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역사 성인열전 | 배달국 최전성기를 연 치우천황 上
[역사인물탐구]
이해영 / 객원기자
인류사는 전쟁의 역사였습니다. 혹자는 인류사를 ‘피의 목욕탕’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선천 상극相克 세상은 모든 존재들이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며 서로 싸우면서 성장 발전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원과 한이 축적되었고, 갈등과 원한이 전쟁으로 분출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한반도는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유신론과 무신론의 갈등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입니다. 최근 남북 화해 모드가 진행되었지만, 상극의 이념 대결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 같은 상태로 잠재되어 있는 곳입니다.
우리 한민족의 이런 비극은 단순한 이념 대결로 인함은 아닙니다. 시원 역사와 문화가 왜곡되고 말살되면서 무기력한 약소국으로 전락해 버린 데 그 근본 원인이 있습니다. 중국의 중화사관과 일제의 식민사관에 찌들어 버렸고, 서양사상에 매몰되었으며, 스스로 자존감을 잃어 버려 대한의 혼을 상실한 우리 민족. 역사를 모르면 미래도 없습니다. 과거를 모르고 어떻게 현재를 알 수 있으며, 현재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는데 어찌 미래의 새 역사를 열 수 있겠습니까? 이제 천지의 시비를 바로잡는 가을개벽을 맞이하여, 우리는 묵은 기운을 깨부수는 깊은 자기반성과 민족의 정체성을 부정한 잘못에 대한 철저한 참회를 바탕으로 민족사 인식을 완전히 개벽시켜야 합니다. 이에 잠자는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서라도 한중 고대사의 첫 번째 왜곡 날조 사건의 대상이 된 우리 민족의 성웅 자오지환웅, 즉 치우천황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합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우리 응원단의 상징으로 그리고 여전히 우리 생활 속에 살아 있는 승리의 신 그 치우천황을 만나 보러 가겠습니다.
4,700년 전 배달국은 14세 자오지환웅 시대에 큰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자오지환웅에 대해서 삼성기 하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오지慈烏支환웅의 호칭에 대해서 박현은 ‘자오’는 ‘땅을 넓힌다’, ‘지’는 ‘치’로 변하기 전의 소리로 ‘이끄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보았습니다. 여기서 ‘오烏’는 태양을 상징하는 새로 고구려의 삼족오와 연결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유립은 치우는 지위智爲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 ‘치우’에는 천둥이 치고 큰 비가 내려 산천이 모습을 바꾼다는 개벽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사서 및 우리 기록에는 ‘치’ 자가 벌레라는 뜻인 ‘蚩’로 표기되어 있어 우리를 당혹케 합니다. 그러나 『환단고기』 「삼성기」 상에서는 다스릴 ‘치治’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尤’ 자에 대해서는 ‘군에서 최고이며 제일인 수장. 군무에 제반적인 것을 관장하는 관직명’이라는 기록이 있어, 치우란 ‘군사를 다스리고 통제하는 으뜸가는 수장’이란 뜻이 됩니다.
치우천황은 앞선 문명 기술을 바탕으로 국력을 신장시켰습니다. 그뿐 아니고 자부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아 신교의 가르침을 널리 펴기도 하였습니다.
치우천황은 배달 신시의 웅렬한 기상을 계승하여 백성과 함께 이를 새롭게 펼쳐 나갔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뜻을 밝혀 생명의 의미를 알게 하였으며(開天知生), 땅을 개간하여 뭇 생명을 다스리게 하였고(開土理生), 사람의 마음을 열어 생명을 존중하게 하였습니다(開人崇生).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만물의 원리를 스스로 살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치우천황의 덕은 미치지 않은 곳이 없고, 지혜가 적합하지 않음이 없게 되었습니다. 백성과 더불어 나라를 나누어 다스렸고, 호랑이처럼 늠름하게 황하의 북쪽 지역에 웅거하여 안으로 군사를 용맹하게 훈련시키고 밖으로 시국의 변화를 관망하였습니다.
