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목적과 사명을 찾는 공부 외 (권태희, 정춘란, 이춘선)
[입도수기]
삶의 목적과 사명을 찾는 공부
“이 공부를 하면서, 어린 시절 철이 들 무렵부터 지금까지 늘 떠나지 않았던 많은 의문과 문제들, 즉 나 자신과 인간, 자연, 지구, 우주의 신비에 대에 해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권태희(여, 71) / Los Angeles도장 / 도기 153년 음력 3월 입도
인생의 해답을 찾다
저는 35년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현재 로스앤젤레스(LA)에 거주 중입니다. 폴란드에서 이민해 온 남편을 이곳에서 만나 지금까지 34년째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 엘에이에서 작은 의류 사업체를 운영하며 옷을 디자인하고 제작 판매하는 일을 합니다. 남편은 트럭 운전을 하는데 평소 늘 유쾌하고 성격이 원만하여 우리 부부는 오늘날까지 큰 탈 없이 만족한 삶을 살며 잘 지내고 있지만, 저는 마음 한구석에 늘 진리에 대한 갈급증을 느끼며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에 고민하였습니다.
인간 삶의 참된 목적과 지극한 사명은 무엇일까? 이 질문은 곧 ‘나의 삶의 참된 목적과 지극한 사명은 무엇일까?’ 하는 고민이기도 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동호회에서 만난 유미선 도생님의 인도로 처음 증산도 엘에이도장을 방문하였고 도장에서 정호진 수호사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본격적으로 증산도를 알아봐야겠다고 결심하고 수호사님과 함께 수행과 진리 공부를 시작한 지 벌써 6개월이 지났습니다.
이 공부를 하면서, 어린 시절 철이 들 무렵부터 지금까지 늘 떠나지 않았던 많은 의문과 문제들, 즉 나 자신과 인간, 자연, 지구, 우주의 신비에 대에 해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배우는 기쁨이 커서 감사하며 증산도 도장에 올 때마다 귀한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증산도에서 제공하는 주제와 내용이 방대하여 재미있게 공부하고 있으며 나의 삶의 목적과 사명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선령님들이 소중함을 깨달으며
장독대에 청수를 올리고 천지신명께 기도를 드리시던 어머니의 모습과 두루마기를 단정하게 차려입고 조상님께 제사를 모시던 집안 어른들의 모습이 미국에 온 지 35년이나 지나 만나게 된 증산도를 통하여 어제 일처럼 새삼 떠올랐습니다.
증산도 도장에서 치성을 드릴 때마다 잊고 지냈던 부모님과 조상님들 생각에 가슴이 뜨거워지고 뭉클해지는 강한 연대를 느끼게 됩니다. 까맣게 잊고 살았던 분들이 언제나 나의 사람이며 연민이었던 것을... 애써 그분들을 부정하려 했던 지난날들이었지만 이제 증산도를 통해서 조상님과 선령신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습니다.
천지에서 사람을 쓰는 이때에 참동학 증산도를 만났으니 매일 마음을 닦고 수행하며 삶의 목적과 사명을 다하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보은, 해원, 상생을 제 삶의 지침으로 삼아 사람 살리는 공부를 앞으로의 삶에서 꾸준히 해 나아갈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진리로 인도해 주신 유미선 도생님과 늘 도장에서 한결같이 지도해 주시는 정호진 수호사님께 감사드립니다. 보은!
도전道典 속에 빠져들다
“내가 하는 이 수행이 나만 잘살자고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제대로 된 수행을 통해 나의 사명감을 찾고 부모 형제도 살리며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마음으로 입도를 결심했습니다.”
