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상 | 실재reality를 찾아 나선 사람들(2)
[철학산책]
문계석 / 상생문화연구소 (서양철학부)
1) 실재와 생성의 대립을 해결한 다원론多元論
초기 자연철학자들의 탐구결말은 두 방식으로 가닥이 잡힌다. 하나는 정태적인 방식에서 탐구한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실재세계다. 그는 실재하는 아르케arche를 불변부동하는 일자이며, 현상의 생성은 모두 환상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는 동태적인 방식에서 역동적인 생성변화의 현상을 탐구한다. 그는 불이 법칙에 따라 변화하여 현상계의 많음이 생성 변화한다고 주장한다. 이제 불변적인 실재와 생성의 문제를 어떻게 끌러내면 좋을까 하는 것이 후속하는 철학자들의 과제로 남는다.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 사이에 일어난 갈등을 해소시킬 수 있는 혜안이 제기된다. 혜안의 하나는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와 같은 실재가 여럿이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 노선에 동참한 철학자들이 후기 자연철학자들인데, 통상 다원론자들(Pluralists)이라 부른다.
다원론자들은 참된 실재가 각각 독립적으로 여럿이 존재하는데, 이것들이 움직여 결합함으로써 생성 변화의 다양한 현상 세계가 나타난다는 견해다. 엠페도클레스Empedokles(BCE 490?~435?)와 아낙사고라스Anaxagoras(BCE 500?~428?)가 여기에 속한다.
실재의 뿌리는 4원소(물, 불, 흙, 공기) - 엠페도클레스Empedokles
엠페도클레스는 시칠리아 섬의 그리스 식민도시 아크라가스Akragas(지금은 agrigento임)에서 태어났다. 그는 매우 신비적이고 모호한 사람이었으나 높은 지위에 오른 정치가로서, 의사로서, 종교가이자 예언가로 살았으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매우 경배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생성의 현상세계를 설명함에서 있어서 엠페도클레스는 아르케가 되는 실재를 4가지라고 주장한다. 4가지를 그는 우주자연을 구성하는 근원의 뿌리라는 의미에서 리조마타rhizomata라 했는데, 차갑고 어두운 물(水), 밝고 뜨거운 불(火), 무겁고 단단한 흙(土), 가볍고 투명한 공기(風)가 그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는 이 4가지 원소를 참된 실재라고 주장하게 됐을까?
아마도 엠페도클레스는 전대의 자연철학자들이 주장한 이론을 그대로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탈레스Thales는 물을,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는 불을, 크세노파네스Xenophanes는 흙을, 아낙시메네스Anaximenes는 공기를 말했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물을 계속 쪼개 들어가면 결국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어떤 크기를 가진 지점’에 이를 것이고, 이것이 곧 파르메니데스가 제시한 근원의 실재로서 뿌리라고 했음직하다. 불, 공기, 흙도 마찬가지다.
이제 4원소들(물, 불, 흙, 공기)을 가지고 현상계의 다양하고 무수한 생성변화의 문제를 풀어내기만 하면 되는데, 문제는 4원소가 살아 있어 자체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바로 이 점에서 엠페도클레스는 4원소들을 움직이게 하는 힘의 원리, 즉 사랑(인력引力)과 미움(척력斥力)이라는 제5의 원소를 끌어들인다. 소위 작용인作用因(causa efficiens)이 그것들이다.
사랑의 힘은 같은 실재를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고, 미움의 힘은 같은 실재를 서로 밀쳐내는 힘이다. 우리 속담에 끼리끼리 모인다는 의미가 여기에도 적용이 될 성싶다. 상반적인 이 두 힘은 번갈아가며 승리를 쟁취하는 끊임없는 싸움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에 엠페도클레스는 이제 물리적인 현상세계의 다양한 생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됐다. 즉 이들 4원소들이 사랑과 미움의 힘에 의해 여러 방식으로 움직임으로써 현상계의 다양한 사물들이 이합집산離合集散이 된다는 얘기다.
그는 최초의 생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의 물음에 직면해서 근원의 4원소를 끌어들이는데, 그 과정을 4단계로 설명한다. 1기는 사랑이 주류를 이루어 같은 원소들끼리 결합하는 시기이고, 2기는 미움이 들어와 서로 다른 원소들이 섞이는 시기이고, 3기는 사랑과 미움이 팽팽하게 맞섬으로 원소들이 같은 비율로 결합하는 시기이고, 4기는 사랑이 힘이 들어와 같은 원소들끼리 결합하는 시기이다. 그럼으로써 우주자연의 창조변화는 끊임없이 일어나며, 반복적으로 순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성의 순환논리는 동양의 ‘오행론五行論’과 유사한 면이 있다. 1기는 수水 기운이 왕성하여 수장해 있는 시기(사랑의 힘에 의해 같은 것끼리 결합해 있음), 2기는 목木 기운이 왕성하여 만물이 탄생하는 시기(미움의 힘이 들어와 원소들이 섞여 생성이 일어남), 3기는 화火 기운이 왕성하여 만물이 최대로 분열한 시기(사랑과 미움이 팽팽하여 원소들이 가장 적절하게 결합해 있음), 4기는 금金 기운이 왕성하여 만물이 수렴 통일하는 시기(사랑이 들어와 같은 원소들끼리 결합함)로 볼 수 있다.
창조변화의 순환 사고는 생명체의 경우에도 꼭 같이 적용된다. 엠페도클레스는 조각글에서 ‘인간의 조상이 물고기였다’고 주장하는데, 이를 분석해 보면 그는 자연도태설과 진화론적 사고를 한 것으로 보인다. 즉 자연의 생명현상은 생명체의 각 부분들이 떨어져서 있다가 두 힘의 작용에 의해 임의대로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들이고, 지금까지 현존하는 생명체들은 일종의 자연도태를 거쳐 남아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엠페도클레스의 주장에서 우리는 물활론物活論적인 입장을 벗어나 최초로 기계론적(mechanism)인 자연관이 태동되고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사랑과 미움이라는 ‘힘’의 작용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영혼의 윤회를 믿었다. 그의 단편들 속에는 자연관, 윤리관, 종교와 예언 등이 결합되어 있는데, 그는 인간의 신체란 단순히 영혼에 의해 일시적으로 입은 옷에 불과하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생성변화는 무수한 씨앗(種子)의 혼합과 분리 - 아낙사고라스
아낙사고라스는 기원전 500년경,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이오니아Ionia 지방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귀족출신으로 돈과 명예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이를 마다하고 진리탐구에 매진한 사람이다.
그리스에 황금기를 가져왔던 정치가 페리클레스Perikles(BCE 495?~429)의 요청으로 그는 462년에 아테네Athens로 이주하여 학문연구와 시민의 교화에 몰두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오니아 사람으로서 아테네로 이주하여 경험에 근거한 합리주의 전통을 아테네에 옮겨놓았다는 점이다.
그는 천체에도 관심을 갖고 연구하여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아테네 시민이 숭배하는 태양신을 믿지 않고, “태양은 신이 아니라 불타는 돌덩어리이고, 달은 흙에 불과하다.”고 역설하여 급기야 불경죄로 기소됐다. 자신에게 닥칠 화를 피하기 위해 그는 아테네를 떠나 람프사코스Lampsakos로 가서 학원을 세우고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베풀다 그곳에서 죽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신神을 믿지 않는 불경죄는 상당히 컸던 모양이다. 아테네 시대에 불경죄에 걸려들어 죽은 철학자만 해도 둘이나 된다. 소피스트의 거장이었던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는 신을 믿지 않는 불경죄로 피소되자 도망가다가 물에 빠져 죽었고, 인류의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도 아테네가 정한 신을 믿지 않고 새로운 신을 끌어들였다는 죄로 피소되어 사형선고를 받아 독배를 마시고 70의 나이로 최후를 마쳤다.
어쨌든 자연에 대해 탐구에 열중한 아낙사고라스는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만으로는 현상의 다양한 생성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왜 그랬을까? 그의 탐구 시야는 우리가 섭취하는 영양소로 향했다. 어떻게 해서 머리카락이 아닌 살에서 머리카락이 생겨나고, 야채를 먹는데 살덩이가 생기는 것일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답변으로 아낙사고라스는 무수하게 많은 종류의 원소들이 실재함을 내세운다. 이것들을 그는 각기 다른 ‘씨앗(종자種子)’이라는 의미에서 스페르마타spermata라 불렀다.
그가 제시한 현존하는 무한수의 씨앗은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는 파르메니데스가 제시한 실재에 대한 정의, 즉 ‘실재하는 것은 없는 것(無)으로 돌아갈 수 없고, 없는 것(無)에서 실재하는 것이 생겨날 수 없다’는 주장을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아낙사고라스는 현상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종류의 생성소멸을 말할 때, 생성은 씨앗 자체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씨앗들의 혼합混合이요, 소멸은 씨앗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혼합된 씨앗들의 분리分離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생성이 씨앗들의 혼합이라면, 자연의 생명체는 먹어야 성장을 유지하게 된다. 식물은 물과 햇빛을 먹어야 살고, 인간은 쌀과 야채 과일 등을 먹고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가 쌀과 야채 과일 등을 먹으면 살, 뼈, 피, 머리카락 등이 생겨난다. 왜 그럴까? 여기에서 아낙사고라스는 ‘모든 것 속에 모든 것들이 들어있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우리가 먹는 과일이나 야채에도 살의 씨앗, 뼈의 씨앗, 피의 씨앗, 머리카락의 씨앗 등이 모두 들어 있고, 이것들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얘기다. 다만 과일이라 부르는 까닭은 과일의 씨앗이, 야채라 부르는 것은 야채의 씨앗이 가장 우세하게 들어 있어서이고, 우리의 하얀 피부에는 하양의 씨앗이, 검은 피부에는 검음의 씨앗이 우세하게 들어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다.
무수한 씨앗들의 혼합과 분리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가, 우연적으로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어떤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가? 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아낙사고라스는 철학사에 길이 빛날 탁월한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다. 바로 정신(nous)이란 개념이 그것이다. 이 정신은 우주자연을 총체적으로 주재하여 조화와 질서를 가져오는 절대자의 정신쯤으로 볼 수 있다.
아낙사고라스는 자연세계의 생성이 정말 질서 있고 조화롭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직관한 것으로 보인다. 질서와 조화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바로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정신은 무수하게 많은 씨앗을 질서 있고 조화롭게 결합하고 분리하는 힘의 원천이요, 운동의 원인인 되는 셈이다. 요컨대 우리가 학교를 향해 걸어가는 것은 발과 다리를 구성하고 있는 물리적인 원소들이 스스로 움직여서가 아니라 수업을 들어야겠다는 목적으로서의 원인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은 생성에 있어서 운동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질서와 조화의 원리가 된다.