후대 기록에서 치우천황 및 그 집단을 상징하는 단어는 동두철액銅頭鐵額, 즉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가졌다는 말입니다. 치우천황에 대한 우리 쪽 기록은 극히 드물고, 맞서 싸웠던 황제헌원 쪽 기록이 많이 남아 있어서 그들이 보기에 특징적이었던 부분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치우천황은 갈로산에서 광석을 캐내어 청동기 시대를 열었습니다. 청동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인류 최초의 금속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갈로산葛盧山은 산둥성 청도靑島시 부근으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치우천황은 이곳에서 제련한 금속을 이용하여 선진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기의 주석으로 유명한 당나라 때 역사학자 사마정司馬貞은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규원사화』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치우가 금속으로 병기를 만들었다‘는 수많은 사서의 기록을 통해 보아도 금속 제련 및 무기 제작과 사용 등의 원조가 치우천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치우천황은 동두철액에 다섯 가지 병기를 만들고 사용하는 왕, 모래와 쇳가루를 먹고 사는 왕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는 치우천황과 그 일족과 군단이 청동기 문화 민족임을 알려 줍니다. 모래와 쇳가루를 먹고 산다는 말은 주석과 분쇄한 황동광으로 청동기를 만들었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즉 치우천황과 그 군단軍團은 구리 머리, 철 이마로 상징하는 투구나 여러 보호 장구에 다섯 가지 병기를 사용하는 당대 최강의 무기를 보유한 군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금속의 사용은 문명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계입니다. 치우천황 당시 배달국 중심지인 청구 지역, 즉 지금의 난하와 대릉하 일대를 중심으로 일찍이 청동기 문화인 하가점하층문화夏家占下層文化가 발전하였습니다. 이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 중 가장 오래된 청동기는 단군조선이 개국한 기원전 2333년 이전에 제작된 것입니다. 최근에는 신석기 시대인 홍산문화의 후기 유적인 요령성 건평현 홍산 우하량 유적에서도 5,000년 전인 기원전 3000년경에 이미 청동기를 사용하였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 청동기 문화에 대해서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중국 전국 시대 말기에 중국의 이주민이 들여온 것으로 우리는 신석기 문화에서 청동기 문화 없이 곧바로 철기 문화로 넘어갔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해방 이후 곳곳에서 청동기 유적이 확인되자 학계에서는 오르도스 시베리아 계통의 것이라 주장하기도 하고, 순수한 한국의 청동기는 세형동검이 전부라고 억지 논리를 펴 왔습니다. 그러나 요령식 동검으로 여겨지던 비파형 동검이 한반도 곳곳에서 발견되어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의 범위는 시간적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할 뿐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북경 지역까지 대폭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또 철기 문화도 우리나라에서 먼저 시작되어 중원 지역에 보급되었습니다. 그것은 철鐵의 옛 글자가 ’동이족의 쇠‘를 뜻하는 철(銕=金+夷)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을 말하는 이夷는 큰 대大 자와 활 궁弓 자를 합한 글자로 동방 사람(東方人)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를 공자가 「春秋」를 지으면서 융적과 함께 오랑캐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현재까지 이렇게 잘못 알려져 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아무튼 구리를 시작으로 해서 치우천황이 처음 철과 같은 금속을 발굴, 제련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런 글자가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은 치우를 동이족인 구려九黎의 천자天子라는 기록을 많이 남겨 놓았습니다. 구려에서 려黎의 다른 소릿값은 ’리‘ 또는 ’이‘가 됩니다. 따라서 구려는 ’구리‘ 또는 ’구이‘가 됩니다. #’구이‘는 ’구려‘라고도 하였고, 이는 치우천황이 통치하였던 배달국의 또 다른 이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구리란 호칭에 대해서 인류 최초로 다루어진 금속인 구리(銅, Copper)의 어원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기원전 2749년 배달국 신시에서 태어난 치우천황은 13세 사와라斯瓦羅환웅의 뒤를 이어 기원전 2707년 42세 되던 해 배달국 14세 환웅으로 즉위하셨습니다. 