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고차원적인 세상의 본질이 있을 거야” 외(노의선, 노금재, 정동섭)
[입도수기]
노의선(남, 28세) / 서울동대문도장 / 146년 음5월 입도
고등 학교 시절, 문득 든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왜 태어났고 어떤 이유로 인해 살아가는가? 다른 사람들은? 더 나아가서 인간은 왜 태어나고 살고 죽고 하는 걸까?’ 당시 학교에서 저는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교 몇 등’, ‘장학퀴즈 학교 대표’, ‘아마추어 성악가’ 등 전교생이 아는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고 선생님들의 칭찬과 또래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허무했습니다.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라도 난 듯 남들이 제게 쏟아내는 감정들이 무의미했습니다. “이런 시시한 것보다 더 고차원적인 세상의 본질이 있을 거야!” 하면서 제 나름대로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각종 철학 서적을 보는 흉내도 내보고 했지만 근원적인 답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들과 주변 어른들은 제 생각을 단순하게만 봤던 것 같습니다.
좋은 대학과 직장을 가지면 그런 의문은 풀린다는 식으로 말해주었지만 그걸 받아들이기에는 저는 너무 영악했습니다. 어른들도 제대로 모른다고 생각한 이후로는 대답 듣기를 포기하고 다녔습니다. 대신 지성인들의 집합소인 대학에서 실마리를 찾기로 했습니다.
막상 대학 생활을 하다 보니 다들 취업이나 돈 이야기만 했고, 제가 가진 생각은 남들에게는 ‘배부른 미친 소리’로 치부되었습니다. 그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적어도 대학생이라면 지성인이라고 불릴 만한데 단순하게 먹고 사는 문제에만 온 관심을 쏟으면 이런 생각은 누가 할까?’라고 생각이 들자 남들에게 제 생각을 꺼내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웠고 더 나아가서는 아예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제 자신도 그런 물음에 대한 답을 포기하게 되면서 점점 세상에 저를 맞춰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원하던 직업보다는 남들이 좋다는 직업을 가지려고 애를 썼습니다. ‘증산도’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처음 접한 건 2년 전 학교 축제 때였습니다. 휴학생이었지만 당시 학교에 다니고 있던 이동우 도생의 소개로 강윤성 포감님을 소개받아 그 자리에서 막차를 타고 갈 때까지 ‘도담’을 나누었습니다.
처음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이랑 몇 시간씩 이야기를 막힘없이, 분야를 뛰어넘어서, 종횡무진 화제가 왔다 갔다 하였습니다. ‘그것 참 희한한데?’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나만 이런 고민을 했던 것이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었습니다. 공무원에 도전한 후로 ‘증산도’는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시험 공부만이 제가 할 일이었고 합격만이 제 존재 가치를 확인해주는 수단이었습니다. 올해까지 도전했던 몇 번의 기회들이 불합격으로 이어지면서 각종 강박증과 스트레스로 인한 짜증, 그리고 우울증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나름대로 극복하려고 운동도 해보고 각종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읽고 실행해봤지만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다시 올 초 증산도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동우 도생님과 강 포감님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제 생각이 점차 맑아지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만날 때마다 이야기가 쉴 새 없이 이어졌고 이야기하면서 우주의 원리나 이치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만 있던 지식들이 체계가 잡히면서 전율에 사로잡힐 정도로 놀라웠습니다.
우주의 일년과 음양오행, 그리고 개벽과 천지공사 등을 배우면서 여태껏 제가 알고 있던 사실과 정보들이 통합되는 그 느낌은 ‘내가 살아있다!’라는 것을 체험하게 해주었습니다. 심지어는 역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제가 공무원 시험 때문에 역사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보면 증산도에서 이야기하는 각종 역사적 사건과 기록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공부하게 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의 권유로 도장 방문도 하고 21일 정성 수행을 하며 겪었던 일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저에게 문화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모든 교회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생각한 ‘신神의 뜻을 따르는 자’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교인들의 모습을 보고 나서 ‘신’에 대해 염증을 느끼게 있었습니다. 차라리 종교를 떠나서, 4대 성인들이 보여준 인간적인 모습이 더 ‘신’의 모습에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신은 있지만 관여하지 않는다’ 라는 생각이 머리에 오래 잡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행을 하면서 느낀 ‘빛의 세계’와 ‘인간과 다를 것 없던 신명들’, 내게 일어난 각종 사건 사고들과 그에 대한 분석을 해보면서 ‘이신사理神事’ 중 제가 제일 이해하지 못하던 신神의 영역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기존 종교에서 신의 사람들처럼 살지 않는 데에 대해 실망한 것과 현실에 대한 문제를 이치적으로 명쾌하게 풀어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증산도에 입도를 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여기까지 저를 이끌고 밀어준 수많은 사람들은 물론 비록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신명들의 힘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입도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까지는 ‘나는 왜 태어나고 살아가며 죽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완벽한 답은 내릴 수 없습니다. 아직은 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아는 지식만으로 답을 내더라도 제 자신이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문제에 대한 답의 방향을 알았으니 이제 달려갈 일만 남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증산도라는 길 위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준 이동우 도생과 강윤성 포감님, 교육을 담당해 주신 이연주 수석포감님, 그리고 동대문도장 도생 여러분들과 수호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더불어 조상님들의 음덕과 인연으로 여기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비록 지금 함께할 수는 없지만 부모님과 동생에게도 무한한 애정을 보냅니다.
