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산채지가 연재에 앞서 | 최수운 대신사가 이름을 바꾸신 까닭

[기고]
김남용 / 본부도장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豹死留皮 人死留名)는 속담俗談은, 살아생전 헛되지 않은 삶을 영위한 사람은 그 명예로운 이름이 길이 남는다는 만고의 성담聖談입니다. 이름이 곧 그 사람인데, 그 이름을 바꾸는 것은 과거의 삶과 결별하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강한 의지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불자들이 법명法名을, 가톨릭에서 세례명을, 연예인들이 예명藝名을 쓰는 것도 같은 맥락이겠지요. 저는 이름이 운명에 영향을 주니까 될 수 있으면 좋은 이름으로 개명해야 한다는 작명가나 개명예찬론자가 아니지만, 우리 역사 속의 특별한 한 분을 소개하기 위해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최수운 대신사를 기억하시나요


지금부터 약 200년 전 태어난 최수운崔水雲 대신사大神師(1824~1864) 이야기입니다. 익히 알고 계신 것처럼 조선 조정이 그를 사도난정邪道亂正으로 몰아 처형한 관계로 그분의 생애 자료 자체가 매우 단편적입니다.

우리가 그를 수운水雲 대신사大神師라고 높여 부르는 것은, 조선이 1905년 11월 일본에 외교권外交權을 빼앗기고, 1907년 7월 군권軍權마저 내주고, 12월에 13도 의병의 한양 탈환 작전마저 실패하고 난 다음에야 가능하였습니다. 1908년 4월 천도교 부구部區총회에서 “대신사大神師”라고 부르자고 결의한 것입니다.

최수운 이전, 최수운 이후 인류 지성사의 흐름에서 최수운 대신사는 우주의 주재자 하나님(상제님, 천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대화를 나눈 빛나는 분입니다. 7~8개월 지속된 이 사건을 천상문답天上問答이라고도 부르는데 동서양의 어떤 기록을 막론하고 유일한 사건입니다. 이를 통하여 수운은 인류에게 상제님을 모시는(侍天主) 시간대를 열어 주었습니다.

그동안 상제님은 나라님이 천제를 지낼 때나 거명되는, 아주 존엄하고 범접하기 어려운 대상이었습니다. 글 한 줄 읽을 줄 모르던 이 땅의 수많은 하층민들이 강경 뻘판에 삼례 들판에 서슴없이 모여들어 체면 가리지 않고 함께 먹고 소통하면서 시천주侍天主를 노래하였음은 오직 그로 인함이었습니다.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경부 경의 철도는 거의 무임금에 가까운 노동력을 기꺼이 제공한 시천주꾼들에 의하여 가능하였습니다.

서양의 이름 없는 철학자도 우리나라에 오면 빛을 보는 이때, 그의 삶은 백번 조명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저는 간단하나마 수박 겉 핥기 수준으로 그의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1859년 10월 최수운은 처가가 있던 울산에서 힘을 기울이던 사업에 크게 실패하고 낙망하여, 가족들을 이끌고 일찍이 부친이 마련해 둔 경주 용담에 돌아온 터였습니다. 용담은 구미산 산중에 있는 제대로 된 집도 아니요 다만 비바람만 막을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초겨울에 괴나리봇짐만을 챙긴 채 산중으로 들어오는 발걸음은 너무도 무거웠습니다. 수운은 그때의 정상이 하도 애처로워 까막까치조차도 자신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고 참담한 심경을 술회하였습니다. <용담가. 1860년 4월 하순>

1859년 겨울 경주 구미산 속 춥고 배고픈 어려운 상황에서 최수운 행장을 다룬 기록은 아주 간단합니다. 우선, 중한 맹세를 다시 하였다(기도생활을 말합니다). 이름을 제우濟愚로 고쳤다. 불출산외不出山外 네 글자를 문 위에 써 붙였다. 하루 세 번 집 앞 용담정에서 청수를 길어 모시고 기도했다. 이듬해(1860년) 봄에는 ‘도기장존사불입道氣長存邪不入 세간중인부동귀世間衆人不同歸’라는 입춘시立春詩를 지어 벽에 붙였다.

이때 수운은 생애 가장 쓸쓸한 생일(10월 28일)을 보냈을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할 도道를 깨치지 못하면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는 뜻’(不出山外)을 문 위에 써 붙이고, 청수를 모실 때마다 쳐다보며 결의를 다지고, 기도에 올인을 합니다. 처자妻子들의 고생담은 아예 기록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입춘에 벽壁 위에 써 붙인 글은 “도道의 기운이 오래 있으니 사악함이 들어오지 못하고 세상의 중인衆人과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내용으로, 그의 의지가 더욱 확고해졌음을 새삼 알리고 있습니다. 봄이 왔지만 경주 용담 최수운이 기도하는 곳에 누가 감히 얼씬거릴 수 있었을까요?

