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뿌리 역사와 진주晉州 소씨蘇氏
[한국의 성씨]
이명규(객원기자) / 서울목동도장
소씨蘇氏는 진주晉州를 본관本貫으로 하는 단일본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진주를 비롯하여 진강, 충주, 능주, 익산, 조양 등 12개의 본관이 전해지고 있으나, 이는 모두 진주 소씨의 분파세거지分派世居地를 이르는 것으로 본다. 소씨의 원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민족의 역사와 비등한 수천 년의 세월을 만날 수 있으니, 이 땅에서 가장 뿌리가 깊은 유구한 씨족사를 지닌 성씨라 일컬을 만하다.
성씨의 기원
「진주소씨세보晉州蘇氏世譜」에 의하면 오방신장五方神將의 하나인 적제赤帝의 61세손 태하공太夏公 기풍己豊이 성을 소蘇로 바꾸고 적제의 배곡倍谷에서 처음엔 난하로 옮겼다가, 숙신肅愼의 홍제洪帝 때에 불함산으로 들어가 그곳에 봉해졌으며, 나라 이름을 소국蘇國이라 하였다. 그 뒤에 공의 후손들 중 일부는 중국 대륙으로 가고 일부는 한반도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태하공의 69세손인 진공辰公 백손伯孫은 기원전 240년에 태어났는데 소국蘇國이 망하자 경주로 옮겨 후진한後辰韓 군주君主가 되었는데, 그의 5세손 소벌도리蘇伐都利는 진주 소씨와 경주 최씨의 조상이라고 한다. 진주 소씨에서는 소벌도리와 소백손을 모두 조상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경주 최씨에서는 소벌도리가 최초의 조상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신라 6촌의 하나인 고허촌高墟村의 촌장 소벌蘇伐(蘇伐都利公)이 바로 진공辰公의 5세손이다.
진주 소씨의 시조는 소경蘇慶이며, 처음 이름은 소알천蘇閼川이다. 신라 진지왕 2년에 태어나, 진덕여왕 1년에 상대등上大等(角干)에 올랐다. 각간角干으로 있을 때 진덕여왕이 죽자, 여러 군신들이 그에게 섭정攝政을 청하였는데 그가 김춘추金春秋를 천거, 무열왕武烈王이 되게 하였다.
「신유보辛酉譜」 손록孫錄 편에 보면, 그는 후진한왕後辰韓王 소백손蘇伯孫의 29세손이며,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의 25세손으로 나이 8순이 넘도록 손孫이 없었는데 어느 날 꿈에 선조인 백공白公(소벌蘇伐)이 나타나 구시동九柿洞(소사곡塗斯谷·소경동蘇慶洞·저동猪洞- 지금의 진주시晋州市 상대동上大洞)으로 천거遷居하면 반드시 구치자九豸子(아홉 장군)를 얻으리라 하였다고 한다. 이 꿈에 감심感心한 그는 무열왕 3년 3월에 구시동으로 이사, 결국 손자를 보게 되었고 이어서 이름을 경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그의 묘영墓塋은 그동안 실전失傳되었던 것을 1975년 봄에 찾아 묘소墓所를 봉심奉審하게 되었다고 유사록遺事錄에 적혀 있다.
그런데 ‘경자보庚子譜’를 수간修刊할 때까지 진주 소씨의 시조는 문공공文恭公 소희철蘇希哲로 삼아 왔다. 그러나 그 사이, 1951년에 발견된 양곡공陽谷公 후손 소창엽蘇昌燁 소장의 세계世系(부소보扶蘇譜)와 1975년에 발견된 소종만蘇鍾萬 소장所藏인 소치선蘇致善 가승家乘에 실록된 문헌 사적과 분묘 소재 등에 대한 고증 결과로 문공공의 22대조인 상대등上大等(소경蘇慶)을 시조로 바로잡게 되었다고 신유보辛酉譜 별록別錄에 적혀 있다.
