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수도 개경開京과 강도江都
[열두 개 도시로 찾아가는 국통 맥 여행]
고려의 수도 개성
한국전쟁韓國戰爭의 휴전 협상은 1951년 이 개성에서 시작했고, 개성이 남북 가운데 어느 쪽에 속할지가 주된 쟁점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북한 치하에 넘어가는 비운의 도시가 되고 말았는데,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태백산맥 이동의 동부전선을 포기하더라도 반드시 탈환할 것을 명령했을 정도로 상징성이 강한 도시였다.
송악에서 개경으로
개성開城은 서울, 평양, 경주와 더불어 우리 역사를 대표하는 4대 고도古都이다. 개성은 고려 시대에는 ‘개경開京’이라고 불렸다. ‘개경’과 ‘개성’은 이 지역에 있었던 개성 현이나 개주에서 비롯한 명칭이다.
이 외에도 개경은 서울(수도)을 뜻하는 경성京城, 주산인 송악산과 관련된 송도松都⋅송경松京⋅송악松岳 등으로 불렸다. 또한 ‘황제의 나라’, ‘천자의 나라’를 자칭한 고려 사람들의 자부심을 상징하여 황도皇都⋅황성皇城이란 이름으로도 불렸다. 이름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도시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개성의 역사
고려의 수도 개경
조선 건국 후 개성
고려 건국 후 태조 왕건이 궁예의 세력 기반이었던 지역 출신자를 차별했듯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도 고려의 본거지인 개성 출신을 꺼렸다. 당시 유일한 출세의 방법인 벼슬길이 막히자, 개성의 인재들은 왕건 이래 정평이 있던 상인商人의 길로 들어섰다. 이들을 송상松商이라고 하였다.
송상은 중국과 일본의 삼각무역에 뛰어들어 상당한 이익을 남겼다. 이들은 인삼人蔘과 홍삼紅蔘의 대량 재배에 나섰다. 대일 항쟁기에 홍삼 전매권을 일제가 가져가자, 백삼白蔘이라는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 내기도 했다. 한때 왕도의 시민이었다는 자존심, 정치적으로 버림받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창의력과 도전 정신, 단결력이 거둔 성과였다.
해방 이후 개성과 미래
개성은 고려 도읍지로서 만월대滿月臺, 현릉顯陵(왕건왕릉), 현정릉玄正陵(공민왕릉), 선죽교善竹橋뿐 아니라 조선 말기와 대일 항쟁기에 지어진 한옥촌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일본의 교토京都처럼 옛 정취를 간직한 도시였다. 치열했던 한국전쟁 당시 북한 도시에 무자비한 공습이 가해졌으나, 개성만은 무사했다. 휴전협정이 진행되는 곳이었고, 북한 정권도 이곳을 찬밥 취급을 했기 때문에 별다른 개발이 없었던 것이 주요 이유였다.
2006년에는 남북한 간의 협상으로 경제특구인 개성공업지구(개성공단)가 설립되면서 대한민국의 일부 중소기업들이 개성으로 진출하였으며, 개성의 주요 관광지도 한때 남한의 관광객에게 개방되기도 했으나 북한 핵 실험과 미사일 도발 등의 여파로 2016년 개성공단의 가동 중단 및 폐쇄 조치가 내려졌다. 이후 2018년에 남북정상회담으로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개성공단에 설치하기로 합의하면서 다시 교류가 이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2020년 6월 남측의 대북 전단 살포를 명분으로 북한 측이 개성공단에 설치되어 있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일방적으로 폭파해 버리는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남북이 함께 누렸던 좋은 세월을 한바탕 꿈처럼 여기게 만들었다.
