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상 | 실재reality를 찾아 나선 사람들(1)
[철학산책]
大一其極(대일기극)이여 是名養氣(시명양기)라
광대한 하나의 지극함이여, 이를 양기라 부르나니
無有而混(무유이혼)하고 虛粗而妙(허조이묘)로다
없음과 있음이 혼재하고, 텅빔과 거칠게 있음이 오묘하구나
三一其體(삼일기체)오 一三其用(일삼기용)이니
셋은 하나를 그 체로 하고 하나는 셋을 그 용으로 하나니
混妙一環(혼묘일환)이오 體用無歧(체용무기)라
혼재함과 오묘함이 하나로 순환하니 체와 용은 둘이 아니로다
大虛有光(대허유광)하니 是神之像(시싱지상)이오
광대한 텅빔에 광명이 있으니 이것이 신의 형상이요
大氣長存(대기장존)하니 是神之化(시기지화)라.
광대한 기가 장구하게 있으니 이것이 신의 조화로다
眞命所源(진명소원)이오 萬法是生(만법시생)이라
진실한 생명이 발원하는 바요 모든 법이 여기에서 생기느니라
-『환단고기』「소도경전본훈」 선인 발귀리의 송가 중에서-
“존재”에 대한 물음은 진리탐구의 시작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물론이고 우주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명백한 사실은 모든 것들이 순간의 정지도 없이 생성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무생물이든 식물이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생겨나서 존재하는 것은 모두 쉬지 않고 생장염장 과정으로 변화해가기 때문이다.
시야를 돌려 지구를 들여다보자. 어떤 것들은 금방 생겨났다가 없어지는가 하면, 하루살이와 같은 것들은 단 하루밖에 더 이상 살지 못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오늘날 생명공학자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하루에도 수많은 종류의 생명체가 창조되거나 소멸되어 없어진다. 반면에 사람이나 어떤 동물은 개별적으로 몇십 년을 넘어서 백 년 이상을 존속하기도 하고, 어떤 나무는 몇백 년을 넘어서 몇천 년을 존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사시四時 사철로 순환하는 시간계열의 흐름에 따라 사람은 사람을 낳으며, 개는 개를 낳고, 장미 씨를 심으면 장미가 나오고, 이곳에 있는 소나무는 죽어서 없어져도 다른 소나무들이 항상 존속하고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종種은 ‘왜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이러한 의문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탐구력과 판별력을 겸비한 사람이라면 한번쯤 던져볼 수 있는 물음일 것이다.
종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 무엇이 지속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학문이 시작되면서 알고 있었던 사실일 터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주요 저서 『형이상학Metaphysica』에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지성인들이 끊임없이 탐구해온 물음이 바로 “존재란 무엇인가”였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존재”란 말은 그리스어로 “to on”이고 영어로 표기하면 “The Being”이다. 이는 거창하고 심오한 뜻이 아니라 간단히 말해서 지속적으로 ‘있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우리의 사유가 진리탐구를 향해 떠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존재가 실재요 진리라는 견해
자연세계를 바라볼 때, 번갯불처럼 순간적으로 있다가 없어지는 것도 존재하는 것이요, 영구히 지속하는 것도 모두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심지어 없는 것(無)도 있다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존재개념은 최고의 유개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결정적인 문제를 하나 제기해볼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는 존재하고 있지만 다음 순간에 변화하여 없어졌을 경우에도 우리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속담에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 한다”는 말이 시사하듯이, 없는데도 있다고 말하면 이는 곧 거짓이 되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참은 진리이고 거짓은 진리가 아니라고 한다. 그럼 참과 거짓의 기준은 무엇인가? 플라톤은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 여기에 진리眞理가 있다고 했다. ‘있는 것을 없다’고 말하거나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라는 얘기다. 다시 말해서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은 참이고, 사실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말하면 거짓이라는 얘기다. 『논리학(Logic)』에서 볼 때 진리는 “동일률同一律”에 근거한 것이고, 거짓은 동일률을 위배하는 언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일률은 참과 거짓을 다루는 논리학의 기본 공리이다. 기본 공리는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 충족이유율을 말하는데, 동일률을 근거로 해서 모순율과 배중률이 나온다. 이 세 가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창안한 것이고, 충족이유율은 근대의 철학자 라이프니쯔(Leibniz, 1646~1716)가 덧붙인 것이다.
서양 고대철학의 사유에서 진리탐구에 대한 학문적 진술은 동일률을 위배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를 가르치고 배우는 학문적 가능 근거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제 동일률에 근거해서 존재를 탐구할 때 우리는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잠시 동안 존재하는 것’, ‘참으로 존재하는 것’을 구분해볼 필요가 있다.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인데, 인간의 지성 속에서 일어나는 환상이나 환영, 망상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믿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기력이 부족하여 헛것을 본다든가, 착시 및 착각 등이 그것이다. ‘잠시 동안 존재하는 것’은 소위 감각에 들어오는 현상세계의 것들로 시간계열의 흐름에 예속되어 생성소멸의 변화과정으로 진행되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는 착한 사람이었으나 세파에 찌들다 보니 악한 사람으로 변했거나, 지금은 존재하지만 시간이 흘러 사라져버린 경우가 그것이다.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란 시간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생성변화가 전혀 없는, 지속적으로 항상 일정하게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생긴 집, 저렇게 생긴 집은 오래되면 부서져 없어질지라도 ‘집 자체’, 다른 용어로 말하면 집의 본성만은 항존하는 것으로 보는 경우가 그것이다. 우리의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난다.’는 말도 콩이나 팥의 본성이 자체로 불변적인 것임을 함축한다.
진리탐구는 ‘항존恒存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추려내는 작업이라 볼 수 있다. 항존하는 것은 자체로 ‘동일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전제로 해서 학적 인식認識(episteme)과 정의定義(definition)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점에 대해 플라톤은 “완전히 존재하는 것은 완전히 이해될 수 있는 것(pantelos on, pantelos gnoston)”이라고 말했다. 진리의 대상은 언제 어디에서나 항상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인식이 되며, 참된 가르침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만일 어떤 존재가 ‘수시로 변화하거나,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게 되는 것’이라면, 혹은 사실 없는 것인데도 있는 것으로 착각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라면, 이는 진리탐구의 대상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 이런 것들은 정확히 알지도(인식) 못할 뿐만 아니라 무엇이라고 가르칠 수도(정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것’만이 진리탐구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왜냐하면 대상이 고정되어 있어야 이를 파악하는 인식의 주체가 유동적이지 않을 것이고, 정의 또한 고정성을 본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감각에 주어지는 감각적인 지식들은 한결같이 변화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참된 인식과 정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로부터 참 존재 = 사유 = 인식(정의) = 진리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이제 서양철학의 여명기부터 제기되어왔던 ‘존재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본질적으로 “실재하는 것”에 대한 탐구임을 알 수 있다. 실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에 종속하지 않는 존재, 즉 환상적인 허상도 아니고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그런 것이 아닌, 불변적이고 항구적으로 존속하는 ‘참으로 있는 것’을 의미한다. ‘참으로 있다’는 의미에서 ‘존재란 무엇인가’는 ‘실재實在(reality)란 무엇인가’의 물음으로 환원됨을 알 수 있다.
실재를 보는 관점들
‘실재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철학적 사유가 현상 세계의 온갖 변화와 차이 속에서도 ‘항상 같은 것으로 남아 있는 어떤 것’을 찾아내는 데로 향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이것을 근거로 해서 우리는 삼라만상의 변화무쌍한 것들이 왜 그렇게 존재하게 되는지를 명명백백하게 설명해 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재’는 모든 생성 변화하는 것들의 근원적인 바탕이요, 창조변화의 원인이요 원리가 된다고들 말한다.
실재에 대한 서양철학의 탐구관점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서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1. 물리적 실재론의 전형인 유물론(Materialism), 2. 인문개벽의 근거인 형이상학적 실재론, 3. 정신적 실재론의 전형인 유심론(Spiritualism)이 그것이다. 이런 방식의 구분은 동양철학에서 소위 “주기론主氣論”이니, “주리론主理論”이니, “심성론心性論” 등에 비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유물론은 실재하는 것을 형질에 있어서 오직 ‘물질적인 어떤 것’으로 간주하여 마음과 의식을 포함하는 정신적인 모든 것들이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되어 설명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실재는 오직 물질뿐이라는 얘기다. 형이상학적 실재론은 참된 존재를 변화무쌍한 현실의 감각세계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존재근거로서의 실재를 내세운다. 여기에는 인간 삶의 가치규범이라든가 문명 지향점의 근거도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유심론은 엄밀한 의미에서 관념론이 아니지만, 정신적인 어떤 마음(心)이 실재하고, 정신적 사고의 현상이나 유형무형有形無形의 것들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밝히려 한다.