씨족사 개요
득성시조得姓始祖 곤오공昆吾公 소풍蘇豊
태하공太夏公(공公은 제후국 왕에게 붙이는 작위) 곤오昆吾(號)는 소씨 성의 득성시조이다. 동근보東槿譜와 소씨 상계上系에 따르면 곤오공은 적제축융赤帝祝融의 후손으로 고신高辛씨가 정치를 포악하게 하자 동숙신東肅愼으로 망명하였고, 고신高辛씨의 침공을 격퇴한 공로로 소성蘇城의 하백으로 봉해졌다고 한다. 본래 기己씨였으나 소씨로 성을 바꾸었고 묘도 소성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곤오공의 행적이 기록된 우리나라의 기록들은 모두 없어져 알 수 없으나, 중국 소씨도 곤오공을 시조로 하고 본래 기己씨였다고 하니 결국 곤오공은 한·중 소씨의 시조로 동일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참고사항 – 소풍蘇豊(太夏公)이 남유소국南有蘇國의 초대 왕이 되었고, 소풍의 장자 소갑蘇岬이 남유소국의 2대 왕이 되어 한국 측 소씨로 이어지고, 소풍의 삼자 소흘蘇紇은 아버지와 의견이 달라 요堯 임금에게로 돌아가 그곳의 소성蘇城에 봉해져 서유소국西有蘇國의 왕이 되어 중국 측 소씨로 이어진다.(소명환 - 전 부천대학교 교수 블로그에서 발췌)
곤오공昆吾公은 삼황오제의 한명으로 알려진 전욱고양 임금의 5세손이며 요임금의 방계 증손이고 순임금의 족숙이다. 전욱고양 임금의 유허지 곤오昆吾 땅에 대제후로 봉해져 곤오라는 호를 얻게 되었다.
시조始祖 소경蘇慶과 구치자九豸子 구장군九將軍
진주소씨보晋州蘇氏譜에 의하면 선조는 소백손蘇伯孫인데, 그는 신라 6부촌장 중의 한 사람인 돌산고허촌장突山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의 4대조가 된다. 그러나 진주로 본관을 삼게 된 것은 시조始祖인 소경蘇慶에 의해서라고 한다. 씨족의 기원이 신라 시대까지 올라가면서도 사실성寫實性이 있는 설화가 바탕이 되어 씨족의 흥기興起를 밝혀 주고 있는 성씨는 아마도 진주 소씨가 대표적인 경우가 아닌가 싶다.따라서 진주 소씨는 매우 실감 있는 설화로 그 역사가 시작된다. 경공慶公은 84세 때인 660년 3월 3일 도사곡塗斯谷으로 이주한다. 아니나 다를까 며느리 석昔씨가 손자 복서福瑞를 낳았다. 그 후 3세 복서福瑞(총관摠管), 4세 억자億滋(총관), 5세 후준後俊(총관), 6세 검백劍白(도독都督), 7세 상영尙榮(총관摠管), 8세 목穆(도독), 9세 은恩(도독) 10세 송淞(도독), 11세 격달格達(대장군) 등 9세에 걸쳐 아홉 명의 장군이 배출돼 소벌공蘇伐公의 현몽現夢이 그대로 맞았다는 얘기다.
소복서는 신라 화랑 출신으로 탐라 정벌 때 공을 세워 청주菁州 총관을 지냈고 소억자는 한주漢州 총관을, 소후준은 상주尙州 총관을 지냈다. 6세 소검백은 이찬伊湌 김은거金隱居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웅주熊州 도독을 지냈고 이찬伊湌 염상廉相, 시중侍中 정문正門의 난을 평정하였다. 7세 소상영은 당唐나라 사신을 다녀와 청주 총관에 올랐으며, 8세 소목은 아들 소은, 손자 소문과 함께 3대 문장으로 삼소三蘇라는 칭송을 들었다. 소목은 김양金陽의 난을 평정, 청주菁州 도독을 지냈고 아들 은恩은 웅주熊州 도독을 손자 송淞(汶의 형)은 강주康州 도독으로 도적 개훤介萱의 난을 평정하였다. 10세 소문蘇汶은 고려 정조 2년 진주 소씨 최초의 대동보인 ‘동근보東槿譜’(947년)를 발행했다고 한다. 현재는 서문만 남아 있는 동근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로 전해진다. 11세 소격달은 신라 신덕왕 때 고소산성姑蘇山城을 쌓은 공으로 하동河東 태수가 되었고, 후삼국의 풍운을 맞아 강주康州(진주)의 향방이 문제가 됐을 때 1천 군을 거느리고 고려에 들어가 대장군이 되었다. 고려 건국의 공으로 뒷날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까지 올랐다.