누구에게나 살다 보면,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일도 허다하고, 하고 싶지 않지만 또 해야만 되는 일도 생기게 마련입니다. 최수운이 외롭게 구도하면서 다짐한 “산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를 깨뜨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경신년(1860) 4월 5일 마침 이날은 최수운의 장조카 최맹륜崔孟倫(1827~1882, 수운의 아버지가 들인 양자養子, 수운보다 3살 어리다)의 생일이었습니다. 맹륜은 산속에서 고생하는 삼촌에게 따뜻한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삼촌은 도道를 좋아하지만 앞뒤가 꽉 막힌 외골수는 아니었습니다. 울산에 계실 때 양산 통도사 근처의 천성산 내원암에 들어가 기도를 하였는데 47일째 숙부가 별세하는 체험을 하고 수행을 중단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삼촌은 고향에 돌아와 1년 시묘살이를 마치고 다시 이듬해 천성산 적멸굴로 가서 49일 입산 기도를 마쳤습니다. 그때 2차 기도 후 울산에서 용광업을 경영하였는데 어쩌다 크게 실패하여 고향에 돌아와 은둔 중인 것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덕불고德不孤 최맹륜은 덕인德人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삼촌을 초대할 수 있을까에 대해 궁리 끝에 삼촌을 위하여 옷을 한 벌 짓고 갓도 준비하였습니다. 의관衣冠을 마련한 것입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의지할 곳이 없어 산중에 칩거하는 이가 외출복이 있을 리 만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간에 맞추어 말을 보냈습니다. 적어도 수운이 출타를 거부할 외형적 명분이 없어졌습니다. 최수운이 얼마 동안 머뭇거렸을지 알 수 있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구도의 뜻을 품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때 최수운의 마음속에 소용돌이쳤을 망설임의 크기를 짐작할 뿐입니다. 말없이 가장家長의 의미 있는 출타를 지켜보는 가족들의 시선. 불출산외不出山外 글귀, 입춘서, 자신을 위한 의관과 대기하고 있는 말….

이날은 양력으로 5월 25일 화창한 초여름 날이었습니다. 용담정에서 맹륜이 사는 구미산 밑 지동芝洞까지는 1리里 정도 거리라고 합니다. 요새 학교 마당에 그려진 400미터 트랙 한 바퀴 거리를 울퉁불퉁한 오솔 산길로 상상하면 됩니다(지금도 흙길 그대로입니다). 약주 한잔이 그리워 가는 길이 아니고, 더구나 가족들의 희생을 담보로 자신이 세운 결의를 파기하러 가는 길은 더더욱 아닙니다. 몰락 양반의 자식으로 스무 살 때 처음으로 세상에 장사하러 나갈 때 바라보았던 주변 회상은 말 위에서 다시 둘러보아도 여전하기만 한데~, 일생을 관통한 다양한 감상들이 서로 겹쳐져 혼돈混沌의 의식 상태에 빠져들어 갑니다. 그랬을 겁니다.

그렇게 지척의 거리에 수운을 존경하는 조카가 있었습니다.
*1)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맹륜이 말을 보내고 국과 술을 덥히던 적당한 시간에 수운은 조카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말이 그렇지 세 살 터울의 삼촌, 20여 년간 한집에 같이 살았던 이물異物없는 사이인 그를 온 식구들이 나와서 기꺼운 모습으로 환대합니다. 용담 산속에 찾아와 칩거한 이후 처음으로 느껴 보는 환한 얼굴들! 경계할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동안 수행의 내공과 경건함으로 가득한 수운의 마음에 따뜻한 온기의 빛이 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최수운 대신사는 수행 기간 중 일탈逸脫하여 조카 집에 출타한 이 사건事件을 그의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수운가사水雲歌詞』에 기록하지 않습니다. 수행자라면 누구나 암묵적으로 느끼는, 굳이 알리고 싶지 않은 일말一抹의 불편한 진실? 인류 역사를 통하여 너무너무 중요한 마디일 수밖에 없는 이날 이때, 수운은 잠시 후에 일어날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1) 약 반년 후의 일이지만 이분(최맹륜)은 최수운을 스승으로 모시는 첫 입도자가 됩니다. 4년 뒤 최수운이 대구에서 처형되고 나서는 그 시신을 수습하여 용담 서원西原에 안장한 분이기도 합니다.