정춘란(여, 57) / 대구수성도장 / 도기 153년 음력 3월 입도
인도자의 정성으로 만난 『도전』
저는 2020년 7월 8일부터 지금의 인도자에게서 증산도 진리 내용을 카톡, 문자 등을 통해 받았습니다. 인도자는 남편 친구의 부인으로 저와는 인사만 한 정도였습니다. 만났을 당시 제가 몸이 안 좋은 상태였는데, 인도자가 몸이 괜찮냐면서 수행을 하다 보니 정말 좋은 걸 느꼈고 저의 아들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고 이야기해서, 종교 이야기 같아 귀담아듣지 않고 마음의 벽을 쌓았습니다.
그 당시 저는 사촌 오빠를 통해 불교 신앙을 했는데, 공부하고 체험까지 하면서 끝까지 불교 신앙을 하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그런데 인도자가 ‘불교 석가모니 시대가 끝나고 지금은 미륵불 시대인데, 그 미륵불이 상제님이다.’라고 하면서 모두 본인 종교가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는 말에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도 지속적으로 동영상을 보내 주어 궁금함과 미안한 마음에 시청했는데 ‘환국, 배달’ 등의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다음부터 보내 주는 것은 고맙다고만 하고 보지 않았습니다.
인도자는 2022년 12월까지 꾸준히 카톡을 보내 줬습니다. 제가 보내지 말라고 했더니, 그럼 책을 보내겠다 해서 성의가 고맙고 미안해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12월 12일 『도전道典』을 받았고 한 장, 두 장 읽기 시작하면서 점점 빠져들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가 보니 눈에 들어오는 성구 말씀이 있었습니다. 도전 2편 40장 6절에 있는 ‘공자, 석가, 예수는 내가 쓰기 위해 내려보냈느니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평소에 다른 신앙을 하면 배반에 대한 벌을 받을까 봐 엄청 두려웠었는데, 이 성구를 읽은 뒤에는 증산도 신앙을 해도 불교를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담감이 줄어들고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사촌 오빠를 통해 불교 신앙을 할 때도, 그 당시 기독교 신앙을 하고 있어서 엄청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신앙을 한다고 생각하니 무서웠지만 그 성구 말씀에 힘을 얻었고 『도전道典』 읽기가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나의 사명을 찾고 남을 살리고 싶어
그때 마침, 인도자가 ‘무병장수 조화신선 도통수행’을 시작했다면서 따라 해 보라고 하여 상생방송을 보고 동영상도 보았는데, ‘빛실’만 빨리 받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무작정 도장을 찾아갔습니다. 대구수성도장이었는데요. 노희봉 수호사님과 천록포감님들을 비롯한 도생님들이 친절히 맞아 주시고 팔관법 공부와 수행도 같이 해 주셔서 정말 좋았습니다.
수행 과정이 끝이 없어 보여서 잠깐 주춤한 적도 있었는데, “시작이 반이다, 열심히 하면 다 할 수 있다.”라고 꾸준히 응원해 주셨으며, 일요치성에 처음 참석한 날에는 꽃까지 선물을 받아 눈물이 났습니다. 주문 수행을 하면 뜨거운 열기가 몸으로 흐르는 반응에 놀랍고 신기하고 좋았습니다.
노희봉 수호사님께서 도장에서 공부하면 기운도 더 많이 받고 입도하면 더 많은 것을 깨우치게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진리 공부는 많이 못 했지만 이 수행이 나만 잘살자고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려면 내가 먼저 제대로 수행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모든 사람들이 다 본인의 사명감을 갖고 태어났다 하니, 나의 사명감도 찾고 부모 형제도 살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마음을 먹었으며, 도장 도생님들이 힘이 되어 주시고 열심히 하면 된다고 응원해 주셔서 입도를 결심했습니다. 보은!!
눈부신 빛꽃이 나를 이끌어
“시천주주와 태을주를 읽으며 선려화를 받아 여기저기 몸에 심어 분화시키고 모으기를 반복하니, 눈부신 빛이 저의 이마를 비추며 눈을 시리게 만들었는데 그런 빛은 처음이었습니다.”
