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홍진 감독의 〈곡성〉
[영화산책 ]
거부할 수 없는 미끼, 파국으로 치닫는 운명
“거부할 수 없는 미끼를 던진 후 관객이 지쳐서 진이 다 빠질 때까지 끌고 다니는 괴작”
“그 모든 의미에서 무시무시하다”
“그 모든 의미에서 무시무시하다”
영화 〈곡성〉에 대한 평론가들의 말이다. 나홍진 감독이 영화 〈황해〉 이후 6년간 공을 들여 스릴러물 한편을 개봉한다. 영화를 준비하는 동안 시나리오를 미리 접한 영화관계자들의 입소문을 타고 무시무시한 한국영화가 탄생한다는 소문이 먼저 퍼졌다.
드디어 5월 11일 베일을 벗은 〈곡성〉 영화는 11일에만 17만 391명을 끌어들여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현재 700만에 가까운 역대급 흥행성적을 거두었다.
제69회 칸 영화제 공식 섹션인 비경쟁부문에 초청되어 7분 동안 기립 박수를 받으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은 것은 물론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또다시 한국영화의 쾌거를 이룬 작품으로 입지를 굳혔다.
또한 〈곡성〉이 가진 독특한 점은 보는 시각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열린 결말’이라는 것과 자신의 신념을 건드리는 주제로 파고들 수밖에 없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다양한 해석이 나오면서 온라인상의 열띤 토론으로 이어졌다
첫 번째 미끼 야생버섯
작은 시골 마을 ‘곡성’에 의문의 죽음이 이어지고 마을은 발칵 뒤집어진다. 현장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어떤 의식이 행해졌던 것 같은 신당의 모습, 그리고 어성초.
가해자는 평범한 마을 사람이다. 게다가 이유 없이 자신의 가족을 무참히 죽였다. 그리고 마치 신들린 듯 괴성을 지르며 날뛰거나 넋이 나가 있다. 또한 온몸에 피부병 같은 것이 나타나는데 엄청난 양의 피를 토하고 사지 뼈마디가 뒤틀리면서 죽는 환자에게 의학도 속수무책일 뿐이다.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경찰은 집단 야생버섯 중독으로 잠정적 결론을 내린다.
“피해자 검사 결과 나왔댜. 뭔 버섯을 잘못 처먹어서 그랬다더라. 먹으면 회까닥 도는 버섯 있지? 그게 혈액 속에서 엄청 나왔댜. 집에서도 말린 게 겁나게 나와 버렸고….”
“형님, 시방 그 말을 믿으요?”
“검사 결과가 나왔당게!”
“형은 요상한 버섯을 안 먹어 봤는가?”
“안 먹어 봤어, 새끼야.”
“그거 처먹었다고 사람이 그렇게 되지 않어라. 갸 꼬라지 봤잖소. 그게 버섯 잘못 먹은 꼬라지여?
세상의 나타나는 현상 중에 현대과학이 밝혀 낸 것은 1%에 불과하다.
두 번째 미끼 증인
사건 현장을 지키고 있던 종구는 의문의 여인 ‘무명’을 만나게 되는데 무명은 외지인이 귀신이며 사람들 피를 말려 죽이려고 한다는 말을 하고 사라진다. 그때 종구는 사건 현장 한편에서 소문의 외지인이 고라니의 피를 빨아먹는 모습을 보게 되고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꿈인지 생시인지도 구별이 안 간다. 외지인 소문의 목격자 영양원집 사장 덕기를 찾아가고.
“내가 기절했다 눈을 딱 떠본께, 짐승맨치로 할딱 벗고 기저귀까지 차고 말여. 대가리를 처박고 온몸에 피칠을 하고 눈깔이 시뻘게 갖고 그 눈깔으로다 나를 딱 쳐다보면서 갑자기 확!”
덕기는 종구가 꿈에서 본 것과 동일한 것을 이야기한다.
눈으로 확인해야 진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것이 아닌가. 목격 장소 근처에서 외지인의 거처를 찾아낸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신당이 차려져 있고 방 한편에는 희생자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정황은 확실한데 물증이 없는 상황. 덕기와 무명의 말은 증언인가, 사람 잡는 소문인가.
