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메카 사우디아라비아
[세계지역문화탐방]
사우디아라비아는 ‘알 사우드 왕가’가 다스리는 아라비아 왕국이란 뜻이다. 왕가의 구성원들이 모든 것을 맡아 다스리는 전제군주국이며, 건조한 사막이 대부분이지만 세계 최대의 석유 수출을 재원으로 경제를 운용하고 있다. 7세기 무함마드의 아라비아 반도 통일에서 본격화된 사우디의 역사는 오랫동안 터키 오스만 제국 영역 내에서 몇몇 군소 왕국들로 명멸을 해오다가 1932년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선포하면서 독립된 통일 왕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오늘날 수니파 이슬람의 맹주 역할을 하고 있는 사우디는 시아파의 중심인 이란과 갈등 관계에 있다가 2016년 1월 단교를 선언하기도 했다. 이슬람 국가 중 가장 엄격한 이슬람 관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최근 선거와 여성 참정권 허용 등 변화의 모습도 보이고 있는 사우디의 현재와 미래를 찾아가 본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지형은 대부분 사막이다. 아라비아반도 서부의 홍해 쪽에는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헤자즈 산맥이 길게 뻗어 있고, 이 산맥에서 북동 방향으로 완만히 경사가 낮아지다가 중앙부에 길게 뻗은 네지드 고원이 나타난다. 이 고원 상에 네푸드 사막과 다하나 사막이 펼쳐지며, 북동쪽으로 점차 경사가 낮아져 페르시아만 연안의 하사 지방에 이른다. 고원과 연결된 남부에는 ‘허무의 사막’으로 부르는 룹알할리 대사막(65만㎢)이 있다. 강이나 호수 대신 강우기에 물이 흐르는 와디가 나타나며 건조한 사막에 비해 연안지방은 습도가 높다.
이처럼 국토 대부분이 모래나 자갈로 덮여 있는 사막지대로 토양은 척박하며, 전체 면적 2,149,690㎢ 중에서 경작가능지 1.67%, 농경지 0.09%, 사막 기타 98.24%(2005년)이며 경지의 0.5% 정도가 관개에 의존하고 있다. 자연 재해로는 모래폭풍과 먼지폭풍이 자주 발생한다. 기후는 비교적 습윤한 남부 아시르 지방, 서부 산악·초원지대, 국토의 95%를 차지하는 사막지대로 삼분된다. 전체적으로 사막기후이며 오아시스가 산재한다.
대부분의 지역은 건조 기후이다. 가장 추운 달은 12~1월이다. 겨울 평균기온은 14~23℃이며 이때의 날씨는 한국의 가을 날씨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겨울철의 경우 모랫바람이 불지 않아 공기가 맑고 비가 오는 날이 많다. 비가 오는 날이면 온도가 급격히 떨어져 ‘파르와’라는 사우디의 전통 겨울 외투가 반드시 필요하다. 여름은 폭서가 나타나 38℃가 넘고 종종 54℃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식생은 대추야자가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자생나무이며, 그외 약간의 목초와 관목이 자란다. 계절에 무관하게 햇살이 강한 날이 많아, 선글라스·선크림이 필수적이다. 가장 더운 달은 6~7월이다. 햇빛으로부터 몸을 보호하지 않으면 100미터도 걸어가기 힘든 기후이다. 이때 밤의 온도는 30도 정도, 일교차는 보통 30도 이상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경작지의 비율이 낮아서 주식인 쌀은 거의 수입한다. 일반적인 지질은 황토 모양의 흙이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모래보다 가늘고 미세해서 가벼운 바람에도 날라가는 정도의 고운 흙이라고 보면 된다.
아랍족의 발상지는 중앙아라비아와 북아라비아이며, 사우디아라비아 동부에서는 BCE(기원전) 4~5천 년 전에 이라크 남부에서 이주하여 거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약 500년경 나바트인(Nabateans)들이 메데인 살레Madain Saleh(사우디 타북Tabuk 남쪽 160km 지점)를 주요 거점으로 아라비아 반도 북부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지역은 국토의 거의 대부분이 황량한 사막(아시아 최대의 사막인 룹알할리 사막과 네푸드 사막, 다흐나 사막 등)과 구릉지역이고 인구도 별로 없어서 통일된 국가가 성립된 적이 없었다. 우마이야 왕조, 압바스 왕조, 페르시아, 남부 해안지대에 번성하던 토후국들, 오스만 제국 등등 이 지역을 지배했다고 할 수 있는 국가들은 있었으나 별로 비옥한 땅이 아니었기에 메카나 메디나 빼고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실제로 아라비아 지방을 정복한 역대 왕조들은 그냥 토착 제후들이 원래 하는 것처럼 자기 마을을 다스릴 수 있도록 했다. 고대에는 고대 예멘국가가 아라비아반도를 통치하였으며 570년에 출생한 꾸라이시Quraysh가家의 무함마드Muhammad가 7세기에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면서 사우디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609년 메카에 거주하던 무함마드는 메카 교외의 히라 산山(Mt. Hir)에 있는 동굴에서 명상생활에 들어갔다가 알라Allah의 계시를 받아 612년부터 알라를 유일신으로 설교하면서 이슬람교를 창시했는데, 622년 무함마드가 메카 지배층의 박해를 피해 추종자들과 메디나로 본거지를 옮긴 것을 히즈라Hijra라고 하며 이 해를 이슬람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무함마드는 메디나에서 신도들을 규합하여 630년 메카 함락에 성공했으며, 이후 그는 이슬람 공동체 ‘움마Ummah’를 설립하고 확장시켰다. 그 결과 아라비아 반도 전역의 부족들이 빠르게 이슬람교를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종족적 결합을 넘어서 ‘이슬람의 유대’를 지향하는 이슬람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근대
1744년 종교학자 무함마드 빈 압델 와하브Mohammad bin Abdel-Wahhab와 토후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Mohammad bin Saud가 동맹전선을 결성하고 와디하니파에 위치한 디리야 지역에 디리야 토후국(사우디아라비아 제1왕국)을 건설했다. 오스만 제국Osman Empire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실제로 약 40년 동안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토는 디리야 근처의 아주 조그만 땅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우드는 그 동안 칼을 갈며 병사들을 양성했고, 1780년대부터는 빠른 속도로 아라비아를 정복하여 1801년에 메카를, 1805년에는 메디나까지 정복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오스만 제국은 속주인 이집트 군대를 보내 1814년 전쟁을 선포하였고, 1818년 사우드 군은 패배하여 독립국가를 세우겠다는 꿈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나 사우드 가문은 독립국가를 세우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824년 파이잘 빈 투르키Faisal bin Turki가 다시 네지드 토후국(사우디아라비아 제2왕국)이라는 독립국가를 선포하고 아라비아 재정복을 시도하였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오스만 제국은 쇠약의 길을 걷고, 이 틈을 타 디리야 시절만큼은 아니더라도 웬만한 넓이의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우드 가문과 라이벌인 알-라쉬드Al-Rashid 가문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1891년에 멸망한다. 아라비아의 판도는 오스만의 지원을 받은 라시드 가문의 자발 샴마르에게 넘어갔다. 사우드 가문은 오스만령 이라크와 쿠웨이트로 도망가 후일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1902년 사우드 가문의 압둘 아지즈(Abdel-Aziz bin Abdelrahman Ibn Saud)가 하일 토후국으로부터 리야드 지방을 탈환해 리야드 토후국(사우디아라비아 제3왕국)이라는 세 번째 독립국가를 건설한다. 압둘 아지즈는 1913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알 하사 지역과 카티프를 빼앗아 영역을 확대했고, 1917년에 술탄을 자칭하며 국명을 리야드 토후국에서 네지드 술탄국으로 바꿨다. 이후 1921년에 하일 토후국을 완전히 병합한다. 한편 무함마드의 직계 후손인 하심Hashemite 가문의 후세인Hussein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으로부터 맥마흔 선언을 이끌어 아랍의 독립 약속을 받고, 1916년에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켰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후세인의 차남 압둘라를 요르단의 왕으로, 삼남 파이살을 이라크의 왕으로 각각 임명했으며, 후세인 본인은 메카와 메디나를 거점으로 한 헤자즈Hejaz 왕국의 왕이 되었다.그러나 후세인은 아랍 통일 왕국을 세워주겠다던 영국의 처음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1924년 스스로를 모든 무슬림의 칼리프로 선언했다. 이는 많은 반발을 불러왔고, 같은 해 결국 사우드 가문의 압둘 아지즈(Abdel-Aziz bin Abdelrahman Ibn Saud)가 후세인을 공격했다. 후세인은 키프로스를 거쳐 차남이 다스리던 요르단으로 도망갔고, 헤자즈의 왕위는 그의 장남 알리가 계승했으나 1년 만에 압둘 아지즈에게 정복당하고 이라크로 추방되었다. 압둘 아지즈는 네지드-헤자즈 이중 왕국을 다스리다가 1932년에 두 나라를 통합해 절대군주제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 왕국Kingdom of Saudi Arabia을 선포하고 초대 왕이 되었다. 1934년에는 아라비아 반도 남부의 아시르 지방을 합병하고 지금의 국경을 완성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은 오늘날까지 사우디 왕가 합법성의 초석이 되고 있는 정통 와하비즘Wahabism을 따르고 있는데, 와하비즘은 이슬람 4대 학파 중 하나인 한발리 학파(Hanbali School)에 기초, 일체의 해석을 배제하고 오로지 쿠란과 순나에 따른 정통 이슬람 사회를 구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말한다.
현대
사우디아라비아는 코란을 바탕으로 한 이슬람법인 샤리아Shari‘ah법을 국가의 기본법으로 하는 절대주의 국가이다. 왕족으로 구성된 왕실위원회와 종교지도자 회의가 국왕 선출 등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데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국왕은 왕실위원회와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국정을 수행한다.
이슬람법은 샤리아법과 규율(국무회의를 거쳐 제정되고 왕령으로 승인됨)로 대별되며, 사법부는 3심제도와 사법감찰위원회가 법원을 감독한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는 1992년 3월에 헌법을 대신할 국가기본법을 제정하고, 국민들이 국정운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정치개혁안을 대대적으로 발표하였다. 여기에는 샤리아에 기초한 기본법 제정, 지방분권을 위한 행정개혁, 황실자문기관 성격의 협의기구인 마즐리스알슈라Majlis Al Shura의 신설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특히 마즐리스알슈라는 그 간의 왕정체제의 획기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역사상 최초로 국민들이 국가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우디 왕국의 초대 국왕인 압둘아지즈가 1953년 사망하자 그의 아들 중 사우드Saud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통치능력의 부족으로 1964년 11월 폐위되고, 이복형제 파이잘(Faisal bin Abdel-Aziz)이 왕위를 계승하여 사우디 제3대 국왕으로 취임하였다. 파이잘은 대내적으로 기본법제정, 지방통치규정제정, 사법기구설립, 경제개발추진, 사회보장제도구축 등을 추구하여 사우디의 근대화를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인접한 아랍 국가들과의 유대를 강화하면서 사우디의 국제적 지위 향상에 공헌하였으며, 특히 제3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하여 1973년 OPEC의 석유금수조치를 주도하였다.
1975년 3월 파이잘이 조카에게 암살당하자, 이복동생 칼리드Khalid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였다가 1982년 6월 심장병으로 사망하였고, 이어 이복동생 파흐드Fahd 왕자가 제5대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1992년 3월 파흐드 국왕은 사우디의 정부체계, 자문회의(Majlis Al-Shura) 및 지방행정 등을 규정한 기본법(Basic Law) 제정에 관한 칙령을 공표하였다.
2005년 8월 파흐드 국왕이 서거하자 이복동생인 압둘라Abdullah 왕세제가 제6대 국왕에 취임하였고, 2015년 1월 압둘라 국왕 서거 후에는 살만(Salman bin Abdulaziz) 왕세제가 제7대 국왕으로 즉위하여 현재 사우디를 통치하고 있다.
사우디는 대외적으로 우경 중립의 비동맹중립정책을 표방하며 국제사회에서의 지위격상을 위해 친서방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1945년 유엔에, 1961년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였으며, 아라비아반도 내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걸프만협력위원회(Gulf Cooperation Council)를 1983년 5월 이 나라 주도로 창설하였다.
1932년에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이름으로 통합되기 이전에는 네지드 술탄국, 헤자즈 왕국 등 여러 왕국이 존재했었다. 이들은 터키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과 연합하여 터키군을 몰아냈다. 이들은 1927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승인받았다.
국왕
사우디아리비아의 국가원수이자 통수권자는 사실상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이며 국왕은 절대군주 및 왕정통치에 따라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실은 물론 국무國務와 국정國政까지 개입한다. 왕정 절대주의에 따라 수상도 따로 임명하지 않으며 의회도 갖추지 않았다. 모든 장관은 국왕의 형제나 조카 등 직계 왕족만이 임명된다. 국왕은 행정 외에도 군 통수권자 역할도 하기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군의 최고수장도 사실상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이다.