1) 일원적一元的인 물활론자들
우선 물질적인 것을 궁극으로 실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소박한 일원론의 입장을 검토해 보자. 여기서 궁극적 실재가 오직 ‘하나’임을 말하면 일원론이고, ‘많다’고 말하면 다원론多元論이라 부른다.
고대 서양에서 학문의 역사는 꽤 오래 전부터 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집트, 바빌론 등지에서 발전된 천문학, 토목공학, 기하학 등은 일찍부터 인류 고대문명을 일으키는 데에 중요한 원동력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양철학의 출범은 몇천 년이나 늦은 BCE 6세기경에 이오니아지방의 그리스 식민도시 밀레토스에서 시작한다. 다른 학문에 비해 철학은 왜 이렇게 늦게 등장하게 됐던 것일까?
다른 학문의 사유와 철학적 사유는 무엇이 다를까? 결정적인 이유를 우리는 『환단고기』에 실려 있는 한민족의 최초 경전 「천부경天符經」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시작이나 무에서 비롯한 하나(一始無始一)이다. 하나가 셋으로 나뉜다 하더라도 그 근본은 다함이 없다(析三極無盡本) … 하나는 끝이나 무로 돌아가 마무리된 하나이다(一終無終一)”(「천부경」). 즉 무수하게 많은 삼라만상은 모두가 ‘하나’에서 나와 펼쳐졌다가 ‘하나’로 돌아간다는 환원주의 사고방식이 철학적 사유를 태동하게 한 실마리가 된다.
모든 것은 ‘하나’에서 나와서 펼쳐지고 ‘하나’로 돌아간다는 사고
서양철학의 시작은 우리가 직접 접하는, 생성 변화하는 자연적인 사물들에 대해 최초로 의문을 제기한 자들에게서 비롯된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연이란 무엇인가’의 물음을 던지고, 여기로부터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으려고 시도했다. 이런 물음을 던졌다는 것은 다름 아닌 진리탐구에 대한 사고思考의 혁명이 있었던 것을 뜻할 것이다. 여기에 동참한 철학자들을 우리는 자연철학자들이라고 부른다.
먼저 “자연physis”의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살펴봄이 좋을 것 같다. ‘자연’은 어원적으로 “phyo”라는 그리스어 동사에서 나왔다. 이는 일차적으로 ‘낳다’, ‘자라나다’(성장하다)의 뜻이다. 그래서 자연적인 사물들은 잠시의 정지도 없이 낳고 자라나고 성장 변화해 가는 것이다. 다음으로 낳고 자라나는 모든 것은 ‘본성상 그렇게 생겨 먹은 것으로만 낳고 자라난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을 심으면 본성상 사람이 태어나 사람으로 자라나고, 나무를 심으면 본성상 나무로 싹이 터 나무로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본성本性’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자연을 바라볼 때 생성 변화의 모습은 현상現象이고, 그 배후에 불변적이고 항구적인 어떤 것은 본성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자연세계의 변화무쌍한 사물들은 마구잡이로 무질서하게 생성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불변적이고 본성적인 것이 있고, 이것으로부터 잠시 이러저러한 것으로 현상됐다가 다시 그것에로 돌아간다. 이러한 사고를 배경으로 자연철학자들은 세상이 아무리 다양하게 전개된다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근원적인 실재가 있고, 전개된 모든 것이 다시 그것에로 환원된다는 혁명적인 사고를 가졌던 것이다.
영원히 존재하는 근원적인 실재를 찾으려는 열망으로부터 자연철학자들은 “아르케archē”라는 개념을 상정하게 된다. 아르케는 그리스어 동사 “시작하다, 출발하다archaō에서 나온 명사로 “시작”, “출발”의 뜻이다. 여기로부터 아르케는 모든 것들의 시작점이 되면서 모든 것들의 근원이 되는, 본성적인 존재원리요 원인의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해서 자연의 아르케를 찾는 작업이야말로 바로 궁극으로 실재하는 것을 밝히는 것이라 하겠다.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
이와 같은 사고의 바탕 위에서 현대 물질문명의 비조라 불리는 최초의 자연 철학자 탈레스Thales(BCE 624~546)가 등장한다. 그는 젊은 시절에 지중해 연안 국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천문학, 기하학 등에 관심을 갖고 학구적인 열의를 불태웠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탈레스는 학문적인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식日蝕이 일어나는 것을 계산해낼 정도로 천문학과 기하학에도 능통하였다고 전해지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자신이 관찰하고 배워서 얻은 천문학을 바탕으로 그는 자연 현상을 예측하기도 하였는데, 그 일화를 소개하면 이렇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은 올리브기름이 최대의 산출 품목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부분의 음식에 올리브기름을 넣어 조리했기 때문이다. 자연 현상을 정확하게 관찰한 탈레스는 가을에 올리브가 대풍이 될 것을 내다보고, 주변을 돌면서 사용하지 않는 올리브 짜는 기름틀을 헐값에 사들였다. 가을이 되자 올리브 농사는 대풍이었다. 그래서 농부들은 갑작스레 많은 올리브를 짜기 위한 다수의 기름틀이 필요하게 되자 탈레스는 비싼 가격에 팔아넘겨 많은 돈을 벌었다. 한마디로 매점매석으로 떼돈을 번 최초의 인물은 바로 철학자였던 것이다.
이 일화가 전해주는 요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근원의 실재를 탐구하여 지혜를 획득하려는 철학자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철학자가 돈을 벌 요량이라면 탁월한 지혜를 동원하여 단번에 떼돈을 벌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철학자는 가난하게 살아간다. 그것은 철학자가 무능력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많은 노력을 투자하여 얻은 탁월한 지혜는 돈벌이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의 우리나라는 인문주의 가치관을 상당히 천대하고 있다. 최근에는 자본주의와 경제 제일 우선주의에 힘입어 팽배해 있는 물신주의, 지역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천민자본주의에 물들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형편이다. 탈레스의 일화는 인간 삶의 가치가 무엇이고, 동물적 이기주의를 넘어선 인격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것인지를 모르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대목이기도 하다.
궁극으로 실재하는 것은 ‘하나’라는 주장
탈레스는 자연의 참된 실재, 즉 아르케를 “물hydōr”이라고 했다. 그는 물이 변해서 현상의 다양한 사물들이 생겨나고, 다시 사물들이 현상에서 사라지면 결국 근원의 물로 돌아간다고 보았던 것이다. 즉 물은 궁극의 실재로서 항상 존속하는 것이며, 모든 만물의 생성 변화의 원인이요 원리가 된다는 것이다.
탈레스가 말한 물은 살아있는 신성한 존재로서의 물이다. 이러한 견해는 그리스어에서 물질을 뜻하는 “휠레hyle”와 생명활동을 뜻하는 “조에zoe”의 합성어로 철학사에서 물활론物活論(hylozoism)이라 불린다. 물활론은 동식물은 물론이고 바위나 돌과 같은 물질도 생명을 갖고 활동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물활론적인 사고는 모든 물질들에게 정령이나 혼과 같은 것이 내재해 있음을 뜻한다. 이점을 증산도 도전에서는 “천지간에 가득 찬 것이 신神이니 풀잎 하나라도 신이 떠나면 마르고 흙 바른 벽이라도 신이 떠나면 무너지고, 손톱 밑에 가시 하나 드는 것도 신이 들어서 되느니라. 신이 없는 곳이 없고, 신이 하지 않는 일이 없느니라.”(『道典』 4:62:4~5)고 밝히고 있다.
탈레스의 제자이면서 친구인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BCE 611~546)가 있다. 그는 아르케를 “무한정자無限定者(to apeiron)”라 했다. 이것으로부터 무수한 것들이 한정되어 산출되고 진화되어간다는 주장이다. 그는 역사상 최초로 진화론을 제기한 인물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밀레토스 출신 아낙시메네스Anaximenes(BCE 585~528)는 아르케를 “공기”라고 했다. 이 공기는 숨, 호흡, 영혼, 생명을 뜻하는 “psyche”와 같은 의미이다.
