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 읽는 환단고기] 역사의 개척자 핵랑

[환단고기]

STEP1. 들어가며


신라의 힘, 화랑花郞



단기 2993년(기원 660년) 7월, 여기는 백제 땅 황산벌입니다. 신라와 백제 두 나라의 군대는 이곳에서 국가의 명운을 건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습니다. 나·당 연합에 의해 당나라 군대는 이미 금강 하구의 기벌포伎伐浦(지금의 서천군 장항읍)에 상륙하여 동진하고 있으니 백제는 동과 서에서 양국의 협공을 받고 있습니다. 백제의 계백 장군은 처자를 자기 손으로 베고 나서 5천 결사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왔습니다. 신라군은 김유신과 흠춘, 품일 등이 거느리고 있는 5만 대군입니다. 비록 신라군이 백제군보다 그 수가 10배 이상 많았지만 계백 장군의 뜨거운 충의와 백제군의 기세에 눌려 네 번의 싸움에서 네 번 다 패하였습니다. 신라군으로서는 병사들의 가슴에 전의戰意의 불을 타오르게 할 불쏘시개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바로 장렬한 죽음을 통한 병사들의 적개심 고취입니다. 먼저 흠춘이 자신의 아들이자 화랑인 반굴盤屈을 내세웠습니다. 반굴과 그의 무리들은 기꺼이 적진으로 돌충하여 전부 전사하였습니다. 이어 품일도 그의 아들 관창官昌을 내세웠습니다. 당시 16세로 나이가 가장 어렸던 관창 역시 결국 목이 베이어 그 머리가 애마의 꼬리에 매달린 채 돌아오게 됩니다. 관창의 장렬한 죽음과 아버지의 오열하는 모습에 감동받은 신라군은 용기백배하여 5천 결사의 저항선을 뚫고 백제의 왕도로 진군하였습니다.

황산벌 싸움을 통해 당시 신라의 지도층이 백제의 멸망이라는 국가 ‘아젠다agenda’를 위해 멸사봉공의 자세로 헌신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전쟁터라지만 아버지가 나이 어린 아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 더해진 신라 화랑들의 가상한 용기와 아름다운 희생은 나라의 백성들도 기꺼이 고통분담의 길에 동참하게 한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비록 완전한 통일은 아니지만 변방의 작은 나라 신라의 성공에 화랑의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실 화랑제도는 신라만 운영한 게 아닙니다. 고구려와 백제 역시 이름만 다를 뿐 신라의 화랑과 같은 제도가 있었고 그 기원은 상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를 낭가郎家라고 하여 우리의 고유한 신앙문화 집단이라고 하였습니다.

