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무극대도 | 뜻 있는 자는 한 번 뜻을 세우면! - 지산겸괘 ䷎
[기고]
땅 아래 산이
지산겸괘地山謙卦(䷎)의 겸은 ‘겸손’, ‘겸양’을 뜻하며 겸양의 도를 보여 주는 괘입니다.
위에는 세 획이 다 끊어진 땅을 나타내는 곤괘(☷), 아래에는 맨 위 획만 이어진 산을 나타내는 간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땅 아래(속)에 산이 있는 것이 왜 ‘겸손하다’는 겸괘謙卦일까요? 산이란 땅 위에 높이 솟아 있는 것이 정상인데 우뚝한 산이 땅 밑에 내려와 자신을 낮추는 모양이니 겸손한 것이고 겸양의 미덕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겸謙 자는 言(말씀 언) + 兼(겸할 겸)의 합성자로 ‘兼’ 자는 고개 숙인 벼(禾) 다발을 겹쳐서 손에 쥐고 있는 모습입니다. 즉 겸謙 자는 능력이 있음에도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공손한 말(言)로 자신을 낮추어 거듭(兼)해서 사양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실천하기 어려운 덕목으로 군자만이 겸도謙道를 지켜 형통할 수 있고 마침내 군지지도君子之道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
겸괘는 15번째 괘로 천도의 변화에서 15수數는 꽉 찬 수입니다. 즉 달의 변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14일은 기망幾望, 15일은 망望(보름), 16일은 기망旣望이라 부르는데 15일 보름을 정점으로 점점 이지러지기 시작하여 그믐으로 줄어드니 겸손의 의미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남을 배려하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 겸양은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의 기본 덕목입니다. 겸괘는 한 개인의 인생살이에서 바른길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큰 틀에서 하늘의 도[天道]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설문해자說文解字』를 보면 ‘겸謙은 경敬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원래 경이란 우주 주재자에 대한 경외심을 의미하는 말로 하느님 앞에 섰을 때 누구든지 겸손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겸謙과 경敬은 서로 상보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대한제국 시절에 개교한 대구 계성고등학교의 교훈이 바로 “인외상제지지본寅畏上帝之智本(삼가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니라)”으로, 잠언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주 주재자에 대한 경외심을 핵심적으로 표현한 성구가 아닐까요.
주역 64괘 중에서 좋은 괘 하나를 꼽으라면 누구나 주저 없이 지산겸괘를 뽑습니다.
64괘에는 육효마다 길흉吉凶이 서로 섞여 있는데 오직 겸괘만은 64괘 중에서 부정적인 말이 전혀 없는 유일한 괘입니다. 다른 괘에서 볼 수 있는 나쁜 표현(凶, 悔, 吝, 咎)이 하나도 없습니다. 겸괘의 여섯 효를 보면 내괘의 세 개 효사는 ‘길吉하다’로, 외괘의 세 개 효사는 ‘이利롭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겸괘를 좋아하는 성향이 반영되어 이름을 지을 때 ‘겸謙’ 자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이 같은 겸괘와 관련된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1539~1601)과 진경화풍의 시조인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을 꼽을 수 있습니다. 겸암 선생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해 낸 명재상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친형으로, 사람들에게 많은 조언과 도움을 주었던 분이었으며 천문, 지리, 복서 등 역학에 달통하였던 도인이었습니다. 15살 되던 해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퇴계가 도산에서 서당을 열었을 때 겸암이 제일 먼저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을 뿐만 아니라, 퇴계 또한 겸암의 학문적 재질과 성실한 자질에 감복하여 총애하였다고 합니다.