2) 유물론의 원조, 고전적인 원자론原子論
우주자연의 실재에 대해 가장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사유한 또 다른 방식의 다원론이 등장한다. 그리스 북부 압델라 출신의 레우키포스Leukippos(BCE 440년 무렵)가 창시했고, 그의 제자 데모크리토스Demokritos(BCE 460?~370?)가 완성하게 된 이론이다. 이들을 서양 철학사에서는 고전적인 원자론(atomism)이라 부른다.
원자론은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즉 우주자연에는 물질적인 원자原子와 비물질적인 공허空虛만을 참되게 실재하는 것으로 주장한다. 우주자연의 다양한 사물들은 무수하게 많은 원자들이 필연(ananhkē)으로 인해 기계적으로 운동하여 이루어진다는 얘기다. 이러한 사상은 근대 여러 학문 분야에 등장하는 환원주의還元主義(reductionism)와 기계론機械論(mechanism)적 세계관의 효시가 되었고, 철학 분야에서 마르크스(K. Marks)의 극단적인 유물론唯物論(materialism)을 태동시켰다.
물질을 무한히 쪼개면 결국 무엇이 남을까 -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
앞서 아낙사고라스는 생성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생명을 가진 것을 경험적으로 분석해서 각기 다른 무한수의 씨앗이 실재함을 주장했다. 그러나 레우키포스는 다른 탐구방식을 제시한다. 그것은 크기를 가진 현상의 사물을 무한히 쪼개 보는 것이다.
아무리 견고하게 지은 건축물도 세월이 가면 부서지고, 아무리 단단한 바윗덩어리도 충격을 가하면 쪼개지고, 최고의 강철도 잘라진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 안에 부서지고 쪼개지고 잘려질 수 있는 틈새가 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미세한 것이든, 단단한 것이든 틈새가 있으면 부서지고 쪼개지고 잘라진다는 얘기다. 역으로 말해볼 때 틈새가 없으면 결코 부서지거나 쪼개지거나 잘라질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레우키포스는 사물을 쪼개고 또 쪼개 보았을 것이다. 쪼개는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망치를 가지고 실제로 쪼개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사유를 통해 쪼개는 것이다. 실제로 쪼개 보니 미세한 먼지처럼 잘게 쪼개졌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쪼갤 수 없으니까 ‘사유를 통해서 논리적으로’ 쪼갤 수밖에 없게 된다. 레우키포스는 사유를 통해 무한대로 쪼개 보니 결국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지점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지점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그는 불가분적이고 불멸하는 물질적인 원자라고 했다. 원자(atoma) 개념은 그리스어로 ‘없다’는 의미를 가진 ‘a’와 ‘나누다’는 뜻의 ‘toma’가 결합하여 나온 합성어로 어떤 방식으로든 ‘나눌 수 없다는 것’, 즉 불가분적不可分的인 실재란 뜻이다.
원자는 ‘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실재가 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세 측면에서 그 특성을 말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원자가 더 이상 쪼갤 틈이 없는 물질의 최소 단위가 된다는 점이다. 이는 파르메니데스가 제시한 실재 개념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쪼갤 틈이 있으면 더 쪼개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2500여 년이 지난 현대과학에서는 원자를 더 쪼개기 시작했다. 원자를 더 쪼개서 양성자, 중성자, 전자를 분리해 냈고, 더 나아가 광자, 쿼크 등을 구분해 냈다.
다른 하나는 고대 기하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크기를 갖는 물질을 무한히 쪼개도 결국엔 크기를 가진 최소 단위가 실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만일 크기가 없어질 정도로 쪼개버렸다면,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전환됐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불가하다. ‘없는 것’을 무한히 모아 본다 하더라도 ‘있는 것’은 나올 수 없듯이, 크기가 없는 것을 무한히 모아도 크기를 가진 것은 결코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대 기하학의 공리公理에서 크기를 가진 선분線分은 아무리 분할되어도 점點이 될 수 없고, 역으로 크기가 없는 점을 아무리 이어도 크기를 가진 선분이 나올 수 없다는 것과 꼭 같은 이치이다.
마지막은 생성 변화하는 물리적인 세계를 관찰하여 그 결과의 부당성을 들춰내는 것이다. 만일 물질적인 최소 단위가 되는 원자가 없다면, 생성하는 것은 ‘없는 것(無)’으로부터 생겨 나올 것이고, ‘있는 것’은 또한 ‘없는 것’으로 파괴된다. 그렇게 되면 자연세계의 전체는, 언젠가는 없는 것에서 생겨난 물질들로 꽉 차 있을 수 있거나, 모두가 없는 것으로 파괴되어 텅 비어 있을 수 있다.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하다.
원자에 대한 이러한 논증으로부터 “무(無)로부터 어떤 것도 생겨나지 않고, 무로 파괴되지 않는다.”는 원자론의 기본 공리가 설정된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자연세계 전체를 양화量化하여 정의하는 근대의 물리학적 세계관이 구축되는데, 기본적으로 우주자연 전체의 질량은 증가하거나 감소될 수 없다는 “질량불변의 법칙(law of conservation of mass)”이 그것이다.
텅 빈 공간 개념의 출현
물질을 이루는 근원적인 실재가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원자여야 한다면, 이제 다시 물음을 던져 보자. 물질이 쪼개지도록 하는 틈새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을 레우키포스는 비물질적인 “공허”(kenon)라 불렀다. 공허는 물질적인 그 어떤 것도 아닌 텅 빈 공간(empty)을 뜻한다. 그가 공허를 도입하게 된 것은, 파르메니데스가 ‘없는 것(無)도 있다’고 했을 때, ‘없는 것’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만일 물질성이 완전히 배제된 텅 빈 공허가 없다면 현상계를 점유하고 있는 물체의 위치란 없을 것이고, 위치 이동 또한 불가능할 것이다.
공간 개념은 후에 루크레티우스Lucretius(BCE 96~55)가 자연에 대해 시적으로 작성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라는 저술에서 대략 네 가지의 뜻으로 확대하여 사용됐다. 물체와의 관계에서 공간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 두 가지이고, 공간 자체에 대한 정의가 두 가지이다. 전자의 두 가지는 물체가 장소를 점유하거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움직여갈 수 있다는 의미에서 공간, 즉 물체에 의해 점유된 장소(locus; location-추상적 의미의 공간 개념)와 아직 점유되지 않아 물체가 뻗어 나갈 수 있는 운동 공간(spatium; space)이다. 후자의 두 가지는 내적으로 물체의 모든 속성이 완전히 배제된 의미에서 텅 빈 허공(inane; empty)과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무한 공간(vacuum; void)이다.
그러므로 원자론은 우주자연에 영구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란 오직 두 종류, 물질적인 원자들과 비물질적인 텅 빈 공간뿐이라는 얘기다. 원자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초기 탈레스로부터 제기된 자연에 대한 영원한 실재와 이를 근원으로 하여 변화무쌍한 현상계의 생성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 기반이 마련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주 끝에 서서 밖으로 창을 던진 사나이
“帝曰(제왈) 爾五加(이오가) 众(중)아 蒼蒼(창창)이 非天(비천)이며 玄玄(현현)이 非天(비천)이라
천제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오가의 백성들아! 저 푸르고 푸른 것이 하늘이 아니며, 저 아득하고 아득한 것도 하늘이 아니니라.
天(천)은 無形質(무형질)하며 無端倪(무단예)하며 無上下四方(무상하사방)하고
하늘은 모양과 성질이 없고, 처음과 끝도 없으며, 위아래와 동서남북도 없으며,
虛虛空空(허허공공)하야 無不在(무부재)하며 無不容(무불용)이니라.
안으로 텅 비어 있고 밖으로도 무한히 텅 비어 있어서 존재하지 않음이 없고 허용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 『환단고기桓檀古記』「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삼일신고三一神誥 중에서-
어릴 적 시골집 마당에 밀집멍석을 깔고 누워 밤하늘의 유성우를 감상하면서 저 별들까지 얼마나 멀고 또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고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이러한 의문은 곧 ‘우주가 무한無限할까 유한有限할까?’ 하는 물음으로 집약된다. 결과적으로 볼 때, 우주가 너무 커서 무한하다는 견해도 있을 것이고, 아무리 크더라도 유한하다는 주장도 있을 것이다. 고대 원자론자들은 어떤 주장을 내놓았을까?
고대 원자론은 우주가 무한하다고 강변한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원자론에 의하면, 우주에는 크기가 다르고 모양이 다양한 무한수無限數의 원자들과 공간뿐이다. 원자들은 특성상 각기 투과될 수 없는 동질적인 것이고 공간은 그 특성에 있어서 무조건 허용만 하는 항상 투과적인 것이다. 원자들은 그 수에 있어서 한계가 없는 무한수이다. 따라서 무한수의 원자들을 담고 있는 그릇, 즉 무조건 허용만 하는 절대적으로 텅 빈 공간은 역시 무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한 우주를 부정하고 유한 우주를 내세운 이들이 있다. 아테네 최고의 철학자 플라톤은 유한 우주를 제시한다. 그는 『티마이오스Timaios』 편에서 천구가 유한하다는 전제하에 창조주 데미우르고스Demiourgos 신神이 우주세계의 생성에 어떻게 관여하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유한 천구론을 토대로 해서 프톨레마이오스Klaudios Ptolemaeos(85~165)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지구의 경도를 360도로 나누고 그것을 중심으로 천구가 돌고 있다는 “천동설”을 주장하게 된다.
플라톤의 유한 우주론에 반기를 든 학자(철학자이자 수학자)가 등장한다. 바로 타렌툼 출신 아르키타스Archytas(BCE 428~347)이다. 그는 처음으로 유한 천구의 한계를 넘어서 무엇이 있을까 하고 의문을 던진다. 만일 누군가가 유한 천구의 끝에서 밖으로 팔을 뻗으면 팔이 어떻게 될까? 그것은 팔이 뻗어나가든가 그렇지 않든가 할 것이다. 이는 우주가 무한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무한 우주에 대한 원자론의 사고는 후에 사모스에서 태어나 아테네에서 활동했던 에피쿠로스Epicouros(BCE 341~271)에게 전수되고 그의 제자 루크레티우스에 의해 귀류법으로 입증된다. 만일 우주가 유한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우주는 어떤 한계점(끝점)을 가질 것이다. 한계점은 다른 어떤 것에 대치되고 있는 경계점이다. 경계점에 대치되고 있는 것은 물질적인 원자 아니면 텅 빈 공간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것들 모두 우주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주는 어떠한 한계도 갖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우주의 어느 지점에 서 있든 상관없이, 모든 방향으로 꼭 그만큼의 무한이 있을 뿐이다.
루크레티우스는 우주가 무한하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창을 던질 때의 예를 들어 한층 선명하게 제시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우주의 가장 극단적인 끝점까지 접근해서 전투용 창을 강한 힘으로 내던진다면, 그 창은 멀리 날아가든지 아니면 날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멈추게 하는 어떤 것이 있든지 둘 중의 하나를 필연적으로 인정하고 선택해야 한다. 여기서 창이 앞으로 날아간다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 있다는 것이고, 멈춘다면 날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물질적인 무엇이 있음을 입증한다. 그러므로 우주는 텅 빈 공간에 원자들로 이루어진 물질적인 것으로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것이다.