정승10명 등 당상관 다수 배출
진주 소씨의 가운은 격달공格達公의 5세손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 소계령蘇繼苓의 딸이 헌종비獻宗妃 회순왕후懷純王后로 간택되면서 융성의 시기를 맞는다. 고려조에서 소씨 가문은 문하시중 소경보蘇景輔·소광보蘇光輔 등 정승 10명과 대제학 소율蘇栗 등 당상관 27명을 배출했다. 소경손蘇慶孫은 정중부鄭仲夫 집권 후 사정沙丁의 난을 평정, 상장군겸개성순무사上將軍兼開城巡撫使가 되었고 후에 추밀원사樞密院事에 올랐으나 무신 정치로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낙향했다.경손의 증손 소함蘇涵은 산원동정散員同正을 거쳐 좌우위상장군左右衛上將軍에 올랐다. 몽고 침입 때 2천 병력을 이끌고 1만 대군의 아모간阿母侃(몽골 4차 침입 시 몽골 장수)과 맞서 싸우다 진위振威(현재 경기도 평택시 부근)에서 전사 순국했다. 그의 아들 희철希哲도 아버지의 순절을 보고 전장에 뛰어들어 무공을 세웠고, 후에 정의대부政議大夫·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이 되었다. 청백리 소을경蘇乙卿은 문과에 급제,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올라 개성윤開城尹을 역임하고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으나 공민왕恭愍王 말년 정사가 어지러워짐을 보고 낙향했다.
문무가 출중한 후손이 많이 나온 소씨 가문
여말에 태어나 조선조 초에 이름을 떨친 소경부蘇敬夫는 공양왕 2년 문과에 급제한 뒤 조선조에서 경주부윤·영남순찰사·예조참판·집현전대제학 등을 지냈다. 그는 하절사로 명나라에 가 어느 날 조회 때 명나라 황제가 자신의 신하와 외국 사신들의 글재주를 시험할 때 제일 먼저 시를 지어 장원했다고 한다.조선조에 들어서는 소천蘇遷의 아들 희禧가 무과에 급제, 부위副衛로 중군사정中軍司正을 지내면서 가문의 관운을 열었다. 손자 소현손은 단종 때 문과에 급제, 호조판서·홍문관 대제학을 지냈으며, 소희蘇禧의 손자로 구례求禮현감을 지낸 소자파蘇自坡는 그의 아들 일곱 모두가 벼슬에 올라 위세를 떨쳤다. 소자파의 동생 소기파蘇起坡는 중종 5년 웅천부사熊川府使로 재임 중 삼포三浦 왜란이 일어나자 조카 소세공蘇世恭과 함께 왜적을 쳐 공을 세웠으며 전라좌수사·경상도병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소자파의 2남 세량世良은 중종 초 문과에 급제, 삼사의 벼슬을 두루 지내고 대사간大司諫에 올랐으나 부모를 공양하기 위해 남원부사南原府使로 내려가 효를 다했다.
5남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은 조선조 진주 소씨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중종 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수찬이 되고 단종端宗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를 건의하여 현릉顯陵에 이장케 했다. 그는 이조정랑·직제학 등을 거쳐 사성司成이 되어 영접사迎接使 이행李荇의 종사관으로 명明나라 사신을 맞아 시문으로 화답, 그들을 놀라게 했다. 그 후 승지·왕자사부·전라도全羅道 관찰사를 거쳐 형조참판·형조판서 등을 지냈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어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가서도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문집으로는 「양곡집陽谷集」이 전해진다. 소세양과 관련된 이야기 중에 황진이가 보낸 야사하夜思何라는 시가 가수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라는 곡의 노랫말 원작이라는 약간은 흥미로운 이야기도 세간에 알려져 있다.