국왕은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행사하며, 종교의 수장을 겸직한다. 이슬람에 대한 대표성과 책임감을 강조하기 위해 1986년(파흐드 국왕 당시) 이후부터 ‘성스러운 2대 사원의 수호자(Custodian of the Two Holy Mosques)’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국왕이 왕세제직을 임명하거나 박탈할 수 있으며, 왕세제직은 종교 지도자회의(Ulama)와 왕족으로 구성된 왕실위원회 및 승계위원회(Allegiance Committee)의 승인으로 확정된다. 1992년 파흐드 국왕 칙령으로 왕권은 왕의 형제 외에도 직계 아들이 승계할 수 있도록 승계 범위가 확대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의 외교 정책은 기본적으로 친미이다. 1991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촉발된 걸프 전쟁 당시 미군의 이라크 침공의 전초 기지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미국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될 미군과 미 군사 시설 허용 여부를 둘러싼 사우디아라비아 왕정과 알 카에다 지도부 사이의 불협화음은 전통적인 협력 관계를 깨뜨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9·11테러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된다.
사우디가 대한민국과 단독으로 수교한 후 1970~80년대에 한국의 근로자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되었는데, 이들이 벌어온 외화는 한국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도 하였다. 9·11 테러 이래로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2006년 기준으로 캐나다와 멕시코의 뒤를 이은 세 번째 원유 공급원)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미국은 전 세계에 걸쳐 원유 탐사작업과 석유산업의 투자를 늘렸다. 미국에서는 전제주의 및 신정정치 속성의 사우디아라비아 체제를 용인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역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종교계와 국민 가운데 상당수는 점점 더 자국에 진출하는 미국을 배척하고 미국이 행사하는 영향력을 거부했다.
점진적인 개혁파였던 6대 압둘라 국왕은 사우디아라비아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의 올림픽 출전을 허용하고, 여성의 정치참여를 허가하며, 악명높은 종교경찰 무타와Mutawa 조직의 국장을 온건파로 바꾸는 등 개혁을 추진했다.
국정자문회의
왕정 중심 체제인 사우디에는 공화정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의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의회 기능을 하는 ‘국정자문회의(Majlis Ash-Shura)’를 설립 운영하고 있다. 국정자문회의는 국왕이 임명하는 의장 1명 및 의원 150명으로 구성된다. 임기는 4년으로 새로운 의회가 구성될 때는 신임 의원수가 전체 의원 수의 50% 이상이 되어야 하며, 의원들은 전직각료, 공무원, 의사, 기업인, 군인, 학자, 언론인 등 사회 각계 전문가 그룹에서 임명하는데, 2013년에는 총원의 20%인 30명을 여성에게 할당토록 규정을 개정하였다. 왕정 절대주의로 인해 참정권이 없기 때문에 선거도 존재하지 않다가 2005년에 최초로 지방 선거가 실시되었지만, 실례적인 정치적 기구로서의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국정자문회의는 경제 사회개발 정책심의, 법률 국제법 조약 등에 관한 심의 및 법의 해석, 정부 각 부처의 연차보고서 심의 기능을 갖고 있고 10명 이상의 의원 발의로 법률 제·개정 제안을 할 수 있다. 또한 정부 부처에서 자문위원회에 의견 검토를 요청하면 심의 의결해 각료회의로 송부하기도 한다.
위원회의 회의는 의장을 포함한 의원 3분의 2 이상 참석으로 열리고, 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된다.
내각
사우디는 국왕이 왕실위원회와 각료회의(Council of Minister)를 주재, 국정을 총괄한다.(파이잘 국왕 이래 국왕이 총리직 겸직) 현재 살만 국왕이 총리를 겸임하고 이복형제인 무그린 왕세제가 제1부총리, 무함마드 나이프 내무장관이 제2부총리 겸 제2왕세제에 임명되어 있다. 내각회의는 총리, 제1·2부총리, 23개 중앙부처 장관과 7명의 무임소장관 등 31명으로 구성된다. 국왕이 직접 내각과 군 주요 인사를 임명할 수 있다.
사법부
사우디의 법은 이슬람법인 샤리아sharia와 규율(regulations)로 구별된다. 이슬람에서는 국왕이 법률을 제정할 수 없고, 다만 알라Allah가 내려준 법을 집행하고 국민의 복지를 위해 필요한 사항을 시행하기 위해 규율을 제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샤리아와 규율이 상치될 때에는 샤리아가 우선한다. 규율은 왕국의 최고 집행기관인 국무회의를 거쳐 제정되고 왕령으로 승인된다.
샤리아는 네 가지 근거, 즉 꾸란Quran, 순나Sunna, 이즈마Izma, 끼야스Qiyas에서 비롯되었다. 이중 꾸란(이슬람 경전)이 가장 기초가 되고 중요한 원천이나, 판사가 판결을 할 때 보다 더 필요한 지침이 요구되는 경우 순나에서 인용할 수 있다. 순나는 무함마드의 언행을 본으로 하는 무슬림의 생활방식으로 하디스Hadith에 기록되어 있으며, 하디스는 9세기경 체계적으로 수집되었다. 이즈마나 끼야스는 꾸란이나 순나보다는 덜 중요한 것으로 이즈마는 꾸란이나 순나에 의해 직접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에 대해 종교학자들이 합의한 사항을 말하며, 끼야스는 앞의 세 가지 근거에 의해서도 명백한 판결이 불가능할 경우, 이에 대한 유추 해석을 의미한다.
사우디의 사법부 조직은 샤리아와 규율에 의거, 재판하는 3심의 법원이 있고, 사법감독위원회가 법원을 감독한다.
지방행정
사우디는 13개 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주지사는 왕실에서 임명한 왕자가 맡고 있다. 각 주는 내무부장관이 임명하는 정원 30명의 주자문위원회를 운영하고 있고, 지방행정자문회의(Municipality Council)는 우리의 지방의회에 해당하는 회의 기구이다. 전체 의석(1,184석)중 2분의 1에 해당하는 592석에 대해 2005년 2월부터 3단계에 걸쳐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하기로 하였고, 2005년 12월 선출직 의원 592명과 임명직 의원 592명으로 구성된 178개의 지방행정자문회의를 구성하였다. 이러한 지방행정자문회의 선거는 압둘라 전 국왕이 추진 중인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사우디 역사상 실시된 최초의 주민직접선거이며, 2015년 12월 지방선거부터는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되었다.
사우디는 세계 최대의 석유 부존 및 수출국으로, 석유부문이 정부 세입액의 약 80%를 차지하는 석유 의존형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고유가에 기인한 막대한 재정수입의 상당부분을 사회 인프라 및 석유화학, 전력, 담수시설, ICT 등 기간산업 분야에 투자하고, 제조업의 활성화를 통해 비석유부문 비중을 점차 늘려 나가는 산업 다변화 정책(Diversification)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외국인 기업에 대한 스폰서 제도, 자국인화 정책, 불공평한 조세제도 및 불공정 관행 등은 외국인의 투자유치에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우디는 석유 생산 이전에는 전통적인 유목과 무역에 의존하였으나, 1938년 석유를 생산한 이후에는 현대적 산업과 농업, 유목 및 가내 수공업이 병존하고 있으며, 1970년대 유류파동 이후 막대한 외화수입을 재원으로 활발한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였다. 특히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중화학공업 분야의 개발에 주력하고 있으며 인력개발을 위해 직업훈련, 해외연수 등으로 기술인력 확충에 노력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OPEC의 맹주적 존재이고, 석유 등의 천연자원의 채굴과 수출이 주요한 외화획득원(석유가 외화수입의 약 90%를 차지하고 있다)인 것 이외에, 이렇게 획득한 외화를 세계 각국에 투자, 운용하고 있다. 그리고 오일 머니를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도시 중 제다는 항구도시이며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제 수도이다. 예전엔 세계 최대의 산유국이었지만 2012년부터 러시아에 이은 2위. 2017년엔 미국이 1위로 올라설 추세이다. 그래도 OPEC(석유 수출국 기구)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이다. 비록 채굴량에서는 아주 약간 밀리게 됐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채굴 원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
이 나라는 한때 물이 귀하여 물 가격이 비싼 적이 있었으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다수의 담수공장을 지어 생수 값이 한국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 이러한 담수공장들의 대부분은 한국기업들이 완공한 것들이다. 그리고 경작지는 상당히 적어서 쌀은 대부분 수입한다.
1인당 GDP는 약 19,313달러(2016)로, 막대한 석유자원(2004년 기준 세계 수출량의 17.4%)을 보유한 나라답지 않게 낮은 편이다. 그나마 왕가가 막대한 부를 거머쥐고 있고 세계적으로 부의 불균형 분배가 극심한, 빈부격차가 엄청난 국가이다. 국가재정은 탄탄한데 국민들이 그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문제가 심화되자, 반反왕가 감정도 슬슬 높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석유가 많이 나오는 데다 생산단가도 OPEC 국가들 중 낮은 편에 속하기 때문에 유가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차지하는 입김은 매우 크며, 2014년 미국이 셰일가스shale gas를 본격적으로 생산하자 미국의 셰일가스 산업에 타격을 주기 위해 저유가 치킨런(어느 한 쪽도 양보하지 않고 극단적으로 치닫는 게임 방식)을 하기 시작하면서 2015년 초 유가가 엄청난 기세로 내려가고 있다. 그 결과 미국은 생산단가 아래로 내려가도 버티고 있지만 러시아와 다른 OPEC 회원국들이 디폴트 위기에 처하고 있다.
사우디는 막대한 부를 가졌으나 불합리한 소득분배 때문에, 그리고 와하비즘Wahhabism 방침이 국시인 나라지만 서방 세계와의 잦은 접촉으로 세속화되는 국민 때문에 사회가 불안하다. 2011년 ‘아랍의 봄’ 때 중동권 여기저기서 시위가 나고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본 사우드 왕가는 경악했고, 일시적으로 150조 원(1,330억 달러)이 넘는 거액을 뿌려 불만을 줄였다. 그리고 소득분배가 불합리하긴 하지만 끼니 걱정을 할 정도라는 말은 과장된 것이다.
사우디는 10인 이상 기업체에서 자국민의 취업우대를 하고 있다. 불이익을 받지 않으려면 3,000명 이상 기업체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 국적자를 30% 이상 의무적으로 채용해야 한다. 주권국가에서 당연한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비슷한 학력의 사우디아라비아 국적자와 외국인 이민자를 채용할 때 월급이 3~4배 차이난다는 걸 생각하면 전혀 당연한 게 아니다. 세금도 없고 집에서 놀고 먹어도 생존에 지장이 없는 이들이다 보니, 억지로 끌어내어 일을 시키려면 능력에 비해 상당한 고임금을 줘야 한다.
인구와 언어
2015년 2월 사우디 중앙통계국 발표에 의하면 사우디의 인구는 약 3,077만 명(사우디인 2,070만 명, 외국인 1,007만 명)이나, 매년 2.5~2.7%에 달하는 급속한 인구증가로 2020년에는 3,72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사우디의 공용어는 아랍어이다. 리야드, 젯다를 중심으로 한 많은 사우디인들은 기본적인 영어는 구사 가능하다. 아랍어를 구사하지 않더라도, 파키스탄이나 인도, 필리핀, 인도네시아, 중국 등 외국인 근로자가 많아 영어만으로도 생활이 지장이 없다.
종교
사우디는 종교의 자유가 없는 나라 중 하나로, 국민의 절대 다수 종교는 이슬람교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교의 발상지이고 수니파 이슬람교가 국교이며 건국 이념에서 “알라 외에는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이다.”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웃 종교는 존재할 수 없다. 이슬람교 종파에 따라 수니파가 전 인구의 90%를 차지하며, 시아파(이란이 다수를 차지)는 나머지 10%에 불과하다. 사우디 국민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무슬림에게 의무로 되어 있는 다섯 가지의 신앙적 기둥(신앙고백, 기도, 단식, 성지순례, 희사)을 필수적으로 이행하도록 되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교 이외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으며, 내국인은 물론이고 외국인들도 이슬람교 이외의 종교 집회가 금지된다. 사우디아라비아 국민은 이슬람교에서 타 종교로 개종하면 참수형을 당하거나 국외로 추방당하는 것,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그것이 계속 유보되면 참수형을 당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의 알베르트 타워 시계탑은 세계에서 가장 큰 시계이다. 시계의 지름이 46미터에 이른다. 뾰족탑과 그 밑부분에 거대한 스피커가 달려 있다. 이 시계는 하루 다섯 번에 걸친 무슬림의 의식 시간을 알려준다. 7킬로미터 밖에서도 아잔소리(이슬람의 의식을 알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교육과 언론
사우디에서는 전통적으로 꾸란의 교리에 기초한 이슬람교육이 종교의무로 간주된다. 1953년에 최초로 교육부가 설치되었고 1957년에는 리야드에 최초의 대학이 설립되었으며 이후 다수의 종합 대학교를 비롯한 상당수 초급 및 단과대학이 신설되어 현대적인 교육제도를 마련했다.
