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으로 보는 여행 시즌 2 41회 유럽을 뒤흔든 바이킹 - 바이킹의 고향, 노르웨이를 가다

[STB하이라이트]
는 상생방송 프로그램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지난 프로그램과 회차는 《한문화중심채널 STB상생방송》 공식 홈페이지(www.stb.co.kr)에서 무료로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상징으로 보는 여행 시즌 2


41회 유럽을 뒤흔든 바이킹
- 바이킹의 고향, 노르웨이를 가다





● 프로그램명 : 상징으로 보는 여행 시즌 2
● 방송시간 : 30분 / 제작 : STB상생방송 2023년
● 방송소개 : 여행을 떠나기 전, 역사와 문화에 대해 궁금증을 해소해 주는 이야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 전 세계에 얽힌 역사와 문화 이야기를 쉽고 재밌게 구성한 프로그램입니다.


[이끔말]



오늘은 유럽을 뒤흔든 바이킹Viking에 대해서 알아볼까 합니다. 우리는 흔히 바이킹의 이미지를 약탈하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또 노르만족이거나 북쪽에 사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죠. 먼저 지도를 하나 보겠습니다.


바이킹의 특징과 역사




이 지도는 바이킹이 약탈하던 전성기 시절 지도입니다. 유럽 곳곳을 다니면서 필요한 것들을 취하곤 했는데 지도에 빈랜드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빈랜드Vinland는 ‘포도의 땅, 포도주가 나오는 땅’이라는 의미로 바이킹이 표기를 했던 곳입니다. 아이슬란드 바이킹이 그린란드를 거쳐서 포도가 나오는 땅, 빈랜드로 야심차게 갔는데 그곳이 바로 아메리카 대륙이었던 것이죠.

서기 1000년에 아메리카 대륙을 찾아서 정착하려고 했으나 이미 그곳에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정착해 사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갔다는 얘기도 있고, 학자들에 따라 “일부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멕시코까지도 갔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기도 합니다. “바이킹이 이미 멕시코 지역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콜럼버스도 갈 수 있었다.”라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지도의 초록색 부분이 바이킹이 살거나 지배를 했던 땅입니다.


그렇다면 바이킹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약탈했을까요? 바이킹들은 장자長子에게 모든 것을 다 줬습니다. 모든 재산과 소유물을 장자에게 물려주면 차남, 삼남은 어떻게 할까요? 농사지을 땅도 많지 않은 북유럽에서 살아남기 위해 약탈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 가서 물건을 탈취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양 문화를, 즉 배를 타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경험한 다양한 문화와 풍습들을 흡수하는 능력으로 다민족, 다문화를 만들어 나갔던 것이 바이킹입니다.


바이킹 시대를 구분하자면 약탈, 정착, 정복의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약탈은 200년이 채 안 되는 시기 동안에 행해졌습니다. 그러니까 바이킹이 약탈만 했던 민족은 아니었다는 것이죠. 바이킹에게도 약탈의 시기가 끝나고 정착을 하는 시기가 옵니다.

프랑스 파리를 공격해 온 바이킹의 무력을 두려워 한 샤를 3세Charles III가 바이킹에게 땅을 주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북쪽 사람들이 사는 땅’이라는 뜻의 노르망디Normandie입니다. 이 노르망디 출신의 후손인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하는데 이 사람이 그 유명한 정복왕 윌리엄(윌리엄 1세William I)입니다. 또한 노르망디 출신의 해적이 십자군 원정을 가서 시칠리아에 나라를 세우기도 하고요. 지금의 터키 지역을 말하는데, 중동 지역에 안티오키아 공국(Principatus Antiochenus)이라는 작은 나라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바이킹의 나라, 영국



영국은 사실 ‘바이킹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덴마크 바이킹들이 정복한 이후 그 후손들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어에 바이킹의 언어가 많이 녹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Die, Egg, Skirt가 모두 바이킹의 언어이고, Cabbage는 바이킹이 사람의 머리를 부르는 단어인데 추후 양배추가 사람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름 지어졌습니다. 또 신화 속 신들의 이름을 각각의 요일로 정한 것도 바이킹의 종교에서 묻어 나온 것입니다.


이제 바이킹이 왜 약탈을 시작하게 됐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노르웨이Norway는 해안선이 굉장히 복잡합니다. 피오르Fjord 해안이라고 하는데 빙하가 녹으면서 바다가 내륙으로 밀려 들어간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내륙 150킬로미터까지 바다가 길쭉하게 들어간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애초부터 바이킹은 항해술航海術, 배를 타고 다니는 기술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농토도 굉장히 적어서 먹고사는 데 지장이 많았기 때문에 바이킹은 영국과 일하면서, 주로 물건을 실어 날라 주는 운송업運送業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물건을 가져가서 다른 나라에 전달하고 돈을 받아야 하는데, 그 모피 같은 물건을 빼앗기 시작합니다. 배가 굉장히 빨랐기 때문에 아주 쉬운 일이었죠. 그렇게 바이킹의 약탈 역사가 시작됩니다. 바이킹은 왕의 존재가 부재不在하고 내륙에 형성된 피오르를 따라 마을이 생겼기 때문에 그 마을마다 부족장을 두고 독립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잘 나가다가 약탈을 멈춘 이유가 있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던 빈랜드,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하려던 계획이 실패했고 그린란드에 정착하려 했으나 얼음만 쌓여 있는 척박한 땅이었기 때문에 그 역시 실패합니다. 그 후 바이킹의 역사가 위축되면서 날마다 당하던 프랑스, 독일, 영국 이런 나라들이 막강한 힘을 쌓으며 바이킹을 쫓아내기 시작합니다. 결정적으로는 1066년에 바이킹들이 몰살당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바이킹이 차지하고 있었던 영국의 동쪽 요크York라는 곳에서, 바이킹과 영국 병사 15,000명이 혈투(스탬퍼드 브리지Stamford Bridge 전투)를 벌이는데, 이때 바이킹 8,000명 정도가 죽거나 실종을 당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통해 다른 나라를 침략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가를 깨닫게 되죠.