망국으로 이끈 의자왕의 실정


망국의 패주敗主 의자왕, 흔히들 백제 멸망의 주범으로 이야기합니다. 원래 의자왕은 태자 시절 ‘해동海東의 증자曾子’로 불리울 정도로 효심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즉위 초기에는 내치를 다지고 군대를 양육하여 왕성한 정복활동을 벌여 연이은 승전고를 올립니다. 고高·당唐 전쟁(645년)이 한창일 때는 계백에게 명하여 신라의 뒤를 습격하여 7개 성을 회복하고 윤충을 보내어 부사달 등 10여개 성을 점령하였습니다. 동시에 해군으로는 당의 강남을 습격하여 월주越州 등지를 점령하여 해외의 개척지를 착착 경영하였습니다. 이듬해에는 대야성을 쳐서 인근의 40여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백제가 망하기 5년 전인 655년에는 고구려·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 개 성을 쳐부수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러한 백제가 아무리 나·당 연합군의 공격이 있었다지만 그리도 순식간에 무너진 것은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의자왕의 실정이 있었습니다. 특히 막바지에 보여준 결정적인 판단 착오 몇 가지는 세월 무상에도 불구하고 두고 두고 한스러움으로 남습니다. 그 첫째는 성충成忠과 윤충允忠, 흥수興首 등의 충신을 내친 것입니다. 경륜과 지혜가 풍부한 이들이 쫓겨나자 조정은 모략꾼, 간신배들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둘째는 성충과 윤충의 건의대로 지세地勢의 험함을 이용하여 적을 막지 못한 점입니다. 그들은 당나라 군사들은 기벌포(지금의 서천군 장항읍)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들은 탄현炭峴(대전과 옥천의 경계에 있는 식장산 고개)을 넘지 못하게 하라고 했으나 이 의견은 간신들에 의해 묵살됩니다. 결국 당나라 군사들은 무사히 상륙하였고 신라군은 탄현을 지나 황산벌에 다다랐습니다. 셋째는 최고 지도자로서 현장을 굳건히 지키고 결사항전의 모범을 보여주지 못한 점입니다. 의자왕에게는 적자가 여럿이고 서자들은 40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이 각기 자기 의견을 주장하면서 정책이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였습니다. 왕 역시 누구의 말을 좇아야 할지 몰라 왕자들의 말을 다 허락하고는 자신은 몸소 태자太子와 함께 북경北京의 곰나루성(웅진熊津)으로 도망하였습니다. 주인이 없는 마당에 누가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고자 하겠습니까? 의자왕이 도성을 버리고 떠나는 순간에 백제의 운명은 끝나버렸습니다. 결국 의자왕은 웅진성을 지키는 대장이 그를 잡아 항복하려고 하자 스스로 칼로 목을 찔렀습니다. 그러나 동맥이 끊어지지 않아 당나라의 포로가 되어 묶여서 당나라 진영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말년에 계속 되었던 판단과 결단력 부족이 자결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계속됩니다. 향락과 사치에 젖어 성명정 삼관을 지키지 못한 의자왕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리 역주자가 전해주는 말씀

☞ 신교는 동방 한민족이 9천 년 역사를 지속할 수 있게 한 역사의 혼이다. 이러한 신교 정신을 직접 실천하고 신교를 바탕으로 새 문명을 열고 나라를 개창한 ‘역사개척의 집단’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낭가郎家이다. 한민족사는 낭가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환국 말기에 환인천제로부터 천부와 인을 받은 환웅을 따라 이주하여 배달을 세운 3천 명의 제세핵랑濟世核郞이 낭가의 시초이다. 이 최초의 핵랑의 정신을 살려 배달은 삼랑三郞 제도를 시행하였다.(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497쪽)

STEP2. 환단고기가 밝혀주는 핵랑의 기원과 전승맥


1. 핵랑의 기원은 삼랑


동방 신교문화의 중심에 핵랑이 있었습니다. 핵랑은 신교의 성직자 그룹이자, 국가 재난 상황을 대비하는 상비군이요, 나라 경영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인재의 보고였습니다. 핵랑의 기원은 환웅천황이 개천開天 후 삼랑三郞이라는 관직을 만든 것에서 시작합니다. 더 소급해 올라가면 7대 환인 천제가 환웅에게 천부인 3개를 주시고 3,000명의 일꾼을 붙여 주신 것이 그 역사의 시발입니다. 당시 동방 개척에 나선 27세의 환웅과 3,000명의 문명개척단은 역사의 무대를 환국의 삼신산(천산, 삼위산, 금악산)에서 동쪽의 태백산으로 옮긴 역사 혁명가들이요, 동방 역사의 젊은 피였습니다.

五加僉曰(오가첨왈) 庶子(서자)에 有桓雄(유환웅)이 勇兼仁智(용겸인지)하고 嘗有意於易世以弘益人間(상유의어역세이홍익인간)하오니 可遣太白而理之(가견태백이리지)니이다 하야늘 乃授天符印三種(내수천부인삼종)하시고 仍敕曰(잉칙왈) 如今(여금)에 人物(인물)이 業已造完矣(업이조완의)니 君(군)은 勿惜厥勞(물석궐로)하고 率衆三千而往(솔중삼천이왕)하야 開天立敎(개천입교)하고 在世理化(재세이화)하야 爲萬世子孫之洪範也(위만세자손지홍범야)어다.

