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적 인간, 인간 꽃 외 (어트겅자르갈, 신상성, 김영민)
[입도수기]
진리적 인간, 인간 꽃
“사람을 살리려고 그런다.”라며 웃는 회사 동료의 눈빛은 진심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고 실제로 실천하며 남을 위해 사는지, 눈앞에 보이는 그들이 점점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보면 볼수록 예쁜 인간 꽃이 진정 그들이었습니다.
어트겅자르갈(여, 46세) / 태전보문도장 / 도기 153년 음력 5월 입도
종교에 대한 불확실성
1990년 봄 몽골에서 민주화 바람이 일어나 사회가 크게 흔들렸던 시절 저는 열두 살의 소녀였습니다. 민주화 운동의 영향으로 몽골 사회에서는 전에 볼 수 없었던 현상들이 생겨났습니다.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 계획경제 제도를 채택했던 몽골은 이때부터 엄청난 혼란을 겪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린 열두 살의 저한테는 마트 진열대에 소금 외에 아무것도 없었던 현상이 제일 강하게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거리에는 승복을 입은 사람들이 종종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저의 외할아버지도 승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언제부터 중이었는지 그때 왜 승복을 입었는지, 원래부터 입었는지도 저는 잘 모릅니다. 그저 중이 된 할아버지 집에 가면 할아버지는 종일 불경을 외우면서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약을 지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전에 친할머니가 아침에 끓인 차를 떠서 집에 있는 신단 같은 곳에 올려놓는 것을 본 것이 전부였던 저에게는 종교의 얼굴을 처음 본 경험이었습니다.
나중에 어른이 된 후에도 제가 처음 보던 그 종교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중이 아니면 불경을 볼 일도 없습니다. 그저 일이 생기거나 필요하면 절에 가서 돈 내고 중에게 불경을 외우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절에서 가져온 향을 피우거나 청수로 세수를 하는 것이 몽골인들의 대표적인 종교 예식이었습니다. 저 또한 그러한 환경을 보고 자라서 종교에 대한 큰 인식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돌아가시기 직전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어느 종교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세상 종교들은 그저 서로를 부인하고, 필요하면 전쟁할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는 괴물들 같았습니다. 그들의 말은 인류 평화를 외치지만 행동은 인류를 갈라놓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종교는 저에게 매력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세상은 신비함으로 가득 찬 곳
하지만 그런 저한테도 신관은 있었습니다. 즉 신神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자연과 주변의 모든 것이 신기해도 너무 신기했기 때문입니다. 절대 저절로 생겨나고 물리학적인 변화에만 의지해 생긴 것으로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에는 나만의 신을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내고 숨을 불어넣어 준 그 진짜 주인공은 나의 신이었습니다. 세상 종교는 다 헷갈려서 그 주인공의 이름을 다양하게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가끔 그 신을 향해 기도도 했습니다.
2013년 셋째 언니가 또 정신을 잃고 병원에 옮겨졌습니다. 이번에는 심장 멈춤도 있었고 증상이 심각하다는 의사의 말은 가족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그날 큰언니가 이상한 말을 꺼냈습니다. 셋째 언니가 신을 내려 받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숨을 이어 가기가 힘들 것이라는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들었다고 했습니다. 식구들이 신을 받을까 말까 이야기하는 중에 저는 마음속으로 그들을 비웃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학교 앞에서 그러고 있는 식구들을 친구들하고 비웃다가 일을 당할 뻔했습니다. 갑자기 미끄러져 오는 차 밑으로 다리가 쑥 들어가 버렸습니다. 다행히 차가 멈춰 무사히 지나갔지만 말을 잘못해 벌을 받는가 싶었습니다. 이를 식구들에게 말했습니다. 이후 언니의 신 받음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고 저 또한 적극 지원했습니다. 신을 받은 언니가 진짜인가 의심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영혼에 대해, 귀신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신을 받은 언니를 체험하면서 신명의 세계가 한없이 궁금해졌습니다. 서서히 사후 세계를 믿게 되었고 귀신의 존재도 믿게 되었습니다.
나의 신관이 깨지면서
2014년 8월 8일 출근하는 남편을 보내고 오전 일과를 보는 중 셋째 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아버지가 더 이상 볼 수 없는 곳으로 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부터 원망을 했습니다. 전날 밤 왠지 모르게 아버지한테 너무 가고 싶어 남편에게 빨리 와 달라고 했는데 동료를 바래다주고 오는 바람에 다음 날로 미룬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지도 못하고 보내 하늘이 멀고 땅이 단단했습니다.
