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열전 | 관용의 정복자 살라흐 앗 딘(살라딘)과 그의 맞수들
[역사인물탐구]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11세기 말 가톨릭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이 한마디로 시작된 유럽의 제1차 십자군은 지중해를 건너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왕국을 세웠다. 점령 당시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하였다. 그러자 이슬람 세력은 서서히 결집하여 반격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이후 근 백여 년이 시간이 지난 뒤 십자군에 맞서는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니 바로 적이었던 십자군 전사들도 칭송할 정도로 위대했던 술탄Sultan(원래 도덕적, 정신적 권위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11세기부터 이슬람 군주의 칭호가 됨) 살라딘Saladin이었다. 이 글은 탁월한 리더십으로 이슬람 세력을 통합하고, 관대함과 포용력으로 유럽에서조차도 칭송했던 살라딘과 그에 맞선 십자군의 매력적인 맞수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11세기 말 가톨릭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이 한마디로 시작된 유럽의 제1차 십자군은 지중해를 건너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왕국을 세웠다. 점령 당시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하였다. 그러자 이슬람 세력은 서서히 결집하여 반격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이후 근 백여 년이 시간이 지난 뒤 십자군에 맞서는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니 바로 적이었던 십자군 전사들도 칭송할 정도로 위대했던 술탄Sultan(원래 도덕적, 정신적 권위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11세기부터 이슬람 군주의 칭호가 됨) 살라딘Saladin이었다. 이 글은 탁월한 리더십으로 이슬람 세력을 통합하고, 관대함과 포용력으로 유럽에서조차도 칭송했던 살라딘과 그에 맞선 십자군의 매력적인 맞수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살라딘, 그는 누구인가?
이슬람 역사상 최고 영웅이라 칭송받는 살라딘은 1138년 현재 이라크 북부인 타크리트Takrit에서 태어났다. 그는 쿠르드족 사람이다. 쿠르드족은 이란, 이라크, 터키 등지에 거주하는 산악 유목 민족으로 용맹하고 강한 부족이었다. 살라딘은 명문 장군 집안 출신이었다. 본명은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Salah ad-Din Yusf ibn ayyub, 욥의 아들이며 정의로운 신앙인인 요셉이란 뜻)로 유수프는 구약 성서에 나오는 유대인 출신 이집트 총리인 요셉의 이슬람식 이름이다. 이름 때문인지 실제 살라딘은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살라딘이란 호칭은 살라흐 앗 딘을 유럽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왜소한 체격에 내성적이며 종교적인 심성이 강하며 사려 깊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탁월한 지도력과 군사적 역량으로 이슬람 세력뿐 아니라 서방 세계에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당시 탐욕스럽고 무자비했던 십자군 군주들에 비해 온건하고 신의가 있는 자비로운 군주로 덕망이 높았다.
파티마 왕조의 멸망
1168년 이집트 파티마Fatima 왕조가 내분에 휩싸였다. 무함마드의 계승자로 이슬람교를 수호하고 이슬람 공동체를 통치하는 지도자이자, 종교상 최고 권위자인 칼리프와 실질적인 통치자인 재상 사이에 불화가 생긴 것이다. 당시 이집트는 시아Shiah파였고,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 등을 지배한 셀주크계 장기 왕조의 제2대 술탄(재위 1146~1174)이었던 누레딘Nureddin은 수니Sunni파의 최고 권력자였다.
정국이 혼란했던 이집트에서는 누레딘에게 원군을 요청하였고, 누레딘은 이집트를 수니파로 만들고 십자군 세력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살라딘의 삼촌인 시르쿠Shirkuh를 파견하였다. 셀주크 투르크 출신이 태반인 누레딘의 휘하 중 쿠르드족 출신인 그를 보낸 것은 그가 재능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여기에 살라딘도 포함이 되었다.
이집트에서 재상이 된 시르쿠가 두 달 뒤 갑자기 사망하자, 31세의 애송이 살라딘이 재상에 취임해 버렸다. 살라딘은 이집트 칼리프가 죽자 다음 칼리프를 옹립하지 않고 실제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면서 파티마 왕조는 멸망하고 말았다
술탄(이슬람에서 말하는 군주)이 된 살라딘
살라딘이 세력을 키워 가면서 결코 고분고분하지 않은 태도를 보이자, 누레딘은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군사 행동을 통해 건방진 애송이를 제거해 버리려 했다. 하지만 1174년 살라딘 정벌을 준비하던 누레딘이 급사하였다. 이에 살라딘은 이집트의 술탄이 되어 아이유브 왕조를 세웠다. 이후 누레딘 세력을 흡수하면서, 살라딘은 그가 이루려고 했던 사업에 착수하였다. 전 이슬람 세력을 아우르는 것과 십자군 세력을 몰아내는 것. 여기서 그는 지하드jihad, 즉 성전聖戰을 선언하였다.
