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B다시보기 | 역사대담 - 5회 홍산문화와 한일고대사(1)
[STB하이라이트]
사회자: 김철수 중원대학교 종교문화학과 교수
대담자: 남창희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지금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의 문제를 넘어서 경제보복까지 진행되고 있는데요. 어떻게 한일관계의 갈등을 극복하고 바람직한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까요. 우리 역사의 참모습을 탐구하는 역사대담에서는 한일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해법을 국제정치학적 관점에서 찾아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Q 김철수 교수: 지난 시간까지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얘기를 나눴습니다. 이번에는 홍산문화에 대한 주제로 말씀을 나누게 될 텐데요, 홍산문화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남창희 교수: 많은 분들이 홍산문화에 대해 처음 들어보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중국 동북지역에 보면 만주가 있고 서쪽에 요하가 있는데요. 여기 적봉시가 있습니다. 홍산문화는 적봉시에 있는 홍산지역을 중심으로 한 고대 문화인데요. BCE 3,500년 전후의 특정 시기를 홍산문화 시기로 얘기합니다.
Q 김철수 교수: 우리가 문화를 이야기할 때는 문화의 주체세력과 사상적 기반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데, 교수님께서는 홍산문화의 주체세력이 우리 민족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일본문화와도 관련이 있다고 보시는데요. 이 부분이 굉장히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말씀 부탁드립니다.
A 남창희 교수: 기존 사학계에서 홍산문화와 우리 고대문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단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실 한번이라도 홍산지역에 현장답사를 다녀오시면 이러한 인식은 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홍산 우하량 지역에 가면 돌로 쌓은 무덤들이 나오는데요. 홍산문화의 적석총과 석관묘의 형태가 한반도 남부와 일본 규슈지역까지 일관되게 나옵니다. 적석총 문화벨트가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고대에 이처럼 문화가 흐르는 문화벨트의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홍산문화와 우리 민족의 관련성을 부인하는 것은 어렵다고 봅니다. 그리고 일본 규슈지역과 혼슈지역까지 시기적으로는 후대이지만 유사한 형태의 묘제가 연결된다고 봤을 때 홍산문화 벨트의 종착점이 일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Q 김철수 교수: 홍산문화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 규슈와 혼슈 서쪽 지역까지 연결되는 귀결점으로써의 일본문화는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교수님께서는 실질적으로 홍산문화와 우리 한민족과의 연결관계에 대한 확신을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A 남창희 교수: 홍산문화와 우리 한민족과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것은 학설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현장답사 혹은 현장조사 유무의 문제라고 봅니다. 또한 현장조사의 철저함과 실증성의 문제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전국의 많은 고고학과가 있는데요. 제가 소속된 인하대 융합고고학 대학원생들은 기본으로 10번 이상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현장에서도 대충 보는 것이 아니라 홍산 현지 박물관을 비롯해서 적봉시 대학의 관계자분들과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세밀하게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이렇게 현장답사와 조사를 통해 연구해본 결과, 홍산문화가 우리 고대문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명제는 누가 부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부정하는 분들이 있다면 죄송한 말씀이지만 현장 연구를 철저하게 하지 않은 분들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홍산문화와 우리 상고문화와의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는 많은 부분들이 있는데요. 그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을 말씀드리면 중국 내몽골의 오한기박물관 3층에 가면 ‘남신소조상’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라 여겨지는 남성이 가부좌로 앉아서 수행하는 모습이 진흙으로 만들어져 있는데요. 