그때 저는 첫 아이를 임신 중이었습니다. 충격으로 양수가 터지고 병원으로 옮겨져 미숙아를 안은 탓에 병원에서 정신없이 지내는 사이 식구들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 마지막 모습도 못 보고 보내 드렸습니다. 이렇게 남편이 아빠가 된 날 저는 아버지를 영원히 잃었습니다. 뵙지 못해서 그런지 아버지는 어딘가 있을 것만 같아 찾아다녔습니다. 아버지 집에도 갔고 언니 집에도 갔습니다. 아버지가 오르던 산을 오르고 거리를 걸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잘 보이는데 아버지만 안 보였습니다.
아버지를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수행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2016년에 둘째를 낳고 석사 과정을 공부할 좋은 기회가 생겨 한국에 왔습니다. 석사 공부를 하면서 저에 대해서도 조금은 더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스스로 신관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세계주의이며 온 인류가 한 덩어리로 평화롭기만 했으면 하는 마음이 그러한 세계주의로부터 나온 생각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비슷한 신념관을 가진 종교들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증산도는 알지도 못했습니다. 일상도 바쁘고 깊은 관심은 두지 않았습니다.
상제님 진리를 향해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난 과정은 아마도 상제님의 진리를 만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나 싶을 때도 있습니다. 종교에 매력을 잃은 것, 저만의 진짜 신을 믿었던 것, 명색이 종교라면 지구 인류를 갈라놓으면 안 된다는 굳은 생각,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싸움 없이 한 공동체로 잘 지내기를 바라는 세계주의, 신명 세계에 대한 큰 관심, 수행에 대한 관심, 이 모든 것이 상제님께서 남기신 길을 제가 함께 걸어갈 준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생각이 2020년 상생문화연구소에 입사하고 나서 더 굳어져 갔던 것 같습니다. 입사하기 전에 상생문화연구소에 대해 알아보기도 했습니다. 어떤 유튜브 영상에서 수행하는 장면이 나와 더욱 좋았습니다. 입사하고 나면 이 사람들하고 수행한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입도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입사하고 나서도 수행은 하고 싶은데 입도와 연결될 우려가 있어 갈피를 못 잡고 많이 헤맸습니다.
그런 와중에 연구소에 수행방이 열려 수행할 좋은 기회가 생겼습니다. 수행을 시작하고 얼마 후 제사상 같은 것이 보이는 한편 저도 모르게 입에서 제사라는 말이 불쑥 나왔습니다. 잠깐 졸았나 싶어 신경 안 쓰려고 했지만 계속해서 생각나 찜찜해서 제사를 올렸습니다.
이후 신도 체험 등은 크게 없었지만 수행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의 차이를 심신의 상태를 통해 많이 느꼈습니다. 수행을 지속적으로 하면 확실히 덜 피곤하고 심리적으로도 긍정적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수행을 통해 좋은 결과를 얻고 싶은 욕심도 생기고 수행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시간이 흘러갈수록 제 마음은 생각과 다르게 움직였습니다. 『도전道典』 속 내용도 제가 기존에 가졌던 신관과 똑같고 신명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신비로웠습니다. 저에게 연구소는 마치 동화 속 신비의 나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세상을 위해 사는 사람들과 함께
그런데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연구소에 있는 봉직자분들을 보면 처음에는 신기했다가 나중에는 존경스러웠습니다. 최의철 실장님, 김동영 부장님 등 여러 봉직자분들과 이사장님께 평생 은혜로 생각해도 넘침이 없을 정도로 감사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점심 먹으러 나가다가 회사 문 앞에서 양섭용 차장님이 “사람을 살리려고 그런다.”라며 웃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눈빛은 진심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천하며 남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어떻게 버리고 살 수 있는지, 눈앞에서 보이는 그들이 점점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보면 볼수록 예쁜 인간꽃이 진정 그들이었습니다.
점점 제 마음의 물은 자꾸 생각과는 달리 거꾸로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수행을 이어 가기 위해서라도 입도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인간 꽃들과 계속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수행을 인도해 주신 최의철 실장님께 입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남편한테 말했습니다. 남편이 하는 한 마디에 모든 것이 정리되었습니다.