초등 6년, 중등 3년, 고등 3년, 대학 4년의 학제를 운영하고 있고, 의무교육은 만 6세부터 15세까지이며, 전 교육과정은 무상이다. 전 교육 과정에 이슬람(꾸란) 교리 등 종교교육 실시되고 여성교육은 유치원에서부터 분리되며, 음악 및 무용 등 이슬람 정서에 맞지 않는 분야는 교육에서 제외된다. 2015년 기준 25개 이상의 국립대학교가 설립되어 있고, 10여개 사립대학이 운영 중에 있다.
사우디에는 국영 라디오와 TV방송이 있으며 TV방송은 Channel 1TV(아랍어), Channel2 TV(영어, 일부 불어 뉴스)를 포함한 8개의 채널이 있고, 신문은 Al-Riyadh, Okaz, Al-Sharq Al-Awsat, Al-Jazeerah 등 다수의 아랍어 일간지와 Arab News, Saudi Gazette 등 2개의 영자 일간지가 발간되고 있다.
생활문화
사우디인들은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가족과 사회에 대한 의무감이 강하고, 남자는 위엄과 강인한 것을 중히 여겨 어려서부터 낙타경주, 승마 등을 가르치며 특히 가부장제로 남아선호 사상이 높은 편이다. 고온건조한 사막 등 척박한 환경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베두윈(유목민) 민족으로 무뚝뚝하고 거친 측면도 있으나,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순화되어 있어 정서면에서는 많이 안정적이다. 만사를 서두르지 않고 여유가 있으며, 자존심이 강하고 이슬람교가 아닌 이방인을 경계하여 정을 주지 않고 의심이 많은 편이나, 신의와 위신, 덕망, 친절, 선행을 중시하는 기질이 있다.
엄격하고 검소한 이슬람 교리와 사막의 전통적인 생활관습 영향으로 문화 생활은 거의 없으나, 생활수준 향상과 도시의 발달로 TV 등 대중매체를 통한 서구 문화 문물에 대한 접촉이 일반화되고 있다.
이슬람 보수가치를 중시하는 와하비즘의 영향으로 사회전반에 걸쳐 엄격한 이슬람계율을 요구하며 음악, 무용, 연극, 영화 등 오락 및 대중 예술은 허용하지 않으며, 학교 교과목에도 제외된다.
스포츠 행사시에도 남녀가 공동 집회를 할 수 없으며 대중음식점은 물론 공공장소에서는 남녀가 합석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으며, 여성들은 운전이 허용되지 않아 여성외부활동에 제약이 존재한다.
사우디의 사회관습
사우디는 이슬람 국가 중 가장 엄격한 이슬람 관습을 유지하고 있는 국가이다. 이슬람 전역에 걸쳐 간음과 매춘행위, 음주, 돼지고기 판매, 도박 등이 생활의 금기로 되어 있으며, 신앙생활을 해치는 가무나 요란한 음악, 영화 등은 허락하지 않고 있다. 학교에서도 음악, 무용 등의 교육과목이 전무하다.
매년 이슬람 히즈라력 9월(라마단월)은 무함마드가 지브릴(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꾸란을 최초로 계시받은 성스러운 달로 여겨지고 있으며, 한 달간은 고행과 수도의 달로서 해가 뜬 후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는 물, 음료, 담배 등 일절 음식물 섭취를 금지하고, 일몰 후에 식사를 하고 특별 예배를 보며 주로 야간에 활동을 한다. 라마단(금식월) 중에 외국인은 금식하는 아랍인 앞에서 음식을 먹거나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좋으며, 특히 거리에서의 흡연을 삼가고 기타 아랍인들의 종교생활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남녀간 내외를 엄격하게 지키므로 가족이 아닌 여자와 함께 다니거나, 여인의 사진을 찍거나 말을 거는 등 접근을 삼가야 한다. 또 왼손은 불결한 것에만 사용하고 깨끗한 일은 오른손으로 하기 때문에 악수를 한다거나 물건을 주고받거나 음식을 먹을 때에는 왼손을 사용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므로 주의해야 한다. 권유받은 선물이나 음료, 음식 등은 거절하지 않는 것이 좋으며 집으로 초대받았을 때에는 세 번 이상 거절하면 예의상 곤란하다.
옷차림은 남자들은 외출시 토브thobe라고 하는 하얀색의 전통복장과 구트라goutra라고 하는 흰 바탕에 붉은 체크무늬 또는 횐색 천을 머리에 두르며 여인들은 아바야abaya라고 하는 검정 겉옷을 입고, 검은색 스카프로 머리와 얼굴을 가린 후 외출한다. 외국 여인들도 아바야 착용이 의무적이다.
이슬람법에 있어 결혼은 모든 무슬림들의 의무사항이며, 이혼도 법적으로 허용되고 있다.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는 중매결혼이 원칙이며 사촌간의 근친결혼이 관습적이다. 민족이 다른 사람 간에도 양가의 합의와 결혼 당사자 간에 동의만 있으면 결혼이 가능하다. 법적으로 꾸란에 따라 1부 4처까지 허용되어 있으나 오늘날에는 1부 1처제의 경향으로 바뀌고 있다. 결혼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순결과 정절로 여성들은 몸가짐에 매우 조심하고 있다. 간통죄가 성립되려면 4명의 증인과 분명한 물증이 필요하고, 형벌은 기혼자인 경우 더욱 엄격하고 미혼자간의 경우는 태형을 받게 되며, 반드시 당사자 간에 결혼해야 한다.
음식과 예절
사우디에서는 개, 돼지, 맹수류, 맹금류, 파충류와 이슬람식으로 도살되지 않은 고기, 죽은 짐승의 고기와 피, 내장 등은 식음할 수 없다. 사우디인들은 샤이shai라고 부르는 홍차와 노란색 박하 향기의 차를 즐겨 마시며 손님 접대 시 아랍 커피 까흐와qahwah와 함께 차를 권유하는 것이 상례이다.
사우디인들은 윗사람을 매우 공경하고, 찾아오는 손님에 대해서는 극진하게 접대하는 것이 예의이며 미덕으로 간주하고 있다. 현지 속담에 “손님이 찾아오지 않는 집에는 천사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인적이 드문 사막의 생활환경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반갑고, 종교 예식상 공덕을 많이 쌓기 위한 문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역사적 관계
역사적으로 보아 우리나라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는 신라시대에서부터 비롯된다. 흔히 대식국大食國이라는 명칭으로 산견되는데, 물론 이 때의 대식국은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고 페르시아제국의 전 지역을 가리키지만 이미 신라시대부터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 지역과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신라와 고려를 거쳐 오랜 기간 교류가 있었던 이 지역과의 관계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활발히 전개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조선의 쇄국적인 대외정책에서도 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외교관계
우리나라는 1962년 10월 16일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하여 1973년 7월 주 사우디아라비아 한국대사관이 개설되어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으며, 주한 사우디아라비아 상주대사관은 1975년 4월에 개설되었다. 사우디는 유엔, 비동맹기구 등 국제무대에서 평화통일 정책 등 우리의 입장을 적극 지지해온 주요 우방국 중의 하나이며, 우리에게 제1위 원유 공급국으로서 중동지역 최대의 교역 대상국이다.
양국은 1998년 압둘라 왕세제 방한, 1999년 리야드 주지사인 살만 왕자(現 국왕)의 방한, 2000년 제2부총리 겸 국방장관인 술탄 왕자의 방한과 2005년 이해찬 국무총리와 2007년 노무현 대통령,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사우디 방문, 2014년 11월 G20 브리스번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 양국 정상회담 등 정상 교류를 통해 양국 우호협력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또한 1974년 경제 및 기술협력 협정을 시작으로 문화 항공 개발 국방 관광 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협정들이 꾸준히 체결되고 있다.
경제관계
사우디아라비아는 우리나라 최대의 원유공급국으로 우리나라 총 원유 수입량의 약 32.5%인 3억 배럴을 공급하고 있다(2014년 기준). 한-사우디 양국은 상호보완적인 경제 산업 구조와 수출입 거래를 바탕으로 중요한 교역 파트너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사우디는 우리의 제4대 교역국(2014)이며, 우리나라는 사우디의 제4대 교역국(2013)이다. 또한 1973년 사우디에 최초로 진출한 이래 우리나라는 2014년 현재까지 약 1,300억 달러를 수주하여 해외건설 진출(1966) 이후 전체 해외 수주 누계의 20%를 차지하면서 지속적으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양국 간 투자는 아직 상대적으로 미미한 실정이다. 2014년 기준으로 우리의 대對사우디 투자는 총 440건, 약 18억 달러이고, 사우디의 대對한 투자는 총 68건에 약 9억 달러 정도이다.
2014년 양국 간 교역은 450.1억 달러로 우리나라의 대對사우디 수출은 82.9억 달러, 수입은 367.2억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목으로는 승용차 건설중장비 선박 전선 변압기 타이어 차단기 화학기계 등이며, 주요 수입품목은 원유 석유제품 등 광물성 연료와 석유화학 원료 등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우리나라 건설사들이 1973년 최초 진출한 이래 2014년까지 누계 기준, 약 총 1,300억불 규모로 전체 우리기업 수주실적의 20%를 차지하는 최대 건설시장이다. 우리나라 건설사들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중반까지 매년 10~50억 달러 수준의 수주실적을 기록했으나, 1980년대 후반부터 유가하락에 따른 발주량 감소로 수주규모가 연간 1~2억 달러 수준으로 급감했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정유 석유화학, 담수 발전 플랜트 등을 중심으로 수주 실적이 증가하여 제2의 중동 붐을 경험하고 있으며, 최근 2014년에는 최근 수년간 투자하던 대규모 정유, 화학 플랜트 건설이 완료됨에 따라 수주 실적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한-사우디는 산업구조가 달라 양국 간 산업의 경합도가 크지 않은 관계로 자본 기술 등 비교우위요소를 상호 교류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양국 간 문화적 차이, 사우디의 교역기반 취약 등으로 인해 실질적 협력은 아직 활발하지 못한 상태이다.
우리나라는 1975년 사우디아라비아와 문화협정을 체결하고, 문화, 교육 분야 교류 증진을 위해 노력 중이다. 사우디는 2000년대 중반 이후 세계 각국과의 문화교류 강화정책을 추진하고 특히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어 양국 간 문화분야 교류는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밖에 청소년 분야와 방송 언론 분야에서도 양국 간에는 상호 교류가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재외국민 실태
사우디아라비아는 영주권 제도가 없다. 따라서 사우디 내 교민은 대부분이 체류자로 분류되며, 주로 자영업, 건설업 관련 현지기업체에 취업 중이다. 주재국 대도시(리야드, 쥬베일, 담맘, 얀부, 라빅, 지잔 등) 인근 공사 현장에서 건설 및 플랜트 관련 업종에 종사하며(공사기간에 따라 체류기간 수시 변동), 특히 동부지역의 재외동포는 건설관련 인력이 대다수이다.
1970~1980년대 초반 우리기업들의 대규모 진출로 한때 10만 명 이상의 근로자 및 가족들이 체류하였으나, 1980년대 중반 이후 사우디 내 건설경기 퇴조의 영향으로 우리 건설업체들의 철수가 이어짐에 따라 체류 국민도 급감하고(2003년 기준 약 1,200명) 정체상태에 머물렀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후 석유가격의 상승 및 사우디 내 우리 기업의 건설수주 확대 등에 기인하여 2010년부터 교민수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건설 경기에 따라 증감을 반복하고 있는 추세이다.
2014년 12월 기준으로 사우디에 있는 재외국민은 리야드 및 중부지역, 담맘 및 동부지역, 제다 및 서부지역을 합하여 총 5,215명(장기 거주 동포 1,250명, 지상사 주재원 및 단기 거주 동포 3,965명)으로 집계되었다. 사우디에 진출해 있는 우리나라 기업은 2015년 1월 기준으로 지상사 9개, 건설업 79개, 제조업 33개, 도매 및 소매업 외 기타 36개 업체 등이다.
예를 들어 사우디아라비아를 지배하는 사우드 왕가는 18세기 주창된 ‘와하비즘’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운다. ‘와하비즘’이란 “이슬람 초기의 순수한 무슬림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합’의 주장을 발전시킨 교리다. 사우드 왕가는 당시 자신의 주장 때문에 고향에서 쫓겨난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합’을 거둬들여 그를 후원해 준 다리아 지역의 족장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에서부터 시작됐다.
