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석씨石氏

[한국의 성씨]

이명규(객원기자) / 서울목동도장

우리나라의 석石씨는 해주海州(조주潮州·성주星州) 석씨石氏와 충주忠州(홍주洪州) 석씨石氏가 있다. 모두 중국에서 건너온 성씨이다. 2015년 인구 총조사에 의하면 해주 석씨는 941명, 충주 석씨가 41,802명, 홍주 석씨가 1,009명으로 조사되었다.

석石씨의 기원


석씨의 기원에 관해서는 대표적으로 여섯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원화성찬元和姓纂」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희성姬姓에서 연원했다는 것이다. 춘추 시기 강숙康叔의 6세손 위정백衛靖伯의 손자 공석작公石碏 또는 석작石碏의 이름을 따서 성씨로 삼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춘추공자보春秋公子谱」에 의하면 송나라의 공자 단段이 선조의 이름을 따서 자석子石이라고 하였는데, 그의 후대가 선조의 자를 성씨로 삼아 석씨로 하였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당서唐書』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소무9성昭武九姓 중 하나라는 것이다. 서역의 석국(현재의 우즈벡 타슈켄트 일대) 사람들이 중원으로 이주하면서 석을 성씨로 삼았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위서魏書·관씨지官氏誌」에 따르면 북위의 오석란乌石兰이라는 삼자 성을 가진 선비족이 중원으로 들어오면서 석씨石氏로 바꿨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후조록后赵录」에 의하면 남민冉闵이 석민石闵으로 성씨를 바꿨다는 것이다. 여섯 번째는 「북사北史」에 의하면 루娄씨 중에 석씨로 개성한 자가 있다는 것이다.

해주海州·조주潮州·성주星州 석씨石氏의 연원


석씨의 시조는 석성石星이라는 인물이다. 자는 공진拱辰 호는 동천東泉으로, 명明나라 신종神宗조에 호부·공부·병부상서를 역임했다. 석씨가 우리나라에 건너온 계기는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내 우리를 도운 석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발발하여 일본이 재차 조선을 침략하자, 석성은 만력제萬曆帝(신종神宗)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달래는 차원에서 일본 국왕에 봉하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하였으나 실패한 뒤, 전쟁에서 많은 희생과 군비를 축내고 일본과의 협상에서 대국의 체면을 깎았다는 이유로 삭탈관직과 함께 하옥되어 1599년 옥사하였다.

그때 석성은 아들 형제를 불러 조선으로 피해 후대를 이으라고 유명遺命하였다. 그리하여 차남 석천石洊(또는 석재금石在錦)은 먼저 우리나라에 와 경상도 가야산 아래 성주군 화곡花谷에 정착, 세거의 터를 잡음으로써 조주 석씨潮州石氏의 뿌리를 이루었다. 형인 석담石潭은 요동을 거쳐 해주에 정착, 망명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그를 수양군首陽君에 봉하고 해주海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사下賜하였기에, 일부 석씨가 해주를 관향으로 삼은 연유가 되었다. 또 한 계통인 성주 석씨星州石氏는 아우인 석천의 후손인데, 관향을 성주라 하기도 하고 혹은 중국의 본향을 그대로 이어 조주 석씨潮州石氏라 하였다. 따라서 이들 각 석씨는 모두 동조동근同祖同根이어서 ‘정묘보丁卯譜’를 간행할 때 관향은 그대로 둔 채 합보하였다.

씨족사의 개요


선조宣祖 25년 임진(1592)년 4월, 15만 대군의 일본군은 물밀듯이 부산포에 상륙했다. 순식간에 부산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불과 한 달이 못 되어 서울을 점령했다. 선조는 황급히 평양으로, 의주로 몽진蒙塵 길을 재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지경에 처하자 조선으로서는 명明나라에 의한 구원이 국난을 이겨내는 한 가닥 희망의 길이었다. 선조는 피난 도중에 사신을 보내 위급을 고하고 파병을 요청하였다. 명에서는 파병 문제를 놓고 찬반이 엇갈려 조의朝議가 분분했으나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의 강력한 주장으로 이여송李如松을 장수將帥로 한 구원병을 보내기로 결정을 보았다.

그리하여 5년 전쟁이란 미증유의 국난을 치러 냈지만 막대한 전비 등 문제로 명나라 역시 큰 위기를 맞게 되고, 더구나 정유재란(1597년)이 일어나자 파병 반대 측의 반발은 거셀 수밖에 없었다. 결국 조선 파병을 적극 주장했던 석성은 인책, 투옥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 그는 두 아들을 불러 동도東渡, 곧 우리나라에 건너가 후계를 이으라는 유훈遺訓을 내렸다. 이 유명을 받들어 어머니와 두 아들은 성주星州와 해주海州에 각각 정착하게 되었다. 해주·조주·성주 석씨의 유래는 이런 배경을 지녔다.