역주 오가의 우두머리가 모두 대답하였다. “서자庶子에 환웅이란 인물이 있는데 용기와 어짊과 지혜를 겸비하고, 일찍이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세상을 개혁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그를 동방의 태백산(백두산)으로 보내 다스리게 하십시오.” 이에 환인께서 환웅에게 천부天符와 인印 세 종류를 주시며 명하셨다. “이제 인간과 만물이 이미 제자리를 잡아 다 만들어졌으니, 그대는 노고를 아끼지 말고 ‘무리 3천 명’을 이끌고 가서, 새 시대를 열어 가르침을 세우고[開天立敎] 세상을 신교의 진리로써 다스리고 깨우쳐서[在世理化] 이를 만세 자손의 큰 규범으로 삼을지어다.” (「삼성기 하」)

護守三神(호수삼신)하야 以理人命者(이리인명자)를 爲三侍郞(위삼시랑)이니 本三神侍從之郞(본삼신시종지랑)이오 三郞(삼랑)은 本倍達臣(본배달신)이니 亦世襲三神護守之官也(역세습삼신호수지관야)니라. 高麗八觀雜記(고려팔관잡기)에 亦曰(역왈)「三郞(삼랑)은 倍達臣也(배달신야)라」 하니 主稼種財利者(주가종재리자)는 爲業(위업)이오 主敎化威福者(주교화위복자)는 爲郞(위랑)이오 主聚衆願功者(주취중원공자)는 爲伯(위백)이니 卽古發神道也(즉고발신도야)라 皆能降靈豫言(개능강령예언)하야 多神理屢中也(다신리누중야)라

역주 삼신을 수호하여 인명을 다스리는 자를 삼시랑三侍郞라 하는데, 본래 삼신을 시종侍從하는 벼슬이다. 삼랑三郞은 본래 배달倍達의 신하이며,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을 세습하였다. 『고려팔관잡기高麗八觀雜記』에도 역시 “삼랑은 배달국의 신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곡식 종자를 심어 가꾸고 재물을 다스리는 일을 주관하는 자를 업業이라 하고, 백성을 교화하고 형벌과 복을 주는 일을 맡은 자를 낭郞이라 하고, 백성을 모아 삼신께 공덕을 기원하는 일을 주관하는 자를 백伯이라 하니, 곧 옛날의 광명[發] 신도神道이다. 모두 영靈을 받아 예언을 하였는데 신이한 이치가 자주 적중하였다. 지금 강화도 혈구에 삼랑성三郞城이 있는데, 성城은 삼랑三郞이 머물면서 호위하는 곳이요, 낭郞은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이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2. 핵랑제도의 변천


고조선의 국자랑 배달국을 계승한 단군조선 시대에도 삼랑의 관직을 그대로 유지하였습니다. 3세 단군 때 한글의 원형 가림토 문자를 창제한 을보륵乙普勒 역시 삼랑이었습니다. 13세 흘달 단군 때 이를 전국 단위로 확대하여 국자랑國子郞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국자랑들은 천왕랑으로도 불렸는데 명예와 영광의 상징으로 천지화를 머리에 꽂고 다녔기에 이들을 천지화랑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신라 화랑의 어원과 기원은 바로 천지화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화랑의 계율 세속오계 역시 소도의 계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소도에 모여 신교 수행과 함께 자기개발에 매진하다가 외적이 침입하거나 병란兵亂이 생기면 무사武士가 되어 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戊戌二十年(무술이십년)이라 多設蘇塗(다설소도)하사 植天指花(식천지화)하시고 使未婚子弟(사미혼자제)로
讀書習射(독서습사)하사 號爲國子郞(호위국자랑)하시니라. 國子郞(국자랑)이 出行(출행) 頭揷天指花(두삽천지화)하니
故(고)로 時人(시인)이 爲天指花郞(위천지화랑)이라.

