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 1933년 조국은 사라지고 작전이 시작된다
[영화산책 ]
암살 Assassination, 2015
평점 관람객 9.10 | 기자 평론가 6.57 | 네티즌 8.97
개요 액션, 드라마 | 한국 | 139분 | 2015.7.22 개봉
감독 최동훈
출연 전지현(안옥윤), 이정재(염석진), 하정우(하와이 피스톨)
등급 [국내] 15세 관람가
흥행 예매율 2위 누적관객 9,493,626명(08.12 기준)
평점 관람객 9.10 | 기자 평론가 6.57 | 네티즌 8.97
개요 액션, 드라마 | 한국 | 139분 | 2015.7.22 개봉
감독 최동훈
출연 전지현(안옥윤), 이정재(염석진), 하정우(하와이 피스톨)
등급 [국내] 15세 관람가
흥행 예매율 2위 누적관객 9,493,626명(08.12 기준)
인간은 참으로 이름 붙이는 것을 좋아하는 존재입니다. 저 하늘 위에 떠있는 별에도 이름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미생물에도 우리는 이름을 붙입니다. 이름은 참으로 존재의 거울입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의 영혼 속에 그의 존재를 새기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하지만 70여년 전, 우리의 선조들은 나라와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마음껏 쓸 수 없고 붙일 수 없었던 슬픈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름이 없어진 조국에서, 독립을 믿고 스러져간 뜨거운 별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영화 〈암살〉의 이야기입니다.
한국독립군의 암살 계획, 그 화려한 시작
윤봉길 의사의 상해上海 홍구虹口공원 의거 후 김구의 임시정부와 김원봉의 의열단에 대한 감시가 더욱 심해지던 1933년, 임시정부의 경무국 대장 염석진(이정재 분)은 김구 주석으로부터, 조선 주둔군 대장 카와구치(박병은 분)와 총독부에서 선정한 최고의 친일파 강인국(이경영 분)의 암살 계획을 실천할 3명의 투사들을 데리고 가줄 것을 부탁받게 됩니다.
그 3명의 투사들은 바로 한국독립군 출신의 저격수 안옥윤(전지현 분), 마지막 신흥무관학교 출신인 속사포(조진웅 분), 폭탄전문가 황덕삼(최덕문 분)입니다. 그들은 김구와 손잡은 무장투쟁의 대부 약산 김원봉(조승우 분)을 만나기 위해 상하이에 있는 미라보 호텔로 향합니다. 거기서 목적을 전달받고 자신의 존재를 새기는 단 한 장의 사진을 웃는 모습으로 촬영하게 됩니다. [사진] 한편 상하이 뒷골목에서 어둠을 뚫고 나타난 누군가가 300달러만 주면 누구라도 죽여준다는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분)과 그의 동료인 영감(오달수 분)에게 3,000달러를 줄 테니 그 3인을 죽여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이후 작전을 위해 배를 타고 경성에 도착한 그들은 아네모네라는 술집에서 독립군의 연락책과 자금책을 담당하고 있는 마담(김해숙 분)을 만나, 강인국과 카와구치 사령관이 사돈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이동경로를 따라 암살계획을 세우지만, 일본경찰에 전해진 정보 누출과 제3자의 개입으로 그들의 계획은 차츰 틀어지게 됩니다. 과연 독립운동가 3인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요?
안옥윤은 실존 인물일까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안옥윤[사진]은 실존인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 목숨을 아끼지 않은 수천명의 여성독립운동가의 생애와 의지를 대변하는 대표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안옥윤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분은 바로 독립군의 어머니라 불리는 남자현 열사[그림]입니다. 일제강점기에 권총을 들고 국내로 잠입해 암살을 기도했던 유일한 여성이라고 합니다. (박스기사 참조)
2015년 8월 4일부터 서대문 형무소에서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266명의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생애를 재조명하는 행사가 성황리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영화가 시국적으로 던진 메시지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여성독립운동가 266명 ‘돌아온 이름들’ 서대문형무소 특별전 2015.8.5 경향신문기사 참조)
1920년 8월 당시 34살 임신한 몸으로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진 안경신 의사, 미국과 조선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하고, 2.8독립선언에 참가했던 김마리아 선생도 적극적인 독립운동가였습니다. 특히 김마리아 선생은 고문하던 일제 검사가 탄복할 정도로 의지가 강했습니다. “김마리아 같은 여성이 열명만 있었어도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라고 안창호 선생이 말했을 정도로 그의 독립에의 의지는 남녀의 구분을 따질 필요가 없이 뜨거운 영웅의 기개였습니다.
