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치와 진리에 대한 이야기 외 (이진남, 김혜염, 한금수, 유창성, 신이랑, 손예진, 한민송, 정윤희)
[입도수기]
세상 이치와 진리에 대한 이야기
이진남(59, 여) / 인천구월도장 / 148년 음력 6월 입도
그동안 저는 30년간 천주교 신앙을 하였습니다. 천주교를 ‘최고의 종교로 생각하고 종교를 잘 선택했다’는 나름대로의 자부심을 가지고 가족과 주위 사람들을 천주교로 인도하며 열심히 신앙하였습니다.
그러다 같은 직장 동료인 이선자 도생으로부터 세상 이치와 진리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통해 참진리를 알지 못하고 세월이 흐르고 있었음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또한 <상생방송>을 소개해 주어 방송을 보면서 『도전』 말씀과 태사부님의 대도 말씀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늘 부모님께 효도하고 조상님을 잘 모셔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 자라서인지 태상종도사님의 대도 말씀을 받들면서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특히 태상종도사님의 음성이 친정아버지의 낯익은 충청도 사투리 목소리여서 친근감이 들었기에 더욱더 제 마음이 움직여 이선자 도생을 따라 인천구월도장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신단에 청수가 놓여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친정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이른 새벽에 정화수를 떠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옥황상제님께 비나이다!”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자라 왔기에 신단의 모습은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도장 포정님께서는 어머니와 같은 모습으로 반겨 주시며 “삼생의 인연으로 이곳에 온 것”이라 하였습니다.
포정님으로부터 팔관법과 여러 가지 기초 교육을 통해 129,600년을 한 주기로 우주가 인간 농사를 짓는 것과 가을 우주 대개벽기가 있음을 공부를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제가 무엇을 준비하고 실천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되어 입도를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동반자인 남편도 함께해야 되는 일이라 생각하여 도장으로 인도하였고, 남편도 입도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입도를 하여 상제님 태모님 태상종도사님 종도사님 말씀 공부와 진리 공부에 더욱 정진하며 조상선령신을 잘 받들고 태을주 기도를 통해 저의 자녀들과 이웃 친지들도 함께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수행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
어머니처럼 변화와 평안을 찾고 싶어
김혜염(24, 여) / 안산상록수도장 / 148년 음력 6월 입도
저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는 빈곤한 가정 형편에 떠밀려 외지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어머니는 서로 굳게 의지하며 살아갔습니다.
열심히 살려고 하다 보니 어머니는 아버지가 없는 생활에 지쳐만 가셨고 몸도 마음도 시들어 버렸으며 건강이 점점 나빠지면서 심지어 여러 차례 수술도 받게 되었습니다.
건강에 좋다는 보약도 많이 써 보았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습니다.
너무나 힘들고 의지할 데 없었던 우리는 동네 사람들의 인도로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3년이란 시간을 들여 열심히 정성스럽게 기도했지만, 몸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힘들고 고달픈 삶에 의지할 데라곤 기독교밖에 없었는데 그조차도 믿지 못하게 되자 소문난 점쟁이를 찾아가 영문을 물으니 어머니께서 신병을 앓는다고 해서 여러 가지 부적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어머니는 2013년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또 한 차례의 수술을 받고 아픈 몸으로 타향 생활을 하려다 보니 예전보다 신경이 더 예민해지고 화도 많이 내고 극도의 불안 증세까지 보이게 되었습니다.
아픈 사람이 자기 고통을 안다고 어머니는 남편도 자식도 다 소용없다며 작은이모에게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하였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이모는 안타까워하며 태을주를 읽으면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인터넷에서 증산도에 관한 자료를 찾았고 며칠 후 증산도 도장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증산도에 입도함과 더불어 수행 체험을 많이 하셨습니다.
도공 수행을 열심히 하여 몸과 마음에 평화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이런 변화된 모습을 보니 저도 몸과 마음을 잘 닦고 싶어졌습니다.