세 번째 미끼 허주
영화상에 ‘허주’라는 단어가 나온다. 무당은 애기 장군, 이순신 장군 등 각자 모시는 신이 있다. 그 신을 자신의 몸에 들어오라고 내림굿을 받을 때 강력한 악귀를 신으로 착각해 엉뚱하게 다른 귀신이 들어올 때가 있는데 이것이 헛된 주인, 바로 허주虛主다.
한번 잘못된 귀신이 들어와 버리면 쫓아내기 힘들고 자신에게 몸을 내어준 무속인의 말과 행동을 이상하게 만들다가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 허주를 모시고 있는 무당 ‘일광’과 같은 편 ‘외지인’이 허주의 제물로 바치려고 곡성 지역 사람을 해하려 하다 대결구도에 있는 ‘무명’이라는 수호신 또는 토착신의 방해가 시작되면서 주인공 종구를 비롯한 인물들이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네 번째 미끼 절박한 마음
딸 효진이 피해자들과 동일한 증상을 보이자 다급해진 종구.
신부를 찾아가 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 세계를 믿는 신부는 어찌 보지도 않고 믿냐며 기도조차 하지 않고 종구를 병원에 가라고 돌려보낸다.
장모는 효진이가 귀신이 들린 것 같다며 용하다고 소문 난 무당 ‘일광’을 불러들이고 신부보다 백번 든든한 무당 일광의 말을 믿고 살煞을 날리는 굿을 하는데, 이때 감독은 외지인이 굿하는 장면과 교차편집을 해서 마치 둘이 대결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외지인은 또 다른 희생자 박춘배를 좀비로 만드는 혹은 불완전한 인간으로 구원하는 의식을 하다 무명의 방해로 쓰러진다.
결국 일광의 살은 딸 효진에게 날린 것. 효진이 너무 아파하자 이상함을 느낀 종구는 굿을 파하고 병원에 간다. 하지만 뼈마디가 뒤틀리며 죽는 환자 앞에서 의학도 속수무책인 상황에 아빠 종구의 마음은 타들어간다.
다섯 번째 미끼 선과 악
한 명이 사기를 치려고 덤비면 열 사람도 못 당한다는 말이 있고, 도둑 한 명을 열 명의 포졸이 못 막는다는 얘기도 있다. 보통 사기를 당한다고 하면 감언이설을 하면서 친근하게 다가오는 사람들한테 당하게 되는데, 문제는 나쁜 사람이 ‘내가 나쁘다’는 얘기를 하지 않고 들어오므로 헷갈린다는 것이다.
‘무명’은 “네 딸을 살리려는 여자”라고 자신을 밝히며 ‘외지인’이 귀신이고 ‘일광’과 한패이니 자신을 믿으라고 한다. 일광도 효진이를 살려주겠다고 굿을 하고 무명이 악귀라며 현혹되면 안된다고 한다. 모두 종구에게 믿음을 주며 다가오는데,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이 어렵다. 도우려는 자인가 해하려는 자인가. 문을 열어줘도 되나, 말아야 하나?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데 초자연적인 힘 앞에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알 수가 없다.
여섯 번째 미끼 신에게 묻다
종구는 “왜 하필 우리 딸이냐?”고 묻는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유가 없다.
“그놈은 그냥 미끼를 던져분 것이고. 자네 딸내미는 고것을 확 물어분 것이여. 고것이 다여”
나홍진 감독은 지인의 장례식에서 예배를 보고 나오는데 그렇게 죽어서는 안될 사람이었는데 죽었다는 것에 회의를 느껴 곡성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제작 동기를 밝힌 바 있다.
“인간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한데, 그 존재가 사라져가는데 이유가 없다는 것이 말이 안되고 충격적이었다. 신이 창조한 인간이 이유 없이 소멸되고 있다면 인간의 입장에서 ‘과연 신은 선한 건가’ ‘신은 존재하는가’란 물음이 꼬리를 물었다.