바른 길 위에 서기까지 많은 고민과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많은 것을 담는 큰 그릇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건져내겠습니다. 진리가 우리 모두를 살릴지니, 상생. ◎
노금재(남, 48세) / 울산옥현도장 / 도기 146년 음 5월 입도
누구나 인생을 살다보면 뜻하지 않게 여러 가지 문제로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과연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또는 인생이란 어디에서 왔다가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인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 시중에 나와 있는 여러 가지 철학서적과 성현들의 가르침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관심분야를 찾게 마련입니다. 저 또한 여러 과정과 너무나 많은 시간을 통해 결국 증산도 옥현도장에 입도하게 되었습니다.
입도 과정을 짧은 수기로 표현하려니 저 자신의 지난 49년 세월을 돌이켜보게 되면서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세상 살면서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라, 모진 풍파와 고뇌, 갈등과 눈바람을 맞고 자란 들에 핀 작은 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혼자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자연과 대화하기를 좋아했고 자연과 함께 늘 생활했습니다. 또 늘 어떤 생각에 잠겨 생활했습니다. 생활 자체가 스님이나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고교만 졸업하고 절에 들어가 스님 되려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스님은 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려서부터 세상 살아가는 데 적응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저는 어린 시절에도 세상살이는 재미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2급 청각 장애를 갖고 계셨고 제가 중2때 엄마와 이혼하셨습니다. 그때 남동생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너희 아버지는 벙어리’라고 하는 친구들의 놀림을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 친구들이 싫었습니다. 왜 우리 집만 이렇게 살아야 되나? 남들처럼 가족과 대화하고 웃으면서 살 수 없는지….
아버지와 대화를 하고 싶어도 수화를 배울 곳이 없었습니다. 왜 남들처럼 정상으로 태어나지 못하셨는지 말입니다. 아버지는 일밖에 모르시는 분이었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밭이나 논에 나가 일하시고 저녁 늦게 돌아오셔서 밥도 손수 지어 드셨습니다. 홀로 농사지어 3남매를 키우셨던 아버지가 얼마나 힘드셨을지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감사한 일인데 왜 그리 원망스러운 마음만 먹었던지.
아버지 는 호강 한 번 못해 보시고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였는지 삶에 대해, 인생에 대해 너무나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늘 혼자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인생이 너무 허무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조상님들의 가르침 속에 마지막 개벽기 때 열매로 남기기 위한 프로그램의 일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깊이 해봅니다.
증산도를 시작하기 전에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김정빈의 ‘단丹’(80년대 중반)이란 책을 읽고 단전호흡을 통해 깨달음을 갈구했었고, 단학선원 및 절(칠성각)에서 불공도 드려보고, 불교 공부를 했지만 더 이상의 깨닫음은 얻지 못했습니다.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이 너무 싫어 절을 나와 신천지 교회를 다니며 3년 동안 공부를 했습니다. 하지만 신천지 교리가 너무 맞지 않아 또 다른 교회에서 3년을 더 공부하며 신학원을 졸업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뭔가는 항상 저를 답답하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상생방송을 보았습니다. 뭔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자꾸 TV를 보게 되었고 문득 4~5년 전 울산옥현도장에서 신앙하고 계신 집안 형님이 태화다리 위에서 행사가 있던 날 제게 『천지성공』이라는 책을 전달해 주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부터 방송을 자세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형님이 보내는 문자 내용이 귀찮아서 스팸처리를 해버렸습니다. 최근에 우연히 형님에게서 카톡이 들어왔고 다시 형님을 만나 울산옥현도장을 방문하여 8관법을 시작으로 증산도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진리공부를 할 때마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하던 모든 내용이 여기에 다 들어 있고 정말 하고 싶어 했던 진리공부가 여기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꾸던 꿈의 내용이 전부 조상 선령들께서 가르쳐 주신다는 걸 알게 되어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동안 교회생활 12년 동안 조상을 모시지 않고 생활해온 제 자신이 너무나 밉고 여러 선령님께 너무나 죄송하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세상 어떤 일을 해도 조상을 모르면 풀리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쓸 만한 자손을 얻으려고 선조께서 30년, 60년을 빌어도 타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정성에 너무 감사하고 조상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를 위해 정한수로 기도를 올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조상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새벽수행에 계속 정진해 나갈 것입니다. 조석으로 봉청수를 하고 조상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러 가지로 도와주신 옥현도장 가족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보은! ◎
정동섭(남, 59세) / 파주금촌도장 / 도기 146년 음5월 입도
군 복무시절 ‘개벽’이라는 책을 읽고 ‘우리나라가 세계의 중심국가가 된다’는 내용에 희열을 느끼고 있었지만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약간 허구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방송을 보며 개벽에 관한 내용이 가끔씩 방영되어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상생방송의 ‘신앙 에세이’나 수행체험 코너를 보면서 ‘저 종교는 도인들이 수행하면서 얻는 체험들을 방송하는구나’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루는 유유자적한 마음으로 거리를 지나가고 있는데 40대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다가와서 ‘복을 많이 받게 생겼네요’라는 말과 함께 ‘조상님의 덕을 많이 보겠네요’라고 말하였는데, ‘정말 내가 그런가?’ 하며 기쁜 마음에 끌리게 되었습니다. 조상님에 대한 관심과 함께 그분에 이끌려 선방이라는 곳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조상님께 치성도 드리고 열심히 수도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선방이라는 곳에는 간판도 걸지 않고 여기가 무엇을 하는 곳이고 어디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곳에 있는 분들에게 여기는 어디이고 무엇을 하는 곳이냐고 물으면 미륵불교라고만 하고 그 다음은 얼버무리기 일쑤였습니다.