이들이 말하는 아르케는 모두 물활론적인 입장이다. ‘세계가 신들로 가득 차 있다.’, ‘자석은 생명이 들어 있다.’는 단편들은 모두 이를 말해주고 있다. 이와 같이 삼라만상의 다양한 사물들의 궁극적 실재가 살아 있는 ‘하나’이고, 이로부터 무수하게 많은 다양한 사물들이 형성 변화된다고 보는 견해를 가진 이들을 묶어 소박한 일원론자들(Monists)이라고 일컫는다.
2) 사고의 갈림길에 선 두 철학자
페르시아가 지중해 연안의 국가를 강타한 후 철학적 사고의 판도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근원의 실재를 구명究明하는 데 있어서 끊임없는 생성변화의 동태적動態的인 측면을 강조한 철학적 사유와 근원의 실재에 대한 정태적靜態的인 측면을 강조한 철학적 사유가 등장하여 대립하게 된다. 전자는 지중해 소아시아 지방에 위치한 에페소스 출신의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BCE 544~483)이고, 후자는 이탈리아 남부 엘레아 출신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BCE 515?~450?)가 대표적이다.
생성生成은 대립물의 투쟁
헤라클레이토스는 역동적인 생성의 철학자로 불린다. 그러한 사유를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살았던 에페소스가 강대한 국가로 등극한 페르시아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BCE 494년에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소아시아가 초토화되고, 이런 위협으로 인해 에페소스는 정치, 경제적으로 늘 불안했고, 또한 사람들의 불안정한 삶과 그들이 향유하는 문화의 극심한 변화가 따랐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헤라클레이토스는 그 어떤 것도 항구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하는 과정의 연속선상에 놓여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고는 그의 “모든 것은 흐른다(panta rhei)”는 주장에 압축되어 있다. 요컨대 우리가 책상 앞에 꼼짝없이 앉아 있다고 치자. 우리는 자전하는 지구위에 살고 있어서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으면서 호흡을 하고 있다. 우리의 몸속에서도 혈액의 운동이 멈추지 않으며, 우리의 뇌가 활동하는 동안 수천 만 개의 세포가 생겨나고 죽으면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주에 운동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기본 전제이다. 달도 차면 기울고, 별들도 끊임없이 움직인다. “태산처럼 끄덕없다”는 말이 있지만, 태산도 순간의 정지함이 없이 움직인다. 히말라야 산 중턱에서 어류의 화석이 발견됐다는 것을 보면, 지금은 태산과 같은 산이지만 과거에는 바다였다는 것을 추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는 자전하면서 태양을 중심으로 초당 29.8km의 속도로 공전하고 있고, 태양도 태양계의 혹성들을 이끌고 초당 250km의 속도로 은하계 중심을 돈다.
세상에 변화하지 않는 것이란 전혀 없다. 모두가 양적으로 보나 질적으로 보나 정지함이 없이 변화하고 있다. 이런 사고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한 그의 조각 글에서도 확인된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한결같이 흐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강물도 변화를 거듭하고 있고, 강물에 담근 나의 발 또한 일순간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담글 수가 없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러한 운동변화가 곧 대립물의 투쟁이라 보았다. 무엇이 존재하려면 존재 근거로서 반대되는 것, 즉 모순되는 것을 가져야 한다. 통상적인 말로 표현하면, 같은 하나에 삶과 죽음, 깨어 있음과 잠을 잠, 어둠과 밝음 등이 대립해 있으면서 공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동양철학에서 운동변화의 원리로 말하는 밀고 당기는 음양陰陽의 힘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연의 모습을 서로 모순된 것의 싸움으로 본 것이다. 이것을 그는 자연의 법칙성(logos)이라고 했다.
자연은 상극相克의 법칙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활(弓)의 경우를 보자. 활의 존재는 시위를 당기는 힘과 밀어내려는 두 힘의 대립에 의해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즉 활은 인력引力과 척력斥力이라는 두 대립 항에 의해서 그 존재성과 변화성을 갖는 것이다. 자연세계의 구조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변화는 바로 대립물의 투쟁인 것이다. 서로 경쟁에서 이겨서 존재하려는 세상, 즉 “선천은 상극相克의 운運”(『道典』 2:17:1)이 지배하는 세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헤라클레이토스는 근원적인 실재로서 아르케를 “불”이라고 설정한다. 불은 역동적으로 살아 있는 신성한 존재이다. 이것이 변화하여 무수하게 많은 다양한 종류의 사물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즉 불의 끊임없는 변화과정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들이 대립물의 법칙성에 따라 잠시 그렇게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이 법칙성의 본성이 곧 신성한 불인 셈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의 현상을 지배하고 규제하는 질서로서의 법칙이 헤라클레이토스에게는 불과 같은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의 역동적인 사고는 후에 니체F.W. Nietzsche(1646~1716)가 초인超人, 권력의 의지를 전개하고, 헤겔G.W.F. Hegel(1770~1831)이 독일 관념 변증법적 운동을 완결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실재는 불변부동의 완전한 ‘하나’
반면에 파르메니데스는 정적인 존재의 철학자로 불린다. 헤라클레이토스와 정 반대의 사유를 펼친 것이다. 이러한 사유를 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살았던 남부 이탈리아의 엘레아 지방이 그리스 식민도시였지만, 사람들이 대체로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누렸던 도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자연의 변화 현상을 무지無知하게 다루지 않고 보다 깊은 차원의 철학적 사유를 시도했다. 심오한 사유로 말미암아 상식을 파괴하는 철학적 사유의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우선 실재에 대한 특성을 정의하는데, 참되게 실재하려면 영원히 그대로 존속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참된 “존재(to on)”는 변하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며, 또한 쪼개질 수도 없는 유일한 ‘하나’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물론이고, 말도 많고 이론도 가지가지로 펼쳐지게 됐던 서구 존재론의 논리는 바로 여기에서 태동되기 시작한 셈이다. 이러한 주장을 펼치게 했던 논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존재는 생성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만일 어떤 것이 생겨났다면 일단 없는 것(to me on)에서 생겨나야 우리가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고 있는 상태이므로, 생겨났다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는 없는 것에서 생겨날 수 없다. 왜냐하면 없는 것은 생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설혹 없는 것에서 존재가 생겨났다면, 없는 것도 존재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존재는 시간상으로 아무 때나 공간상으로 전후 관계없이 생겨났다고 해야 하므로 주장의 필연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존재는 움직이지 않는다. 존재가 움직이려면 움직여 갈 빈 공간이 있어야 한다. 빈 공간은 존재하는 것이든가 없는 것이든가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없는 것은 사유될 수도 없고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 따라서 존재 이외에 빈 공간은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빈 공간이 없으니 운동 또한 불가하다.
존재는 쪼개질 수 없는 완전한 ‘하나’이다. 만일 존재가 쪼개진다면 둘로 나누어질 것이고, 그러려면 나누는 제3의 것이 있어야 한다. 제3의 것은 결국 없는 것이어야 하는데,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 또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존재는 참으로 전체이고, 과거로부터 불생불멸하며 영구하게 존속하는 것이고, 완전히 연속적인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논리이다.
문제는 생성소멸을 거듭하는 자연 현상이 명백한 사실이고, 또한 불연속체의 무수히 다양한 것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가 제시한 존재는 ‘많음’이 아니라 전체로서 ‘하나’이면서 불변不變 부동不動한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이를 어떻게 해명했을까? 결과적으로 그는 자연현상의 다양한 것들이란 한낱 미망의 허구요 허상이며 환상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이러한 사상은 후에 플라톤의 존재론(이데아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중세의 신학적 기반이 된 플로티누스Plotinus(204~270)의 ‘일자’론과, 근대의 데카르트R. Descartes(1596~1650)를 비롯한 합리주의 전통의 초석이 된다.
3) 귀류법歸謬法의 창시자 제논
파르메니데스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현상세계의 ‘많음’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 단순한 허상이며, 실재란 오직 ‘하나’이고 불변 부동하는 것이라고 했다. 과연 그런가? 만일 누군가가 날카로운 창을 들어 파르메니데스를 향해 던졌고, 파르메니데스는 이를 맞고 죽었다고 치자. 이래도 그는 현상계의 다양성과 운동 변화가 모두 허상이라 말할 수 있었을까?