아픔을 겪게 되면 하늘을 원망하는 게 보편적인 모습이다. 이 영화를 통해 ‘이제는 신께서 그 선함을 드러내야 하고 당신의 존재를 증명해 주셔야겠습니다’ 하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다.”
감독은 이 영화를 본 관객도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하길 바랐다고 한다.
그의 바람대로 영화를 본 관객들은 이 ‘결말 없는 영화’에 대해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해석들을 찾아보게 되었고 저마다의 해석이 쏟아져 나왔다. 어떤 이는 좀비물로 보기도 했고, 어떤 이는 야행버섯을 사료로 먹인 돼지를 지속적으로 섭취한 마을사람들이 단체 환각에 빠져 선량한 사람들을 악인으로 몰았다고 과학적으로 접근한 의견을 제시했으며, 어떤 이는 의심하면 악의 미끼를 무는 것이므로 의심하지 않고 믿어야 한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또 모 교수는 “다양한 언어를 해석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경 내용도 해석하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성경만 옳다며 의심하지 않고 믿는 카톨릭인에게 ‘살을 날린 영화’라고 평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감독은 내용 전반에 유일신 개념의 기독교 상징들을 은유로서 차용하며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민속신앙을 끌어들임으로서 다각도의 접근이 가능하게 했으며 특히 굿하는 장면에서 감독으로서 관객들이 어떤 질문을 던져도 빠져나올 구멍은 다 생각해놓은 편집이었다라고 밝힌 것처럼, 내용상의 여러 장치들을 설치해놓아 ‘열린 결말’로 신의 존재와 인간의 존재 이유를 저마다의 생각으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이끌어냈다.
영화는 절박한 상황에서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이 선인지 악인지도 모르겠고 우호적인 존재인지 해를 끼칠 존재인지도 알 수 없는 혼란에 빠뜨리면서 선택의 기로에 서도록 만든다.
이는 곧 “나는 지금 무얼 믿고 있으며 내 믿음이 참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며 현혹되지 않고 어떻게 참 진리를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영화이다.
관객이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시작부터 두 가지 힌트를 주고 시작한다.
첫 번째 믿음에 관하여
“그들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누가복음 24장 37절~39절>
위와 같은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영화는 시작된다. 이는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목격한 제자들 앞에 사흘 후 다시 나타나 한 말이다. 영화는 전개되는 내내 관객에게 혼돈을 주며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너는 마음에 의심(혼란)이 일어날 때 이것을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
두 번째 의심에 관하여
외지인(악마)이 낚시 바늘에 미끼를 끼우는 장면. 그가 던진 현혹이라는 미끼를 물었을 때 마을 사람들은 악의 제물이 된다. 잘 모를 때 사기를 당하기 쉬운 것처럼 의심, 즉 확실한 답을 찾지 못했을 때 현혹이라는 미끼를 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영화가 대표적으로 사용한 종교인 기독교와 무속 신앙의 공통점은 의심하지 않는 믿음을 요구한다. 실제로 중세 기독교는 질문이 금지되었었고 현대 기독교 역시 질문은 성경으로 답할 수 있는 부분으로 한정되어 있기에 사실상 질문(의심)은 믿음의 부재요 아멘(네, 맞습니다!)으로 화답하는 것이 신도들의 의무다. 종교란 대부분의 보통 사람이 눈으로 보지 못하는 신의 영역을 아는 것이라서 올바른 통찰력이 없다면 믿는 사람에게는 맹목적 믿음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고, 안 믿는 사람에게는 논리적이지 못한 것으로 비쳐져 미신이라 치부되기 쉽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알고자 할 때 우리는 의심을 부정해야 하는 것일까?
믿음과 의심의 정의
“선요에 이르기를 참선함의 큰 요체가 셋 있으니
첫째는 큰 믿음의 뿌리를 갖는 것이요,
둘째는 크게 분발하는 의지를 갖는 것이라.
의심은 믿음을 바탕으로 삼고, 깨달음은 의심을 쓰임으로 삼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이 십분이면 의심도 십분이요, 의심이 십분이면 깨달음이 십분이라 하니 이것이 정정을 얻는 가장 빠른 법이니라.