세상은 어떻게 창조된 것일까?
大始(대시)에 上下四方(상하사방)이 曾未見暗黑(증미견암흑)하고 古徃今來(고왕금래)에 只一光明矣(지일광명의)러라
태초에 위아래 동서남북 사방에는 일찍이 암흑이 보이지 않고 오직 한 광명뿐이었다.
自上界(자상계)로 却有三神(각유상신)하시니 卽一上帝(즉일상제)시오
천상세계에 삼신이 계시니 즉 한분 상제님이시다.
主体則爲一神(주체즉위일신)이시니 非各有神也(비각유신야)시며 作用則三神也(작용즉삼신야)시니라
주체는 일신이시나 각기 따로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작용으로 보면 삼신이시니라.
三神(삼신)이 有引出萬物(유인출만물)하시며 統治全世界之無量智能(통치전세계지무량지능)하사 不見其形軆(불현기형체)시니라
삼신께서 만물을 이끌어내시고,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능력으로 온 세계를 다스리시나 그 형체를 나타내지 않으신다.
- 『환단고기桓檀古記』「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중에서 -
고대 원자론에 의하면 끝없는 공간에 무한 수의 원자들이 실재한다. 원자들 자체는 모두가 아무런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다. 그 크기는 극미한 것으로부터 커다란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전적으로 동질적인 존재여서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다. 그 형태는 둥근 모양, 네모진 모양, 세모진 모양, 가시같이 생긴 모양, 구멍 난 모양 등 별의별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 원자들로부터 현상 세계의 변화무쌍한 생성이 어떻게 이뤄지는가를 설명해야 하겠는데, 사물들의 창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 원자들을 움직여 서로 결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자들이 움직여야 할 것이다. 이 원자들을 움직이도록 하는 원인(운동인運動因)은 무엇일까? 원자 자체가 살아서 스스로 움직이는가 아니면 원자 이외의 다른 힘(무한한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이 있어 이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일까?
원자론에 의하면 원자들은 무한 공간 속에서 애초부터 자동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항상 움직인다. 원자들을 움직이게 할 원인 같은 것은 따로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anangkē) 움직임뿐이라는 얘기다. 그러한 원자의 운동속도는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다고 한다. 왜냐하면 텅 빈 공간을 이동하는 빛은 복합체(원자들의 결합체)이므로 내적으로 방해를 받지만, 원자는 단순체이므로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빛보다 빠른 원자의 속도는 더 빠르거나 더 느리지 않고 항상 일정하다.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속도로, 또한 기계적으로 일정하게 움직이는 무한 수의 원자들은 서로 충돌하게 마련이다. 충돌할 때 어떤 것들은 서로 결합하고 어떤 것들은 투사각에 따라 튕겨나간다. 서로 결합한다 하더라도 원자의 속도가 느려지는 것이 아니고 원래의 속도대로 그 자리에서 움직인다. 바이브레이션 같은 운동이다. 그리고 튕겨나간 것들은 또 다른 원자들과 충돌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당구대 위의 당구공처럼 뉴톤의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를 상기시킨다.
충돌할 때 어떤 것들은 “우연적으로(forte)” 서로 결합하여 개별적인 사물들이 창조된다. 원자들의 모양과 크기가 매우 다양하고, 이것들의 배열 방식이 무수하게 많기 때문에,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물들이 우연적으로 출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작도 끝도 없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원자들은 우연적으로 서로 결합하여 거대한 우주를 형성하고, 지구를 구성하며, 그 밖의 하늘과 바다, 온갖 종류의 무기물과 수없이 많은 종류의 생명체를 이룬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다 일정하게 움직이는 원자들이 우연히 만나 결합하여 생겨난 것들이다. 지구상에서 하루에도 수천 가지의 생명체가 탄생하고 없어지는 것도 원자들이 우연히 만나 얼마 동안 결합되었다가 해체되는 현상이라는 얘기다.
인간의 고귀한 생명체도 원자들이 우연히 만나 탄생하게 되는 것일까? 여타의 동식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자자손손 대를 이어서 지속되어 가는 까닭은 무엇인가? 원자론에 의하면, 현재 존재하는 사물들은 원자들이 생존에 적합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아직까지 존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과거에는 ‘머리는 소에 몸은 사람(牛頭人身), ‘인어人魚’와 같은 기상천외奇想天外하게 생긴 것들이 있었으나 생존에 적합하지 못하여 사멸하고 없다는 얘기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근대에 출현한 다윈C. Darwin의 생물학적 진화론이 태동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영혼(마음)도 미세한 원자라는 주장 - 유물론의 원조
“사람에게는 혼魂과 넋魄이 있어 혼은 하늘에 올라가 신神이 되어 제사를 받다가 4대가 지나면 영靈도 되고 혹 선仙도 되며, 넋은 땅으로 돌아가 4대가 지나면 귀鬼가 되느니라.” (『道典』4:118:2-4)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인간이 죽으면 시신이 땅에 묻혀 썩어 흩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일까, 아니면 종말론에서 통용되는 휴거처럼, 자신이 살았던 세계와는 다른 사후세계(신의 세계)로 넘어가(거듭 태어나) 다시 살아가는 것일까? 만일 인간의 신체가 죽어 없어져도 사후세계로 들어가 다시 살게 된다면 인간에게는 결코 사멸하지 않는 그 무엇이 실재해야 한다. 이것을 통상적으로 인간의 영혼靈魂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원자론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마음)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영혼은 단순히 물질적인 원자 내지는 원자들의 파생물, 즉 원자들이 공간 속에서 움직이면서 부딪혀 발생하는 일시적인 심적 현상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원자와 텅 빈 공간 이외에 신의 세계나 영혼이 따로 거주하는 사후세계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원자론에서 본다면 태초부터 지속돼 온 인간의 도덕적 가치나 어떤 종교적 행위는 모두 한낱 맹목적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엄청난 주장은 어떻게 해서 나오는 것일까?
우선 인간이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 발생하는 감각에 대해 검토해 보자. 인간의 감각은 다섯 종류, 즉 눈을 통해 색을 구분하는 시각視覺, 코를 통해 냄새를 맡는 후각嗅覺, 귀를 통해 소리를 듣는 청각聽覺, 혀를 통해 맛을 느끼는 미각味覺, 피부의 접촉을 통해 느끼는 촉각觸覺이다. 그런데 원자들은 각각 크기와 모양이 다를 뿐 자체로 아무런 성질도 없다. 즉 딱딱하거나 부드러운 것도 아니고, 알록달록한 색깔도 없고, 어떤 맛을 내는 것도 아니고, 냄새를 풍기는 것도 아니고, 소리를 내는 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오감을 통한 감각적 표상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원자론에 의하면 사물의 딱딱함은 원자들이 밀접하게 결합했기 때문이며, 매끈매끈함은 동글동글한 원자들이 결합했기 때문이며, 까칠까칠함은 뾰쪽뾰쪽한 원자들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맛이나 색깔, 냄새 등도 그렇다. 이런 느낌이 형성되는 과정은 사물을 보고서 색깔을 느끼는 것을 예로 삼을 수 있다. 사물들이 다양한 색으로 보이는 것은 햇빛 원자가 사물에 충돌하여 ‘에이돌라eidola’라는 일종의 미세한 원자들이 끊임없이 떨어져 나와서 우리의 감각 기관에 충돌하고, 이것이 신경계를 통해 뇌에 전달되어 표상이 생겨나서 감각지각이 형성된다. 감각지각은 우리의 인식주관으로 하여금 사물이 그렇게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감각으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성질들은 인간의 인식주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견해는 서양 근대철학의 인식론이 대두하면서 체계적으로 정립된다. 동양의 불가에서도 마음의 상象을 실상과 허상으로 구분하고, 오관을 통해 들어오는 상은 모두 인식주관이 만든 허상으로 취급된다.
그럼 이러저러한 감각지각이 생겨나게 되는 인식주관은 실재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원자론에 의하면 인식주관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요소로 형성된 심적 현상이다. 즉 인간의 영혼은 아주 미세하고 정교한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감각지각의 심적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외부의 자극에 의해 이 원자들이 활동함으로써 생기는 부수적인 현상이라는 얘기다. 원자들이 결합하여 사람이 생겨날 적에 영혼도 생겨나고 의식도 생겨나며, 사람이 죽을 때 원자들이 해체되어 영혼도 의식도 없어진다. 즉 사람이 죽으면 심적 현상이나 여타의 정신적인 모든 것들이 감쪽같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가 바로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유물론적 입장이다.
따라서 영혼을 구성했던 원자들은 신체와 더불어 흩어져 다른 사물들을 구성하는 것에로 들어가기 때문에 사람은 죽은 다음의 세상에 대하여 생각할 필요가 없다. 설혹 불멸의 신들이 있다 하더라도 죽음의 세상을 간섭하거나 죽은 자들을 벌주는 일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원자론자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당면하게 되는 어떤 두려움이나 곤경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본성과 자연의 변화 법칙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통찰하는 것뿐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자연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비스런 현상은 신들이 인간을 벌주기 위해서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불변적인 법칙에 따라서 발생하는 자연 현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3) 원자론에서 출범한 현대의 물리과학
2400여 년 전에 태동한 원자론은 후에 에피쿠로스Epikuros와 로마 시대의 루크레티우스Lukretius에게로 이어지고, 17세기경에 고전 물리학의 체계자라 불리는 뉴톤I. Neuton에게 전해져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탐구의 철학적 기초를 제공한다. 특히 물질의 기계론적 자연관은 근대에 새롭게 대두하는 물리학, 생물학, 화학, 심지어는 정신과학 등에 이르기까지 학문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환원주의에 바탕을 둔 기계론적 패러다임
근대의 과학자들은 고전적인 원자를 복합체로 보고 이를 더 쪼개기 시작한다. 그 결과 그들은 전자, 중성자, 핵의 개념을 도입하게 된다. 즉 그들은 원자보다 더 작은 소립자 혹은 ‘쿼크quark’들을 자연의 물리적인 실재로 보고, 이것들이 기계적으로 이합집산하여 다양한 사물의 생성변화가 일어난다고 보았다.
입자들의 운동은 외부에서 주어진다. 외부의 충격은 변화의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얘기다. 자연의 생성변화는 ‘원인에 의한 입자들의 운동 결과(casuality)’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근대의 과학자들은 자연 세계의 생성변화가 과학적 방법, 즉 인과법칙에 의해 정확히 이해되고 조직될 수 있다고 믿었다. 심지어 사람의 의식 활동, 사회 제도, 또는 문화적인 행태들조차도 소립자들로 이뤄진 물질의 기계적인 운동의 결과로 이해하기에 이른다. 이를 토대로 하여 미래가 결정론적으로 예측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었던 것이다.