그날, 경신년 4월 5일, 낮부터 밤까지
사월이라 초오일에 꿈일런가 잠일런가 천지가 아득해서 정신수습 못할러라

공중에서 외는 소리 천지가 진동할 때 집안사람 거동 보소 경황실색驚惶失色 하는 말이

애고 애고 내 팔자야 무삼 일로 이러한고 애고 애고 사람들아 약藥도사 못해 볼까

침침칠야沈沈漆夜 저문 밤에 눌로 대해 이 말할꼬 경황실색 우는 자식 구석마다 끼어 있고

댁의 거동 볼작시면 자방머리 행주치마 엎어지며 자빠지며 종종걸음 한창 할 때

공중에서 외는 소리 물구물공勿懼勿恐 하여스라 호천금궐昊天金闕 상제님을 네가 어찌 알까 보냐

초야에 묻힌 인생 이리 될 줄 알았던가 개벽시開闢時 국초일國初日을 만지장서滿紙長書 나리시고


십이제국十二諸國 다 버리고 아국我國 운수 먼저 하네 그럭저럭 창황실색 정신수습 되었더라 <안심가. 1861년 8월 하순>#]

수운은 자신이 상제上帝님을 만나는 신비 체험을 『수운가사』 곳곳에 언급하고 있지만, 『용담유사龍潭遺詞』에 실린 「안심가安心歌」에서 비교적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안심가는 ‘현숙한 내집부녀 이글보고 안심하소’ 라는 구절로 시작하듯이 그의 구도 체험 시간에 함께한 처자妻子들이 겪었을 놀라움이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시간대를 살펴보면 이미 저녁입니다.

『도원기서道源記書』라는 책을 보면, 수운이 조카 생일에 마지못해 참석하였으나 곧 몸이 떨리고··· 하여 급히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통 어른이 좌정하면 먼저 술을 한 잔 올리는 것이 상례이고 수운도 약주를 한 잔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흥에 겹게 식사를 마무리하지 못한 분위기가 기록의 행간에 묻어 나옵니다.

몸에 이상을 느낀 삼촌을 맹륜이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겠지요. 당연히 모셔 올 때와 같이 시자侍子를 붙였을 것입니다. 그 시기를 수운 연구에 평생 애쓰신 표영삼 선생은 오전午前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미 한밤중입니다. 수운의 아내가 행주치마를 벗지 못하고 머리는 헝클어진 채, 방구석마다 자식들이 끼어서 울고 있는 가운데 넋두리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낮부터 시작된 수운의 신비 체험은 처자식들이 저녁이 되어 거의 자포자기로 실성한 분위기까지 몰고 갑니다. ‘물공물구’는 수운뿐 아니라 온 식구들에게 적절한 표현이지요. 낮이라면 약이라도 구해서 어떻게 해 볼 텐데~ 부인의 절망 어린 넋두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너는 상제上帝를 모르느냐? 수운이 득도得道 시 첫날 받아 공개한 첫 메시지는 “나는 호천금궐 상제님이다.”, “십이제국의 괴질운수가 온다.”, “상제님이 우리나라 운수부터 먼저 정한다.”, “한울님이 이 몸 내어 아국운수 보전하네.”입니다. 어두운 밤, 등불을 켜고 상제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는, 온 가족이 “존경하는 우리 남편(아버지)은 이제 정말 미쳤구나!” 하는 만장일치 인증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전개되었습니다. 그리고 『도원기서』에서는 상제님이 수운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제우로 이름을 고친 사연을 찾아서


제가 매우 무례하지만, 『도원기서』의 저자에게 한마디 유감을 표명하고 싶습니다. 이때 최수운의 자字는 도언道彦(선비 언)이 아니라 성묵입니다. 경주 용담 들어온 그달, 이름을 제선濟宣에서 제우濟愚로 바꿀 때 같이 바꾼 것이지요. 호號도 수운水雲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므로 최수운의 일생을 담은 기록이라면, 도언道彦은 2% 적절치 못합니다. 왜 그가 제우濟愚라는 이름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는가가 부각되어야 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고치고 7~8개월 동안 수행에 전념하고 오매불망하던 상제님을 만났다면, 어딘가에 최수운이 직접, 개명改名을 결단한 배경을 세상에 알렸으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분명 수운의 신비 체험은 한 개인 구도자가 아닌, 그로 인해 아국我國 운수가 보전되고, 인류의 역사 흐름에서 보면 상제님을 직접 뵙고 아버지라고 부른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도덕 질서의 새 기틀을 놓은, 천명天命 받은 선각先覺이기 때문입니다.