앞으로 입도 후에도 어머니와 함께 일심 신앙을 하면서 태을주를 많이 읽어 많은 창생을 살리는 큰 일꾼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현재 외할머니와 아버지랑 같이 살고 있는데 어머니와 합심하여 상제님 신앙을 같이할 수 있도록 정성을 들이겠습니다.
그래서 종도사님께서 강조하시는 가정도장을 이루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 가족을 보호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조상님들께 항상 감사드리며 열심히 신앙하여 보은하는 일꾼이 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감격스럽고 경외로운 진리를 만나
한금수(78, 남) / 구미원평도장 / 148년 음력 6월 입도
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 보면 초등학교 5~6학년 때에 고향인 군산시 옥구군 서수면에서 서당을 다니면서 천자문을 배웠습니다. 저의 훈장님은 ‘방’ 자 ‘남’ 자 ‘중’ 자(방남중) 선생님이셨는데 임피읍 진사님이셨다고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강증산 상제님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하여 주셨습니다.
한번은 선생님께서 「소학」, 「중용」, 「대학」을 외우시다가 김제, 원평, 금산사를 이야기해 주시면서 상제님께서 담뱃대에 담배를 태우시다가 하늘에 있는 해를 서 있어라 하시면 서 있기도 하고 달도 그러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당시 기차도 섰거라 하시면 섰다 가기도 하고 하루는 담뱃대로 불화로를 탕탕 때리면서 “이 소리는 전쟁이 나는 총소리이니라.”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는 한낱 이야기로만 들었습니다. 그 후로는 임피 술산 고봉리라는 곳에서 세상일을 하셨다고 말씀을 해 주셨는데 저는 그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김제 쪽을 보면 그 생각이 나곤 했습니다.
후일 저는 성장해서 금산사에 여러 번 놀러 갔었는데 ‘금산사 입구에는 조그마한 저수지가 있고 조금 올라가면 금산사 사찰인데 그러한 분이 이곳 어디에서 탄강하셨을까 이곳일까? 저곳일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 제가 직장을 다니고 있을 무렵 저에게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당시 군산 고등학교 수학 담당 선생님이 상처를 하고 후처를 얻었는데 후처에게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이 제 아들과 동갑내기였는데 당시 그 선생님께서 집에서 과외를 할 때 단칸방이라 부인과 아들이 있을 곳이 없어 우리 집에 놀러 오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서로 이야기 끝에 우리의 어려운 처지를 알고 제 집사람한테 나하고 같이 가 볼 곳이 있으니 한번 가 보자고 해서 우리는 따라나섰습니다.
그곳(김제 만경)에 가 보니 하나님상이라고 좌상이 있었는데 5층 높이의 금상으로 왕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어느 교인지도 모르고 우선 급하니 저에 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한동안 다녔는데 가끔 제사를 지낼 때 크게는 소 다섯 마리, 돼지 스무 마리, 제삿밥 쌀 스무 가마를 들여 며칠에 걸쳐 밥을 해서 제사를 지내곤 했습니다. 그곳의 교주님은 여자였는데 그 선생님은 김일부 선생님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잊고 생활을 하며 살던 중 5~6년 전부터 아침 예불 방송(불교방송)을 다 보고 TV채널을 돌려 보면
그러나 저는 이렇게 방송만 볼 것이 아니고 직접 그곳에 가서 보고 듣고 배우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구미원평도장의 문을 두드리고 진리 교육을 받았습니다. 구미원평도장 수호사님께 배워 보니 너무나 큰 진리에 마음이 감격스럽고 벅차고 한편으로는 떨리고 무섭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아침 수행 때 따라 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제가 직접 청수를 올리고 태을주를 소리 내어 읽으며 수행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였습니다. 열심히 교육을 받고 수행을 일심으로 하고자 해서 증산도에 입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
삶의 궁금증이 한순간에 풀리다
유창성(48, 남) / 부산덕천도장 / 148년 음력 5월 입도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 입사한 후 10여 년간 거의 매일 야근을 하고 주말에도 출근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직장 생활 초기에는 너무 바빠서 퇴근하면 가족들이 자고 있어서 얼굴도 제대로 볼 시간도 없었습니다.
