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국에 처한 아랍의 부국 리비아 Libya

[세계지역문화탐방]
리비아는 오랜 식민지 역사를 거쳐 왕국으로 독립한 후 42년간 카다피 정권하에서 자마히리야Jamahiriya(인민 직접민주주의) 체제를 경험하기도 했으나, 2011년 아랍 민주화혁명의 여파로 카다피 정권이 붕괴된 후 군벌들이 난립하고 나라가 분열되는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를 맞아 이슬람주의 정신과 공동체 문화를 바탕으로 난국을 헤쳐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리비아의 현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리비아State of Libya는 지중해에 면한 북아프리카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이다. 북으로는 지중해에 면해 있고, 서쪽은 튀니지, 알제리, 동쪽은 이집트, 남쪽은 니제르, 차드, 수단과 접하고 있다. 국토는 서부의 트리폴리타니아Tripolitania 지역, 동부의 키레나이카Cyrenaica 지역 및 남부의 훼잔Fezzan 지역으로 크게 나눠진다. 트리폴리타니아는 지중해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점차 높아지는 구릉 지역이며, 해안 평야라 불려지는 제파라Jefara와 급경사로 이루어진 자발Jabal로 형성되어 있다. 수도 트리폴리와 함께 대부분의 인구가 집중돼 있는 지역으로 리비아에서 가장 중요한 농업 지대이다. 최남단은 중앙 사하라Sahara 산맥을 형성하며 해발 3,500m의 고원 지대이다.

키레나이카 지역은 지중해를 따라 북쪽에 해발 600m의 협곡으로 된 고원이 있으며, 북쪽의 고지대는 ‘푸른 산’이라는 의미를 갖는 자발 악다르Jabal Akhdar가 있다. 이곳에 인구가 모여 살며 중요한 두 도시, 벵가지와 데르나가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쟈발 악다르 서쪽은 시르테Sirte만으로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동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이집트까지 연결된다. 자발 악다르의 남쪽은 낮은 지역이며 주로 사막지대에 오아시스가 있다. 이 지역 동쪽이 사해沙海(the Sand Sea)이다. 이 지역의 남쪽에 중앙 사하라 산맥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는 훼잔 남쪽과 계속 연결되는 티베시Tibesi 산맥이 차드까지 연결된다. 훼잔은 사하라 사막이 연장된 곳으로 오아시스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사막으로 이루어졌다.

리비아의 기후는 건조함과 다양한 온도 변화가 특징이다. 산맥에 의한 장벽이 부족하기에 사하라, 지중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겨울철 북쪽 지역은 언덕에 눈이 내릴 정도로 춥다. 여름철 트리폴리타니아의 제파라Jefara 지역은 40~45도까지 온도가 올라가며 매우 덥다. 남쪽 지역은 더위가 심각하며 49도까지 올라가지만, 겨울철에는 이곳에도 눈을 볼 수 있다. 북부의 키레나이카는 여름철 비교적 시원한 27~32도 정도의 온도를 유지하지만, 해안 근처는 매우 높은 습기를 유지한다. 특징적인 것은 무덥고 건조한 바람인 기블리ghibli이다. 이는 몇 시간 동안 15도나 심지어 20도까지 온도를 상승시키며, 1월에는 때때로 20~25도까지 기온을 상승시킨다. 이 건조한 모래 바람은 1년 중 어느 때라도 불 수 있지만, 봄과 가을이 가장 빈번한 계절이다. 이 때문에 농작물에 대한 상당한 패해가 발생하며 종종 인간에게도 커다란 피해를 입힌다.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나이카 언덕은 300~500 mm의 강우량을 갖고 있지만, 나머지 지역은 약 200 mm를 밑도는 강우량을 유지한다. 빼놓을 수 없는 기후적 특징은 매 5~6년마다 한 번씩 뚜렷하게 가뭄이 찾아오며, 때때로 계속해서 두 계절 동안 지속된다. 따라서 실제적인 강우량은 믿을 수 없고 변덕스럽다고 할 수 있다.