포덕 시대를 알리는 신교가 내리다 최수운의 신비한 신교神敎 체험은 3년 동안 계속되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보통 7~8개월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 해(辛酉, 1861년) 봄에 수운은 정신을 가다듬고 자신의 체험을 담은 글짓기에 집중합니다. 그것은 상제님의 명命이기도 했습니다. 그때까지 용담에는 불출산외不出山外와 입춘시立春詩가 걸려 있었는데, 어느 날 상제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신교神敎가 내려왔습니다.

너의 깨달음의 전과 후, 그리고 그에 따른 길흉화복은 나와 관계되지 않을 수 없다. 네가 용담정에 들어온 이후로 이름과 호를 고치고 산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작정했다. 그리고 이른바 입춘시를 썼다. 이런 시구詩句를 벽에 걸어 놓고 세상을 조롱하고 있으니 이는 실로 가소롭기 그지없다. 너는 이제 생각을 바꿔야 하느니라. 이후로는 사람을 가르치고 진리의 덕을 세상에 펼쳐야 하느니라. - 『도원기서』


곧 세상과 단절을 의미하는 불출산외不出山外와 입춘시의 글은 깨달음을 얻기 전前의 일이므로 접고, 대신 이제 세상과 소통하는 이른바 포덕布德 시대를 명하신 것입니다.
*2)

*2) 그전에 조카 맹륜의 입도 사건이 있었습니다. 큰 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삼촌이 비 한 방울 옷에 묻히지 않고 처마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포덕布德, 사람을 가르치고 진리를 세상에 펼친다 『동경대전』의 「포덕문布德文」은 그런 의미에서 수운이 왜 포덕을 하는지, 수운 자신의 도道와 서도西道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확인해 볼 수 있고, 자신의 꿈과 이상을 세상에 본격적으로 펼치는 선언문의 성격을 읽을 수 있습니다. 첫 문단은 너무나도 중요하므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포덕문布德文 1861년 7월 중순>>
盖自上古以來(개자상고이래) 春秋迭代(춘추질대) 四時盛衰(사시성쇠) 不遷不易(불천불역)
是亦(시역) 天主造化之迹(천주조화지적)
昭然于天下也(소연우천하야) 愚夫愚民(우부우민) 未知雨露之澤(미지우로지택)
知其無爲而化矣(지기무위이화의)
저 옛적부터 봄과 가을이 갈아들고 사시四時가 성盛하고 쇠衰함이 옮기지도 못하고 바뀌지도 아니하니 이 또한 천주天主님 조화造化의 자취가 천하에 뚜렷한 것이로되 어리석은 사람들은 비와 이슬의 혜택을 알지 못하고 무위이화無爲而化로 알았다.

自五帝之後(자오제지후) 聖人以生(성인이생) 日月星辰(일월성신) 天地度數(천지도수)
成出文卷而以定天道之常然 (성출문권이이정천도지상연)
一動一靜(일동일정) 一盛一敗(일성일패) 付之於天命(부지어천명) 是(시)
敬天命而順天理者也(경천명이순천리자야)
故(고) 人成君子(인성군자) 學成道德(학성도덕) 道則天道(도즉천도) 德則天德(덕즉천덕)
明其道而(명기도이) 修其德(수기덕) 故(고) 乃成君子(내성군자) 至於至聖(지어지성)
豈不欽歎哉(기불흠탄재)
오제 후부터 성인이 나시어 일월성신과 천지도수를 글로 적어 내어 천도의 떳떳함을 정하여 일동일정과 일성일패를 천명天命에 부쳤으니, 이는 천명을 공경하고 천리를 따르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사람은 군자가 되고 학은 도덕을 이루었으니, 도는 천도요 덕은 천덕이라. 그 도를 밝히고 그 덕을 닦음으로 군자가 되어 지극한 성인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부러워 감탄하지 않으리오.