양곡의 조카 소순蘇巡도 양곡을 모시고 연경燕京에 갔을 때 중국 사람들이 그의 필법을 보고 감탄했다는 명필이다. 소희의 후손에서는 양곡 외에도 많은 학자와 문신이 나왔다. 부재학 소봉蘇逢의 손자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일념한 사은四隱 소영복蘇永福, 첨사 소세공蘇世恭의 증손으로 문과에 급제,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소동도蘇東道,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직언 상소를 잘해 권신들의 비위를 거슬러 외직에 머물러야 했던 월주月洲 소두산蘇斗山, 조선조의 학문을 빛낸 춘암春菴 소응천蘇凝天·제천濟川 소수구蘇洙榘·인산仁山 소휘면蘇輝冕·표사杓史 소승규蘇昇奎 등은 학문에서 일가의 전통을 이은 이름들이다.
국가에 위기가 있을 때마다 호국에 앞장섬
소씨는 임진왜란 때 많은 구국의 절신節臣을 냈다. 소제蘇濟는 형 황滉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권율權慄 장군의 휘하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진주晋州 싸움에서 용전 끝에 전사했고, 소상진蘇尙眞은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의병을 모아 호남에서 별장別將으로 홍의를 입고 선전, 성주星州 싸움에서 수백 명으로 수천의 적과 맞서다 전사했다. 흥양공興陽公 소세득蘇世得의 증손 소행진蘇行震도 의병 4백 명으로 이화현梨花峴 전투에서 용전하다 전사했다. 또 이에 앞서 명종 10년 소달蘇達은 왜구가 호남을 침범하자 이에 앞서 손자 율律과 함께 싸워 적을 물리치는 공을 세우고 순절했다.이 밖에 소인계蘇仁溪는 진위에서 의병을 일으켜 크게 활약했으며, 소논동蘇論東도 의병장으로 싸우고 임란 후에는 수문장이 되었고, 소덕복蘇德福은 임란 때 선조가 의주로 몽진할 때 호종하여 호성공신이 되었다. 소억민蘇億民은 무과에 급제, 임진왜란 때 종형 소억령蘇億齡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박한무朴漢武 등과 함께 여러 곳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연안延安에서는 이정암李廷馣 장군 휘하에 들어가 전공을 세웠다. 선조 26년 평양 탈환 때는 종형 이억령을 잃은 비운 속에서 끝까지 전장을 지켜 승리하고, 전란 후에 병조참판을 거쳐 중추부사에 올랐다. 병자호란 때에는 소응록蘇應祿이 동생 응희應禧, 조카 이간爾幹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안현鞍峴에서 대승하고 중현中峴에서 적장과 싸우다 순절했다.
소씨 일가의 이 같은 전통은 구한말과 일제 때까지 이어져 소휘태蘇輝泰·소휘옥蘇輝玉·소진형蘇鎭亨·소병원蘇秉元·소진욱蘇鎭旭 등이 독립유공자로 기록돼 있다. 소휘태蘇輝泰·휘옥輝玉·휘선輝璇은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소진형은 이민식 등 11명의 동지와 국권 회복을 논의하다가 1919년 3월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와 연락, 독립 주비단을 조직해 단장직을 맡았다. 충청도 등지에 통문을 보내 모금 운동을 펴 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그의 아버지 소성규蘇誠圭는 아들의 독립운동에 호응, 가산을 독립 자금으로 내놓았고 아들이 7년 옥고를 치르는 동안 냉방에서 단식하며 아들과 아픔을 같이했다.