결국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국가 간의 조약으로 관계 개선의 첫발을 디뎠던 동서독과 달리, 남북한은 끝내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정치적 결정에 따라 언제든 휴지 조각이 될 수 있는 허망한 협의서를 근거로 교류해 왔던 것이다. 도시의 이름은 열 개開 자를 썼는데, 남북 사람들 사이에 놓인 마음의 문은 왜 이리 닫혀[閉] 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언제쯤이면 남과 북 사이에 봄이 오고, 한민족으로서 어우러져 가을에 열매를 맺듯 하나가 된 나라가 될 수 있을까? 환웅천왕님과 단군 임금님께서 내려 주신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의 가르침 아래 하나로 모이는 상생의 세상을 여는 것이 우리에겐 절실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개경의 수도로서의 특징 - 풍수지리설을 중심으로
개성의 산세
산들이 낮기는 하지만, 주위를 빙 두르고 있어서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분지盆地 지세이다. 주산인 송악산松嶽山은 힘찬 기상이 솟아 나오는 모습이다. 중심이 되는 땅인 혈穴이 개경의 궁성인 만월대滿月臺인데 이와 가장 가까운 왼쪽 산을 내청룡, 그 바깥 산은 외청룡이라 한다. 자남산子男山은 내청룡, 부흥산富興山과 덕암봉德岩峯이 외청룡이다. 오른쪽 산은 백호가 되는데 오공산蜈蚣山 자락의 우백호가 있다. 개성은 내청룡과 외청룡으로 청룡이 강하다. 남성과 장자長子의 운세가 좋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조선의 한양漢陽과는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은 청룡에 해당하는 낙산駱山이 낮고 완만하지만, 백호인 인왕산仁王山이 상대적으로 크고 웅장하여 차남次男과 여성의 운세가 좋다고 보았다. 실제 조선은 적장자嫡長子로 왕위에 올라 정통성에 근거해서 제대로 정치를 한 임금은 19대인 숙종肅宗 정도이고 외척外戚의 발호 정도가 심했다.
개경은 남쪽의 용수산龍首山이 안산이 되어, 사신사四神砂(풍수의 대상이 되는 혈의 전후좌우의 산세)가 잘 갖춰진 장풍국藏風局의 명당이라고 한다. 만월대를 중심으로 궁궐이 조성되었는데, 가급적 본래의 지형을 깎아 내지 않아 비탈면에 궁궐이 지어져 있으며, 지형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건물의 좌향坐向이 정해져 있어, 계획적인 궁궐의 모습을 가진 조선의 경복궁景福宮과는 대비된다. 다만 조선의 창덕궁昌德宮은 고려 궁궐의 전통에 따라 가급적 자연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이용하는 우리나라 풍수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개경의 물
그래서 개경은 수덕水德이 부족하다고 하여, 물의 합류점 부근에 광명사廣明寺, 일월사日月寺, 개국사開國寺 같은 절을 두었다. 이는 수세를 진압하는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세워졌는데, 하천의 범람이 우려되는 취약 지점과 합류점에 절이라는 인공 건조물을 세워 하천의 측방 침식을 억제하고, 승려들에게 하천을 감시하게 함과 동시에 유사시에는 노동력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한 방안이다.
산과 강 그리고 바다가 어우러진 개방적인 도시, 개경
천지의 수기水氣를 다스리는 신수神獸는 용龍이다. 이 용의 자손을 표방했던 왕건의 후예들은 더 큰 물이 필요했을까? 고려는 바다로 오가는 접근이 한양보다 유리하였다. 개경은 예성강禮成江과 임진강臨津江을 좌우로 두르고 송악산 아래 분지 지형에 자리를 잡은 도시로 국방 및 교통 그리고 물산과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하천 유역인 연백평야延白平野, 장단평야長湍平野 등의 농경지는 경제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마련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고, 예성강과 임진강의 두 하천은 다시 하구에서 한강漢江으로 합쳐져 서해로 이어진다. 개경은 예성강 하류의 나루인 벽란도碧瀾渡를 드나들던 이슬람 상인들을 통해 ‘코리아(高麗)’란 이름을 세계에 알리기도 했을 만큼 유연하고 개방적인 상업 도시였다.
번성한 개경의 모습
당唐과 송宋의 제도를 수용하면서도, 나라와 왕실이 중국의 그것과 대등하고 스스로 ‘천자국天子國’에 살고 있다는 신념에 따라 자율적으로 나라를 경영한 고려의 수도 개경은 그 위엄과 광휘光輝가 사해에 넘쳐흘렀다. 개경과 인근에는 30만 명 정도의 사람이 살았고, 13세기 초에는 최대 50만 명까지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고려가 있었던 서기 1000년경 전 세계에서 100만 정도의 인구가 있던 도시는 북송의 수도인 ‘카이펑開封’과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 정도였고, 조선의 한양이 18만 명에서 최대 24만 명이었던 것에 비교하면 대단한 번성이라고 할 수 있다.