해주를 사관지賜貫地로 내린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했다. 그러나 청淸나라의 발흥에 따라 우리나라가 그 지배 아래 놓이자 조정에서는 그들에게 멀리 남방으로 피할 것을 권해, 결국 산음현山陰縣에 자리를 잡았고 적지 않은 땅을 하사받아 생업의 터전을 마련했는데, 그곳을 추동楸洞이라 했다. 조정에서는 4세손 석란石亂에게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큰아들 석중립石仲立에게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부사中樞府事를, 또 아들 석진번石進繁에게는 형조참의를 증직했다.

그때 추동楸洞은 화각華閣이 즐비하고 기왓장에는 ‘망호亡胡’라 새겨 한을 달랬다고 한다. 그 뒤 석씨의 후예들은 조선이 청淸의 지배에 들어가게 되면서, ‘대명일월大明日月’을 동경하여, 벼슬길에 뜻을 끊고 임천林泉에 숨어 절의를 지키면서 존주모화尊周慕華의 정신으로 조선 말엽까지 연면히 그 명맥을 이어 왔다고 「동천실기東泉實記」에 적혀 있다.

역사 속 주요 인물


{석진번石進繁 - 1684년(숙종 10년) ~ 1742년(영조 18년). 자字는 경관慶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중립仲立의 아들. 조선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이르렀다.

석선일石善一 - 1660년(현종 1년) ~ 1726년(영조 2년). 자字는 덕경德卿.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용양위호군龍驤衛護軍을 지냈다.

석준옥石俊玉 - 1831년(순조 31년) ~ 1896년(고종 33년). 자字는 윤중允中.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거쳐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역임하였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석상룡石祥龍 - 1870년(고종 7년) ~ ?. 자字는 용견龍見. 의병을 일으켜 경기, 충청도 지방에서 지리산으로 들어온 문태수文泰守, 박화서 등과 합세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남원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진주에서 5년간 옥고를 치렀다.
[참고자료]
1)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2)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1) 한국인의 족보 (https://www.youtube.com/watch?v=QV4Xl8PoGtI)
2) 위키백과 해주 석씨 등
3) 성씨 정보 (http://www.surname.info)
4)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
5) 김성회의 성씨 이야기
6) 통계청 홈페이지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해주 석씨海州石氏 등



홍순언과 석성의 인연
「해주석씨족보海州石氏族譜」의 기록에 의하면 석성의 후처後妻인 류씨는 절강 사람으로 남경 호부시랑戶部侍郞의 딸로 일찍이 역병으로 부모를 여의고 곤란을 당하던 중, 조선의 역관譯官 홍순언洪純彦의 구호를 받은 바 있다. 그녀의 음덕으로 조선 조정의 골칫거리였던 종계변무宗系辨誣
*
와 임진왜란 때 원병援兵 요청 문제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일화가 『청구야담』, 「통문관지通文館志」 등에 전해져 온다.

역관이었던 순언이 북경에 가는 길에 통주通州에서 어느 청루靑樓에 들렀다. 거기서 화대로 은 천 냥이 매겨진 소복 차림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여인에게 그 연유를 물은즉, 역병으로 양친이 다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외동딸로서 장례 치를 돈이 없어 청루의 화대로 장례를 치르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는 답을 들었다. 딱한 사정에 측은지심이 동한 순언은 공금을 털어 삼백 금을 던져 주고 유곽을 그냥 나왔다.

몇 년 후 1584년 선조 17년에 종계변무 문제로 사신을 보내면서 선조가 이르기를 “열 번이나 사신으로 떠났던 자들이 모두 실패했으니 이번에도 못 고치고 오면 역관의 우두머리를 죽이겠다.” 하였다. 역관들이 명나라 사신 길을 모두 회피하자, 결국 공금 유용으로 옥에 갇혀 있던 홍순언이 명나라에 가게 되었다. 이때 예부시랑 석성石星과 그 부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 부인은 과거 순언이 유곽에서 만난 여인이었다. 이후 석성과 그녀의 도움으로 종계변무 문제와 임진왜란 원병 요청이 무사히 해결될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하늘이 의기 넘치는 사내와 은혜를 아는 여인을 절묘한 인연으로 만나게 하여 장차 닥칠 국가 변란을 대비하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 종계변무宗系辨誣 -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선조를 이인임李仁任으로 잘못 기록한 문제를 수정해 줄 것을 요구한 사건으로, 1394년부터 1588년까지 자그마치 200여 년 가까이 진행되었다. 이인임은 성주 이씨星州李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