몽기사르 전투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Baudouin 4세 국왕이 16세 때이던 1177년 11월 25일, 살라딘은 2만 6천의 대군을 이끌고 카이로를 떠나 북상하여 예루살렘 쪽으로 진군하였다. 이에 맞선 보두앵 4세는 국왕 친위 기병 5백 명과 템플 기사단 80명으로 살라딘 군대를 향해 돌진했다. 만용에 가까웠으나 기백이 담긴 어린 왕의 분전에 살라딘의 친 위대인 쿠르드 기병대까지 도망치고 술탄이 포로가 될 뻔하였다. 이것이 바로 군대를 물린 적은 있어도 도망친 적은 없는 살라딘에게 치욕을 안긴 몽기사르 전투였다. 살라딘은 휴전 협정을 맺고 패전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며 군대를 재건하였다. 시간은 살라딘 편이었다. 예루살렘 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왕이었던 보두앵 4세가 24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 살라딘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단 한 번의 전투로 십자군을 궤멸시키다(하틴 전투)
■십자군 진영
당시 십자군 세력인 예루살렘 왕국은 보두앵 4세의 누나 시빌 드 예루살렘과 남편 기 드 뤼지냥이 공동 왕위에 있었다. 이들은 호전적인 샤티용의 레날드와 성전 기사단을 아우르면서, 트리폴리의 백작 레몽 3세가 이끄는 세력과 대립하였다. 이유는 보두앵 4세 사망 후 레몽이 왕위에 올랐으나, 기가 그 자리를 강탈했기 때문이다. 전면전 직전까지 치달았으나, 이벨린의 발리앙이 중재하면서 겨우 무마되었다. 당시 십자군은 세력을 확장하는 이슬람 세력과 휴전 협정을 맺고 있었다. 그러나 레날드가 이슬람 대상隊商을 공격하고, 이슬람 최대 성지인 메카를 위협하였다. 그러자 이슬람 세력은 살라딘을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하였고, 예루살렘 왕국은 기가 레몽과 화해하고 군대를 모두 모아 이슬람 세력과 결전을 벌이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살라딘 진영
1187년 봄 시리아 북부와 멀리 동쪽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다마스쿠스를 향해 대규모의 이슬람군이 모이고, 이윽고 카이로를 떠난 살라딘이 다마스쿠스에 도착했다. 살라딘의 이런 움직임은 그리스도교 최대 성지인 예루살렘을 노리는 것이었다. 이슬람의 가장 중요한 성지는 메카이며, 그 다음은 예언자 마호메트가 죽은 장소인 메디나, 마지막이 마호메트가 하늘로 승천했다고 전해지는 바위가 있는 예루살렘이다. 반면 그리스도교에게는 예수가 살았으며 죽었다가 부활한 예루살렘이 제일 중요한 성지였기에, 만약 함락된다면 이로 인한 심리적 타격은 매우 컸다
■보급로가 끊어진 십자군
예루살렘의 십자군은 갈릴리 남단 세포리스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그러자 살라딘은 이들을 유인하기 위해 북쪽에 있는 레몽의 요새인 티베리아스를 공격하였다. 이곳은 레몽의 근거지이고 그의 부인 에시바가 살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리 중요한 곳이 아니었다. 레몽은 아내를 구하기 위해 병사를 이끌고 떠날지 말지 선택해야 했으며, 기 역시 동맹자를 지원하러 갈지 자리를 지킬지 결정해야 했다. 살라딘은 적의 불화를 알고 갈등 요인을 던져 놓은 것이다. 레몽은 자신의 부인은 몸값을 내고 구하면 되니, 물이 충분하고 방어하기 좋은 이곳에서 버티면 더운 여름에 이슬람군이 돌아갈 것이라고 주장하며 반대하였지만, 기 왕은 적극적으로 공격하자는 주장을 선택하였다. 유일한 수원을 포기하고 한낮의 찌는 더위 속에 30킬로미터를 진군한 이 어리석은 결정은 지금도 의아스럽다. 결국 티베리아스를 구하기 위해 출진한 십자군은 가장 중요한 식수를 확보하지 못했다. 이슬람군은 십자군의 보급로를 끊었다. 결국 갈증과 더위에 시달린 십자군은 하틴 마을 근처 구릉지에서 포위된지도 모른 채 숙영하였다.
