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변화의 기로에 선 파키스탄

[세계지역문화탐방]
파키스탄은 이슬람 국가이지만 인도, 중국, 서역 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역사적 자취와 천혜의 다양한 지형에서 파생된 복합적인 문화 유산을 보유한 나라이다. 하지만, 과격한 이슬람 전사들로 상징되는 투쟁적이고 불안정한 이미지와 함께 파키스탄 탈레반과 마약 문제, 카슈미르 영토 분쟁 등 바람 잘 날이 없는 ‘위험한 나라’라는 오명도 함께 갖고 있다. 최근 평화적 정권교체를 달성하고, Look East Policy(동방정책)를 실행에 옮기는 등 미래를 향한 변화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파키스탄의 현재를 더듬어 본다.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파키스탄이슬람공화국Islamic Republic of Pakistan은 북위 23도 30분~36도 45분과 동경 60도 55분~75도 31분 사이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인도, 서쪽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그리고 북동쪽으로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남쪽으로는 아라비아 해에 접한다. 면적은 796,095㎢로 아시아에서 7번째로 큰 나라이며, 총 해안선의 길이는 1,046㎢이다. 한반도의 3.5배에 달하는 면적을 가진 파키스탄은 인도대륙 서쪽에,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비스듬히 놓여 있으며 국토의 거의 중앙을 인더스Indus 강이 남북으로 관류한다. 아프가니스탄으로 통하는 카이버 패스Khyber Pass는 인도아대륙(인도반도)과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통로이다.

파키스탄은 지형학적으로 대고원, 발루치스탄 고원, 인더스 평원, 사막지대의 4개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대고원은 히말라야 및 트랜스히말라야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부와 남서부를 이루는 발루치스탄 고원은 해발 약 300m의 중단된 고원으로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많은 산맥들이 가로지르고 있다. 동쪽의 인더스 평원은 파키스탄에서 가장 번창하는 농업지역이다. 남동부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탈, 촐리스탄, 타르 등의 사막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파키스탄은 많은 인구에 비해 공항, 도로, 철도 등 교통 인프라가 부족한 편이며, 대도시를 중심으로 버스 등 대중교통이 발달하였다. 대표적인 항구는 신드 주의 카라치Karachi 항구와 콰심Qasim 항구, 발루치스탄 주의 과다르Gwadar 항구와 파스니Pasni 항구이고, 공항 수는 총 151개(세계 37위, 2010년 CIA 기준)로 국제공항은 진나Jinnah국제공항과 베나지르부토Benazir Bhutto국제공항 등 총 14개 국제공항이 있다. 도로는 총 262,256㎞(세계 20위, 2010년 CIA 기준)이고, 철도는 총 7,791㎞(세계 27위, 2010년 CIA 기준)이다.

파키스탄은 극단적인 기후를 가지고 있다. 북회귀선이 지나는 자리, 그리고 몬순지역의 서쪽 끝에 자리 잡고 있어서 매우 다양한 기후 조건을 가지고 있다. 북부 산악지방은 고산성 기후이며, 중앙의 펀잡 지방은 스텝 또는 온대 기후이다. 주로 북부 쪽에 위치한 산악지역은 겨울에는 매우 춥다. 고산지의 경우에는 -30℃에서 -40℃까지도 내려가는 등 극단적으로 추운 기후를 보인다. 여름에는 선선한 날씨가 이어지며, 평야지방은 여름에는 40℃ 이상으로 매우 덥고 0℃ 근처의 겨울에는 쌀쌀한 기후를 보인다. 남부 신드, 발루치스탄의 해안지역은 연중 온도가 30℃ 이상으로 평야지방과 비슷하게 덥거나, 25℃ 정도의 따뜻한 날씨다. 해안지방은 온도가 낮아도 습도가 높기 때문에 체감온도는 더 높을 수 있다. 계절은 대체로 3개로 구분 가능하며 1월~3월간은 비교적 건조하며 최저 4℃, 최고 18℃의 서늘한 기후이고 4월~9월간은 혹서기로서 낮 기온이 30℃~50℃까지 올라가기도 하며, 7월~8월간은 몬순기로서 비가 많이 온다. 10월~12월간은 건조하며 최고 기온은 20℃ 내외로 아침, 저녁은 서늘하여 지내기 좋은 계절이다.

파키스탄은 몬순지역에 위치하고 있지만 히말라야 남부산맥과 그 주변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강우량이 충분치 못하다. 지방에 따라 연간 5㎜~1,000㎜의 강우량을 보이고 90% 이상의 지역이 연간 510㎜ 이하이며, 강우량의 75% 가량이 7월에 집중된다. 발루치스탄의 건조지대는 연간 강우량이 210㎜인 반면 히말라야 남쪽산맥지역은 1,270㎜이며, 주요 도시의 연간 강우량은 이슬라마바드 900㎜, 카라치 196㎜, 라호르 452㎜, 퀘타 239㎜, 페샤와르 300㎜이다.

파키스탄의 역사
고대 및 중세
1947년 8월 독립 이전의 파키스탄 역사는 바로 인도의 역사이기도 하다. 파키스탄 서남부의 인더스강 하류에 위치한 모헨조다로Moenjodaro에는 고대문명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는 BCE(기원전) 3000년경에 발전한 금석병용기시대의 도시국가 유적으로서 인더스강 상류의 하랍파Harappa유적과 함께 고대 인더스문명의 기원으로 간주되고 있다. 인더스문명은 고도의 청동기 문명으로서 정연한 도로, 완비된 위생시설 등 탁월한 도시건설로 유명하며, 약 1천년 동안 지속되다가 기원전 1500년경 중앙아시아 코카서스 북방지역에서 침입해 온 아리안족에 의해 멸망하였다.

BCE 4세기경 알렉산더대왕의 인도 침입 이후 인도의 서북지방은 외래 세력의 침투로가 되어 그리스, 훈, 터키족 같은 제 세력이 침입, 성쇠를 거듭하였으며, 문화, 예술 및 언어 등도 이러한 외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8세기부터 12세기까지 이슬람교(무슬림muslim) 세력의 서북지방 침입으로 델리를 중심으로 이슬람교 왕조의 성쇠가 되풀이되었으나, 이슬람교 세력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아리안족이 만든 카스트 제도는 유지되었다.

중앙아시아의 ‘티무르Timur’가 멸망한 후 그의 후예인 바부르Babur가 1500년경 북인도에 수립한 무굴Mughul 제국은 인도 전역과 파키스탄 및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포함한 대제국이었으나,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 대립, 농민반란 등으로 분열과 쇠퇴를 거듭하다가 세포이 반란Sepoy Mutiny(1857)을 계기로 1858년 영국에 합병되었다.

