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무극대도 | 주역 스물여덟 번째 가을 문턱에서 서신西神의 살기殺氣가 손사풍巽巳風으로 부는 택풍대과괘 ䷛
[기고]
못물이 넘쳐흘러 나무가 잠기니
위에는 태상절(☱) 못(澤)괘가 있고 아래에는 손하절(☴) 바람(風)괘가 있는 것이 크게(大) 지나치다(過)라는 ‘대과괘大過卦’입니다. 대과는 ‘큰 허물’이라는 뜻과 ‘크게 지나침’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과過 자는 辶(쉬엄쉬엄 갈 착) + 咼(입 비뚤어질 와)가 합하여 ‘바른길을 지나쳤다 → 통과하다 → 도를 넘치다 → 과오’의 뜻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럼 왜 못과 바람이 대과가 되며 그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대과大過의 ‘대大’는 주역에서 양효(⚊)를 가리키는데, 대과괘의 괘상(䷛)을 보면 양효(4개)가 음효(2개) 보다 많고[大], ‘과過’는 지나쳤다는 뜻으로 음효는 초효와 상효에만 있고 가운데 부분은 양효가 과도하게[過] 차지하고 있어 ‘대과’입니다. 또한 위의 못물(澤,☱)이 아래로 넘쳐흘러 나무(風=巽=木,☴)가 물에 빠져 있는 형상입니다. 나무의 생육에 물이 필요[水生木]하지만 과도하면 나무를 썩게 만듭니다.
둘째로 주역은 음양학으로 정음정양正陰正陽이 마땅한데 대과괘는 양이 지나치게 많아 중도를 벗어나고 있습니다. 중도中道는 역易이 추구하는 지고의 선善인데 대과는 상하(초효, 상효)가 허약하여 가운데 있는 네 양효를 감당하지 못해 용마루가 휘어진 형상입니다. 그래서 과도한 양을 적절히 조절하여 중도를 회복할 때 형통하게 된다고 괘사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대과大過’는 문자적으로 ‘크게 지나쳤다’라는 뜻 이외에도 심오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선후천론의 시각에서 보면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큽니다. 지축이 동북방(陽方)으로 23.5도 기울어졌듯이 대과괘 또한 4양2음으로 선천을 상징하는 천지비괘天地否卦(䷋)의 억음존양이라는 일그러진 자화상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선천(삼천양지參天兩地)≒지축의 경사(23.5도)≒택풍대과괘(4陽2陰)≒천지비괘(억음존양抑陰尊陽)’라는 등식이 성립합니다.
지금은 선후천이 바뀌는 대과大過 시대입니다. 현대는 ‘크게 초과’하는 시대인 것입니다. 인구도 폭발적으로 늘고, 온갖 물건들로 넘쳐 나고, 헤아릴 수 없는 정보의 바다에 살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죠. 인간의 욕심 또한 끝이 없습니다. 21세기를 정의하면 그것은 바로 ‘초과’, ‘넘침’, ‘과잉’입니다. 모든 것이 중도를 지키지 못하고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고속 열차와 같습니다.
주역 상경上經은 선천과 천도를 나타내는데 머리괘(건괘, 곤괘)와 꼬리괘(감괘, 리괘)가 ‘건곤감리乾坤坎離’로 되어있습니다. 건곤감리는 다른 말로는 ‘천지일월天地日月’이며, 체용體用으로 보면 체體는 천지가 되고 용用은 일월이 됩니다. 그러므로 상경(선천)에서 머리괘인 중천건괘(첫 번째)와 중지곤괘(두 번째)를 감안하면 실질적인 첫 번째 괘는 ‘수뢰둔괘水雷屯卦(세 번째,䷂)’가 되며, 꼬리괘인 중수감괘(스물아홉 번째)와 중화리괘(서른 번째)를 감안하면 ‘택풍대과괘澤風大過卦(스물여덟 번째,䷛)가 실질적인 선천의 마지막 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대과괘의 효사들을 보면 선천의 말기를 나타내는 상징어가 눈에 띕니다. 역철학에서 대과괘와 관련된 인물로는 북송 시대의 역학자 소강절邵康節(1011~1077)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서 선천이 끝나고 후천이 시작되는 오늘날을 바로 ‘대과시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과괘를 볼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바로 『논어』에 나오는 ‘대과’인데요.