재위는 109년이요 천수는 151세였습니다. 역대 환웅 중 가장 장수하셨습니다. 치우천황 초기 염제 신농씨가 세운 신농국은 그 후손인 유망楡罔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10세 갈고환웅葛古桓雄 시기에 배달국은 염제 신농씨의 나라와 국경을 정하였습니다. 치우천황이 즉위하고 초기에 신농국이 쇠망을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이에 치우천황은 웅대한 포부[雄圖]를 품고 서방으로 출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산둥성, 장쑤성, 안휘성 일대를 배달의 영토로 흡수하였습니다. 유망은 대패하여 수도였던 지금의 허난성 진류인 공상空桑으로 도망하였습니다. 하지만 치우천황은 이들을 일거에 멸하였습니다. 이때 치우군의 공상 입성 소식이 들리자, ‘서방 한족 문화권 통합’이라는 야망을 품고 있던 서토 지역의 일개 제후였던 헌원軒轅이 치우천황을 밀어내고 스스로 천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드러내며 대군을 일으키게 됩니다. 『태백일사』 「신시본기神市本紀」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개 제후에 불과한 헌원의 반란 사건! 결론적으로 제후의 위치에 있었던 헌원이 천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천자인 치우천황에게 도전해 온 ‘황제작란黃帝作亂’은 서양의 트로이 전쟁에 빗대어 일컬어지는 탁록대전의 진실입니다. 결론적으로 탁록대전은 동방 종주국 배달과 이에 대항한 서방 헌원 세력의 대전쟁이었습니다. 10년간 73회에 걸쳐 치열하게 펼쳐진 공방전! 그 진실과 사마천에 의해 자행된 역사 왜곡의 실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파헤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대극성은 대릉하 중류의 조양朝陽 부근에 있습니다. 허베이성 창려현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현존하는 인류 성씨의 시조는 염제 신농씨의 강씨입니다. 본래 태호 복희씨의 풍씨였으나 15세 이후 사라졌습니다. 염제 신농씨가 문명을 일으킨 제왕으로 흔히 소로 상징되는데, 치우천황에 대해서 뿔 달린 투구를 사용했다고 전하는 점에서 이 두 분의 혈통적, 문화적 계승 여부에 대해서 매우 의미 있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내 역사학계에서는 치우천황을 중국 남방에 있는 삼묘족의 족장으로만 보고 우리 민족과의 연결성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록에서 보듯이 묘족은 본래 우리 환족의 후예로 태호 복희씨와 치우천황을 조상으로 섬겨 온 동방족이라는 사실을 간과해 왔습니다. 이 묘족은 치우천황을 묘족의 왕이자 비조鼻祖로 섬겨 왔습니다. 현재 중국 남방 구이저우성貴州省을 중심으로 인근 윈난성, 후난성, 쓰촨성, 광시성 및 베트남, 라오스, 타이 북부에도 거주하고 있습니다. 중국에 거주하는 인구는 약 250만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몽골계 인종으로 살갗은 누르고 성질이 급하며 몸집은 비교적 작은 편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황하 중류에 널리 퍼져 살았으나, 점차 남쪽으로 이동해 왔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들은 특별한 명절에는 큰 축제를 벌여 화수花樹라고 하는 큰 나무를 베어다가 가운데 세우고 돌면서 춤을 춥니다. 이 춤은 손을 잡고 여러 개의 둥그런 원을 만들고 앞뒤 원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돕니다. 이런 원무圓舞는 우리의 강강술래를 연상케 해 줍니다. 그 밖에도 우리 민속과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신교문화가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묘족이 뜻밖에도 요堯임금의 아들인 단주와 인연이 있습니다. 탁록대전 이후 당시 양자강 이남의 동정호洞庭湖와 팽려호彭蠡湖 일대에는 구려九黎의 후예인 ‘유묘有苗’ 혹은 ‘삼묘三苗’라 불리는 부족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요임금의 아들 단주와 매우 가깝게 지냈습니다. 단주는 서방과 동방을 통합하여 대동 세계를 구현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요임금이 순舜에게 제위를 넘겨주려 하자 이 소식을 듣고 승복하지 않던 삼묘의 족장은 단주가 오자 곧바로 세력을 연합하여 요임금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요와 순의 군대는 단주와 삼묘 연합군을 궤멸시켜 버립니다. 이 전투에서 삼묘 족장과 단주가 전사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묘족이 남쪽으로 옮겨 가게 된 배경이라고 합니다. (이재석,『인류원한의 뿌리 단주』, 33~ 34쪽)
<참고문헌>
『역주본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이것이 개벽이다 하』(안경전, 상생출판, 2014)
『갑골에 새겨진 신화와 역사』(김성재, 동녘, 2000)
황제黃帝가 난亂을 지으므로 치우蚩尤가 큰 안개를 지어 이를 평정하였나니 난을 지은 사람이 있어야 다스리는 사람이 있느니라.