영국 식민통치기(1858~1947.8)
영국 식민통치하의 독립운동이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등 힌두교도의 지도하에 1885년 소집된 국민회의를 중심으로 전개되자, 이슬람교도들은 1907년 이슬람교동맹을 결성하고 1930년대 초 이슬람교 도시인 알라마 익발Allama Iqbal 등에 의해 태동된 이슬람 국가의 분리독립 이념을 토대로 인도 대륙에 두 개의 국가 건설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슬람교동맹은 1940년 3월 라호르에서 개최된 정당회의에서 독립국가의 영토를 이슬람교도 밀집거주지역으로 하는 결의안(일명 ‘파키스탄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파키스탄 독립 요구는 이슬람교도들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며, 1946년 10월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슬람교동맹은 임시정부 내에서의 투쟁을 위해 대표를 파견하였고, 국민회의 지도자들도 파키스탄의 독립을 인정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방안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1946년 초 영국정부의 각료사절단은 세 개의 연방그룹 결성계획을 건의하였으며, 이에 따라 1947년 6월 3일 분리계획서가 공포되었다. 이 계획에 따라 이슬람교도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는 벵갈Bengal과 펀잡Punjab 두 지역은 인도를 사이에 두고 분리되었으며, 서부 펀잡, 동 벵갈, 신드, 발루치스탄의 지방의회와 퀘타 자치주가 파키스탄 편입을 지지하고 북서 변방 지역과 아삼 실헷 지역의 주민들도 국민투표로 파키스탄 편입을 지지하였다. 이에 따라 1947년 8월 14일 이들 지방을 영토로 하여 파키스탄이라는 새 국가가 영연방에 속한 자치령으로 탄생하였다. 독립 당시 파키스탄은 인도 영토를 사이에 두고 지리적으로 서로 떨어진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이라는 두 영토를 동시에 갖게 되었다.

독립초기(1947.8~1958.10)
파키스탄 독립과 동시에 분리 독립 운동을 이끈 무하마드 알리 진나Muhammad Ali Jinnah가 초대 총독(Governor General)으로 선출되고, 초대 총리에는 리아콰트 알리 칸(Liaquat Ali Khan)이 취임하였다. 1948년 폐암으로 별세한 진나는 파키스탄에서 콰이드에아잠Quaid-e-Azam(우르두어로 ‘위대한 지도자’) 및 바바에쾀Baba-e-Qaum(‘국부’라는 의미)이라고 불리며 추앙을 받고 있다. ‘파키스탄’이라는 국명은 진나가 독립 당시 파키스탄을 구성하는 다섯 개 지역인 펀잡Punjab, 아프간Afghan, 카슈미르Kashmir, 신드Sindh, 발루치스탄Baluchistan의 지명들에서 문자어를 따서 만든 조어로 알려져 있다.

신생 파키스탄은 법률 및 제도의 정비, UN가입 등 독립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져나가다가 1948년 5월부터 인도와의 영유권 분쟁지역인 카슈미르Kashmir에서 이슬람교도들의 무장봉기 사건이 발생하고 이에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이 군대를 파견, 충돌함으로써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였다. 1949년 1월 UN 중재 하에 휴전이 성립되었으나 파키스탄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아유브 칸 정권(1958.10~1969.3)
파키스탄 독립 이후 정치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다가 1958년 10월 아유브 칸Ayub Khan 장군에 의한 군사정권이 수립되었다. 칸 장군은 집권 초반기에는 통치기반을 군과 관료에 의존하였으나 1960년 계엄령을 해제하고 민주주의에 입각한 포고령을 선포한 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아유브 칸 대통령은 카슈미르 영유권 분쟁으로 다시 재개된 1965년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의 패배와 친인척의 관직 등용, 부패, 경제개발의 실패 등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였다. 서파키스탄에서는 그의 첫 외무장관이었던 줄피칼 알리 부토Zulfikar Ali Bhutto로부터, 동파키스탄에서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벵갈인들의 불만을 대변하는 아와미동맹Awami League의 세이크 무지부르 라만Sheigkh Mujibur Rahman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1968년 10월 서쪽지방에서 발생한 시위가 동쪽지방까지 확산되자 1969년 3월 아유브 칸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인 야히야 칸Yahya Khan 장군에게 정권을 인계하였다.

야히야 칸 정권(1969.3~1971.12)
야히야 칸 장군에 의해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최초의 총선이 1970년 12월에 실시되었다. 그 결과 서파키스탄에서 알리 부토가 이끄는 파키스탄인민당(PPP: Pakistan Peoples Party)이 의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였고, 동파키스탄에서는 무지부르 라만이 영도하는 아와미동맹이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동서 파키스탄 양 정치지도자간의 연합정부 구성에 관한 협상은 양측 간의 심각한 의견 차이로 결렬되었다. 동파키스탄은 인종 언어 생활양식 등 모두가 서파키스탄과 달랐고 경제적 차별을 받아 일종의 식민지 같은 존재에 불과하여 항상 파키스탄 중앙 정부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1971년 3월 아와미동맹이 주도한 과격 시민불복종 운동으로 동파키스탄 정국이 혼미해짐에 따라 서파키스탄은 군대를 파견하였으며 유혈 진압 과정에서 많은 벵갈인이 살해되었다. 이후 파키스탄군과 벵골 자유 투사들 간의 전투가 계속된 내전으로 확산되자, 힌두교를 믿는 1,00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벵갈인이 인도에 유입되었다. 이에 인도가 동파키스탄에 군사 개입을 하여 12월에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서파키스탄이 패하면서 동파키스탄은 국호를 방글라데시Bangladesh(‘벵골 국가’라는 의미)로 하여 서파키스탄으로부터 분리 독립(1971.3.26)하였고, 서파키스탄은 현재의 파키스탄으로 재출발하여 4개의 행정지역으로 재편하였다.

알리 부토 정권(1971.12~1977.7)
1971년 12월 야히야 칸 장군은 의회 다수당인 파키스탄인민당(PPP) 지도자 알리 부토에게 정권을 인계하였으며, 부토는 1973년 8월 신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내각책임제하의 총리로 취임했다. 부토 총리는 집권 이래 주요 산업의 국유화, 노동자의 경영 참여 및 토지개혁 등 사회주의노선을 채택하면서 농업의 증산 등 경제건설을 추진하였으나, 막대한 전비와 주력 수출상품인 구 동파키스탄의 황마 상실 및 노동운동 격화로 경제가 호전되지 않았다.

부토 총리는 1977년 3월 총선에서 압승하였으나 선거과정에서 투표조작과 강압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는 비난이 뒤따랐으며, 야당연합체의 총선결과 불복 선언 및 총리 사임 요구로 정국 불안이 계속되는 가운데 7월 지아 울 하크Zia-ul-Haq 장군에 의한 쿠데타로 실각하고 1979년 4월 야당인사 살인 연루혐의로 옥중 처형되었다.