소진형蘇鎭亨의 아들 철영喆永도 애국지사로 기록되어 있다. 소병원蘇秉元은 한일 합방 후 백범 김구, 신익희 선생과 함께 중국에 망명, 상해 임시정부 수립 후 10여 년 동안 임정 요원으로 활약했다. 한말에 의병을 일으켜 일군과 싸운 소승규蘇昇奎와, 1907년 정미조약과 동시에 조선 군대가 해산되자 안담산安澹山 의병에 가담해 싸운 소천술蘇天述·소휘천蘇輝千·소용무蘇龍武, 반공의사 소운영蘇雲永·소병상蘇秉商 등도 호국의 대열에 이름을 남겼다.
현대의 소씨 인물로는 군정 시설 사법부 차장을 지낸 소완규蘇完奎, 2·3·5·6대 국회의원으로 초대 참의원 부의장을 지낸 소선규蘇宣奎 형제가 돋보인다. 연세대 교수 소진탁蘇鎭琸 박사(전 의대 학장)는 소완규의 장남이며 전 외무부 본부대사 소진철蘇鎭轍 박사(정치학)는 소선규의 2남이다. 또 예비역 육군 대장 소준렬蘇俊烈·소중영蘇重永·소종팔蘇宗八 변호사·소병해蘇秉海 삼성그룹 비서실장·소흥렬蘇興烈 이대 교수 등이 유명하다.
진주의 연혁
경상남도 중서부에 있는 도시이고 전기 가야 시대에는 변진의 소국인 고순시국이었으며, 대가야 시대에는 자타子他 또는 자탄子呑으로 불렸다. 삼국 시대에는 백제의 거타성居陀城이 소재했다고 한다. 통일신라에 편입된 후 거타주居陀州가 설치되었고 신무왕 5년에는 청주菁州, 경덕왕 16년에는 강주康州, 혜공왕 때는 청주菁州라 불리었다. 고려 초기에 강주로 환원되었다가 983년(고려 성종 2년)에 12목牧 중 하나인 진주목晋州牧을 두었다. 조선 시대에는 진양晉陽·진강晉江·청주菁州·진산晋山이라고 하였다. 1896년 고종 33년 13도 개편 시 진주는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로 관찰사가 상주하였다. 1995년 진주시와 진양군을 폐지하고 통합 진주시를 설치하였다.
주요 인물
신라 시대에 상대등을 지냈던 소경을 시조로 하는 진주 소씨 주요 인물로는 소세량, 소세양, 소영복, 소동도, 소두산, 소진형, 소완규, 소선규, 소진섭 등이 있으며 현재 배우로 활동 중인 소지섭도 진주 소씨이다.
소세량蘇世良(1476~1528) : 소세양蘇世讓의 형이다. 1496년 생원시를 거쳐 성균관에 들어가 명유名儒들과 교유하였으며, 사서삼경은 물론 소설小說, 불경佛經에 이르기까지 외우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며, 이에 힘입어 문장과 조필操筆이 물 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1507년(중종 2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한림원에 들어가 예문관 검열에 등용된 뒤 오랫동안 대간大諫, 시종侍從으로 시강侍講하였으며 주서奏書와 상소는 거의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1516년 용담현령龍潭縣令으로 부임, 백성을 사랑하고 가혹한 형벌을 금하고 이도吏道를 쇄신하여 칭송을 받았다. 저서로는 「병암집屛巖集」이 있고 익산益山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봉향되었다.
소영복蘇永福(1555~?) : 대사간 소세량蘇世良의 증손이며 현감 소민선蘇敏善의 아들인데, 서윤庶尹 응선應善에게 입양되었다. 1582년(선조 15년) 진사가 된 뒤 성균관에 들어갔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혼成渾으로부터 출사할 것을 여러 차례 권유받았으나 학문이 미진함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의 사람들과 의병을 일으켜 용화산에 설책, 향토 방위에 참여한 일이 있었으며, 전란 후 국정 전반에 관한 시무책을 조정에 올려 가납嘉納되기도 하였다.