제가 그 종교를 비방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상하리만큼 비밀이 많고 참으로 답답하고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조상님을 좋은 곳으로 잘 가시게 열심히 비세요’라고 하였습니다. 당연히 저는 조상님들께서 좋은 곳으로 잘 가시고 편안해지시라고 주문수행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주문을 모두 외워야 하지만 주문수행 문구는 밖으로 유출되면 안된다는 이유로 내주지를 않아 주문을 외우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주문들은 인터넷상에 흔하게 있던 것이었습니다.
주문의 원문은 구하였으나 또 다시 주문 외우기에 어려움을 느껴 인터넷상에서 MP3 주문파일을 구했습니다. 그러다 한 블로그에서 ‘북두협객’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분의 도움으로 각 주문의 MP3 파일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선방에서 수행하는 주문과는 달라 실망했습니다. 메일로 MP3 파일을 보내주신 이후로 그분은 지속적으로 제게 도장을 찾으라고 하며 조금은 귀찮게(?) 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핑계를 대며 미루고 미루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미 선방에서 미륵불교라는 종교의 공부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선방에서 공부하고 수행하던 중 선각이라는 분(저를 처음 이끌었던 분)이 부천 지부에서 도력이 높은 분이 강연을 한다고 하여, 그분의 도력과 좋은 기운이 수행에 도움이 될까 하는 기대감에 같이 참석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모인 사람들의 차림새를 보니 비록 풍족하지는 않지만 득의양양한 자신감과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도력이 높다고 하는 분의 강연 중에 아무 느낌도 없었고 약간의 도력 기운이나 심지어 조그마한 기감氣感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저는 과거에 기공 공부를 잠시나마 해서 기감을 갖고 있었거든요.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수행을 해야지 도력이 있게 된다’라는 우리 포정님 말씀처럼 수행을 하지 않고는 도력이 생길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간판에서 ‘성주회 부천지부’라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소속된 곳은 성주회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을 열심히 뒤졌습니다. 성주회라는 곳은 대순진리회에서 분파된 한 종교단체이고, 대순진리회는 태극도에서 분파된 종교단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탐구욕과 우리 조상님을 위한다고 하니 어렵지만 계속해서 공부와 수행을 하러 선방을 다녔습니다.
그 와중에 북두협객이라는 분은 자꾸 근처 도장을 가보라고 전화와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저는 내심 ‘그래, 그렇다면 성주회와 증산도를 비교해보자’라는 생각으로 파주금촌도장을 방문하여 포정님을 뵙고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도장 포정님은 친절하고 참 알기 쉽게 교육을 해주셨습니다. 집중하기도 수월해서 공부 하나하나가 귀에 쏙쏙 들어오니 즐거웠습니다.
공부와 수행을 하며 며칠 되지 않아 집에서 태을주 수행을 하던 중 이상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수행하는 중에 갑자기 미천한 저에게 이런 크나큰 은혜를 내려주시는 상제님과 조상님들께 감사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선령신들이 쓸 자손 하나씩 타내려고 60년 동안 공을 들여도 못 타내는 자도 많으니라. 이렇듯 어렵게 받아 난 몸으로 꿈결같이 쉬운 일생을 어찌 헛되이 보낼 수 있으랴 . 너희는 선령신의 음덕을 중히 여기라. 선령신이 정성 들여 쓸 자손 하나 잘 타내면 좋아서 춤을 추느니라.”(도전 2편 119장) 라는 구절이 떠올라 적잖이 난감했습니다.