又此挽近以來(우차만근이래) 一世之人(일세지인) 各自爲心(각자위심) 不順天理(불순천리)
不顧天命(불고천명) 心常悚然(심상송연) 莫知所向矣(막지소향의)
또 이 근래에 오면서 온 세상 사람이 각자위심各自爲心하여 천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천명을 돌아보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항상 두려워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최수운은 포덕문布德文 첫 줄에서 사시四時가 순환하는 자연 질서가 천주天主(=상제)님의 조화造化라고 천명합니다. 이를 모르는 것이 어리석음이다. 그래서 과거에 성인聖人은 천명天命을 받아 천도天道와 천리天理를 세상에 알려서 어리석은 사람을 일깨워 군자君子도 성인聖人도 되게 하였다. 근래에는 세상 사람들이 천명을 돌보지 않고 각자 제멋대로 마음을 쓰는 고로 어리석은 세상이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우주는 천주天主님의 조화造化뿐인데, 어리석은 사람들이 무위이화無爲而化를 빗대어 하늘 이치를 순종치 아니하는 것을 나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럴 때에는 천명天命으로 도道를 밝혀 그 덕德으로 사람들을 군자君子가 되게 하는 성인聖人이 나와야 하는 때라는 것이 수운의 지론입니다. 결국, 수운水雲은 천주天主님의 조화造化를 알지 못하는 우부우민愚夫愚民을 건지는 것을 일생일대의 사명天命으로 알고 이름을 제우濟愚로 고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글의 시각에서 보면, 천天을 이理로 보는 유학자들도, 신神은 죽었다고 선언한 서양의 철학자들도 또한 모두 우부愚夫 우민愚民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3)
이러한 고민을 하늘에 하소연한 사람이 서양에는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수운이 유일한데, 그 천명을 실천으로 옮기기에 현실적으로 그 과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포덕문의 다음 문장이 그것을 말합니다.
*3) 이렇게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 일부에서 이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포덕문 첫 구절은 최수운 자신이 세상을 향하여 자신이 경험한 천주님은 누구이고, 자신은 왜 천주님을 포덕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므로, 조화주 상제관이 아닌 이신론적 신관 주장은 무위이화에 포함시켜야 된다고 읽었습니다.


至於庚申(지어경신) 傳聞西洋之人(전문서양지인) 以爲天主之意(이위천주지의)
不取富貴(불취부귀) 攻取天下(공취천하) 立其堂(입기당) 行其道(행기도)
故(고) 吾亦有其然(오역유기연) 豈其然之疑(기기연지의)
경신년에 와서 전해 듣건대 서양 사람들은 천주天主의 뜻이라 하여 부귀는 취하지 않는다 하면서 천하를 쳐서 빼앗아 그 교당을 세우고 그 도를 행한다고 하므로 내 또한 그것이 그럴까 어찌 그것이 그럴까 하는 의심이 있었다.


서교에 대한 의구심 경신년(1860)이라고 하면, 수운이 경주 용담에 들어와 겨울을 지내고 맞은 첫해이자 도통을 받은 해입니다. 이 글을 보면, 수운은 경주 용담에 들어와서 완전한 은둔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는 귀를 어느 정도 열어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천명天命을 펼치는 데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과제와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이 구절은 영국과 중국의 2차 아편전쟁을 통하여 텐진조약(1860)이 체결되는 과정에 대한 소식으로, 조약 내용에 있는 <크리스트교 선교 자유 인정 건件>을 말합니다. 부도덕한 아편을 통하여 중국을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선교사들이 천주天主님을 앞세워 포교 활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4)
수운은 선교사들이 전하는 천주天主님에 대하여 강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의 기도 주제는 세간을 초월하는 영역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4) 표영삼 선생은 “수운은 기독교 문명이 건전하다고 믿었는데 이 소식을 전해 듣자 그들의 문명도 병들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풀이하였습니다.


수운의 기도 목표, 천주강령天主降靈 그러면, 최수운은 대체 무엇을 기도했을까요? 『대선생주문집大先生主文集』에 보면 1856년 수운이 울산에 있을 때 양산 통도사로 수행하러 간 기록이 있습니다. 천성산에 3층단을 쌓고 폐백을 바친 후 49일 지성 축원을 하였는데 …이축원심소항념而祝願心所恒念 여천주강령與天主降靈 지망유명교의只望有命敎矣…라 하였습니다. …당신의 마음속에서 항상 염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천주天主님께서 영靈을 내려 주시기를 축원하였다. 단지 천주님의 명교命敎가 있으리라는 것을 대망할 뿐이었다….

명교命敎의 의미 이같이 수운의 기도는 천주天主님의 강령降靈을 목표로 한다는 것과 함께 ‘명교命敎’라는 특별한 언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천주님의 영이 내려와 천명天命을 내려 주심과 더불어 신교神敎를 주시기를 간구한다는 점입니다.