무엇 때문인가?
큰 소원을 품지 않으면 지극한 정성이 생겨나지 않고,
큰 의심이 없으면 죽음을 무릅쓸 분발심이 생겨나지 않고, 큰 믿음이 없으면 진정한 의심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라.” - 『영보국 정정지법』 「영보를 닦는 삼요체」
질문을 해봐야 답을 얻을 수 있듯이 의심을 해봐야 진정한 깨달음으로 갈 수 있다. 의심이 없는 믿음이나 믿음이 없는 의심은 전체를 관통하지 못하였기에 뿌리 깊지 못하고 거짓에 현혹되기 쉽다. 믿음과 의심이란 음양으로 존재하며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영화 속에서 답을 찾고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두 인물인 ‘주인공 종구’와 ‘부사제 양이삼’은 이 의심과 믿음의 과제에 대해 각자 다른 방식으로 답을 쫓아나간다.
주인공 종구
종구는 꿈에서 알음귀를 얻는다. 소문의 목격자 영양원집 덕기의 도움을 받아 외지인의 거처도 찾아냈다.
사건 현장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됐던 신당이 차려진 외지인의 집을 확인하고 딸을 포함한 피해자들의 증상을 통해 신의 문제임을 파악한다. 할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하여 문제를 정면 돌파하지만 속수무책 당할 뿐이다.
상식도 이성도 통하지 않는 초월적인 문제에 내 딸의 목숨이 걸렸기에 아버지의 종구는 더욱 처절하고 절박해진다. 이때 나를 도우려는 ‘무명’의 말과 ‘일광’이 전화로 현혹하는 말 사이에서 갈등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라!
죽으려 하면 죽을 것이요 살려고 하면 살 것이다.
종구는 마을에 일어나는 신의 작용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고 그 해결책으로 찾은 의학, 종교, 무속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현대인이 맹목적으로 믿는 의학(과학), 믿음 없이 찾아간 종교, 장모의 권유로 한 무당 굿. 의학은 대책이 없고 종교는 무능하고 무속은 자신의 이익만 찾았다.
설령 그것이 하나님이었다 해도 내가 없이 누구를 믿을 수가 있으며 지식 없이 어떻게 분별할 수 있으며 그렇게 찾은 답에 확신인들 할 수 있겠는가. 더욱 절박해진 상황 속에서 그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몸속에 깃든 악령이 자라날 때까지 안타까운 시간만 흐르다 결국 모두 파국을 맞이한다.
부사제 양이삼
여기 부사제 양이삼 또한 자신이 믿어왔던 신의 존재와 종교의 무능함으로 믿음과 의심 앞에 처절하다. 악마의 정체를 확인하고 죽일 각오로 무기를 들고 찾아가지만, 정작 외지인을 마주하고서 “악마다”라고 말하면서도 “네가 악마가 아니라고 말해 달라. 그러면 돌아갈게”라며 부탁한다.
죽일 각오로 찾아가서도 자신이 내린 결단을 믿지 못한다. 자신의 질문을 회피하고 답을 악마(신)에게 넘긴 것이다. 그 사이 답을 찾지 못한 의심은 미끼가 되어 악마를 부활시킨다.
이것이 그의 의심이 낳은 결과일지라도 외지인은 이와 같이 현혹이라는 미끼로 자신의 제물을 만들어내 마을에 해를 끼쳤고 결과적으로 악마의 모습을 확실히 보여준 셈이다.