특히 ‘60년’이라는 글자와 ‘꿈결같이 쉬운 일생을 어찌 헛되이 보낼 수 있으랴’라는 글귀가 머리 위에서 뱅뱅 돌며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말이 60년이지 인간으로서는 정녕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60년 동안 빌고 빌고 또 빌어 손바닥이 뭉개지고 뭉개지셨을 조상님의 손이 떠오르며, 죄스럽고 고맙고 감사한 마음과 미약한 내가 조상님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혹여 누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며 펑펑 울고야 말았습니다.
다음 날 역시 집에서 수행을 하던 중 자발동공이 와서 수행 중에 몸을 흔들게 되었습니다. 과거 기공 공부를 하면서도 해보지 못했던 자발동공을 태을주 수행 중에 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동공이 너무 심해서 이가 부러질까 걱정도 되었습니다. 몹시 불안하여 의식적으로 멈추고자 하면 할수록 동공은 더욱 강도가 높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동공을 하면 할수록 몸이 아파왔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등 쪽으로 기맥이 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백회가 처음 열리더니 좌측 뇌의 여러 곳에서 짧은 기맥들이 곳곳에서 열리고 어깨의 부분 부분이 시원한 느낌이 들면서 좌뇌의 여러 곳에서 청량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독맥의 여러 부분에서도 기가 관통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의 자발동공은 주로 머리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아마 태을주 수행이 아니고 다른 이유로 이렇게 장시간 과도하게 머리를 흔들어서 뇌척수액이 출렁이고 뇌가 흔들렸다면 부상이나 사망에 이르기도 했을 것입니다.
수행이 끝나면 멀쩡한 내 자신을 보며 신기했습니다. 부상의 위험도 있었지만 저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할 말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만일 수행 중에 제가 부상이나 사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순전히 상제님 책임이니까요….
제게는 어릴 적부터 숙명과도 같은 이명耳鳴(속칭 귀울림)이 심하게 있었는데 이것은 양의학에서는 손도 못 대거니와 한의학에서도 다루기 어렵고 치료가 잘 되지 않는 병이라 숙명으로 생각하고 제 몸에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이명, 그것은 마치 기계가 바로 옆에서 돌아갈 때 나는 소리들 듣는 듯한, 전철이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 소리 절반 정도의 소음을 평생 24시간 듣고 있어야 하는 고충이었습니다.
사실 너무도 오랫동안 듣고 있으려니 제 친구처럼 친숙한 내 인생의 동반자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때도 있었습니다. 제 나이와 비슷한 분들은 평생의 지병을 안고 지내시기도 합니다. 정도가 그리 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밤에 그것이 울린다고 하는데 저의 경우는 하루 종일은 물론, 그것도 대화하는 중에 심한 이명을 느끼니 대화 중에 귀울림의 음높이와 상대방 음성의 음높이가 섞여서 분명한 발음을 알아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말귀가 어두운’, 당시의 편견으로는 썩 똘똘하지 못한 사람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명이 심했던 저의 약점은 집안이 가난해서 상급학교로 진학을 포기하고 기술이라도 익히고자 했던 저에게는 가혹하고 험난하기만 했던 인생행로를 걸어오게 하였습니다. 가난해서 불편하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억울하지도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유는 저처럼 무력한 사람들이 상제님을 뵙기가 쉽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과거 나름대로 열심히 했던 기공 때보다 태을주 수행에서 더욱 높은 기감을 느꼈습니다. 이상하지요?
의념이라는 힘을 사용해서 열심히 기를 끌어들이는 기공보다 소리와 생각만 하는 태을주 주문이 왜 이리 강력할까요? 자발동공을 하던 얼마 후 가장 심했던 왼쪽 귀의 이명이 안 들려서 이상하다 싶어 주의 깊게 관찰해 보았지만 예전보다 그 강도와 빈도가 현저히 낮아진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른쪽의 귀는 전보다 더욱 기승을 부려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제 오른쪽 귀도 이명 발생 빈도와 강도가 예전보다 훨씬 낮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제 인생의 동반자였던 이명이 점점 사라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증산도 수행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저는 이렇게 크나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 곳의 기맥이 뚫리고 지긋지긋했던 이명이 곧 사라지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하니 제가 상제님과 증산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저는 제가 나태해지고 게을러져서 수행을 소홀히 할까 두려워하며 언제나 처음처럼 열심히 정진하고 싶습니다.
저를 증산도 도장으로 이끌어주신 북두협객 도생님과 저에게 상제님 진리를 친절하게 강의해 주신 포정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상제님께서는 왜 아직 입도도 하지 않은 저에게 이렇게 큰 은혜를 내려주시나 하는 것입니다. 도인으로 만들어 대개벽기에 사람들을 많이 살리는 상제님의 천지일꾼으로 쓰시려나요? 보은!