지아 울 하크 정권(1977.7~1988.8)
지아 울 하크 장군은 1978년 10월 대통령에 취임 후 계엄령을 선포하고 1986년 1월 정당법이 부활될 때까지 약 10년간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유례없는 강압통치를 실시했다. 지아 대통령은 집권기반 구축을 위하여 추진해 온 이슬람화 정책에 대한 국민투표를 1984년 12월 실시하여 투표자 97%의 지지를 받았다. 기존 법제도를 이슬람법(샤리아Sharia)에 부합되도록 하는 이슬람국가 건설 프로그램에 의해 현재 파키스탄에서는 이슬람법과 서구 법제도가 혼용되고 있다. 지아 대통령은 베나지르 부토Benazir Bhutto(알리 부토 전 대통령의 딸)의 파키스탄인민당(PPP)를 비롯한 야당 연합체인 ‘민주주의 회복운동(MRD: Movement for the Restoration of Democracy)’ 세력의 도전에 직면하였다.

지아 대통령은 1985년 3월 대통령직 재취임을 앞두고 민정이양 계획을 추진하여 2월부터 하원, 주의회, 상원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8월 모하메드 칸 주네조Mohammed Khan Junejo 총리 주도의 민간정부가 출범하였으며 12월에 계엄령이 해제되고 1986년 1월 정당법이 실시됨으로써 정당정치가 부활되었다. 1984년에 영국으로 망명한 베나지르 부토는 망명 상태에서 부친의 정당인 파키스탄인민당 당수로 취임하였으며, 지아 대통령의 종용으로 1986년 4월에 귀국하여 반정부 활동을 주도하였다. 1988년 5월 지아 대통령은 치안유지 실패를 이유로 하원을 해산하고, 이슬람화 정책과 정당의 역할에 관해 대립해 온 주네조 총리를 해임한 후 과도내각을 구성했다.

1988년 8월 지아 대통령이 의문의 항공사고로 사망하여 정국이 혼란한 가운데 실시된 총선에서 야당인 파키스탄인민당이 여당연합인 이슬람민주연합(IDA)을 누르고 승리, 파키스탄인민당 총재인 베나지르 부토Benazir Bhutto가 이슬람교국가들 중에선 처음으로 여성 총리로 취임하고 굴람 이샤크 칸Ghulam Ishaq Kahn 상원의장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1977년 7월 지아 장군의 군사쿠데타 후 11년 만에 처음으로 완전한 민선정부가 수립되었다.

제1차 베나지르 부토 정권(1988.11~1990.8)
베나지르 부토 정부는 국내적으로는 민주화 및 경제개발을 추진하고 대외적으로는 비동맹을 천명하면서 미국·영국·프랑스 등 서방과 관계 강화도 추구하였다. 부토 정부는 출범 초부터 펀잡Punjab주에서는 주 다수당인 IDA(이슬람민주동맹)와 대립하고, 신드Sindh주에서는 연립정당인 MQM(Muttahida Quami Movement, 통일민족운동당: 1947년 독립 당시 인도에서 이주해온 무슬림들인 무하지르Mohajir가 설립한 정당)과 대립하였으며, IDA측은 치안 불안, 경제난, 대인도 유화정책을 이유로 1989년 10월 총리 불신임안을 제출하였으나 부결되었다. 신드주를 장악한 MQM의 경제력에 위협을 느낀 신드주 토착인들의 반발로 양측 간에 무력 충돌이 심해지고, 과세부담 증가, 인플레 심화, 집권층의 부정부패(부토 총리의 남편인 자르다리Zardari 의원의 이권개입, 주식시장 스캔들에 재무장관 연루 등)로 정국이 불안해지자 1990년 8월 이샤크 칸 대통령은 하원을 해산하고 부정부패, 권력남용, 헌법위반 등 혐의로 부토 총리를 해임하였다. 굴람 무스타파 자토이Ghulam Mustafa Jatoi 과도정부 총리하에 1990년 10월 실시된 총선에서 IDA가 승리하여 나와즈 샤리프Nawaz Sharif IDA 총재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제1차 나와즈 샤리프 정권(1990.10~1993.7)
샤리프 총리는 규제완화, 민영화, 민간주도 경제, 사회간접자본 건설 등 경제개혁프로그램 실시하고 외국인투자 유치 노력을 경주하는 한편, 부토 전총리 남편인 자르다리 의원을 살인과 테러 혐의로 수감했다. 1991년부터 대규모 금융스캔들, 신드주 사태로 인한 군부-MQM 간의 갈등, 참모총장 인선문제로 총리와 대통령 간의 대립이 심화되며 정국이 혼란해지자 칸 대통령은 1993년 4월 샤리프 총리를 해임하고 의회를 해산하였다. 샤리프 총리가 제기한 위헌 제소에 대해 대법원이 대통령의 권한 행사가 위헌이라고 판결함으로써 총리는 복권되었으나 결국 군부 중재로 1993년 7월 대통령과 총리가 동시에 사임하였다.

제2차 베나지르 부토 정권(1993.10~1996.11)
1993년 10월 총선에서 승리한 파키스탄인민당(PPP)은 일부 정당과 연합하여 연립정권을 수립하여 부토 총리가 취임하고, 11월 대통령선거(의회 간접선거)에서 총리 측근인 파루크 아메드 칸 레가리Farooq Ahmed Khan Leghari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정치인들의 부패와 총리의 전횡, 테러의 증대, 급격한 물가 인상 등의 요인들로 인해 1995년부터 총리와 대통령 간의 대립이 시작되었고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도 증대되었다. 레가리 대통령은 1996년 11월 하원을 해산하고 총리를 해임하였으며, 부토 총리의 남편인 자르다리 의원은 부패혐의로 수감되었다. 총리는 하원해산 및 총리해임이 위헌이라며 대법원에 제소했으나 패소하고 미라즈 칼리드Miraj Khalid가 과도내각 총리로 임명되었다.

제2차 나와즈 샤리프 정권(1997.2~1999.10)
1997년 2월 총선에서 파키스탄 무슬림동맹 나와즈그룹(PML-N: Pakistan Muslim League-Nawaz)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당수인 나와즈 샤리프Nawaz Sharif가 총리에 취임하였다. 샤리프 총리는 경제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자조적 노력을 통한 국가부채 상환 프로그램, 경제회복 계획 및 농업생산증진을 추진하였다. 샤리프 총리는 1997년 4월에 내각책임제 요소를 약화시키고 대통령 권한 강화를 지향한 제8차 개헌을 폐지하는 내용의 제13차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고 총리 권한을 강화했으며, 7월에 ‘당적 변경, 소속당의 당헌 방침 위배 행위 국회의원 자격 박탈’을 추가하는 제14차 개헌을 통과시켰다.