역주 재위 20년 무술(단기 571, BCE 1763)년에 소도蘇塗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天指花를 심으셨다. 미혼 소년들에게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하고, 이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 부르셨다. 국자랑이 밖에 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 불렀다. (단군세기)


源花(원화)는 稱女郞(칭여랑)이오 男(남)은 曰花郞(왈화랑)이니 又云天王郞(우운천왕랑)이라. 自上(자상)으로 命賜烏羽冠(명사오우관)하야 加冠(가관)에 有儀注(유의주)라.

역주 원화源花는 여랑女郞을 말하고, 남자는 화랑花郞이라 하는데 천왕랑天王郞이라고도 하였다. 임금으로부터 오우관烏羽冠을 하사 받아 썼는데 관을 쓸 때 예식을 거행하였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蘇塗之立(소도지립)에 皆有戒(개유계)하니 忠孝信勇仁五常之道也(충효신용인오상지도야)라. 蘇塗之側(소도지측)에 立扃堂(입경당)하야 使未婚子弟(사미혼자제)로 講習事物(강습사물)하니 蓋讀書習射馳馬禮節歌樂拳搏(개독서습사치마예절가악권박)(並劒術)(병검술))六藝之類也(육예지류야)라.

역주 소도가 건립된 곳에는 모두 계율을 두었는데, 충·효·신·용·인忠孝信勇仁이라는 오상의 도[五常之道]가 그것이다. 소도 곁에는 반드시 경당扃堂을 세워 미혼 자제로 하여금 사물事物을 익히게 하였는데, 대개 독서·활쏘기·말달리기·예절·가악·권박(검술을 겸함)으로 육예六藝의 종류였다.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북부여의 천왕랑 조선의 국자랑은 북부여에 와서도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허리에 칼을 찬 해모수 단군의 모습에서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가 한반도에서 건너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왕랑들은 머리에 꽃과 더불어 새의 깃털을 꽂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유풍은 바다 건너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깃털로 모자를 만드는 풍습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인디언들에게 모자의 깃털은 부족의 상징이면서 전사의 용맹을 상징합니다. 고구려 조의들과 신라 화랑들이 모자에 깃털을 꽂아 그들의 신분과 명예를 표현한 것과 일치합니다.

帝(제)는 天姿英勇(천자영용)하시고 神光射人(신광사인)하시니 望之若天王郞(망지약천왕랑)이러시라. 年二十三(연이십삼)에 從天而降(종천이강)하시니 是檀君高列加五十七年壬戌四月八日也(시단군고열가오십칠년임술사월팔일야라. 依熊心山而起(의웅심산이기)하사 築室蘭濱(축실난빈)하시고 戴烏羽冠(대오우관)하시며 佩龍光劒(패용광검)하시며 乘五龍車(승오룡거)하시니라.

역주 해모수단군의 재위 원년은 임술(환기 6959, 신시개천 3659, 단기 2095, BCE 239)년이다. 임금께서는 본래 타고난 기품이 영웅의 기상으로 씩씩하시고, 신령한 자태는 사람을 압도하여 바라보면 마치 천왕랑天王郞같았다. 23세에 천명을 좇아 내려오시니, 이때는 47세 고열가단군 재위 57년(단기 2095)으로 임술년 4월 8일)이었다. 임금께서 웅심산熊心山 에서 기병하여 난빈蘭濱에 제실帝室을 지으셨다. 머리에 오우관烏羽冠을 쓰고 허리에 용광검龍光劒을 찼으며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다니셨다. (「북부여기」)