겸암이 하회 마을 건너편의 부용대 산자락에 정사精舍를 지었을 때 퇴계는 지산겸괘의 ‘겸손한 군자는 스스로 자기 몸을 낮춘다’는 뜻이 담긴 ‘겸암정謙菴亭’이라는 현액을 친히 써 주며 “그대가 새 집을 잘 지었다는데 가 보지 못해 아쉽다”는 편지글까지 보내 주었다고 합니다. 겸암은 퇴계가 지어준 그 이름을 귀하게 여겨 평생 자신의 호로 삼았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늘 겸손함을 삶의 지표로 여기고 살았으며, 겸암정사를 지을 때도 정상 근처의 전망 좋은 곳에다 짓지 않고 약간 내려온 지점에, 그것도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을 택하여 터를 잡은 것을 보면 겸괘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겸암정사는 자신을 낮춰 겸허한 마음으로 유종의 미를 거둔다는 겸덕을 여실히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부용대 중간 자락에는 겸암 선생을 주 제향으로 모신 화천서원花川書院이 있는데요. 이 서원 안에 있는 이층 누마루 건물 현액이 다름 아닌 ‘지산루地山樓’로 되어 있는 것도 지산겸괘의 ‘지산地山(땅 아래 산이 있음)=謙’에서 따온 작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겸재 정선은 이전까지 중국 화풍을 그대로 모방해 오던 기존의 화풍과는 달리 ‘진짜 조선의 산천을 그리자’는 생각으로 우리만의 고유 산수화 양식인 진경산수화풍眞景山水畫風을 개척한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정선은 30대에 겸허하게 살기로 작정하고 자신의 호를 겸손하다는 겸재謙齋로 짓고 이를 평생토록 실천하여 화가로서는 드물게 종2품이란 큰 벼슬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겸재는 율곡 학맥을 이어받은 성리학자로 또한 주역에도 능통하여 산수화법에 이를 적용하였습니다. 또한 겸재는 20년 넘게 금강산을 자주 오른 ‘금강산 화가’로도 유명한데요. 그중에서도 금강산을 주역적으로 재해석한 진경산수화의 대표작이 바로 국보 제217호로 지정된 〈금강전도金剛全圖〉입니다.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소장에 의하면, 금강전도는 주역의 음양 원리에 입각하여 음양의 조화·대비의 원리로 화면을 구성해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즉 토산(陰)과 암산(陽)이 어우러진 금강산을 음양조화와 대비를 통해 우리 산천의 주종을 이루는 화강암 바위와 소나무를 묘사하는 화법으로 그린 것입니다.
그림을 잘 보면 왼쪽 아래 부분은 수목이 우거진 부드러운 흙산을 음陰으로, 오른쪽 뾰족한 산봉우리가 많은 돌산은 굳센 필선으로 양陽을 표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하늘의 굳건한 기상을 상징하는 중천건괘(䷀)의 자강불식自彊不息은 바위산으로 표현하였으며, 땅의 유순한 지덕을 상징하는 중지곤괘(䷁)의 후덕재물厚德載物은 흙산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화법은 음양조화를 우주 생성의 기본으로 삼고 있는 주역의 이념에 일치될 뿐만 아니라 암산과 토산이 적당히 어우러져 있는 우리 산천의 특징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겸재는 우리들에게 친숙한 천 원권 지폐 뒷면에 등장하는 퇴계 선생을 흠모하여 계당서당 풍경을 그린 보물 585호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군자는 마침이 있다
그럼 괘사를 보겠습니다.
謙(겸)은 亨(형)하니 君子有終(군자유종)이어라
겸은 형통하니 군자가 마침이 있느니라.
겸은 형통하니 군자가 마침이 있느니라.
지산겸괘(䷎)는 잘난 양효陽爻 하나가 자기보다 못한 다섯 음효陰爻들 아래에서 겸손하고 다소곳하게 있으니 매사에 형통할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謙亨). ‘만초손 겸수익滿招損 謙受益’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오만하게 굴면 손해를 보게 되지만,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면 이익이 찾아온다는 뜻으로 서경書經에 나오는 말입니다. 보통 사람도 겸손하게 처신하면 자기한테 끝내 이익이 돌아가고 만사가 형통하게 되는 것인데 하물며 군자는 더 말할 나위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자주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처음처럼’입니다. 하지만 작심삼일이란 말이 있듯이 처음처럼이란 초심初心을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초지일관하기가 어렵다는 말이죠.
* 마음 지키기가 죽기보다 어려우니라. 사람 마음이 열두 가지로 변하나니 오직 송죽松竹처럼 한마음을 잘 가지라. (증산도 도전 8:6:1~2)
누구든지 처음은 할 수 있지만 끝[마침]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상제님께서도 “한 번 뜻을 세워 평생을 한결같이 일관한다는 것이 말로는 쉽지마는 어찌 쉽게 행하리오(8:10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군자만이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습니다.
중천건괘를 보면 ‘군자는 종일토록 건건(君子終日乾乾, 군자는 날이 마치도록 굳세고 굳세어서)’해서 하늘의 굳건한 기상을 본받아 스스로 굳세어 쉼이 없는 삶을 살아가기에 끝을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군자는 겸덕謙德에 의해 완성됩니다. 『도덕경』을 보면 “강과 바다가 모든 계곡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강과 바다가 가장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계곡의 왕이 되는 것이다(江海所以能爲百谷王子 以其善下之 故能爲百谷王)”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처럼 바다가 온갖 하천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낮은 데 있어서 가능한 것처럼 자신을 낮추는 군자에게 세상 사람들은 감화가 되는 것이지요. 군자유종의 군자는 유가에서 말하는 군자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군자는 어떤 존재일까요? 그 해답의 힌트는 겸괘가 15번째 괘라는 것이며 ‘군자君子와 15수數’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5수의 의미는 우주 창조의 설계도인 하도河圖의 중궁中宮에 있는 15土(10土와 5土의 합수)로서 ‘15진주眞主’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15진주에 의해 성취되는 마침[終] 또한 세속 개인사個人事의 마침이 아니라 ‘선천 역사를 종결[終]짓고 후천 가을 세상을 시작[始]하는’ 바로 ‘종어간終於艮 시어간始於艮’의 ‘종終’입니다.