1997년 8월 대법관 임명 문제로 총리-대법원장, 총리-대통령 간 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가운데 대법원장이 제13차 개헌을 정지시키고 대통령의 하원해산권을 부활시킴으로써 하원해산 위기가 대두되었으나 대통령이 자진 사임함으로써 정국이 수습되었다. 12월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는 샤리프 총리가 추천한 무하마드 라피크 타라르Muhammad Rafiq Tarar 상원의원이 압도적 다수로 당선되었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정권(1999.10~2008.3.25)
샤리프 총리와 군부 간의 갈등으로 1999년 10월 페르베즈 무샤라프Pervez Musharraf 육군참모총장 주도로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여 무샤라프를 수반으로 하는 군사정권이 출범하였다. 군사정권은 잠정헌법령 및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의회를 해산하였으며 샤리프 총리는 2000년 12월 사우디로 망명하였다. 미국의 경제제재 등 압력에도 불구하고 2001년 6월 무샤라프는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9.11 테러 사태를 맞은 미국은 대 아프간 전쟁을 위해 파키스탄의 협력이 필요함에 따라 무샤라프 대통령에 대한 지원을 시작하였다. 2002년 4월 국민투표에서 무샤라프 대통령 임기 5년 연장안이 통과되었으며, 대통령은 대법원 판결과 당초 자신의 약속대로 10월에 총선을 실시하였고 여당인 PML-Q(Pakistan Muslim League-Quaid-e-Azam, 파키스탄무슬림리그-콰이드에아잠)의 승리로 정국이 안정되고 자파룰라 칸 자말리Zafarullah Khan Jamali 총리 내각이 출범하였다. 그러나 정치역량 부족을 이유로 한 여당의 압력으로 2004년 6월 자말리 총리가 사임하고 PML-Q 당수인 차우드리 슈자트 후세인Chaudhry Shujaat Hussain 과도 총리에 이어 8월에 샤우카트 아지즈Shaukat Aziz 총리 내각이 출범하였다. 2007년 3월 무샤라프 대통령의 차우드리Chaudry 전 대법원장 직무정지 및 직권남용 혐의 조사에 대해 전국적인 항의시위가 격화되고, 7월에는 랄 마스지드Lal Masjid(붉은 사원)에서 무장항거하던 과격 무슬림교도들의 진압 과정에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망명 중이던 부토 전 총리와 샤리프 전 총리가 총선을 앞두고 귀국하여 정치활동을 재개한 가운데 2007년 10월 선거에서 무샤라프 대통령이 재선출되었다. 2007년 11월 무샤라프 대통령은 사법부의 월권행위로 인한 국가기관 업무마비와 테러 증가를 명분으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임시헌법명령을 공포하였다. 12월에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당초 2008년 1월로 예정되었던 총선이 2월에 실시되었고 이 총선에서 무샤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PML-Q가 참패하였다.

아시프 자르다리 정권(2008.3~2013.6)
총선에서 최대의석을 확보한 아시프 자르다리Asif Zardari 주도의 파키스탄인민당(PPP)은 나와즈 샤리프Nawaz Sharif가 주도하는 PML-N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파키스탄인민당의 유사프 라자 길라니Yousaf Raza Gillani가 총리에 취임하였다. 연립정부의 압력으로 무샤라프 대통령이 사임하고 2008년 8월 실시된 선거에서 자르다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9년 2월 대법원이 나와즈 샤리프Nawaz Sharif와 동생인 샤바즈 샤리프Shahbaz Sharif 펀잡주 수석장관의 피선거자격 무효 판결을 내림으로써 PPP와 PML-N 간의 불신이 심화되었다. 2009년 11월 법무부가 발표한 국가화해법안(NRO) 수혜대상자 목록에 스위스에서 거액의 자금세탁 혐의를 받고 있던 자르다리 대통령과 장관들이 포함되자 야당이 반발하고, 대법원이 NRO 원인무효 및 NRO 수혜자에 대한 범죄사실 조사 처리 판결을 내림으로써 대통령이 큰 타격을 입었다. 2010년 4월 제18차 헌법개정으로 대통령 권한 축소, 총리 권한 강화, 의회 기능 강화, 지방정부 자치권 강화 등이 실현됨으로써, 40년간 지속된 군인정치로 인해 사실상 대통령제와 유사한 모습이었던 정치체제가 1973년 민주헌법 체제에 따른 내각책임제 헌법으로 환원되었다. 2012년 4월 대법원은 NRO 판결 미이행을 이유로 길라니 총리에게 법원모독죄 판결을 내리고 6월에는 의원자격 상실 판결을 내림으로써 길라니 총리가 실각하고 내각이 해산되었으며 라자 아시라프Raja Ashraf 전 정보통신기술부장관이 신임 총리로 선출되었다. 2013년 1월 이슬람 성직자 콰드리Qadri 주도의 대규모 정권퇴진 집회로 정부기능이 마비되고, 대법원은 과거 수전력부장관 시절 수뢰혐의로 아시라프 총리 체포명령을 내림으로써 정국이 혼미해졌다. 2013년 3월 콰드리측과 정부 간의 합의에 따라 정부가 해산하고 중립적인 과도정부가 구성되었다.

제3차 나와즈 샤리프 정권(2013.6~현재)
2013년 5월 총선에서 PML-N이 대승하여 당수인 나와즈 샤리프Nawaz Sharif가 총리로 선출되고, 9월에 기업인 출신인 맘눈 후세인Mamnoon Hussain이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전임 자르다리 대통령이 처음으로 임기를 마치고 퇴임함으로써 파키스탄에서 최초로 평화적 정권교체가 실현되었다.

파키스탄 탈레반(TTP)
파키스탄 탈레반(TTP: Tehrik-e-Taliban Pakistan)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을 지지하는 파키스탄 내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13개가 연합해 2007년에 결성된 이슬람 무장단체이며, 2001년 미국에 의해 축출된 아프가니스탄 탈레반과는 다른 조직이다. TPP는 파키스탄 정부를 전복하고 이슬람법(샤리아Sharia)이 시행되는 강력한 이슬람 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한다. 이들은 서구식 교육이 학교에서 이뤄지는 것을 반대하며, 특히 여성이 교육받는 것은 이슬람 교리에 어긋난다고 주장하고 있다. TPP 조직은 2014년 기준 25,000명 규모로 파악되고 있으며, 알카에다와 연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TPP를 이끈 초대 지도자 바이툴라 메수드와 2대 지도자 하키물라 메수드는 모두 미군 무인항공기(드론) 공격을 받아 사망했으며, 2013년부터는 마울라나 파즈룰라가 3대 최고지도자로 선출되었다.