삼국의 핵랑제도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각 조의弔意, 무절武節, 화랑花郞이라는 제도를 운영하였습니다. 특히 고구려의 조의에서는 역사적으로 위대한 영걸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수나라의 침입을 물리친 을지문덕 장군, 당태종 이세민의 항복을 받아 낸 연개소문과 문무를 겸비한 을파소乙巴素, 명림답부明臨答夫 등이 조의출신이었습니다. 고구려·수나라의 전쟁 당시에 국가 총동원령에 따라 ‘조의 20만’이 전쟁터에 나가 130만이나 되는 수의 대군을 궤멸시켜 인류전쟁사에 기록을 세웠습니다. 신라가 1,000년 사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화랑도의 정신과 기강이 살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후기에 와서 불교에 밀려 신교가 쇠퇴해지고 덩달아 화랑 정신도 퇴색하면서 신라는 정치로는 사대事大, 군사로는 유약柔弱에 빠져 망국의 길로 치달았습니다.

自是(자시)로 俗尙(속상)이 叅佺有戒(참전유계)하고 皂衣有律(조의유율)하나니 衣冠者(의관자)는 必帶弓矢(필대궁시)하고 能射者(능사자)는 必得高位(필득고위)하야 善心(선심)은 爲修行之本(위수행지본)하고 貫革(관혁)은 爲假想之惡魁(위가상지악괴)하니라.

역주 이때부터 세상에서는 참전叅佺에게 지켜야 할 계戒가 있고, 조의皂衣에게 율律이 있어 숭상하였는데, 의관을 갖춘 자는 반드시 활과 화살을 차고 다니고, 활을 잘 쏘는 사람은 반드시 높은 지위를 얻었다. 착한 마음을 수행의 근본으로 삼고, 과녁을 악의 우두머리로 가정하고 활을 쏘았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乙巴素(을파소)가 爲國相(위국상)에 選年少英俊(선연소영준)하야 爲仙人徒郞(위선인도랑)하니 掌敎化者(장교화자)를 曰叅佺(왈참전)이니 衆選守戒(중선수계)하야 爲神顧托(위신고탁)하며 掌武藝者(장무예자)를 曰皂衣(왈조의)니 兼操成律(겸조성률)하야 爲公挺身也(위공정신야)라.

역주 을파소가 국상國相이 되어 나이 어린 영재를 뽑아 선인도랑仙人徒郞으로 삼았다. 교화를 주관하는 자를 참전叅佺이라 하는데, 무리 중에 계율을 잘 지키는 자를 선발하여 삼신을 받드는 일을 맡겼다.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皂衣라 하는데,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규율을 잘 지켜, 나라의 일을 위해 몸을 던져 앞장서도록 하였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정리 역주자가 전해주는 말씀

☞ 환국 말기에 태동한 제세핵랑과 배달 시대의 삼랑은 그 후 고조선의 국자랑國子郞→ 북부여의 천왕랑天王郞 → 고구려의 조의선인皂衣仙人, 백제의 무절武節, 신라의 화랑花郞 → 고려의 재가화상在家和尙(선랑仙郞, 국선國仙) 등으로 계승되었다. 이들은 모두 평상시에는 삼신상제님의 진리를 공부하며 완전한 인격체의 길을 추구하고, 학문과 무예를 동시에 연마하며 심신을 수련하였다. 그러나 유사시에는 구국의 선봉에서 목숨을 바쳐 국난을 물리쳤다. 결론적으로 낭가는 신교의 구도자이며 또한 역사 개척의 선봉장으로서 한 시대의 구국청년단이었다.(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85쪽)