이춘선(여, 41) / 안산상록수도장 / 도기 153년 음력 윤 2월 입도
탈북을 했던 이유, 그리고 만난 인연
저는 대한민국에 온 지 14년이 된 탈북민입니다. 4남 2녀 중 막내로, 첫째 오빠와는 19년 차이가 나고 바로 위 오빠와도 10년의 차이가 있는 완전 늦둥이입니다. 북한에서 엄마는 저를 임신했을 때 의사의 오진으로 암으로 진단받아, 직장도 그만두고 죽을 날을 기다리며 슬픔으로 몇 달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7개월째가 되고서야 임신인 것을 알게 되었고 당시 엄마의 나이가 43세였으니 기막힌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북한에는 17세가 되면 군대에 가는 제도가 있어 제가 태어났을 때 큰오빠는 군대를 갔고 군복무 10년을 마치고 집으로 온 오빠의 존재를 유치원 졸업반 여덟 살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 오빠가 집에 왔을 때는 한동안 삼촌 삼촌 하면서 쫓아다녔는데, 큰오빠는 사람들로부터 군대 가서 사고 치고 아이를 만들어 왔냐는 오해를 받았다는 웃픈 이야기를 저에게 들려준 기억이 납니다.
북한에서 비교적 다복하고 남들보다는 나은 생활을 하였으나 고난의 행군 1세대라 먹고살기 위해 장사를 했으며, 말도 안 되는 북한의 희한한 법으로 인해 사회교양 처분이라는 명목으로 두 번의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이때 감옥에서 듣고 느낀 상황들이 탈북하여 지금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어려움과 즐거움 등 모든 것들이 어쩌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인연으로 이어져 같은 탈북민인 안산상록수도장 차수현 부포감님을 만나고, 증산도를 알게 되고, 상제님을 알게 되어 오늘 이 글을 쓸 수 있게 해 준 것 같습니다.
상제님의 뜻이었을까
탈북의 여정에서 두만강을 건너기 바로 전날인 5월 어느 날은 비가 몹시 내렸는데, 장맛비도 아닌 것이 그렇게 폭우가 내리는 건 처음 봤습니다. 과연 두만강을 건널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정말 귀신의 조화처럼 약속한 새벽 5시 전인 3시 반부터 비가 멈추었고 저는 두만강 기슭에 서서 맞은편 중국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시야는 1미터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강물 위에는 뭉게구름 같은 안개가 끼어 있었습니다. 안개는 손을 내밀면 흩어지거나 손에 잡힐 것같이 강물을 따라 흘러가고, 물은 검푸른 색으로 저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약속한 장소와 시간에 사람들이 다 있었던 터라 일단 강물에 들어섰고 작은 체구의 브로커 손에 이끌려 당장이라도 삼켜 버릴 것 같은 물살을 건넜습니다. 어떤 정신으로 버티며 건넜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합니다. 돈을 벌어 다시 온다고 하니 돌아오지 말고 너만 잘 살아가라며 불편한 몸으로 두 손을 잡고 눈물로 딸을, 그리고 동생을 떠나보내던 부모 형제의 모습에 눈물을 쏟으며 강을 건넜습니다.
젖은 몸으로 중국 땅에 발을 딛고 올라서서 풀숲에 몸을 숨기고 건너편 북한을 바라보니, 세상에!!! 1미터 앞도 안 보이던 그 강이 맞는 걸까 싶었습니다. 북한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고 저를 넘겨준 북한 군인이 반대쪽에서 저를 바라보고 서성거리며 중국의 브로커를 기다리는 모습이 다 보였습니다. 아까 그 안개는 다 어디로 갔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습니다. 살면서 처음 체험한 그때의 신비와 조화 그리고 그 감정과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고, 지금도 손으로 잡으면 잡힐 듯한 기억이 눈앞에서 계속 출렁입니다.