리비아의 역사
이슬람 도래 이전의 리비아
원래의 리비아에는 베르베르Berber인이 살고 있었다. 리비아는 마그레브 문화권과 이집트 문화권 사이에 위치하여 고대에는 지중해 무역거점이었으며, 페니키아, 오스만 터키, 이탈리아 등 계속되는 외세의 침략으로 오랜 식민지 역사를 가지고 있다. BCE(기원전) 1,000년경 고대 지중해 무역의 주역이었던 페니키아인들이 무역 거점을 찾아 리비아의 서부해안(트리폴리타니아Tripolitania)에 진출하였고 BCE 800∼700년에는 3개의 식민도시, 즉 렙티스 마그나Leptis Magna, 오에아Oea(현재 트리폴리Tripoli) 및 사브라타Sabratha를 건설했다. 페니키아가 건설한 카르타고(현재 튀니스 부근)가 지중해 최대 식민도시로 성장함에 따라 리비아는 BCE 517년까지 카르타고의 지배하에 들어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및 수단에서 들어오는 금 은 옥석 상아 노예의 무역 중계지로 번영했다. BCE 631년경에는 그리스인들이 식민지를 찾아 리비아 동부지역(키레나이카Cyrenaica)에 진출하여 키레네Cyrene, 벨루니스Belunis(현재 벵가지Benghazi), 아폴로니아Apolonia 등 그리스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키레네는 강성하였으나 알렉산더 제국 지배하에 들어가고, BCE 322년 이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Ptolemios 왕조 지배를 거쳐 BCE 96년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로마의 콘스탄티노플 천도 후 로마제국이 멸망하자 로마의 북아프리카 식민지는 게르만German계의 반달Vandal족 영향하에 놓여, 리비아는 CE 431년 반달족에 의해 정복되었다. 약 100년 후인 CE 500년을 전후하여 이 지역은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재차 정복되었으나, 원주민인 베르베르Berber 부족들의 계속되는 반란으로 사실상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아랍 및 터키의 지배
이슬람Islam의 선지자 사도 모하메드의 제자로 이집트에 근거지를 둔 아므르 빈 알-아스Amr bin Al-As가 마그레브(북아프리카 일대)지역의 정복을 시작하였다. 642년 제1차 원정을 일으켜 키레나이카에 침입한 아랍군은 비잔틴을 패배시켰고, 644~645년간에 걸친 제2차 원정에서는 트리폴리Tripoli를 함락시켰으며, 이후 아랍인은 마그레브 전역으로 지배영역을 확장했다. 8세기 말 마그레브에 반란이 빈번해지자, 바그다드의 칼리프 하룬 알-라쉬드Haroun Al-Rashid는 800년 이브라힘 빈 알-아글라비드Ibrahim bin Al-Aghlabid를 총독으로 파견했다. 이후 튀니지 카이라완Kairouan을 수도로 한 아글라브 왕조Aghlabid Dynasty가 바그다드의 칼리프로부터 독립하여 리비아를 지배하게 되나, 10세기 초 시아파의 반란으로 붕괴되고 시아파의 파티마 왕조(Fatimid Caliphate)가 성립되었다. 파티마 왕조는 튀니지부터 이집트까지 정복하고 972년 카이로로 천도하였다. 11세기 초 지리드 아미르Zirid Amir가 시아파에서 정통 수니파로 개종한데 대한 응징으로 바그다드의 파티마 칼리프가 1049년 리비아를 침략하였으며, 그 후 500년간은 부족간 전쟁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11세기에는 이집트로부터 바니 힐랄Bani Hilal족, 바니 살림Bani Salim족이 리비아로 대거 이주하여 원주민인 베르베르족과의 혼혈과 함께 아랍화가 크게 진전되었다. 급속한 아랍화에도 불구하고 리비아는 튀니지 카이라완과 이집트 카이로의 강력한 이슬람 정권사이에서 독자적 이슬람국가를 건설하지 못한 채 한때 기독교 세력의 점령을 받기도 했으나, 1551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오스만 터키Ottoman Turks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551년 오스만 터키의 시난 파샤Sinan Pasha가 트리폴리를 함락시킨 이후 1711년 오스만 터키군 장교였던 아흐마드 카라만리Ahmad Karamanli에 의해 카라만리 왕조(터키 황제의 분봉왕 형식)가 세워져 1835년까지 지속되었다. 1835년 프랑스의 튀니지, 알제리로의 세력 확장을 우려한 터키 황제는 리비아를 재차 점령하고 터키정부의 직접 통치하에 두었다. 그 후 제1차 대전까지 리비아에서는 부패, 압정, 반란이 계속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장차 리비아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사누시 Sanusi 교단이 주요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이탈리아 식민주의 시대
19세기 후반 식민지 획득 경쟁에 뒤쳐진 이탈리아Italy는 영국 프랑스의 영향력이 약하고 지리적 역사적으로 관계가 깊은 리비아를 진출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터키의 발칸전쟁 개입을 기회로 1911년 9월 29일 오스만 터키제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10월3일 트리폴리 상륙작전을 감행했으나, 터키군과 리비아인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 이후에도 이탈리아는 리비아 식민지화를 적극 도모했으나 1차 대전 발발시까지 트리폴리Tripoli, 뱅가지Benghazi, 베르나Berna, 투브루크Tubruq(=토브룩Tobruk) 등 지중해 연안에 지배권을 미치는 정도에 그쳤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터키와 독일은 리비아에서 이탈리아 교란 작전에 나서 잠수함으로 리비아에 무기와 탄약을 공급하고 고위관리를 파견하는 등 대 이탈리아 전열을 재정비했다. 1918년 1차 대전 종료로 이탈리아는 약해지고 리비아인들도 지치자 트리폴리타니아의 리비아인들은 가리안Gharian을 수도로 압둘-라흐만 아잠을 고문으로 하는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 이탈리아는 이들과 휴전하고 ‘행정적 독립’ 구상을 받아들여 이들 대표단의 로마행을 허용하였으며, 미수라타의 라마단 알-수에힐리는 수도를 트리폴리로 천도하였다.

1921년 서트에서 트리폴리타니아의 지도자들이 모여 리비아의 독립을 획득하려는 세력과 합세하여 이드리스Muhammad Idris를 국왕으로 하고 충성을 서약하였다. 하지만 1922년 이탈리아에 파시스트Fascist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리비아에 대한 식민지화 정책을 강력 추진하여, 1925년까지 트리폴리타니아주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무장해제시켰다. 그러나 키레나이카에서는 이드리스가 지도하는 사누시 교단이 완강히 저항하였고, 사이드 오마르 알-무크타르Said Omar Al-Mukhtar가 무력투쟁을 주도해 이탈리아군에 대항하였다. 하지만 1931년 반식민 항쟁의 영웅 오마르 알-무크타르가 이탈리아군에 포위,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짐으로써 리비아인의 저항은 종식되고 리비아의 대부분은 이탈리아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오마르 무크타르는 리비아의 민족적 영웅으로 숭상되고 있으며, 그의 항전을 주제로 한 영화 ‘사막의 라이온’은 한국에서도 상영된 바 있다.

리비아의 독립과 연방왕국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리비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2차대전 중인 1942년 키레나이카와 트리폴리타니아는 영국군에, 페잔 지역은 프랑스군에 점령되어 각각 군정통치를 받게 되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간에 리비아 신탁통치 계획이 수립되기도 하였으나, 1949년 12월 UN에서 리비아독립 지지 결의가 채택되었고 1951년 12월 24일에 리비아는 무함마드 이드리스Muhammad Idris를 국왕으로 하는 연방왕국으로의 독립을 선포하게 되었다. 리비아는 독립과 더불어 심각한 정치 재정 경제적 난관에 직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에게 국민적 동일성과 일체감을 조성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당시 리비아인들은 여전히 촌락과 부족에 충성했고, 부족 지역간 대립이 수시로 표출되는 상황이었다.