영화 속 전지현 같은 여성독립운동가가 1,900명이 넘는다는 자료도 있습니다([인터뷰]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오마이뉴스 2015.8.6 기사). 그리고 아네모네의 마담과 같이 기방과 술집의 기녀와 마담들이 독립운동가들을 숨겨주거나 연락하고 자금책으로의 역할을 매우 활발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들 수천명의 여성 열사들께서 모두 조국 광복의 순간까지 조선독립의 의지를 세계에 천명하기 위해 중국과 조선, 일본을 넘나들며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투쟁해왔던 것입니다.
상제님께서는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없음을 일찍이 일러주셨습니다
남녀동권 시대를 열어 주심 (도전 2편 53장)
1 여자가 천하사를 하려고 염주를 딱딱거리는 소리가 구천에 사무쳤나니 이는 장차 여자의 천지를 만들려 함이로다.
2 그러나 그렇게까지는 되지 못할 것이요, 남녀동권 시대가 되게 하리라.
3 사람을 쓸 때에는 남녀 구별 없이 쓰리라.
4 앞세상에는 남녀가 모두 대장부(大丈夫)요, 대장부(大丈婦)이니라.
1 여자가 천하사를 하려고 염주를 딱딱거리는 소리가 구천에 사무쳤나니 이는 장차 여자의 천지를 만들려 함이로다.
2 그러나 그렇게까지는 되지 못할 것이요, 남녀동권 시대가 되게 하리라.
3 사람을 쓸 때에는 남녀 구별 없이 쓰리라.
4 앞세상에는 남녀가 모두 대장부(大丈夫)요, 대장부(大丈婦)이니라.
9년 동안 준비한 영화
이 영화는 감독이 9년 전부터 고민하고 준비해온 작품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독립군 이야기를 품게 된 건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 선생의 책 때문이다. 나 같은 범인들은 갖지 못한 어떤 위대함이 느껴졌다. 물론 그 시대를 살았던 그들도 평범한 사람이었겠지만 결단이나 행동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걸 영화에 조금이나마 녹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최고흥행감독 ‘암살’의 변 “친일파는 역사적 찌꺼기” [인터뷰] 최동훈 감독 2015.7.23. 오마이스타
1930년은 내부적으로는 기미독립운동(1919) 이후 일제의 문화통치, 즉 문화적 포섭정책으로 인해 수많은 조선 군중이 친일과 반일이라는 갈등의 기로에 놓여있었고, 외적으로는 중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괴뢰정부인 만주국, 필리핀 등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며 대동아공영권을 넓혀 나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이렇게 민족의 독립의식이 약화되는 것을 걱정한 백범 김구, 약산 김원봉 등은 무장투쟁단체를 만들 것을 결심하게 되었고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한인애국단과 의열단입니다. 당면한 시대의 상황은 세상의 변화에 대한 타협과 반발, 안으로는 유화적인 척하면서 밖으로는 지배자들의 야만적 광기가 함께 일어나던 시기였고, 이에 맞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오로지 사진 한 장만을 존재의 흔적으로 남긴 채 산발적인 무장투쟁 과정에서 사라져갔거나 체백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무명열사들의 치열한 생애가 함께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영화 암살에는 다양한 무장독립단체들이 등장하는데 그 모든 단체를 관통하는 뿌리지점에 있는 단체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였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일제강점기에 갖은 역경을 뚫고 10여년에 걸쳐 3,500여명의 독립투사와 애국지사들을 길러내면서 항일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곳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청산리대첩을 비롯한 독립전쟁에서 기간요원으로 참전해 공을 세웠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 조선혁명군, 의열단, 한국독립군, 고려혁명군, 한국광복군 등 독립전선 각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림] 하지만 설립 이후의 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주변지역의 가뭄 때문에 경영이 힘든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촌락을 돌며 구걸까지 하면서 독립운동가를 양성했다고 합니다.
“독립운동도 돈이 있어야 하는 거지.”