그리고 저는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지금의 저를 있게 한 것이 이때의 체험 때문일까요, 아니면 엄마 배 속에 자리 잡고 여자로 태어나 그렇게 살아오게 하고 지금으로 이끌어 주신 상제님의 뜻이었을까요?
하느님 모시는 숭고함에 귀를 열어
이런저런 사연이 중국에서도 있었고, 종교나 신神을 어느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지만 무조건 하느님, 해님, 달님, 별님, 모든 우주에 존재할 것 같은 신과 님은 다 부르고 찾으면서 북한을 떠난 지 2년 만에 한국에 오게 되었고 결혼도 하였습니다. 결혼 8년 만에 일곱 번의 시험관 수정을 시도한 끝에 쌍둥이 남매가 태어났으나 또다시 아이들과 홀로 남게 되는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어쩌지? 이 땅에 나밖에 없는데, 이 아이들과 나는 어떻게 살라고...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원망과 우울증으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고 삶의 의미도 사라져 가는 것 같았습니다. 무슨 힘으로 일어나고 무슨 깡으로 이렇게 버티고 있는지 저도 신기합니다. 아니, 이제 알고 있기에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딛고 아이들을 혼자 키우면서 100일이 되기 전 차수현 도생님이 저를 찾아오는 기막힌 사건이 있었고 그때부터 저는 증산도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 말들이 들리지도 않았고 이상하기만 했습니다. 오히려 저 속에서 어떻게 끌어내야 하나 싶었고,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보내면서 어쩔 수 없이 들어 주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태을궁 행사에 참여하고 오는데 그때의 광경들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날은 하늘이 너무 맑고 깨끗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음에도 하나같이 상제님을 바라보고 기다리며 행사를 진행하였고, 읍배를 드리는 모습이나 신단에 차려진 상을 보니 너무나 화려하고 멋져 보였습니다. 또한 조상님을 섬긴다는 그들이 제 옆에 있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며 뭔가 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뒤로부터는 증산도 이야기에 조금씩 귀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태을주의 힘으로 치유된 질병과 부상
그런데 저의 세 살 된 쌍둥이 아이들에게 수족구병이 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태을주를 읽지 않았고 긴가민가하는 상태였습니다. 아이들이 아픈데 특별한 약은 없다는 말을 들었고 온몸에 퍼지고 있는 수포들을 보며 눈물과 속상함 그리고 불안한 마음으로 밤을 새우는데, 아이들은 울면서 잠도 안 자고 먹지도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아이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간절한 마음으로 태을주를 읽었습니다. 태을주를 읽으니 이튿날 아침부터 온몸으로 퍼지던 수포들이 더 이상 번지지 않고 다음 날에는 까맣게 딱지가 앉기 시작했습니다. 증세가 진정되는 데에 1주일은 걸릴 것이고, 온몸에 다 퍼지고 열도 날 만큼 나고 아픈 시간이 있을 만큼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간절해진 심정으로 태을주가 저의 입에서 계속 흘러나왔습니다.
수족구는 4일 만에 딱지가 떨어졌고 입안과 손발에서 나오던 것들은 다시 가라앉고 몇 개의 수포들은 하룻밤 사이에 새까만 숯덩이처럼 딱지가 되어 굳어지더니 일주일쯤 후엔 온데간데없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열이 나거나 콧물이 나와도 태을주를 읽었고, 제가 몸이 안 좋아지면 태을주를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4년간 출산과 육아로 지친 저는 온몸이 성한 데가 없어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아예 두 손을 쓰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두 손목의 삼각인대가 튀어나와 뼈와 뼈의 길이가 차이가 나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아이들을 돌보지도, 밥을 해 먹이지도 못하게 되어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입니다.
역시 이때도 김수현 도생님이 찾아와 아파서 잠도 못 자는 저에게 무슨 실을 풀어 준다면서 시천주주와 태을주를 읽어 주셨는데, 저는 아무렇지도 않게 잠이 들었고 다음 날이 되니 손목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진통제로 인한 효과인가 생각도 해 봤지만, 계속해서 태을주를 들려주고 이상한 행동으로 저를 붙들고 기도하는 차수현 도생님의 정성을 목격하다 보니 태을주를 읽으며 살게 되었습니다.