그럼 인과법칙에 따라 전개되는 입자들의 운동 방식은 어떻게 측정 가능한가? 이에 대해서 근대 물리학자들은 입자들의 ‘위치’와 ‘속도’라는 용어를 도입한다. 입자의 ‘위치’와 ‘속도’ 개념은 자연 세계가 자동 장치의 기계와 같은 자율성이 없는 운동방식을 전제한다. 여기에서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관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기계론의 패러다임에 의하면, A점에서 B점에로 이동하는 입자의 운동은 ‘가역적可逆的’이다. 철학의 용어에서 통용되고 있는 환원주의還元主義가 여기에 적용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체는 부분으로 나뉘고, 부분들의 총합은 전체로 환원된다는 것은 입자의 운동이 가역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움직이는 입자들 전체의 총합은 증감이 없다. “질량불변의 법칙”이니 “에너지 보존 법칙” 등은 이를 근거로 해서 나온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고전적인 환원주의적 전통을 이어받은 기계론적 세계관은, 모든 물질적인 것들이 ‘가역적’이고 이들의 운동 또한 기계적인 움직임을 전제한다는 의미에서, 자연에 대한 결정론적인 설명 방식뿐만 아니라 현대의 기계론적인 기술문명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환원주의와 기계론이 결합하여 출범한 기술문명은 인류가 물질적인 편의를 위해 과학기술을 자연 세계의 것들에 적용하여 자연물을 새롭게 임의대로 개조한 결과를 낳는다. 기술문명의 진보는 과학기술에 의해 ‘덜 질서 있는’ 자연 세계를 ‘더 질서 있는’ 물리적인 환경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술문명을 현대인들은 자연의 원래상태에서 존재했던 가치보다 더 부가된 가치, 더 우수한 구조, 그래서 더 높은 질서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환원주의적 기계론에 반기를 든 현대 물리학
그러나 금세기에 접어들어 환원주의적 바탕 위에 성립된 입자들의 ‘위치’와 ‘속도’라는 기계학적 용어가 검증의 대상으로 부각되면서 17세기 뉴턴 물리학이 전적으로 타당한가의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현대 물리학자들은 이러한 ‘미시적 세계의 단순성’으로 파고들어 물질의 참된 실재로서의 입자들을 찾아 이를 분리하여 측정하려는 시도에 들어갔다. 이런 시도의 근본적인 의도는 궁극적인 실재가 되는 소립자 세계의 기본 단위들의 존재와 그 운동을 명백히 규정하고 인식하기만 한다면, 이들로부터 거시세계의 사물들이 어떻게 이뤄지고 변화되는지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기대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각기 외로운 궤적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인다는 입자는 ‘파속(wave packet)’의 순수 운동을 관념화한 것이었고, 또한 미시적인 단순 실재의 입자들로부터 거시세계의 다양한 사물들이 충분하게 설명될 수 있다는 예측은 빗나갔기 때문이다.
소립자 세계의 입자들의 규정과 그 운동의 측정에 관련하여, 금세기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Heisenberg는 “원자 입자의 본성에서 볼 때 관측이라는 바로 그 행위가 관찰 대상을 고정시키고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간섭하고 변동을 가하는 것이라서 원자를 이루는 입자들을 객관적으로 관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주어진 순간에 물체의 ‘속도’와 ‘위치’를 동시에 측정할 수도 인식할 수도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러셀B. Russel도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안다면 우리 자신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를 알 수 없으며, 우리가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를 알려면 우리 자신의 위치를 말할 수 없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이론적 내용이 바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이다.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미시세계의 입자들에 대한 관측에 직면할 때마다 정밀한 측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근원의 실재인 입자들의 위치와 운동으로부터 거시세계의 사물들이 과학적 방법에 의해 조직되고 이해되며 또한 예측되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됨을 보여준다.
게다가 전통적인 환원주의 사고방식이 검증될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즉 미시적인 입자들의 존재 위치와 속도가 정확히 인식되고 정립된다 하더라도 이들로부터 구성된 거시세계의 생성 변화하는 사물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시세계의 개별적인 사물은 복잡하게 구성되고 조직되어 있으나 하나의 단일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시세계의 개별적인 사물은 수백만 개의 원자나 아원자 또는 쿼크quark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이들과는 다른 일정한 개체이다. 이들 각각의 개체는 소립자들로 환원시켜 설명될 수 없는 자신의 고유한 성질을 가진다. 특히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각각의 생명체의 경우가 그렇다. 생명체들은 단순히 정태적으로 파악된 실재로서의 소립자들의 구성 요소들이나 그 조합으로부터 나온 것들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복잡하게 구성된 동태적인 존재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지적들은 환원주의적 태도를 기반으로 성립하는 고전 물리학적 세계관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자연세계란 생명이 없는 입자들에 의해 짜 맞춰진 것으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외부적인 힘에 의해 양적으로만 운동하는 물질로 이뤄져 있지도 않으며, 그리고 고정된 힘이 정확하게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다른 고정된 힘에 대하여 작용한다고 보는 결정론적인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 물리학의 대표로 보이는 뉴턴 물리학은 살아 있는 생명체의 경우가 보여주는 자기 조직적이고 구성적인 어떤 메카니즘 체계나,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에너지 환경에 대하여서는 결국 부적합한 패러다임이다.
그러므로 고전 물리학의 기계론적인 환원주의가 보여 주었던 자연의 안정성은 처음부터 환상이었으며, 인간이 자연계를 조정하여 기술문명을 발전시키는 데에 진리의 틀로서 환원주의적 자연관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명백히 그릇된 것으로 판정난다.
엔트로피 세계관
본Max Born이 말했듯이,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우주는 더욱더 오리무중이고, 모든 것이 제멋대로 춤추는 형상이다.” 복잡하게 조직되고 구성된 거시세계의 현상들은 고립된 물질의 실재적인 성분이나 또는 고정된 미시적 구성 요소들의 기계적인 이합집산으로 취급될 수 없다. 우주자연의 삼라만상은 기계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흐름의 일부이며, 각각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비환원적으로 변화하는 물질과 에너지 흐름의 결과이다.
그래서 환원론에 바탕을 둔 기계론적 세계관을 탈출하여 거시적 가치체계의 질서 변화를 대상으로 삼는 새로운 비환원적인 자연관이 등장하게 된다. 이는 19세기 열역학이 발달하면서 독일의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에 의해 창안된 용어로, 열역학 ‘제2법칙’ 또는 ‘엔트로피 법칙(The Entropy Law)’이라 불리우는 패러다임이다.
‘엔트로피 법칙’의 세계관은 물질로 이루어진 거시적 존재의 가치질서를 문제 삼는다. 자연의 사물들이 질량을 가지는 한 에너지로 환산되고, 우주의 총 질량이 불변적이라면 에너지의 총량 또한 불변적이기 때문에, 엔트로피 법칙의 세계관은 거시세계의 역동적인 생성변화란 단순히 각각의 에너지가 새로운 형태로 끊임없이 변형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환원론을 기반으로 하는 17세기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관과는 대조적으로 엔트로피 법칙의 세계관은 ‘비가역성’ 또는 ‘지향성’을 도입한다. 지구라는 고립된 체계에서 볼 때 현재의 거시적인 상태는 동일하거나 보다 높은 엔트로피를, 과거의 상태는 현재보다 보다 낮은 엔트로피를 산출하고, 그 반대의 경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자연의 역사를 물질과 에너지의 흐름으로 파악한다. 우주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생성변화 과정은 물질과 에너지의 흐름으로 환원되며, 에너지의 흐름이 항상 농도가 높은 것으로부터 낮은 것으로 흐르기 때문에 ‘비가역적’(irreversible)이다. 에너지 흐름의 ‘비가역적’ 과정들은 계속적인 엔트로피를 산출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세계의 전체적인 존재질서의 파괴와 에너지의 총체적인 분산은 점점 증가될 것이다.
그러므로 ‘엔트로피 법칙’은 고도의 기술 문명을 이룩한 현대인이 지금 ‘열 사망(heat death)’의 운명에 처해 있고, 또한 앞으로의 기술 문명이 더 발전함에 따라 자연의 파괴는 물론 부존자원의 고갈을 촉진시킬 것이며, 결국 인류가 피할 수 없는 에너지 위기 및 심각한 환경오염에 직면하게 됨을 고발한다. 이것이 19세기 초에 유물론적 자연관에 토대를 두고 일어난 엔트로피 세계관이다.
유물론적 세계관
19세기에 접어들어 또한 다른 각도에서 현대 유물론이 출현하게 된다. 마르크스K. Marx의 변증법적 유물론이 그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하면, 실재하는 세계는 객관적인 사물들만 존재하고, 다른 여타의 정신적인 산물은 물질과 운동에서 파생된 것으로 부수적인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신적인 문화유산들 또한 자연의 물질적인 세계가 변화함에 따라서 진행되는 일부분이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본 원리는 대략 세 관점에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자연세계의 실재는 물질이요, 현상 세계의 다양한 변화는 이 물질적 실재의 운동으로 표현되는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자연세계는 이 물질적 실재의 운동법칙에 따라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 둘째, 자연세계의 물질적인 실재는 사람의 정신으로부터 독립하여 있는 객관적인 현실이다. 정신에 속하는 의식과 인식 주체는 단지 물질의 반영 내지 물질의 부수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정신의 발전은 곧 물질의 발전에 기인한다. 셋째, 자연세계의 발전의 법칙은 과학적으로 구명될 수 있기 때문에 객관적 진리가 인정되어야 한다. 자연세계에 대한 과학적 구명은 곧 사회의 역사적인 현실 속에서 그것을 실천(praksis)하는 일이다.
결과적으로 마르크스는 이러한 변증법적 유물론을 사회구성과 그 변화에 적용시켜 사회의 기본적인 사실이 경제 문제, 즉 생산양식과 그 분배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는 사회에 두 개의 계급을 설정하였는데, 이것에 따라서 사회의 정신활동이 좌우된다는 것이다. 하나는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이며, 다른 하나는 단순한 생산 도구에 불과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다. 이 두 계급은 자연적으로 불가피하게 충돌하며 이익을 위한 투쟁을 벌인다. 이에 따라서 역사가 창출되며 사회의 진화가 변증법적으로 진행된다.
변증법은 ‘정립(These)’, ‘반정립(Antithese)’, ‘종합(Synthese)’의 과정으로 진행되는 원리이다. 정립이란 기존의 상태나 조건으로 소유주(자본가)가 통제하는 생산체계를 말한다. 이 조건이 과도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대립자(반정립), 즉 노동자 계급이 발전하여 혁명역량으로 성장하게 된다. 결국 정립과 반정립의 갈등이 정점에 이르게 되면 새로운 계급 질서가 출현하는데, 이것이 종합이다. 이 종합에 또 다른 반정립이 성립하여 종국에 가서는 이상적 공산사회에 도달한다고 한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사회 발전의 변증법적 역사관이다.