※성혼成渾(1535~1598)은 조선 좌찬성 직책을 지낸 조선 중기의 문신, 작가, 시인이며 성리학자, 철학자, 정치인이다.
소광진蘇光震(1566~1611) : 조선 중기의 문신, 대제학 소세양의 증손이며 찬성 성선의 아들이다. 주서, 예문관 검열, 봉교를 차례로 역임하고 이듬해 형조좌랑을 거쳐 평안도 도사, 예조정랑, 홍문관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소휘면蘇輝冕(1814~1889) : 조선 말기의 문신, 학자. 나이 9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엄한 훈육과 할아버지인 수구에게 학업을 닦았으며, 20세 이전에 문명을 떨쳤다. 뒤에 홍직필을 사사師事하였다. 1858년(철종 9년) 도백道伯이 그의 학행을 조정에 천거하였다. 1881년(고종 18년) 선공감 가감역을 제수받았으며 곧 전설시별제典設寺別提에 제수되었다. 그 뒤 전라도사로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1882년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후배들을 교육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 저서로는 「인산집仁山集」 17권이 있다.
소휘천蘇輝千(1880~1909) : 한말의 의병장. 전남 보성 출신, 준술準述의 아들이다. 1908년 2월 보성 동소산에서 의병 부대를 편성하자 이에 가담, 유격장으로 임명되었다. 안규홍 의진義陣의 기세에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은 최강의 미토오 히라이 부대를 투입, 대토벌 작전을 전개하자, 파청 전투에서 중군장으로 참가하여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후 흥양, 순천 등지에서도 격전을 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진산 전투에서는 일본군 5명을 격살하고 무기류와 기밀문서 등 다수를 노획하였다. 그 뒤 묵석墨石에서 일본군과 격전할 때 앞장서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소선규蘇宣奎(1903~1968) : 대한민국의 정치인, 공무원이다. 해방 직후 초대 서울 동대문구 구청장을 지냈고, 서울특별시 승격 직전의 서울시 부시장직과, 부시장을 행정장관으로 직제를 조정할 때 부시장급인 서울특별시 행정장관을 역임했다. 2·3대 민의원의원과, 5대 참의원의원, 6대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경제통이었다. 한국민주당과 민주국민당의 창당 발기인이며, 호헌동지회와 민주당, 신민당의 창당 과정에도 참여하였다.
맺음말
본문에서 살펴보았듯이 진주 소씨의 씨족사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으며, 더욱 희망적인 사실은 소씨 문중에서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족보 서문 「부소보서扶蘇譜序」, 「소씨상상계蘇氏上上系」, 「동근구보서東槿舊譜序」, 「서풍구보서瑞風舊譜序」를 통해 연구를 계속한다면 상고시대 역사를 기록한 사서인 『환단고기桓檀古記』의 내용을 보완할 수 있는 자료의 발굴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진주 소씨의 족보 서문인 「부소보서」에는 「삼성기」에서는 찾을 수 없는 기록도 있어, 한민족의 역사가 식민사관에 의해 송두리째 뿌리 뽑힌 상황에서 항상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본다.
[참고자료]
1)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2)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3) STB 상생방송, 환단고기북콘서트, 경주편
<참고사이트>
1) 한국인의 족보 (https://www.youtube.com/watch?v=QV4Xl8PoGtI)
2) 위키백과 진주소씨
3)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4)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
5) 김성회의 성씨 이야기
6) 통계청 홈페이지
중국의 소씨
중국의 소씨蘇氏는 중국 성씨 순위 41위이며, 대략 7가지 계통이 있다. 초나라에 병합된 소나라, 고대 중국의 소수민족, 북위北魏 선비족 등 세 가지 계통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위구르와 유사한 유고족裕固族, 이족彝族, 창족羌族 등이 창성했다고 한다. 인물로는 당나라의 장군 소정방蘇定方, 대만의 가수·배우 소유붕蘇有朋이 있다. 죽서기년竹書紀年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임금 괴槐 33년 곤오의 아들이 유소에 봉해져 유소씨有巢氏라고도 한다. 주의 무왕은 곤오공昆吾公의 후손 분생忿生을 사관司官으로 봉하여 형벌과 감찰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형벌이 공평하고 백성을 잘 다스려 소나라 왕으로 봉했다.춘추시대 초장왕에게는 대부大夫 소종蘇從이 있었고 진국시대에는 낙양 출신 소진蘇秦, 소대蘇代, 소역蘇繹 삼 형제가 있었다. 한漢나라 초에는 통일 천하를 잘 다스리기 위하여 인구를 재배치했는데 이때 소씨의 일부는 무공武功의 두릉杜陵으로 옮기고 후에 일부는 부풍扶風 평능平陵으로 옮겼는데 모두 큰 부족으로 발전하였다.