눈여겨 볼 점은 이런 ‘와하비즘’이 사우디아라비아 왕조의 통치이념이기도 하지만, 테러조직 ‘알 카에다’와 ‘대쉬’, ‘무슬림 형제단’이 주장하는 내용과도 일맥상통한다는 점이다. 수니파 무슬림 가운데 의외로 많은 수가 이런 주장에 동조한다. 꾸란과 함께 무함마드의 언행록(하디스), 무슬림의 전통 율법(샤리아), 이슬람 성직자의 유권해석(파트와)만을 믿고 따라야 하며, 서방 국가에서 나온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 천부인권, 자유, 평등을 모두 물리쳐야 한다는 주장 또한 이런 ‘와하비즘’이 퍼지면서 나온 것이다.
20세기 들어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여전하다. 수니파는 서방적인 ‘신정분리’ 원칙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고, 시아파 국가인 이란은 ‘신정일치’ 국가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속살을 들여다보면, 수니파 무슬림 국가에서는 민주주의, 시장경제, 천부인권, 양성평등 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반면 시아파 무슬림 국가 또는 조직에서는 오히려 천부인권과 양성평등이 잘 보장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외교관계 단절로까지 이른 중동의 숙적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오랜 갈등은 두 나라가 각각 이슬람 양대 종파인 수니파와 시아파의 맹주라는 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지난 1월 3일 선언한 이란과의 단교 방침도 사우디아라비아가 ‘셰이크 님르 바크르 알님르’ 등 시아파 유력인사를 처형하고, 이에 화가 난 시아파 이란 국민들이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과 총영사관을 공격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이슬람 수니파의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란이 맹주인 시아파 유력인사를 처형한 것은 이란과의 충돌과 유혈사태를 뻔히 예견한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두 나라의 갈등은 일파만파 퍼져, 중동의 이슬람 종파 간의 갈등으로까지 확대됐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우호적인 수니파 이슬람 국가들도 이란과 외교 단절에 동참했다.
중동 최대의 산유국들인 양국의 대립이 지리적으로 세계 최대의 원유 수송망과 겹치고 있다는 점에서 자칫 국제 원유시장에 큰 위기를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상당수 관련 업계 전문가들은 현재 국제 원유시장은 사우디아라비아-이란 관계 악화에도 불구하고 공급 과잉상태로 유가가 급등할 가능성은 없지만, 핵심 원유 수송로인 사우디아라비아 동부와 호르무즈 해협 등에 이번 사태로 인한 변수가 발생할 경우 예상 밖의 큰 파장이 일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생산하는 하루 1,030만 배럴의 원유 가운데 대부분이 이들 시아파 거주 지역을 지나고 있다. 현재 국제 원유시장의 재고량은 기록적 수준이지만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하면 여분의 능력이 전무한 상태이다.
유가 폭락에 원자재에 의존하는 자원 신흥국들도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취약 신흥국으로 꼽혀온 국가들의 통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당국의 환율 방어에도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들 국가의 경제적ㆍ정치적 위험을 정량화하긴 어렵다면서도 원유 수출국들의 위험이 커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최대 석유매장량을 자랑하는 나라이지만, 유가 하락에 경기가 계속 추락하면서 경제가 붕괴 직전이다. 인플레이션은 작년 150%를 넘어섰고, 올해는 200%를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는 채권을 갚을 여력이 없고, 심지어 음식과 기초생활용품마저 공급이 달리는 상황이다. 이처럼 두 국가의 갈등이, 중동을 넘어 세계시장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이슬람의 경전은 쿠란(코란)이며, 이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천사 지브릴(가브리엘)로부터 받은 알라의 말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이슬람의 대표적인 종파로는 전체 무슬림의 80~90%를 차지하는 수니파와 이란이 대표하는 시아파가 있다. 시아파는 10~20%를 차지한다. 발칸 반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의 무슬림들은 수피 무슬림들이 많다. 수니파 내에서 무슬림 모두는 동질 의식을 가지나, 다른 종파 간에는 보이지 않는 불신이 있다.
이슬람에는 교리가 상반되는 200여 개의 종파가 있다. 그 중 주류는 수니파이다. 전 세계 무슬림의 83% 이상이 수니파에 속한다. 그 외에는 16%의 시아파와 시아파와 수니파에 섞여 있는 수피파, 그리고 이바디파 등 여러 종파들이 존재한다.
수니파 수니파(Sunni)는 무슬림 공동체 즉 움마의 "순나(Sunnah, 관행)"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순나(관행)"는 쿠란ㆍ하디스ㆍ예언자와 정통 칼리파의 선례에 바탕을 두고 있다. 4대 법학파(하나피ㆍ말리크ㆍ샤피이ㆍ한발리)로 나뉜다.
시아파 시아파(Shia|)는 빼앗긴 칼리파 자리를 살해당한 알리 가문에 되돌려주려는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시아(Shia)"는 "시아 알리(Shia Ali)", 즉 "알리를 따르는 사람들"에서 나온 명칭이다.
카와리즈파 무함마드 사망 25년 뒤, 칼리파 우스만 이븐 아판이 살해당하자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이하 ‘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우스만의 6촌인 다마스쿠스 총독 무아위야 1세는 알리가 우스만의 복수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다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내란 속에서 알리 지지자들은 주전파와 협상파로 갈라졌다. 그중 주전파는 절대신 알라만이 중재할 수 있고 인간은 현 상황에서 계속 싸워야 한다면서 알리 진영을 떠났다. 이들이 이슬람 역사상 최초의 종파 카와리즈파(Khawārij, 탈퇴자)이다.
카와리즈파는 전투적인 행동주의자여서, 지하드(jihad, 주로 "성전"으로 번역한다)를 여섯 번째 ‘신앙의 기둥’으로 삼았다. 661년 이들은 알리를 살해했다. 카와리즈파는 메카의 부족 쿠라이시의 자손만이 칼리파가 될 수 있다는 수니파의 전통적 견해를 비난하고, 독실한 무슬림이면 누구나 칼리파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민 평등주의적 입장과 아랍 귀족층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베드윈과 비아랍계 무슬림 추종자를 얻을 수 있었지만 내분으로 뒷날 저절로 약화됐다. 현재는 알제리와 튀니지의 베르베르 지역,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와 아라비아 반도의 오만에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의 청교도적인 정신은 18세기 사우디아라비아 건국의 기반이 된 와하브Wahhab 운동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수니파와 시아파 대립의 계기 수니파와 시아파가 대립하게 된 계기는 이슬람을 창시한 무함마드의 ‘후계자’ 선정에 대한 기준이 달라서다. 632년 사망한 무함마드는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다. 슬하에는 아들도 없었다. 이때 무슬림들은 무함마드의 조력자인 ‘아부 바크르’를 2대 교주로 추대한다. 교주의 명칭은 ‘칼리프’로 현재 테러조직 ‘대쉬(ISIS)’가 그들의 두목을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아부 바크르’를 추대한 사람들은 “무슬림은 ‘순나(꾸란에 명시된 내용과 무함마드가 살아 있을 때 내린 명령)’를 철저히 지키며 살면 된다”는 주장을 편다. 이 ‘순나’를 따르며 살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바로 수니파다.
반면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시아트 알리’를 추종하던 세력들은 무함마드의 혈통만이 이슬람의 교주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시아트 알리’를 ‘칼리프’로 추대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때 ‘시아트 알리’는 ‘칼리프’의 추대를 지지했다고 한다.
‘칼리프’ 선출에 대한 시아파의 반발은 극렬했다. 2대 교주인 ‘아부 바크르’가 양 계파 사이의 암투 과정에서 암살을 당한 것이다. 이후 2명의 ‘칼리프’가 추대됐지만 얼마 못가 암살당했다.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는 5대 교주가 된다.
수니파는 종교지도자인 ‘칼리프’라도 잘못하면 탄핵이 가능하고, ‘이맘(무슬림 성직자)’은 종교적 안내자일 뿐으로, 누구나 될 수 있는 ‘임무’에 불과하다고 여긴 반면,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혈통만이 ‘칼리프’와 ‘이맘’이 될 수 있으며, 이는 ‘신의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시아파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맘은 오류가 없다’거나 이미 사망한 ‘알리’가 나중에 세상을 구할 구세주(마디)로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니파는 기도를 할 때 “알라 이외에 신은 없고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이다”라는 문구만 읊지만, 시아파는 “또한 알리는 신의 벗이다”라는 구절을 추가하는 점에서도 양측의 차이를 알 수 있다.
무슬림 종파별 세계 분포를 보면 세계 16억 무슬림 인구 가운데 90% 가량이 수니파다. 그리고 9% 가량이 시아파로 알려져 있다. 수니파 무슬림 국가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인도네시아, 이집트, 수단, 리비아, 차드, 오만, 아랍에미리트연합, 터키, 파키스탄, 말레이시아, 나이지리아(북부), 소말리아 등이 있다. 시아파 무슬림 국가로는 이란이 대표적이며, 아프가니스탄, 이라크(남부), 예멘, 시리아, 아제르바이잔, 레바논 등이 있다. 걸프협력회의(GCC) 회원국인 바레인이나 이라크의 경우 집권 왕족은 수니파이지만, 국민들 70% 이상이 시아파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식당이나 쇼핑몰에 가족이 아닌 남녀가 같이 입장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은 증명서를 가진 가족이 함께여야 입장을 허락하는 곳이 대다수이다. 또 패스트푸드점은 남성과 여성의 주문을 따로 받아 성별에 따라 줄이 만들어지는 특이한 광경을 볼 수 있다. 여성은 혼자서 병원에 갈 수도 없다. 의사와 신체접촉이 필요한 진료는 아버지나 남성 보호자가 함께여야 가능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이란 영화는 유명하며 중동의 다른 나라 영화도 영화제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영화제작을 떠나 상영 자체가 허가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 국민들은 집에서 DVD를 보거나 레스토랑에서 틀어주는 영화를 보는 것이 전부이다. 서구에서처럼 영화배우나 연예인이 우상시 되는 것이 종교교리에 어긋나기도 하지만 극장에서의 남녀 접촉이 영화관을 금지하는 이유이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술 역시 남녀 간의 문제나 부도덕한 해의의 매개체라는 이유로 금지되고 있으며 많은 사우디아라비아 국민들은 주말에 술과 영화를 즐기기 위해 이웃인 바레인으로 떠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랍권 국가 중 최초로 발렌타인데이를 공식적으로 금지하였다. 그 외에도 초콜릿이나 꽃, 사탕, 붉은 색이 들어간 제품이 발렌타인데이 기간 동안 판매 금지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 식품인증인 할랄 인증을 받은 식품만이 수입통관된다. 100%의 국민이 무슬림이기에 돼지고기의 반입은 신성모독으로 다루어진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이슬람교 이외의 어떤 종교도 금지되고 있으며 내국인이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은 불법이다. 이슬람교를 버리거나 개종하면 사형에 처한다. 다른 이슬람국가들도 돼지고기를 금지하고 있지만 비이슬람 국민을 위해 완전 금수조치는 하지 않는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음악 산업을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지만 음악 수업을 하는 학교는 찾아볼 수 없으며 여성은 기상캐스터가 될 수도 없다. 이슬람 율법에 의해 노래는 금지되며 쇼핑몰에 있는 레코드 가게에서 음약을 틀 수 없다. 음악가나 가수가 되고 싶다면 일대일 교습을 받거나 해외 유학을 해야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45세 미만의 여성이 정부의 허가 없이 여행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45세가 되면 이 금지는 해제가 되지만 그 나이에는 여건상 여행을 할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45세 미만의 여성은 남편이나 아버지와 함께 여행하거나 다른 남성 후견인의 보증을 받아야 할 수 있다. 또 여성에게 운전면허증을 발급하지 않기 때문에 여성의 자동차 운전이 금지된 것과 같다.
2012년 런던 올림픽은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여성 선수를 참가시킨 최초의 올림픽이었다. 이 말은 그동안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여성으로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가 없다는 뜻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는 달마 말하스라는 올림픽에 참가할 만한 유일한 여성 선수가 있었는데 1992년 생인 이 여성은 싱가폴에서 열린 2010년 유스 올림픽 승마 장애물 경기에 참가하여 동매달을 수상했다. 이것이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이 국제대회에서 수상한 최초의 기록이다.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어:السعودية앗수디야/앗사우디야[*]; as-Su‘ūdiyyah 또는 as-Sa‘ūdiyyah)는 중동에 있는 전제군주국이다. 서아시아에서 가장 큰 아랍국가이고 아랍권에서는 두 번째로 큰 나라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영토 면적이 2,149,690㎢로 한반도의 10배, 대한민국의 21배 크기이며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차지한다. 해안선의 길이는 2640㎞이다. 사우디의 정치 및 행정 수도는 리야드Riyadh이고 하계수도는 사우디 왕실의 휴양지로 알려진 타이프Taif이다. 북쪽으로 이라크와 요르단, 북동쪽으로 쿠웨이트, 동쪽으로 카타르, 바레인, 아랍에미리트와 국경이 붙어있고 남쪽에 예멘과 오만이 있다.사우디아라비아의 지형은 대부분 사막이다. 아라비아반도 서부의 홍해 쪽에는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헤자즈 산맥이 길게 뻗어 있고, 이 산맥에서 북동 방향으로 완만히 경사가 낮아지다가 중앙부에 길게 뻗은 네지드 고원이 나타난다. 이 고원 상에 네푸드 사막과 다하나 사막이 펼쳐지며, 북동쪽으로 점차 경사가 낮아져 페르시아만 연안의 하사 지방에 이른다. 고원과 연결된 남부에는 ‘허무의 사막’으로 부르는 룹알할리 대사막(65만㎢)이 있다. 강이나 호수 대신 강우기에 물이 흐르는 와디가 나타나며 건조한 사막에 비해 연안지방은 습도가 높다.