3. 낭가의 맥이 약해진 계기


고려 시대에도 낭가의 정신은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신라의 화랑을 계승하여 국가 차원에서 국선國仙·선랑仙郞 제도를 운영한 것입니다. 이 제도는 윤관의 9성 정벌 때는 항마군으로, 대몽항쟁 때는 삼별초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낭가의 맥이 쇠퇴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으니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 역사상 일천년 이래 최대 사건’이라 일컬었던 서경 전쟁(묘청의 난)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묘청의 반란이 김부식에 의해 진압됨으로써 서경 천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을 보면 묘청과 김부식의 싸움은 평양 천도파 대對 개경 고수파, 칭제북벌稱帝北伐파 대 존화주의尊華主義파, 낭가파 대 유교파, 자주·진보파 대 사대·보수파의 싸움이었습니다. 이 싸움이 김부식 일파의 승리로 끝나게 됨으로써 그 이후 역사는 전자前者가 아닌 후자後者의 길로 대세가 꺾이게 됩니다. 김부식은 반란군 토벌을 위해 출병하기 전에 정치 라이벌이자 칭제북벌론자였던 정지상과 백수한을 모함하여 피살하고 전쟁 후에는 윤언이를 탄핵하여 귀양보냈습니다. 전쟁 후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자신의 주장과 배치되는 사서들은 철저히 배제하였고 반면에 춘추필법에 의해 쓰여진 중국 측 기록들은 충실하게 인용하였습니다. 이 때 우리의 자랑스런 낭가의 역사는 대폭 삭제되거나 수정, 폄하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김부식은 삼국사기 편찬 후에는 일체의 사료를 궁중에 비장하여 다른 사람이 열람할 길을 끊음으로써 박학자博學者란 자신의 명예를 보전하고 삼국사기를 당시 사회에서 유일하게 유행하는 역사서로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단재는 ‘아 슬프다. 당의 장수 이적과 소정방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문헌들을 소탕하였다고 하지만, 그들이 우리 사학계에 끼친 재앙이 어찌 김부식의 서경 전쟁의 결과에 미칠 수 있으랴’ 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정리 역주자가 전해주는 말씀

☞ 조의는 삼신상제님의 진리, 즉 한민족의 신교 낭가사상으로 무장한 종교적 무사단武士團(신교의 종교 군대)이다. 이 조의선인을 한민족 고유의 선비라 말할 수 있는데, 유교·불교·도교 등 외래 사상에 물들지 않은 한민족 고유의 선비상은 문사文士가 아니라 ‘문무를 겸비한 상무尙武적 무사武士’였다. 조의는 개인적인 완성이 아니라 항상 공도公道와 국가, 민족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도 같이 내던지는 살신성도殺身成道를 이상과 목적으로 삼은 ‘한민족 역사 개창의 주역’이었다.(환단고기 역주본 본문 625쪽 미주)

STEP3. 나오면서


미완의 갑오동학혁명


조선은 유교를 국체國體로 삼는 나라였기에 국가 차원에서 낭가의 제도를 운영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낭가 정신은 명맥이 쇠잔해졌고 사회 전체가 사대주의로 점철되었습니다. 그러나 한민족의 역사의식 속에 뿌리 깊이 잠재된 낭가 정신은 조선의 선비 정신으로 이어졌고 국난의 위기 때마다 구국의 의병 운동으로 유감없이 표출되었습니다. 구한말의 항일 운동과 3.1 운동, 갑오동학혁명 등이 근대사 낭가 정신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갑오동학혁명 때 동학농민군들의 한 서린 절규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조선 왕조의 부정부패와 탐관오리들의 패악질에 견디지 못한 그들은 압제의 사슬을 끊고 외세의 침탈로부터 나라를 구하고자 하였습니다. 5만년 무극대운을 타고서 후천 세상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시천주, 다시 개벽, 무극대도의 출세로 요약되는 그들의 주장은 삼신상제님께서 최수운 선생에게 내려 주신 가르침 그대로입니다. 비록 개벽의 시운에 맞지 않고 역량 부족과 외세의 개입으로 실패했지만 그들은 삼신상제님의 일꾼들이자 후천 개벽의 서막을 연 역사 혁명가들이었습니다.