1952년 2월 연방하원 선거 시 헌법을 지지하는 ‘독립당’이 의회 다수를 구성하였고, 트리폴리타니아의 '국민의회당'은 연방주의에 반대하고 단일국가 및 비례대표제 선거를 주창하였다. 이러한 대립의 결과 '국민의회당'은 불법화되고 당수 바쉬르 베이 알-사아다위Bashir Bey Al-Sa'adawi가 추방되었으며, 1952년 구성된 트리폴리타니아의 입법회의 역시 연방정부 및 국왕과의 계속되는 마찰로 1954년 해체되었다. 신생독립국 리비아 최초의 중요 대외활동은 1953년 3월 아랍연맹 가입이었으며, 리비아는 신생국의 경제적 곤란 타개 노력의 일환으로 서방국과의 관계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석유의 발견과 단일왕국
독립한 리비아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였다. 1954년 세계은행World Bank 보고서에 의하면, 리비아의 주요 수출품은 아프리카 나래 새esparto grass와 과거 전쟁 중 나온 폐고물 등이었다. 그러나 1955~1956년간 미국회사에 석유 탐사권을 부여한 이래 석유 자원 탐색은 리비아 정부의 주요 관심사였으며, 1960년까지 35개의 유전을 개발, 일일 93,000배럴을 생산했으며, 1962~1966년간 석유생산이 크게 증가되어 석유 수출이 1962년 8백만 톤에서 1966년 7천만 톤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석유개발에 따른 국부 증가로 정부 역할이 더욱 복잡해져 1960~1963년간 수차례 개편을 거쳐 1963년 3월 모힛딘 페키니Mohieddin Fekini를 총리로 새로운 내각이 발족했다. 페키니 총리는 1963년 4월 정부행정의 효율성과 경제성 향상을 위해 국가체제를 종래 연방국가에서 단일국가로 전환시키기 위해 중요 개혁(여성 참정권 부여, 국왕의 상원의원 24명 전원 임명, 주정부 폐지 등)을 포함하는 법안을 하원에 상정하였고, 결국 1963년 4월 27일에 리비아는 국왕 포고로 단일 왕정국가가 되었다.

리비아는 석유수입 증가에 따라 재정적으로 독립하게 되어 국제 문제, 특히 아프리카 문제에 대해 발언권을 높이기 시작했다. 1962년 모로코, 1963년 알제리와 협정을 체결, 모든 마그레브제국(아프리카 북서부 지역의 나라들)과 밀접한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서방에 대한 의존을 탈피하고자 노력했다.
1967년 6월 아랍-이스라엘간 6일 전쟁 발발로 트리폴리와 벵가지는 심각한 소요사태를 겪게 되었다. 이집트의 선전책동에 자극받은 항구 노동자와 석유 노동자, 학생들은 미국 및 영국대사관을 습격하고, 유대인 사회를 공격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이탈리아, 몰타 등지로 이주하였다.

리비아 아랍공화국
리비아는 원유 수출에 의해 국가의 부富가 신장되는 변화를 겪었지만, 이렇게 새로 형성된 갑작스러운 부는 효과적으로 분배되지도 않았고, 고용기회도 제공하지 못했다. 낫쎌주의Nasserism와 아랍통합Arab Unity 사상이 중동 전역을 휩싸고 있을 무렵, 리비아는 왕정하의 부패가 만연되었고 국민들의 불만이 확산되었다. 리비아 정부의 친 서구적인 태도는 사회적인 불안을 가중시켰고, 1967년 아랍 이스라엘 전쟁 이후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1969년 리비아에서는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이드리스 왕이 터어키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던 그해 9월 1일, 27세의 무아마르 알-카다피Muammar Al-Qaddafi 대위를 중심으로 한 청년장교 그룹이 트리폴리에서 무혈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수일 만에 전국을 장악하였으며, 이들 청년장교그룹 12명으로 구성된 혁명평의회(Revolution Command Council, RCC)는 왕정을 폐지하고 리비아 아랍공화국Libyan Arab Republic을 선포하였다. 리비아 아랍공화국은 처음에는 문민정부였으나, 카다피에 의해 주도되는 혁명평의회로 대치되었다.

리비아 사회주의아랍공화국
리비아의 정치제도는 국회의 소집과 함께 1976년부터 급격히 변화되었다. 혁명평의회가 역할을 대신하던 국회는 1년 후인 1977년 총인민회의General People's Congress(GPC)로 바뀌었고, 동시에 국명도 대중 국가인 리비아 인민사회주의 아랍공화국 Socialist People's Libyan Arab Jamahiriya(일명, 대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국)으로 선포되었다. 이는 인민주권 선언에 따라 인민 직접민주주의(자마히리야Jamahiriya)를 지향하는 통치체제로 전환한 것이었으며, 무아마르 알-카다피는 총인민회의 총서기국 서기장(국가원수직)에 취임했다. 직접민주주의와 체제 견고화를 위해 리비아는 1979년 해외 공관을 개혁하여 해외 유학생, 교민들로 하여금 해외공관을 접수하여 인민사무소(People's Bureau)로 개칭하고 인민 위원회를 구성하여 운영토록 하였다. 또한 1985년 외국인 근로자 약 5만명을 추방하여 이집트, 튀니지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유가하락으로 재정적자가 누적되고 국민생활이 어려워지자 1988년에는 Green Perestroika로 불리는 녹색헌장을 선포하여 여행자유화, 소규모 사기업 인정, 체포·구금 제한 등 인권존중, 여성 사회참여 확대 등의 정책을 실시했고, 1991년에는 경제자유화 시책을 발표하여 경제난 타파를 위한 자유시장경제 체제 부분 도입과 중앙은행을 제외한 모든 국영기업의 민영화 등을 추진하였다. 1998년에는 실용주의 정책으로의 전환을 시도하여 과거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기치 아래 시행하던 반정부단체 및 테러집단에 대한 지원을 포기하는 한편, 이슬람국가로서 종교와 인종을 초월하여 아프리카 연합African Union(AU) 창설 등 지역협력체 구축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평화외교 및 경제 자유화, 개방화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리비아 내전
2010년말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에서 시작되어 아랍의 봄 재스민혁명이라 불리는 민주화 시위의 폭풍은 알제리와 모리타니를 거쳐 이집트에서부터 본격화되었고, 수단, 예멘, 절대군주국인 요르단과 사우디아라비아, 모로코까지도 파급되어 나갔으며, 리비아에도 예외 없이 불어닥쳤다.