TPP는 2008년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Islamabad에 있는 메리어트 호텔을 차량 폭탄으로 공격해 60명을 살해했고, 2009년에는 페샤와르Peshawar의 펄 인터컨티넨탈 호텔을 공격해 17명을 살해했다. 2014년 9월 페샤와르의 한 교회에서 자살 폭탄 테러를 일으켜 어린이 등 81명을 사망하게 했으며, 12월에는 페샤와르의 한 학교에 난입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해 10대 학생과 교사 등 최소 140여 명을 살해하는 테러를 자행했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전선국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파키스탄은 2007년 1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TTP와 전투를 벌였으며, TTP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파키스탄 전역에서 군과 경찰은 물론 일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를 빈번하게 자행하였다. 2013년 9월 샤리프 정부는 제정파회의 결의를 통해 TTP와 평화협상을 추진했으나 TTP에 의한 테러는 계속되고 실제 협상은 개최되지 않았다. 2014년 초부터 TTP에 의한 대규모 테러가 빈발하자 파키스탄 정부군은 적극적인 대응 공세에 나섰다. 특히 2014년 12월 학교에서 발생한 끔찍한 테러 사건은 파키스탄에서 테러범을 몰아내야 한다는 범국가적인 합의를 이뤄내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파키스탄군은 공군까지 동원한 대대적인 TTP 소탕 작전에 돌입하여 1년 만에 약 3000명이 넘는 탈레반을 사살했다고 발표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올해 말까지 탈레반을 완전히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TTP 테러와 관련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파키스탄의 한 소녀가 있다. ‘여성은 학교에 가서는 안 된다’는 탈레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육 받을 권리를 주장하다 지난 2012년 얼굴에 총을 맞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파키스탄의 말랄라 유사프자이Malala Yousafzai(18세)는 2014년 최연소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으며, 지금은 영국에서 거주하며 시민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정치 및 행정


정치체제: 내각책임제
파키스탄은 1957년 3월 이슬람공화국 헌법을 공포한 이래 정치체제 등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헌법개정을 거쳤다. 그 결과 내각책임제를 기반으로 하되,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고 총리 권한을 강화하는 방식(2010년 4월 개정 헌법)으로 현행 정치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2013년 5월 총선에서 파키스탄무슬림리그-나와즈(PML-N)당이 대승을 거둔 후 6월에 당수인 나와즈 샤리프Muhammad Nawaz Sharif가 하원 투표에 의해 총리로 선출되었으며, 9월에는 기업인 출신인 맘눈 후세인Mamnoon Hussain이 국회(상하원)와 지방의회 의원 투표에 의해 제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행정부: 내각
파키스탄의 정치 행정은 내각 중심으로 운영된다. 대통령은 상징적인 국가 수반(Head of the State)으로서 총리가 추천한 각군 참모총장의 임명 해임권을 보유(형식적 절차)하고, 의회 해산시 퇴임하는 총리 및 야당 대표와의 협의 하에 과도정부를 구성하며, 적법한 입법절차에 따라 의회가 대통령에게 송부한 법안을 10일 이내 처리한다.

총리는 모든 행정에 관한 실질적 권한을 행사하는 행정부 수반(Head of the Government)으로 참모총장위원회(Chiefs of Staff Committee)의 의장과 각군 참모총장 후보 건의권을 보유하고, 국가 중요정책에 관해 대통령에게 통지할(to inform) 의무가 있다. 2010년 개정 전 헌법에서는 대통령의 의회해산권, 하원의 총리 불신임권과 함께 총리가 대통령과 협의할(to consult) 의무 등이 규정되었으나 총리 권한이 강화된 현행 헌법에서는 이러한 규정들이 사라졌다. 행정관료는 직급에 따라 장관Minister, 국무장관Minister for State, 수석차관Secretary General, 차관Secretary, 차관보Additional Secretary, 국장Joint Secretary(Director General), 과장Deputy Secretary(Director), 담당관Assistant Director으로 구분한다.

지방행정은 발루치스탄Baluchistan주, 펀잡Punjab주, 신드Sindh주, 카이버팍툰콰Khyber Pakhtunkhwa주(북서변경주North West Frontier Province가 2010년 개칭) 등 4개 주와 부족자치지역(FATA: Federally Administered Tribal Area) 및 연방수도지역(FCA: Federal Capital Area)으로 구성된다. 주에는 주지사(Governor), 수석장관(Chief Minister) 및 주의회(Provincial Assembly)를 설치하였다.

입법부: 양원제 의회
파키스탄의 의회Parliament는 상하양원제로 운영된다. 상원Senate은 총 104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는데, 펀잡주와 신드주, 카이버팍툰콰주 및 발루치스탄주의 주의회에서 각각 23명씩 선출한 92명의 의원과 하원에서 선출한 FCA 대표 4명 및 FATA 대표 8명 등이다. 상원의 임기는 6년이며 매 3년마다 2분의 1을 개편한다. 상원의장단은 의장 및 부의장 각 1명(임기 3년)이고 대통령 공석시 상원의장이 대통령 직무 및 권한을 대행한다. 상원은 자체적으로 법안을 발의하거나 하원에서 이송된 법안에 대한 의결권을 보유한다. 통화법안(Money Bill)을 제외한 모든 법안은 상하원에서 발의가 가능하다. 법안 통과는 출석 과반수의 찬성으로 결정되는데, 예외적으로 헌법 개정안은 재적인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통과된다. 법안에 관해 상하원 간에 이견이 있는 경우 상하원 합동 회의에 회부되며, 최종적으로 의견 불일치가 있는 경우에는 부결된다. 상원은 적어도 1년에 3번 회기를 가지며, 최소한 90일 이상 개원해야 한다. 상원의 개원과 폐회 공고는 대통령이 한다. 상원의장은 상원의원 재적 4분의 1 이상의 요구가 있으면 대통령에게 개원을 요구하거나, 상원의장 명의로 개원 공고를 할 수 있다.

하원National Assembly은 국민투표에 의해 선출된 342명으로 구성된다. 무슬림 하원의원은 272명으로 펀잡주 148명, 신드주 61명, 카이버팍툰콰주 35명, 발루치스탄주 14명, FATA 12명, FCA 2명으로 구성된다. 또한 여성 하원의원 60명과 소수 종교인 하원의원 10명이 비례대표로 선출된다. 하원의원의 임기는 5년이고 하원 의장단은 의장 및 부의장 각 1명이다. 하원은 1년에 적어도 3번의 회기를 열고, 최소한 130일을 개원해야 한다. 회기 공고는 대통령이 하며, 4분의 1 이상의 하원의원이 요구하면 하원의장이 소집 공고를 낼 수 있다. 주요 정당으로는 PPP(Pakistan Peoples Party, 파키스탄인민당), PML-N(Pakistan Muslim League-Nawaz, 파키스탄무슬림리그-나와즈), PML-Q(Pakistan Muslim League-Quaid-e-Azam, 파키스탄무슬림리그-콰이드에아잠), MMA(Muttahida Majlis-e-Amal, 이슬람정당연합), MQM(Muttahida Quami Movement, 통일민족운동당) 등이 있다.

파키스탄의 주의회Provincial Assembly는 각 지방별로 투표에 의해 일반, 여성, 소수민족으로 나누어 일정 수의 의원을 선출해 구성한다. 의원의 임기는 5년이고, 의장단은 의장과 부의장 각 1명이다. 주의회 해산은 지방정부 수석장관(Chief Minister)의 권고를 받아들여 주지사가 행한다.