“내 나이에 수년을 더하여 오십에 역경을 배웠다면 가히 큰 허물이 없을 것이다(加我數年하여 五十以學易이면 可以無大過矣니라)”.
이 말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지만, 공자가 역경을 조금만 더 일찍 공부했더라면 대과의 시대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법방을 제시할 수 있을 텐데 정도의 의미로서, 회한의 감정이 담긴 말로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넷째로 당나라의 유학자 공영달孔穎達은 “대과의 ‘과過’는 과월過越(뛰어넘음)의 과過를 일컬음이니 경과經過(지나감)의 과過가 아니다. 이는 쇠하고 어려운 세상에 오직 양효라야 떳떳한 이치를 크게 과월하여 환란을 구제할 수 있으므로 대과라 한 것이다. 인사로 보면 성인聖人이 떳떳한 이치를 과월하여 환란을 구제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대과는 성인聖人을 상징하며 환란기에 창생을 구제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64괘 중에서 ‘과過’의 이름이 붙은 괘는 ‘대과大過’와 ‘소과小過’라는 두 개의 괘가 있는데, 양陽이 지나치면(4양2음) 택풍대과괘澤風大過卦(䷛)요, 음陰이 지나치면(4음2양) 뇌산소과괘雷山小過卦(䷽)입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산뢰이괘山雷頤卦(䷚)에서 음양을 서로 바꾸면 택풍대과괘(䷛)가 됩니다. 대과괘를 이괘 다음에 배치한 이유에 대해 서괘전에서는 “이頤라는 것은 기르는 것이니 기르지 아니하면 가히 움직일 수 없다. 그러므로 대과괘로 이어받는다”고 하였습니다.
택당澤堂 이식李植
택풍대과괘를 언급하면서 이 인물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조선 시대 문신이며 4대 문장가 중의 한 분인 택당澤堂 이식李植(1584~1647) 선생인데요. 왜냐하면 이식 선생이 남한강 변에 택풍당澤風堂이란 정자를 지었는데, 택풍澤風이란 당호堂號가 바로 택풍대과괘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큰 어려움을 겪는다(大過)는 그 괘명대로 실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10세 때 임진왜란을 당하고, 37세 때 왕명을 거역해서 감옥에 갇혔으며, 43세 때 병자호란으로 청나라로 압송당해 모진 고생을 겪었고, 62세 때는 과거 시험에 역모 문제를 출제하였다 하여 관직을 삭탈당하는 등 그야말로 한평생 고단한 삶을 짊어졌습니다.