그러므로 괘사에 나오는 ‘군자유종君子有終’이란 ‘한평생을 일관되게 광구창생하시는 상제님의 대행자께서 주도하는 천하사가 마무리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 유지자사경성有志者事竟成이라. 뜻 있는 자는 한 번 뜻을 세우면 평생을 한결같이 일관하여 필경에는 성취한다는 말이요. (도전 8:104:2)
그래서 백절불굴, 독행천리하시는 인사의 대권자를 본받아 천지 일꾼인 증산도의 도군자道君子들은 상제님·태모님께서 모사재천해 놓으신 후천선경의 청사진을 반드시 성사재인하여야 합니다.
* 일꾼은 천명을 받아 천지사업에 종신終身하여 광구천하의 대업을 실현하는 자니라. (도전 8:1:1)
이번에는 단전을 보겠습니다
彖曰(상왈) 謙亨(겸형)은 天道(천도) 下濟而光明(하제이광명)하고 地道(지도) 卑而上行(비이상행)이라
단전에 이르길 겸손함이 형통하다는 것은 하늘의 도가 아래로 내려와 광명하고, 땅의 도가 낮은 데서 위로 행함이라.
天道(천도)는 虧盈而益謙(휴영이익겸)하고 地道(지도)는 變盈而流謙(변영이유겸)하고
하늘의 도는 가득 찬 것을 이지러지게 만들고 겸손함에 보태주고, 땅의 도는 가득 찬 것을 변하게 하며 겸손으로 흘러가게 하고
鬼神(귀신)은 害盈而福謙(해영이복겸)하고 人道(인도)는 惡盈而好謙(오영이호겸)하니
귀신은 가득 찬 것을 해롭게 하며 겸손함에 복을 주며 사람의 도는 가득 찬 것을 싫어하며 겸손함을 좋아하니
謙(겸)은 尊而光(존이광)하고 卑而不可踰(비이불가유)니 君子之終也(군자지종야)라
겸은 높고도 빛나서 낮아도 넘지 않으니 군자의 마침이라.
단전에 이르길 겸손함이 형통하다는 것은 하늘의 도가 아래로 내려와 광명하고, 땅의 도가 낮은 데서 위로 행함이라.
天道(천도)는 虧盈而益謙(휴영이익겸)하고 地道(지도)는 變盈而流謙(변영이유겸)하고
하늘의 도는 가득 찬 것을 이지러지게 만들고 겸손함에 보태주고, 땅의 도는 가득 찬 것을 변하게 하며 겸손으로 흘러가게 하고
鬼神(귀신)은 害盈而福謙(해영이복겸)하고 人道(인도)는 惡盈而好謙(오영이호겸)하니
귀신은 가득 찬 것을 해롭게 하며 겸손함에 복을 주며 사람의 도는 가득 찬 것을 싫어하며 겸손함을 좋아하니
謙(겸)은 尊而光(존이광)하고 卑而不可踰(비이불가유)니 君子之終也(군자지종야)라
겸은 높고도 빛나서 낮아도 넘지 않으니 군자의 마침이라.
겸괘의 괘사 ‘겸謙은 형통하니 군자의 마침이 있다’는 것에 대해 공자께서 부연 설명한 단전입니다. 겸덕이 형통한 것은 하늘의 도[天道]가 땅으로 내려와서 광명하고, 땅의 도[地道]는 낮은 데에서 천도와 호응하여 위로 올라가서 그렇다고 합니다.
하늘의 도가 광명하다는 말은 하괘인 산괘(☶)의 구삼九三을 지칭하며, 땅의 도가 낮은 데서 위로 행한다는 말은 땅괘(☷)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는 곧 천지의 교합을 나타내는 지천태地天泰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도는 달이 차면 이지러지고 또 이지러지면 차듯이 천도의 겸손이란 일월日月의 소식영허消息盈虛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땅의 도는 가득 찬 것을 변하게 하며 겸손으로 흐르게 한다는 말은 땅이란 온 들녘을 황금물결로 뒤덮는 풍요를 주기도 하지만 수확이 줄어드는 흉년을 만들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귀신은 욕심으로 가득 찬 많은 사람에게는 해코지를 하지만 겸손한 사람에게는 복을 내려 준다고 하였습니다.