이처럼 국토 대부분이 모래나 자갈로 덮여 있는 사막지대로 토양은 척박하며, 전체 면적 2,149,690㎢ 중에서 경작가능지 1.67%, 농경지 0.09%, 사막 기타 98.24%(2005년)이며 경지의 0.5% 정도가 관개에 의존하고 있다. 자연 재해로는 모래폭풍과 먼지폭풍이 자주 발생한다. 기후는 비교적 습윤한 남부 아시르 지방, 서부 산악·초원지대, 국토의 95%를 차지하는 사막지대로 삼분된다. 전체적으로 사막기후이며 오아시스가 산재한다.
대부분의 지역은 건조 기후이다. 가장 추운 달은 12~1월이다. 겨울 평균기온은 14~23℃이며 이때의 날씨는 한국의 가을 날씨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겨울철의 경우 모랫바람이 불지 않아 공기가 맑고 비가 오는 날이 많다. 비가 오는 날이면 온도가 급격히 떨어져 ‘파르와’라는 사우디의 전통 겨울 외투가 반드시 필요하다. 여름은 폭서가 나타나 38℃가 넘고 종종 54℃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식생은 대추야자가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자생나무이며, 그외 약간의 목초와 관목이 자란다. 계절에 무관하게 햇살이 강한 날이 많아, 선글라스·선크림이 필수적이다. 가장 더운 달은 6~7월이다. 햇빛으로부터 몸을 보호하지 않으면 100미터도 걸어가기 힘든 기후이다. 이때 밤의 온도는 30도 정도, 일교차는 보통 30도 이상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경작지의 비율이 낮아서 주식인 쌀은 거의 수입한다. 일반적인 지질은 황토 모양의 흙이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모래보다 가늘고 미세해서 가벼운 바람에도 날라가는 정도의 고운 흙이라고 보면 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역사
고대 및 중세아랍족의 발상지는 중앙아라비아와 북아라비아이며, 사우디아라비아 동부에서는 BCE(기원전) 4~5천 년 전에 이라크 남부에서 이주하여 거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약 500년경 나바트인(Nabateans)들이 메데인 살레Madain Saleh(사우디 타북Tabuk 남쪽 160km 지점)를 주요 거점으로 아라비아 반도 북부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지역은 국토의 거의 대부분이 황량한 사막(아시아 최대의 사막인 룹알할리 사막과 네푸드 사막, 다흐나 사막 등)과 구릉지역이고 인구도 별로 없어서 통일된 국가가 성립된 적이 없었다. 우마이야 왕조, 압바스 왕조, 페르시아, 남부 해안지대에 번성하던 토후국들, 오스만 제국 등등 이 지역을 지배했다고 할 수 있는 국가들은 있었으나 별로 비옥한 땅이 아니었기에 메카나 메디나 빼고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실제로 아라비아 지방을 정복한 역대 왕조들은 그냥 토착 제후들이 원래 하는 것처럼 자기 마을을 다스릴 수 있도록 했다. 고대에는 고대 예멘국가가 아라비아반도를 통치하였으며 570년에 출생한 꾸라이시Quraysh가家의 무함마드Muhammad가 7세기에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면서 사우디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609년 메카에 거주하던 무함마드는 메카 교외의 히라 산山(Mt. Hir)에 있는 동굴에서 명상생활에 들어갔다가 알라Allah의 계시를 받아 612년부터 알라를 유일신으로 설교하면서 이슬람교를 창시했는데, 622년 무함마드가 메카 지배층의 박해를 피해 추종자들과 메디나로 본거지를 옮긴 것을 히즈라Hijra라고 하며 이 해를 이슬람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무함마드는 메디나에서 신도들을 규합하여 630년 메카 함락에 성공했으며, 이후 그는 이슬람 공동체 ‘움마Ummah’를 설립하고 확장시켰다. 그 결과 아라비아 반도 전역의 부족들이 빠르게 이슬람교를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종족적 결합을 넘어서 ‘이슬람의 유대’를 지향하는 이슬람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근대
1744년 종교학자 무함마드 빈 압델 와하브Mohammad bin Abdel-Wahhab와 토후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Mohammad bin Saud가 동맹전선을 결성하고 와디하니파에 위치한 디리야 지역에 디리야 토후국(사우디아라비아 제1왕국)을 건설했다. 오스만 제국Osman Empire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실제로 약 40년 동안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토는 디리야 근처의 아주 조그만 땅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우드는 그 동안 칼을 갈며 병사들을 양성했고, 1780년대부터는 빠른 속도로 아라비아를 정복하여 1801년에 메카를, 1805년에는 메디나까지 정복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오스만 제국은 속주인 이집트 군대를 보내 1814년 전쟁을 선포하였고, 1818년 사우드 군은 패배하여 독립국가를 세우겠다는 꿈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나 사우드 가문은 독립국가를 세우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824년 파이잘 빈 투르키Faisal bin Turki가 다시 네지드 토후국(사우디아라비아 제2왕국)이라는 독립국가를 선포하고 아라비아 재정복을 시도하였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오스만 제국은 쇠약의 길을 걷고, 이 틈을 타 디리야 시절만큼은 아니더라도 웬만한 넓이의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우드 가문과 라이벌인 알-라쉬드Al-Rashid 가문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1891년에 멸망한다. 아라비아의 판도는 오스만의 지원을 받은 라시드 가문의 자발 샴마르에게 넘어갔다. 사우드 가문은 오스만령 이라크와 쿠웨이트로 도망가 후일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1902년 사우드 가문의 압둘 아지즈(Abdel-Aziz bin Abdelrahman Ibn Saud)가 하일 토후국으로부터 리야드 지방을 탈환해 리야드 토후국(사우디아라비아 제3왕국)이라는 세 번째 독립국가를 건설한다. 압둘 아지즈는 1913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알 하사 지역과 카티프를 빼앗아 영역을 확대했고, 1917년에 술탄을 자칭하며 국명을 리야드 토후국에서 네지드 술탄국으로 바꿨다. 이후 1921년에 하일 토후국을 완전히 병합한다. 한편 무함마드의 직계 후손인 하심Hashemite 가문의 후세인Hussein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으로부터 맥마흔 선언을 이끌어 아랍의 독립 약속을 받고, 1916년에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켰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후세인의 차남 압둘라를 요르단의 왕으로, 삼남 파이살을 이라크의 왕으로 각각 임명했으며, 후세인 본인은 메카와 메디나를 거점으로 한 헤자즈Hejaz 왕국의 왕이 되었다.그러나 후세인은 아랍 통일 왕국을 세워주겠다던 영국의 처음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1924년 스스로를 모든 무슬림의 칼리프로 선언했다. 이는 많은 반발을 불러왔고, 같은 해 결국 사우드 가문의 압둘 아지즈(Abdel-Aziz bin Abdelrahman Ibn Saud)가 후세인을 공격했다. 후세인은 키프로스를 거쳐 차남이 다스리던 요르단으로 도망갔고, 헤자즈의 왕위는 그의 장남 알리가 계승했으나 1년 만에 압둘 아지즈에게 정복당하고 이라크로 추방되었다. 압둘 아지즈는 네지드-헤자즈 이중 왕국을 다스리다가 1932년에 두 나라를 통합해 절대군주제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 왕국Kingdom of Saudi Arabia을 선포하고 초대 왕이 되었다. 1934년에는 아라비아 반도 남부의 아시르 지방을 합병하고 지금의 국경을 완성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은 오늘날까지 사우디 왕가 합법성의 초석이 되고 있는 정통 와하비즘Wahabism을 따르고 있는데, 와하비즘은 이슬람 4대 학파 중 하나인 한발리 학파(Hanbali School)에 기초, 일체의 해석을 배제하고 오로지 쿠란과 순나에 따른 정통 이슬람 사회를 구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말한다.
현대
사우디아라비아는 코란을 바탕으로 한 이슬람법인 샤리아Shari‘ah법을 국가의 기본법으로 하는 절대주의 국가이다. 왕족으로 구성된 왕실위원회와 종교지도자 회의가 국왕 선출 등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데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국왕은 왕실위원회와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국정을 수행한다.
이슬람법은 샤리아법과 규율(국무회의를 거쳐 제정되고 왕령으로 승인됨)로 대별되며, 사법부는 3심제도와 사법감찰위원회가 법원을 감독한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는 1992년 3월에 헌법을 대신할 국가기본법을 제정하고, 국민들이 국정운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정치개혁안을 대대적으로 발표하였다. 여기에는 샤리아에 기초한 기본법 제정, 지방분권을 위한 행정개혁, 황실자문기관 성격의 협의기구인 마즐리스알슈라Majlis Al Shura의 신설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특히 마즐리스알슈라는 그 간의 왕정체제의 획기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역사상 최초로 국민들이 국가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우디 왕국의 초대 국왕인 압둘아지즈가 1953년 사망하자 그의 아들 중 사우드Saud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통치능력의 부족으로 1964년 11월 폐위되고, 이복형제 파이잘(Faisal bin Abdel-Aziz)이 왕위를 계승하여 사우디 제3대 국왕으로 취임하였다. 파이잘은 대내적으로 기본법제정, 지방통치규정제정, 사법기구설립, 경제개발추진, 사회보장제도구축 등을 추구하여 사우디의 근대화를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인접한 아랍 국가들과의 유대를 강화하면서 사우디의 국제적 지위 향상에 공헌하였으며, 특히 제3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하여 1973년 OPEC의 석유금수조치를 주도하였다.
1975년 3월 파이잘이 조카에게 암살당하자, 이복동생 칼리드Khalid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였다가 1982년 6월 심장병으로 사망하였고, 이어 이복동생 파흐드Fahd 왕자가 제5대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1992년 3월 파흐드 국왕은 사우디의 정부체계, 자문회의(Majlis Al-Shura) 및 지방행정 등을 규정한 기본법(Basic Law) 제정에 관한 칙령을 공표하였다.
2005년 8월 파흐드 국왕이 서거하자 이복동생인 압둘라Abdullah 왕세제가 제6대 국왕에 취임하였고, 2015년 1월 압둘라 국왕 서거 후에는 살만(Salman bin Abdulaziz) 왕세제가 제7대 국왕으로 즉위하여 현재 사우디를 통치하고 있다.
사우디는 대외적으로 우경 중립의 비동맹중립정책을 표방하며 국제사회에서의 지위격상을 위해 친서방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1945년 유엔에, 1961년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였으며, 아라비아반도 내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걸프만협력위원회(Gulf Cooperation Council)를 1983년 5월 이 나라 주도로 창설하였다.
1932년에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이름으로 통합되기 이전에는 네지드 술탄국, 헤자즈 왕국 등 여러 왕국이 존재했었다. 이들은 터키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과 연합하여 터키군을 몰아냈다. 이들은 1927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승인받았다.
정치 및 행정
국왕
사우디아리비아의 국가원수이자 통수권자는 사실상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이며 국왕은 절대군주 및 왕정통치에 따라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실은 물론 국무國務와 국정國政까지 개입한다. 왕정 절대주의에 따라 수상도 따로 임명하지 않으며 의회도 갖추지 않았다. 모든 장관은 국왕의 형제나 조카 등 직계 왕족만이 임명된다. 국왕은 행정 외에도 군 통수권자 역할도 하기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군의 최고수장도 사실상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이다.
국왕은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행사하며, 종교의 수장을 겸직한다. 이슬람에 대한 대표성과 책임감을 강조하기 위해 1986년(파흐드 국왕 당시) 이후부터 ‘성스러운 2대 사원의 수호자(Custodian of the Two Holy Mosques)’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국왕이 왕세제직을 임명하거나 박탈할 수 있으며, 왕세제직은 종교 지도자회의(Ulama)와 왕족으로 구성된 왕실위원회 및 승계위원회(Allegiance Committee)의 승인으로 확정된다. 1992년 파흐드 국왕 칙령으로 왕권은 왕의 형제 외에도 직계 아들이 승계할 수 있도록 승계 범위가 확대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의 외교 정책은 기본적으로 친미이다. 1991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촉발된 걸프 전쟁 당시 미군의 이라크 침공의 전초 기지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미국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될 미군과 미 군사 시설 허용 여부를 둘러싼 사우디아라비아 왕정과 알 카에다 지도부 사이의 불협화음은 전통적인 협력 관계를 깨뜨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9·11테러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된다.