선생이 쓴 택풍당지澤風堂誌를 보면 얼마나 대과괘의 정신에 투철하여 택풍당을 지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광해군 시절에 세상이 어수선하여 거처를 옮기고자 여러 곳을 점占쳐 봤는데 모두 불길하게 나왔으나 선영이 있는 경기도 지평砥平(지금의 양평군 양동면)은 본괘本卦가 대과괘大過卦, 지괘之卦가 함괘咸卦로 나와 좋은 것이 아닌가. 효사에 ‘마른 버들에 싹이 나며 늙은 홀아비가 아내를 얻으니 이롭지 않음이 없느니라’라 하였으니 ‘이제 거의 화를 면하였구나. 넘어진 나무에서 다시 싹이 난다니, 좋은 징조로구나’라고 풀이하였다. 또 대상大象에 이르기를 ‘홀로 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을 피해 살아도 근심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성인의 일이니 내가 어찌 감당하겠는가? 그렇지만 혹시 현재의 상황이 그렇다는 것을 신이 알려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홀로 서야 하고 세상을 피해야 한다는 것인가? 두려워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는 것은 성현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잘할 수 있겠는가? 공자께서는 ‘천명天命을 두려워하고 대인大人을 두려워하며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한다’고 하였는데, 나 같은 소인이 감히 이 상象의 뜻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니 그 뜻을 더럽히는 것은 아닌지? 지평은 메마른 땅이라서 그간 점도 쳐 보지 않다가 길하다는 점괘를 얻고서야 비로소 기미년(1619년)에 누樓의 형태로 작은 집을 짓고 택풍당澤風堂이라는 당호堂號를 붙였다. 당堂은 높이가 16척으로 가운데 한 칸은 방을 만들어 당堂 안은 꽉 차고 밖은 텅 비게 하였으며, 연못 가운데는 버들을 심었으니 이게 모두 다 택풍澤風의 상象이다. 그리고 방 안의 벽 끝에는 64괘와 대상사大象辭를 나열했고, 특히 남쪽 창 양쪽에는 대과괘의 상사象辭 8자(獨立不懼 遯世无憫)를 크게 써 두었다.”
동방에서 요堯임금이 출현하니
☯ 괘사
大過(대과)는 棟(동)이 橈(요)니 利有攸往(이유유왕)하야 亨(형)하니라
대과는 기둥이 흔들리니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우니 형통하니라.
대과는 기둥이 흔들리니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우니 형통하니라.
☞ 대과는 기둥이 흔들리니(大過棟橈) : 동棟은 ‘용마루’이며 한옥에서 지붕 중앙에 있는 가장 높은 주된 마루입니다, 요橈는 ‘흔들리다’라는 뜻입니다. 괘상(䷛)으로 보면 상하 기둥(2음)이 약한 탓에 기둥 사이에 있는 대들보(4양)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용마루의 기둥이 휘어지는 모습이죠.
혹자는 위의 서양 물질문명의 적폐로 인해 아래 동양의 정신문화를 잠식하는, 즉 서방[澤,☱]의 금金이 동방[風,☴]의 목木을 금극목金克木하고 있는 형국이라고도 합니다. 필자 소견으로 정리해 보면 ‘대과大過란 우주의 가을(兌,☱) 문턱에서 서신西神의 추살지기秋殺之氣가 손사풍(巽,☴)으로 불기 시작하는 병란病亂의 시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과過’ 자는 옥편에 보면 ‘재앙災殃 화’라고도 합니다.
대과괘는 4양2음으로 양기운이 과잉하고 있는 선천의 억음존양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며 호괘互卦는 중천건괘(䷀)로 하늘의 이법을 담고 있고 또한 험난한 감괘(水,☵)의 확대판(䷛)이므로 ‘선천 상극의 총체적 난국의 혼란상’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棟과 요橈’를 비사체秘辭體로 풀어 보면, 棟=木+東이니 동방東方의 목도木道로 홍익의 도(弘益人間)를 가리키며 정확히는 동방 땅으로 오시는 하느님의 진리인 ‘무극대도無極大道’를 상징합니다. 또 橈=木+堯이므로 우리나라(木) 땅에 ‘요임금(堯) 같은 성인’이 출현한다는 것입니다.