수운의 첫 번째 49일 수행은 숙부의 별세로 이틀을 못 채우고 중단됩니다. 그리고 1년 후 다시 49일 수행을 마친 후 철점鐵店을 운영할 때에도, 집안에 기도소祈禱所를 차렸다고 합니다. 철점이 실패하고 용담에 돌아와서도 그의 기도는 지속되었으며 기도 제목 또한 일관되었으리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경주 용담에 은둔하였어도 천주天主님에 관해서라면 언제든 촉각이 서 있었음을 기록으로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나온 ‘중重한 맹세를 다시 하였다.’는 이를 말합니다.

수운의 수양녀인 주씨朱氏는 수운의 구도 생활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언제 보아도 책을 펴고 있었다. …… 밤에는 나가서 한울님께 절을 하시되 수없이 많이 하시더라. 새로 지은 버선이 하룻밤을 지내고 나면 버선 앞코가 다 이지러지고 상하도록 되었다.” <『신인간』 1927년 8월호>

마침내 만난 상제님, 그 첫 메시지
不意四月(불의사월) 心寒身戰(심한신전) 疾不得執症(질부득집증)
言不得難狀之際(언부득난상지제)
有何仙語(유하선어) 忽入耳中(홀입이중) 驚起探問則(경기탐문즉)
曰勿懼勿恐(월물구물공) 世人(세인) 謂我上帝(위아상제) 汝不知上帝耶(여부지상제야)
問其所然(문가소연) 曰余亦無功故(왈여역무공고) 生汝世間(생여세간) 敎人此法(교안차법)
勿疑勿疑(물의물의)
曰然則(왈연즉) 西道以敎人乎(서도이교인호) 曰不然(왈불연) 吾有靈符(오유영부) 其名(기명)
仙藥(선약) 其形(기형) 太極(태극)
又形(우형) 弓弓(궁궁) 受我此符(수아차부) 濟人疾病(제인질병) 受我呪文(수아주문)
敎人爲我則(교인위아즉) 汝亦長生(여역장생) 布德天下矣(포덕천하의)
뜻밖에도 사월에 마음이 선뜩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집증할 수도 없고 말로 형상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어떤 신선의 말씀이 있어 문득 귀에 들리므로 놀라 캐어물은즉 대답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겁내지 말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시기를 “내 또한 공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묻기를 “그러면 서도로써 사람을 가르치리이까.”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나에게 영부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형상은 태극이요 또 형상은 궁궁이니,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 <포덕문>


이 문단은 최수운이 상제님으로부터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받는 과정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상제님을 향한 5년여의 일편단심 끝에 드디어 결실이 맺어지는 날에, 그는 ‘불의不意!’라는 단어를 골라 적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그리고 그날은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일탈逸脫의 날,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여 병증病症이라고 표현할 만큼 심각한 공황 상태에서, 천주강령天主降靈의 꿈을 실현한 그 순간에도 서도西道(예수교)의 천주님으로 세상을 교화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과학의 힘으로 무기와 군함을 앞세운 서양 문명은 득도하는 순간까지 수운을 괴롭힌 거대한 벽壁이었습니다.

이렇게 동학東學이 탄생했습니다. 상제님은 영부靈符를 말씀하시며 12제국 괴질운수를 맞아 질병疾病에서 건지는 수단이 있음을 말씀하시고, 주문呪文을 받고 글을 지어 천하 사람들을 가르치라고 명하셨습니다. 상제님이 약속하셨으니 앞으로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천상문답이 끝나고, 붓을 들어 체험을 정리하다
꿈일런가 잠일런가 무극대도無極大道 받아 내어
정심수신正心修身 하온 후에 다시 앉아 생각하니
우리 집안 여경餘慶인가 순환지리循環之理 회복인가
어찌 이리 망극한고 전만고前萬古 후만고後萬古를
역력히 생각해도 글도 없고 말도 없네
대저 생령生靈 많은 사람 사람 없어 이러한가
유도불도儒道佛道 누천년累千年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
윤회輪廻같이 둘린 운수 내가 어찌 받았으며
억조창생億兆蒼生 많은 사람 내가 어찌 높았으며
일 세상 없는 사람 내가 어찌 있었던고
아마도 이 내 일은 잠자다가 얻었던가
꿈꾸다가 받았던가 측량치 못할러라
사람을 가렸으면 나만 못한 사람이며
재질을 가렸으면 나만 못한 재질이며
만단의아萬端疑訝 두지마는 한울님이 정하시니
무가내無可奈라 할 길 없네 사양지심辭讓之心 있지마는
어디 가서 사양하며 문의지심問疑之心 있지마는
어디 가서 문의하며 편언척자片言隻字 없는 법을
어디 가서 본을 볼꼬 묵묵부답 생각하니
고친 자호字號 방불彷彿하고 어린 듯이 앉았으니
고친 이름 분명하다 <교훈가. 1861.11~12>