후한後漢 때 부풍 평릉 소씨 소장蘇章은 무원령 관직 때 흉년을 만나도 기름진 땅을 찾아 일궈 백성의 기아를 구했다. 기주자사冀州刺史로 있을 때는 법을 잘 준수하고 사리사욕이 없었으며 의지가 강인했었다. 진晉나라 때 정현 사람 소준蘇埈은 수천 명의 유랑민을 규합하여 자위 조직을 만들고 남쪽으로 진격하여 동진 초기 관군장군官軍將軍이 되었으며 군대를 이끌고 건강(강소성 남경)을 공격하여 단독으로 정부를 세웠다.
북송北宋 때 사천泗川 소씨는 문단에서 혁혁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메이샨眉山(중국 쓰촨성) 사람 소식蘇軾(소동파蘇東坡)은 저명한 문학가, 서화가였으며 시의 품격이 독특하고 청신, 건강하였으며 단어가 호방하여 후대에 매우 영향이 컸다. 그중 서법은 낭만적이었고 일취월장하여 문장의 기세가 웅장하고 성대하였다. 그의 아버지 소순蘇洵과 동생 소철蘇轍도 산문학의 대가로 이들을 합하여 삼소三蘇라 하고 당송 8대가 중 3명이다. 소동파의 아들 소과역蘇過亦도 문학가였다.
진주 소씨, 평택 유력 가문들과 혼사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에는 “석씨 천년·소씨 천년·원씨 천년 마을”이라는 표현이 있다. 평택 진주 소씨와 혼인 관계를 맺었던 집안으로는 독곡동·오좌동 마을과 송탄동 막곡의 수성隋城 최씨崔氏와 도일동의 원주 원씨, 칠괴동의 청주 한씨 등이다. 수성 최씨 입향조는 조선 전기 화원畵員 출신 최경崔涇이다. 최경의 장남, 최유림崔有臨은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공을 세워 입향 초기의 어려움을 해소하게 되었는데, 그 기반을 잡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진주 소씨 어머니다.원주原州 원씨元氏도 진주 소씨와 혼인 관계로 입향하였는데, 초기 입향지는 진주 소씨의 터전 도일동 상리 샛골 마을이었다. 원준량元俊良이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르고, 원균元均이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공신의 반열에 올랐으며, 원연元埏 원전元塼 원사립元士立 등에 충신 효자 정문旌門이 하사되면서 도일동 내리에 터를 잡았다.
진주 소씨는 이렇게 평택 양반 문화의 대동맥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나, 1728년(영조4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연루되어 멸문지화를 당하기도 하였다.
근·현대에 평택·안성 지역에서 활동한 진주 소씨 인물로는 안성에서 태어나 안성시 양성면에서 활동한 애국지사 소휘태蘇輝泰(1870~1948)가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안성시 양성면·원곡면의 기미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이다. 소휘태는 원곡면 사무소 주재 소우편소 등을 방화·파괴하여 일경에 체포되어 1922년 경성 복심 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1묘역 배위 이진희와 합장되었다.
진주 소씨의 집성촌은 주로 전북에 위치하고 있다.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의 주천리, 만도리, 부절리가 있고 고창군의 해리면 송산리, 익산시에는 망성면 어량리, 금마면 동서고도리, 왕궁면의 발산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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