즉 ‘선후천이 바뀌는 대과 시대에 환란을 극복할 수 있는 동방(東)의 목도(木道=棟)를 집행하실 요임금(堯) 같은 분이 우리나라(木)에서 출현(堯+木=橈)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요임금(堯) 같은 분이란 대개벽기 광구창생의 추수자인 ‘대두목’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 세상이 바뀔 때에는 대두목(大頭目)이 나오리라. 그래야 우리 일이 되느니라. (도전 11:54:3)
☞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우니 형통하니라(利有攸往亨) : 비록 초육과 상육은 음효로 약하지만 가운데 있는 구이, 구삼, 구사, 구오는 양효로 강건하기에 형통하다는 말입니다. ‘가는 바를 둠이 이롭다(利有攸往)’는 비사체로 ‘우주 가을의 결실[利]은 후천의 강을 건널 수 있게 해 주는[攸] 두 분의 진주[往=人人+主]에게 달려 있다’라는 뜻입니다. 유攸 자는 자전字典에 찾아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수영을 시킨다’는 뜻을 가진 글자입니다. 이처럼 격랑의 대과라는 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형통한 것은 없겠지요.
대과는 큰 것이 지나감이니
☯ 단사
彖曰(단왈) 大過(대과)는 大者(대자) 過也(과야)오 棟橈(동요)는 本末(본말)이 弱也(약아)라
단전에 이르길 “대과는 큰 것이 지나감이오.
동요는 본과 말이 약한 것이다.
剛過而中(강과이중)하고 巽而說行(손이일행)이라
강한 것이 지나치되 가운데 하고 겸손하고 기쁨으로 행함이라.
利有攸往(이유유왕)하니 乃亨(내형)해서 大過之時(대과지시) 大矣哉(대의재)라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우니 이에 형통하니 대과의 때가 크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단전에 이르길 “대과는 큰 것이 지나감이오.
동요는 본과 말이 약한 것이다.
剛過而中(강과이중)하고 巽而說行(손이일행)이라
강한 것이 지나치되 가운데 하고 겸손하고 기쁨으로 행함이라.
利有攸往(이유유왕)하니 乃亨(내형)해서 大過之時(대과지시) 大矣哉(대의재)라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우니 이에 형통하니 대과의 때가 크도다!”라고 하였습니다.
☞ 대과는 큰 것이 지나감이오. 동요는 본과 말이 약한 것이다(大過大者過也棟橈本末弱也) : 큰 것이 지나갔다는 것은 대과괘는 4양2음이므로 양[大]이 4개로 음보다 2배 더 많으니 지나친[過] 것이며, 본本은 초효, 말末은 상효이며 음효라서 약하니까 결국 용마루[棟]가 흔들리[橈]는 것입니다.
☞ 강한 것이 지나치되 가운데 하고 겸손하고 기쁨으로 행함이라(剛過而中巽而說行) : 대과의 상하 양쪽은 음효로 허약하나 구이부터 구오까지 중심은 양효로 강건하게 중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대과 시대에는 괘덕卦德대로 아래 손괘(☴)처럼 손순巽順하며 위 태괘(☱)처럼 기쁜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우니 이에 형통하니 대과의 때가 크다(利有攸往乃亨大過之時大矣哉) : 대과의 때는 선천이 끝나고 추살개벽이 닥치는 때라서 대환란 상황을 극복할 지도자를 만나야 살아남을 수 있고 그렇게 해야 이로우며 형통합니다. 대과의 때는 129,600년을 한 주기로 순환하는 ‘우주 일 년(원회운세元會運世)’에서 ‘천지가 개벽되는 때’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우주사적 대사건입니까!