더 큰 병원인 서울삼성병원을 찾아가 수술하려고 MRI와 CT를 촬영해 보니 뼈의 차이가 없어 수술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출산하고부터 갑상선 항진증과 저하증으로 근 3년간 약을 복용하고 있었지만 약을 언제 끊었는지도 잊어버렸고 손목도 아프지 않아 10킬로짜리 쌀 포대를 양손에 한 개씩 들고 다닐 정도입니다.
지금 저희 집에는 24시간 태을주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우리 쌍둥이들도 손을 들어 흔들어 가며 태을주 도공에 맞춘 율동을 하면 3분 정도 지나서 꿈나라로 갑니다.
우주의 빛꽃 선려화를 받고
그 후 광주 선려화 전수 행사에 차수현 도생님과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그날 화면에 저희 모습이 많이 나왔는데, 상제님과 종도사님 옆으로 더 가까이 간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고 설레었습니다.
종도사님 말씀대로 집중하여 두 눈을 감고 기도하고 시천주주와 태을주를 읽으며 선려화를 받았습니다. 이때 분명히 눈을 감았는데 눈앞에 너무도 환한 빛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너무 신기하여 잠깐 눈을 떠 보니 빛은 보이지 않고 다들 사회자를 따라 선려화를 받는 데 집중하고 있었고 종도사님도 단상에 그대로 앉아 사람들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다시 눈을 감고 시천주주와 태을주를 읽으며 선려화를 받아 여기저기 몸에 심고 뽑는데, 하나씩 팍팍 꽂아 넣고 수천 수만 수억 개로 분화시킨 후 다시 모으기를 반복하니 아까와 같은 눈부신 빛이 저의 이마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 빛이 얼마나 저의 눈을 시리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런 빛은 처음이었습니다.
선려화 전수 행사 전날에 꿈을 꾸었습니다. 하얀 도포를 입은 사람들 수백 수천 명의 행렬이 큰 운동장으로 들어가는데, 하나같이 머리 양쪽에 하얀 꽃이 주렁주렁 달린 가지를 꽂고 영정 사진 같은 세 개의 사진을 앞세우며 행진하였습니다. 저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죽어서 이리 요란한 장례를 치르나 싶어 사진을 들여다보니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영정 사진 같은 액자도 하얀 꽃으로 온통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 뒤로 마차가 줄지어 들어오는데 금으로 된 동상이 실려 뒤따랐고 말들도 다 하얀 꽃으로 치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그 행렬 자체가 하얀 꽃으로 뒤덮인 상태였습니다.
그다음 날 차수현 도생님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선려화 전수 행사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차수현 도생님이 손가락의 실을 풀어 손목을 낫게 해 준 걸 보았기에, 선려화 이야기를 꺼내자 불쑥 “나도 함께 가요.”라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그렇게 하여 일정이 잡혀 있던 광주 행사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꿈에서 본 영정 사진 같은 세 개의 사진은 바로 마고삼신님과 궁희 마마님, 소희 마마님이었나 봅니다.
상제님, 태모님, 종도사님 감사합니다. 저는 앞으로 150살 수명줄도 광선 여의봉도 다 받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어려운 환경이지만 상제님 말씀대로 후천으로 가기 위해 열심히 따라가겠습니다. 증산도 진리를 공부하면서 새삼 놀라웠던 건 우리가 쓰는 말 속에 이미 개벽 소식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미치고 자빠진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 미未가 치고 자子가 빠지는 그때 그 순간을 잘 넘기기 위해서는 항상 어디에서나 상제님의 말씀과 수행 및 기도뿐이라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도와주세요 상제님! 감사합니다. 보은!
©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