“당신은 그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뺏긴 거야.”
마음의 물이 흐르는 대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신비한 나라의 매력적이고 착한 백성들과 그 멋진 활동은 따라 하지 못해도 흉내라도 내며 늘 응원하고 정성 신앙을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전 세계가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상제님과 태모님, 그것을 이어받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 주시는 태상종도사님과 종도사님, 사모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보은!
우주의 빛이 내 몸에 내려오다
신상성(남, 81) / 서울잠실도장 / 도기 153년 음력 4월 입도
“숨은 산소가 아니라, 우주의 빛을 호흡하는 것입니다!” 저의 80년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는 신민식 원장님의 이 말 한마디에 몸속 고속도로가 새롭게 뻥 뚫렸습니다. 충맥호흡법 수행은 제게 와서 꽃이 되어 주었습니다.
우주의 빛을 호흡한다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나를 만나면 나를 죽이고”
하나.
“숨은 산소가 아니라, 우주의 빛을 호흡하는 것입니다!” 신민식 원장님의 이 말 한마디가 순간적으로 저에게 멍!을 때렸습니다. 고개를 돌려 창문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어지럽습니다. 저의 80년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는 딱! 이 단어 한마디에 몸속 고속도로가 새롭게 뻥! 뚫린 것입니다. 저를 세속의 진흙탕에서 연꽃으로 틔워 준 대오각성 명언입니다. ‘단순한 산소가 아니라 빛을 들이마신다!’ 어쩌면 당연한 이 진리를 외면하고 왜 이제까지 미망에서만 헤엄쳐 왔을까. 이제 미혹의 벼랑에서 또 하나의 화두를 즐겁게 내려놓을 차례입니다. ‘자성어’自性語였습니다. 빛을 호흡한다는 팩트 하나가 제 몸과 맘을 전혀 새롭게 뒤집어 놓는 것 같습니다.
실제 우리들은 빛을 마시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산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주의 파장이 아닌가. 똑같은 사물을 쳐다보아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기쁨과 슬픔으로 갈리기도 하고 길게는 행⋅불행으로 분리되기도 합니다. 길고양이를 두 사람이 똑같이 쳐다보아도 어떤 사람은 불쌍하다며 달려가 안아 주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무섭다고 도망가기도 하고 심지어 기분 나쁘다고 발길로 차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길고양이 자체는 그대로입니다. 다만 사람들의 인식에 따라 불쌍하게 또는 징그럽게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각기 자기 인식에 대한 고집, 심지어 독선이 남에게까지 피해를 주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바로 산소냐 빛이냐, 생각의 차이가 일상을, 인생을 전혀 다르게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내게 와서 꽃이 되어 준‘충맥호흡법 수행’
잠실 자생한방병원의 세미나실 창문으로 올라가는 4월의 봄 햇살 아지랑이에 저는 아직도 멍!을 놓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비로소 내게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이 생각났습니다. 역시 인연이란 아무나 되는 게 아니고 인연이 되어야 비로소 자석같이 찾아서 붙는가 봅니다. 우리들은 매월 2회씩 이곳에서 ‘충맥호흡법’을 수련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호흡을 그냥 단순한 산소를 마신다고 생각하는 것과 빛으로 온몸에 받아들인다고 판단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즉 지렁이와 독수리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땅속 지렁이에게는 단순한 미생물만 보이지만, 하늘 위 독수리는 천하를 다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저는 약 25년간 국선도 단전호흡법에만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충맥호흡법을 만나면서 새로운 인연이 되었습니다. 충맥호흡법은 백회에서 회음까지 고속도로를 뚫어 가는 수련법입니다. 우리들은 지금 우리 몸 한복판을 벤츠로 왕래하는 전기자동차 운전법을 숙달하고 있습니다. 그뿐인가! 뇌 십자로 정중앙의 숨은 신 ‘송과체’라는 뇌 핵기지를 발견하게 되면서 제 몸은 새로운 블랙홀 세계로 진입하게 된 것 같습니다. 신 원장의 한방의학적 기氣 운용과 우주 운행의 논리는 우리 민족의 뿌리 상고 시대 역사철학적 존재론 문제도 겸하고 있습니다.