* 다가오는 대개벽은 우주 1년 12만 9,600년의 시간대에서 오직 한 번 맞는 일이다. 기회는 잠시뿐인 천지대사天地大事이며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천지대업이다. (도전 8:20:4 측주)
군자는 홀로 서도 두렵지 않으며
☯ 대상전
象曰(상왈) 澤滅木(택멸목)이 大過(대과)니 君子(군자) 以(이)하여 獨立不懼(독립불구)하며 遯世无憫(둔세무민)하나니라
대상전에서 이르기를 “못이 나무를 멸하는 것이 대과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홀로 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을 피해 살아도 걱정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대상전에서 이르기를 “못이 나무를 멸하는 것이 대과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홀로 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을 피해 살아도 걱정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 못의 물이 나무를 멸하는 것이 대과의 괘상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澤滅木大過君子以) : 대과의 괘상은 위의 못 물이 아래로 넘쳐흘러 나무를 죽이고 있는 모습입니다. 나무라는 것이 물이 있어야 사는 것이지만 너무 과하면 나무가 썩어 버려 죽게 됩니다. 이를 보고 군자는 처신의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 홀로 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을 피해 살아도 걱정하지 아니한다(獨立不懼遯世无憫) : 대과 시대는 중도에서 벗어나 끝없는 극단으로 치닫는 때이지만 군자는 온갖 시류時流에 편승하지 않고 올바른 길만을 걷는 딸깍발이 정신으로 살아가야 하며(獨立不懼), 험난한 이 풍진風塵세상을 만나 은둔해 있어도 조금도 민망하게 여기지 않습니다(遯世无憫).
이와 유사한 구절을 도전에서 찾아보면 ‘열풍뇌우불미烈風雷雨不迷’입니다. “요堯임금이 순舜에게 천하를 전할 때 유래한 말로, 순으로 하여금 홍수 피해를 살피게 하였는데, 때마침 바람이 맹렬히 불고 천둥 번개가 크게 치면서 거세게 비가 내렸는데도 순은 조금도 혼미하지 않고 일을 마쳤습니다. 상제님 일꾼들 또한 천하사를 할 때, 아무리 가혹한 시련과 역경이 닥쳐도 절대 미혹되거나 흔들리지 말라는 상제님의 경계 말씀”(도전 5:250:4 측주)입니다. 그리고 우리 태을랑들은 생명을 다 바쳐 형극의 길을 극복하고 새 시대를 여는 개척자로 쓰라린 고난과 매도 속에 외로이 투쟁하며 불의와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동방의 요임금[橈]’이신 태상종도사님의 심법 또한 배워야 합니다.
☯ 육효사
初六(초육)은 藉用白茅(자용백모)니 无咎(무구)하니라
초육은 자리를 까는데 흰 띠를 쓰니 허물이 없느니라.
초육은 자리를 까는데 흰 띠를 쓰니 허물이 없느니라.
象曰(상왈) 藉用白茅(자용백모)는 柔在下也(유재하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자리를 까는데 흰 띠를 쓴다는 것은 부드러운 것이 아래에 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소상전에 이르길 “자리를 까는데 흰 띠를 쓴다는 것은 부드러운 것이 아래에 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 자리를 까는데 흰 띠를 쓰니 허물이 없다(藉用白茅无咎) : 초육은 맨 아래 있는 음효라서 바닥에 까는 부드러운 띠자리가 되며, 띠자리를 깐다는 것은 정성을 들인다는 것입니다. 띠풀은 삘기라고도 하며 산이나 들의 풀밭이나 강가에서 무리 지어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예로부터 정성을 들이는 것은 제사 올리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특히 순결을 나타내는 흰 띠를 깐다는 것은 병란病亂 같은 대과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지극한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띠자리를 깔고 정성껏 제祭를 올리듯 공경하고 삼가면 아무리 대과 시대라도 잘못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 자리는 띠자리가 정(淨)한 것이니라. (도전 6:102:7)
참고로 주역에서 ‘띠자리’는 주로 선후천과 관련되는 괘에서 볼 수 있는데 대과에서는 특히 ‘흰 띠자리(白茅)’라고 합니다. 이는 선후천이 바뀌는 대과 시대에는 ‘백보좌白寶座’ 하느님이신 상제님의 진리에 머물러야 후천으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 자리를 까는데 흰 띠를 씀은 부드러운 것이 아래에 있음이라(藉用白茅柔在下也) : 이게 흰 띠를 깔고 정성을 들이는 사람들은 부귀하고 강권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하층 사람들이라고 상제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나는 오직 빈천하고 병들고 어리석은 자를 가까이하나니 그들이 곧 내 사람이니라. (도전 9:32:6)
공자는 초육을 중히 여겨 계사전에서 부연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저 땅에 두어도 괜찮거늘 띠자리를 까니 무슨 허물이 있으리오. 삼감의 지극함이라. 무릇 띠의 물건 됨이 박하나 쓰이는 것은 중히 여기는 것이니 이 방법을 삼가 쓰면 그 잃는 바가 없으리라(苟錯諸地라도 而可矣어늘 藉之用茅하니 何咎之有리오 愼之至也라 夫茅之爲物이 薄而用은 可重也니 愼斯術也하여 以往이면 其无所失矣리라).”고 하였습니다.
