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B다시보기 | 한국의 성씨 - 13회 한양·함안 조씨
[STB하이라이트]
우리나라에서 강씨에 이어 일곱 번째로 큰 성씨가 조趙씨이며, 약 105만 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이 조씨 중에서 대표적으로 큰 성씨인 ‘한양 조씨’와 ‘함안 조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조씨의 본관
우리나라 조趙씨는 본관마다 유래가 다르고 다른 시조를 모시고 있어 계통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이 중 ‘배천 조씨’와 ‘임천 조씨’는 중국 송태조 조광윤의 후손이 귀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충청남도 천안의 세거 성씨인 ‘직산 조씨’는 백제의 개국공신을 시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현재 조씨의 본관은 35본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중 대표적인 본관은 한양, 함안, 풍양 조씨를 비롯한 10여 본입니다.
중국에는 조趙씨가 약 2천만 명 살고 있고, 성씨 순위로는 8위라고 합니다. 촉한의 장군 조자룡趙子龍과 북송을 개국한 조광윤趙匡胤이 대표적인 조씨 인물입니다.
1. 한양 조씨
우리나라 조씨에서 가장 큰 본관은 한양 조씨입니다. 한양 조씨는 어떤 성씨인지 살펴보겠습니다.
한양 조씨 현황
한양 조씨는 토착 성씨로 현재의 서울을 관향으로 하는 성씨입니다.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약 33만여 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데, 전체 조씨에서 31.5%를 차지합니다.
한양 조씨 집성촌
집성촌으로는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저전리와 영양군 영양읍 상원리, 하원리, 예천군 감천면 돈산리 등의 세거지가 있습니다. 또한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 마을도 한양 조씨의 집성촌인데, 이곳은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1519년(중종 14년), 조광조가 개혁정치를 하다 훈구파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기묘사화가 발생하자 한양 조씨 일족들은 화를 피하기 위해 전국으로 흩어지게 되는데, 1630년경 호은壺隱 조전趙佺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형성된 집성촌이 주실 마을입니다. 실학자들과의 교류로 일찍이 개화한 마을이며, 일제 강점기에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지조 있는 마을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이 주실 마을은 작은 시골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14명의 박사를 배출하는 등 많은 문인, 학자를 배출한 마을로도 유명합니다.
한양 조씨의 시조, 조지수
한양 조씨의 시조는 고려 때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낸 ‘조지수趙之壽’라고 합니다. 조지수는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한양 조씨는 한양에 세거해 온 사족士族의 후예로서 고려 중엽에 조순대부 첨의중서사를 지낸 조지수 할아버지를 모시고, 약 10만 가구 30여만 명의 종인이 충과 효를 가훈으로 삼아 이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첨의중서사는 첨의성과 중서성을 합한 관청으로 지금으로 보면 총리직에 해당하는 고위 관직입니다.
한양 조씨 시조부터 5세조까지 단소와 묘소가 모두 북한에 모셔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손들이 2004년부터 이곳 충남 홍성군 홍북읍 대인리 매산 마을에 시조 이하 5세조의 단소를 마련하여 설단을 짓고 제향을 모시고 있습니다. - 조병수 한양 조씨 대종회 홍보부회장
조지수 가문과 이성계 가문
함경도 덕원에 정착한 조지수는 아들 대에 이르러 큰 변화를 맞게 됩니다. 동북면 지역을 점령한 원나라가 이곳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조지수의 아들 ‘조휘’를 쌍성총관에 임명한 것입니다. 이후 4대에 걸쳐 총관직을 세습하면서 이 지역의 실력자로 부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쌍성총관부가 공민왕 때 수복이 되면서 조지수의 가문은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함경도 덕원 : 지금의 원산 일대
조지수 가문은 4대에 걸쳐 쌍성총관부 총관직을 세습했지만, 또한 조선을 개국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조선 건국 이전부터 한양 조씨의 조지수 가문과 전주 이씨의 이성계 가문은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쌍성총관부의 천호 벼슬을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두 가문은 혼인으로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조돈의 아들 조인벽이 이자춘의 딸인 정화 공주와 혼인을 하면서 이성계는 그에게 처남이 됩니다.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수복할 때 마지막 총관 조소생은 도망가지만 그의 숙부인 조돈은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고려의 통치권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후에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을 건국할 때도 적극 참여하면서 한양 조씨는 조선 개국과 더불어 크게 번성하게 됩니다.