2011년 1월 13일 주택 건설의 지연과 정치적 부패에 저항하는 시위가 벵가지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으며, 대규모 인원이 카다피 리비아 국가 수반 겸 국가평의회 의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본격적인 반정부 시위는 2월 15일 저녁에 발생하였다. 이후에도 시위는 계속되어 반정부 시위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17일에는 ‘분노의 날’로 선포되어 여러 도시에서 시위가 발생하였다. 반정부 시위의 물결은 리비아 전역으로 확대되며 봉기 수준으로 격화되었다.

반정부 시위에 대한 정부의 무차별 진압작전은 불과 2개월 만에 6천여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야기하였다. UN과의 밀고 당기기를 계속 하던 정부군은 3월 17일 반군에 대해 최후통첩을 하였고 이에 다국적군은 20일 오전 2시 24분 오디세이의 새벽 작전 하에 정부군을 향해 군사공격을 감행하였다. 서방 연합군의 공습은 카다피 세력의 승리로 기울어가던 리비아 시민봉기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나토NATO의 공중 지원에 힘입어 반군은 트리폴리를 제외한 서부지역 곳곳에서 카다피군을 몰아붙였다.

수도 트리폴리 이외의 지역의 거의 대부분이 반정부 세력의 손에 떨어지자, 카다피는 지지 시민들에게 무기를 지급하고, 반정부 운동의 봉쇄에 나섰다. 반정부 세력도 미스라타에서 의용병을 모으기 시작해 수백 명이 결집하였고, 이로 인해 수도에서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월 27일, 카다피 정권에 반기를 들고 사임한 무스타파 압둘 잘릴 전 법무장관이 벵가지에서 잠정 정권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 설립을 선언하고, 카다피 정권의 타도를 위해 리비아 국민의 결속을 호소하였다. 이날 수도 트리폴리 일부는 반정부 세력에 의해 제압되었다. 3월, 압둘 잘릴이 이끄는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 아래 당초 난립하고 있던 반정부 세력의 자치 정권이 결집하기 시작하였고, 3월 2일에는 벵가지에서 회합을 열어 압둘 잘릴이 정식으로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 의장으로 취임, 리비아 혁명의 달성을 향해 결속을 강화하였다. 한편 정부 세력도 용병 출동이나 공군의 폭격 등으로 영토 탈환에 나섬으로 인해 리비아 전국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이 일어났다. 리비아는 사실상 두 개의 국가로 나뉘었으며, 장기전의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해, 이러한 혼란을 봉기나 반정부 시위 대신 내전內戰이라고 표현하는 언론이 나타났다. 반정부 세력은 각국에 군사 개입과 비행 금지 구역의 설정을 요청하였다. 8월 23일, 트리폴리가 함락되었다. 카다피 정권의 마지막 보루였던 카다피의 관저 '바브 알아지지아'가 시민군측에 함락되면서, 수도 트리폴리 시내 전역이 시민군측의 통제에 들어가게 되었다.

10월 20일, 시르테가 함락됨과 동시에 하수도에 숨어있던 무아마르 카다피가 시민군에게 발각되어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카다피 정권의 종식을 공식 선포한 리비아는 새 과도정부를 구성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리비아 반反정부세력의 구심점인 과도국가위원회National Transitional Council(NTC)를 리비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 과도국가위는 늦어도 8개월 내에 헌법을 만들어서 의회를 구성하고 권력을 이양하는 작업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혁명 이후 과도정부가 리비아 정국을 장악하지 못함에 따라, 리비아 내의 혼란과 충돌은 끊이지 않았다. 시민군, 혹은 민병대들이 무장해제를 하지 않고 세를 확장하면서 리비아의 치안 불안은 심각해졌다. 혁명 이듬해인 2012년 7월, 과도국가위원회를 대체하기 위한 제헌의회General National Congress(GNC)를 구성하는 선거가 치러졌다. 선출된 의회는 2012년 10월 인권변호사 출신인 알리 제이단Ali Zeidan을 총리로 지명했고, 그를 중심으로 과도 정부가 꾸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테러와 서로 다른 민병대들 간의 충돌, 민병대와 정부군 간의 충돌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치안 불안과 중앙 정부의 장악력 부족으로 인해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는 동부와 남부 주민들의 무력시위도 발생하였다. 시민혁명으로 카다피가 축출된 지 만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리비아의 안정적인 민주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제헌의회GNC는 원래 이슬람이 주류가 아니었으나, 2013년 6월 이슬람계 아부샤마인Nouri Abusahmain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이슬람 주도로 변질되었다. 이에 2014년 5월 18일, 퇴역 장성 칼리파 하프타르Khalifa Haftar가 조직한 비이슬람계 ‘국민군(Libyan National Army)’이 GNC의 해산을 요구하며 국회의사당을 공격했다. ‘리비아의 존엄(Dignity ofLibya/ Diginty Operation)’이라는 대테러 및 이슬람 극단세력 소탕 작전을 주도한 하프타르는 리비아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GNC는 임기를 더 연장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2014년 6월에는 제헌의회를 대체하는 새로운 의회, 대표자회의Council of Deputies(CoD: 하원)를 구성하는 선거가 있었고 총선 결과 다수를 차지한 비이슬람계 세속주의 세력 중심의 정부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당시 투표율이 18%로 지나치게 저조하고 무장세력이 선거에 개입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슬람 세력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제헌의회 해산을 거부하면서 자신들의 총리를 따로 선출하는 등 첨예한 대립을 보였다. 결국 세속주의(비이슬람) 세력이 주도한 새 의회의 정부는 칼리파 하프타르가 장악하고 있는 리비아 동쪽 끝 도시 투브루크Tubruq로 피난하여 정착하였고, 이슬람 세력들은 8월 23일 수도 트리폴리를 장악하고 새 의회에 참여하지 않은 기존 총국민회의 의회 의원들을 규합해 의회를 구성함으로써 양측이 서로 합법 정부라 주장하는 두 개의 국가 분단 상태를 연출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트리폴리에 소재한 리비아 대법원은 2014년 11월 6일자로 6월 총선이 무효라고 선고하였고 세속주의 세력 측은 대법원이 이슬람 세력의 총구 앞에서 내린 판결은 무효라고 반발하였다. 국제사회는 대체로 투브루크에 있는 새 정부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여러 혼란한 정국 상황들을 고려해 볼 때 리비아 내전 사태가 단기간에 정상화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정치 및 행정