파르메니데스의 실재론은 치명적인 약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주변의 사상가들로부터 공격을 받기 일쑤였다. 이에 상대방의 공격을 논파하는 방법을 최초로 개발한 철학자가 등장한다. 다름 아닌 그의 뛰어난 제자 제논Zenon(BCE 490~430?)이다. 제논의 관심은 주로 스승에게 쏟아지는 비판에 대한 합리적인 답변을 구하는 일에 있었다.
제논은 스승의 이론이 타당함을 어떻게 논증하여 반대자들을 제압하였을까? 제논의 논법을 귀류법歸謬法(Reductio ad absurdum)이라 한다. 귀류법이란 직역하자면 ‘불합리에로의 환원’이란 뜻이다. 즉 이러저러한 전제에서 출발한 상대방의 논증이 잘못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보여준 뒤에, 그러한 전제가 틀렸다는 점을 지적하여 결국 자신의 전제가 옳음을 입증하는 논법이다.
현상 세계의 존재가 생성 변화의 운동을 하려면, 크기를 갖는 것은 무엇이든지 ‘무한 분할’이 돼야 한다. 그래야만 현상의 무수히 다양한 것들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무한 분할이 가능하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보자. 제논은 네 가지 예를 들어 존재는 분할될 수 없고 운동 또한 불가능함을 입증한다. 증명의 예시는 경주로競走路, 아킬레스와 거북이, 날아가는 화살, 운동의 상대성이다.
경주자는 100m의 거리를 완주할 수 없다?
남자 육상 100m 경주 최고 기록 보유자인 자메이카 출신 우사인 볼트Usain Bolt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총알 탄 사나이로 알려져 있다. 2009년에 그가 100m 거리를 완주하는데 세운 세계 신기록은 9.58초였다. 그런데 제논의 논법에 따르면 그는 100m 거리를 눈앞에 놓고 일생 동안 뛰어도 종착점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째서 그런가?
크기를 가진 것들이 무한분할이 된다면, 100m의 거리 또한 무한분할이 되어 무한 수의 점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우사인이 100m의 경주로를 달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한수의 점들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그는 먼저 반(50m 지점)을 통과하고, 다음에 그 반에서 반(75m 지점)을 통과해야 하고, 그 다음에 그 반에 반에서 반(87.5m 지점)을 통과해야 하고, 계속해서 그 반에 반에서 반에 반(93.75m 지점) …을 통과할 수밖에 없게 된다. 통과해야 할 지점들이 무한수이기 때문에 우사인은 무한한 시간 동안 달려야 한다. 그러므로 우사인은 결코 100m 지점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우사인은 실제로 100m 지점에 도달한다. 이 사실은 환상일까? 우사인이 아무리 빠른 총알 탄 사나이라 하더라도 100m의 중간 지점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의 어느 지점에도 도달할 수 없다. 만일 무한히 많은 지점들이 존재한다면, 논리적으로 볼 때 무한히 많은 시간 안에 무한히 많은 지점들을 통과한다. 이것은 불가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논은 실제로 다양하게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현상 세계의 생성 변화란 모두 환상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제논의 역리(=역설, Paradox)가 시사하듯이, 현실과 수학적인 논리 사이에 넘나들 수 없는 괴리가 있다. 이 문제로 인해 철학사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크기를 가진 것이 논리적으로 무한히 분할될 수 있다는 문제는 근대의 위대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라이프니쯔G.W. Leibniz(1646~1716)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 결과 라이프니쯔는 현상세계의 다양성을 구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형이상학적인 “단자론(monadology)”을 체계화했고, 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웠던 “미분과 적분”이라는 수학적 이론을 창안하였던 것이다.
아무리 빠른 아킬레우스도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아킬레우스Achilleus는 호메로스Homeros가 『일리아스Ilias』에서 전하는 트로이 전쟁 영웅이다. 그리스의 가장 오래된 서사시 『일리아스』는 호메로스가 트로이의 왕성王城이 위치해 있던 일리온 지역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아킬레우스는 빠르게 잘 달리기로 유명하다. 반면에 거북이는 가장 느리게 움직인다. 만일 이 둘이 달리기 경주를 하게 된다면,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결코 추월하여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제논의 역리가 보여준다.
결승점을 200m로 설정하고 이 둘이 경주를 한다고 해 보자. 거북이가 100m 전방에서 출발하고, 아킬레우스는 100m 뒤에서 출발한다고 할 때, 200m의 길이가 무한분할이 가능하다면, 아킬레우스는 제아무리 빠르게 달린다 하더라도, 거북이를 결코 추월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아킬레우스가 빠르게 달려 거북이가 출발했던 100m 지점에 도착하면, 그 시간에 거북이는 얼마만큼 앞으로 전진했을 것이고, 다시 거북이가 전진했던 만큼 아킬레우스가 달려가면 거북이는 또 얼마만큼 전진했을 것이고, 이 과정은 무한히 반복된다. 그러므로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를 결코 추월할 수 없다.
길이가 무한분할이 가능하다면, 적어도 수학적인 논리로 보면 이 이론이 맞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금방 추월한다. 수학의 논리적인 세계와 물리적인 현실세계간의 괴리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문제를 아주 심도 있게 다루어 제논의 역리를 해결하려고 시도한 수학자가 등장한다. 독일에서 출생한 칸토르G.F.L.P Cantor(1845~1918)이다. 그는 무한수를 셈하는 집합론을 창안하여 수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놓았다.
날아가는 화살은 정지해 있다?
우리의 뼈아픈 역사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제작된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장면이 있다. 그것은 주인공 남이가 마지막으로 쏜 화살이 바람을 가르고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가 가장 유능한 적장의 목을 꿰뚫었던 국면이었을 것이다. 그 화살은 움직여 날아가고 있었던 것일까, 정지해 있었던 것일까?
공간의 길이가 무한분할이 가능하다면 날아가는 화살은 정지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제논의 역설이다. 공간의 길이도 크기를 갖는다면 무한히 분할된 점들로 이루어졌을 것이고, 시위를 떠난 화살이 날아가려면 무한히 분할된 점들을 거치면서 과녁에 적중하게 된다. 그런데 화살은 과녁에 도달하기 전에 반을 지나야 하고, 반을 지나려면 그 반에서 반을 지나게 되고, 반에서 반에 … 라는 과정은 무한히 계속된다. 결국 화살은 움직일 수 없고, 나는 화살은 환상이다. 그러므로 모든 경우에서 만물은 무한히 분할되어 ‘많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일자’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현실적인 생성변화의 운동이란 일종의 환상이다.
운동의 속도는 상대적이라는 제논의 역리
움직이는 물체의 속도는 관점에 따라서 상대적이다. 이는 우리가 기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어느 기차역에는 정지해 있는 기차(A), 100km로 내려오는 기차(B), 100km로 올라가는 기차(C)가 동시에 마주할 때가 있다. 이 경우에서 우리가 만일 정지해 있는 기차에 앉아 있으면 하행선(B)과 상행선(C)의 속도는 100km의 속도로 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00km로 달리는 기차(상행선, 혹은 하행선)에 앉아 있으면서 정지해 있는 기차(A)를 쳐다보게 되면 100km의 속도로 달리게 되지만, 달려오는 기차를 보게 되면 200km의 속도로 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100㎞의 속도와 200㎞의 속도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동일한 속도의 운동이란 것이 실은 동일한 속도의 운동이 아니라 상대적인 운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운동이란 명확하게 정의될 수 없다. 이점은 후대에 세기적인 물리학자 아인슈타인A. Einstein(1879~1955)에 의해서 명확히 해명된다. 진리는 불변적이고 절대적인 것이지만, 이러한 사실은 인식의 불확실성과 지식의 상대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서 제논이 네 가지 역설을 통해 증명하려 했던 것은 자신의 스승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변론하고, 스승에 반대하는 자들의 이론이 결국 오류에 봉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즉 ‘많음’의 존재와 생성변화의 운동을 주장하는 자들은 결국 무한분할의 불합리성에 빠지게 되므로, 오직 불생불멸하는 ‘일자’요, 존재 그 자체만이 진리라는 것이다.