■살라딘의 승리
1187년 7월 4일 새벽의 여명이 밝아왔다. 이슬람군에서 피워 낸 연기는 기갈飢渴과 피로에 누적된 십자군에게는 죽음의 손짓 같았다. 새벽부터 시작된 공격에 십자군은 속수무책이었다. 대부분의 기사와 보병들이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전의를 상실하고 그대로 항복하였다. 대책 없이 돌격만 앞세우는 단순한 공격 방식, 대단위 부대에 대한 지휘 경험 부족, 보급과 식수에 대한 확보 실패가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주요 지휘관들은 거의 모두 생포되었고, 레몽과 발리앙만이 겨우 살아 도망쳐 버렸다.
역사상 유명한 하틴 전투는 살라딘의 최고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각본, 연출, 주연 모두 그 혼자 해 낸 것이다. 6월 26일 다마스쿠스에서 출진한 뒤 7월 4일 결전 때까지 고작 9일밖에 걸리지 않을 만큼 속도전을 벌이며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예루살렘 공방전
■예루살렘 상황
하틴 전투로 이미 예루살렘은 살라딘의 수중에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예루살렘 자체도 절대 난공불락의 도시가 아니었다. 성벽은 대략 4킬로미터에 지나지 않았고, 외부에서 원군이 오는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여기에 예루살렘의 왕 기는 하틴으로 가면서 성채를 지킬 예비 병력까지 총동원하였기에 병사도 적었고, 이들을 지휘할 사람도 없었다. 더욱이 6만 명 정도의 예루살렘 인구 중 약 1만 5천 명 정도만 유럽인이고, 나머지는 이슬람교도와 유대교, 동방 그리스도교였다. 6만 명 전원이 예루살렘 방어에 나설 수 없었다.
■관용과 자비의 군주가 되다
9월 20일 예루살렘에 도착한 살라딘군은 그 다음 날 바로 공격해 들어왔다. 압도적 병력의 공격에 발리앙의 방어 측은 잘 버텨 냈다. 성벽 한 군데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자 살라딘은 모든 투석기를 이용해 한꺼번에 한 곳에 집중하였고, 인부를 동원해 성벽 아래까지 갱도를 파게 했다. 함락 직전! 그러자 발리앙은 대담하게 협상을 제안했는데, 오히려 살라딘에게 협박을 했다. 시내의 이슬람교도를 모두 죽이고, 모든 이슬람 성소를 파괴하고서 전원이 옥쇄한다, 즉 모두가 깨끗이 죽겠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내건 벼랑 끝 전술이었다.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이슬람교도의 피로 물들고 파괴된 예루살렘을 얻을 순 없었다. 살라딘은 이제 관용과 자비의 군주가 되기로 하였다. 성안 모든 사람들의 몸값을 받는 조건으로 협상에 응했다. 하지만 사실상 몸값 일부만 낸 사람도 풀어 주었다. 오히려 몸값이 없는 노인이나 여인, 고아는 당장 필요한 돈까지 주며 예루살렘을 떠나게 했다. 이 모든 비용은 살라딘 자신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여기에 어떤 약탈 행위도 금지시키고, 떠나는 예루살렘인들을 지켜 주며 안전한 곳으로 보내 주었다.
■예루살렘 해방
살라딘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보기에도 비난받을 만한 관대함으로 제1차 십자군 때와 전혀 다른 방식, 즉 살육을 행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해방’시켰다. 살라딘은 1187년 10월 9일 대열을 이끌고 성지 해방자로 당당하게 입성하였다. 이날은 이슬람교도에게는 기념일이 되었다. 예루살렘을 십자군이 점령하기 이전 상태로 되돌렸다. 유럽에서 오는 순례를 허용하되, 예루살렘의 이슬람 지배를 인정해야 했다.