마른 버들에 싹이 나니
九二(구이)는 枯楊(고양)이 生稊(생제)하며 老夫(노부)가 得其女妻(득기여처)하니 无不利(무불리)하니라
구이는 마른 버드나무에 싹이 나며 늙은 지아비가 그 아내를 얻으니 이롭지 않음이 없느니라.
象曰(상왈) 老夫女妻(노부여처)는 過以相與也(과이상여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늙은 지아비가 아내를 얻음은 지나침으로써 서로 더불어 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구이는 마른 버드나무에 싹이 나며 늙은 지아비가 그 아내를 얻으니 이롭지 않음이 없느니라.
象曰(상왈) 老夫女妻(노부여처)는 過以相與也(과이상여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늙은 지아비가 아내를 얻음은 지나침으로써 서로 더불어 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 마른 버들에 싹이 나며 늙은 지아비가 그 아내를 얻으니 이롭지 않음이 없느니라(枯楊生稊老夫得其女妻无不利) : 구이는 연못(상괘,☱) 아래 심어져 있는 손목巽木(하괘,☴)으로 부드러운 버드나무입니다. 나이가 먹어 고사 직전의 노거수老巨樹도 거기서 조그마한 움이 돋아나면 다시 살아납니다. 대과괘는 양효가 넷인 늙은 지아비(老夫)가 음효가 둘인 젊은 아내(女妻)를 얻어 자식을 낳을 수 있으니 이롭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상제님 진리로 볼 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첫째는 대개벽기에 광구창생하시는 대두목, 둘째는 상제님 진리의 증언자에 대한 내용입니다.
* 고목에서 움이 돋아나면 추수할 도인이 생긴다. (도전 4:133:6)
* 내 일은 고목에서 움이 돋고, 움 속에서 새끼를 낳아 꽃이 피고(枯木生花) 열매가 되어 세상에 풀어지느니라. (도전 6:65:9)
* 내 일은 고목에서 움이 돋고, 움 속에서 새끼를 낳아 꽃이 피고(枯木生花) 열매가 되어 세상에 풀어지느니라. (도전 6:65:9)
도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두목이 새판을 열어 가을개벽 사업을 추수하여 매듭짓는 것(도전 6:65, 4:133)이 3대에 걸쳐 이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어린 호연이가 진리의 증언자로 천명을 완수하는 것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부여처老夫女妻는 인사와 관련된 도수로 대과의 시운이라서 지나치지만 서로 더불어 함이라고 소상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마른 버들에 싹이 난다(枯楊生稊)’는 것은 비사체秘辭體로 ‘마른 버들(枯楊)’이란 옛(古) 동방(木) 땅을 주 무대로 삼았던 동이(東夷=木)의 역(木+易=楊)인 환역桓易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고대 동방에서 만들어진 동이의 역(桓易)이 대과 시대에 다시 싹(稊)이 튼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대산大山 선생의 해석에 근거해서 필자 의견을 가미하였음, 구오 효사 참조).
九三(구삼)은 棟(동)이 橈(요)하니 凶(흉)하니라
구삼은 기둥이 흔들리니 흉하니라.
象曰(상왈) 棟橈之凶(동요지흉)은 不可以有輔也(불가이유보야)일새라
소상전에 이르길 “기둥이 흔들리는 흉함은 가히 도움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삼은 기둥이 흔들리니 흉하니라.