☞ 다음호(4번째) 게재될 주제
【 원자론과 물질개벽을 이룬 근대의 물리적 실재론 】
1) 실재와 생성의 대립을 해결한 다원론(多元論)
광대한 하나의 지극함이여, 이를 양기라 부르나니
無有而混(무유이혼)하고 虛粗而妙(허조이묘)로다
없음과 있음이 혼재하고, 텅빔과 거칠게 있음이 오묘하구나
三一其體(삼일기체)오 一三其用(일삼기용)이니
셋은 하나를 그 체로 하고 하나는 셋을 그 용으로 하나니
混妙一環(혼묘일환)이오 體用無歧(체용무기)라
혼재함과 오묘함이 하나로 순환하니 체와 용은 둘이 아니로다
大虛有光(대허유광)하니 是神之像(시싱지상)이오
광대한 텅빔에 광명이 있으니 이것이 신의 형상이요
大氣長存(대기장존)하니 是神之化(시기지화)라.
광대한 기가 장구하게 있으니 이것이 신의 조화로다
眞命所源(진명소원)이오 萬法是生(만법시생)이라
진실한 생명이 발원하는 바요 모든 법이 여기에서 생기느니라
-『환단고기』「소도경전본훈」 선인 발귀리의 송가 중에서-
“존재”에 대한 물음은 진리탐구의 시작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물론이고 우주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명백한 사실은 모든 것들이 순간의 정지도 없이 생성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무생물이든 식물이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생겨나서 존재하는 것은 모두 쉬지 않고 생장염장 과정으로 변화해가기 때문이다.
시야를 돌려 지구를 들여다보자. 어떤 것들은 금방 생겨났다가 없어지는가 하면, 하루살이와 같은 것들은 단 하루밖에 더 이상 살지 못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오늘날 생명공학자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하루에도 수많은 종류의 생명체가 창조되거나 소멸되어 없어진다. 반면에 사람이나 어떤 동물은 개별적으로 몇십 년을 넘어서 백 년 이상을 존속하기도 하고, 어떤 나무는 몇백 년을 넘어서 몇천 년을 존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사시四時 사철로 순환하는 시간계열의 흐름에 따라 사람은 사람을 낳으며, 개는 개를 낳고, 장미 씨를 심으면 장미가 나오고, 이곳에 있는 소나무는 죽어서 없어져도 다른 소나무들이 항상 존속하고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종種은 ‘왜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이러한 의문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탐구력과 판별력을 겸비한 사람이라면 한번쯤 던져볼 수 있는 물음일 것이다.
종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 무엇이 지속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학문이 시작되면서 알고 있었던 사실일 터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주요 저서 『형이상학Metaphysica』에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지성인들이 끊임없이 탐구해온 물음이 바로 “존재란 무엇인가”였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존재”란 말은 그리스어로 “to on”이고 영어로 표기하면 “The Being”이다. 이는 거창하고 심오한 뜻이 아니라 간단히 말해서 지속적으로 ‘있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우리의 사유가 진리탐구를 향해 떠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존재가 실재요 진리라는 견해
자연세계를 바라볼 때, 번갯불처럼 순간적으로 있다가 없어지는 것도 존재하는 것이요, 영구히 지속하는 것도 모두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심지어 없는 것(無)도 있다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존재개념은 최고의 유개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결정적인 문제를 하나 제기해볼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는 존재하고 있지만 다음 순간에 변화하여 없어졌을 경우에도 우리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속담에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 한다”는 말이 시사하듯이, 없는데도 있다고 말하면 이는 곧 거짓이 되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참은 진리이고 거짓은 진리가 아니라고 한다. 그럼 참과 거짓의 기준은 무엇인가? 플라톤은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 여기에 진리眞理가 있다고 했다. ‘있는 것을 없다’고 말하거나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라는 얘기다. 다시 말해서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은 참이고, 사실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말하면 거짓이라는 얘기다. 『논리학(Logic)』에서 볼 때 진리는 “동일률同一律”에 근거한 것이고, 거짓은 동일률을 위배하는 언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일률은 참과 거짓을 다루는 논리학의 기본 공리이다. 기본 공리는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 충족이유율을 말하는데, 동일률을 근거로 해서 모순율과 배중률이 나온다. 이 세 가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창안한 것이고, 충족이유율은 근대의 철학자 라이프니쯔(Leibniz, 1646~1716)가 덧붙인 것이다.
서양 고대철학의 사유에서 진리탐구에 대한 학문적 진술은 동일률을 위배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를 가르치고 배우는 학문적 가능 근거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제 동일률에 근거해서 존재를 탐구할 때 우리는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잠시 동안 존재하는 것’, ‘참으로 존재하는 것’을 구분해볼 필요가 있다.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인데, 인간의 지성 속에서 일어나는 환상이나 환영, 망상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믿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기력이 부족하여 헛것을 본다든가, 착시 및 착각 등이 그것이다. ‘잠시 동안 존재하는 것’은 소위 감각에 들어오는 현상세계의 것들로 시간계열의 흐름에 예속되어 생성소멸의 변화과정으로 진행되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는 착한 사람이었으나 세파에 찌들다 보니 악한 사람으로 변했거나, 지금은 존재하지만 시간이 흘러 사라져버린 경우가 그것이다.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란 시간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생성변화가 전혀 없는, 지속적으로 항상 일정하게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생긴 집, 저렇게 생긴 집은 오래되면 부서져 없어질지라도 ‘집 자체’, 다른 용어로 말하면 집의 본성만은 항존하는 것으로 보는 경우가 그것이다. 우리의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난다.’는 말도 콩이나 팥의 본성이 자체로 불변적인 것임을 함축한다.
진리탐구는 ‘항존恒存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추려내는 작업이라 볼 수 있다. 항존하는 것은 자체로 ‘동일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전제로 해서 학적 인식認識(episteme)과 정의定義(definition)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점에 대해 플라톤은 “완전히 존재하는 것은 완전히 이해될 수 있는 것(pantelos on, pantelos gnoston)”이라고 말했다. 진리의 대상은 언제 어디에서나 항상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인식이 되며, 참된 가르침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만일 어떤 존재가 ‘수시로 변화하거나,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게 되는 것’이라면, 혹은 사실 없는 것인데도 있는 것으로 착각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라면, 이는 진리탐구의 대상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 이런 것들은 정확히 알지도(인식) 못할 뿐만 아니라 무엇이라고 가르칠 수도(정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것’만이 진리탐구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왜냐하면 대상이 고정되어 있어야 이를 파악하는 인식의 주체가 유동적이지 않을 것이고, 정의 또한 고정성을 본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감각에 주어지는 감각적인 지식들은 한결같이 변화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참된 인식과 정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로부터 참 존재 = 사유 = 인식(정의) = 진리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이제 서양철학의 여명기부터 제기되어왔던 ‘존재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본질적으로 “실재하는 것”에 대한 탐구임을 알 수 있다. 실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에 종속하지 않는 존재, 즉 환상적인 허상도 아니고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그런 것이 아닌, 불변적이고 항구적으로 존속하는 ‘참으로 있는 것’을 의미한다. ‘참으로 있다’는 의미에서 ‘존재란 무엇인가’는 ‘실재實在(reality)란 무엇인가’의 물음으로 환원됨을 알 수 있다.
실재를 보는 관점들
‘실재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철학적 사유가 현상 세계의 온갖 변화와 차이 속에서도 ‘항상 같은 것으로 남아 있는 어떤 것’을 찾아내는 데로 향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이것을 근거로 해서 우리는 삼라만상의 변화무쌍한 것들이 왜 그렇게 존재하게 되는지를 명명백백하게 설명해 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재’는 모든 생성 변화하는 것들의 근원적인 바탕이요, 창조변화의 원인이요 원리가 된다고들 말한다.
실재에 대한 서양철학의 탐구관점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서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1. 물리적 실재론의 전형인 유물론(Materialism), 2. 인문개벽의 근거인 형이상학적 실재론, 3. 정신적 실재론의 전형인 유심론(Spiritualism)이 그것이다. 이런 방식의 구분은 동양철학에서 소위 “주기론主氣論”이니, “주리론主理論”이니, “심성론心性論” 등에 비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유물론은 실재하는 것을 형질에 있어서 오직 ‘물질적인 어떤 것’으로 간주하여 마음과 의식을 포함하는 정신적인 모든 것들이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되어 설명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실재는 오직 물질뿐이라는 얘기다. 형이상학적 실재론은 참된 존재를 변화무쌍한 현실의 감각세계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존재근거로서의 실재를 내세운다. 여기에는 인간 삶의 가치규범이라든가 문명 지향점의 근거도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유심론은 엄밀한 의미에서 관념론이 아니지만, 정신적인 어떤 마음(心)이 실재하고, 정신적 사고의 현상이나 유형무형有形無形의 것들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밝히려 한다.