이 인물상의 머리 스타일이 ‘편발개수編髮盖首’라고 해서 머리를 땋아서 정수리에 덮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 조선왕조실록의 정조실록을 보면 “단군은 우리 동방의 맨 먼저 나온 성인으로 역사에 편발개수編髮盖首의 제도를 제정하였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헤어스타일은 타 지역에는 거의 없는 아주 독특한 스타일이기 때문에 이 점만 보아도 홍산문화지역이 우리 고대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Q 김철수 교수: 교수님께서는 홍산문화가 우리 문화를 넘어서서 일본문화와도 ‘문화벨트’라는 개념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고 말씀해주셨는데요. 이 말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내용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A 남창희 교수: 한국의 상고문화인 고조선 문화가 홍산문화와 일본의 고대문화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보여집니다. 실제로 문화의 흐름이 시기적으로 앞선 문화가 A, B, C 순차적으로 나타났다면 A에서 C로 문화가 흘러가고 B는 징검다리 혹은 매개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으로 맞다고 생각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문화양식 중에서 묘제는 시대의 사상과 문화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에 잘 변하지 않는 특성이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홍산문화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으로 이어지는 공통된 묘제가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그중에서 한반도 남부와 일본 규슈를 잇는 대마도와 이끼섬에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홍산의 제의문화와 우리 삼한의 제천문화가 상당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고대 문헌에도 동맹이나 무천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런 제천문화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이런 제천문화의 공통점이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 고분의 여러 가지 양식들이 홍산문화 지역의 고분 양식과 공통점이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Q 김철수 교수: 제천문화 같은 경우 흥미로운 주제인 것 같습니다. 홍산문화와 우리 민족의 제천문화, 일본의 신도 신사문화가 연결이 된다는 말씀이신데요. 제천문화에서 닮은 부분들을 추려낸다면 어떤 내용들이 있을까요?
A 남창희 교수: 우선 일본에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활동을 했었고, 동경대 교수로 있다가 본인의 논문 때문에 파면되었다가 다시 와세다대학 교수로 복직한 ‘구메 구니타케’ 교수가 있습니다. 이분의 고향이 사가현인데요, 일본 천황가의 도서관의 자료를 정리하는 역할을 맡아서 사가현을 포함해서 규슈지역 답사와 조사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조사를 하다 보니 고대 한국의 제천문화가 일본 신도문화로 이어졌다고 확신을 하고 현장조사까지 하게 됩니다.
이 논문의 내용들을 제가 연구하면서 홍산문화까지 연결해서 거대한 문화벨트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홍산지역 우하량 유적에 가면 제천단으로 추정되는 3단 유적지가 있는데요. 이 제천단 가장자리에 ‘무저형 토기’를 나란히 세워놓았습니다. 그런데 무저형 토기는 실용성이 없는 토기입니다. 무저형이란 말 그대로 밑부분이 없는 토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토기는 의례용으로만 만들어진 토기라고 볼 수 있는데요. 이런 무저형의 토기는 일본에서 자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2008년 처음 우하량에서 이 토기를 보고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단서를 얻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2006년에 일본 고베대학에 교환교수로 있으면서 일본 전국의 50여 군데 박물관을 다녔었는데요. 그중 고베 매장문화재센터에서 무저형 토기인데 ‘원방각’의 문양이 뚫린 토기를 봤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홍산지역과 일본의 문화가 3,000년의 차이가 있지만 연속적인 문화벨트에 속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김철수 교수: 토기에서 문화벨트를 찾는 교수님 말씀이 참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동방의 제천문화를 이야기할 때 천지인 삼재, 삼수사상, 원방각, 천원지방 문화를 많이 얘기하는데요. 말씀하신 ‘원방각’ 문화에 대해서 토기와 연결시켜서 좀 더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A 남창희 교수: 많은 분들이 ‘원방각’이 뭔지 궁금해 하실 것 같습니다. 동양문화에서는 하늘을 원으로 상징을 했고요, 땅은 네모로 상징을 했습니다. 단순히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은 원융무애한 정신을 갖고 있다는 뜻에서 동그라미(원)로 표현을 했고, 땅은 방정하다, 반듯하다는 의미를 담아서 사각형(방)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삼각형(각)으로 표현을 했다는 문헌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 사람의 상징체계를 압축적으로 한 공간에 모아서 표현한 것이 홍산 우하량 지역에서도 발견되고 일본에서도 발견된 것이 공통점인 것입니다.