정치현황
리비아는 1951년 독립 이후 왕정체제를 거쳐 무아마르 카다피 집권기(1969~2011) 동안 아랍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자마히리야Jamahiriya(인민 직접민주주의) 체제가 시행되었다. 이 체제에서는 헌법이 없이 자마히리야 체제가 코란과 함께 리비아의 정치 사회질서를 규율하는 틀로 작용을 했다. 하지만 자스민 혁명으로 카다피 정권이 붕괴된 이후,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NTC에 의해 2012년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고 총리가 선출되어 제헌의회NGC에 정권이 이양되었다. 임시정부 및 제헌의회의 최우선 임무는 리비아 국정의 근간을 이루는 헌법 수립 일정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원래의 일정이 1년 이상 지연되어 당초 예정한 2013년 신정부 구성은 무산되었고, 2014년 6월 25일 제헌의회를 대체할 대표자회의Council of Deputies(CoD: 하원)를 구성하는 총선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의회가 구성되면 이후 대통령선거, 신정부 내각 등의 정치 일정이 추진될 상황이었다.

총선 결과 리비아 의회는 세속주의(비이슬람계) 의원이 다수를 점하여 압둘라 알 틴니Abdullah Abdul Rahman Al-Thinni 총리 정부가 새로 출범해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소수의 이슬람계 의원들은 낮은 투표율과 무장세력 선거개입 등을 이유로 의회 참석을 거부하면서 대법원에 의회의 합헌성 여부를 판단해 달라고 요구하였고, 이슬람 민병대가 수도 트리폴리를 장악하면서 알 틴니 정부는 동부 투브루크로 근거지를 옮겼다. 결국 리비아는 합법성을 인정받고 있는 세속주의 세력의 투브루크 정부와 별개의 정권을 수립한 이슬람 세력의 트리폴리 정부가 공존하는 사태를 맞았고, 극도의 치안 혼란과 함께 양 세력이 내전을 장기전으로 몰고가는 형국이 되면서 리비아의 헌법과 정치체제를 확정하는 정치 전환 과정은 지연되고 있다.

42년간의 카다피 독재 정권 붕괴 후, 신정부에 대한 리비아 국민들의 기대감은 고조되어 있으나 뿌리 깊은 지역 부족주의, 내전 당시 붕괴된 경제기반, 광범위한 무기 유포(약 200만정)로 인한 치안 불안, 민병대(1,700여개 27만여명) 세력과 정부 간 갈등, 시민 사회 미성숙 등으로 민주주의 조기 정착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행정부
카다피 정권 붕괴 후 2012년 1월 28일 제정된 제헌의회GNC 선거법은 정당투표제를 거쳐 집권당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하는 형태를 취했다. 2014년에 제헌의회를 대체하는 새로운 의회(하원)으로 대표자회의Council of Deputies(CoD)를 구성하는 선거가 있었는데, 그 결과를 놓고 이슬람 진영과 비이슬람 진영이 대립을 벌여 서로 다른 두 개의 정부가 생겨나는 사태를 맞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대외적으로 합법성을 인정받고 있는 리비아의 정부는 투브루크에 거점을 둔 압둘라 알 틴니Abdullah Abdul Rahman Al-Thinni 총리 정부이다.

지방행정
리비아는 2007년 전국 행정구역을 22개의 샤비아트Shabiat(광역 행정체계)로 구성하여 개편했다. 그 행정구역은 왼쪽과 같다.

입법부
리비아의 제헌의회GNC 선거법은 정당투표제를 채택하였으며, 2012년 7월 7일 실시한 제헌의회의원 선거에서는 마무드 지브릴Mahmoud Jibril 전 총리가 이끄는 자유주의 성향의 국민연합당이 39석으로 가장 많은 의석을 획득하였으며, 무슬림형제단의 정의건설당(17석), 국민전선당(3석), 국민중도당(2석), 조국연맹당(2석), 민주건설당(2석) 및 여타 15개 정당이 각각 1석씩을 차지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후 2014년 대표자회의Council of Deputies(CoD)를 구성하는 선거에서 비非이슬람 세속주의 세력이 득세하자 이슬람주의 세력이 제동을 걸면서 선거 무효 주장과 함께 별개의 정부를 구성해 갈라서면서 내전에 돌입해 혼란을 겪고 있다.

경제동향
리비아는 1988년 미국 팬암기 폭발과 1989년 프랑스 UTA기 폭발 사건에 리비아 정보기관원이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미국 영국 프랑스 3국에게서 테러포기, 혐의자 인도 및 피해유족 보상 등을 촉구받았으나 이를 부인하고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대해 미 영 프 3국이 주도한 1992년 UN 안보리 결의에 따라 리비아에 대한 두 차례의 제재 및 추가 제재를 통해 리비아 정부, 공공기관, 기업이 직간접으로 소유 지배하는 모든 해외자산 동결, 석유생산 및 공급 관련 기자재 수출 및 동 기자재 관련 용역 수출 금지와 같은 제재 압박을 받음으로써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리비아는 결국 1999년 협상을 통해 혐의자를 인도하면서 경제제재 조치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2003년에는 대량살상무기(Weapons of Mass Destruction, WMD) 개발 포기선언을 하면서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도 이루어냈다.

리비아는 석유산업이 정부 재정수입과 수출에 있어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석유산업을 제외한 여타산업 기반은 취약한 것으로 분석된다(IMF). 카다피의 등장 이후 사회주의 경제이념에 따라 모든 토지의 국유화, 사막 오지에 대형농장 개발 및 농업인력 이주와 함께 대규모 산업생산형 공장 건설 등을 추진하였다. 1988년 이후 소규모 자영업 허용, 민간부문의 경제참여범위 확대 등의 경제 자유화시책이 발표되었고, 2003년 9월 UN제재 해제 및 2004년 9월 미국의 경제제재 해제 이후에는 국내 경제회복을 위해 외국인 투자유치 및 경제개발 노력을 기울인 바 있다.