【원자론과 근대의 물리적 실재론】
1) 실재와 생성의 대립을 해결한 다원론多元論
초기 자연철학자들의 탐구결말은 두 방식으로 가닥이 잡힌다. 하나는 정태적인 방식에서 탐구한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실재세계다. 그는 실재하는 아르케arche를 불변부동하는 일자이며, 현상의 생성은 모두 환상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는 동태적인 방식에서 역동적인 생성변화의 현상을 탐구한다. 그는 불이 법칙에 따라 변화하여 현상계의 많음이 생성 변화한다고 주장한다. 이제 불변적인 실재와 생성의 문제를 어떻게 끌러내면 좋을까 하는 것이 후속하는 철학자들의 과제로 남는다.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 사이에 일어난 갈등을 해소시킬 수 있는 혜안이 제기된다. 혜안의 하나는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와 같은 실재가 여럿이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 노선에 동참한 철학자들이 후기 자연철학자들인데, 통상 다원론자들(Pluralists)이라 부른다.
다원론자들은 참된 실재가 각각 독립적으로 여럿이 존재하는데, 이것들이 움직여 결합함으로써 생성 변화의 다양한 현상 세계가 나타난다는 견해다. 엠페도클레스Empedokles(BCE 490?~435?)와 아낙사고라스Anaxagoras(BCE 500?~428?)가 여기에 속한다.
실재의 뿌리는 4원소(물, 불, 흙, 공기) - 엠페도클레스Empedokles
엠페도클레스는 시칠리아 섬의 그리스 식민도시 아크라가스Akragas(지금은 agrigento임)에서 태어났다. 그는 매우 신비적이고 모호한 사람이었으나 높은 지위에 오른 정치가로서, 의사로서, 종교가이자 예언가로 살았으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매우 경배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생성의 현상세계를 설명함에서 있어서 엠페도클레스는 아르케가 되는 실재를 4가지라고 주장한다. 4가지를 그는 우주자연을 구성하는 근원의 뿌리라는 의미에서 리조마타rhizomata라 했는데, 차갑고 어두운 물(水), 밝고 뜨거운 불(火), 무겁고 단단한 흙(土), 가볍고 투명한 공기(風)가 그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는 이 4가지 원소를 참된 실재라고 주장하게 됐을까?
아마도 엠페도클레스는 전대의 자연철학자들이 주장한 이론을 그대로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탈레스Thales는 물을,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는 불을, 크세노파네스Xenophanes는 흙을, 아낙시메네스Anaximenes는 공기를 말했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물을 계속 쪼개 들어가면 결국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어떤 크기를 가진 지점’에 이를 것이고, 이것이 곧 파르메니데스가 제시한 근원의 실재로서 뿌리라고 했음직하다. 불, 공기, 흙도 마찬가지다.
이제 4원소들(물, 불, 흙, 공기)을 가지고 현상계의 다양하고 무수한 생성변화의 문제를 풀어내기만 하면 되는데, 문제는 4원소가 살아 있어 자체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바로 이 점에서 엠페도클레스는 4원소들을 움직이게 하는 힘의 원리, 즉 사랑(인력引力)과 미움(척력斥力)이라는 제5의 원소를 끌어들인다. 소위 작용인作用因(causa efficiens)이 그것들이다.
사랑의 힘은 같은 실재를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고, 미움의 힘은 같은 실재를 서로 밀쳐내는 힘이다. 우리 속담에 끼리끼리 모인다는 의미가 여기에도 적용이 될 성싶다. 상반적인 이 두 힘은 번갈아가며 승리를 쟁취하는 끊임없는 싸움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에 엠페도클레스는 이제 물리적인 현상세계의 다양한 생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됐다. 즉 이들 4원소들이 사랑과 미움의 힘에 의해 여러 방식으로 움직임으로써 현상계의 다양한 사물들이 이합집산離合集散이 된다는 얘기다.
그는 최초의 생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의 물음에 직면해서 근원의 4원소를 끌어들이는데, 그 과정을 4단계로 설명한다. 1기는 사랑이 주류를 이루어 같은 원소들끼리 결합하는 시기이고, 2기는 미움이 들어와 서로 다른 원소들이 섞이는 시기이고, 3기는 사랑과 미움이 팽팽하게 맞섬으로 원소들이 같은 비율로 결합하는 시기이고, 4기는 사랑이 힘이 들어와 같은 원소들끼리 결합하는 시기이다. 그럼으로써 우주자연의 창조변화는 끊임없이 일어나며, 반복적으로 순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성의 순환논리는 동양의 ‘오행론五行論’과 유사한 면이 있다. 1기는 수水 기운이 왕성하여 수장해 있는 시기(사랑의 힘에 의해 같은 것끼리 결합해 있음), 2기는 목木 기운이 왕성하여 만물이 탄생하는 시기(미움의 힘이 들어와 원소들이 섞여 생성이 일어남), 3기는 화火 기운이 왕성하여 만물이 최대로 분열한 시기(사랑과 미움이 팽팽하여 원소들이 가장 적절하게 결합해 있음), 4기는 금金 기운이 왕성하여 만물이 수렴 통일하는 시기(사랑이 들어와 같은 원소들끼리 결합함)로 볼 수 있다.
창조변화의 순환 사고는 생명체의 경우에도 꼭 같이 적용된다. 엠페도클레스는 조각글에서 ‘인간의 조상이 물고기였다’고 주장하는데, 이를 분석해 보면 그는 자연도태설과 진화론적 사고를 한 것으로 보인다. 즉 자연의 생명현상은 생명체의 각 부분들이 떨어져서 있다가 두 힘의 작용에 의해 임의대로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들이고, 지금까지 현존하는 생명체들은 일종의 자연도태를 거쳐 남아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엠페도클레스의 주장에서 우리는 물활론物活論적인 입장을 벗어나 최초로 기계론적(mechanism)인 자연관이 태동되고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사랑과 미움이라는 ‘힘’의 작용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영혼의 윤회를 믿었다. 그의 단편들 속에는 자연관, 윤리관, 종교와 예언 등이 결합되어 있는데, 그는 인간의 신체란 단순히 영혼에 의해 일시적으로 입은 옷에 불과하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생성변화는 무수한 씨앗(種子)의 혼합과 분리 - 아낙사고라스
아낙사고라스는 기원전 500년경,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이오니아Ionia 지방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귀족출신으로 돈과 명예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이를 마다하고 진리탐구에 매진한 사람이다.
그리스에 황금기를 가져왔던 정치가 페리클레스Perikles(BCE 495?~429)의 요청으로 그는 462년에 아테네Athens로 이주하여 학문연구와 시민의 교화에 몰두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오니아 사람으로서 아테네로 이주하여 경험에 근거한 합리주의 전통을 아테네에 옮겨놓았다는 점이다.
그는 천체에도 관심을 갖고 연구하여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아테네 시민이 숭배하는 태양신을 믿지 않고, “태양은 신이 아니라 불타는 돌덩어리이고, 달은 흙에 불과하다.”고 역설하여 급기야 불경죄로 기소됐다. 자신에게 닥칠 화를 피하기 위해 그는 아테네를 떠나 람프사코스Lampsakos로 가서 학원을 세우고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베풀다 그곳에서 죽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신神을 믿지 않는 불경죄는 상당히 컸던 모양이다. 아테네 시대에 불경죄에 걸려들어 죽은 철학자만 해도 둘이나 된다. 소피스트의 거장이었던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는 신을 믿지 않는 불경죄로 피소되자 도망가다가 물에 빠져 죽었고, 인류의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도 아테네가 정한 신을 믿지 않고 새로운 신을 끌어들였다는 죄로 피소되어 사형선고를 받아 독배를 마시고 70의 나이로 최후를 마쳤다.
어쨌든 자연에 대해 탐구에 열중한 아낙사고라스는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만으로는 현상의 다양한 생성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왜 그랬을까? 그의 탐구 시야는 우리가 섭취하는 영양소로 향했다. 어떻게 해서 머리카락이 아닌 살에서 머리카락이 생겨나고, 야채를 먹는데 살덩이가 생기는 것일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답변으로 아낙사고라스는 무수하게 많은 종류의 원소들이 실재함을 내세운다. 이것들을 그는 각기 다른 ‘씨앗(종자種子)’이라는 의미에서 스페르마타spermata라 불렀다.
그가 제시한 현존하는 무한수의 씨앗은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는 파르메니데스가 제시한 실재에 대한 정의, 즉 ‘실재하는 것은 없는 것(無)으로 돌아갈 수 없고, 없는 것(無)에서 실재하는 것이 생겨날 수 없다’는 주장을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아낙사고라스는 현상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종류의 생성소멸을 말할 때, 생성은 씨앗 자체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씨앗들의 혼합混合이요, 소멸은 씨앗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혼합된 씨앗들의 분리分離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생성이 씨앗들의 혼합이라면, 자연의 생명체는 먹어야 성장을 유지하게 된다. 식물은 물과 햇빛을 먹어야 살고, 인간은 쌀과 야채 과일 등을 먹고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가 쌀과 야채 과일 등을 먹으면 살, 뼈, 피, 머리카락 등이 생겨난다. 왜 그럴까? 여기에서 아낙사고라스는 ‘모든 것 속에 모든 것들이 들어있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우리가 먹는 과일이나 야채에도 살의 씨앗, 뼈의 씨앗, 피의 씨앗, 머리카락의 씨앗 등이 모두 들어 있고, 이것들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얘기다. 다만 과일이라 부르는 까닭은 과일의 씨앗이, 야채라 부르는 것은 야채의 씨앗이 가장 우세하게 들어 있어서이고, 우리의 하얀 피부에는 하양의 씨앗이, 검은 피부에는 검음의 씨앗이 우세하게 들어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다.
무수한 씨앗들의 혼합과 분리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가, 우연적으로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어떤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가? 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아낙사고라스는 철학사에 길이 빛날 탁월한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다. 바로 정신(nous)이란 개념이 그것이다. 이 정신은 우주자연을 총체적으로 주재하여 조화와 질서를 가져오는 절대자의 정신쯤으로 볼 수 있다.
아낙사고라스는 자연세계의 생성이 정말 질서 있고 조화롭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직관한 것으로 보인다. 질서와 조화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바로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정신은 무수하게 많은 씨앗을 질서 있고 조화롭게 결합하고 분리하는 힘의 원천이요, 운동의 원인인 되는 셈이다. 요컨대 우리가 학교를 향해 걸어가는 것은 발과 다리를 구성하고 있는 물리적인 원소들이 스스로 움직여서가 아니라 수업을 들어야겠다는 목적으로서의 원인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은 생성에 있어서 운동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질서와 조화의 원리가 된다.