영성의 미사일을 던져 주신 종도사님
제2의 인생 길목에서 저에게는 목숨같이 소중한 인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 원장은 수련 때마다 지극정성으로 우리들에게 강의 자료를 프린트해 주고 관련 책자 등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저는 최근 한국독립운동사 중 ‘한의사 항일독립투사, 신광렬의 평전(달이즈믄바람에)’을 집필하느라 매일 아침이면 세면대에 코피를 쏟았습니다. 그러면서 틈틈이 충맥호흡을 했습니다. 그러자 점차 밤을 꼬박 새우면서도 이상하게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충맥호흡 특강 날에는 새벽부터 출발을 준비했습니다. 홍천 임시 숙소에서 서울로 차를 몰아서 혼과 몸 그리고 몸빛을 바꾸는 수련에 참가해 왔습니다. 교수들 기질이란 게 우선 남을 잘 믿지 않습니다. 과학적인 근거나 논리가 아니면 고개를 돌립니다. 다행히 한의사이자 융합고고학 박사인 신 원장의 특강이어서 『환단고기』 이론과 충맥호흡 실기에 매혹되어 매월 2회씩 이렇게 달려오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신민식 원장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래 단전에서만 맴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충맥호흡법’을 터득하면서 백회에서 회음까지 고속도로가 뚫리기 시작했습니다. 국선도의 축기가 연계되어 백회가 활화산으로 폭발된 것입니다. 곁에서 같이 수련하는 동료 교수들도 신 원장의 실기 지도를 열심히 따라 해 오고 있습니다. 첫 번째 백회가 순간적으로 뚫린 것은 안경전 종도사님과 악수를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영성의 미사일이 시멘트 같은 저의 백회를 뚫은 것 같습니다. 바로 청담동 새천년호텔에서의 <조화선 명상 포럼>에서였습니다. 그날 강단 앞으로 나가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큰 영광입니다.
첫 번째 인연은 종도사님에게서 백회가 뚫린 것이고, 두 번째 인연은 신민식 원장님에 의해서 충맥호흡법 고속도로가 개통된 것입니다. 전혀 새로운 인연입니다. 제가 살아가는 이유에 대한 가치 문제, 존재론적 블랙홀의 의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약 80년간 헛발질 끝에 한용운의 ‘날카로운 첫 키스’를 만나게 된 것은 금년의 큰 행운이자 소중한 인연입니다.
삶과 죽음 그리고 나
둘.
‘나는 누구인가?’ 밑그림이 그려질 것 같습니다. 죽음은 생물입니다. 생물이 사멸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면 죽음 이후에 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생물학적 문제를 뛰어넘는 영성 문제 또는 종교 문제에 누구나 불안하고 불편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자칫 사교에 빠져서 많은 재산을 날리고 사회적 문제까지 야기하는 일들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살아갈수록 용기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감이 더 두꺼워지는 것은 왜 그럴까, 때때로 손톱 무좀같이 우리들의 눈썹을 가로막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죽음을 부정하거나 회피할수록 죽음은 더욱 가까이에서 자신의 옆구리를 송곳으로 찔러 댑니다. 걱정과 불안도 죽음과 연계되어 포장돼 나오곤 합니다. 죽음을 경계하고 도망칠수록 죽음은 더 목공 본드처럼 더 가까이에서 달라붙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수용하고 동반할 때 그놈은 좋은 친구이자 반려자가 됩니다. 어떻게 생각하든 그놈은 죽을 때까지 동행해야 합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깨동무하고 같이 가야 합니다. 어쩌다 태어난 우리들은 또 어쩌다 가는 것입니다. 환생하든 안 하든 그다음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고민한다고 해서 이생에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머님의 지극하신 염원 기도
저는 기氣와 영성 문제에 대해 그동안 유난히 함몰되어 있었습니다. 어디에 무슨 도사가 있다고 하면 지옥까지 찾아갈 정도였습니다. 기공술과 도인이라면 자다가도 뛰쳐나갔습니다. 신림동 서울대 뒤 관악산 골짜기에 연줄도 없이 연을 날린다는 도사를 만나러 한 달간이나 밤 12시면 산속을 몰래 헤메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1995년에는 중국 낙양외대에 교환교수로 파견 나가 있을 때에도 도사를 찾아 대륙 전역을 헤메고 다녔습니다. 당시 유명한 낙양의 엄신 수제자도 만나고, 심양의 빠륜궁八輪功 도사들도 만나서 그들의 기묘한 기공술도 배웠습니다. 또한 사기꾼도 만나고 진짜 도술인도 살짝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헛발질이었습니다. 허깨비들한테 시간만 낭비했습니다.