유불선이 하나가 된 나라, 고려
고려高麗는 국호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高句麗를 계승하는 나라였다. 그래서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문화의 계승, 유지, 발전에 힘쓴 나라였다. 당시 동아시아는 북방 유목 민족의 흥기가 도래하여 거란의 요遼나라, 여진의 금金나라, 몽골의 원元나라까지 등장해 정세가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이에 고려는 북방 민족에 대해 화친과 강경 대응 등 두 가지 정책을 병행하였는데, 현종 10년(1019)에 침입한 거란군의 주력을 귀주대첩龜州大捷에서 섬멸시킴으로써 고려와 거란 그리고 송宋나라의 3국 체제를 이루며 균형추 구실을 했다. 또한 군사 조직인 별무반別武班을 동원하여 만주의 여진 영역까지 도모했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겼기 때문에 별다른 무력 충돌은 없었다.
고려가 몽골에 맞서 싸운 대몽 항쟁은 비정상적인 정치 체제인 무신 정권기였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길어진 측면이 있었다. 정상적인 고려 황제 체제였으면, 거란과 전쟁에서 보듯 대규모 섬멸전을 펼치거나, 화친을 통해 빠르게 평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아무튼 몽골의 부마국이 된 고려는 원元의 세계 질서 속에서 어느 정도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으나, 고려를 몽골의 행정구역 중 하나인 일개 성省으로 편입시키려는(입성책동立省策動) 부원배附元輩들이 창궐하기도 하였다. 이후 대륙의 정세가 대원 제국이 급격히 쇠퇴하는 상황으로 전개되자, 고려 제31대 국왕인 공민왕恭愍王은 원元나라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개혁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공민왕이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으며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결국 고려는 문을 닫고 조선이 새로 들어섰다.
고려는 정치 이념으로 유교儒敎 질서를, 사회 통합적인 종교 측면에선 불교佛敎 국가로의 위상을 명확히 가지면서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융합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지닌 나라였고, 개경은 그 상징이었다.
무엇보다 개경은 고려 불교의 중심지로서 불교 도시의 면모를 분명히 갖추고 있었다. 개경 주위에만 300여 곳의 절이 있었다. 개경 사람과 모든 고려인이 어울려 즐기는 큰 잔치인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 중 연등회는 불교 축제였다. 왕실에서는 부모의 명복을 비는 원찰願刹을 운영했고, 개경 사람들도 부모의 제사를 비롯한 온갖 의례를 절에서 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개경 시내와 교외 경승지 요소요소에는 절이 자리해서 사색의 공간이자 휴식처 노릇을 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각종 불화佛畫와 금과 은으로 된 사경寫經, 경함經函 등의 제작과 불경佛經 간행을 통한 눈부신 인쇄⋅출판 문화의 발전은 이런 환경 속에서 가능했다.
유교와 전통적인 신교의 모습을 보여 주는 건축물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구단圓丘壇과 종묘宗廟(태묘太廟)와 사직社稷 그리고 고려의 성균관인 국자감國子監이 있었다. 『송사宋史』에 이르기를 “고려에는 국자감이 있는데 학자가 6천 명이나 된다.”라고 할 정도로 고려는 조선만큼은 아니지만 유학적 소양을 갖춘 문사 관료들이 꾸준히 배출되었다. 그 밖에 청연각淸讌閣과 보문각寶文閣은 궁궐 바로 옆에 세워진 조선의 집현전集賢殿이나 규장각奎章閣 같은 곳으로 유학자들이 모여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며 가끔 행차하는 왕의 자문諮問에 응하곤 했다.
개경의 축제, 연등회와 팔관회
고려 중기의 문인 이규보李奎報는 개경의 풍경을 “수많은 저택과 집들이 고기비늘이 겹친 듯 즐비하다. 연이은 지붕들의 기세가 마치 교룡이 일어나고 봉황이 춤추는 듯하다.”라고 예찬했다. 1488년 조선에 사신으로 온 명明나라 동월董越이 귀국 후 지은 『조선부朝鮮賦』에서 “개성은 백성이 많고 산물이 풍부해 여러 고을과 견줄 바가 아니다. 그 풍기風氣도 단단하고 짜임새 있으니, 평양보다 낫다.”라고 기록했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연등과 팔관을 중히 여기라고 했다. 매년 4월 봄날이 되면 개경 전역을 무대로 한 행사가 열렸다. 바로 연등회燃燈會다. 지금도 4월 초파일이 되면 서울 종로와 전국 사찰에 빛나는 등불이 가득한데, 불교 국가인 고려는 오죽하랴? 온갖 색으로 칠해지고 휘황하게 빛나는 형형색색의 등불이 개경 전역을 수놓았다.