2) 유물론의 원조, 고전적인 원자론原子論
우주자연의 실재에 대해 가장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사유한 또 다른 방식의 다원론이 등장한다. 그리스 북부 압델라 출신의 레우키포스Leukippos(BCE 440년 무렵)가 창시했고, 그의 제자 데모크리토스Demokritos(BCE 460?~370?)가 완성하게 된 이론이다. 이들을 서양 철학사에서는 고전적인 원자론(atomism)이라 부른다.
원자론은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즉 우주자연에는 물질적인 원자原子와 비물질적인 공허空虛만을 참되게 실재하는 것으로 주장한다. 우주자연의 다양한 사물들은 무수하게 많은 원자들이 필연(ananhkē)으로 인해 기계적으로 운동하여 이루어진다는 얘기다. 이러한 사상은 근대 여러 학문 분야에 등장하는 환원주의還元主義(reductionism)와 기계론機械論(mechanism)적 세계관의 효시가 되었고, 철학 분야에서 마르크스(K. Marks)의 극단적인 유물론唯物論(materialism)을 태동시켰다.
물질을 무한히 쪼개면 결국 무엇이 남을까 -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
앞서 아낙사고라스는 생성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생명을 가진 것을 경험적으로 분석해서 각기 다른 무한수의 씨앗이 실재함을 주장했다. 그러나 레우키포스는 다른 탐구방식을 제시한다. 그것은 크기를 가진 현상의 사물을 무한히 쪼개 보는 것이다.
아무리 견고하게 지은 건축물도 세월이 가면 부서지고, 아무리 단단한 바윗덩어리도 충격을 가하면 쪼개지고, 최고의 강철도 잘라진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 안에 부서지고 쪼개지고 잘려질 수 있는 틈새가 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미세한 것이든, 단단한 것이든 틈새가 있으면 부서지고 쪼개지고 잘라진다는 얘기다. 역으로 말해볼 때 틈새가 없으면 결코 부서지거나 쪼개지거나 잘라질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레우키포스는 사물을 쪼개고 또 쪼개 보았을 것이다. 쪼개는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망치를 가지고 실제로 쪼개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사유를 통해 쪼개는 것이다. 실제로 쪼개 보니 미세한 먼지처럼 잘게 쪼개졌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쪼갤 수 없으니까 ‘사유를 통해서 논리적으로’ 쪼갤 수밖에 없게 된다. 레우키포스는 사유를 통해 무한대로 쪼개 보니 결국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지점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지점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그는 불가분적이고 불멸하는 물질적인 원자라고 했다. 원자(atoma) 개념은 그리스어로 ‘없다’는 의미를 가진 ‘a’와 ‘나누다’는 뜻의 ‘toma’가 결합하여 나온 합성어로 어떤 방식으로든 ‘나눌 수 없다는 것’, 즉 불가분적不可分的인 실재란 뜻이다.
원자는 ‘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실재가 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세 측면에서 그 특성을 말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원자가 더 이상 쪼갤 틈이 없는 물질의 최소 단위가 된다는 점이다. 이는 파르메니데스가 제시한 실재 개념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쪼갤 틈이 있으면 더 쪼개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2500여 년이 지난 현대과학에서는 원자를 더 쪼개기 시작했다. 원자를 더 쪼개서 양성자, 중성자, 전자를 분리해 냈고, 더 나아가 광자, 쿼크 등을 구분해 냈다.
다른 하나는 고대 기하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크기를 갖는 물질을 무한히 쪼개도 결국엔 크기를 가진 최소 단위가 실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만일 크기가 없어질 정도로 쪼개버렸다면,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전환됐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불가하다. ‘없는 것’을 무한히 모아 본다 하더라도 ‘있는 것’은 나올 수 없듯이, 크기가 없는 것을 무한히 모아도 크기를 가진 것은 결코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대 기하학의 공리公理에서 크기를 가진 선분線分은 아무리 분할되어도 점點이 될 수 없고, 역으로 크기가 없는 점을 아무리 이어도 크기를 가진 선분이 나올 수 없다는 것과 꼭 같은 이치이다.
마지막은 생성 변화하는 물리적인 세계를 관찰하여 그 결과의 부당성을 들춰내는 것이다. 만일 물질적인 최소 단위가 되는 원자가 없다면, 생성하는 것은 ‘없는 것(無)’으로부터 생겨 나올 것이고, ‘있는 것’은 또한 ‘없는 것’으로 파괴된다. 그렇게 되면 자연세계의 전체는, 언젠가는 없는 것에서 생겨난 물질들로 꽉 차 있을 수 있거나, 모두가 없는 것으로 파괴되어 텅 비어 있을 수 있다.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하다.
원자에 대한 이러한 논증으로부터 “무(無)로부터 어떤 것도 생겨나지 않고, 무로 파괴되지 않는다.”는 원자론의 기본 공리가 설정된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자연세계 전체를 양화量化하여 정의하는 근대의 물리학적 세계관이 구축되는데, 기본적으로 우주자연 전체의 질량은 증가하거나 감소될 수 없다는 “질량불변의 법칙(law of conservation of mass)”이 그것이다.
텅 빈 공간 개념의 출현
물질을 이루는 근원적인 실재가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원자여야 한다면, 이제 다시 물음을 던져 보자. 물질이 쪼개지도록 하는 틈새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을 레우키포스는 비물질적인 “공허”(kenon)라 불렀다. 공허는 물질적인 그 어떤 것도 아닌 텅 빈 공간(empty)을 뜻한다. 그가 공허를 도입하게 된 것은, 파르메니데스가 ‘없는 것(無)도 있다’고 했을 때, ‘없는 것’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만일 물질성이 완전히 배제된 텅 빈 공허가 없다면 현상계를 점유하고 있는 물체의 위치란 없을 것이고, 위치 이동 또한 불가능할 것이다.
공간 개념은 후에 루크레티우스Lucretius(BCE 96~55)가 자연에 대해 시적으로 작성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라는 저술에서 대략 네 가지의 뜻으로 확대하여 사용됐다. 물체와의 관계에서 공간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 두 가지이고, 공간 자체에 대한 정의가 두 가지이다. 전자의 두 가지는 물체가 장소를 점유하거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움직여갈 수 있다는 의미에서 공간, 즉 물체에 의해 점유된 장소(locus; location-추상적 의미의 공간 개념)와 아직 점유되지 않아 물체가 뻗어 나갈 수 있는 운동 공간(spatium; space)이다. 후자의 두 가지는 내적으로 물체의 모든 속성이 완전히 배제된 의미에서 텅 빈 허공(inane; empty)과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무한 공간(vacuum; void)이다.
그러므로 원자론은 우주자연에 영구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란 오직 두 종류, 물질적인 원자들과 비물질적인 텅 빈 공간뿐이라는 얘기다. 원자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초기 탈레스로부터 제기된 자연에 대한 영원한 실재와 이를 근원으로 하여 변화무쌍한 현상계의 생성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 기반이 마련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주 끝에 서서 밖으로 창을 던진 사나이
“帝曰(제왈) 爾五加(이오가) 众(중)아 蒼蒼(창창)이 非天(비천)이며 玄玄(현현)이 非天(비천)이라
천제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오가의 백성들아! 저 푸르고 푸른 것이 하늘이 아니며, 저 아득하고 아득한 것도 하늘이 아니니라.
天(천)은 無形質(무형질)하며 無端倪(무단예)하며 無上下四方(무상하사방)하고
하늘은 모양과 성질이 없고, 처음과 끝도 없으며, 위아래와 동서남북도 없으며,
虛虛空空(허허공공)하야 無不在(무부재)하며 無不容(무불용)이니라.
안으로 텅 비어 있고 밖으로도 무한히 텅 비어 있어서 존재하지 않음이 없고 허용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 『환단고기桓檀古記』「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삼일신고三一神誥 중에서-
어릴 적 시골집 마당에 밀집멍석을 깔고 누워 밤하늘의 유성우를 감상하면서 저 별들까지 얼마나 멀고 또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고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이러한 의문은 곧 ‘우주가 무한無限할까 유한有限할까?’ 하는 물음으로 집약된다. 결과적으로 볼 때, 우주가 너무 커서 무한하다는 견해도 있을 것이고, 아무리 크더라도 유한하다는 주장도 있을 것이다. 고대 원자론자들은 어떤 주장을 내놓았을까?
고대 원자론은 우주가 무한하다고 강변한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원자론에 의하면, 우주에는 크기가 다르고 모양이 다양한 무한수無限數의 원자들과 공간뿐이다. 원자들은 특성상 각기 투과될 수 없는 동질적인 것이고 공간은 그 특성에 있어서 무조건 허용만 하는 항상 투과적인 것이다. 원자들은 그 수에 있어서 한계가 없는 무한수이다. 따라서 무한수의 원자들을 담고 있는 그릇, 즉 무조건 허용만 하는 절대적으로 텅 빈 공간은 역시 무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한 우주를 부정하고 유한 우주를 내세운 이들이 있다. 아테네 최고의 철학자 플라톤은 유한 우주를 제시한다. 그는 『티마이오스Timaios』 편에서 천구가 유한하다는 전제하에 창조주 데미우르고스Demiourgos 신神이 우주세계의 생성에 어떻게 관여하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유한 천구론을 토대로 해서 프톨레마이오스Klaudios Ptolemaeos(85~165)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지구의 경도를 360도로 나누고 그것을 중심으로 천구가 돌고 있다는 “천동설”을 주장하게 된다.
플라톤의 유한 우주론에 반기를 든 학자(철학자이자 수학자)가 등장한다. 바로 타렌툼 출신 아르키타스Archytas(BCE 428~347)이다. 그는 처음으로 유한 천구의 한계를 넘어서 무엇이 있을까 하고 의문을 던진다. 만일 누군가가 유한 천구의 끝에서 밖으로 팔을 뻗으면 팔이 어떻게 될까? 그것은 팔이 뻗어나가든가 그렇지 않든가 할 것이다. 이는 우주가 무한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무한 우주에 대한 원자론의 사고는 후에 사모스에서 태어나 아테네에서 활동했던 에피쿠로스Epicouros(BCE 341~271)에게 전수되고 그의 제자 루크레티우스에 의해 귀류법으로 입증된다. 만일 우주가 유한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우주는 어떤 한계점(끝점)을 가질 것이다. 한계점은 다른 어떤 것에 대치되고 있는 경계점이다. 경계점에 대치되고 있는 것은 물질적인 원자 아니면 텅 빈 공간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것들 모두 우주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주는 어떠한 한계도 갖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우주의 어느 지점에 서 있든 상관없이, 모든 방향으로 꼭 그만큼의 무한이 있을 뿐이다.
루크레티우스는 우주가 무한하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창을 던질 때의 예를 들어 한층 선명하게 제시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우주의 가장 극단적인 끝점까지 접근해서 전투용 창을 강한 힘으로 내던진다면, 그 창은 멀리 날아가든지 아니면 날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멈추게 하는 어떤 것이 있든지 둘 중의 하나를 필연적으로 인정하고 선택해야 한다. 여기서 창이 앞으로 날아간다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 있다는 것이고, 멈춘다면 날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물질적인 무엇이 있음을 입증한다. 그러므로 우주는 텅 빈 공간에 원자들로 이루어진 물질적인 것으로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것이다.