1 물리적 실재론의 전형인 유물론(Materialism)
【 소박한 물리적 실재론 】
1) 일원적一元的인 물활론자들
우선 물질적인 것을 궁극으로 실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소박한 일원론의 입장을 검토해 보자. 여기서 궁극적 실재가 오직 ‘하나’임을 말하면 일원론이고, ‘많다’고 말하면 다원론多元論이라 부른다.
고대 서양에서 학문의 역사는 꽤 오래 전부터 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집트, 바빌론 등지에서 발전된 천문학, 토목공학, 기하학 등은 일찍부터 인류 고대문명을 일으키는 데에 중요한 원동력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양철학의 출범은 몇천 년이나 늦은 BCE 6세기경에 이오니아지방의 그리스 식민도시 밀레토스에서 시작한다. 다른 학문에 비해 철학은 왜 이렇게 늦게 등장하게 됐던 것일까?
다른 학문의 사유와 철학적 사유는 무엇이 다를까? 결정적인 이유를 우리는 『환단고기』에 실려 있는 한민족의 최초 경전 「천부경天符經」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시작이나 무에서 비롯한 하나(一始無始一)이다. 하나가 셋으로 나뉜다 하더라도 그 근본은 다함이 없다(析三極無盡本) … 하나는 끝이나 무로 돌아가 마무리된 하나이다(一終無終一)”(「천부경」). 즉 무수하게 많은 삼라만상은 모두가 ‘하나’에서 나와 펼쳐졌다가 ‘하나’로 돌아간다는 환원주의 사고방식이 철학적 사유를 태동하게 한 실마리가 된다.
모든 것은 ‘하나’에서 나와서 펼쳐지고 ‘하나’로 돌아간다는 사고
서양철학의 시작은 우리가 직접 접하는, 생성 변화하는 자연적인 사물들에 대해 최초로 의문을 제기한 자들에게서 비롯된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연이란 무엇인가’의 물음을 던지고, 여기로부터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으려고 시도했다. 이런 물음을 던졌다는 것은 다름 아닌 진리탐구에 대한 사고思考의 혁명이 있었던 것을 뜻할 것이다. 여기에 동참한 철학자들을 우리는 자연철학자들이라고 부른다.
먼저 “자연physis”의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살펴봄이 좋을 것 같다. ‘자연’은 어원적으로 “phyo”라는 그리스어 동사에서 나왔다. 이는 일차적으로 ‘낳다’, ‘자라나다’(성장하다)의 뜻이다. 그래서 자연적인 사물들은 잠시의 정지도 없이 낳고 자라나고 성장 변화해 가는 것이다. 다음으로 낳고 자라나는 모든 것은 ‘본성상 그렇게 생겨 먹은 것으로만 낳고 자라난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을 심으면 본성상 사람이 태어나 사람으로 자라나고, 나무를 심으면 본성상 나무로 싹이 터 나무로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본성本性’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자연을 바라볼 때 생성 변화의 모습은 현상現象이고, 그 배후에 불변적이고 항구적인 어떤 것은 본성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자연세계의 변화무쌍한 사물들은 마구잡이로 무질서하게 생성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불변적이고 본성적인 것이 있고, 이것으로부터 잠시 이러저러한 것으로 현상됐다가 다시 그것에로 돌아간다. 이러한 사고를 배경으로 자연철학자들은 세상이 아무리 다양하게 전개된다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근원적인 실재가 있고, 전개된 모든 것이 다시 그것에로 환원된다는 혁명적인 사고를 가졌던 것이다.
영원히 존재하는 근원적인 실재를 찾으려는 열망으로부터 자연철학자들은 “아르케archē”라는 개념을 상정하게 된다. 아르케는 그리스어 동사 “시작하다, 출발하다archaō에서 나온 명사로 “시작”, “출발”의 뜻이다. 여기로부터 아르케는 모든 것들의 시작점이 되면서 모든 것들의 근원이 되는, 본성적인 존재원리요 원인의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해서 자연의 아르케를 찾는 작업이야말로 바로 궁극으로 실재하는 것을 밝히는 것이라 하겠다.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
이와 같은 사고의 바탕 위에서 현대 물질문명의 비조라 불리는 최초의 자연 철학자 탈레스Thales(BCE 624~546)가 등장한다. 그는 젊은 시절에 지중해 연안 국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천문학, 기하학 등에 관심을 갖고 학구적인 열의를 불태웠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탈레스는 학문적인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식日蝕이 일어나는 것을 계산해낼 정도로 천문학과 기하학에도 능통하였다고 전해지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자신이 관찰하고 배워서 얻은 천문학을 바탕으로 그는 자연 현상을 예측하기도 하였는데, 그 일화를 소개하면 이렇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은 올리브기름이 최대의 산출 품목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부분의 음식에 올리브기름을 넣어 조리했기 때문이다. 자연 현상을 정확하게 관찰한 탈레스는 가을에 올리브가 대풍이 될 것을 내다보고, 주변을 돌면서 사용하지 않는 올리브 짜는 기름틀을 헐값에 사들였다. 가을이 되자 올리브 농사는 대풍이었다. 그래서 농부들은 갑작스레 많은 올리브를 짜기 위한 다수의 기름틀이 필요하게 되자 탈레스는 비싼 가격에 팔아넘겨 많은 돈을 벌었다. 한마디로 매점매석으로 떼돈을 번 최초의 인물은 바로 철학자였던 것이다.
이 일화가 전해주는 요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근원의 실재를 탐구하여 지혜를 획득하려는 철학자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철학자가 돈을 벌 요량이라면 탁월한 지혜를 동원하여 단번에 떼돈을 벌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철학자는 가난하게 살아간다. 그것은 철학자가 무능력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많은 노력을 투자하여 얻은 탁월한 지혜는 돈벌이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의 우리나라는 인문주의 가치관을 상당히 천대하고 있다. 최근에는 자본주의와 경제 제일 우선주의에 힘입어 팽배해 있는 물신주의, 지역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천민자본주의에 물들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형편이다. 탈레스의 일화는 인간 삶의 가치가 무엇이고, 동물적 이기주의를 넘어선 인격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것인지를 모르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대목이기도 하다.
궁극으로 실재하는 것은 ‘하나’라는 주장
탈레스는 자연의 참된 실재, 즉 아르케를 “물hydōr”이라고 했다. 그는 물이 변해서 현상의 다양한 사물들이 생겨나고, 다시 사물들이 현상에서 사라지면 결국 근원의 물로 돌아간다고 보았던 것이다. 즉 물은 궁극의 실재로서 항상 존속하는 것이며, 모든 만물의 생성 변화의 원인이요 원리가 된다는 것이다.
탈레스가 말한 물은 살아있는 신성한 존재로서의 물이다. 이러한 견해는 그리스어에서 물질을 뜻하는 “휠레hyle”와 생명활동을 뜻하는 “조에zoe”의 합성어로 철학사에서 물활론物活論(hylozoism)이라 불린다. 물활론은 동식물은 물론이고 바위나 돌과 같은 물질도 생명을 갖고 활동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물활론적인 사고는 모든 물질들에게 정령이나 혼과 같은 것이 내재해 있음을 뜻한다. 이점을 증산도 도전에서는 “천지간에 가득 찬 것이 신神이니 풀잎 하나라도 신이 떠나면 마르고 흙 바른 벽이라도 신이 떠나면 무너지고, 손톱 밑에 가시 하나 드는 것도 신이 들어서 되느니라. 신이 없는 곳이 없고, 신이 하지 않는 일이 없느니라.”(『道典』 4:62:4~5)고 밝히고 있다.
탈레스의 제자이면서 친구인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BCE 611~546)가 있다. 그는 아르케를 “무한정자無限定者(to apeiron)”라 했다. 이것으로부터 무수한 것들이 한정되어 산출되고 진화되어간다는 주장이다. 그는 역사상 최초로 진화론을 제기한 인물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밀레토스 출신 아낙시메네스Anaximenes(BCE 585~528)는 아르케를 “공기”라고 했다. 이 공기는 숨, 호흡, 영혼, 생명을 뜻하는 “psyche”와 같은 의미이다.