고등 학교 시절, 문득 든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왜 태어났고 어떤 이유로 인해 살아가는가? 다른 사람들은? 더 나아가서 인간은 왜 태어나고 살고 죽고 하는 걸까?’ 당시 학교에서 저는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교 몇 등’, ‘장학퀴즈 학교 대표’, ‘아마추어 성악가’ 등 전교생이 아는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고 선생님들의 칭찬과 또래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허무했습니다.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라도 난 듯 남들이 제게 쏟아내는 감정들이 무의미했습니다. “이런 시시한 것보다 더 고차원적인 세상의 본질이 있을 거야!” 하면서 제 나름대로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각종 철학 서적을 보는 흉내도 내보고 했지만 근원적인 답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들과 주변 어른들은 제 생각을 단순하게만 봤던 것 같습니다.
좋은 대학과 직장을 가지면 그런 의문은 풀린다는 식으로 말해주었지만 그걸 받아들이기에는 저는 너무 영악했습니다. 어른들도 제대로 모른다고 생각한 이후로는 대답 듣기를 포기하고 다녔습니다. 대신 지성인들의 집합소인 대학에서 실마리를 찾기로 했습니다.
막상 대학 생활을 하다 보니 다들 취업이나 돈 이야기만 했고, 제가 가진 생각은 남들에게는 ‘배부른 미친 소리’로 치부되었습니다. 그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적어도 대학생이라면 지성인이라고 불릴 만한데 단순하게 먹고 사는 문제에만 온 관심을 쏟으면 이런 생각은 누가 할까?’라고 생각이 들자 남들에게 제 생각을 꺼내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웠고 더 나아가서는 아예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제 자신도 그런 물음에 대한 답을 포기하게 되면서 점점 세상에 저를 맞춰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원하던 직업보다는 남들이 좋다는 직업을 가지려고 애를 썼습니다. ‘증산도’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처음 접한 건 2년 전 학교 축제 때였습니다. 휴학생이었지만 당시 학교에 다니고 있던 이동우 도생의 소개로 강윤성 포감님을 소개받아 그 자리에서 막차를 타고 갈 때까지 ‘도담’을 나누었습니다.
처음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이랑 몇 시간씩 이야기를 막힘없이, 분야를 뛰어넘어서, 종횡무진 화제가 왔다 갔다 하였습니다. ‘그것 참 희한한데?’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나만 이런 고민을 했던 것이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었습니다. 공무원에 도전한 후로 ‘증산도’는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시험 공부만이 제가 할 일이었고 합격만이 제 존재 가치를 확인해주는 수단이었습니다. 올해까지 도전했던 몇 번의 기회들이 불합격으로 이어지면서 각종 강박증과 스트레스로 인한 짜증, 그리고 우울증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나름대로 극복하려고 운동도 해보고 각종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읽고 실행해봤지만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다시 올 초 증산도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동우 도생님과 강 포감님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제 생각이 점차 맑아지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만날 때마다 이야기가 쉴 새 없이 이어졌고 이야기하면서 우주의 원리나 이치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만 있던 지식들이 체계가 잡히면서 전율에 사로잡힐 정도로 놀라웠습니다.
우주의 일년과 음양오행, 그리고 개벽과 천지공사 등을 배우면서 여태껏 제가 알고 있던 사실과 정보들이 통합되는 그 느낌은 ‘내가 살아있다!’라는 것을 체험하게 해주었습니다. 심지어는 역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제가 공무원 시험 때문에 역사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보면 증산도에서 이야기하는 각종 역사적 사건과 기록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공부하게 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의 권유로 도장 방문도 하고 21일 정성 수행을 하며 겪었던 일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저에게 문화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모든 교회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생각한 ‘신神의 뜻을 따르는 자’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교인들의 모습을 보고 나서 ‘신’에 대해 염증을 느끼게 있었습니다. 차라리 종교를 떠나서, 4대 성인들이 보여준 인간적인 모습이 더 ‘신’의 모습에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신은 있지만 관여하지 않는다’ 라는 생각이 머리에 오래 잡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행을 하면서 느낀 ‘빛의 세계’와 ‘인간과 다를 것 없던 신명들’, 내게 일어난 각종 사건 사고들과 그에 대한 분석을 해보면서 ‘이신사理神事’ 중 제가 제일 이해하지 못하던 신神의 영역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기존 종교에서 신의 사람들처럼 살지 않는 데에 대해 실망한 것과 현실에 대한 문제를 이치적으로 명쾌하게 풀어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증산도에 입도를 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여기까지 저를 이끌고 밀어준 수많은 사람들은 물론 비록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신명들의 힘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입도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까지는 ‘나는 왜 태어나고 살아가며 죽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완벽한 답은 내릴 수 없습니다. 아직은 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아는 지식만으로 답을 내더라도 제 자신이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문제에 대한 답의 방향을 알았으니 이제 달려갈 일만 남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증산도라는 길 위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준 이동우 도생과 강윤성 포감님, 교육을 담당해 주신 이연주 수석포감님, 그리고 동대문도장 도생 여러분들과 수호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더불어 조상님들의 음덕과 인연으로 여기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비록 지금 함께할 수는 없지만 부모님과 동생에게도 무한한 애정을 보냅니다.