세상은 어떻게 창조된 것일까?
大始(대시)에 上下四方(상하사방)이 曾未見暗黑(증미견암흑)하고 古徃今來(고왕금래)에 只一光明矣(지일광명의)러라
태초에 위아래 동서남북 사방에는 일찍이 암흑이 보이지 않고 오직 한 광명뿐이었다.
自上界(자상계)로 却有三神(각유상신)하시니 卽一上帝(즉일상제)시오
천상세계에 삼신이 계시니 즉 한분 상제님이시다.
主体則爲一神(주체즉위일신)이시니 非各有神也(비각유신야)시며 作用則三神也(작용즉삼신야)시니라
주체는 일신이시나 각기 따로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작용으로 보면 삼신이시니라.
三神(삼신)이 有引出萬物(유인출만물)하시며 統治全世界之無量智能(통치전세계지무량지능)하사 不見其形軆(불현기형체)시니라
삼신께서 만물을 이끌어내시고,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능력으로 온 세계를 다스리시나 그 형체를 나타내지 않으신다.
- 『환단고기桓檀古記』「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중에서 -
고대 원자론에 의하면 끝없는 공간에 무한 수의 원자들이 실재한다. 원자들 자체는 모두가 아무런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다. 그 크기는 극미한 것으로부터 커다란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전적으로 동질적인 존재여서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다. 그 형태는 둥근 모양, 네모진 모양, 세모진 모양, 가시같이 생긴 모양, 구멍 난 모양 등 별의별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 원자들로부터 현상 세계의 변화무쌍한 생성이 어떻게 이뤄지는가를 설명해야 하겠는데, 사물들의 창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 원자들을 움직여 서로 결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자들이 움직여야 할 것이다. 이 원자들을 움직이도록 하는 원인(운동인運動因)은 무엇일까? 원자 자체가 살아서 스스로 움직이는가 아니면 원자 이외의 다른 힘(무한한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이 있어 이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일까?
원자론에 의하면 원자들은 무한 공간 속에서 애초부터 자동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항상 움직인다. 원자들을 움직이게 할 원인 같은 것은 따로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anangkē) 움직임뿐이라는 얘기다. 그러한 원자의 운동속도는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다고 한다. 왜냐하면 텅 빈 공간을 이동하는 빛은 복합체(원자들의 결합체)이므로 내적으로 방해를 받지만, 원자는 단순체이므로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빛보다 빠른 원자의 속도는 더 빠르거나 더 느리지 않고 항상 일정하다.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속도로, 또한 기계적으로 일정하게 움직이는 무한 수의 원자들은 서로 충돌하게 마련이다. 충돌할 때 어떤 것들은 서로 결합하고 어떤 것들은 투사각에 따라 튕겨나간다. 서로 결합한다 하더라도 원자의 속도가 느려지는 것이 아니고 원래의 속도대로 그 자리에서 움직인다. 바이브레이션 같은 운동이다. 그리고 튕겨나간 것들은 또 다른 원자들과 충돌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당구대 위의 당구공처럼 뉴톤의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를 상기시킨다.
충돌할 때 어떤 것들은 “우연적으로(forte)” 서로 결합하여 개별적인 사물들이 창조된다. 원자들의 모양과 크기가 매우 다양하고, 이것들의 배열 방식이 무수하게 많기 때문에,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물들이 우연적으로 출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작도 끝도 없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원자들은 우연적으로 서로 결합하여 거대한 우주를 형성하고, 지구를 구성하며, 그 밖의 하늘과 바다, 온갖 종류의 무기물과 수없이 많은 종류의 생명체를 이룬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다 일정하게 움직이는 원자들이 우연히 만나 결합하여 생겨난 것들이다. 지구상에서 하루에도 수천 가지의 생명체가 탄생하고 없어지는 것도 원자들이 우연히 만나 얼마 동안 결합되었다가 해체되는 현상이라는 얘기다.
인간의 고귀한 생명체도 원자들이 우연히 만나 탄생하게 되는 것일까? 여타의 동식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자자손손 대를 이어서 지속되어 가는 까닭은 무엇인가? 원자론에 의하면, 현재 존재하는 사물들은 원자들이 생존에 적합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아직까지 존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과거에는 ‘머리는 소에 몸은 사람(牛頭人身), ‘인어人魚’와 같은 기상천외奇想天外하게 생긴 것들이 있었으나 생존에 적합하지 못하여 사멸하고 없다는 얘기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근대에 출현한 다윈C. Darwin의 생물학적 진화론이 태동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영혼(마음)도 미세한 원자라는 주장 - 유물론의 원조
“사람에게는 혼魂과 넋魄이 있어 혼은 하늘에 올라가 신神이 되어 제사를 받다가 4대가 지나면 영靈도 되고 혹 선仙도 되며, 넋은 땅으로 돌아가 4대가 지나면 귀鬼가 되느니라.” (『道典』4:118:2-4)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인간이 죽으면 시신이 땅에 묻혀 썩어 흩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일까, 아니면 종말론에서 통용되는 휴거처럼, 자신이 살았던 세계와는 다른 사후세계(신의 세계)로 넘어가(거듭 태어나) 다시 살아가는 것일까? 만일 인간의 신체가 죽어 없어져도 사후세계로 들어가 다시 살게 된다면 인간에게는 결코 사멸하지 않는 그 무엇이 실재해야 한다. 이것을 통상적으로 인간의 영혼靈魂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원자론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마음)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영혼은 단순히 물질적인 원자 내지는 원자들의 파생물, 즉 원자들이 공간 속에서 움직이면서 부딪혀 발생하는 일시적인 심적 현상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원자와 텅 빈 공간 이외에 신의 세계나 영혼이 따로 거주하는 사후세계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원자론에서 본다면 태초부터 지속돼 온 인간의 도덕적 가치나 어떤 종교적 행위는 모두 한낱 맹목적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엄청난 주장은 어떻게 해서 나오는 것일까?
우선 인간이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 발생하는 감각에 대해 검토해 보자. 인간의 감각은 다섯 종류, 즉 눈을 통해 색을 구분하는 시각視覺, 코를 통해 냄새를 맡는 후각嗅覺, 귀를 통해 소리를 듣는 청각聽覺, 혀를 통해 맛을 느끼는 미각味覺, 피부의 접촉을 통해 느끼는 촉각觸覺이다. 그런데 원자들은 각각 크기와 모양이 다를 뿐 자체로 아무런 성질도 없다. 즉 딱딱하거나 부드러운 것도 아니고, 알록달록한 색깔도 없고, 어떤 맛을 내는 것도 아니고, 냄새를 풍기는 것도 아니고, 소리를 내는 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오감을 통한 감각적 표상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원자론에 의하면 사물의 딱딱함은 원자들이 밀접하게 결합했기 때문이며, 매끈매끈함은 동글동글한 원자들이 결합했기 때문이며, 까칠까칠함은 뾰쪽뾰쪽한 원자들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맛이나 색깔, 냄새 등도 그렇다. 이런 느낌이 형성되는 과정은 사물을 보고서 색깔을 느끼는 것을 예로 삼을 수 있다. 사물들이 다양한 색으로 보이는 것은 햇빛 원자가 사물에 충돌하여 ‘에이돌라eidola’라는 일종의 미세한 원자들이 끊임없이 떨어져 나와서 우리의 감각 기관에 충돌하고, 이것이 신경계를 통해 뇌에 전달되어 표상이 생겨나서 감각지각이 형성된다. 감각지각은 우리의 인식주관으로 하여금 사물이 그렇게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감각으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성질들은 인간의 인식주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견해는 서양 근대철학의 인식론이 대두하면서 체계적으로 정립된다. 동양의 불가에서도 마음의 상象을 실상과 허상으로 구분하고, 오관을 통해 들어오는 상은 모두 인식주관이 만든 허상으로 취급된다.
그럼 이러저러한 감각지각이 생겨나게 되는 인식주관은 실재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원자론에 의하면 인식주관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요소로 형성된 심적 현상이다. 즉 인간의 영혼은 아주 미세하고 정교한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감각지각의 심적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외부의 자극에 의해 이 원자들이 활동함으로써 생기는 부수적인 현상이라는 얘기다. 원자들이 결합하여 사람이 생겨날 적에 영혼도 생겨나고 의식도 생겨나며, 사람이 죽을 때 원자들이 해체되어 영혼도 의식도 없어진다. 즉 사람이 죽으면 심적 현상이나 여타의 정신적인 모든 것들이 감쪽같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가 바로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유물론적 입장이다.
따라서 영혼을 구성했던 원자들은 신체와 더불어 흩어져 다른 사물들을 구성하는 것에로 들어가기 때문에 사람은 죽은 다음의 세상에 대하여 생각할 필요가 없다. 설혹 불멸의 신들이 있다 하더라도 죽음의 세상을 간섭하거나 죽은 자들을 벌주는 일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원자론자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당면하게 되는 어떤 두려움이나 곤경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본성과 자연의 변화 법칙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통찰하는 것뿐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자연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비스런 현상은 신들이 인간을 벌주기 위해서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불변적인 법칙에 따라서 발생하는 자연 현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3) 원자론에서 출범한 현대의 물리과학
2400여 년 전에 태동한 원자론은 후에 에피쿠로스Epikuros와 로마 시대의 루크레티우스Lukretius에게로 이어지고, 17세기경에 고전 물리학의 체계자라 불리는 뉴톤I. Neuton에게 전해져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탐구의 철학적 기초를 제공한다. 특히 물질의 기계론적 자연관은 근대에 새롭게 대두하는 물리학, 생물학, 화학, 심지어는 정신과학 등에 이르기까지 학문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환원주의에 바탕을 둔 기계론적 패러다임
근대의 과학자들은 고전적인 원자를 복합체로 보고 이를 더 쪼개기 시작한다. 그 결과 그들은 전자, 중성자, 핵의 개념을 도입하게 된다. 즉 그들은 원자보다 더 작은 소립자 혹은 ‘쿼크quark’들을 자연의 물리적인 실재로 보고, 이것들이 기계적으로 이합집산하여 다양한 사물의 생성변화가 일어난다고 보았다.
입자들의 운동은 외부에서 주어진다. 외부의 충격은 변화의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얘기다. 자연의 생성변화는 ‘원인에 의한 입자들의 운동 결과(casuality)’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근대의 과학자들은 자연 세계의 생성변화가 과학적 방법, 즉 인과법칙에 의해 정확히 이해되고 조직될 수 있다고 믿었다. 심지어 사람의 의식 활동, 사회 제도, 또는 문화적인 행태들조차도 소립자들로 이뤄진 물질의 기계적인 운동의 결과로 이해하기에 이른다. 이를 토대로 하여 미래가 결정론적으로 예측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었던 것이다.