힘든 업무로 과로와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종교를 가져 볼까 하는 생각도 가졌지만,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어 제 맘속에 신앙심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가끔 주말에 시간이 나면 재일 교포인 아내와 아이들에게 한국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체험할 수 있도록 유명한 사찰을 찾아갔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에는 가까운 절에 가서 기도하고 공양을 먹고 오기도 하였습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열심히만 하면 언젠가는 좋을 때가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항상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가져 왔습니다.
아이들에게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들보다 앞서야 한다고 다그치다 보니 항상 잔소리와 꾸중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과의 관계도 요즘 시대에 맞지 않게 엄격하고 무서운 아빠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가을에 해당하는 40대를 맞이하니 이때까지 살아온 삶이 보람보다는 끊임없는 욕심에 만족하지 못하는 삶이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허무감과 함께 진정한 삶에 대한 갈망과 의구심들이 저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혼자서 해결해 볼 요량으로 SNS를 통해 어설프게 배운 명상도 해 보고 자기 계발 서적들도 많이 읽어 봤지만 허전한 마음을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진정으로 ‘내가 이 세상에 무엇을 하기 위해 태어났을까?’라는 내면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 고민하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던 올해 사월 초파일 즈음에 경남 양산에 있는 고찰에 아내와 같이 다녀온 뒤, 집에서 쉬면서 TV를 보다가 우연히 <상생방송>을 시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안운산 태상종도사님의 대도 말씀을 듣는 도중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은 사람 농사를 짓기 위해서~”라는 말씀을 듣고 그동안 내가 힘들게 살아온 삶의 궁금증이 한순간에 풀리게 되었습니다. 그날 당장 상생방송 콜 센터에 전화를 걸어 『증산도 도전』과 『다이제스트 개벽』 도서 신청을 하였고,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도장에 전화하여 다음 날 도장에 방문하였습니다.
도장을 방문한 그날 포정님과 증산도 신앙 상담을 하고 즉시 21일 입도 정성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21일 입도 정성 수행을 하는 동안 사배심고, 태을주 수행을 통해서 그동안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행한 잘못을 깊이 반성하게 되었고, 앞으로 저의 삶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포정님께서 강의해 주신 우주 변화 원리, 하도낙서, 음양오행에 관한 내용들은 우리 인간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살아가면서 꼭 이해하여야 하는 진리였고 제가 그동안 고민해 왔던 궁금증들이기도 하면서 삶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기에 공부가 너무 즐거웠습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정성 수행을 한 결과, 7월 4일 입도 치성을 봉행하였습니다. 길지 않은 21일간의 증산도 체험이었지만 입도한 후에 저의 마음은 평안해졌고 가정에서도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일이 없어지다 보니 아내와 아이들까지 가족 모두의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회사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할아버지, 할머니 기제사에 참석하지 못하였는데 조상은 자손들의 씨앗이며 부모가 자식의 하나님이므로 제사를 잘 모셔야 한다는 말씀에 지금까지 내가 왜 힘들어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는 아침마다 청수를 모시고 기도를 하셨고, 어디에서 들으셨는지 저에게 절에 가면 삼성각이나 칠성각에 기도해야 좋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제 아내도 매일 아침 조그만 그릇에 청수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과거 우리 가족의 삶을 되돌아보면 조상님들과 부모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문화나 제사는 저를 증산도 신앙의 길로 안내해 주시기 위한 토대와 같았습니다.
이제는 증산도를 통해서 체계적이고 바르게 일심으로 진리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도 증산 상제님의 참진리의 길로 인도해 나갈 생각입니다. 입도를 위해 가족과 같이 도움을 주신 선배 도생님들을 본받아 저도 도장에서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석하고 봉사하도록 하겠습니다. ◎
소중한 가족을 위한 선택
신이랑(31, 여) / 인천주안도장 / 148년 음력 6월 입도
저는 지금껏 살면서 어떠한 종교도 믿지 않았습니다.