이들이 말하는 아르케는 모두 물활론적인 입장이다. ‘세계가 신들로 가득 차 있다.’, ‘자석은 생명이 들어 있다.’는 단편들은 모두 이를 말해주고 있다. 이와 같이 삼라만상의 다양한 사물들의 궁극적 실재가 살아 있는 ‘하나’이고, 이로부터 무수하게 많은 다양한 사물들이 형성 변화된다고 보는 견해를 가진 이들을 묶어 소박한 일원론자들(Monists)이라고 일컫는다.
2) 사고의 갈림길에 선 두 철학자
페르시아가 지중해 연안의 국가를 강타한 후 철학적 사고의 판도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근원의 실재를 구명究明하는 데 있어서 끊임없는 생성변화의 동태적動態的인 측면을 강조한 철학적 사유와 근원의 실재에 대한 정태적靜態的인 측면을 강조한 철학적 사유가 등장하여 대립하게 된다. 전자는 지중해 소아시아 지방에 위치한 에페소스 출신의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BCE 544~483)이고, 후자는 이탈리아 남부 엘레아 출신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BCE 515?~450?)가 대표적이다.
생성生成은 대립물의 투쟁
헤라클레이토스는 역동적인 생성의 철학자로 불린다. 그러한 사유를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살았던 에페소스가 강대한 국가로 등극한 페르시아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BCE 494년에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소아시아가 초토화되고, 이런 위협으로 인해 에페소스는 정치, 경제적으로 늘 불안했고, 또한 사람들의 불안정한 삶과 그들이 향유하는 문화의 극심한 변화가 따랐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헤라클레이토스는 그 어떤 것도 항구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하는 과정의 연속선상에 놓여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고는 그의 “모든 것은 흐른다(panta rhei)”는 주장에 압축되어 있다. 요컨대 우리가 책상 앞에 꼼짝없이 앉아 있다고 치자. 우리는 자전하는 지구위에 살고 있어서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으면서 호흡을 하고 있다. 우리의 몸속에서도 혈액의 운동이 멈추지 않으며, 우리의 뇌가 활동하는 동안 수천 만 개의 세포가 생겨나고 죽으면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주에 운동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기본 전제이다. 달도 차면 기울고, 별들도 끊임없이 움직인다. “태산처럼 끄덕없다”는 말이 있지만, 태산도 순간의 정지함이 없이 움직인다. 히말라야 산 중턱에서 어류의 화석이 발견됐다는 것을 보면, 지금은 태산과 같은 산이지만 과거에는 바다였다는 것을 추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는 자전하면서 태양을 중심으로 초당 29.8km의 속도로 공전하고 있고, 태양도 태양계의 혹성들을 이끌고 초당 250km의 속도로 은하계 중심을 돈다.
세상에 변화하지 않는 것이란 전혀 없다. 모두가 양적으로 보나 질적으로 보나 정지함이 없이 변화하고 있다. 이런 사고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한 그의 조각 글에서도 확인된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한결같이 흐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강물도 변화를 거듭하고 있고, 강물에 담근 나의 발 또한 일순간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담글 수가 없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러한 운동변화가 곧 대립물의 투쟁이라 보았다. 무엇이 존재하려면 존재 근거로서 반대되는 것, 즉 모순되는 것을 가져야 한다. 통상적인 말로 표현하면, 같은 하나에 삶과 죽음, 깨어 있음과 잠을 잠, 어둠과 밝음 등이 대립해 있으면서 공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동양철학에서 운동변화의 원리로 말하는 밀고 당기는 음양陰陽의 힘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연의 모습을 서로 모순된 것의 싸움으로 본 것이다. 이것을 그는 자연의 법칙성(logos)이라고 했다.
자연은 상극相克의 법칙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활(弓)의 경우를 보자. 활의 존재는 시위를 당기는 힘과 밀어내려는 두 힘의 대립에 의해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즉 활은 인력引力과 척력斥力이라는 두 대립 항에 의해서 그 존재성과 변화성을 갖는 것이다. 자연세계의 구조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변화는 바로 대립물의 투쟁인 것이다. 서로 경쟁에서 이겨서 존재하려는 세상, 즉 “선천은 상극相克의 운運”(『道典』 2:17:1)이 지배하는 세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헤라클레이토스는 근원적인 실재로서 아르케를 “불”이라고 설정한다. 불은 역동적으로 살아 있는 신성한 존재이다. 이것이 변화하여 무수하게 많은 다양한 종류의 사물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즉 불의 끊임없는 변화과정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들이 대립물의 법칙성에 따라 잠시 그렇게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이 법칙성의 본성이 곧 신성한 불인 셈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의 현상을 지배하고 규제하는 질서로서의 법칙이 헤라클레이토스에게는 불과 같은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의 역동적인 사고는 후에 니체F.W. Nietzsche(1646~1716)가 초인超人, 권력의 의지를 전개하고, 헤겔G.W.F. Hegel(1770~1831)이 독일 관념 변증법적 운동을 완결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실재는 불변부동의 완전한 ‘하나’
반면에 파르메니데스는 정적인 존재의 철학자로 불린다. 헤라클레이토스와 정 반대의 사유를 펼친 것이다. 이러한 사유를 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살았던 남부 이탈리아의 엘레아 지방이 그리스 식민도시였지만, 사람들이 대체로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누렸던 도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자연의 변화 현상을 무지無知하게 다루지 않고 보다 깊은 차원의 철학적 사유를 시도했다. 심오한 사유로 말미암아 상식을 파괴하는 철학적 사유의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우선 실재에 대한 특성을 정의하는데, 참되게 실재하려면 영원히 그대로 존속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참된 “존재(to on)”는 변하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며, 또한 쪼개질 수도 없는 유일한 ‘하나’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물론이고, 말도 많고 이론도 가지가지로 펼쳐지게 됐던 서구 존재론의 논리는 바로 여기에서 태동되기 시작한 셈이다. 이러한 주장을 펼치게 했던 논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존재는 생성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만일 어떤 것이 생겨났다면 일단 없는 것(to me on)에서 생겨나야 우리가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고 있는 상태이므로, 생겨났다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는 없는 것에서 생겨날 수 없다. 왜냐하면 없는 것은 생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설혹 없는 것에서 존재가 생겨났다면, 없는 것도 존재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존재는 시간상으로 아무 때나 공간상으로 전후 관계없이 생겨났다고 해야 하므로 주장의 필연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존재는 움직이지 않는다. 존재가 움직이려면 움직여 갈 빈 공간이 있어야 한다. 빈 공간은 존재하는 것이든가 없는 것이든가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없는 것은 사유될 수도 없고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 따라서 존재 이외에 빈 공간은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빈 공간이 없으니 운동 또한 불가하다.
존재는 쪼개질 수 없는 완전한 ‘하나’이다. 만일 존재가 쪼개진다면 둘로 나누어질 것이고, 그러려면 나누는 제3의 것이 있어야 한다. 제3의 것은 결국 없는 것이어야 하는데,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 또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존재는 참으로 전체이고, 과거로부터 불생불멸하며 영구하게 존속하는 것이고, 완전히 연속적인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논리이다.
문제는 생성소멸을 거듭하는 자연 현상이 명백한 사실이고, 또한 불연속체의 무수히 다양한 것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가 제시한 존재는 ‘많음’이 아니라 전체로서 ‘하나’이면서 불변不變 부동不動한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이를 어떻게 해명했을까? 결과적으로 그는 자연현상의 다양한 것들이란 한낱 미망의 허구요 허상이며 환상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이러한 사상은 후에 플라톤의 존재론(이데아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중세의 신학적 기반이 된 플로티누스Plotinus(204~270)의 ‘일자’론과, 근대의 데카르트R. Descartes(1596~1650)를 비롯한 합리주의 전통의 초석이 된다.
3) 귀류법歸謬法의 창시자 제논
파르메니데스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현상세계의 ‘많음’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 단순한 허상이며, 실재란 오직 ‘하나’이고 불변 부동하는 것이라고 했다. 과연 그런가? 만일 누군가가 날카로운 창을 들어 파르메니데스를 향해 던졌고, 파르메니데스는 이를 맞고 죽었다고 치자. 이래도 그는 현상계의 다양성과 운동 변화가 모두 허상이라 말할 수 있었을까?