수운 대신사의 표현대로, 그는 상제님으로부터 만고萬古에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았습니다. 『용담유사』 「교훈가敎訓歌」는 그가 무극대도를 세상 사람들에게 설명할 길이 없어 얼마나 고민하였는지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 결론은, 이 무극대도는 전만고 후만고를 통하여 없던 일이며, 이로써 이제 유도儒道 불도佛道 누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다는 것, 어쩌다 자신에게 이런 운수가 돌아왔는지 만 가지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지만 상제님이 정定한 일이라는 것, 사양하고 싶고 의문 나는 것을 묻고 싶지만 아무도 대답해 주지 못한다는 것…… 등등. 최수운식 오도송悟道頌이 교훈가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도통한 자신의 현재 모습이 용담에 입산하여 고친 자字와 호號와 방불彷佛하다. 같다! 분명하다! 자호字號를 개명改名하고 수도修道하여 그대로 소원 성취를 하였다! 이렇게 성공한 구도자가 대체 어디 있을까요?

그가 상제님으로부터 받은 무극대도는 어디에서 누구에게서도 말 한마디, 글 한 자字, 본本을 볼 수 없는 독보적인 것이라 하고, 묵묵부답은 그의 고친 자字 성묵에 비유합니다. 누구에게 물을 수 없으니, 그가 처음이요 출발입니다. 그의 호號는 수운水雲인데, 물과 구름은 대자연大自然의 조화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용담수류사해원龍潭水流四海源(용담의 물이 흘러 사해의 근원이 된다)은 새 시대의 개명을 선언합니다.

끝으로 어리석은 듯 앉아 있는 자신을 고친 이름 제우濟愚의 우愚 자로 비유합니다. 앞서 포덕문에서는 피아彼我 이분법을 써서, 천주님의 조화造化를 인식하지 못하는 대상을 몰아서 우愚로 표현하였는데 여기서는 아주 많이 누그러뜨리고 스스로 낮추고 있습니다.

왕초보 작명가가 설명하는 우愚 자의 의미 자전字典을 보면, 우愚는 긴꼬리원숭이를 뜻하는 우禺와 마음 심心으로 이루어진 글자입니다. 원숭이들도 나름 질서를 유지하며 집단생활을 하지요. 우리와 한 하늘 아래 같이 살고 있지만, 원숭이들도 비와 이슬을 천주님의 자취라고 인식할까요? 물어볼 방법도 없고, 대답을 들을 방법도 없는 난센스입니다.

우문우답愚問愚答에도 우愚 자를 쓰지요. 차라리 불가능에 가까운 이미지의 단어가 우愚입니다. 그러나 수운은 고친 이름 제우濟愚를 통하여 천주天主님의 조화造化를 모르는 모든 어리석은[愚] 사람들을 건지겠다[濟]고 합니다. 이른바 시천주侍天主의 뜻입니다.

마무리하면서 - 이제는 참동학 시대


지금까지 최수운 대신사가 받은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여기저기 건너뛰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분이 직접 기록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180년이 채 안 된 문서임에도 읽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언어가 많이 바뀌어서일까요? 한자가 어려워서일까요? 저는 앞서 살펴본 안심가 한 구절에서 새로운 연구 과제를 찾습니다.

공중에서 외는 소리 물구물공勿懼勿恐 하여스라 호천금궐昊天金闕 상제님을 네가 어찌 알까보냐 초야에 묻힌 인생 이리 될 줄 알았던가 개벽시開闢時 국초일國初日을 만지장서滿紙長書 나리시고 십이제국十二諸國 다 버리고 아국我國 운수 먼저 하네 그럭저럭 창황실색 정신수습 되었더라 <안심가>


“호천금궐의 상제님”, “십이제국 괴질운수” 사이에 무엇이 나옵니까? 최수운 대신사는 그날 득도할 때 상제님으로부터 특별한 것을 보았습니다. 개벽시開闢時 국초일國初日. 여기서 개벽開闢은 천지 창조와 같은 음양 운동의 측면보다는 인간이 이 세상에 나와 문명을 개척하는 역사 과정을 전제로 한 상황으로 읽힙니다. 국초일은 나라를 개국開國하는 것이지요. 수운은 상제님을 뵙고 도통하면서 (자신이 감당할 천명) 십이제국 괴질운수를 듣기까지 적지 않은 긴 시간 동안 도통 교육(오리엔테이션) 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수운은 12제국의 괴질운수가 도는 것을 (들은 것이 아니라) 본 것입니다. 그리고 잘나가는 12제국을 (천지에서) 다 버리고 (그곳에 구원의 법도가 없어서 속수무책인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긴박한 그 상황에서) 우리나라를 먼저 구원하는 (그것이 왜 그렇게 되는지) 과정을 본 것입니다.