살라딘의 예루살렘 함락 이후
■살라딘의 명성
하틴에서의 결정적 패배와 예루살렘 함락은 유럽 사회를 경악에 빠뜨렸다. 그와 함께 이슬람에 제대로 된 지도자와 잘 조직된 군대가 출현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살라딘에 대해서 이교도의 수장으로 과격하고 마귀 중의 마귀일 줄 알았는데, 정작 그는 싸움을 즐기지 않고 자기 의무라 생각해 전쟁을 수행하였을 뿐이고, 사람들의 신망을 얻었으며 포로들에게 관대하여 십자군 중에서도 그를 칭송하는 이가 많았다.
■리처드Richard 1세
제3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다. 당시 유럽 최강국인 프랑스, 잉글랜드, 신성로마제국(독일)의 국왕이 참전하였다. 실제 십자군을 이끈 인물은 그 유명한 잉글랜드 국왕으로, 사자왕 또는 사자심왕(The Lionheart)이라 불린 리처드 1세였다. 사람들을 압도할 만큼 큰 키, 유달리 긴 팔과 다리, 떡 벌어진 어깨, 붉은색이 감도는 금발은 사자 갈기 같았던 리처드는 중세 무훈담의 단골 주인공이며 소설이나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원정의 승패는 재정의 안정성이 좌우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영지와 사유재산 등을 매각하여 원정 자산을 확보하였다. 그동안 주먹구구식으로 그냥 믿음에 의지해 나아갔던 역대 십자군과 달리 조직과 통제가 되는 정규군이었다. 역대 십자군 중 가장 뛰어난 리더와 조직화된 십자군이 원정을 떠난 것이다.
■살라딘의 실패한 공격
1190년 7월 시작된 십자군 원정은 도중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죽고, 프랑스 필립 2세가 마음을 바꿔 귀국하면서 리처드 홀로 살라딘과 전쟁을 시작했다. 1191년 6월 초 아크레 근처에 도착한 리처드는 2년 간 끌었던 치열한 아크레 공방전을 단 5주 만에 끝내며 살라딘의 연승 행진을 저지시켜 버렸다. 살라딘 처지에서는 자신이 여기서 죽으면 누구도 이슬람 군대를 모을 수 없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반격에 나섰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없다. 십자군 전쟁상 최고의 리더와 체계적인 군대가 맞붙는 진짜 전쟁이 시작되었다.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는 리처드의 군대를 결정적 장소에서 기습 격멸할 계획을 살라딘은 세웠다. 이른바 사상 최대의 아르수프 전투였다. 하지만 리처드에 의해 완벽히 통제된 십자군은 살라딘 기병의 도발에도 꿋꿋하게 전열을 지켰다. 살라딘군의 첫 번째 공격이 실패하자, 이슬람군의 전략이 어그러지고 사기가 급격하게 저하되었다. 이 틈을 노린 리처드는 결정적 반격을 가한다. 조직적인 십자군의 반격에 이슬람군은 몰살당하고 말았다.
■휴전 협정
하지만 살라딘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고 집요하게 십자군의 보급선을 끊었다. 여기에 심한 폭우와 사막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십자군은 병사 수가 3분의 1로 줄었다. 또한 동생 존이 프랑스의 필립 2세와 짜고 왕위 찬탈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리처드의 마음은 급했다. 결국 십자군은 전투는 승리했지만, 예루살렘 탈환은 실패했다. 1192년 9월 살라딘과 리처드는 휴전 협정을 맺었다. 아크레를 포함해 야파에서 티레까지 이어진 지중해 연안 항구 지역의 십자군 영토를 존중하되 예루살렘은 이슬람교도의 통치하에 둔다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비무장한 기독교도 순례자가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성지 통행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는 조건도 더해졌다.