경제


경제 개관
파키스탄은 세계 6위(1.9억 명)의 거대 소비시장과 한반도 3.5배의 방대한 영토와 풍부한 자원을 갖추고 있고, 지리적으로 요충지에 위치한 미래 성장 잠재력이 매우 큰 국가이다. 가스, 석탄, 구리, 금, 철광석, 암염, 대리석, 크로마이트 등 풍부한 천연 광물자원과 52종의 미개발된 광물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서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중국, 중동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인데다 18~40세가 전체 인구의 57%(약 1억명)를 차지하는 풍부한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다. 파키스탄은 2014년 기준 GDP가 2,414억 달러, 1인당 GDP는 1,307 달러의 개발도상국이다. 또한 인더스강의 풍부한 수자원을 이용해 농업이 발달하였고, 주요 산업도 농업에 기초한 준 산업화 경제(semi industrialized economy)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농업이 전체 GDP의 21%를 차지하고 국민의 약 70%가 농업부문에 의존하는 농업중심 국가이다. 연간 교역액은 약 650억 달러로 전체 경제 규모대비 교역액이 크지 않은 국내 소비 위주의 내수형 산업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산업도 경공업 위주의 저 개발형 산업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공산품을 수입에 의존하므로 수입이 전체 교역액의 65%를 차지하여 큰 폭의 무역수지 적자가 계속 발생하고 있으며, 산업의 90%를 중소기업이 차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소비재는 고관세로 수입 억제 정책을 실시하여 수입 품목의 대부분이 기계류, 석유, 화학제품 등 중화학 공업 제품으로 구성된다. 생필품 중 특히 가전제품 등은 상당 부분이 밀수로 들어오거나 여행자 짐을 통해 시장에 반입되고 있다. 따라서 실제로 소비재의 해외 제품 의존도는 정규 수입량보다 30% 정도 많은 것으로 추정 된다. 파키스탄 경제는 높은 성장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빈번한 테러 및 종파분쟁에 따른 불안한 치안상황과 만연한 부패문제, 만성적인 전력부족 사태, 열악한 인프라 등이 경제발전의 제약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시장특성 및 주요산업
파키스탄 시장은 최근까지만 해도 전형적 프로젝트 시장으로 일반 소비재는 밀수가 주도적이었고, 도로, 항만, 통신 등 기간산업 설비 확충에 따른 입찰 비즈니스의 비중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1998년 핵 실험 이후 외국으로부터의 원조 및 차관이 크게 줄어들면서 대형 프로젝트는 대부분 공급자 금융의 BOT(Build, Operate, Transfer) 또는 BOO(Build, Own, Operate) 베이스로 추진되고 있다.

파키스탄은 세계 4위의 면화 생산국으로 인더스 강 유역의 풍부한 면화와 인구 1억 6,000 만 명의 풍부하고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섬유 산업을 전체 산업 인력의 38%, 전체 제조업의 46%, 수출의 60%를 차지하는 국가 최대 산업으로 발전 시켜왔다. 가전 산업은 대부분 다국적 기업과 현지 파트너와의 합작을 통한 현지 생산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정보통신 산업은 2003년 통신산업 규제완화 정책을 발표하며 통신산업의 경쟁 체제를 도입하였고, 최근 유무선 통신 산업이 급속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동통신 분야에 대한 투자 집중과 소득 수준 향상으로 이동전화 서비스 가입자 수가 최근에 급증세를 보이고 있다.

교역 현황
파키스탄의 교역 상황은 원면, 면사, 카페트, 피혁, 쌀 등이 주종을 이루는 빈약한 수출 구조와 국내경제 기반 빈약에 기인하는 원자재, 기계류 및 소비재의 수입 증가로 무역수지 적자가 지속되는 상황에 있다. 2011/12년도 무역수지 적자가 157억 달러에 달했으나 그 이후 정부의 수출확대 추진 및 수입 제한 정책 등으로 2012/13년도에는 약 154억 달러로 미미하나마 무역적자 규모가 감소하였다. 주요 수출대상국은 미국, 중국, UAE, 아프가니스탄, 영국, 독일, 이탈리아, 홍콩 순이고, 주요 수입대상국은 UAE,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일본, 싱가포르, 독일, 인도 미국, 영국 순이며, 한국은 2012/13년도 기준으로 파키스탄의 13번째 교역 대상국이다.

신정부의 경제정책
2013년 6월 집권한 나와즈 샤리프 정부는 경제회생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외환부족 사태 해결을 위해 IMF로부터 66.5억 달러의 금융 지원을 수용하고, 전력난 해결을 위한 약 48억 달러의 전력요금미납금(circular debt) 지급 및 국영기업 민영화 추진 등 친기업적인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GDP가 4.4% 증가하고, 카라치 증시가 49% 상승하는 등 투자 심리와 경기가 점차 호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

파키스탄은 경제정책 측면에서 ‘신정부 VISION 2025 국가 전략’ 수립을 진행하고 있고, 적극적인 외국인투자 유치 정책과 개방적 통상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수입규제 및 비관세 장벽이 높지 않은 개방적 경제체제를 유지하면서 FTA 등을 통한 제3국 시장접근을 강화하고 수출 강화 정책과 재정 건전화 정책도 추진하고 있다. 아울러 1990년대부터 진행해 온 국영기업의 민영화 정책을 계속 추진하고 공기업을 구조 조정하는 등 경제구조 개혁도 가속화하고 있다.

사회와 문화


문화적 특성
파키스탄은 이슬람 문화권에 속하지만 지역적, 민족적 기원으로 살펴볼 때 인도 문화권과 중국 문화권의 접점 지역에 있고 실크로드를 통해서 중동 유럽과의 교류도 있었으므로 이러한 다자적 문화 특성이 복합되어 있다. 10세기 이슬람교가 전파되기 이전의 고대 모헨조다로 문명 유적지나 간다라 불교 유적, 유물들이 보전되고 있으며, 이슬람 궁전과 힌두 사원, 앙골-몽골의 주택 등 다양한 문화 자원들이 많다. 실크와 보석 세공품, 목각 제품과 금속 조각품 등도 유명하다.

이슬람 문화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만큼 파키스탄에서는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무슬림 운동이 강조되고 있는데, 일반생활 곳곳에서 무슬림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부심하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복장은 전통 복장이 일반적이며 술과 돼지고기, 도박이 금지되고 있다. 예술 부문으로 눈을 돌려 보면 고유의 서예 분야를 제외하고는 서구적 개념의 일반예술 수준은 낮다고 할 수 있다. 대학 중에도 예술 부문의 학과가 있는 대학은 펀잡대학교(Punjab University)와 라호르Lahore 지역에 있는 국립대학(National College) 정도이다. 스포츠 분야에서 파키스탄은 하키Hockey와 크리켓Cricket의 강국이며 30여 개의 각종 체육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인구, 민족 및 언어
파키스탄의 인구는 1947년 독립 이후 약 50년 동안 거의 4배로 늘어 2014년 기준 1억 9천6백만 명을 기록하고 있다. 인구증가율은 1960년대에는 3.6%, 1980년대에는 2.6%, 2011년에는 2.05%, 2012/13년에는 2%을 기록하고 있으며, 평균인구밀도는 1981년 1㎢ 당 106명에서 2013년에는 239명으로 증가하였다. 인구의 대부분이 펀잡과 신드지방의 비옥한 인더스강 유역에 살고 있으며, 나머지 지역은 대부분 황무지로 인구밀도가 낮아 각 지방의 인구밀도는 다양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평균수명은 2013년 기준으로 남성은 64.6세, 여성은 66.5세이다.