이때는 왕족과 고관, 상인, 평민들이 궁궐 마당과 사찰과 시장터를 가리지 않고 온 개경에 흩어져서 어우러졌다. 승려도 선비도 중국인도 서역인도 신분과 남녀에 상관없이 함께 일상을 잊고 시와 춤, 술과 노래를 함께 나누었다. 연등회는 불교 의례로 부처를 섬김과 아울러 군신동락君臣同樂의 축제적인 성격이 강했는데, 황제와 황후의 제삿날 등에 따라 날짜가 변경되었다.
팔관회八關會는 하늘의 신령과 오악五嶽,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龍神을 섬기는 행사로 고려 황제의 권위와 고려의 위상을 만천하에 과시하는 국가 의례로서의 성격이 중시되었다. 음력 11월 보름에 개최되는데 대략 동지冬至 전후였음을 알 수 있다. 초기에 팔관회는 위령제 성격을 지니면서 미륵의 용화 세계 구현과 화랑의 풍류도가 결합된 행사였다.
궁예가 연 후고구려의 팔관회는 고구려 제천 행사인 10월 동맹제東盟祭를 계승하였고, 신라 시대에는 농경 의례적인 계절 축제의 성격이 더해졌다. 고려의 팔관회는 이를 계승하여 제천 행사를 통해 흩어진 민심과 지방 세력을 모으고 달래며 하나로 결집시키는 전국적 성격을 띤 국가 의례가 되었다.
팔관회는 대외적으로 국제 관계에서 고려의 위상을 알리는 중요한 행사였다. 즉 중원과 공존하는 천자국으로서,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天子인 고려의 황제가 친히 집전하는 국가 의례이다. 고려 황제를 위해 만세를 부르고 행차하는 길에 황토黃土를 까는 등 황제의 격식으로 진행되고, 외국인들이 고려 황제에게 조하朝賀하는 의식이 중시되었다. 조하는 조의진하朝儀陳賀의 준말로 조정에 나아가 임금에게 경축하는 예(하례賀禮)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팔관회에 조하하는 외국인들은 고려에 복속된 것은 아니지만, 고려가 중심이 되는 천하의 일원으로 고려에 찾아와 고려의 덕화德化를 받는 조공국朝貢國의 사자로서 예우를 받았다. 외국인의 조하 의식은 각종 문물제도가 정비되고 왕권이 안정된 전성기에 자신감이 넘치던 고려의 국가적 위상을 뒷받침해 주는 국가 의례였다.
경기京畿의 의미
우리나라에서 ‘도道’라는 행정구역의 명칭은 고려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중서부에 있는 ‘경기京畿’는 오늘날 광역 행정구역의 하나인 ‘경기도京畿道’로 그 명칭이 남아 있는데, 다른 도와 작명법이 달랐다. 보기를 들면 경상도慶尙道는 대표적 두 도시인 경주의 경慶과 상주의 상尙을 취하여 이름을 지었는데, 경기는 말 그대로 서울 경京과 서울 주변 지역 기畿이다. 그래서 경기란 왕실을 보위하고 왕도王都를 유지하기 위해 왕도 외곽에 설치한 특별 구역을 말한다.지금의 경기도는 지방세의 수취를 통해 독립 재정을 운영하지만, 전근대前近代 이전 경기는 중앙에서 직접 지배하는 방식으로 국가의 모든 행정사무가 직접 관철되었다. 본래 경京은 천자의 도읍을, 기畿는 천자가 직접 관할하던 도성 주위 1천 리의 땅을 의미하였다. 경기제京畿制는 당唐나라 때 제도적으로 완비되었지만, 『서경書經』, 『시경詩經』, 『주례周禮』 등 경전에 이미 나타나 있다. 그 형태는 역대 왕조(고구려, 백제, 신라 등과 중국 왕조)의 왕기王畿, 기내畿內를 계승한 것이다. 이는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신분 질서 체제를 구현하면서 세력 범위를 반영한 질서관 또는 세계관을 나타낸 것이다.