리비아 경제의 중추 원유산업
아프리카 최대 산유국인 리비아는 2010년까지 경제제재 해제, 국제유가 상승, 원유생산 증대를 바탕으로 5% 수준의 견실한 성장세를 기록하였으나, 2011년 내전 발발로 원유 생산량이 급감하고 인프라 및 생산시설이 파괴되면서 무려 61.4%의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바 있다. 2012년부터 추진된 석유 생산 재개 및 정상화로 2012년 연말 기준 150만b/d의 원유 생산이 이뤄졌으나, 2013년 7월 이래 동부 연방주의자들의 원유 시설 및 수출항(60%) 무장 점거로 인해 원유 생산 및 수출량이 급감(100억 달러 이상의 석유수출 감소 피해)하고, 원유의 불법수출(북한 인공기 게양 모닝글로리호 사건)도 발생하여 정부 재정의 95%를 원유 수출에 의존하는 리비아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2014년에도 중앙정부와 동부 연방주의자(원유 최대수출항인 Es Sider항, Las Lanuf 항 점거)간의 협상 중단 및 일부 원유 생산 지역에 대한 부족 등의 사보타주 및 원유 관련 설비 노후 등으로 인해 오일 수출도 못할 위기에 처했으나 다행히 회복되었다.

교역현황
2010년 리비아 통계청이 발표한 수출입통계에 따르면, 수출은 2009년 대비 35.6% 증가한 462억 리비아 디나르(352억 6,718만 달러)를, 수입은 2009년 대비 39.3% 증가한 224억 리비아 디나르(170억 9,924만 달러)를 기록해 238억 리비아 디나르(181억 6,794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내전 이후 명확한 무역 동향을 발표하지 않고 있어, 2010년 이후의 정확한 실적은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주요 수출품목으로는 석유가스 수출이 전체 수출의 97.7%, 화학제품이 1.3%를 차지하였다. 국가별로는 이탈리아가 전체 수출의 42.3%를 차지하여 최대 수출시장 지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다음으로 프랑스 15.5%, 중국 9.4%, 스페인 9.2%, 네덜란드 3.4%, 독일 2.6% 등의 수출시장점유율을 기록하였다. 주요 수입품목을 보면, 기계 및 장비류, 운송수단, 기초금속, 식물제품, 화학제품 등의 수입증가세 호조가 지속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리비아 경제의 과제와 전망
리비아는 2012년 카다피 사망으로 잠시 정국이 평온을 찾고 원유 생산이 재개되는 등 복구가 이뤄지면서 92.1%의 경제성장을 시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이후 정국이 다시 혼미해지면서 경제 상황도 점차 난국으로 빠져드는 형국이다. 리비아가 차후 안정을 찾고 경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제를 검토하고 개선책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고질적인 용수 부족’ 문제가 있다. 사하라 사막의 일부인 리비아 사막이 전 국토에 걸쳐 있으며, 용수부족으로 농경지 확대가 어려워 2007년 기준 농경지가 국토의 8.8%에 불과하다. 정부는 고질적인 용수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남부 사하라 사막의 지하수를 끌어올려 북부 지중해 연안 도시들에 공급하기 위한 대수로 건설 공사를 진행 중이며 우리나라 기업이 이에 참여하고 있다. ‘치안 불안’도 리비아의 고질적인 문제이다. 정치 사회의 불안정과 제도 미비로 기업투자 환경이 열악한 점은 경제 운용에 큰 부담이 되고 있는데, 정부가 두 개로 나뉘어 분단 상태가 돼버린 지금 치안의 개선 문제는 리비아 경제 개선에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대부분의 외국 투자가들은 종전과 별반 다름 없는 투자법 및 환경, 불안정한 치안 등을 이유로 대 리비아 투자를 유보하고 있다. 더구나 2014년 하반기에 수립될 것으로 기대한 신정부 출범이 이슬람과 비非이슬람 세력 및 군벌들의 대립과 분쟁으로 비화되면서 당분간 리비아에 대한 투자는 고려 대상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사회와 문화


민족구성 및 가족제도
현재 리비아 민족 구성에서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이는 민족은 아랍족이다. 아랍족은 CE 643년 리비아를 정복한 이래 9~10세기에 걸쳐 아라비아 반도로부터 대거 진출하여 원주민인 베르베르족보다 다수 민족이 되었다. 주요 종족 및 부족은 아랍Arab인 48%, 베르베르Berber인 20%, 투아레그Tuareg인 12%, 아랍흑인 혼혈 15%, 유럽계 3%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967년 이전에는 트리폴리 지방을 중심으로 유태인이 많이 살고 있었으나 1969년 혁명 이후 이스라엘, 몰타, 기타 제3국으로 이주하였다.

아랍인은 유목민 전통에 따라 부족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혈연적 연대의식과 신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교우적 연대의식을 생활 기반으로 삼고 있다. 혈연을 신성시하고 혈연에 대한 충성이 생활과 사고에 크게 작용하여 누구나 가계家系에 대한 자부심이 있고, 가계에 대한 비방은 용서할 수 없는 모욕으로 여기며, 이슬람의 영향으로 부족 구성원 간에는 남녀의 차별 없이 모두가 평등하다.

오늘날 대부분의 아랍인은 부족 생활에서 벗어나 가족중심으로 생활하며, 석유개발 및 과거 카다피 정권의 사회주의 정책의 영향으로 생활·교육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사회 전반에 개인주의가 확산되어 핵가족 제도로 점차 변모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개인은 가족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으므로 개인의 혼인문제는 가족 전체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어 결혼상대는 가족 구성원이 공동으로 물색하여 서로 상의한 후 택하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리비아에서는 남녀 모두 18세부터 결혼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남자는 28세, 여자는 26세 전후에 결혼하며, 남자들의 평균 결혼비용(집 제외)이 20,000디나 정도 소요되므로 소득이 적거나 유산이 없을 경우 결혼이 지연되는 경향이 있다. 전통적 아랍관습에 의하면 이혼할 수 있는 권리는 남자에게만 있었으나 1973년 법에 의하여 여자에게도 남자와 같이 이혼할 권리가 인정되었다. 이혼한 남자는 외국인이나 리비아 외의 아랍국적 여자와 결혼을 할 수 없으며, 외국인과 결혼한 남자는 정부기관 및 정부소속 기관에 취업하기가 어렵다. 장례는 3, 5, 7, 15일장이 있으며 화장은 인정되지 않고 조상에 대한 제사도 없다.