그 후부터 바이킹 국가들은 정상적인 국가로 변하게 됩니다. 유럽 사회에서 정상적인 국가의 기준이라는 것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국교로 하며 왕을 선발하고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면서 유럽 사회와 비슷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중세 노르웨이의 이미지는 두려운 약탈자가 아닌 건조 대구(Stockfish)를 수출하는 나라로 유명해지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강원도에 가면 황태 덕장들이 있어서 명태를 말리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 북유럽의 겨울에는 이런 풍경을 아주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대구 크기도 사람만 하게 커서 전 세계 곳곳에 수출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북유럽이 워낙 잘살고 물가가 비싸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비해서 대구 가격이 월등하게 비쌉니다.


사진에 보이는 곳은 대구잡이로 유명한 노르웨이의 소도시 올레순Alesund으로 옛날 어촌입니다. 대구를 주로 많이 잡아서 수출하던 곳인데, 요즘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와서 대구잡이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또 노르웨이에는 누구든지 가 보고 싶어 하는 게이랑에르 피오르Geiranger Fjord가 있는데 거대한 크루즈cruise선船들을 타고 다니면서 풍경을 감상하기도 합니다.

노르웨이에는 빙하(glacier)가 매우 많습니다. 산 위쪽으로 빙하가 많이 쌓여 있고 호수가 많아서 물이 깨끗하기 때문에 지나가다가 목마르면 그냥 흐르는 물을 마셔도 될 정도라고 합니다. 물이 많은 만큼 어딜 가든 거대한 폭포를 볼 수 있는데 약 40만 개의 폭포가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켈트 문화와 종교 신앙




그렇다면 바이킹들은 어떤 배를 이용했을까요? 롱쉽Longship이라는 긴 배를 이용했습니다. 바이킹 박물관에 가면 긴 바이킹 선박이 전시가 되어 있는데 보통 몇십 년을 사용하고 낡으면 관棺으로 사용했습니다.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Oslo의 피오르에서 발견된 바이킹의 배 가운데는 오세베르그호(Oseberg ship)가 있습니다. 오세베르그라는 마을의 대형 매장지에서 발견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어졌는데, 주로 피오로드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사용했던 것입니다. 35명의 사람이 노를 젓고 돛을 달아서 사용했으며, 약 50년이 지난 다음에는 오사 여왕의 관棺으로 사용됐다고 합니다. 길이 30미터, 폭 6미터 정도의 매우 큰 배입니다.


오세베르그호에서는 각종 부장품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여왕이었기 때문에 장신구가 많고 그중에서 특이한 것은 ‘부처님 양동이’(Buddha bucket)라는 부장품이 있습니다. 양동이에 새겨진 인물의 몸통 가운데에는 정正십자가가 그려져 있고, 십자가를 기준으로 네 군데에 만卍 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바이킹의 배에서 많은 것들이 발견되는데 이것들은 바이킹이 직접 만들었다기보다 무역을 하거나 약탈해 온 것들입니다. 이 장신구들의 본래 용도는 아니지만, 바이킹은 이것들을 브로치 같은 장신구로 사용했습니다. 마치 신라 시대의 금 세공품에 작은 금 알갱이를 붙여 놓은 것 같은 모습입니다.


9세기 카롤링거Carolinger 제국의 황금 바이킹 브로치도 발견되었는데, 본래는 카롤링거 왕조의 귀족 계급 군 장교들이 착용했던 장식용 띠 볼드릭baldric(칼 벨트)에 부착하던 물건입니다.