파키스탄의 민족 구성은 인도 아리안계가 대종을 이루고 있으며, 이외에도 드라비다족, 희랍족, 터키족, 페르시아족, 아랍족 및 무갈족 등이 있으며, 우르두(Urdu)어를 사용한다. 지방별 원주민으로 구분하면 펀잡인(Punjabi), 신드인(Sindhi), 발루치인(Baluchi) 및 파탄인(Pathans)으로 나누어지며 각 지방 원주민들은 상이한 특성을 갖고 있다. 펀잡인은 인구의 56%를 차지하고 있으며 체격이 건장하고 활동적이어서 군과 관료사회를 지배하고 있다(지아 전 대통령과 나와즈 샤리프 총리는 펀잡주 출신). 과거 지아 대통령의 펀잡주 우선주의 통치는 타지방과의 반목을 야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역자치권 확대에도 장애가 되었으며, 특히 베나지르 부토 출신지역인 신드지방은 펀잡인이 주도하고 있는 정부에 대해서 적대적 태도를 보여 왔다. 신드인은 손기술이 뛰어나 정교한 수공예품 생산에 능하고, 발루치인들은 단순하고 정직하며 신앙심이 깊고 주로 유목생활을 한다. 카이버팍툰콰주에 거주하는 파탄인은 발루치인과 더불어 인도 아리안계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종족으로 투사적 기질이 두드러지며 원한 및 적대관계가 있을시 생명을 건 결투전통이 있다.

파키스탄의 국어는 우르두(Urdu)어이다. 비록 종족에 따라 모국어가 다를지라도 우르두어를 통해서 국민의 일체감을 가진다. 우르두어는 터키어에 어원을 두고 있는데, 군대 또는 야영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군대용어처럼 단순하다. 우르두어는 공손하고 온화한 언어로 모든 인간의 동등성을 나타내는 언어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영국의 오랜 식민지 지배로 인해 영어가 널리 전파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상용 및 관용문서도 영어를 사용한다. 그 밖에 펀잡어, 신드어, 발루치어, 파슈트어 등 24개의 지방언어가 있다.

종교
파키스탄은 국가를 탄생케 한 역사적인 배경이 종교에 있었듯이 국민의 97%가 이슬람교도이며, 이중 대부분이 수니Sunni파이고 나머지 15~25% 정도가 시아Shiite파이다. 이슬람교는 국교로서 사회문화는 물론 정치, 경제, 법률에까지 크게 영향을 미친다. 그 밖의 종교로는 아마디종파가 있는데, 그들 스스로는 이슬람교도로 자처하지만 공식적으로는 비이슬람교도로 간주되며, 과거 종교문제로 수니파와 기타 종파 간, 수니파의 각 계파 간에 많은 충돌이 있었다. 소수종교로서, 신드주에는 힌두교도(전체인구의 1.5%)들의 소규모 공동체가 있고 카라치 등 주요도시에는 약간의 기독교인(1%)들도 있다.

지아 전前대통령은 1977년 7월 집권 이래 파키스탄의 무슬림화에 역점을 두고 하두드Hadood(무슬림식 신체절단 및 태형 등 형벌), 샤리아 코트Shariat Court(무슬림재판소), 자카트Zakat(부유층이 극빈자를 위해 제공하는 자선형태의 조세), 우샤르Ushar(무이자 금융제도) 등의 제도를 도입한 바 있으나 현재는 무슬림화 정책이 후퇴해 있다. 1999년 집권한 무샤라프 대통령은 집권 이후 이슬람 근본주의의 폐해를 막기 위해 ‘온건 이슬람주의’를 표방하고, 2006년에는 여성보호를 위한 개혁 입법 등 사회개혁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 바 있다.

이슬람교도들은 신앙고백, 희사, 예배, 금식 및 성지순례의 회교도 5대 의무가 모든 가치기준의 척도이며, 하루 5회 기도시간을 준수하며 기도시간이 되면 이슬람교사원에서 기도를 스피커로 내보낸다.

언론
파키스탄에는 APP(Associated Press of Pakistan, 국영), PPI(Pakistan Press International, 민영), NNI(News Network International, 민영) 등 3대 통신사가 있으며, 국영 APP의 시설 및 기술은 양호한 편이다. TV 방송으로는 국영 PTV(3개 채널)와 AJK TV가 있고 기타 Geo-TV, ARYONE, Indus TV 등 다수 채널이 두바이 또는 인도에 본사를 두고 방송되고 있으며, 라디오 방송은 국영 PBC(Pakistan Broadcasting Corporation)가 있다.

주요 일간신문으로는 파키스탄 최고의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대중지 Jang을 비롯하여, Daily Times, Dawn, The News, The Nation, The Express Tribune, Pakistan Observer, The Frontier Post, The Post, Nawa-i-Waqt, Daily Khabrain, Daily Pakistan, Al-Akhbar 등이 있다.

주간지는 Akhbar-e-Jehan와 Family Magazine이, 월간지로는 Urdu Digest, Herald, Newsline 등이 있다.

관광
파키스탄은 1970년 파키스탄관광개발공사(Pakistan Tourism Development Corporation)를 설립, 관광 진흥을 위해 노력중이나 관광시설이 빈약할 뿐 아니라 무슬림화 정책 등 폐쇄적인 사회기풍과 치안불안 등의 국내요인 및 아프가니스탄 사태와 카슈미르 사태 등 국제 요인으로 관광개발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유네스코UNESCO에 의해 지정된 파키스탄의 세계문화유산World Cultural Heritage으로는 모헨조다로 고고유적(Archaeological Ruins at Moenjodaro: 1980년 등재), 타흐티바이 불교유적과 사리바롤 도시 유적(Buddhist Ruins at Takht-i-Bahi and Neighboring City Remains at Sahr-i-Bahlol: 1980년), 탁실라(Taxila: 1980년), 라호르 성과 샬리마르 정원(Fort and Shalimar Gardens in Lahore: 1981년), 타타의 역사기념물(Historical Monuments at Makli, Thatta: 1981년), 로타스 요새(Rohtas Fort: 1997년) 등이 있다.