생활관습
리비아인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세계관은 모두 이슬람교에 근거를 두고 있다. CE 622년 이슬람교 탄생 이래 1,400여 년간 아랍인의 생활과 그들의 의식구조는 이슬람 교리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신에게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타끄와Taqwa(fear of God)가 삶에 있어 인간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의복의 경우 남자들은 전통적으로 흰색 면 셔츠와 면바지를 입고 겨울에는 양털로 된 외투를 착용하며, 여자들은 넓은 천으로 몸을 휘감는데 이를 바라칸Barracan이라 부른다. 투아레그족 남자들은 푸른 물감을 들인 베일을 쓰나, 여자는 쓰지 않는다.

리비아의 음식으로는 밀과 곡식을 혼합한 가루로 만든 둥근 모양의 빵이 주식이고, 양羊은 최상의 음식으로서 옛날 유목생활 때부터 신에 대한 제물과 주식으로 이용되었으며, 가죽은 옷 또는 신발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아랍 차(茶)는 이들의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 기호품이며, 리비아에서는 식사 후 박하 잎을 띄우고 설탕을 첨가한 녹차(Green Tea)를 많이 마신다.

리비아인들은 악수하기를 좋아하고 상대방 집안 식구 모두의 안부를 물어 보며, 오랜만에 만났을 때는 반가운 표시로 양 볼에 키스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일반적으로 외부인의 가정 방문을 꺼리나 손님을 초대하였을 때에는 접대를 아끼지 않으며, 이때 손님의 시중은 남자들이 하고 손님은 내실로 들어갈 수 없다. 초대를 받았을 경우 선물을 가져가지 않아도 좋으나, 차려 놓은 음식은 많이 먹을수록 좋아한다.

종교생활
리비아 주민의 대부분은 이슬람교 수니파이며, 신의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무신론자를 부정한다.(이슬람교도 98%, 기독교 2%) 모든 생활의 규범은 꾸란Qur'an에 의거하며 꾸란은 개인생활은 물론 정부시책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꾸란Qur'an(코란Koran)은 아랍어로 쓰인 이슬람 성전으로 알라가 예언자 모하메드를 통하여 인류에게 계시한 것을 예언자 사후에 편찬한 것을 말한다. 꾸란의 내용은 ‘메카’장과 ‘메디나’장으로 구분되어 CE 610~632년, 약 22년간 메카에서 계시 받은 사항과 메디나 천도 후의 사항을 구분하여 수록되어 있다. 메카장에는 신의 유일성, 도덕, 최후심판 등이 기록되어 있고, 메디나장에는 입법관계, 결혼, 술 돼지고기 도박 간통 금지 등이 명기되어 무슬림의 법전 구실을 하고 있다.

교육, 언론
리비아 교육정책의 주된 목표의 하나는 문맹 퇴치이며, 중등교육과정까지 의무교육을 무상으로 실시하고 있으며, 학교는 모두 국. 공립으로 운영된다. 학제 및 학기는 초등교육 6년, 중등일반과정 3년, 중등기술 또는 훈련과정 4년, 고등일반과정 3년, 고등교사 또는 특수훈련 과정 4년, 대학교육 4년으로 교육제도는 미국식의 6.3.3.4제로서, 매년 9월에 학기가 시작되며 연 35주, 1주 5일의 수업이 행해진다.

언론사로는 국영통신사 JANA (Jamahiriya News Agency), 라디오방송은 El-Jamahiriya, Arab Tripoli(트리폴리 지역), Benghazi Radio Station(벵가지 지역), Sebha Radio Station(세바 지역), Mediterranean Radio Station, Studio 5(영어 및 불어, 트리폴리 지역)이 있으며, TV 방송국은 El-Jamahiriya TV(리비아 전역), Channel 2 TV(영어, 불어, 트리폴리 지역), El-Jamahiriya space channel(아랍어 위성방송), Shaa TV 방송(아랍위성방송 중계 채널)이 있다. 일간지로는 Al-Fajr Al-Jadid(정부공식 기관지), Al-Jamahiriya, Al-Shams(The Sun), Al-Zahf Al-Akhdar가 있으며 주간 및 월간지로는 AL REYAH(스포츠), AL ELAN(광고지), AL MIZAN(경찰지), AL MUNTIGON(제조업소식), AL TALIB(학생지), AL MUAZAF(노동자지), AL THAGAFFA AL ARABIAH(문화지)등이 있다.