라고 말하는 속사포의 현실적인 대사는 이러한 힘든 상황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생기게 된 경험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낙엽이 지기 전에 무기를 준비해서 압록강을 건너고 싶다’는 그의 혈서의 내용과 함께 작전이 끝나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 적을 향한 응사를 놓치지 않던 그의 정신은 신흥무관학교라는 항일무장투쟁의 요람에서 비롯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림] 결국 신흥무관학교라는 하나의 시금석이 독립운동가라는 수많은 금맥들을 찾아냈고,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그들의 항일투쟁이 모이고 모여 마침내 광복이라는 시대의 열매로 다가오게 된 것이겠지요.
독립이 올지 몰랐다고!
살생을 돈벌이 수단으로 살아가던 상하이무법자 하와이 피스톨은 아무 이유도 없이 독립운동가 안옥윤의 작전을 돕게 되면서 자신의 출신을 털어놓게 됩니다. 그가 언급한 살부계는 친일파로 변절한 아버지를 죽이는 모임을 말합니다. 이것이 실제 존재했는지는 근거를 찾기 힘듭니다.
하지만 이완용의 아들로서 1909년 경술국치 이후 부끄러움에 자결한 이승구, 박제순의 손자로서 광복군에 들어가 활동했던 박승유,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일제의 자작 작위를 받았으나 군인으로서 평생 그것을 부끄러워하며 살았던 이종찬 장군과 같은 사람이 있었으므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과오를 자신의 과오인 것처럼 부끄러워하며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강인국의 실제 모델인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사진]의 경우에는 조선 경비행기공업사를 설립하여 일제의 전쟁물자 지원에 앞장섰습니다. 을사오적으로서 작위를 받은 대표적 5인과 76인의 친일파들은 한 사람당 현재의 가치로 300억원이 넘는 부동산을 축재하기도 했고(이완용), 심지어 또 다른 친일파(송병준)의 후손들은 자기 조상의 임지를 찾겠다며 소송을 걸기도 했었습니다. 친일파라기보다는 종일파라고 불려집니다.
그리고 영화 속 밀정인 ‘그’의 경우, 젊어서부터 항일활동을 해왔던 사람이었지만 결국 암살에 대한 정보를 일본 헌병에게 넘겨 수많은 암살활동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그는 당시 3,40년대를 살아가던 수많은 변절지식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결국 해방 후 1949년 반민특위가 유야무야 되고 이승만 정부가 친일파들을 대거 등용하게 되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그들은 이렇게 변명합니다.
“독립이 올지 누가 알았겠냐고!”
민족을 위해, 적의 심장을 쏘다
암살이란 영화를 보고서 어떤 이는 한인애국단과 의열단이 테러단체 곧 범죄단체 아니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 안에서 그들의 활동이 단순한 테러가 아닌 강력한 정치적 어필이었음을 알게 해주는 대사가 있습니다. 속사포와 약산 김원봉은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민간인은 희생당하면 안 되겠지요?”
“안 되네. 총알에도 눈이 있다고 생각하자고!”
국가도 없고 정부도 없고 군대도 없는 당시의 현실에서 강력한 독립에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했던 정치적 행위였으며 생명을 다 바친 투쟁이었습니다. 영화에서 안옥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친일파 몇명 죽인다고 독립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알려줘야지. 우리가 계속 싸우고 있다고!”
저 이역만리 타국땅에서 독립운동을 해온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심정이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영화상에서 언급되는 청산리대첩의 승리에 대한 복수로 3,600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한 간도 참변, 그리고 세 손가락을 펴며 자신이 300명이나 되는 조선인을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그들의 모습은 일제강점기에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선조들의 비극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장수 해원 공사 (도전 4편 116장)
4 이 다음에 때가 되어 우리가 일을 할 때는 죽었다 말고 혼이라도 애를 써라. 그리하면 네 원을 풀어 주마.” 하시니라.
5 이에 장수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드니 다시 말씀하시기를 “아무리 죽었다 해도 넌들 몸뚱이에 쓸개가 없을 것이냐?
6 네 부하들이 다 죽은 것을 애석하게 여겨 한을 품지 말아라.” 하시니 장수가 도로 벌떡 드러눕거늘 땅을 다시 다독거려서 덮어 주시니라.
4 이 다음에 때가 되어 우리가 일을 할 때는 죽었다 말고 혼이라도 애를 써라. 그리하면 네 원을 풀어 주마.” 하시니라.
5 이에 장수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드니 다시 말씀하시기를 “아무리 죽었다 해도 넌들 몸뚱이에 쓸개가 없을 것이냐?