그리고 묘제를 보면 수혈식 무덤 혹은 구덩식 무덤이라고도 하는데요. 구덩이를 파고 석관이나 목관을 넣게 되는데요. 이 안에서 발견되는 부장품들이 홍산문화와 한반도하고 공통점이 있고요, 한반도와 일본하고 공통점이 있습니다. 홍산문화와 일본이 똑같이 공통적인 부분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하지만 한반도를 경유해서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연속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부장품에는 옥기玉器가 있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원방각은 고대인들의 정신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했던 것이고, 인생의 모든 것을 걸어서 완성해야 할 그 무엇과 연관된 것이기 때문에 상당한 지속성이 있는 문화체계였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Q 김철수 교수: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개념을 알고 있으면 문화적인 의미를 이해하시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일본문화를 이해하는 데도 천부경을 이해하면 문화적 의미를 더 깊게 알 수 있다고 하는데요. 이 부분도 어려울 수 있지만 간단히 말씀 부탁드립니다.
A 남창희 교수: 안타깝게도 천부경이라고 하면 아직 학계에서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의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1920년에 성암 전병훈이란 분이 있었는데요, 나라가 망하고 중국으로 망명을 가셨는데 중국에서 대학자로 추앙을 받으신 분입니다. 이 분이 저술한 역저 중에 하나가 『정신철학통편』이란 책이 있는데, 시중에도 나와 있습니다. 이 책의 첫머리에 천부경 81자가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최소한 19세기 초에는 천부경이 학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연구되었던 텍스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천부경이 단순히 20세기 초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 조선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여러 문헌에도 천부경이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고려 말 목은 이색 선생이라든가 최영 장군과 행촌 이암 선생과의 대화에도 천부경이 등장합니다. 통일신라시대 고운 최치원 선생이 천부경을 한자로 번역해서 새겨놓았다는 것은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맥의 『태백일사』를 보면 “천부경은 환인천제의 환국시절부터 구전되어 온 글이다.”라는 놀라운 기록이 있습니다. 천부경은 한민족을 포함해서 전 인류의 존재론과 인간론에 대한 압축적인 사상체계를 표현한, 아주 뿌리가 깊은 경전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천부경의 텍스트는 우리나라에만 전해 내려오는 비전사서로써 연구가 되고 있는데요. 경전의 보존은 우리나라가 했지만 천부경이 도형과 같이 상징화가 되어 현실적인 유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우리나라보다 일본에 더 많습니다. 천부경의 정신이 상징화된 대표적인 일본의 유적지로 ‘전방후원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전방후원분은 원과 네모를 결합시켜서 거대한 무덤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천부경의 상수철학을 여러 가지 형태로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부경을 알면 일본 고고학자들이 전혀 해석하지 못하는 일본 고대문화의 진실과 실체를 알 수 있고 또 놀랍고 신비로운 고대문화의 많은 이야기들을 뽑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김철수 교수: 말씀 감사합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일본의 묘제로부터 전방후원분까지 말씀을 해주시면서 홍산문화와 일본문화의 유사성을 이야기하시더라도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A 남창희 교수: 네 맞습니다. 이 담론을 제가 이야기하면서 국내 학계에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유학할 때 정치인류학을 창시한 칼란데 교수님으로부터 사사받았는데요. 정치인류학이란 분야가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합니다. 제가 역사를 연구하면서 정치인류학의 개념과 이론을 가지고 홍산문화의 발굴성과와 함께 천부경의 사상과 해석, 고고학까지 융합을 시켜서 나온 결과를 말씀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새로운 담론으로 인식이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학계에서 연구되고 성과가 보편화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자리를 통해 좀 더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고분을 통해서 어마어마한 사상이 드러나게 되기에 고분에는 동아시아 문화를 하나로 관통하는 정신사의 흐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고분의 비밀을 파헤치면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한마음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