한국과 리비아의 관계


민주화 혁명 이전의 기본관계
리비아는 1980년 12월에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카다피 정권 시절 리비아는 국내적으로는 이슬람이 가미된 사회주의를 실시하고 대외적으로는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반이스라엘 강경정책을 추구했다. 이러한 정책방향이 서구국가들과의 불편한 관계를 심화시키게 되자 리비아는 Look East 정책(동양권과의 관계증진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리비아는 한국의 국력신장 및 중동진출의 실적을 평가하여 1970년대 말부터 건설 분야를 중심으로 양국의 실질협력관계를 발전시켰으며, UN 제재하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그 관계는 꾸준히 확대되어 큰 성과를 거두고 상호신뢰를 구축하였다. 1978년 이후 한국 업체의 대규모 수주에도 불구, 로커비 사건(미국 팬암 항공기 폭파 사건) 및 대對리비아 경제제재관련 UN 표결에서 표출된 우리정부의 태도 등으로 양국 간에는 불편한 정치관계가 지속되었다. 한편, 동아건설 파산에 따른 대수로 공사 문제의 원만한 해결, Al-Fateh대학 전산화 사업프로젝트 추진(2001~2003), 우리 전통예술단 공연 개최(2002, 2004, 2005), 우리 고위인사 리비아 방문 등 양국 관계 발전을 위한 우리의 주도적 노력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면서 양국 관계는 다시 확대 발전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한반도 통일정책과 관련, 카다피는 2003년 1월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자주적 통일원칙, 북한의 무력 및 테러위협 포기, 핵프로그램 중단 등 우리의 대북 포용정책을 지지하였고, 2003년 12월 한-리 친선협회가 정식 발족함으로써 민간차원의 교류 협력도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민주화 혁명 이후의 관계
2011년 2월 리비아 민주화 혁명이 발발한 후 우리 정부는 카다피 정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5월말 대사관을 튀니지로 옮긴 후부터는 과도국가위원회National Transitional Council(NTC)와 관계 형성을 시작했다. 6월에는 정부 합동 대표단이 벵가지를 공식 방문하여 NTC를 접촉하였으며, 7월에는 NTC를 지지하는 국가들의 모임인 ‘Contact Group’ 회의에 참석하여 NTC를 다자차원에서 승인하여 공식적인 관계를 맺었다. 한국은 아시아국가 중에서 NTC를 가장 먼저 승인한 국가로서, 내전 종식 후 대사관을 최초로 복귀시키는 등, 새로운 리비아와의 협력 관계 증진을 위해 노력해 왔다.

우리나라는 리비아 민주화 혁명 및 내전으로 고통 받는 리비아 국민들을 위해 2011년 국제기구를 통해 100만 달러의 인도적 지원을 시행하였으며, 정부와 민간기업(14개사)를 통해 조성한 160만 달러 규모의 구호물자를 전달했다. 또한, 2012년 1월 국무회의를 통해 단기 경제적 이익보다는 리비아 국민의 ‘마음’ 확보 및 중장기적 국가재건 전략수립 지원, 민관합동 지원 및 우방국과의 공조 추진이라는 원칙을 세우고, 수자원 관리와 농업협력, 인프라 구축 등 7가지 분야의 리비아 재건 지원 사업을 선정하여 지원하고 있다. 2012년 4월 30일에는 리비아와의 장기적 경제협력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한-리비아 경제협력 포럼’을 개최했고, 2013년 3월 3일에는 실종자 유해발굴 및 신원확인 사업 차량과 장비 인도식이 개최 되면서 본격적인 리비아 재건 지원 사업이 시작되는 등 다각도의 재건 지원 방안들이 집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문제는 정부의 통제력이 확고하지 못해 생기고 있는 리비아의 불안한 치안 상황이다. 2014년 1월 19일, 리비아 주재 한국 코트라KOTRA 무역관장이 한 군소 민병대 소속 무장 세력들에 의해 납치되었다가 사흘 만에 구출되었고, 2015년 4월 12일에는 트리폴리 아부나와스 지역에 있는 한국 대사관 앞에서 무장괴한이 기관총 40여발을 난사하여 대사관 경비초소에서 근무 중이던 리비아 경찰관 2명이 숨지고 1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도 발생했다. 케냐, 남수단에 이어 리비아 등 아프리카 분쟁국에서 발생한 사태가 한국민에게도 실제적인 위협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리비아 교역관계
한국과 리비아 양국의 2013년 총 교역규모는 전년대비 15.6% 감소한 15.4억 달러 기록하였다. 수출 10.6억 달러(-1.1%), 수입 4.8억 달러(-36.2%)로 무역수지 5.8억 달러의 흑자를 달성했다. 원유 수입 감소에 따라 교역규모는 줄었으나, 수입 대비 수출이 소폭 감소에 머물러 무역흑자는 전년대비 79.7% 증가하였다. 2013년 한국의 대對리비아 주요 수출품은 승용차, 화물자동차, 자동차부품, 타이어, 가열난방기, 건설중장비 등 중간재 산업재가 주종을 이루며, 자동차 이외의 수출품은 주로 프로젝트 기자재 관련, 가열난방기, 건설중장비, 축전지, 전선, 변압기, 밸브 등의 산업재이다. 대對리비아 주요 수입품은 원유, 나프타, 어육, 알루미늄괴 및 스크랩, 참치 등으로 전년대비 36.2% 감소한 4.8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한국의 대對리비아 수출품목은 일부 품목(자동차 등)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어 향후 수출 품목 다변화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리비아에서 한국 상품의 인지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한국산이 자동차 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핸드폰, 컴퓨터, 전자제품 등의 한국산 시장 점유율이 매우 높다. 내전 이후에는 연식제한이 무의미해 지면서 한국산 중고자동차의 수입도 대폭 증가하였다. 거리에서 한국 상품의 홍보간판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리비아 소비자에게 한국산은 우수한 제품으로 인식되고 있어 ‘Made in Korea’라는 라벨인 붙인 제품은 최고 제품으로 손꼽힌다. 리비아 시장 수출이 유망한 한국 상품은 자동차 부품, 건설중장비 및 부품, 중소형 제조설비, 위성방송수신기(일명 셋톱 박스), 오일 밸브, 담요, CCTV 카메라 등 보안관련 제품 등이다.

북한과의 관계
리비아는 1974년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리비아는 체제의 유사성과 국제문제에 대한 외교노선의 동질성 및 군사협력 필요성 등으로 비동맹회의 등에서 한국문제 거론 시 북한지지 태도를 견지하였다. 하지만 리비아가 1980년 한국과의 외교관계 수립 후 북한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남북한에 대한 실리외교를 추구하고 있다. 2003년 12월 리비아의 대량살상무기(WMD) 개발계획 포기 선언 이후 카다피의 북한에 대한 핵포기 촉구는 핵개발이 정당한 자주권 행사라는 주장의 명분을 약화시켜 북한에 심리적 압박감을 주었다. 리비아-북한 간 양자관계는 위축되는 추세이나, 2006년 6월 임경만 북한 대외무역 부상 방리, 2008년 7월 바라니 외교차관 방북 등을 계기로 건설, 의료 인력의 리비아 재진출 추진 등 경제분야를 중심으로 관계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