(증산도 도전 2:31:1~2)
(증산도 도전 2:31:1~2)
인류사는 전쟁의 역사였습니다. 혹자는 인류사를 ‘피의 목욕탕’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선천 상극相克 세상은 모든 존재들이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며 서로 싸우면서 성장 발전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원과 한이 축적되었고, 갈등과 원한이 전쟁으로 분출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한반도는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유신론과 무신론의 갈등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입니다. 최근 남북 화해 모드가 진행되었지만, 상극의 이념 대결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 같은 상태로 잠재되어 있는 곳입니다.
우리 한민족의 이런 비극은 단순한 이념 대결로 인함은 아닙니다. 시원 역사와 문화가 왜곡되고 말살되면서 무기력한 약소국으로 전락해 버린 데 그 근본 원인이 있습니다. 중국의 중화사관과 일제의 식민사관에 찌들어 버렸고, 서양사상에 매몰되었으며, 스스로 자존감을 잃어 버려 대한의 혼을 상실한 우리 민족. 역사를 모르면 미래도 없습니다. 과거를 모르고 어떻게 현재를 알 수 있으며, 현재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는데 어찌 미래의 새 역사를 열 수 있겠습니까? 이제 천지의 시비를 바로잡는 가을개벽을 맞이하여, 우리는 묵은 기운을 깨부수는 깊은 자기반성과 민족의 정체성을 부정한 잘못에 대한 철저한 참회를 바탕으로 민족사 인식을 완전히 개벽시켜야 합니다. 이에 잠자는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서라도 한중 고대사의 첫 번째 왜곡 날조 사건의 대상이 된 우리 민족의 성웅 자오지환웅, 즉 치우천황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합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우리 응원단의 상징으로 그리고 여전히 우리 생활 속에 살아 있는 승리의 신 그 치우천황을 만나 보러 가겠습니다.
치우천황治尤天皇은 누구인가?
4,700년 전 배달국은 14세 자오지환웅 시대에 큰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자오지환웅에 대해서 삼성기 하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분은 신이한 용맹이 매우 뛰어나 구리와 철로 투구를 만들어 쓰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며, (채광 기계인) 구치九治를 제작하여 광석을 캐내 이 철을 주조하여 무기를 제작하니 천하가 모두 외경하였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는 이분을 치우천황이라 불렀는데, 치우란 세속에서 말하길 ‘뇌우가 크게 일어 산하가 뒤바뀐다’는 뜻이다.
자오지慈烏支환웅의 호칭에 대해서 박현은 ‘자오’는 ‘땅을 넓힌다’, ‘지’는 ‘치’로 변하기 전의 소리로 ‘이끄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보았습니다. 여기서 ‘오烏’는 태양을 상징하는 새로 고구려의 삼족오와 연결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유립은 치우는 지위智爲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 ‘치우’에는 천둥이 치고 큰 비가 내려 산천이 모습을 바꾼다는 개벽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사서 및 우리 기록에는 ‘치’ 자가 벌레라는 뜻인 ‘蚩’로 표기되어 있어 우리를 당혹케 합니다. 그러나 『환단고기』 「삼성기」 상에서는 다스릴 ‘치治’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尤’ 자에 대해서는 ‘군에서 최고이며 제일인 수장. 군무에 제반적인 것을 관장하는 관직명’이라는 기록이 있어, 치우란 ‘군사를 다스리고 통제하는 으뜸가는 수장’이란 뜻이 됩니다.
신교神敎 가르침을 널리 펼친 구려의 치우 천자天子
치우천황은 앞선 문명 기술을 바탕으로 국력을 신장시켰습니다. 그뿐 아니고 자부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아 신교의 가르침을 널리 펴기도 하였습니다.