6 네 부하들이 다 죽은 것을 애석하게 여겨 한을 품지 말아라.” 하시니 장수가 도로 벌떡 드러눕거늘 땅을 다시 다독거려서 덮어 주시니라.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은 수없이 많은 무명지사無名志士들에 의해서 지켜졌습니다. 그들은 온몸을 전장에 내던지는 뜨거운 심장으로 이 한 많은 역사의 땅을 지켜냈습니다. 상제님께서는 그 희생정신과 가치를 다독여주심으로써 그들의 원을 풀어주셨습니다.
이렇게 한민족의 역사는 수백만명의 무명無名 독립열사들이 이뤄온 무명武名으로 인해 광복의 길을 얻었습니다.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해서, 먼저 조국을 위해서 희생한 그들의 존재 자체가 어둠을 불사르는 광명의 총알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혼돈의 시대 속에서 생명의 불꽃으로 새 시대를 연 주인공들입니다.
역사 전쟁의 끝은 어디일까
뜨거운 청춘의 열정을 바쳐 후손들에게 선물한 이 세상의 가치를 과연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고 살고 있을까요?
우리에게 역사는 단순한 과거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존재의의를 확인하는 자아의 거울입니다. 한중일 역사전쟁이 극점을 향해 치달아가고 있는 이때,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우리말을 쓰고 우리의 이름을 쓸 수 있게 해준 것은 역사 속에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무명열사들의 희생 덕분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독립활동의 근간이 되어주고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준 보천교 같은 민족종교의 대대적인 자금지원과 계연수, 홍범도, 오동진 장군께서 사재를 털어 편찬한 환단고기와 같은 민족의 경전 역시 큰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조국을 위해 바친 뜨거운 열혈의 배경에는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나이는 불과 2,30대에 불과했습니다. 영화 속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선물한 이 세상의 가치를 우리에게 다시 한번 기억하게 해줍니다.
이상 내가 본 영화 〈암살〉편이었습니다. (정리 권혁필)
■[안옥윤의 실제 모델]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열사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활약하는 한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각 단체와 군사기관, 농어촌을 순회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또한 남만주 각지를 순회하면서 동포간의 단합과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활약하였다. 1925년 채찬蔡燦, 이청산李靑山 등과 총독 사이토(齋藤實)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만주로 돌아갔다.
1933년 이규동 등과 주만일본대사 부토(武藤信義)를 죽이기로 하고, 연락 및 무기운반 등의 임무를 띠고 걸인노파 차림으로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를 지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6개월 동안 갖은 혹형을 받다가 단식투쟁을 전개하고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하얼빈에서 사망.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
또 한 인물을 더 소개하면 윤희순 의사가 있다. 적극적으로 의병을 돕기 위해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의 독립운동을 독려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모든 집안이 의병활동에 뛰어들어 활동했던 명문가의 안주인이었다. 다음은 그녀로 인해 한국 여성독립운동사를 연구하게 되었다는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의 심옥주 소장의 이야기다.
“윤희순 의사는 79세로 사망할 때까지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쳤습니다. 집안의 시아버지, 남편, 아들도 독립운동을 했고, 손자분이 얼마 전에 작고한 광복회 강원도지부장이었어요. 집안의 4대가 독립운동의 맥을 이어오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입니다. 이 부분을 연구하면서 여성독립운동가가 과연 조력자에 불과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여성독립운동가들이 단지 수동적인 역할에 머물렀으리라는 기존의 추측은 실제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죠.”
■[최동훈 감독 인터뷰 중에서]
광복 70주년, 우리의 무의식이 반영되고 있다
“재밌는 사실은 곧 광복 70주년이라는 거다. 나도 몰랐다. 흐름이란 게 있고, 인연이 있는 것 같다. 어쨌든 계속 거부하려고 해도 영화는 결국 동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게 된다. 〈암살〉 말고도 1930년대 전후를 다룬 작품들이 기획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우리의 무의식이 지금 반영되고 있는 거다.” [중략] “역사문제에 있어서 일본이 제대로 된 사과를 안 하고 있잖나. 나도 한국 사람이니 불만이 있다. 또 국내 역사교육도 부실해지는 것 같고. 어떤 나라건 자국의 역사교육은 중요하다. 집밥을 먹는 것과 비슷한데 그걸 잘 안 챙기고 있다. 거기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친일파에 대한 매듭을 못 지었고,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찌꺼기가 남아 있잖나. 그런 눈으로 1930년대를 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영화 암살의 제작, 각본, 연출의 최동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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