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B특별기획 | 항일무장독립전쟁의 전설 대한독립군단 김좌진 총사령관

[이달의프로그램]
홍범도 장군과 함께 항일무장독립운동 역사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김좌진 장군. 이 프로그램은 항일무장투쟁을 통해 조국 광복을 이루려 했던 대한독립군단 김좌진 총사령관의 삶을 조명하는 특집 다큐 프로그램입니다. 김좌진 장군이 이끈 청산리 전투는 일제의 식민 지배로 고통받고 있던 우리 민족에게 희망의 불씨를 심어 주었습니다. 항일 혁명가이자 위대한 교육자였던 김좌진 장군의 생애를 살펴봅니다.

김좌진金佐鎭 (1889 ~ 1929)
1911년에 북간도에 독립군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자금조달차 돈의동敦義洞에 사는 족질 김종근金鍾根을 찾아간 것이 원인이 되어, 2년 6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16년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 등이 결성한 광복단에 가담해 격렬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18년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건너가서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고, 3·1독립선언의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의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대한정의단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칭하고, 소속 무장독립군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 편성에 주력하였다.

우선 독립군 양성을 위해 왕청현 십리평汪淸縣十里坪 산곡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였다. 스스로 소장이 되어 엄격한 훈련을 시키면서 무기 입수에 전력하였다. 1920년 9월 제1회 사관연성소 졸업생 298명을 배출시켰다.

10월 일본군 대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만주로 출병하자 소속 독립군을 백두산으로 이동시키던 도중 청산리靑山里에서 일본군과 만나 전투가 시작되었다. 10월 21일 청산리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같은 달 26일 고동하 전투를 끝으로 청산리 전투가 전개되었으며,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 휘하 부대가 서로 합동작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 3,000여 명을 살상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특히 김좌진 장군 휘하의 북로군정서군은 백운평 전투, 천수평 전투, 어랑촌 전투 등에서 큰 전승을 거두어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전술 전략이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거두어 독립 전투의 금자탑을 세웠다. 그 뒤 북진을 강행하며 그해 말에 러시아와 인접한 북만주 밀산密山에 도착하였다. 집결한 10여 개의 독립군 단체가 통합,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자 부총재로 취임하였다.

1925년 3월 신민부新民府를 창설하고 군사부위원장 및 총사령관이 되었다. 또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 사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1927년 많은 간부가 일제에 붙잡히자, 신민부를 재정비해 중앙집행위원장으로서 신민부를 통솔하였다. 1929년 신민부의 후신으로 한국총연합회韓國總聯合會가 결성되자, 주석으로 선임되었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앞 자택으로부터 200m 거리에 있는 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