치우천황은 배달 신시의 웅렬한 기상을 계승하여 백성과 함께 이를 새롭게 펼쳐 나갔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뜻을 밝혀 생명의 의미를 알게 하였으며(開天知生), 땅을 개간하여 뭇 생명을 다스리게 하였고(開土理生), 사람의 마음을 열어 생명을 존중하게 하였습니다(開人崇生).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만물의 원리를 스스로 살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치우천황의 덕은 미치지 않은 곳이 없고, 지혜가 적합하지 않음이 없게 되었습니다. 백성과 더불어 나라를 나누어 다스렸고, 호랑이처럼 늠름하게 황하의 북쪽 지역에 웅거하여 안으로 군사를 용맹하게 훈련시키고 밖으로 시국의 변화를 관망하였습니다.
당대 최강 군단의 수장, 치우천황과 배달군倍達軍
동두철액銅頭鐵額과 치우천황
후대 기록에서 치우천황 및 그 집단을 상징하는 단어는 동두철액銅頭鐵額, 즉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가졌다는 말입니다. 치우천황에 대한 우리 쪽 기록은 극히 드물고, 맞서 싸웠던 황제헌원 쪽 기록이 많이 남아 있어서 그들이 보기에 특징적이었던 부분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치우천황은 갈로산에서 광석을 캐내어 청동기 시대를 열었습니다. 청동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인류 최초의 금속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갈로산葛盧山은 산둥성 청도靑島시 부근으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치우천황은 이곳에서 제련한 금속을 이용하여 선진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기의 주석으로 유명한 당나라 때 역사학자 사마정司馬貞은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관자』에 치우가 노산盧山의 금(금속)을 얻어 다섯 가지 병기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 『규원사화』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갈로산의 쇠를 캐어 칼, 갑옷, 창과 가닥 진 창(戟), 큰 활과 싸리나무 화살(楛矢) 등을 많이 만들어 정비하고 탁록을 떠나 구혼九渾에 올라 연전연승하니, 기세가 마치 비바람과 같아서 세상 만민이 두려워 엎드리니 그 위세가 천하에 떨쳤다.
이외에도 ’치우가 금속으로 병기를 만들었다‘는 수많은 사서의 기록을 통해 보아도 금속 제련 및 무기 제작과 사용 등의 원조가 치우천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치우천황은 동두철액에 다섯 가지 병기를 만들고 사용하는 왕, 모래와 쇳가루를 먹고 사는 왕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는 치우천황과 그 일족과 군단이 청동기 문화 민족임을 알려 줍니다. 모래와 쇳가루를 먹고 산다는 말은 주석과 분쇄한 황동광으로 청동기를 만들었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즉 치우천황과 그 군단軍團은 구리 머리, 철 이마로 상징하는 투구나 여러 보호 장구에 다섯 가지 병기를 사용하는 당대 최강의 무기를 보유한 군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치우천황과 청동기 시대 개창 그리고 역사 왜곡
금속의 사용은 문명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계입니다. 치우천황 당시 배달국 중심지인 청구 지역, 즉 지금의 난하와 대릉하 일대를 중심으로 일찍이 청동기 문화인 하가점하층문화夏家占下層文化가 발전하였습니다. 이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 중 가장 오래된 청동기는 단군조선이 개국한 기원전 2333년 이전에 제작된 것입니다. 최근에는 신석기 시대인 홍산문화의 후기 유적인 요령성 건평현 홍산 우하량 유적에서도 5,000년 전인 기원전 3000년경에 이미 청동기를 사용하였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 청동기 문화에 대해서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중국 전국 시대 말기에 중국의 이주민이 들여온 것으로 우리는 신석기 문화에서 청동기 문화 없이 곧바로 철기 문화로 넘어갔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해방 이후 곳곳에서 청동기 유적이 확인되자 학계에서는 오르도스 시베리아 계통의 것이라 주장하기도 하고, 순수한 한국의 청동기는 세형동검이 전부라고 억지 논리를 펴 왔습니다. 