살라딘의 죽음
살라딘은 리처드와 화약을 맺고 5개월이 지난 1193년 3월 4일 다마스쿠스에서 55세를 일기로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전기 작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신께서 자비를 내려 그분의 영혼을 구원하시길! 그분은 세상의 보물이자 감탄의 대상이었으므로.” 성과 도시 그리고 전 세계가 슬픔에 빠졌고 그 슬픔의 정도는 신만이 잴 수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살라딘은 다마스쿠스의 거대 모스크 사원 옆 묘지에 묻혔다. 일생 독실한 이슬람교도로 재산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는 십자군 전쟁 승리를 통해 이슬람의 가장 위대한 군사 지도자임을 실증하였고, 광신적인 종교 분위기 탓에 무자비한 살육이 판치는 당시 상황에서 관용적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정복한 영토를 정의롭게 통치하고 신하들로부터 아낌없는 신망을 받은 성군이기도 하였다. (정리 - 이해영 객원기자)
이슬람 시아파와 수니파
시아파와 수니파의 구분은 이슬람 교조 무함마드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 계승자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발생한 차이다. ‘수니’는 꾸란과 함께 이슬람 경전의 커다란 두 개의 기둥 중 하나이다. 이 수니를 존중한 교파가 수니파로 대다수를 차지한다. 이들은 가톨릭의 교황과 같은 이슬람교 지도자인 칼리프를 존중하는 반면,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남편인 알리를 유일한 계승자로 여긴다. 시아파는 엄격하고 극단적인 면이 강하며 이란 등 일부 지역을 장악하고 이슬람교도 중 약 10%를 차지한다. 당시 이집트는 시아파가 장악하였다가, 살라딘에 의해 수니파가 되었다보두앵Baudouin 4세
살라딘 앞을 가로막은 이는 흔히 문둥병으로 알려진 한센병을 앓고 있는 10대 소년 보두앵 4세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수명이 길지 않다는 걸 잘 아는 보두앵 4세는 자신이 지도자라는 점을 강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그는 뛰어난 국제 감각과 정치력 그리고 책임감으로 이슬람 세력의 진출을 막고 있는 인물이었다. 아마 그가 수명이 길어 좀 더 재위를 하였다면, 예루살렘 왕국과 십자군 전체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보두앵 4세의 전반적인 전략은 수성전 위주였다. 그러면서 전장에서는 항상 말을 타고 최전선에 섰고, 살라딘군이 공격해 와도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병이 악화되었을 때는 안장에 자기 몸을 묶어서라도 지휘를 했다.이벨린의 발리앙Balian of Ibelin
마지막까지 예루살렘 수비대를 이끈 이벨린의 발리앙은 2005년에 나온 영화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의 주인공이다. 그는 이탈리아 남부 출신으로 이벨린이라 명명한 야파 근처 영토를 지닌 영주였다. 뛰어난 현지 적응력을 지녔고, 이슬람에 대해서는 온건한 편이었다. 그런 47살의 그가 예루살렘 방어에 나섰다. 그는 최소 3만 병력으로 공격해 오는 살라딘에 맞서 시내에 있던 16세 이상 남자를 모두 기사로 임명한다. 전투의 프로인 기사라는 호칭을 부여하여, 방어할 기개를 심어 주려고 한 것 같다.영웅 대 영웅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살라딘과 리처드는 적장이지만 상대를 높게 평가했다. 둘은 실제 대면한 적은 없었지만 상호 존경하며 많은 일화들을 남겼다. 살라딘은 리처드가 부상을 입자 전투를 중단하고 개인 의사를 보내 상처를 돌보게 하고, 말을 잃자 두 필을 보내 주기도 하고, 신선한 과일을 보내 주기도 하였다. 이런 살라딘의 기사도와 관대함은 유럽에 알려져 그를 칭송하는 많은 시들이 나타났다. 단테는 『신곡神曲』에서 그를 미덕을 갖춘 이교도로 묘사하였다.아크레Acre
성서에 등장하는 고대 도시로 원래 페니키아인의 도시였다가 635년 이슬람 세력에게 점령당했다. 지중해와 접해 유럽과 연결되는 항구 도시로 상업과 교통뿐 아니라 군사적 요충지였다. 또 예루살렘 순례를 위한 거점 도시이었기 때문에 십자군 전쟁 당시 치열한 격전지였다.<참고문헌>
『전쟁연대기 1』 (조셉 커민스 지음, 김지원 등 옮김, 니케북스,2008)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 (제임스 레스턴, 이현주 옮김, 민음사,2003)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5』 (김태권, 비아북, 2013)
『살라딘』(스탠리 레인 폴, 이순호 옮김, 갈라파고스, 2003)
『파란만장 세계사 10대 사건 전말기』(심현정, 느낌이 있는책, 2017)
『십자군 이야기2, 3』(시오노 나나미, 송태욱 옮김, 문학동네, 2012)
『세계명장 51인의 지혜와 전략』(여영무, 팔복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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