파키스탄의 주요 난제들
파키스탄은 두 가지의 사회적, 국제적 난제를 안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마약상습자의 증대로 심각한 사회문제에 직면해 있다. 마약상습자의 숫자는 1980년 수천 명에 불과하였으나, 최근에는 100만 명이 훨씬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형이 험난한 북서변방지역의 계곡은 양귀비 재배지와 헤로인 제조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국에서 소비되는 헤로인의 1/5이 이곳에서 공급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국경을 접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은 미얀마에 이어 세계 두 번째의 양귀비 재배지로 알려지고 있으며, 2,250km의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두 국경지대에서의 아편과 헤로인 생산 잠재력은 각각 연간 800톤과 80톤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은 영국의 식민통치 당시부터 국내법이 적용되지 않았고, 그 지방의 부족지배자가 통치한 것도 마약증대의 원인으로 들 수 있다.

국제적으로는 카슈미르Kashmir 영토분쟁 문제가 있다. 카슈미르 지역은 파키스탄이 1947년 인도로부터 독립할 당시 인도와 파키스탄간의 국경 편입 문제를 놓고 명확한 조정이 이뤄지지 못하면서 생겨난 분쟁 지역이다. 파키스탄은 주민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이기 때문에 당연히 파키스탄에 편입해야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 이와 반면에 인도 측은 카슈미르는 역사적으로 인도의 영토라는 주장을 들어 상호 팽팽한 주장을 펴왔다. 55년에 걸친 카슈미르 분쟁은 종교 갈등에서 출발하였으나 지금은 인도-파키스탄 사이의 영토분쟁, 인도-중국 간의 지역 패권 갈등, 테러와의 전쟁 등 여러 문제들과 복잡하게 얽혀있는 상황이다. 최근 인-파 분쟁을 계기로, 국제사회는 21세기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비극의 땅 카슈미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등 강대국들이 방관의 자세를 버리고 적극 나서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한국과 파키스탄의 관계


기본관계 및 한반도정책
파키스탄은 한국과 1968년 한국 총영사관 설치와 무역협정을 체결하였고, 1980년 이전에는 비동맹 중립노선에 따라 한국과 북한에 대한 남북 등거리 외교를 추진하였다가, 제2차 인-파 전쟁 이후 친서방에서 친중국 노선으로 전환함에 따라 1972년 11월 북한과 수교하는 등 친북자세를 보였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한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국익에 기여한다는 인식 아래 1983년 11월 한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면서 한국과의 정치 경제 관계도 크게 강화되었다. 나와즈 샤리프 총리의 경제개발 우선 정책, 전 베나지르 부토 총리의 외국인 투자 유치, 동방정책(Look East Policy) 추진을 배경으로 파키스탄 언론에서도 한국과의 관계 강화를 강조하는 논조가 증대하였다.

남북한 문제에 있어서 파키스탄은 남북한 간의 대화를 통한 평화적인 문제 해결을 기본으로,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 원칙에 입각한 남북통일과 2000년 남북 정상 간에 합의된 6.15 공동선언을 지지하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1983년 수교 이래 파키스탄 대통령과 총리 등 정상급 인사가 총 7회 한국을 방문하였는데, 가장 최근에는 2012년 12월 자르다리Zardari 대통령이 방한한 바 있다. 2013년 3월 파키스탄 정부는 북한의 제3차 핵실험 후 북한의 행동을 우려하는 성명을 신속히 발표하고 유엔의 대북제재 결의안 2094호가 채택된 후에는 국내 이행조치를 신속히 취하는 등 대북제재 조치에 적극 동참하였다.

경제·통상 관계
1983년 수교 이후 한-파 간의 경제교류는 지속적인 신장세를 보이고 있다. 수교 당시 연간 천만 달러 수준에 불과하던 양국 간 교역액은 꾸준히 증가하였으나 2008년 세계경제위기 이후 크게 감소했다가 이후 점차 회복되어 2012년에 16.2억 달러로 크게 증가했다. 하지만 파키스탄측의 대한 수출 감소로 교역액은 2013년도 13.4억 달러, 2014년 11.7억 달러로 다시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한국의 대對파키스탄 주요 수출품목은 철강제품, 합성수지, 농·의약품, 석유제품, 폴리에스터 섬유류, 화학제품, 플라스틱제품, 의료용품 등이고, 주요 수입품목은 석유제품(나프타), 천연섬유사, 동제품, 면직물, 가죽, 기호식품, 어류, 곡실류, 기타 비금속광물, 암염 등이다.

1990년대 들어 파키스탄은 한국을 경제발전 모델로 삼고 적극적인 경제 협력을 추진하였으며, 우리 정부도 이를 지원하고 기업들도 적극 진출하면서 양국 간 경제협력관계가 한층 강화되었다. 우리 기업들은 고속도로건설, 관개시설, 발전소 등 주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전자, 섬유, 화학, 자동차 부문에서 합작투자 회사를 설립하는 등 대파키스탄 진출에 적극적 자세를 보였다. 1997년 대우건설이 시공한 라호르-이슬라마바드간 M-2 고속도로는 우리 기업의 파키스탄 기간산업, 인프라 진출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1997 IMF 경제위기 이후 우리 기업의 경영여건 악화로 파키스탄 진출도 상당기간 정체를 보였다. 2000년대 들어 양국 경제의 상호보완성이 부각되면서 교역 및 건설을 중심으로 경제교류가 활성화되는 조짐을 보이다 2009년 세계경제 위기로 다시 경제교류가 축소되었다. 최근 들어서는 에너지, 인프라 건설 외에도 화학, 철강, 제과, 철도 등 다양한 분야로 우리 기업의 진출이 확대되고 있는 등 경제협력 관계가 점차 확대되고 있으나, 파키스탄이 보유한 잠재력에 비해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북한과의 관계
북한과 파키스탄은 1968년 8월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후, 파키스탄의 친중 정책과 줄피카르 알리 부토Zulfikar Ali Bhutto 총리의 비동맹 외교노선으로 인해 1972년 11월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이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무역을 비롯한 실질 관계는 거의 없었다.

1982년 3월 무함마드 지아 울 하크Muhammad Zia ul-Haq정권이 출범한 이후, 파키스탄은 한국과의 경제 협력이 필요함에 따라 1983년 11월 한국과 수교를 맺었다. 그리고 한국과의 관계 발전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임으로써 그동안 북한에 치우친 외교관계가 완화되었다. 1993년 10월 베나지르 부토Benazir Bhutto총리는 재집권 후 그 해 12월에 북한을 방문하는 등 북한과 파키스탄 간의 협력관계가 강화되는 징후를 보였다. 그러나 1997년 2월 무함마드 나와즈 샤리프Muhammad Nawaz Sharif 총리의 재집권 및 동방정책의 추진으로 북한과는 군사 부문 외에 진전이 없었다. 2001년 9·11테러 이후, 페르베즈 무샤라프Pervaiz Musharraf 대통령은 대對테러전에 적극 동참하면서 미국의 압력을 의식하여 북한과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2002년 10월 북한 핵 문제가 대두되면서 미국의 대對북 핵 협력 중단 압력 등의 이유로 북한과의 관계에 거리를 두고 있다. 북한과 파키스탄은 과거와 달리 관계가 소원하지만 간헐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협력은 미미한 것으로 관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