우리 어머니 외가는 대대로 불교 집안입니다. 외할머니는 다락방에 부처님을 모셔 놓고 꼭두새벽이면 청수를 올리고 향을 피웠습니다. 맹신적인 면도 없지 않았지만 또 무시할 수 없는 영성의 존재라는 것도 분명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 엉덩이 뒤를 따라 전국의 웬만한 큰 사찰은 안 다녀 본 곳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팔공산 갓바위는 우리 집에 크고 작은 일이 터질 때마다 어머니가 찾았습니다. 어머니는 때로 무당같이 신기神氣가 강했습니다. 어쩌면 여승이나 무당으로 살았어야 더 편안하지 않았을까.
결국 우리 부모님은 제가 고교 입시반 때 이혼했습니다. 함경도 사나이 기질이 강한 아버지와 역시 신기가 강한 어머니의 성격이 잘 안 맞았습니다. 어머니는 조선조 말기 몰락한 귀족인 민씨 집안의 외가로서 마포구에서 성장했습니다. 혼인 생활은 파란만장한 일대기였습니다.
그 벼랑 끝 속에 저 또한 위험한 담벼락을 걸어왔습니다. 제가 사춘기 때에는 마산 3.15 의거 사건으로 체포되었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또 6.3 사태 주모자로 전국 수배를 당했습니다. 덕분에 제1공수특전단 요원을 거쳐 월남 백마부대에서 총알을 날려야 했습니다. 어쨌든 평범한 삶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목숨이 붙어 온 것은 어쩌면 어머니의 염불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저는 다시 진지한 가부좌를 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시천주주와 태을주, 그리고 도전道典으로의 삶
시천주와 태을주 주문을 외우고 『도전道典』에 대한 깊은 공부를 이제부터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강옥 수호사님의 지도로 최근 『도전道典』의 가르침을 듣고 있습니다. 또한 매주 동방신선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두 손을 모으고 있습니다. 또한 신 원장의 『환단고기』 등 특강에 매료된 교수들이 ‘조화선’이란 단톡방을 만들어 연구 모임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불교 신자인 아내도 동참하여 STB 상생방송을 열심히 시청하고 있습니다. 앞뒤로 잘 매듭된 행복의 실타래가 아닌가 합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우선 이렇게 입도를 해서 더욱 용맹정진할 것입니다. STB 상생방송은 교양 프로그램이 풍부해서 청소년들에게 매력적인 볼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민족의 역사철학적 뿌리에 대한 인문학적 지식 등은 일반 국민들에게도 필수적으로 인지해야 할 콘텐츠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현재 중고교 역사와 문학 교과서는 크게 기울어진 운동장입니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전통문화와 역사를 올바르게 전수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제가 상생방송에서 ‘정통한국문학사’도 강의하고 싶습니다. 평생 한국문학을 연구해 온 제 모든 것을 헌신하고 싶습니다.
삶의 역사서, 도전道典
김영민(남, 55세) / 안성봉산도장 / 도기 153년 음력 5월 입도
『생활 도전』을 읽기 시작한 순간부터 ‘아! 어릴 적 보고 배우며 들어 왔던 실제 역사들과 내가 알고자 했던 모든 것들이 여기에 다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친근하고 재미있게 읽혀서 단 며칠 만에 완독을 했습니다.
삶의 허망함을 풀어 준 상생방송
2015년, 과거 병력의 재발로 인해 투병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병석에서 TV를 보던 중 채널을 검색하다 ‘상생방송’ 화면에 멈춰져 처음 방송을 접하였습니다. 직장 생활 중 의도치 않게 중병을 얻음으로 인해 건강, 직장, 가족, 경제 등 밑바닥까지 모든 걸 잃게 된 후,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또 선천 수행 시에 나름대로 마음을 많이 비우며 공부를 하였지만, 어딘가 뚫리지 않던 궁금함과 삶의 허망함 등으로 인해 고민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상생방송을 접하고 보니 제가 지금까지 생각해 왔었고 바라던 것이 여기에 나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깐 본 방송이었지만 마음이 이끌린 저는 안내된 대표 번호로 연락하여 간단한 상담 답변을 드리곤 잊어버렸는데, 며칠 뒤에 『생활 도전』이라는 책자를 선물로 보내 주시더군요. 처음엔 별생각 없이 훑어보다가 어느 날 첫 장부터 읽어 봐야겠단 생각으로 『생활 도전』을 펼쳐 들었습니다. 책을 읽기 시작한 순간부터 ‘아! 어릴 적 할머니들을 통해 보고 배우며 들어 왔었던 실제 역사들과 내가 알고자 했던 모든 것들이 여기에 다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친근하고 재미있게 읽혀서 단 며칠 만에 완독을 했습니다.