사우디가 대한민국과 단독으로 수교한 후 1970~80년대에 한국의 근로자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되었는데, 이들이 벌어온 외화는 한국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도 하였다. 9·11 테러 이래로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2006년 기준으로 캐나다와 멕시코의 뒤를 이은 세 번째 원유 공급원)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미국은 전 세계에 걸쳐 원유 탐사작업과 석유산업의 투자를 늘렸다. 미국에서는 전제주의 및 신정정치 속성의 사우디아라비아 체제를 용인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역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종교계와 국민 가운데 상당수는 점점 더 자국에 진출하는 미국을 배척하고 미국이 행사하는 영향력을 거부했다.
점진적인 개혁파였던 6대 압둘라 국왕은 사우디아라비아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의 올림픽 출전을 허용하고, 여성의 정치참여를 허가하며, 악명높은 종교경찰 무타와Mutawa 조직의 국장을 온건파로 바꾸는 등 개혁을 추진했다.
국정자문회의
왕정 중심 체제인 사우디에는 공화정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의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의회 기능을 하는 ‘국정자문회의(Majlis Ash-Shura)’를 설립 운영하고 있다. 국정자문회의는 국왕이 임명하는 의장 1명 및 의원 150명으로 구성된다. 임기는 4년으로 새로운 의회가 구성될 때는 신임 의원수가 전체 의원 수의 50% 이상이 되어야 하며, 의원들은 전직각료, 공무원, 의사, 기업인, 군인, 학자, 언론인 등 사회 각계 전문가 그룹에서 임명하는데, 2013년에는 총원의 20%인 30명을 여성에게 할당토록 규정을 개정하였다. 왕정 절대주의로 인해 참정권이 없기 때문에 선거도 존재하지 않다가 2005년에 최초로 지방 선거가 실시되었지만, 실례적인 정치적 기구로서의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국정자문회의는 경제 사회개발 정책심의, 법률 국제법 조약 등에 관한 심의 및 법의 해석, 정부 각 부처의 연차보고서 심의 기능을 갖고 있고 10명 이상의 의원 발의로 법률 제·개정 제안을 할 수 있다. 또한 정부 부처에서 자문위원회에 의견 검토를 요청하면 심의 의결해 각료회의로 송부하기도 한다.
위원회의 회의는 의장을 포함한 의원 3분의 2 이상 참석으로 열리고, 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된다.
내각
사우디는 국왕이 왕실위원회와 각료회의(Council of Minister)를 주재, 국정을 총괄한다.(파이잘 국왕 이래 국왕이 총리직 겸직) 현재 살만 국왕이 총리를 겸임하고 이복형제인 무그린 왕세제가 제1부총리, 무함마드 나이프 내무장관이 제2부총리 겸 제2왕세제에 임명되어 있다. 내각회의는 총리, 제1·2부총리, 23개 중앙부처 장관과 7명의 무임소장관 등 31명으로 구성된다. 국왕이 직접 내각과 군 주요 인사를 임명할 수 있다.
사법부
사우디의 법은 이슬람법인 샤리아sharia와 규율(regulations)로 구별된다. 이슬람에서는 국왕이 법률을 제정할 수 없고, 다만 알라Allah가 내려준 법을 집행하고 국민의 복지를 위해 필요한 사항을 시행하기 위해 규율을 제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샤리아와 규율이 상치될 때에는 샤리아가 우선한다. 규율은 왕국의 최고 집행기관인 국무회의를 거쳐 제정되고 왕령으로 승인된다.
샤리아는 네 가지 근거, 즉 꾸란Quran, 순나Sunna, 이즈마Izma, 끼야스Qiyas에서 비롯되었다. 이중 꾸란(이슬람 경전)이 가장 기초가 되고 중요한 원천이나, 판사가 판결을 할 때 보다 더 필요한 지침이 요구되는 경우 순나에서 인용할 수 있다. 순나는 무함마드의 언행을 본으로 하는 무슬림의 생활방식으로 하디스Hadith에 기록되어 있으며, 하디스는 9세기경 체계적으로 수집되었다. 이즈마나 끼야스는 꾸란이나 순나보다는 덜 중요한 것으로 이즈마는 꾸란이나 순나에 의해 직접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에 대해 종교학자들이 합의한 사항을 말하며, 끼야스는 앞의 세 가지 근거에 의해서도 명백한 판결이 불가능할 경우, 이에 대한 유추 해석을 의미한다.
사우디의 사법부 조직은 샤리아와 규율에 의거, 재판하는 3심의 법원이 있고, 사법감독위원회가 법원을 감독한다.
지방행정
사우디는 13개 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주지사는 왕실에서 임명한 왕자가 맡고 있다. 각 주는 내무부장관이 임명하는 정원 30명의 주자문위원회를 운영하고 있고, 지방행정자문회의(Municipality Council)는 우리의 지방의회에 해당하는 회의 기구이다. 전체 의석(1,184석)중 2분의 1에 해당하는 592석에 대해 2005년 2월부터 3단계에 걸쳐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하기로 하였고, 2005년 12월 선출직 의원 592명과 임명직 의원 592명으로 구성된 178개의 지방행정자문회의를 구성하였다. 이러한 지방행정자문회의 선거는 압둘라 전 국왕이 추진 중인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사우디 역사상 실시된 최초의 주민직접선거이며, 2015년 12월 지방선거부터는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되었다.
경제
사우디는 세계 최대의 석유 부존 및 수출국으로, 석유부문이 정부 세입액의 약 80%를 차지하는 석유 의존형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고유가에 기인한 막대한 재정수입의 상당부분을 사회 인프라 및 석유화학, 전력, 담수시설, ICT 등 기간산업 분야에 투자하고, 제조업의 활성화를 통해 비석유부문 비중을 점차 늘려 나가는 산업 다변화 정책(Diversification)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외국인 기업에 대한 스폰서 제도, 자국인화 정책, 불공평한 조세제도 및 불공정 관행 등은 외국인의 투자유치에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우디는 석유 생산 이전에는 전통적인 유목과 무역에 의존하였으나, 1938년 석유를 생산한 이후에는 현대적 산업과 농업, 유목 및 가내 수공업이 병존하고 있으며, 1970년대 유류파동 이후 막대한 외화수입을 재원으로 활발한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였다. 특히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중화학공업 분야의 개발에 주력하고 있으며 인력개발을 위해 직업훈련, 해외연수 등으로 기술인력 확충에 노력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OPEC의 맹주적 존재이고, 석유 등의 천연자원의 채굴과 수출이 주요한 외화획득원(석유가 외화수입의 약 90%를 차지하고 있다)인 것 이외에, 이렇게 획득한 외화를 세계 각국에 투자, 운용하고 있다. 그리고 오일 머니를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도시 중 제다는 항구도시이며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제 수도이다. 예전엔 세계 최대의 산유국이었지만 2012년부터 러시아에 이은 2위. 2017년엔 미국이 1위로 올라설 추세이다. 그래도 OPEC(석유 수출국 기구)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이다. 비록 채굴량에서는 아주 약간 밀리게 됐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채굴 원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
이 나라는 한때 물이 귀하여 물 가격이 비싼 적이 있었으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다수의 담수공장을 지어 생수 값이 한국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 이러한 담수공장들의 대부분은 한국기업들이 완공한 것들이다. 그리고 경작지는 상당히 적어서 쌀은 대부분 수입한다.
1인당 GDP는 약 19,313달러(2016)로, 막대한 석유자원(2004년 기준 세계 수출량의 17.4%)을 보유한 나라답지 않게 낮은 편이다. 그나마 왕가가 막대한 부를 거머쥐고 있고 세계적으로 부의 불균형 분배가 극심한, 빈부격차가 엄청난 국가이다. 국가재정은 탄탄한데 국민들이 그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문제가 심화되자, 반反왕가 감정도 슬슬 높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석유가 많이 나오는 데다 생산단가도 OPEC 국가들 중 낮은 편에 속하기 때문에 유가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차지하는 입김은 매우 크며, 2014년 미국이 셰일가스shale gas를 본격적으로 생산하자 미국의 셰일가스 산업에 타격을 주기 위해 저유가 치킨런(어느 한 쪽도 양보하지 않고 극단적으로 치닫는 게임 방식)을 하기 시작하면서 2015년 초 유가가 엄청난 기세로 내려가고 있다. 그 결과 미국은 생산단가 아래로 내려가도 버티고 있지만 러시아와 다른 OPEC 회원국들이 디폴트 위기에 처하고 있다.
사우디는 막대한 부를 가졌으나 불합리한 소득분배 때문에, 그리고 와하비즘Wahhabism 방침이 국시인 나라지만 서방 세계와의 잦은 접촉으로 세속화되는 국민 때문에 사회가 불안하다. 2011년 ‘아랍의 봄’ 때 중동권 여기저기서 시위가 나고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본 사우드 왕가는 경악했고, 일시적으로 150조 원(1,330억 달러)이 넘는 거액을 뿌려 불만을 줄였다. 그리고 소득분배가 불합리하긴 하지만 끼니 걱정을 할 정도라는 말은 과장된 것이다.
사우디는 10인 이상 기업체에서 자국민의 취업우대를 하고 있다. 불이익을 받지 않으려면 3,000명 이상 기업체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 국적자를 30% 이상 의무적으로 채용해야 한다. 주권국가에서 당연한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비슷한 학력의 사우디아라비아 국적자와 외국인 이민자를 채용할 때 월급이 3~4배 차이난다는 걸 생각하면 전혀 당연한 게 아니다. 세금도 없고 집에서 놀고 먹어도 생존에 지장이 없는 이들이다 보니, 억지로 끌어내어 일을 시키려면 능력에 비해 상당한 고임금을 줘야 한다.
사회와 문화
인구와 언어
2015년 2월 사우디 중앙통계국 발표에 의하면 사우디의 인구는 약 3,077만 명(사우디인 2,070만 명, 외국인 1,007만 명)이나, 매년 2.5~2.7%에 달하는 급속한 인구증가로 2020년에는 3,72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사우디의 공용어는 아랍어이다. 리야드, 젯다를 중심으로 한 많은 사우디인들은 기본적인 영어는 구사 가능하다. 아랍어를 구사하지 않더라도, 파키스탄이나 인도, 필리핀, 인도네시아, 중국 등 외국인 근로자가 많아 영어만으로도 생활이 지장이 없다.
종교
사우디는 종교의 자유가 없는 나라 중 하나로, 국민의 절대 다수 종교는 이슬람교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교의 발상지이고 수니파 이슬람교가 국교이며 건국 이념에서 “알라 외에는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이다.”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웃 종교는 존재할 수 없다. 이슬람교 종파에 따라 수니파가 전 인구의 90%를 차지하며, 시아파(이란이 다수를 차지)는 나머지 10%에 불과하다. 사우디 국민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무슬림에게 의무로 되어 있는 다섯 가지의 신앙적 기둥(신앙고백, 기도, 단식, 성지순례, 희사)을 필수적으로 이행하도록 되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교 이외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으며, 내국인은 물론이고 외국인들도 이슬람교 이외의 종교 집회가 금지된다. 사우디아라비아 국민은 이슬람교에서 타 종교로 개종하면 참수형을 당하거나 국외로 추방당하는 것,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그것이 계속 유보되면 참수형을 당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의 알베르트 타워 시계탑은 세계에서 가장 큰 시계이다. 시계의 지름이 46미터에 이른다. 뾰족탑과 그 밑부분에 거대한 스피커가 달려 있다. 이 시계는 하루 다섯 번에 걸친 무슬림의 의식 시간을 알려준다. 7킬로미터 밖에서도 아잔소리(이슬람의 의식을 알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교육과 언론
사우디에서는 전통적으로 꾸란의 교리에 기초한 이슬람교육이 종교의무로 간주된다. 1953년에 최초로 교육부가 설치되었고 1957년에는 리야드에 최초의 대학이 설립되었으며 이후 다수의 종합 대학교를 비롯한 상당수 초급 및 단과대학이 신설되어 현대적인 교육제도를 마련했다.
초등 6년, 중등 3년, 고등 3년, 대학 4년의 학제를 운영하고 있고, 의무교육은 만 6세부터 15세까지이며, 전 교육과정은 무상이다. 전 교육 과정에 이슬람(꾸란) 교리 등 종교교육 실시되고 여성교육은 유치원에서부터 분리되며, 음악 및 무용 등 이슬람 정서에 맞지 않는 분야는 교육에서 제외된다. 2015년 기준 25개 이상의 국립대학교가 설립되어 있고, 10여개 사립대학이 운영 중에 있다.
사우디에는 국영 라디오와 TV방송이 있으며 TV방송은 Channel 1TV(아랍어), Channel2 TV(영어, 일부 불어 뉴스)를 포함한 8개의 채널이 있고, 신문은 Al-Riyadh, Okaz, Al-Sharq Al-Awsat, Al-Jazeerah 등 다수의 아랍어 일간지와 Arab News, Saudi Gazette 등 2개의 영자 일간지가 발간되고 있다.