참동학 증산도의 제세핵랑군


역사는 흘러 다시 갑오년입니다. 역사의 사건은 지나갔지만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갑오동학혁명의 정신과 에너지는 역사의 이면 속에 차곡차곡 쌓여왔습니다. 최수운 사후 인간으로 오신 상제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을 ‘나의 가르침이 참동학이니라’ 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동학혁명에서 못다 이룬 후천 5만년 세상 건설의 꿈을 마침내 참동학 증산도에서 성취하게 됩니다. 세상의 불의와 맞서다 처참하게 막을 내린 그 역사의 한이 증산도의 일꾼들에 의해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일찍이 상제님께서는 천지공사를 보시면서 다가오는 ‘다시 개벽’의 비상상황을 군대조직으로 돌파하라는 천명을 내려주셨습니다.

육임군 발동으로 난법 도운을 종결하심
상제님께서 공우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육임은 군대와 같으니라.” 하시고 ‘육임노래’라 하시며 매양 노래를 부르시니 이러하니라. 큰 놀음판이 생겼구나. 육임군(六任軍)이 들어가면 그 판이 깨어지네(도전 6편 115장)

군령 받드는 대공사
대흥리에 계실 때 하루는 상제님께서 “오늘밤에는 너희들을 거느리고 행군을 하리라.” 하시고 성도들에게 군대에서 쓰는 물건을 준비하게 하시고 열을 지어 진군하도록 명하시니라. 성도들이 명을 좇아 군량과 그릇을 메고 행군 구령 소리를 내어 위세를 떨치고 장령(將令)을 복창하며 군율(軍律)을 집행하니 행진하는 모습이 지엄하여 한밤중이 소란하니라.(도전 5편 334장)


이 조직을 증산도에서는 충의핵랑 또는 육임군이라 부릅니다. 육임군은 개벽상황에서 인류를 구원하는 상생의 도군입니다. 상제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모시는 진리의 군대요 태을주太乙呪의 도권을 쓰는 태을도군太乙道軍입니다. 개벽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 혁명으로 천도혁명이자 도덕혁명입니다. 선천의 상극 문명을 후천의 상생 문명으로 갈아 끼우는 진정한 문화 혁명입니다. 원시반본의 정신으로 말하면 잃어버린 구천년 역사와 환단桓檀의 천지 광명 문화를 회복하는 역사광복운동이요 역사독립운동입니다. 증산도에서 수행과 진리 공부를 통해 길러진 충의핵랑들이야말로 구천년 낭가의 맥을 계승한 진정한 제세핵랑군이요 후천 5만년 새 세상을 여는 역사 혁명가들입니다. 우주 가을 개벽을 앞둔 지금 한민족과 인류의 희망이 오직 인간으로 오신 상제님의 일꾼들에게 달려있습니다. 개벽기에 인간으로 오신 상제님의 진리를 만나는 것은 자신의 인생사에 가장 축복되고 보람된 일입니다. 나아가 인류를 건지는 제세핵랑군의 대열에 동참한다는 것은 구천년 민족사를 넘어 인류사를 통틀어 가장 영광되고 명예로운 일입니다.



多勿興邦歌다물흥방가
고구려 皁衣들이 즐겨 부른 노래이다. 신교 역사관, 인성론과 함께 유불선의 정수가 담겨있고 조의들과 고구려인들의 국가관 생사관도 엿볼 수 있다. 고구려 안장제 때 을밀乙密이 조의선인이 되어 무리들과 함께 불렀다고 한다.


先去者爲法兮(선거자위법혜)여 後來爲上(후래위상)이로세.
爲法故(위법고)로 不生不滅(불생불멸)이오
爲上故(위상고)로 無貴無賤(무귀무천)이라.
먼저 가신 선령은 법이 되나니 뒤에 오는 후손은 조상을 받든다네.
우리 선령이 삶의 법(길잡이) 되어 주시니 그 정신 불생불멸이요
후손이 선령을 받드니 귀천이 없음이라.