그럼 인과법칙에 따라 전개되는 입자들의 운동 방식은 어떻게 측정 가능한가? 이에 대해서 근대 물리학자들은 입자들의 ‘위치’와 ‘속도’라는 용어를 도입한다. 입자의 ‘위치’와 ‘속도’ 개념은 자연 세계가 자동 장치의 기계와 같은 자율성이 없는 운동방식을 전제한다. 여기에서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관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기계론의 패러다임에 의하면, A점에서 B점에로 이동하는 입자의 운동은 ‘가역적可逆的’이다. 철학의 용어에서 통용되고 있는 환원주의還元主義가 여기에 적용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체는 부분으로 나뉘고, 부분들의 총합은 전체로 환원된다는 것은 입자의 운동이 가역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움직이는 입자들 전체의 총합은 증감이 없다. “질량불변의 법칙”이니 “에너지 보존 법칙” 등은 이를 근거로 해서 나온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고전적인 환원주의적 전통을 이어받은 기계론적 세계관은, 모든 물질적인 것들이 ‘가역적’이고 이들의 운동 또한 기계적인 움직임을 전제한다는 의미에서, 자연에 대한 결정론적인 설명 방식뿐만 아니라 현대의 기계론적인 기술문명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환원주의와 기계론이 결합하여 출범한 기술문명은 인류가 물질적인 편의를 위해 과학기술을 자연 세계의 것들에 적용하여 자연물을 새롭게 임의대로 개조한 결과를 낳는다. 기술문명의 진보는 과학기술에 의해 ‘덜 질서 있는’ 자연 세계를 ‘더 질서 있는’ 물리적인 환경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술문명을 현대인들은 자연의 원래상태에서 존재했던 가치보다 더 부가된 가치, 더 우수한 구조, 그래서 더 높은 질서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환원주의적 기계론에 반기를 든 현대 물리학
그러나 금세기에 접어들어 환원주의적 바탕 위에 성립된 입자들의 ‘위치’와 ‘속도’라는 기계학적 용어가 검증의 대상으로 부각되면서 17세기 뉴턴 물리학이 전적으로 타당한가의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현대 물리학자들은 이러한 ‘미시적 세계의 단순성’으로 파고들어 물질의 참된 실재로서의 입자들을 찾아 이를 분리하여 측정하려는 시도에 들어갔다. 이런 시도의 근본적인 의도는 궁극적인 실재가 되는 소립자 세계의 기본 단위들의 존재와 그 운동을 명백히 규정하고 인식하기만 한다면, 이들로부터 거시세계의 사물들이 어떻게 이뤄지고 변화되는지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기대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각기 외로운 궤적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인다는 입자는 ‘파속(wave packet)’의 순수 운동을 관념화한 것이었고, 또한 미시적인 단순 실재의 입자들로부터 거시세계의 다양한 사물들이 충분하게 설명될 수 있다는 예측은 빗나갔기 때문이다.
소립자 세계의 입자들의 규정과 그 운동의 측정에 관련하여, 금세기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Heisenberg는 “원자 입자의 본성에서 볼 때 관측이라는 바로 그 행위가 관찰 대상을 고정시키고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간섭하고 변동을 가하는 것이라서 원자를 이루는 입자들을 객관적으로 관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주어진 순간에 물체의 ‘속도’와 ‘위치’를 동시에 측정할 수도 인식할 수도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러셀B. Russel도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안다면 우리 자신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를 알 수 없으며, 우리가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를 알려면 우리 자신의 위치를 말할 수 없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이론적 내용이 바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이다.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미시세계의 입자들에 대한 관측에 직면할 때마다 정밀한 측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근원의 실재인 입자들의 위치와 운동으로부터 거시세계의 사물들이 과학적 방법에 의해 조직되고 이해되며 또한 예측되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됨을 보여준다.
게다가 전통적인 환원주의 사고방식이 검증될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즉 미시적인 입자들의 존재 위치와 속도가 정확히 인식되고 정립된다 하더라도 이들로부터 구성된 거시세계의 생성 변화하는 사물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시세계의 개별적인 사물은 복잡하게 구성되고 조직되어 있으나 하나의 단일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시세계의 개별적인 사물은 수백만 개의 원자나 아원자 또는 쿼크quark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이들과는 다른 일정한 개체이다. 이들 각각의 개체는 소립자들로 환원시켜 설명될 수 없는 자신의 고유한 성질을 가진다. 특히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각각의 생명체의 경우가 그렇다. 생명체들은 단순히 정태적으로 파악된 실재로서의 소립자들의 구성 요소들이나 그 조합으로부터 나온 것들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복잡하게 구성된 동태적인 존재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지적들은 환원주의적 태도를 기반으로 성립하는 고전 물리학적 세계관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자연세계란 생명이 없는 입자들에 의해 짜 맞춰진 것으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외부적인 힘에 의해 양적으로만 운동하는 물질로 이뤄져 있지도 않으며, 그리고 고정된 힘이 정확하게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다른 고정된 힘에 대하여 작용한다고 보는 결정론적인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 물리학의 대표로 보이는 뉴턴 물리학은 살아 있는 생명체의 경우가 보여주는 자기 조직적이고 구성적인 어떤 메카니즘 체계나,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에너지 환경에 대하여서는 결국 부적합한 패러다임이다.
그러므로 고전 물리학의 기계론적인 환원주의가 보여 주었던 자연의 안정성은 처음부터 환상이었으며, 인간이 자연계를 조정하여 기술문명을 발전시키는 데에 진리의 틀로서 환원주의적 자연관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명백히 그릇된 것으로 판정난다.
엔트로피 세계관
본Max Born이 말했듯이,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우주는 더욱더 오리무중이고, 모든 것이 제멋대로 춤추는 형상이다.” 복잡하게 조직되고 구성된 거시세계의 현상들은 고립된 물질의 실재적인 성분이나 또는 고정된 미시적 구성 요소들의 기계적인 이합집산으로 취급될 수 없다. 우주자연의 삼라만상은 기계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흐름의 일부이며, 각각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비환원적으로 변화하는 물질과 에너지 흐름의 결과이다.
그래서 환원론에 바탕을 둔 기계론적 세계관을 탈출하여 거시적 가치체계의 질서 변화를 대상으로 삼는 새로운 비환원적인 자연관이 등장하게 된다. 이는 19세기 열역학이 발달하면서 독일의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에 의해 창안된 용어로, 열역학 ‘제2법칙’ 또는 ‘엔트로피 법칙(The Entropy Law)’이라 불리우는 패러다임이다.
‘엔트로피 법칙’의 세계관은 물질로 이루어진 거시적 존재의 가치질서를 문제 삼는다. 자연의 사물들이 질량을 가지는 한 에너지로 환산되고, 우주의 총 질량이 불변적이라면 에너지의 총량 또한 불변적이기 때문에, 엔트로피 법칙의 세계관은 거시세계의 역동적인 생성변화란 단순히 각각의 에너지가 새로운 형태로 끊임없이 변형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환원론을 기반으로 하는 17세기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관과는 대조적으로 엔트로피 법칙의 세계관은 ‘비가역성’ 또는 ‘지향성’을 도입한다. 지구라는 고립된 체계에서 볼 때 현재의 거시적인 상태는 동일하거나 보다 높은 엔트로피를, 과거의 상태는 현재보다 보다 낮은 엔트로피를 산출하고, 그 반대의 경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자연의 역사를 물질과 에너지의 흐름으로 파악한다. 우주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생성변화 과정은 물질과 에너지의 흐름으로 환원되며, 에너지의 흐름이 항상 농도가 높은 것으로부터 낮은 것으로 흐르기 때문에 ‘비가역적’(irreversible)이다. 에너지 흐름의 ‘비가역적’ 과정들은 계속적인 엔트로피를 산출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세계의 전체적인 존재질서의 파괴와 에너지의 총체적인 분산은 점점 증가될 것이다.
그러므로 ‘엔트로피 법칙’은 고도의 기술 문명을 이룩한 현대인이 지금 ‘열 사망(heat death)’의 운명에 처해 있고, 또한 앞으로의 기술 문명이 더 발전함에 따라 자연의 파괴는 물론 부존자원의 고갈을 촉진시킬 것이며, 결국 인류가 피할 수 없는 에너지 위기 및 심각한 환경오염에 직면하게 됨을 고발한다. 이것이 19세기 초에 유물론적 자연관에 토대를 두고 일어난 엔트로피 세계관이다.
유물론적 세계관
19세기에 접어들어 또한 다른 각도에서 현대 유물론이 출현하게 된다. 마르크스K. Marx의 변증법적 유물론이 그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하면, 실재하는 세계는 객관적인 사물들만 존재하고, 다른 여타의 정신적인 산물은 물질과 운동에서 파생된 것으로 부수적인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신적인 문화유산들 또한 자연의 물질적인 세계가 변화함에 따라서 진행되는 일부분이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본 원리는 대략 세 관점에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자연세계의 실재는 물질이요, 현상 세계의 다양한 변화는 이 물질적 실재의 운동으로 표현되는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자연세계는 이 물질적 실재의 운동법칙에 따라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 둘째, 자연세계의 물질적인 실재는 사람의 정신으로부터 독립하여 있는 객관적인 현실이다. 정신에 속하는 의식과 인식 주체는 단지 물질의 반영 내지 물질의 부수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정신의 발전은 곧 물질의 발전에 기인한다. 셋째, 자연세계의 발전의 법칙은 과학적으로 구명될 수 있기 때문에 객관적 진리가 인정되어야 한다. 자연세계에 대한 과학적 구명은 곧 사회의 역사적인 현실 속에서 그것을 실천(praksis)하는 일이다.
결과적으로 마르크스는 이러한 변증법적 유물론을 사회구성과 그 변화에 적용시켜 사회의 기본적인 사실이 경제 문제, 즉 생산양식과 그 분배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는 사회에 두 개의 계급을 설정하였는데, 이것에 따라서 사회의 정신활동이 좌우된다는 것이다. 하나는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이며, 다른 하나는 단순한 생산 도구에 불과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다. 이 두 계급은 자연적으로 불가피하게 충돌하며 이익을 위한 투쟁을 벌인다. 이에 따라서 역사가 창출되며 사회의 진화가 변증법적으로 진행된다.
변증법은 ‘정립(These)’, ‘반정립(Antithese)’, ‘종합(Synthese)’의 과정으로 진행되는 원리이다. 정립이란 기존의 상태나 조건으로 소유주(자본가)가 통제하는 생산체계를 말한다. 이 조건이 과도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대립자(반정립), 즉 노동자 계급이 발전하여 혁명역량으로 성장하게 된다. 결국 정립과 반정립의 갈등이 정점에 이르게 되면 새로운 계급 질서가 출현하는데, 이것이 종합이다. 이 종합에 또 다른 반정립이 성립하여 종국에 가서는 이상적 공산사회에 도달한다고 한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사회 발전의 변증법적 역사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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