또 다른 사진은 영국 수도원을 공격해 약탈한 것으로 자세히 보면 켈트인의 특징을 볼 수 있는 삼태극三太極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상 가장 잘 보존된 바이킹의 투구입니다. 바이킹을 떠올리면 대부분 뿔이 달린 투구를 상상합니다. 실제 전 세계를 다녀 보면 일부 군대들이 뿔이 달린 투구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치우천황蚩尤天皇이나 기마騎馬 민족들이 뿔이 달린 투구를 썼습니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뿔 달린 투구를 쓴 민족은 없습니다. 뿔이라는 게 굉장히 높은 신분을 나타냈는데, 유럽사에는 없고 중동에 가면 볼 수가 있죠. 그래서 결론을 내리자면 바이킹은 뿔 달린 투구를 쓴 적이 없다. 만약에 있었다면 소뿔을 달았을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졌을 거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바이킹들이 약탈을 멈추고 정상적인 국가로 변모한 후에는 교회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스타브 목조 교회라고 하는데, 스타브Stave는 교회 안에 들어가 있는 나무 기둥을 이야기합니다. 솟대, 장승 등의 기둥을 교회 안에 굉장히 많이 세웠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에는 바이킹 문화의 특징도 있고 켈트 문화도 있고 기독교 양식도 들어가 있습니다. 토착 신앙과 새로운 종교는 합쳐지기 마련이므로 건물도 세 가지 양식이 합쳐져 나타납니다.


지붕은 물결 문양으로 깎았는데 북쪽에 사는 사람들의 특징을 나타낸 너와 지붕입니다. 합판을 이어 붙인 것을 너와 지붕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도 강원도 산골에서 너와 지붕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북방 민족의 문화가 들어가 있는 것이죠. 이런 목조 교회들을 많이 지었는데 단순하게 만든 것 같지만 소나무 2,000개를 사용해야 한다고 합니다. 또 높은 산에서 자라는 소나무라야 뒤틀림이 많지 않고 오랜 세월을 견딘다고 합니다. 목조 교회는 보통 800년에서 900년 정도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중세 때는 약 2,000개 정도 존재했었는데, 종교개혁을 겪으며 많이 불타서 없어졌습니다.


목조 교회는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를 끼워 맞춰서 만들었습니다. 스타브라고 하는 나무 기둥에 사람의 얼굴을 그려 놓았는데, 저런 것을 보면 장승 문화, 솟대 문화가 굉장히 발달했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노르웨이를 여행하다 보면 거의 모든 집 입구에 기둥 두 개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일종의 신앙이자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잘 보여 주는 조각품이 있습니다. 노르웨이의 유명한 조각가 구스타브 비겔란Gustav Vigeland이 13년에 걸쳐 조각한 212개의 수많은 조각 가운데 가장 하이라이트로서 ‘기둥 하나’라는 의미를 가진 화강암 조각입니다.

17미터 높이의 화강암 조각인데 121명의 인물이 뒤엉켜 있고 맨 꼭대기에는 왕관을 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겼지만, 구스타브 비겔란은 이 기둥에 대해서 ‘부활’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남겼죠. “하늘과 통하는 인간 기둥을 통해 하늘의 빛을 받아서 사는 영원한 삶을 표현했습니다.

기독교나 신플라톤주의 수도사들의 경우 수행을 하면서 광명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구스타브 비겔란도 이런 기독교 문화와 솟대 문화의 결합을 통해서 빛과 부활을 표현하려 한 게 아닌가 하는 해석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노르웨이에는 아시아에서 건너온 토착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중 사미Sami족이라고 하는 이들은 바위 신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칸디나비아 3국(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의 정부가 “토착 신앙을 하지 마라. 기독교 신앙을 해라.”라는 강압적인 명령을 내려서 토착민들의 전통 신앙이 사라지게 됐습니다. 바위 신앙은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왔고, 제주도의 돌하르방, 고인돌 등이 있습니다.

몽골 지역에도 있지만, 바위 신앙은 일종의 산신山神에 대한 신앙입니다. 산에 있는 신령한 존재에게 매일 가서 빌 수 없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돌을 가져와 내가 살고 있는 집 근처에 놓아두거나 사당을 만들어서 신앙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땅, 어머니 신을 모시는 지모신地母神 신앙 문화의 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전 세계에서도 다양하게 발견되는 문화입니다. 그리고 사미족은 남근 모양의 솟대를 세우는 등 우리와 비슷한 문화 양상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나무로 남근을 만들어 절을 하거나 수행하는 등의 신앙 모습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은 지금의 인도입니다. 시바Śiva 신을 모시는 인도의 남부에서는 ‘링가’Linga라고 하는 남근 모양의 기둥을 만들어 숭배합니다.

[맺음말]


노르웨이는 해안선이 굉장히 복잡하게 발달해 있기 때문에, 옛날부터 항해술이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바이킹의 기지를 잘 이용해서 항해도 하고, 약탈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정상적인 국가로 발전했을 때, 교회도 많이 짓고 무역도 활발하게 하며 하나의 국가로 발돋움했습니다. 그 결과 1인당 국민소득이 9만 불에 달하는 가장 잘사는 국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인구는 500만 명에 불과하지만, 북해 브렌트유(Brent Crude) 생산으로 유럽 최대 산유국이 되기도 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잘살기도 하지만, 생활 수준도 높고 물가도 굉장히 비싼 나라, 노르웨이. 오늘은 바이킹과 그들의 대표 나라인 노르웨이에 대해서 이야기해 봤습니다. 다음에도 더 재미있는 역사와 상징을 통해 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상징으로 보는 여행 시즌2〉를 시청하시려면?
매주 : 월요일 오전 9시, 오후 6시 30분
온 가족이 함께 보면 더 좋은 방송 STB상생방송! 많은 시청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