과연 이때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의 바람처럼 악마가 아니라고 믿었다면, 부활했다고 믿는 자에게 신이 된 예수처럼 악마는 신이 되었을까? 자신이 보고싶은 대로 보고 믿고싶은 대로 믿는 신앙은 어디에도 없는 자신만 아는 돌연변이를 만들어내며 믿음의 본질을 왜곡시킨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만들어낸 신에게 현혹되어 제물이 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또한 현혹된 자들은 피해자이자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하는 가해자가 되어 같은 길을 가게 된다.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자신을 못 믿으면 상제님도 못 믿느니라
하루는 고찬홍이 집으로 돌아가고자 태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마당에 내려서는데 태모님께서 물으시기를 “찬홍이 너는 누구를 믿느냐?” 하시니 찬홍이 “제가 저를 믿지요.”하고 대답하니라. 이에 “꼭 그런가?” 하시니 “꼭 그렇지요.” 하매 다시 물으시기를 “꼭 그런가?” 하시니 또 “꼭 그렇지요.” 하더라태모님께서 “그 다음에는?” 하고 물으시니 찬홍이 “다음은 증산 상제님을 믿지요.” 하고 대답하거늘 말씀하시기를 “꼭 그렇게 하라. 저를 못 믿으면 상제님 또한 못 믿느니라.” 하시니라. 태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한테 내가 있다, 나를 찾아라. 내가 나를 못 찾으면 이 천지를 못 찾느니라.” 하시니라. (도전11:69:1~7)
중요한 것은 선에 대한 믿음일까? 악에 대한 의심일까?
딸 효진
딸 ‘효진’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빠 ‘종구’에게 말한다.
“뭣이 중한지도 모르면서!”
참 진리를 찾아가는 길에서 절박한 우리에게 일침을 가하는 말이다. 이 영화에서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가려내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가장 두려운 것은 박람박식이니라.” “박람박식이 천하무적이니라.” 하신 상제님의 말씀처럼 필요한 것은 누구를 ‘믿고’ ‘의심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사건을 통찰하는 지식과 나를 믿고 내리는 결단력이다.
삶의 목적에 대해서 의심하고 경험해서 깨달아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둥글어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고 그 속에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가 낳고 자라고 성장하고 소멸되는 과정을 끝없이 반복한다.
어릴 적 어린아이가 싸우면서 크듯이, 어려움을 겪어야 성장하고 상처를 받아야 단단해진다.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깨어져 천지와 하나 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저마다의 모습에 맞추어 변화해간다. 그런데 이 일정한 자연의 규칙을 놓쳐 이탈하거나 잊어버렸을 때 우리는 혼란스러워지고 세상을 원망하게 된다.
하지만 호랑이에게 토끼가 잡아먹히는 게 토끼가 선해서도 아니고 토끼를 잡아먹는 호랑이가 악해서도 아니듯이, 사람이 고난을 겪는 이유는 고통받기 위한 악의 심판이 아니라 우주의 질서 속에서 저마다 성숙되어가는 과정이다.
종구와 양이삼은 자신이 처한 불행 속에서 ‘왜 나여야만 하냐!’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냐?’고 혼란스러워 한다. 필자는, 종구가 가족의 불행을 겪으면서 지식이 있어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을, 그리고 양이삼이 내가 나를 믿을 수 있을 때 신도 그 누구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 각자의 고통과 의심의 크기만큼 깨닫는 과정이 되었기를 바란다.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필자가 보기에, 영화 속 곡성의 모습은 마치 인생에 혼란을 겪고 마음속 답을 찾기 위해 도장을 방문하는 우리의 모습과 똑 닮아 보였다.
진리를 알려줘도 종구처럼 지식이 없어 알아보지 못하고 주위에 현혹되는 사람. 양이삼처럼 믿음은 있으나 확신하지 못해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다른 것에 현혹되는 사람. 소문만으로 혹은 자신이 보고싶은 대로 보고 단정짓는 사람들.
결국 다른 것에 흔들리지 말고 사력을 다해 의심하고 사력을 다해 직접 체험하고 사력을 다해 깨우쳐서 후천 5만년을 함께 살아가자고 말하고 싶다.
생존자
영화에서 유일하게 악마와 맞닥뜨리고도 생존한 자가 있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 영양원집 사장 덕기.
모두가 소문만으로 외지인을 의심할 때 그는 자신을 죽이려고 덮치는 외지인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그의 정체를 알았으며, 모두가 선과 악에 현혹될 때 악귀의 존재를 확신했기에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그는 (비밀을 누설했으므로) 벼락을 맞고도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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