象曰(상왈) 棟橈之凶(동요지흉)은 不可以有輔也(불가이유보야)일새라
소상전에 이르길 “기둥이 흔들리는 흉함은 가히 도움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삼은 내괘에서 외괘로 넘어가는 자리로 불안하고 중中도 못 얻은 데다 양자리에 있어 기둥이 더 흔들리고 있습니다. 구삼은 내괘의 상단 부분인데 기초(초육)가 음효로 허약해서 흔들리고 있으므로 도움이 되지 못하여 흉합니다. 대도 진리로 보면 구삼은 선천의 마지막 효로 지축이동地軸移動 등으로 바다가 육지 되고 육지가 바다로 되는 상황입니다. 이처럼 온 세상이 요동칠 때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가을개벽은 천지이법으로 오는 것이라서 어느 누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九四(구사)는 棟隆(동융)이니 吉(길)하거니와 有它(유타)면 吝(인)하니라
구사는 기둥이 튼튼하니 길하거니와 다른 것을 두면 인색하리라.
象曰(상왈) 棟隆之吉(동융지길)은 不橈乎下也(불요호하야)일새라
소상전에 이르길 “기둥이 튼실해서 길하다는 것
은 아래에서 흔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사는 기둥이 튼튼하니 길하거니와 다른 것을 두면 인색하리라.
象曰(상왈) 棟隆之吉(동융지길)은 不橈乎下也(불요호하야)일새라
소상전에 이르길 “기둥이 튼실해서 길하다는 것
은 아래에서 흔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 기둥이 튼튼하니 길하거니와 다른 걸 두면 인색하리라(棟隆吉有它吝) : 구사는 하괘에서 상괘로 올라와 높아지고 튼튼해졌으며 또 네 개의 양효 중에서도 세 번째라서 높고 튼실해서 길한 것입니다. 그래도 대과 시대라서 조심해야 하는데, 사사로이 자기와 응하는 아래 초육에게만 마음을 쓰면 안 됩니다. 신하라는 자기 본분에 걸맞게 위에 있는 구오 군왕을 잘 보필해야 대과 시대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구사는 구이, 구삼을 거쳐 온 양효로 굳건한 자리라서 아래에서 함부로 흔들 수 없다고 합니다.
마른 버들에 꽂이 피니
九五(구오)는 枯楊(고양)이 生華(생화)하며 老婦(노부)가 得其士夫(득기사부)니 无咎(무구)나 无譽(무예)리라
구오는 마른 버드나무에 꽃이 피며 늙은 지어미가 젊은 남자를 얻으니 허물은 없으나 명예롭지도 아니하다.
象曰(상왈) 枯楊生華(고양생화)가 何可久也(하가구야)며 老婦士夫(노부사부)는 亦可醜也(역가추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마른 버드나무에서 꽃 피는 것이 어찌 오래갈 수 있겠으며 늙은 지어미가 젊은 남자를 얻는 것은 또한 추한 일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구오는 마른 버드나무에 꽃이 피며 늙은 지어미가 젊은 남자를 얻으니 허물은 없으나 명예롭지도 아니하다.
象曰(상왈) 枯楊生華(고양생화)가 何可久也(하가구야)며 老婦士夫(노부사부)는 亦可醜也(역가추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마른 버드나무에서 꽃 피는 것이 어찌 오래갈 수 있겠으며 늙은 지어미가 젊은 남자를 얻는 것은 또한 추한 일이니라.”고 하였습니다.
