껏 즐기자는 뜻을 담고 있다.카니발은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에서 탄생하였으나 현재와 유사한 형태는 중세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고, 지금은 영국, 독일, 스페인,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남미의 브라질을 비롯한 콜롬비아, 페루, 우루과이 등 많은 국가에서 행해지고 있다.
오늘날 카니발은 브라질을 대표하는 축제로 자리를 잡았는데 리우 데 자네이루Rio de Janeiro, 살바도르Salvador, 상파울루SãoPaulo 카니발이 가장 유명하며, 특히 2013년 카니발에는 한인이주 50주년을 맞이하여 리우 데 자네이루와 상파울루에서 한국을 주제로 한 카니발이 있었고, 리우 데 자네이루와 살바도르 카니발에는 한국 가수 싸이가 등장하여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브라질의 카니발 축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삼바samba이다. 삼바란 아프리카와 유럽에 뿌리를 두고 있는 브라질의 음악 장르 또는 그 리듬에 맞추어 추는 춤을 말한다. 삼바의 기원은 아프리카에서 사탕수수 농장이 있었던 바이아Bahia 주에 노예로 끌려온 흑인들이 고된 노동을 이겨내기 위해 추는 춤이었다고 하는데, 점차 그 리듬이 대중적으로 변화하면서 지금과 같은 음악과 춤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강렬한 삼바의 리듬에 맞추어 추는 삼바춤은 브라질 사람들의 열정을 표현하는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브라질에서 카니발은 매년 30만 명의 고용과 10억 달러의 관광수입을 창출하는 문화산업이다. 보통 50달러에서 2000달러까지 다양한 입장료 수입만 10억 달러가 넘고 음료 판매량도 2000만 개에 달한다고 한다. 반면 카니발의 이면에 도사린 사회 문제들도 있다. 카니발 기간 동안에는 범죄율이 더 높고 지나친 음주와 잘못된 성 문화로 인한 사회적 문제들이 특히 카니발 기간에 더욱 심각한 추세이므로 브라질 정부도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여러 대책들을 강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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