파르메니데스의 실재론은 치명적인 약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주변의 사상가들로부터 공격을 받기 일쑤였다. 이에 상대방의 공격을 논파하는 방법을 최초로 개발한 철학자가 등장한다. 다름 아닌 그의 뛰어난 제자 제논Zenon(BCE 490~430?)이다. 제논의 관심은 주로 스승에게 쏟아지는 비판에 대한 합리적인 답변을 구하는 일에 있었다.
제논은 스승의 이론이 타당함을 어떻게 논증하여 반대자들을 제압하였을까? 제논의 논법을 귀류법歸謬法(Reductio ad absurdum)이라 한다. 귀류법이란 직역하자면 ‘불합리에로의 환원’이란 뜻이다. 즉 이러저러한 전제에서 출발한 상대방의 논증이 잘못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보여준 뒤에, 그러한 전제가 틀렸다는 점을 지적하여 결국 자신의 전제가 옳음을 입증하는 논법이다.
현상 세계의 존재가 생성 변화의 운동을 하려면, 크기를 갖는 것은 무엇이든지 ‘무한 분할’이 돼야 한다. 그래야만 현상의 무수히 다양한 것들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무한 분할이 가능하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보자. 제논은 네 가지 예를 들어 존재는 분할될 수 없고 운동 또한 불가능함을 입증한다. 증명의 예시는 경주로競走路, 아킬레스와 거북이, 날아가는 화살, 운동의 상대성이다.
경주자는 100m의 거리를 완주할 수 없다?
남자 육상 100m 경주 최고 기록 보유자인 자메이카 출신 우사인 볼트Usain Bolt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총알 탄 사나이로 알려져 있다. 2009년에 그가 100m 거리를 완주하는데 세운 세계 신기록은 9.58초였다. 그런데 제논의 논법에 따르면 그는 100m 거리를 눈앞에 놓고 일생 동안 뛰어도 종착점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째서 그런가?
크기를 가진 것들이 무한분할이 된다면, 100m의 거리 또한 무한분할이 되어 무한 수의 점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우사인이 100m의 경주로를 달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한수의 점들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그는 먼저 반(50m 지점)을 통과하고, 다음에 그 반에서 반(75m 지점)을 통과해야 하고, 그 다음에 그 반에 반에서 반(87.5m 지점)을 통과해야 하고, 계속해서 그 반에 반에서 반에 반(93.75m 지점) …을 통과할 수밖에 없게 된다. 통과해야 할 지점들이 무한수이기 때문에 우사인은 무한한 시간 동안 달려야 한다. 그러므로 우사인은 결코 100m 지점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우사인은 실제로 100m 지점에 도달한다. 이 사실은 환상일까? 우사인이 아무리 빠른 총알 탄 사나이라 하더라도 100m의 중간 지점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의 어느 지점에도 도달할 수 없다. 만일 무한히 많은 지점들이 존재한다면, 논리적으로 볼 때 무한히 많은 시간 안에 무한히 많은 지점들을 통과한다. 이것은 불가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논은 실제로 다양하게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현상 세계의 생성 변화란 모두 환상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제논의 역리(=역설, Paradox)가 시사하듯이, 현실과 수학적인 논리 사이에 넘나들 수 없는 괴리가 있다. 이 문제로 인해 철학사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크기를 가진 것이 논리적으로 무한히 분할될 수 있다는 문제는 근대의 위대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라이프니쯔G.W. Leibniz(1646~1716)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 결과 라이프니쯔는 현상세계의 다양성을 구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형이상학적인 “단자론(monadology)”을 체계화했고, 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웠던 “미분과 적분”이라는 수학적 이론을 창안하였던 것이다.
아무리 빠른 아킬레우스도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아킬레우스Achilleus는 호메로스Homeros가 『일리아스Ilias』에서 전하는 트로이 전쟁 영웅이다. 그리스의 가장 오래된 서사시 『일리아스』는 호메로스가 트로이의 왕성王城이 위치해 있던 일리온 지역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아킬레우스는 빠르게 잘 달리기로 유명하다. 반면에 거북이는 가장 느리게 움직인다. 만일 이 둘이 달리기 경주를 하게 된다면,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결코 추월하여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제논의 역리가 보여준다.
결승점을 200m로 설정하고 이 둘이 경주를 한다고 해 보자. 거북이가 100m 전방에서 출발하고, 아킬레우스는 100m 뒤에서 출발한다고 할 때, 200m의 길이가 무한분할이 가능하다면, 아킬레우스는 제아무리 빠르게 달린다 하더라도, 거북이를 결코 추월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아킬레우스가 빠르게 달려 거북이가 출발했던 100m 지점에 도착하면, 그 시간에 거북이는 얼마만큼 앞으로 전진했을 것이고, 다시 거북이가 전진했던 만큼 아킬레우스가 달려가면 거북이는 또 얼마만큼 전진했을 것이고, 이 과정은 무한히 반복된다. 그러므로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를 결코 추월할 수 없다.
길이가 무한분할이 가능하다면, 적어도 수학적인 논리로 보면 이 이론이 맞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금방 추월한다. 수학의 논리적인 세계와 물리적인 현실세계간의 괴리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문제를 아주 심도 있게 다루어 제논의 역리를 해결하려고 시도한 수학자가 등장한다. 독일에서 출생한 칸토르G.F.L.P Cantor(1845~1918)이다. 그는 무한수를 셈하는 집합론을 창안하여 수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놓았다.
날아가는 화살은 정지해 있다?
우리의 뼈아픈 역사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제작된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장면이 있다. 그것은 주인공 남이가 마지막으로 쏜 화살이 바람을 가르고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가 가장 유능한 적장의 목을 꿰뚫었던 국면이었을 것이다. 그 화살은 움직여 날아가고 있었던 것일까, 정지해 있었던 것일까?
공간의 길이가 무한분할이 가능하다면 날아가는 화살은 정지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제논의 역설이다. 공간의 길이도 크기를 갖는다면 무한히 분할된 점들로 이루어졌을 것이고, 시위를 떠난 화살이 날아가려면 무한히 분할된 점들을 거치면서 과녁에 적중하게 된다. 그런데 화살은 과녁에 도달하기 전에 반을 지나야 하고, 반을 지나려면 그 반에서 반을 지나게 되고, 반에서 반에 … 라는 과정은 무한히 계속된다. 결국 화살은 움직일 수 없고, 나는 화살은 환상이다. 그러므로 모든 경우에서 만물은 무한히 분할되어 ‘많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일자’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현실적인 생성변화의 운동이란 일종의 환상이다.
운동의 속도는 상대적이라는 제논의 역리
움직이는 물체의 속도는 관점에 따라서 상대적이다. 이는 우리가 기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어느 기차역에는 정지해 있는 기차(A), 100km로 내려오는 기차(B), 100km로 올라가는 기차(C)가 동시에 마주할 때가 있다. 이 경우에서 우리가 만일 정지해 있는 기차에 앉아 있으면 하행선(B)과 상행선(C)의 속도는 100km의 속도로 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00km로 달리는 기차(상행선, 혹은 하행선)에 앉아 있으면서 정지해 있는 기차(A)를 쳐다보게 되면 100km의 속도로 달리게 되지만, 달려오는 기차를 보게 되면 200km의 속도로 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100㎞의 속도와 200㎞의 속도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동일한 속도의 운동이란 것이 실은 동일한 속도의 운동이 아니라 상대적인 운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운동이란 명확하게 정의될 수 없다. 이점은 후대에 세기적인 물리학자 아인슈타인A. Einstein(1879~1955)에 의해서 명확히 해명된다. 진리는 불변적이고 절대적인 것이지만, 이러한 사실은 인식의 불확실성과 지식의 상대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서 제논이 네 가지 역설을 통해 증명하려 했던 것은 자신의 스승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변론하고, 스승에 반대하는 자들의 이론이 결국 오류에 봉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즉 ‘많음’의 존재와 생성변화의 운동을 주장하는 자들은 결국 무한분할의 불합리성에 빠지게 되므로, 오직 불생불멸하는 ‘일자’요, 존재 그 자체만이 진리라는 것이다.
☞ 다음호(4번째) 게재될 주제
【 원자론과 물질개벽을 이룬 근대의 물리적 실재론 】
1) 실재와 생성의 대립을 해결한 다원론(多元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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