人中天地爲一兮(인중천지위일혜)여
心與神(심여신)이 卽本(즉본)이로다.
爲一故(위일고)로 其虛其粗(기허기조)가 是同(시동)이오
卽本故(즉본고)로 惟神惟物(유신유물)이 不二(불이)라.
사람이 천지의 중심으로 태일이 됨이여! 마음은 신명과 더불어 천지의 근본이로세.
사람이 태일이므로 무형(정신)과 유형(물질)이 같고 천지의 근본이므로 신과 만물은 둘이 아니네.


眞爲萬善之極致兮(진위만선지극치혜)여
神主於一中(신주어일중)이로다.
極致故(극치고)로 三眞歸一(삼진귀일)이오
一中故(일중고)로 一神卽三(일신즉삼)이로다.
참[眞]은 온갖 선의 극치요 삼신은 일심의 중도 정신으로 만유를 주장하시네.
참[眞]이 선의 극치에 이르니 삼진(三眞)은 하나로 돌아가고 일심 중도에 머무는 고로 삼위 정신(삼신)으로 창조 운동을 하여라.


天上天下(천상천하)에 惟我自存兮(유아자존혜)여
多勿其興邦(다물기흥방)이로다.
自存故(자존고)로 處無爲之事(처무위지사)오
興邦故(흥방고)로 行不言之敎(행불언지교)라.
천상천하에 오직 내가 있음이여! 옛 땅과 혼을 되찾는 다물 정신, 나라를 부흥시키네.
스스로 생존하기에 함이 없는 일을 처리하고, 나라를 일으키기에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하네.


眞命之大生(진명지대생)이 性通光明兮(성통광명혜)여
入則孝(입즉효) 出則忠(출즉충)하라.
光明故(광명고)로 衆善(중선)을 無不奉行(무불봉행)이오
孝忠故(효충고)로 諸惡(제악)을 一切莫作(일절막작)하라.
영원한 참 목숨 크게 생함은 나의 본성이 광명에 통해 있음이라!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충성하여라.
광명하므로 뭇 선을 다 받들어 행하고 효도와 충성을 위해 일체의 악 짓지 말지라.


惟民之所義(유민지소의)는
乃國爲重兮(내국위중혜)여 無國我何生(무국아하생)고
國重故(국중고)로 民有物而爲福(민유물이위)이오
我生故(복아생)고로 國有魂而爲德(국유혼이위덕)이라.
백성의 정의로움은 오직 나라를 소중히 여기는 데 있네. 나라 없이 어찌 내가 살 수 있으리.
나라 소중하니 백성에게 만물이 있어 복이 되고, 내가 살아 있기에 나라에 혼이 있어 덕이 되네.


魂之有生(혼지유생) 有覺(유각) 有靈兮(유령혜)여
一神攸居之爲天宮(일신유거지위천궁)이로다.
三魂故(삼혼고)로 智生(지생)을 可以雙修(가이쌍수)오
一神故(일신고)로 形魂(형혼)을 亦得俱衍(역득구연)이라.
우리의 혼 속에 생함[生]과 깨달음[覺]과 신령함[靈]의 삼혼 깃들어 있음이여!
우주의 조화신(일신) 영원히 머무는 이내 몸, 천궁(天宮)이로세. 우리 몸에 삼혼(三魂) 깃들어 삶과 지혜를 함께 닦을 수 있으니, 일신이 머무는 천궁, 이내 몸이여! 몸과 영혼을 함께 닦아 영생하리로다.


俾我子孫(비아자손)으로 善爲邦兮(선위방혜)여
太白敎訓(태백교훈)이 吾所師(오소사)로다.
我子孫故(아자손고)로 統無不均(통무불균)이오
吾所師故(오소사고)로 敎無不新(교무불신)이라.
우리 자손들 나라를 잘 다스림이여! 대광명의 신교 가르침,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로다.
우리 자손들, 통일되어 모두 잘 살리니 우리 스승의 가르침에 새롭지 않은 것이 없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