☞ 마른 버드나무에서 꽃이 피며 늙은 지어미가 젊은 남자를 얻으니 허물도 명예도 없다(枯楊生華老婦得其士夫无咎无譽) : 구이를 마른 버드나무로 보았듯이 구이와 응하고 있는 구오 또한 마른 버드나무로 보고 있습니다. 구이는 위에 양효가 있어 늙은 지아비로, 아래에는 초육이란 음이 있어 싹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구오는 위에 있는 음효가 늙은 지어미가 되고 상육에만 음이 하나 있어 피고 마는 꽃이라고 하였습니다. 늙은 지어미가 젊은 남자와 사는 것이 허물까진 아니더라도 명예로운 일도 아닙니다.
☞ 마른 버드나무에 꽃 피는 것이 어찌 오래갈 것이며 늙은 지어미가 젊은 남자와 사는 것 또한 추한 일이다(枯楊生華何可久也老婦士夫亦可醜也) : 움이 튼다는 것은 새 생명이 시작되는 것이지만, 꽃만 피는 것은 잠시 피었다가 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늙은 지아비가 젊은 여자와 산다면 대를 이을 수 있지만, 늙은 지어미와 젊은 남자가 사는 것은 자식을 낳을 수 없으니 오래갈 수 없는 것이죠. 또한 남들 보기에도 추하다고 했습니다.
또 재미있는 것은 마른 버들에 꽃이 핀다(枯楊生華)는 것은 구오가 변하면 진괘震卦로 중국(震方)에서 주역周易의 꽃(華)이 피고, 구이가 변하면 간괘艮卦로 우리나라(艮方)에서 후천 역易인 정역正易의 싹(稊)이 나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즉 옛 동이의 땅인 중국에서 고대 동방(枯)의 역(楊=桓易)이 꽃 피었지만, 대과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에서 정역正易이 옛 환역의 전통을 이어받아 후천 오만 년 우주 가을시대 역易의 씨를 뿌린 것입니다(대산大山 선생의 해석을 참고해서 필자 의견을 가미하였음, 구이 효사 참조).
上六(상육)은 過涉滅頂(과섭멸정)이라 凶(흉)하니 无咎(무구)하니라
상육은 지나치게 건너다가 이마를 멸함이라 흉하니 허물할 데가 없느니라.
象曰(상왈) 過涉之凶(과섭지흉)은 不可咎也(불가구야)니라
소상전에 이르길 “지나치게 건너가는 흉함은 가히 허물하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상육은 지나치게 건너다가 이마를 멸함이라 흉하니 허물할 데가 없느니라.
象曰(상왈) 過涉之凶(과섭지흉)은 不可咎也(불가구야)니라
소상전에 이르길 “지나치게 건너가는 흉함은 가히 허물하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 지나치게 건너다가 이마를 멸해 흉하니 허물할 데가 없다(過涉滅頂凶无咎) : 상육은 상괘인 연못(☱)의 맨 위에 있으며 크게 지나친다는 대과괘의 끝자리에 있어 지나치게 건너가다 연못에 빠져 이마까지 다쳤습니다. 대과괘의 극한 자리까지 지나칠 정도로 본인이 저지른 짓이니 누굴 붙잡고 원망하며 누굴 탓하겠습니까.
* 지은 죄상은 만인경(萬人鏡)에 비추어 보면 제 죄를 제가 알게 되니 한탄한들 무엇하리. (도전 2:106:1)
태모님께서도 저 죽을 짓만 하는 어리석은 창생들에게 “잘못된 그 날에 제 복장 제가 찧고 죽을 적에 앞거리 돌멩이가 모자라리라.”(도전 11:70:9)라고 경책하셨습니다.
그리고 ‘지나치게 건너다가 이마를 멸했다’는 것을 상제님 진리로 보면 어떨까요? 상육은 대과 시대의 말기, 즉 추살 개벽의 극기라고 볼 수 있는데요. 이때는 서양(兌方,☱)은 깊은 못 속에 빠져 이마까지 다칠 정도라고 하니까 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제님께서도 “장차 서양은 큰 방죽이 되리라.”(도전 2:139:1) 또는 “물(水)개벽은 서양에서 날 것이니라.”(도전 7:4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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