종도사님 말씀들이 심금을 울리며
그러던 당해 후반기부터 이듬해 전반기까지 극도로 몸 상태가 안 좋아져서 이 병원 저 병원을 떠돌며 치료를 받았으나, 효과 없이 점점 죽어 가는 지경까지 이르자 삶을 거의 포기하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시한부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2017년 어느 날 대구시지도장에 계시는 분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군산에서 북 콘서트가 열리는데 함께 가 보지 않겠느냐?”라고 물어봐 주셨습니다. 저는 “제 몸이 단체로 차를 타고 어디 갈 만한 몸이 아니라서 함께 가면 주변 분들께 민폐가 될 것 같으니 생각해 보고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하고 통화를 마쳤습니다.
며칠 뒤 가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 가 봐야겠단 생각이 들어 그분께 연락을 해서 “함께 가긴 힘들 것 같으니 혹시 개인적으로 가도 됩니까?”라고 여쭸습니다. 그랬더니 가능하다고 하셔서, 며칠 뒤 참석 출입증을 받아 혼자서 군산으로 향했습니다.
힘들게 도착하였으나 생각보다 시간적 여유가 있게 도착하여 맨 앞자리에 앉았고, 행사가 시작되어 종도사님을 처음 뵙게 되었는데 말씀하시는 것마다 제 가슴이 요동을 치는 느낌이었습니다. 몸이 아픈 것도 잊은 채 몇 시간 동안의 말씀을 듣고 나온 후 행사장 바깥의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하늘이 더 웅장해 보이고 삶이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그런 이후 또다시 몸이 극도로 나빠지길 반복하여 몇 년간 잊은 듯했으나 저도 모르게 그동안 ‘태을주 주문 수행’으로 하루하루를 버텨 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지난 2021년 몸은 아프고 괴로우나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는 그냥 겸허히 받아들이듯 인생을 마무리할 곳을 찾던 도중 거주지로 정한 곳이 경기도 안성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신변 정리를 하며 일 년을 살던 어느 날, 이왕 죽을 거 주문을 읽으면 살 수 있다는데 한번 해 보자는 생각에 2022년 12월 ‘동방신선학교’ 멤버십에 가입하여 그때부터 안내에 따라 실제 수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일기도의 생각으로 초를 밝혀 수행한 지 100일 후, 지난번 군산에서 다시 콘서트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마지막 힘을 짜내어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행사장 맨 앞자리에 앉아 기다리다 시작된 이번 행사엔 종도사님께서 ‘선려화’를 내려 받아 치유 수행을 하는 내용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동방신선학교 홈페이지에서 접한 적이 있었으나 현장에서 선려화를 직접 내려 받아 수행을 하니,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영대 혈 위쪽으로 몸이 뜨거워지면서 몸 안에서 번쩍번쩍하는 느낌이 있었으며, 눈앞까지 번쩍임을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또 다른 경험을 하고 도생분들께서 거의 다 빠져나가신 행사장을 조용히 마지막으로 나오면서 올려다본 하늘은 지난번처럼 웅장하고 드넓고 거룩하게 느껴졌으며, 제가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가득 찼습니다.
이후 며칠 동안 동방신선학교를 통해 수행하며 공부를 해 보니 ‘이제 더 이상 미루다가는 때는 늦으리!’라는 시급함이 직감적으로 들어, 시일을 보던 중 이곳 안성봉산도장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입도 교육과 수행 시에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역사와 진리, 일어나는 모든 경험들이 경이로움과 함께 즐겁고 신나며 하나라도 더 알고 싶고 배우고 싶은 의욕으로 충만해짐을 느꼈습니다. 시간과 날이 갈수록 상제님 진리에 더 가까워짐과 동시에 하루 속히 강건체가 되어 상제님의 진리를 받들어 참된 일을 해 나가는 바른 일꾼이 되며 천하사의 밑거름이 되고자 스스로를 다독여 봅니다! 보은!
©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