바른 길 위에 서기까지 많은 고민과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많은 것을 담는 큰 그릇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건져내겠습니다. 진리가 우리 모두를 살릴지니, 상생. ◎
열매로 만들기 위한 조상님의 프로그램
노금재(남, 48세) / 울산옥현도장 / 도기 146년 음 5월 입도
누구나 인생을 살다보면 뜻하지 않게 여러 가지 문제로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과연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또는 인생이란 어디에서 왔다가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인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 시중에 나와 있는 여러 가지 철학서적과 성현들의 가르침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관심분야를 찾게 마련입니다. 저 또한 여러 과정과 너무나 많은 시간을 통해 결국 증산도 옥현도장에 입도하게 되었습니다.
입도 과정을 짧은 수기로 표현하려니 저 자신의 지난 49년 세월을 돌이켜보게 되면서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세상 살면서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라, 모진 풍파와 고뇌, 갈등과 눈바람을 맞고 자란 들에 핀 작은 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혼자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자연과 대화하기를 좋아했고 자연과 함께 늘 생활했습니다. 또 늘 어떤 생각에 잠겨 생활했습니다. 생활 자체가 스님이나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고교만 졸업하고 절에 들어가 스님 되려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스님은 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려서부터 세상 살아가는 데 적응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저는 어린 시절에도 세상살이는 재미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2급 청각 장애를 갖고 계셨고 제가 중2때 엄마와 이혼하셨습니다. 그때 남동생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너희 아버지는 벙어리’라고 하는 친구들의 놀림을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 친구들이 싫었습니다. 왜 우리 집만 이렇게 살아야 되나? 남들처럼 가족과 대화하고 웃으면서 살 수 없는지….
아버지와 대화를 하고 싶어도 수화를 배울 곳이 없었습니다. 왜 남들처럼 정상으로 태어나지 못하셨는지 말입니다. 아버지는 일밖에 모르시는 분이었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밭이나 논에 나가 일하시고 저녁 늦게 돌아오셔서 밥도 손수 지어 드셨습니다. 홀로 농사지어 3남매를 키우셨던 아버지가 얼마나 힘드셨을지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감사한 일인데 왜 그리 원망스러운 마음만 먹었던지.
아버지 는 호강 한 번 못해 보시고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였는지 삶에 대해, 인생에 대해 너무나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늘 혼자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인생이 너무 허무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조상님들의 가르침 속에 마지막 개벽기 때 열매로 남기기 위한 프로그램의 일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깊이 해봅니다.
증산도를 시작하기 전에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김정빈의 ‘단丹’(80년대 중반)이란 책을 읽고 단전호흡을 통해 깨달음을 갈구했었고, 단학선원 및 절(칠성각)에서 불공도 드려보고, 불교 공부를 했지만 더 이상의 깨닫음은 얻지 못했습니다.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이 너무 싫어 절을 나와 신천지 교회를 다니며 3년 동안 공부를 했습니다. 하지만 신천지 교리가 너무 맞지 않아 또 다른 교회에서 3년을 더 공부하며 신학원을 졸업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뭔가는 항상 저를 답답하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상생방송을 보았습니다. 뭔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자꾸 TV를 보게 되었고 문득 4~5년 전 울산옥현도장에서 신앙하고 계신 집안 형님이 태화다리 위에서 행사가 있던 날 제게 『천지성공』이라는 책을 전달해 주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부터 방송을 자세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형님이 보내는 문자 내용이 귀찮아서 스팸처리를 해버렸습니다. 최근에 우연히 형님에게서 카톡이 들어왔고 다시 형님을 만나 울산옥현도장을 방문하여 8관법을 시작으로 증산도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진리공부를 할 때마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하던 모든 내용이 여기에 다 들어 있고 정말 하고 싶어 했던 진리공부가 여기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꾸던 꿈의 내용이 전부 조상 선령들께서 가르쳐 주신다는 걸 알게 되어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동안 교회생활 12년 동안 조상을 모시지 않고 생활해온 제 자신이 너무나 밉고 여러 선령님께 너무나 죄송하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세상 어떤 일을 해도 조상을 모르면 풀리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쓸 만한 자손을 얻으려고 선조께서 30년, 60년을 빌어도 타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정성에 너무 감사하고 조상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를 위해 정한수로 기도를 올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조상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새벽수행에 계속 정진해 나갈 것입니다. 조석으로 봉청수를 하고 조상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러 가지로 도와주신 옥현도장 가족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보은! ◎
수행으로 이명耳鳴을 치유하다
정동섭(남, 59세) / 파주금촌도장 / 도기 146년 음5월 입도
군 복무시절 ‘개벽’이라는 책을 읽고 ‘우리나라가 세계의 중심국가가 된다’는 내용에 희열을 느끼고 있었지만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약간 허구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방송을 보며 개벽에 관한 내용이 가끔씩 방영되어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상생방송의 ‘신앙 에세이’나 수행체험 코너를 보면서 ‘저 종교는 도인들이 수행하면서 얻는 체험들을 방송하는구나’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루는 유유자적한 마음으로 거리를 지나가고 있는데 40대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다가와서 ‘복을 많이 받게 생겼네요’라는 말과 함께 ‘조상님의 덕을 많이 보겠네요’라고 말하였는데, ‘정말 내가 그런가?’ 하며 기쁜 마음에 끌리게 되었습니다. 조상님에 대한 관심과 함께 그분에 이끌려 선방이라는 곳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조상님께 치성도 드리고 열심히 수도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선방이라는 곳에는 간판도 걸지 않고 여기가 무엇을 하는 곳이고 어디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곳에 있는 분들에게 여기는 어디이고 무엇을 하는 곳이냐고 물으면 미륵불교라고만 하고 그 다음은 얼버무리기 일쑤였습니다.