그러나 요령식 동검으로 여겨지던 비파형 동검이 한반도 곳곳에서 발견되어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의 범위는 시간적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할 뿐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북경 지역까지 대폭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또 철기 문화도 우리나라에서 먼저 시작되어 중원 지역에 보급되었습니다. 그것은 철鐵의 옛 글자가 ’동이족의 쇠‘를 뜻하는 철(銕=金+夷)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을 말하는 이夷는 큰 대大 자와 활 궁弓 자를 합한 글자로 동방 사람(東方人)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를 공자가 「春秋」를 지으면서 융적과 함께 오랑캐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현재까지 이렇게 잘못 알려져 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아무튼 구리를 시작으로 해서 치우천황이 처음 철과 같은 금속을 발굴, 제련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런 글자가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은 치우를 동이족인 구려九黎의 천자天子라는 기록을 많이 남겨 놓았습니다. 구려에서 려黎의 다른 소릿값은 ’리‘ 또는 ’이‘가 됩니다. 따라서 구려는 ’구리‘ 또는 ’구이‘가 됩니다. #’구이‘는 ’구려‘라고도 하였고, 이는 치우천황이 통치하였던 배달국의 또 다른 이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구리란 호칭에 대해서 인류 최초로 다루어진 금속인 구리(銅, Copper)의 어원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서토西土로 진출하는 치우천황
기원전 2749년 배달국 신시에서 태어난 치우천황은 13세 사와라斯瓦羅환웅의 뒤를 이어 기원전 2707년 42세 되던 해 배달국 14세 환웅으로 즉위하셨습니다. 재위는 109년이요 천수는 151세였습니다. 역대 환웅 중 가장 장수하셨습니다. 치우천황 초기 염제 신농씨가 세운 신농국은 그 후손인 유망楡罔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10세 갈고환웅葛古桓雄 시기에 배달국은 염제 신농씨의 나라와 국경을 정하였습니다. 치우천황이 즉위하고 초기에 신농국이 쇠망을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이에 치우천황은 웅대한 포부[雄圖]를 품고 서방으로 출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산둥성, 장쑤성, 안휘성 일대를 배달의 영토로 흡수하였습니다. 유망은 대패하여 수도였던 지금의 허난성 진류인 공상空桑으로 도망하였습니다. 하지만 치우천황은 이들을 일거에 멸하였습니다. 이때 치우군의 공상 입성 소식이 들리자, ‘서방 한족 문화권 통합’이라는 야망을 품고 있던 서토 지역의 일개 제후였던 헌원軒轅이 치우천황을 밀어내고 스스로 천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드러내며 대군을 일으키게 됩니다. 『태백일사』 「신시본기神市本紀」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변경大辯經』에 말한다. 우리 치우천황은 신시의 옛 힘을 받으시어 백성과 더불어 새롭게 태어나셨다. 유망楡罔의 정권이 쇠약해지니 군대를 보내어 정벌하였다. 갈로산의 쇠를 캐내어 도개刀鎧, 모극矛戟, 대궁, 호시弧矢 같은 무기를 대량으로 제작하여 탁록琢鹿(지금의 북경 일대)을 함락하고 구혼九渾에 올랐다. 연전연승하는 그 위세는 질풍과 같아서 만군을 겁에 질려 굴복케 하고 위세는 천하에 떨치었다…. 1년 동안에 모두 아홉 제후諸侯의 땅을 함락하고 … 서토西土의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도망하여 숨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일개 제후에 불과한 헌원의 반란 사건! 결론적으로 제후의 위치에 있었던 헌원이 천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천자인 치우천황에게 도전해 온 ‘황제작란黃帝作亂’은 서양의 트로이 전쟁에 빗대어 일컬어지는 탁록대전의 진실입니다. 결론적으로 탁록대전은 동방 종주국 배달과 이에 대항한 서방 헌원 세력의 대전쟁이었습니다. 10년간 73회에 걸쳐 치열하게 펼쳐진 공방전! 그 진실과 사마천에 의해 자행된 역사 왜곡의 실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파헤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치우천황의 성은 강씨姜氏인가?
