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칼럼 | 판 밖에서 진정한 대학을 만나자

[칼럼]
이주희 / 도감, 본부도장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은 오늘도 가장 바쁜 하루를 보낸다. 전날 몇 시에 잤건 중요치 않다. 모두가 아침형 인간이 되어 버스에 몸을 맡기고 지각을 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뛴다. 그 뿐인가. 수업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이어지고, 어느덧 야자(야간 자율학습) 타임을 맞게 된다. 한 명도 열외 없이 해야 하는 야자는 왜 자율학습이라고 하는지, 고등학생들의 오래된 의문이다.

이러한 큰 물결 속에서 가끔 제동을 거는 아이들이 있긴 하다.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해야 하는지,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인생의 방향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각은 지속되고 깊어지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만들어진 룰(rule)대로 살아가기를 우리 청소년들에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움은 어느덧 명문대학 진학의 수단으로 전락하였고, 즐거운 배움의 터는 입시지옥으로 둔갑해버렸다.

사실 배움은 대학에 들어가기 전 12년 동안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삶 자체가 배움의 연속이고, 우리는 배움을 통해 더 나은 인간으로 성숙한다. 보다 나은 가치에 눈뜨게 되고, 그것은 나 자신을 넘어 세상을 향한 도움의 손길로 뻗어나간다. 올바른 가치 실현, 값진 자아실현의 순간이다. 상제님께서도 배움의 재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공부를 제대로 한번 해 보아라. 그 재미에 똥구멍이 옴쏙옴쏙 하느니라.”(道典 9편 77장) 곰곰이 곱씹어볼수록 참으로 실감나는 말씀이다. 배움은 이토록 재밌고, 신명나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배움의 참된 목적에 대해 분명히 알았던 듯하다. 『대학』을 보면 ‘대인지학大人之學’이라고 해서 대인이 되는 배움의 길을 제시한다. “대학지도大學之道는 재명명덕在明明德하며, 재신민在新民하며, 재지어지선在止於至善이니라.” 인간은 하늘로부터 내려받은 본성을 지니고 있고, 기질에 가려져 미처 깨닫지 못한 본성을 인지하고 밝혀서 세상을 이롭게 할 사명을 띠고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태어날 때부터 갖추고 있는 ‘텅 비고 신령하여 어둡지 않은’ 본래의 성품인 명덕明德을 밝히고 타인을 새롭게 하는 것, 지극한 선善에 머무르는 것이야말로 대인이 되는 길이요, 진리를 실천하는 길이다. 대인大人이라는 말은 시대를 초월하여 진리와 하나 된 이상적 인간상을 이르는 말이다. 진리는 밝음이고 빛이며, 빛은 전방위적으로 뻗어나가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참 진리를 깨달은 자는 누구에게나 어디서건 진리를 전하려는 마음이 일어난다.

『대학』에서는 이러한 배움의 삼강령三綱領을 달성하기 위한 단계별 공부법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이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격물’이다. 이 세상 만물과 만사에는 이치가 있는데 그 이치를 깊이 연구하고 파고들어 궁극에 도달하게 되면(격물格物) 지극한 앎에 이른다(치지致知)는 것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진정한 앎은 논리나 지식이 아니라 이치를 궁구하여 그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 실상을 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 이면에 흐르고 있는 질서를 알아차리는 일이다.
상제님께서는 “세상에 이치 없는 법은 없느니라.”(8편 32장) 하셨고, “이치는 하늘에 근원을 두고 사람의 마음에 갖춰져 있느니라.”(2편 90장)는 말씀도 내려주셨다. 이치를 밝히는 일이야말로 나의 마음을 밝히고, 본연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격물로부터 평천하의 첫걸음이 시작됨은 이와 같다.

이렇듯 『대학』에서는 대인이 되기 위한 틀을 세우고 실천해야 할 자세한 절목까지 제시하였으니 그 가르침이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상제님께서도 『대학』의 가르침을 인정해주셨다. 대학의 구절을 글로 쓰셨고, 대학 경일장經一章 장하章下를 잘 알아 두라는 당부의 말씀도 남기셨다. 도전 2편 79장에는 상제님께서 대학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병자病者를 고쳐주시는 장면이 등장한다.

상제님께서 하루는 원평을 지나시는 길에 온몸이 대풍창大風瘡으로 뒤덮인 병자를 만나셨다. 그때 성도들로 하여금 길 위에서 병자를 둘러싸고 앉게 하신 후 눈을 감고 “대학지도大學之道는 재신민在新民이라”는 구절을 계속하여 외우게 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도들이 눈을 떠 보니 병자가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한 성도가 천형天刑인 문둥병을 글을 읽게 하여 고치게 하신 연고를 묻자 상제님께서는 ”나의 도는 천하의 대학이니 장차 천하창생을 새사람으로 만들 것이니라”고 하셨다.

지금은 20살이 되어서야 대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대학교는 큰 배움을 내려주는 학교라는 뜻이지만, 그마저도 진정한 배움이 무엇인지 의문이 들게 한다. 대학교에서 앎이 늘어날수록 인간의 가치, 삶의 의미, 바르게 사는 길 등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오히려 미궁 속으로 더 깊숙이 빠져드는 느낌이 든다. 누구나 한 번쯤은 무의식에서 들려오는 이러한 외침들에 대해 사색을 하고 번민도 하면서 해결책을 찾아보지만 대학교에선 아무런 해답도, 구체적인 실마리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예로부터 우리는 열다섯 살이 되던 해 태학太學(고구려의 교육기관)에 들어가 큰 배움의 길에 첫 발자국을 내딛었다. 궁리窮理, 정심正心, 수기修己, 치인治人의 도를 이미 지금의 청소년 때부터 익히고 체득하여 실천하도록 한 것이다.

상제님께서도 현세의 학교 교육에 일침을 가하시며, 큰 배움이란 무엇인지를 알려주신다. “이 세상에 학교를 널리 세워 사람을 가르침은 장차 천하를 크게 문명케 하여 천지의 역사役事를 시키려 함인데 현하의 학교 교육이 학인學人으로 하여금 비열한 공리功利에 빠지게 하므로 판밖에서 성도成道하게 되었노라.”(2편 88장)

돈, 명예, 출세를 위한 배움은 비열한 공리功利일 뿐이다. 이제는 판밖으로 눈을 돌려 상제님의 무극대도를 찾아야 할 때다. 누구라도 천지의 뜻을 깨우쳐 천지의 일을 하려는 큰 배움의 뜻을 품고, 그 길을 걸어갈 때 진정한 대인이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