제가 그 종교를 비방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상하리만큼 비밀이 많고 참으로 답답하고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조상님을 좋은 곳으로 잘 가시게 열심히 비세요’라고 하였습니다. 당연히 저는 조상님들께서 좋은 곳으로 잘 가시고 편안해지시라고 주문수행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주문을 모두 외워야 하지만 주문수행 문구는 밖으로 유출되면 안된다는 이유로 내주지를 않아 주문을 외우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주문들은 인터넷상에 흔하게 있던 것이었습니다.
주문의 원문은 구하였으나 또 다시 주문 외우기에 어려움을 느껴 인터넷상에서 MP3 주문파일을 구했습니다. 그러다 한 블로그에서 ‘북두협객’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분의 도움으로 각 주문의 MP3 파일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선방에서 수행하는 주문과는 달라 실망했습니다. 메일로 MP3 파일을 보내주신 이후로 그분은 지속적으로 제게 도장을 찾으라고 하며 조금은 귀찮게(?) 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핑계를 대며 미루고 미루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미 선방에서 미륵불교라는 종교의 공부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선방에서 공부하고 수행하던 중 선각이라는 분(저를 처음 이끌었던 분)이 부천 지부에서 도력이 높은 분이 강연을 한다고 하여, 그분의 도력과 좋은 기운이 수행에 도움이 될까 하는 기대감에 같이 참석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모인 사람들의 차림새를 보니 비록 풍족하지는 않지만 득의양양한 자신감과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도력이 높다고 하는 분의 강연 중에 아무 느낌도 없었고 약간의 도력 기운이나 심지어 조그마한 기감氣感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저는 과거에 기공 공부를 잠시나마 해서 기감을 갖고 있었거든요.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수행을 해야지 도력이 있게 된다’라는 우리 포정님 말씀처럼 수행을 하지 않고는 도력이 생길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간판에서 ‘성주회 부천지부’라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소속된 곳은 성주회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을 열심히 뒤졌습니다. 성주회라는 곳은 대순진리회에서 분파된 한 종교단체이고, 대순진리회는 태극도에서 분파된 종교단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탐구욕과 우리 조상님을 위한다고 하니 어렵지만 계속해서 공부와 수행을 하러 선방을 다녔습니다.
그 와중에 북두협객이라는 분은 자꾸 근처 도장을 가보라고 전화와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저는 내심 ‘그래, 그렇다면 성주회와 증산도를 비교해보자’라는 생각으로 파주금촌도장을 방문하여 포정님을 뵙고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도장 포정님은 친절하고 참 알기 쉽게 교육을 해주셨습니다. 집중하기도 수월해서 공부 하나하나가 귀에 쏙쏙 들어오니 즐거웠습니다.
공부와 수행을 하며 며칠 되지 않아 집에서 태을주 수행을 하던 중 이상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수행하는 중에 갑자기 미천한 저에게 이런 크나큰 은혜를 내려주시는 상제님과 조상님들께 감사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선령신들이 쓸 자손 하나씩 타내려고 60년 동안 공을 들여도 못 타내는 자도 많으니라. 이렇듯 어렵게 받아 난 몸으로 꿈결같이 쉬운 일생을 어찌 헛되이 보낼 수 있으랴 . 너희는 선령신의 음덕을 중히 여기라. 선령신이 정성 들여 쓸 자손 하나 잘 타내면 좋아서 춤을 추느니라.”(도전 2편 119장) 라는 구절이 떠올라 적잖이 난감했습니다.