치우천황의 성씨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 『태백일사』 「신시본기」에서는 강씨라고 전하고 있습니다.옛날에 강태공 여상呂尙 또한 치우씨의 후손이다. 고로 성이 강씨姜氏이니, 치우가 강수姜水에 살면서 낳은 아들이 모두 강씨가 되었다
(남송 때 정초鄭樵가 지은 역사책인) 통지通志 씨족략氏族略에 ‘치씨蚩氏’는 치우의 후손’이라 하였고, 어떤 사람은 ‘창힐과 고신이 다 치우의 후손으로 대극성大棘城에서 태어나 산동, 회수 북쪽에 옮겨 살았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치우천황의 영웅적인 풍채와 굳세고 맹렬한 기상이 아주 멀리까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송 때 정초鄭樵가 지은 역사책인) 통지通志 씨족략氏族略에 ‘치씨蚩氏’는 치우의 후손’이라 하였고, 어떤 사람은 ‘창힐과 고신이 다 치우의 후손으로 대극성大棘城에서 태어나 산동, 회수 북쪽에 옮겨 살았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치우천황의 영웅적인 풍채와 굳세고 맹렬한 기상이 아주 멀리까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대극성은 대릉하 중류의 조양朝陽 부근에 있습니다. 허베이성 창려현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현존하는 인류 성씨의 시조는 염제 신농씨의 강씨입니다. 본래 태호 복희씨의 풍씨였으나 15세 이후 사라졌습니다. 염제 신농씨가 문명을 일으킨 제왕으로 흔히 소로 상징되는데, 치우천황에 대해서 뿔 달린 투구를 사용했다고 전하는 점에서 이 두 분의 혈통적, 문화적 계승 여부에 대해서 매우 의미 있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치우천황과 묘족苗族 그리고 단주丹朱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상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웅족과 호족이 서로 다투던 때는 환웅천황께서 아직 나라를 다스리기 이전이다. 묘환苗桓은 환국 시절 구황九皇족의 하나로 그 땅은 옛적에 이미 우리 환족이 유목과 농경을 하던 곳이다.
국내 역사학계에서는 치우천황을 중국 남방에 있는 삼묘족의 족장으로만 보고 우리 민족과의 연결성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록에서 보듯이 묘족은 본래 우리 환족의 후예로 태호 복희씨와 치우천황을 조상으로 섬겨 온 동방족이라는 사실을 간과해 왔습니다. 이 묘족은 치우천황을 묘족의 왕이자 비조鼻祖로 섬겨 왔습니다. 현재 중국 남방 구이저우성貴州省을 중심으로 인근 윈난성, 후난성, 쓰촨성, 광시성 및 베트남, 라오스, 타이 북부에도 거주하고 있습니다. 중국에 거주하는 인구는 약 250만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몽골계 인종으로 살갗은 누르고 성질이 급하며 몸집은 비교적 작은 편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황하 중류에 널리 퍼져 살았으나, 점차 남쪽으로 이동해 왔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들은 특별한 명절에는 큰 축제를 벌여 화수花樹라고 하는 큰 나무를 베어다가 가운데 세우고 돌면서 춤을 춥니다. 이 춤은 손을 잡고 여러 개의 둥그런 원을 만들고 앞뒤 원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돕니다. 이런 원무圓舞는 우리의 강강술래를 연상케 해 줍니다. 그 밖에도 우리 민속과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신교문화가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묘족이 뜻밖에도 요堯임금의 아들인 단주와 인연이 있습니다. 탁록대전 이후 당시 양자강 이남의 동정호洞庭湖와 팽려호彭蠡湖 일대에는 구려九黎의 후예인 ‘유묘有苗’ 혹은 ‘삼묘三苗’라 불리는 부족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요임금의 아들 단주와 매우 가깝게 지냈습니다. 단주는 서방과 동방을 통합하여 대동 세계를 구현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요임금이 순舜에게 제위를 넘겨주려 하자 이 소식을 듣고 승복하지 않던 삼묘의 족장은 단주가 오자 곧바로 세력을 연합하여 요임금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요와 순의 군대는 단주와 삼묘 연합군을 궤멸시켜 버립니다. 이 전투에서 삼묘 족장과 단주가 전사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묘족이 남쪽으로 옮겨 가게 된 배경이라고 합니다. (이재석,『인류원한의 뿌리 단주』, 33~ 34쪽)
<참고문헌>
『역주본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이것이 개벽이다 하』(안경전, 상생출판, 2014)
『갑골에 새겨진 신화와 역사』(김성재, 동녘, 2000)
©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