그 자신의 말씀대로 초야에 묻힌 인생으로서는 미처 생각해 본 적도, 알기도, 감당하기도 어려운 주제를 보고 창황(너무나 무섭고 기가 막혀) 실색失色(얼굴빛이 달라짐)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우리나라가 사람 살리는 역할을 하는 것을 보고 난 후 비로소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고 결론만 써 놓은 것입니다.

상제님은 최수운을 아주 오랜 기간 당신님을 만나도록 예비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갖은 고난을 겪어 내며 준비된 수운조차도 정작 도통하면서 맞닥뜨린 자신의 운명運命-괴질운수 시대의 도래와 조화주 상제님 시대 선포-의 로드맵을 보고 정신 수습을 못 하였습니다.

만지장서滿紙長書(종이 가득 쓴 긴 글)란 무엇일까요? 개벽 이후 우리 조상들이 나라를 건설하고 경영해 온 국통맥國統脈을 본 것입니다. 상제님이 설명해 주셨을 개연성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도통맥과 연결되니까요. 그 자신이 도통하는 순간, 도통의 역사 공부를 한 것입니다. 도통 멤버쉽 클럽membership club에 가입한 것이지요. 그것을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제가 아무 말을 못 하는 영역입니다. 다만 앞의 포덕문에 우리의 국통맥이 아닌 중국사의 오제五帝를 기준으로 기술한 점은 결정적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상제님은 수운이 유교儒敎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評을 하신 적이 있는데, 이 같은 그의 유교적 역사 인식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또 도통道統의 맥에서는 반드시 천부경天符經이 언급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국통맥은 천부天符와 인印이 전수되지 않았습니까? 수운水雲이 영부靈符를 보았다고 짧게 기록한 것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부符를 그려 마시면서 신선神仙을 언급합니다. 인류 역사상 부符 문화는 동방 환국 이전 마고대성麻姑大成 때의 천부天符 문화, 중화권의 서왕모부西王母符, 수운의 동학부東學符 그리고 증산 상제님의 현무경부玄武經符가 있을 뿐입니다.

부符가 언급되면서 동학은 신비주의적인 측면이 강조되지만 설명이 선문답식이라 대중화하기에는 턱이 너무 높았습니다. 이것 역시 수운이 도통하실 때 동방의 천부天符 문화와 서왕모 계통으로 흘러간 중화 문명권의 부적符籍 문화를 명확히 구분하여 기록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혼란이라고 추정합니다.

인간으로 오신 상제님께서는 동학 신도들이 부를 그려 마시는 것을 언급하시면서 이를 단지 제우강濟愚降이라고 한정하셨습니다. 한마디로 동학은 후천 일을 부르짖었음에 불과하다는 상제님 말씀대로 맛만 살짝 보여 주는 아쉬움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최수운의 득도 체험이 오전이냐 저녁이냐 밤이냐 등은 크게 문제 되지 않습니다. 첫날은 오전부터 밤까지 시간도 부족하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운 대신사가 스스로 기록한 모든 글들의 시간대 오착誤錯도 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한말 상황에서, 상제上帝님을 뵙고 받은 대다수 내용이 도비道秘에 속할 것은 자명합니다. …유도儒道 불도佛道 수천 년에 운運이 역시 다했다…는 말씀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수운이 유불선 각각의 도道가 완전히 운이 다한 것을 직접 상제님 앞에서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고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상제님이 최수운을 무극대도 새 운수를 여는 주장자로 내세울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상제님과의 문답問答은 그 후로도 11월까지 7~8개월 지속되었다고 하니 무척이나 많은 (말 못 할, 기록하기 힘든) 내용이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한류韓流가 전 세계에 고동치고 꽃피우는 때입니다. 앞으로 참동학 증산도를 통하여 한류의 중심에 상제님이 우뚝 서는 날이 올 것입니다. 수운이 상제님을 만나 첫날에 보았던 결론, (수운조차 벌벌 떨며 보고 받든 당면한) 괴질운수 속에서 아국운수我國運數의 날이 옵니다. 그때 최수운 대신사가 오매불망 사무치게 찾았던 동학東學의 주제 조화주 상제님, 시천주侍天主, 그리고 제우濟愚의 뜻이 마침내 크게 발음發蔭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