특히 ‘60년’이라는 글자와 ‘꿈결같이 쉬운 일생을 어찌 헛되이 보낼 수 있으랴’라는 글귀가 머리 위에서 뱅뱅 돌며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말이 60년이지 인간으로서는 정녕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60년 동안 빌고 빌고 또 빌어 손바닥이 뭉개지고 뭉개지셨을 조상님의 손이 떠오르며, 죄스럽고 고맙고 감사한 마음과 미약한 내가 조상님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혹여 누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며 펑펑 울고야 말았습니다.
다음 날 역시 집에서 수행을 하던 중 자발동공이 와서 수행 중에 몸을 흔들게 되었습니다. 과거 기공 공부를 하면서도 해보지 못했던 자발동공을 태을주 수행 중에 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동공이 너무 심해서 이가 부러질까 걱정도 되었습니다. 몹시 불안하여 의식적으로 멈추고자 하면 할수록 동공은 더욱 강도가 높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동공을 하면 할수록 몸이 아파왔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등 쪽으로 기맥이 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백회가 처음 열리더니 좌측 뇌의 여러 곳에서 짧은 기맥들이 곳곳에서 열리고 어깨의 부분 부분이 시원한 느낌이 들면서 좌뇌의 여러 곳에서 청량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독맥의 여러 부분에서도 기가 관통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의 자발동공은 주로 머리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아마 태을주 수행이 아니고 다른 이유로 이렇게 장시간 과도하게 머리를 흔들어서 뇌척수액이 출렁이고 뇌가 흔들렸다면 부상이나 사망에 이르기도 했을 것입니다.
수행이 끝나면 멀쩡한 내 자신을 보며 신기했습니다. 부상의 위험도 있었지만 저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할 말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만일 수행 중에 제가 부상이나 사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순전히 상제님 책임이니까요….
제게는 어릴 적부터 숙명과도 같은 이명耳鳴(속칭 귀울림)이 심하게 있었는데 이것은 양의학에서는 손도 못 대거니와 한의학에서도 다루기 어렵고 치료가 잘 되지 않는 병이라 숙명으로 생각하고 제 몸에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이명, 그것은 마치 기계가 바로 옆에서 돌아갈 때 나는 소리들 듣는 듯한, 전철이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 소리 절반 정도의 소음을 평생 24시간 듣고 있어야 하는 고충이었습니다.
사실 너무도 오랫동안 듣고 있으려니 제 친구처럼 친숙한 내 인생의 동반자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때도 있었습니다. 제 나이와 비슷한 분들은 평생의 지병을 안고 지내시기도 합니다. 정도가 그리 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밤에 그것이 울린다고 하는데 저의 경우는 하루 종일은 물론, 그것도 대화하는 중에 심한 이명을 느끼니 대화 중에 귀울림의 음높이와 상대방 음성의 음높이가 섞여서 분명한 발음을 알아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말귀가 어두운’, 당시의 편견으로는 썩 똘똘하지 못한 사람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명이 심했던 저의 약점은 집안이 가난해서 상급학교로 진학을 포기하고 기술이라도 익히고자 했던 저에게는 가혹하고 험난하기만 했던 인생행로를 걸어오게 하였습니다. 가난해서 불편하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억울하지도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유는 저처럼 무력한 사람들이 상제님을 뵙기가 쉽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과거 나름대로 열심히 했던 기공 때보다 태을주 수행에서 더욱 높은 기감을 느꼈습니다. 이상하지요?
의념이라는 힘을 사용해서 열심히 기를 끌어들이는 기공보다 소리와 생각만 하는 태을주 주문이 왜 이리 강력할까요? 자발동공을 하던 얼마 후 가장 심했던 왼쪽 귀의 이명이 안 들려서 이상하다 싶어 주의 깊게 관찰해 보았지만 예전보다 그 강도와 빈도가 현저히 낮아진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른쪽의 귀는 전보다 더욱 기승을 부려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제 오른쪽 귀도 이명 발생 빈도와 강도가 예전보다 훨씬 낮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제 인생의 동반자였던 이명이 점점 사라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증산도 수행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저는 이렇게 크나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 곳의 기맥이 뚫리고 지긋지긋했던 이명이 곧 사라지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하니 제가 상제님과 증산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저는 제가 나태해지고 게을러져서 수행을 소홀히 할까 두려워하며 언제나 처음처럼 열심히 정진하고 싶습니다.
저를 증산도 도장으로 이끌어주신 북두협객 도생님과 저에게 상제님 진리를 친절하게 강의해 주신 포정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상제님께서는 왜 아직 입도도 하지 않은 저에게 이렇게 큰 은혜를 내려주시나 하는 것입니다. 도인으로 만들어 대개벽기에 사람들을 많이 살리는 상제님의 천지일꾼으로 쓰시려나요? 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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