친할머니께서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셔서 저를 데리고 교회도 자주 갔었는데 저는 전혀 믿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제 주위에 많은 사람이 다양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저는 종교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저희 어머니께서 증산도에 입도하시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계속해서 증산도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개벽에 관한 이야기가 무섭기도 하고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라 믿기 어려웠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저는 원래부터 종교에 관한 관심도 없었고 무언가를 믿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에 그리고 그 당시에는 제 미래가 더 중요했기에 어머니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께서 하도 태을주나 운장주의 중요성을 강조하셔서 그 주문들은 외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 가서 혼자 생활을 하다 보니 가족들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한국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낼 때는 어른들 말씀 특히 어머니의 말씀보다는 저 스스로의 판단이 더 바르다고 생각했었는데 타국에서 멀리 떨어져 혼자가 되니 어른들 말씀, 어머니의 말씀들이 하나같이 틀린 게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저는 가정을 이루고 천사 같은 딸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보다 더 소중하고 지켜야 할 아이가 생겨나니 문득 개벽 그리고 증산도가 생각났습니다.
어머니께서 항상 태을주를 들려주라고 하셔서 아기에게 태을주를 읽어 주고 틀어 주었습니다. 오래전에 외웠던 주문임에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한국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짐을 챙겨서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머니께서 더욱 적극적으로 제가 왜 증산도를 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얘기해 주셨고 저도 계속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 덕분에 저희 조상님께 천도 치성을 해 드리게 되었습니다. 천도 치성에 참석을 해 보니 조상님을 모시고 상제님을 모시는 것이 너무 좋게 와닿았습니다. 이런 제사 문화, 조상님을 모시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입도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증산도 진리 공부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제가 부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제 목숨보다 소중한 제 딸, 사랑하는 가족들, 친구들을 꼭 살리고 싶고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정말 많이 부족하고 한없이 작은 존재이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정성 들여 수행하고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환하게 밝아진나의 인생
손예진(18, 여) / 대구대명도장 / 148년 음력 6월 입도
저는 출생 때부터 미숙아로 태어나 인큐베이터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 때문에 부모님께서는 많이 힘들어하셨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아낌없는 사랑으로 저는 잘 자랄 수 있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세상은 항상 밝고 힘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일곱 살 되던 해 인생이 항상 즐거운 것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학교 폭력을 가한 적도 있고, 제가 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바쁜 일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진 저는 게임을 자주 하였고 게임 중독에 걸려 어머니 속을 많이 썩힌 적도 있습니다.
중학생 때는 열심히 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대인 관계를 좋게 가졌습니다.
하지만 중2 때 어머니께서 말기 암으로 투병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후로 인생이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성적은 나날이 떨어지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친구들과도 싸우면서 연을 끊게 되고 공부를 멀리하며 일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생활하면서 고1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고 세상이 부질없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았고 선생님께 대들기도 했으며 잘못을 하고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인품이 망가졌습니다.
사람을 못 믿게 되고 심적으로 힘든데 털어놓을 곳은 없고, 가족이라곤 언니 하나가 있으나 항상 싸우고 너무 힘들었기에 병원에 다니면서 약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고 살아가는데 고2 담임이신 김미순 선생님께서 제 인생을 밝혀 주셨습니다.
저를 증산도로 인도해 주시고 진리를 가르쳐 주시면서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무신론자였던 저는 처음에는 의아해했고 몇 번 따라 하고서 거절하려고 하였으나 105배례를 하고 종도사님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이 많이 변했고 이제는 진리를 스스로 알고 싶어할 정도로 증산도에 대한 믿음이 커졌습니다.
입도식은 저의 생일날에 하는데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로 경건하게 입도식을 하고 훌륭한 도생이 되어 큰 일꾼이 되겠습니다. 보은! ◎
진정한 증산도 사람이 되는 길
한민송(15, 여) / 대구복현도장 / 148년 음력 6월 입도
어머니와 함께 처음 도장에 나왔을 때 신기함과 새로움이 가득하였습니다.
이제는 어머니와 같이 청수도 모시고 태을주 수행을 하는 증산도가 생활이 되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상생방송 청소년 기자단’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의 진짜 역사 뿌리인 환국과 국통맥을 알게 되었고 관심이 생겼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대구 청포 연합 토요 치성에 가게 되었습니다.