한양 조씨의 인물, ①조광조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있습니다. 그는 중종반정 이후 유교적 이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불꽃같은 짧은 생애를 산 개혁가였습니다.
한양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함경도의 지방관으로 파견됐을 때, 17세의 나이로 마침 인근에 유배를 와 있던 김굉필을 찾아가게 됩니다. 김굉필은 조선조 사림의 연원인 김종직의 문인입니다.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배운 그는 관직에 나가기 전부터 명성이 있어 사림의 영수로 인정받았습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 때 잘못된 정치를 일신하는 분위기를 맞이하자 사림들 또한 정계에 재진출하게 되는데, 이 중심에 선 인물이 조광조입니다. 조정에 출사한 이후 만 3년 만에 대사헌까지 초고속 승진한 조광조는 중종의 신임 아래 조선을 성리학적 이상 사회로 만들기 위해 정치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이에 공신들은 조광조의 과격한 언행과 정책에 결국 돌아선 중종의 지지를 업고 사림의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키게 됩니다.
정국공신 개정이 선포된 지 나흘 뒤 한밤중에 갑자기 죄인 신세가 된 조광조는 다음 날 바로 유배형에 처해지고 그로부터 한 달 뒤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38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당대에는 실패한 개혁가였지만, 그가 널리 보급한 향약鄕約은 서원과 함께 사림의 튼튼한 기반이 되어 선조 대에 이르러 사림은 정국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또한 그를 사림의 도통道統 맥을 후대에 이어준 인물로 추앙하여 문묘에 종사하고, 전국의 많은 서원과 사당에 제향되었습니다.
*주초위왕(走肖爲王) 나뭇잎
한양 조씨의 인물, ②조지훈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어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 「지조론志操論」 中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불린 조지훈은 한국의 문화와 멋을 탐구해 《승무》와 같은 우아하고 섬세한 시를 썼지만, 시대에 대한 비판은 매섭고 대쪽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1920년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한양 조씨 집성촌인 주실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일제식 교육은 받지 않고 전통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키 180cm가 넘는 육 척 장신에 언제나 당당한 기풍을 가진 그는 시인으로서만 활동한 게 아니라 한국학의 기틀을 다진 학자이며 한학에 조예가 깊은 교수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 냈습니다. 또한 명문 「지조론」과 각종 논설을 통해 시대의 병리를 질타하며 올곧게 바른길을 추구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병을 얻어 48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고, 고향인 주실 마을에는 그를 기리는 ‘지훈문학관’이 들어서 있습니다.
2. 함안 조씨
우리나라 조씨에서 두 번째로 큰 성씨가 함안 조씨입니다. 선조가 경상남도 함안에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면서 이곳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로 알려져 있는 함안 조씨는 어떤 성씨인지 살펴보겠습니다.