생활문화
사우디인들은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가족과 사회에 대한 의무감이 강하고, 남자는 위엄과 강인한 것을 중히 여겨 어려서부터 낙타경주, 승마 등을 가르치며 특히 가부장제로 남아선호 사상이 높은 편이다. 고온건조한 사막 등 척박한 환경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베두윈(유목민) 민족으로 무뚝뚝하고 거친 측면도 있으나,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순화되어 있어 정서면에서는 많이 안정적이다. 만사를 서두르지 않고 여유가 있으며, 자존심이 강하고 이슬람교가 아닌 이방인을 경계하여 정을 주지 않고 의심이 많은 편이나, 신의와 위신, 덕망, 친절, 선행을 중시하는 기질이 있다.
엄격하고 검소한 이슬람 교리와 사막의 전통적인 생활관습 영향으로 문화 생활은 거의 없으나, 생활수준 향상과 도시의 발달로 TV 등 대중매체를 통한 서구 문화 문물에 대한 접촉이 일반화되고 있다.
이슬람 보수가치를 중시하는 와하비즘의 영향으로 사회전반에 걸쳐 엄격한 이슬람계율을 요구하며 음악, 무용, 연극, 영화 등 오락 및 대중 예술은 허용하지 않으며, 학교 교과목에도 제외된다.
스포츠 행사시에도 남녀가 공동 집회를 할 수 없으며 대중음식점은 물론 공공장소에서는 남녀가 합석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으며, 여성들은 운전이 허용되지 않아 여성외부활동에 제약이 존재한다.
사우디의 사회관습
사우디는 이슬람 국가 중 가장 엄격한 이슬람 관습을 유지하고 있는 국가이다. 이슬람 전역에 걸쳐 간음과 매춘행위, 음주, 돼지고기 판매, 도박 등이 생활의 금기로 되어 있으며, 신앙생활을 해치는 가무나 요란한 음악, 영화 등은 허락하지 않고 있다. 학교에서도 음악, 무용 등의 교육과목이 전무하다.
매년 이슬람 히즈라력 9월(라마단월)은 무함마드가 지브릴(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꾸란을 최초로 계시받은 성스러운 달로 여겨지고 있으며, 한 달간은 고행과 수도의 달로서 해가 뜬 후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는 물, 음료, 담배 등 일절 음식물 섭취를 금지하고, 일몰 후에 식사를 하고 특별 예배를 보며 주로 야간에 활동을 한다. 라마단(금식월) 중에 외국인은 금식하는 아랍인 앞에서 음식을 먹거나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좋으며, 특히 거리에서의 흡연을 삼가고 기타 아랍인들의 종교생활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남녀간 내외를 엄격하게 지키므로 가족이 아닌 여자와 함께 다니거나, 여인의 사진을 찍거나 말을 거는 등 접근을 삼가야 한다. 또 왼손은 불결한 것에만 사용하고 깨끗한 일은 오른손으로 하기 때문에 악수를 한다거나 물건을 주고받거나 음식을 먹을 때에는 왼손을 사용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므로 주의해야 한다. 권유받은 선물이나 음료, 음식 등은 거절하지 않는 것이 좋으며 집으로 초대받았을 때에는 세 번 이상 거절하면 예의상 곤란하다.
옷차림은 남자들은 외출시 토브thobe라고 하는 하얀색의 전통복장과 구트라goutra라고 하는 흰 바탕에 붉은 체크무늬 또는 횐색 천을 머리에 두르며 여인들은 아바야abaya라고 하는 검정 겉옷을 입고, 검은색 스카프로 머리와 얼굴을 가린 후 외출한다. 외국 여인들도 아바야 착용이 의무적이다.
이슬람법에 있어 결혼은 모든 무슬림들의 의무사항이며, 이혼도 법적으로 허용되고 있다.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는 중매결혼이 원칙이며 사촌간의 근친결혼이 관습적이다. 민족이 다른 사람 간에도 양가의 합의와 결혼 당사자 간에 동의만 있으면 결혼이 가능하다. 법적으로 꾸란에 따라 1부 4처까지 허용되어 있으나 오늘날에는 1부 1처제의 경향으로 바뀌고 있다. 결혼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순결과 정절로 여성들은 몸가짐에 매우 조심하고 있다. 간통죄가 성립되려면 4명의 증인과 분명한 물증이 필요하고, 형벌은 기혼자인 경우 더욱 엄격하고 미혼자간의 경우는 태형을 받게 되며, 반드시 당사자 간에 결혼해야 한다.
음식과 예절
사우디에서는 개, 돼지, 맹수류, 맹금류, 파충류와 이슬람식으로 도살되지 않은 고기, 죽은 짐승의 고기와 피, 내장 등은 식음할 수 없다. 사우디인들은 샤이shai라고 부르는 홍차와 노란색 박하 향기의 차를 즐겨 마시며 손님 접대 시 아랍 커피 까흐와qahwah와 함께 차를 권유하는 것이 상례이다.
사우디인들은 윗사람을 매우 공경하고, 찾아오는 손님에 대해서는 극진하게 접대하는 것이 예의이며 미덕으로 간주하고 있다. 현지 속담에 “손님이 찾아오지 않는 집에는 천사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인적이 드문 사막의 생활환경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반갑고, 종교 예식상 공덕을 많이 쌓기 위한 문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국과 사우디의 관계
역사적 관계
역사적으로 보아 우리나라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는 신라시대에서부터 비롯된다. 흔히 대식국大食國이라는 명칭으로 산견되는데, 물론 이 때의 대식국은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고 페르시아제국의 전 지역을 가리키지만 이미 신라시대부터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 지역과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신라와 고려를 거쳐 오랜 기간 교류가 있었던 이 지역과의 관계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활발히 전개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조선의 쇄국적인 대외정책에서도 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외교관계
우리나라는 1962년 10월 16일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하여 1973년 7월 주 사우디아라비아 한국대사관이 개설되어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으며, 주한 사우디아라비아 상주대사관은 1975년 4월에 개설되었다. 사우디는 유엔, 비동맹기구 등 국제무대에서 평화통일 정책 등 우리의 입장을 적극 지지해온 주요 우방국 중의 하나이며, 우리에게 제1위 원유 공급국으로서 중동지역 최대의 교역 대상국이다.
양국은 1998년 압둘라 왕세제 방한, 1999년 리야드 주지사인 살만 왕자(現 국왕)의 방한, 2000년 제2부총리 겸 국방장관인 술탄 왕자의 방한과 2005년 이해찬 국무총리와 2007년 노무현 대통령,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사우디 방문, 2014년 11월 G20 브리스번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 양국 정상회담 등 정상 교류를 통해 양국 우호협력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또한 1974년 경제 및 기술협력 협정을 시작으로 문화 항공 개발 국방 관광 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협정들이 꾸준히 체결되고 있다.
경제관계
사우디아라비아는 우리나라 최대의 원유공급국으로 우리나라 총 원유 수입량의 약 32.5%인 3억 배럴을 공급하고 있다(2014년 기준). 한-사우디 양국은 상호보완적인 경제 산업 구조와 수출입 거래를 바탕으로 중요한 교역 파트너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사우디는 우리의 제4대 교역국(2014)이며, 우리나라는 사우디의 제4대 교역국(2013)이다. 또한 1973년 사우디에 최초로 진출한 이래 우리나라는 2014년 현재까지 약 1,300억 달러를 수주하여 해외건설 진출(1966) 이후 전체 해외 수주 누계의 20%를 차지하면서 지속적으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양국 간 투자는 아직 상대적으로 미미한 실정이다. 2014년 기준으로 우리의 대對사우디 투자는 총 440건, 약 18억 달러이고, 사우디의 대對한 투자는 총 68건에 약 9억 달러 정도이다.
2014년 양국 간 교역은 450.1억 달러로 우리나라의 대對사우디 수출은 82.9억 달러, 수입은 367.2억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목으로는 승용차 건설중장비 선박 전선 변압기 타이어 차단기 화학기계 등이며, 주요 수입품목은 원유 석유제품 등 광물성 연료와 석유화학 원료 등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우리나라 건설사들이 1973년 최초 진출한 이래 2014년까지 누계 기준, 약 총 1,300억불 규모로 전체 우리기업 수주실적의 20%를 차지하는 최대 건설시장이다. 우리나라 건설사들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중반까지 매년 10~50억 달러 수준의 수주실적을 기록했으나, 1980년대 후반부터 유가하락에 따른 발주량 감소로 수주규모가 연간 1~2억 달러 수준으로 급감했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정유 석유화학, 담수 발전 플랜트 등을 중심으로 수주 실적이 증가하여 제2의 중동 붐을 경험하고 있으며, 최근 2014년에는 최근 수년간 투자하던 대규모 정유, 화학 플랜트 건설이 완료됨에 따라 수주 실적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한-사우디는 산업구조가 달라 양국 간 산업의 경합도가 크지 않은 관계로 자본 기술 등 비교우위요소를 상호 교류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양국 간 문화적 차이, 사우디의 교역기반 취약 등으로 인해 실질적 협력은 아직 활발하지 못한 상태이다.
우리나라는 1975년 사우디아라비아와 문화협정을 체결하고, 문화, 교육 분야 교류 증진을 위해 노력 중이다. 사우디는 2000년대 중반 이후 세계 각국과의 문화교류 강화정책을 추진하고 특히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어 양국 간 문화분야 교류는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밖에 청소년 분야와 방송 언론 분야에서도 양국 간에는 상호 교류가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재외국민 실태
사우디아라비아는 영주권 제도가 없다. 따라서 사우디 내 교민은 대부분이 체류자로 분류되며, 주로 자영업, 건설업 관련 현지기업체에 취업 중이다. 주재국 대도시(리야드, 쥬베일, 담맘, 얀부, 라빅, 지잔 등) 인근 공사 현장에서 건설 및 플랜트 관련 업종에 종사하며(공사기간에 따라 체류기간 수시 변동), 특히 동부지역의 재외동포는 건설관련 인력이 대다수이다.
1970~1980년대 초반 우리기업들의 대규모 진출로 한때 10만 명 이상의 근로자 및 가족들이 체류하였으나, 1980년대 중반 이후 사우디 내 건설경기 퇴조의 영향으로 우리 건설업체들의 철수가 이어짐에 따라 체류 국민도 급감하고(2003년 기준 약 1,200명) 정체상태에 머물렀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후 석유가격의 상승 및 사우디 내 우리 기업의 건설수주 확대 등에 기인하여 2010년부터 교민수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건설 경기에 따라 증감을 반복하고 있는 추세이다.
2014년 12월 기준으로 사우디에 있는 재외국민은 리야드 및 중부지역, 담맘 및 동부지역, 제다 및 서부지역을 합하여 총 5,215명(장기 거주 동포 1,250명, 지상사 주재원 및 단기 거주 동포 3,965명)으로 집계되었다. 사우디에 진출해 있는 우리나라 기업은 2015년 1월 기준으로 지상사 9개, 건설업 79개, 제조업 33개, 도매 및 소매업 외 기타 36개 업체 등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수니파의 와하비즘Wahabism
수니파 무슬림 국가 가운데는 터키와 같이 17세기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세계적으로 굳어진 ‘신정분리 원칙’에 따라 선거로 지도자를 뽑는 곳들이 많지만, 이를 곧 수니파 무슬림 전체와 결부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예를 들어 사우디아라비아를 지배하는 사우드 왕가는 18세기 주창된 ‘와하비즘’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운다. ‘와하비즘’이란 “이슬람 초기의 순수한 무슬림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합’의 주장을 발전시킨 교리다. 사우드 왕가는 당시 자신의 주장 때문에 고향에서 쫓겨난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합’을 거둬들여 그를 후원해 준 다리아 지역의 족장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에서부터 시작됐다.
눈여겨 볼 점은 이런 ‘와하비즘’이 사우디아라비아 왕조의 통치이념이기도 하지만, 테러조직 ‘알 카에다’와 ‘대쉬’, ‘무슬림 형제단’이 주장하는 내용과도 일맥상통한다는 점이다. 수니파 무슬림 가운데 의외로 많은 수가 이런 주장에 동조한다. 꾸란과 함께 무함마드의 언행록(하디스), 무슬림의 전통 율법(샤리아), 이슬람 성직자의 유권해석(파트와)만을 믿고 따라야 하며, 서방 국가에서 나온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 천부인권, 자유, 평등을 모두 물리쳐야 한다는 주장 또한 이런 ‘와하비즘’이 퍼지면서 나온 것이다.