초반에는 치성이 길기만 하였는데 배례하고 치성 의전을 보는 것도 점점 익숙해지면서 치성이 짧은 것처럼 느껴지고 진리 공부도 재미있어졌습니다.
대전도 여러 번 다녀오다 보니 처음엔 신기하였던 태을궁도 점점 익숙해지고 도장에 오면 마음이 편안하였고 날마다 청수를 모시며 기도를 드리니 재미있었습니다.
종도사님과 함께 하는 성지순례도 몇 차례 다녀와서 큰 기운을 받았습니다. 입문만 하고 입도를 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입도를 해야 진정한 증산도의 사람이 되는 일이라 생각하여 입도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입도를 하고 태을궁도 자주 다녀오고 진리 공부도 열심히 하고 청수도 빠지는 일 없이 열심히 모시고 도장도 열심히 나와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를 살리고 내 주변 사람들, 그리고 지구에 사는 전 인류를 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열심히 하여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증산도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청소년들이 중요하단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린아이도 어른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가 아니라 제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느끼고 새로운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수행을 하면서 마음도 밝아지고 있고 진리 공부도 재미있고 하루하루 보람찬 생활을 하여야겠다고 생각하며 알차게 보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증산도의 일꾼이 되어 열심히 임하겠습니다. ◎
태을주를 만나 해갈된 삶의 의혹
정윤희(43, 여) / 서울강남도장 / 148년 음력 6월 입도
저는 태어나기 전부터 기구한 배경과 사연을 안고 있었던 아이였습니다. 엄마가 저를 갖고 7개월째 되었을 때 3살 오빠가 익사 사고로 죽게 되어 저는 엄마의 눈물로 배 속에서 자라게 됐습니다. 3개월 후 태아가 온전할까 하는 온 동네 사람들의 걱정과 함께 저는 태어났고, 아니나 다를까 석 달간 매일 울음소리로 인해 자정이 되도록 부모님을 잠 못 들게 하였고, 설사 잠을 자더라도 작은 소리에 다시 잠을 깨는 등 무척이나 예민해서 부모님의 걱정거리였다고 합니다.
다행히 자라면서 온갖 영특한 행동으로 귀염과 사랑을 잔뜩 받으면서 부모님의 기쁨이자 희망이 되었는데, 제가 고3 되던 해에 또 아래 남동생이 교통사고로 즉사하는 사고가 생겼습니다.
집안의 우환이 한 번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자식을 둘이나 데려갈까 싶어 어떤 절대적인 존재를 깊게 갈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신이 있다면 무얼 내게 알려 주려고 하는 걸까 하며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틈만 나면 종교 단체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마음속 답답함을 해갈하려 시도했지만, 매번 의문만 깊어지고 의구심만 더해 갔습니다. 그럴수록 더 허탈해지고 제 마음 하나 눕힐 곳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기성종교에 대해 반발이 심해지면서 수행이나 명상 쪽으로 더욱 치우치며 절대적인 존재를 찾아 헤매게 되었습니다. 또 하는 일이 잘 안되거나 온갖 고뇌에 시달릴 때는 마치 달관한 듯이 허무주의에 빠져 지내며 ‘해 봤자 소용없어’라는 식의 생각으로 세월만 보내며 지냈습니다. 제 모습에 탄식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다 2017년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상생체험 공개 세미나>에 참여하게 되면서 태을주의 신비로운 체험이나 효능에 관해 지인에게 소개를 받았습니다. 이 간단한 수행이 그렇게 효력이 크단 말인가 하고 태을주를 읊게 되면서 원리나 이치에 관해 더욱 알고자 도장을 찾게 되었습니다.
게으르고 나태한 제 성격으로 겨우겨우 21일 수행에 임하며 애쓰면서 1년을 보내게 되었고 드디어 때가 되었는지 입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도를 많이 알게 되어 기쁘게 삶에 임할 것이고, 상제님 가르침 안에서 참도를 알아 가며 평안하게 목표를 가지고 꾸준히 치성하며 노력해 보겠습니다. 귀하게 쓰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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