함안 조씨의 시조는 휘 정鼎이시다. 고려조에 대장군 원윤元尹을 지내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후손들이 함안에 세거하면서 함안咸安을 본관으로 하였다. 고려 왕조가 바뀔 무렵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킨 두문동杜門洞 72현 중 고죽재공孤竹齋公 안경安卿. 덕곡공德谷公 승숙承肅 두 분과, 생육신生六臣의 한 분인 정절공貞節公 려旅 등 열세 분 충신의 충절이 청사靑史에 길이 빛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과 의정원 의장을 지내고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주창한 소앙공素昻公 용은鏞殷, 일제 강점기에 일왕의 장인을 대만에서 자격刺擊한 명하明河 의사義士 외 60여 분 독립 유공자들의 공적은 구국 광복의 초석이 되었다. - 대전 뿌리공원 함안 조씨 성씨 조형물 中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과 의정원 의장을 지내고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주창한 소앙공素昻公 용은鏞殷, 일제 강점기에 일왕의 장인을 대만에서 자격刺擊한 명하明河 의사義士 외 60여 분 독립 유공자들의 공적은 구국 광복의 초석이 되었다. - 대전 뿌리공원 함안 조씨 성씨 조형물 中
함안 조씨 현황
함안 조씨는 경상남도 함안을 관향으로 삼는 성씨입니다.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28만여 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데, 전체 조씨에서 26.8%를 차지합니다.
함안 조씨 집성촌
대표적인 집성촌은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 원북 마을입니다. 이곳은 대대로 함안 조씨가 터를 잡고 살아온 곳으로 함안 조씨 대종회 건물이 있는 곳입니다. 또한 생육신 중 한 명인 어계 조려가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이 외에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인지리 부곡 마을과 청도군 풍각면 안산리 구산 마을,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안곡리 안곡 마을 등 전국에 산재해 있습니다.
함안 조씨의 시조, 조정
함안 조씨는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시조 이전의 역사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1926년 간행된 조선명신록朝鮮名臣錄과 1927년에 발행된 동국명현언행록東國名賢言行錄에는 시조 조정趙鼎과 두 아우가 신라 말에 귀화해 태조 왕건을 도왔다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우리 함안 조씨의 시조 조정趙鼎 할아버지는 고려 대장군 원윤 벼슬을 하신 분입니다. 고려 말 공조전서로 계시던 조열 할아버지께서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을 가지고 낙조하여 원북에 입향한 분입니다. 원북은 정절공 어계 조려趙旅 선생이 태어나신 곳이기도 합니다. 어계 선생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계실 때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보고 낙향하여 원북에 입향하였고 어조대 등에서 절의를 지키신 분이고 그분이 사신 곳은 어계고택이라 명하여 경남 문화재 제14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백이산 앞에 중국 고사 중 주나라의 백이와 숙제가 불사이군의 정신으로 수양산에 은거하여 고사리를 채취해 일평생을 보내며 굶어 죽었던 정절의 두 분을 참고해 생육신 여섯 분을 모신 서산서원을 건립하였습니다. 서산서원 후원에 채미정이라는 정자를 지어 선조를 모셨습니다. 그리고 서산서원 옆에는 충의비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원북에는 정절공 어계 선생의 조부이신 조열 선조님을 모신 묘역이 있으며, 바로 옆 원북면 내의 하림에는 정절공 어계 선생의 부친이신 조안 선조님의 묘가 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함안 조씨의 종훈은 백세청풍百世淸風과 숭조목종崇祖睦宗입니다. 백세청풍은 영원토록 변치 않는 푸르고 높은 선비의 정절과 기개를 의미하며, 숭조목종은 이러한 선조님을 잘 모시고 가족 간, 종훈 간에 화목하라는 의미입니다. - 조욱래 함안 조씨 대종회 회장
경상남도 함안을 관향으로 하는 함안 조씨는 영원히 변치 않는 맑고 높은 절개를 뜻하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을 자랑거리로 삼는 가문이어서 그런지 많은 충신과 지사를 배출하게 됩니다. 함안 조씨 종문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함안 조씨의 인물, ①조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생육신의 한 사람인 어계漁溪 조려趙旅가 있습니다. 그는 1453년 성균관 진사가 되어 당시의 사림 사이에 명망이 높았으나 1455년,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이에 항거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절의를 지킨 그는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 먹으며 살았다는 고사를 인용해 이름 붙인 채미정과 청풍대, 어조대에서 독서와 낚시를 하며 여생을 보냅니다.