20세기 들어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여전하다. 수니파는 서방적인 ‘신정분리’ 원칙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고, 시아파 국가인 이란은 ‘신정일치’ 국가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속살을 들여다보면, 수니파 무슬림 국가에서는 민주주의, 시장경제, 천부인권, 양성평등 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반면 시아파 무슬림 국가 또는 조직에서는 오히려 천부인권과 양성평등이 잘 보장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갈등
사우디아라비아가 2016년 1월 이란과 외교관계 단절을 선언했다. 이어 4일에는 이란과의 교역은 물론이고 항공편 운항까지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이란 국민들이 사우디아라비아 공관을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조치다. 이에 양국과 중동 정세뿐 아니라 세계 경제에 큰 파장이 예상된다.외교관계 단절로까지 이른 중동의 숙적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오랜 갈등은 두 나라가 각각 이슬람 양대 종파인 수니파와 시아파의 맹주라는 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지난 1월 3일 선언한 이란과의 단교 방침도 사우디아라비아가 ‘셰이크 님르 바크르 알님르’ 등 시아파 유력인사를 처형하고, 이에 화가 난 시아파 이란 국민들이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과 총영사관을 공격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이슬람 수니파의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란이 맹주인 시아파 유력인사를 처형한 것은 이란과의 충돌과 유혈사태를 뻔히 예견한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두 나라의 갈등은 일파만파 퍼져, 중동의 이슬람 종파 간의 갈등으로까지 확대됐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우호적인 수니파 이슬람 국가들도 이란과 외교 단절에 동참했다.
중동 최대의 산유국들인 양국의 대립이 지리적으로 세계 최대의 원유 수송망과 겹치고 있다는 점에서 자칫 국제 원유시장에 큰 위기를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상당수 관련 업계 전문가들은 현재 국제 원유시장은 사우디아라비아-이란 관계 악화에도 불구하고 공급 과잉상태로 유가가 급등할 가능성은 없지만, 핵심 원유 수송로인 사우디아라비아 동부와 호르무즈 해협 등에 이번 사태로 인한 변수가 발생할 경우 예상 밖의 큰 파장이 일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생산하는 하루 1,030만 배럴의 원유 가운데 대부분이 이들 시아파 거주 지역을 지나고 있다. 현재 국제 원유시장의 재고량은 기록적 수준이지만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하면 여분의 능력이 전무한 상태이다.
유가 폭락에 원자재에 의존하는 자원 신흥국들도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취약 신흥국으로 꼽혀온 국가들의 통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당국의 환율 방어에도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들 국가의 경제적ㆍ정치적 위험을 정량화하긴 어렵다면서도 원유 수출국들의 위험이 커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최대 석유매장량을 자랑하는 나라이지만, 유가 하락에 경기가 계속 추락하면서 경제가 붕괴 직전이다. 인플레이션은 작년 150%를 넘어섰고, 올해는 200%를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는 채권을 갚을 여력이 없고, 심지어 음식과 기초생활용품마저 공급이 달리는 상황이다. 이처럼 두 국가의 갈등이, 중동을 넘어 세계시장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이슬람의 대립, 수니파와 시아파
이슬람 또는 회교回敎는 무함마드를 예언자로 하며 ‘알라’를 유일신으로 받드는 종교이다. ‘알라’는 아랍어로 ‘하나님, 신’이라는 뜻이며, 불교와 그리스도 신앙과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이슬람’이란 뜻은 ‘복종ㆍ순종’이란 뜻이다. 이슬람을 믿는 남자는 ‘무슬림’이라 부르고, 여자는 ‘무슬리마’라고 부른다.이슬람의 경전은 쿠란(코란)이며, 이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천사 지브릴(가브리엘)로부터 받은 알라의 말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이슬람의 대표적인 종파로는 전체 무슬림의 80~90%를 차지하는 수니파와 이란이 대표하는 시아파가 있다. 시아파는 10~20%를 차지한다. 발칸 반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의 무슬림들은 수피 무슬림들이 많다. 수니파 내에서 무슬림 모두는 동질 의식을 가지나, 다른 종파 간에는 보이지 않는 불신이 있다.
이슬람에는 교리가 상반되는 200여 개의 종파가 있다. 그 중 주류는 수니파이다. 전 세계 무슬림의 83% 이상이 수니파에 속한다. 그 외에는 16%의 시아파와 시아파와 수니파에 섞여 있는 수피파, 그리고 이바디파 등 여러 종파들이 존재한다.
수니파 수니파(Sunni)는 무슬림 공동체 즉 움마의 "순나(Sunnah, 관행)"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순나(관행)"는 쿠란ㆍ하디스ㆍ예언자와 정통 칼리파의 선례에 바탕을 두고 있다. 4대 법학파(하나피ㆍ말리크ㆍ샤피이ㆍ한발리)로 나뉜다.
시아파 시아파(Shia|)는 빼앗긴 칼리파 자리를 살해당한 알리 가문에 되돌려주려는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시아(Shia)"는 "시아 알리(Shia Ali)", 즉 "알리를 따르는 사람들"에서 나온 명칭이다.
카와리즈파 무함마드 사망 25년 뒤, 칼리파 우스만 이븐 아판이 살해당하자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이하 ‘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우스만의 6촌인 다마스쿠스 총독 무아위야 1세는 알리가 우스만의 복수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다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내란 속에서 알리 지지자들은 주전파와 협상파로 갈라졌다. 그중 주전파는 절대신 알라만이 중재할 수 있고 인간은 현 상황에서 계속 싸워야 한다면서 알리 진영을 떠났다. 이들이 이슬람 역사상 최초의 종파 카와리즈파(Khawārij, 탈퇴자)이다.
카와리즈파는 전투적인 행동주의자여서, 지하드(jihad, 주로 "성전"으로 번역한다)를 여섯 번째 ‘신앙의 기둥’으로 삼았다. 661년 이들은 알리를 살해했다. 카와리즈파는 메카의 부족 쿠라이시의 자손만이 칼리파가 될 수 있다는 수니파의 전통적 견해를 비난하고, 독실한 무슬림이면 누구나 칼리파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민 평등주의적 입장과 아랍 귀족층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베드윈과 비아랍계 무슬림 추종자를 얻을 수 있었지만 내분으로 뒷날 저절로 약화됐다. 현재는 알제리와 튀니지의 베르베르 지역,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와 아라비아 반도의 오만에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의 청교도적인 정신은 18세기 사우디아라비아 건국의 기반이 된 와하브Wahhab 운동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수니파와 시아파 대립의 계기 수니파와 시아파가 대립하게 된 계기는 이슬람을 창시한 무함마드의 ‘후계자’ 선정에 대한 기준이 달라서다. 632년 사망한 무함마드는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다. 슬하에는 아들도 없었다. 이때 무슬림들은 무함마드의 조력자인 ‘아부 바크르’를 2대 교주로 추대한다. 교주의 명칭은 ‘칼리프’로 현재 테러조직 ‘대쉬(ISIS)’가 그들의 두목을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아부 바크르’를 추대한 사람들은 “무슬림은 ‘순나(꾸란에 명시된 내용과 무함마드가 살아 있을 때 내린 명령)’를 철저히 지키며 살면 된다”는 주장을 편다. 이 ‘순나’를 따르며 살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바로 수니파다.
반면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시아트 알리’를 추종하던 세력들은 무함마드의 혈통만이 이슬람의 교주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시아트 알리’를 ‘칼리프’로 추대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때 ‘시아트 알리’는 ‘칼리프’의 추대를 지지했다고 한다.
‘칼리프’ 선출에 대한 시아파의 반발은 극렬했다. 2대 교주인 ‘아부 바크르’가 양 계파 사이의 암투 과정에서 암살을 당한 것이다. 이후 2명의 ‘칼리프’가 추대됐지만 얼마 못가 암살당했다.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는 5대 교주가 된다.
수니파는 종교지도자인 ‘칼리프’라도 잘못하면 탄핵이 가능하고, ‘이맘(무슬림 성직자)’은 종교적 안내자일 뿐으로, 누구나 될 수 있는 ‘임무’에 불과하다고 여긴 반면,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혈통만이 ‘칼리프’와 ‘이맘’이 될 수 있으며, 이는 ‘신의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시아파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맘은 오류가 없다’거나 이미 사망한 ‘알리’가 나중에 세상을 구할 구세주(마디)로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니파는 기도를 할 때 “알라 이외에 신은 없고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이다”라는 문구만 읊지만, 시아파는 “또한 알리는 신의 벗이다”라는 구절을 추가하는 점에서도 양측의 차이를 알 수 있다.
무슬림 종파별 세계 분포를 보면 세계 16억 무슬림 인구 가운데 90% 가량이 수니파다. 그리고 9% 가량이 시아파로 알려져 있다. 수니파 무슬림 국가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인도네시아, 이집트, 수단, 리비아, 차드, 오만, 아랍에미리트연합, 터키, 파키스탄, 말레이시아, 나이지리아(북부), 소말리아 등이 있다. 시아파 무슬림 국가로는 이란이 대표적이며, 아프가니스탄, 이라크(남부), 예멘, 시리아, 아제르바이잔, 레바논 등이 있다. 걸프협력회의(GCC) 회원국인 바레인이나 이라크의 경우 집권 왕족은 수니파이지만, 국민들 70% 이상이 시아파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금지된 것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국가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국가 중의 하나이다. 여성의 운전을 금지하거나 취업을 제한하는 것은 유명하다. 게다가 현재 중동에서는 보이지 않는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나라이다. 그럼에도 사이디아라비아가 다른 중동권 나라에 비해 서구화된 것으로 알려진 것은 여타 국가들이 반미를 외치면서 악의 축으로 불리는 동안 사우디아라비아는 친미정책으로 석유가 많이 나는 부유한 나라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다음의 몇 가지 사례를 보면 사우디아라비아가 얼마나 보수적인 틀에 매여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성별구분
사우디아라비아의 식당이나 쇼핑몰에 가족이 아닌 남녀가 같이 입장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은 증명서를 가진 가족이 함께여야 입장을 허락하는 곳이 대다수이다. 또 패스트푸드점은 남성과 여성의 주문을 따로 받아 성별에 따라 줄이 만들어지는 특이한 광경을 볼 수 있다. 여성은 혼자서 병원에 갈 수도 없다. 의사와 신체접촉이 필요한 진료는 아버지나 남성 보호자가 함께여야 가능한 것이다.
극장에서의 영화상영
세계적으로 이란 영화는 유명하며 중동의 다른 나라 영화도 영화제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영화제작을 떠나 상영 자체가 허가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 국민들은 집에서 DVD를 보거나 레스토랑에서 틀어주는 영화를 보는 것이 전부이다. 서구에서처럼 영화배우나 연예인이 우상시 되는 것이 종교교리에 어긋나기도 하지만 극장에서의 남녀 접촉이 영화관을 금지하는 이유이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술 역시 남녀 간의 문제나 부도덕한 해의의 매개체라는 이유로 금지되고 있으며 많은 사우디아라비아 국민들은 주말에 술과 영화를 즐기기 위해 이웃인 바레인으로 떠나고 있다.
발렌타인데이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랍권 국가 중 최초로 발렌타인데이를 공식적으로 금지하였다. 그 외에도 초콜릿이나 꽃, 사탕, 붉은 색이 들어간 제품이 발렌타인데이 기간 동안 판매 금지된다.
돼지고기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 식품인증인 할랄 인증을 받은 식품만이 수입통관된다. 100%의 국민이 무슬림이기에 돼지고기의 반입은 신성모독으로 다루어진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이슬람교 이외의 어떤 종교도 금지되고 있으며 내국인이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은 불법이다. 이슬람교를 버리거나 개종하면 사형에 처한다. 다른 이슬람국가들도 돼지고기를 금지하고 있지만 비이슬람 국민을 위해 완전 금수조치는 하지 않는다.
음악수업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음악 산업을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지만 음악 수업을 하는 학교는 찾아볼 수 없으며 여성은 기상캐스터가 될 수도 없다. 이슬람 율법에 의해 노래는 금지되며 쇼핑몰에 있는 레코드 가게에서 음약을 틀 수 없다. 음악가나 가수가 되고 싶다면 일대일 교습을 받거나 해외 유학을 해야 한다.
45세 미만 여성은 허가증 없이 여행 금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45세 미만의 여성이 정부의 허가 없이 여행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45세가 되면 이 금지는 해제가 되지만 그 나이에는 여건상 여행을 할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45세 미만의 여성은 남편이나 아버지와 함께 여행하거나 다른 남성 후견인의 보증을 받아야 할 수 있다. 또 여성에게 운전면허증을 발급하지 않기 때문에 여성의 자동차 운전이 금지된 것과 같다.
여성을 위한 체육관과 스포츠
2012년 런던 올림픽은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여성 선수를 참가시킨 최초의 올림픽이었다. 이 말은 그동안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여성으로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가 없다는 뜻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는 달마 말하스라는 올림픽에 참가할 만한 유일한 여성 선수가 있었는데 1992년 생인 이 여성은 싱가폴에서 열린 2010년 유스 올림픽 승마 장애물 경기에 참가하여 동매달을 수상했다. 이것이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이 국제대회에서 수상한 최초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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