천자국이었던 고려의 경기는 왕경王京을 보위하는 지역이었던 만큼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경기의 백성들은 이념상으로는 ‘경기 우선론’이었지만, 현실적으로 각종 부역에 시달리는 등 다른 지역에 비해 무거운 부담을 져야 했다.
고려의 또 다른 수도, 강화도
본래 강화도는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고려 시대부터 지속해서 간척干拓이 이루어져 현재와 같은 모양이 되었다. 강화도의 부속 섬인 석모도席毛島는 본디 세 개, 교동도喬桐島도 두 개의 섬이었고, 본섬인 강화도의 경우 수십 개의 섬이었던 데다가 서남부 지역은 그냥 갯벌일 뿐이었다. 이걸 매립하고 개간하여 지금의 해안선이 만들어졌다. 해안선 일부는 절벽이고 일부는 평지인 이유가 그것이다. 단군 성조께서 천제를 올린 마리산(마니산摩尼山)이 있는 화도면도 원래는 강화도 본도本島와 다른 섬이었지만, 1706년(숙종 32년) 간척 사업으로 본도와 연결되었다. 마리산 근처에 경지 정리가 되어 있는 상당히 넓고 평탄한 농지는 이 일대가 예전엔 바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간척이 이루어지기 전의 강화도 모습을 보고 싶다면 강화도에 있는 산으로 올라가서 산이 있는 부분만 섬이라 생각하고 보면 대강 예상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잦은 외침에도 강화도가 요새 역할을 오랫동안 수행할 수 있었던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강과 바다가 천연의 해자垓子 역할을 하고 해안선이 꼬불꼬불하며 온통 산과 절벽뿐인 데다, 사방이 갯벌이니 적이 상륙하기에는 까다로운 지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강화도의 간척 사업이 계속 이루어져 병자호란 무렵에는 강화도가 대몽 항쟁 시절보다 더 넓어졌다. 그로 인해 상륙할 지점도 많아져서 청나라 군대는 손쉽게 강화도에 진입할 수 있었다. 이에 강화도로 피신한 왕족과 대신들 및 그 가족들이 몽땅 포로로 잡히거나 자살하는 비극이 일어났으며, 결과적으로 남한산성에 있던 국왕 인조仁祖는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우리 역사상 최악의 치욕을 당해야 했다.
또한 강화도는 유배지의 상징이었다. 살려 두기는 위험하지만 죽이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많은 인물을 강화도로 유배 보내는 일이 많았다. 고려의 제21대 왕 희종熙宗에 이어 조선의 연산군燕山君, 임해군臨海君, 영창대군永昌大君, 광해군光海君 등이 이곳에 유배되었으며, 철종哲宗은 왕위에 오를 때까지 강화도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광해군은 형인 임해군과 동생인 영창대군을 여기에 유배시켰다가 자신도 인조반정으로 여기에 유배되었으니, 인생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근대에 와서도 병인박해로 인해 프랑스가 침공해 온 병인양요丙寅洋擾,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미국이 침공한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모두 강화도에서 발생했다. 그 밖에도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일본과 맺은 최초의 불평등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 조약 등 역사적 사건이 많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개성의 실향민들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개성의 문화를 이었다고 한다. 현재에도 해병대 2사단이 주둔하여 북한과 대치하는 최전방이자 군사적 요충지이다.
〈참고문헌〉
* 『역주본 환단고기』, 안경전, 2012, 상생출판
* 『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 함규진, 2023, 다산초당
* 『온 국민을 위한 대한민국 역사 교과서 1』, 대한민국 역사 교과서 편찬위원회, 2024,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 『고려사의 재발견』, 박종기, 2021,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 『역사 저널 그날』, KBS 역사 저널 그날 제작팀, 2021, 민음사
* 『고려의 황도 개경』, 한국 역사연구회, 2002, 창비
* 『개경의 생활사』, 한국 역사연구회, 2007,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 『역주본 환단고기』, 안경전, 2012, 상생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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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황도 개경』, 한국 역사연구회, 2002, 창비
* 『개경의 생활사』, 한국 역사연구회, 2007,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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