후에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권될 때 그의 충절도 인정받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고향인 함안에 서산서원이 세워져 조려를 비롯한 생육신의 위패가 모셔지게 됩니다. 또한 서산서원 옆에는 ‘함안 조씨 십삼충 공적비’가 있는데, 이것은 조려의 충절을 본받아 이를 실천한 후손 13명의 공적을 기록한 비입니다. 모두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때 순국한 인물들과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들입니다.
*생육신 : 조려, 김시습, 이맹전, 원호, 남효온, 성담수
*어조대 : 어계 조려가 낚시하며 소일한 곳
*서산서원 : 어계 조려를 비롯한 생육신의 위패를 모신 서원
함안 조씨의 인물, ②조명하
나는 대한大韓의 원수를 갚았노라.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 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하리라.
- 1928년 순국 직전 조명하 의사의 유언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 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하리라.
- 1928년 순국 직전 조명하 의사의 유언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친 영웅들을 생각하면 대개 안중근 의사와 윤봉길 의사를 떠올립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에 못지 않는 분이 바로 대만에서 타이중臺中 의거를 일으킨 조명하 의사입니다. 조명하 의사는 어떤 독립운동 조직에도 소속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의지로 단독 거사를 일으켜 일본 왕족 처단에 성공한 유일한 독립운동가입니다.
1905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조 의사는 일찍이 같은 지역 출신인 안중근, 김구 등의 무용담을 듣고 독립투사의 뜻을 품게 됩니다. 항일을 위해서는 우선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1926년 22살의 나이로 현해탄을 넘어갔습니다. 오사카에서 주경야독하며 때를 기다리던 그는 좀처럼 기회를 잡을 수 없자 상하이로 가기 위해 타이완으로 향했습니다. 조 의사는 타이완 타이중시臺中市 부귀원富貴園이란 찻집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때를 보던 중 중국 대륙 침략을 위해 타이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특별 검열하기 위해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이며 육군 대장인 ‘구니노미야’가 온다는 정보를 얻게 됩니다.
1928년 5월 14일, ‘구니노미야’가 검열을 마치고 타이중역으로 가는 도중에 기회를 노려 조 의사는 독검으로 거사를 이뤄냅니다. 조 의사는 아수라장이 된 그 자리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고 체포당한 뒤 그해 10월,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합니다. ‘구니노미야’는 거사 당시 치명상을 입진 않았지만, 독검에 의한 부상으로 다음 해 1월 사망하게 됩니다. 조명하 의사의 타이중 의거는 일본 제국주의를 충격에 빠뜨리고 우리의 독립 정신을 고취시킨 쾌거였습니다.
중국 조씨의 기원
‘한양 조씨’와 ‘함안 조씨’ 시조 이전의 역사는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 기원을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중국의 조씨는 그 뿌리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주나라 목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로 ‘조보造父’란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주나라에 쳐들어온 강성한 서언왕徐偃王을 무너뜨리는 데 공을 세우게 됩니다. 이때 주 목왕으로부터 조성趙城 땅을 하사받게 되는데, 이로부터 조씨趙氏 성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조보造父는 순임금의 신하였던 ‘백익伯益’의 후손입니다. 동이족인 백익은 후에 우의 치수를 도와 그 공으로 영嬴씨 성을 하사받게 됩니다. 그리고 우임금은 백익의 아들인 약목若木을 서徐에 봉하여 서나라를 세웠는데, 후에 자손들은 나라 이름인 서徐를 성씨로 삼게 됩니다. 그래서 영씨인 진시황 정政과 불로불사의 영약을 찾아 떠난 서불徐市은 모두 백익의 후손입니다. 이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귀화한 조씨의 기원은 순임금과 우임금의 신하였던 ‘백익’까지 그 근원을 찾아가 볼 수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우리나라 조씨 중에서 대표적인 한양 조씨와 함안 조씨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한국 성씨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시간, <한국의 성씨> 많은 시청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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