이 경우는 도전에 나오는 백남신白南信의 이야기로 갈음하겠습니다. 백남신이라는 호남 제일의 갑부가 있었는데 상제님께서 남신의 관액을 끌러 주시자 은혜에 보답하고자 진수성찬을 차려 모셨지만 상제님께서는 젓가락만 세 번 드시고는 끝내 음식을 드시지 않았습니다. 남신의 집을 나온 후 허름한 주막집에서 겉보리밥을 드시면서 상제님께서는 “상 밑에 척신들이 가득 차서 내가 젓가락을 드니 척신들이 벌벌 떨며 ‘그걸 드시면 저희들은 어찌 됩니까’ 하고 하소연하므로 내가 남신의 성의를 보아 젓가락만 세 번 들었다 놓았느니라.”(3:6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상제님 말씀대로 남신과 같은 “부잣집 마루와 방과 곳간에는 살기와 재앙이 가득히 채워져”(3:138:7)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도[人道]는 가득 찬 것을 싫어하며 겸손한 사람에게는 호감을 갖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너무 완벽하거나 모든 걸 다 갖추고 있으면 가까이하길 꺼려합니다. 약간 부족한 듯하면서도 남을 배려하는 겸손한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는 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이 같은 겸덕謙德을 행하는 군자야말로 상대방을 높여 줌으로써 더불어 빛나게 되니 자신을 낮춘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므로 군자는 유종의 미를 거둔다고 하였습니다. 단전에서는 겸양의 도를 네 가지 측면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천도天道는 익겸益謙’, ‘지도地道는 류겸流謙’, ‘신도神道는 복겸福謙’, ‘인도人道는 호겸好謙’입니다.
저울질하여 베풂을 고르게
대상전을 보겠습니다.
象曰(상왈) 地中有山(지중유산)이 謙(겸)이니 君子(군자) 以(이)하여 裒多益寡(부다익과)로써 稱物平施(칭물평시)하니라
대상전에 이르길 땅 속에 산이 있는 것이 겸손함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많은 것을 덜어 내어 적은 데에 더해 줌으로 물건을 저울질하여 베풂을 고르게 하니라.
대상전에 이르길 땅 속에 산이 있는 것이 겸손함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많은 것을 덜어 내어 적은 데에 더해 줌으로 물건을 저울질하여 베풂을 고르게 하니라.
땅 위에 솟아 있을 산이 땅 속으로 내려오듯 자신을 낮춰서 아래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는 것이 겸괘이니 군자는 이를 본받아 권력과 재물을 혼자 독식하려 하지 말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서 다 같이 공평하게 잘 사는 대동세계大同世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겸괘에서는 대동세계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넘치는 것을 덜어 내어 부족한 데다 보태 줌으로써 베풂을 고르게 할 수 있다(裒多益寡 稱物平施)고 하였습니다.
* 우리 일은 남 잘되게 하는 공부니 남이 잘되고 남은 것만 차지하여도 우리 일은 되느니라. (도전 2:29:1)
만유 생명의 아버지 상제님과 자애로우신 어머니 태모님의 삶은 그 자체가 베풂의 연속이었습니다. 상제님께서는 가옥과 전답을 팔아 걸인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남의 집 협실에서 궁핍하게 사신 것은 물론이고 성모님께서 간신히 장만하신 고추밭마저도 팔아서 나누어 주시는가 하면, 입고 계신 옷과 짚신마저도 다 벗어 주셨습니다. 또 호연이에게 이르시기를 “배고픈 사람에게 밥 잘 줘야 하고, 옷 없는 사람에게 옷 잘 줘야 한다”(9:33:16)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상제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구휼이 도수로 박히어 앞세상에는 헐벗고 배고픈 사람이 없는 지상선경이 펼쳐지게 됩니다.
* 후천에는 식록食祿은 고르게 하리니 (도전 7:21:4)
* 후천 백성살이가 선천 제왕보다 나으리라. (도전 7:87:5)
칭물평시稱物平施! 이것이 바로 겸괘의 군자가 추구하는 빛나는 가치입니다. 선천은 삼양이음三陽二陰으로 인해 원한의 불씨를 토해 낸 상극 세상이었으나, 후천은 정음정양正陰正陽의 공평한 세상으로 지상선경 세계입니다. 단주丹朱의 해원을 머리로 이 땅에서 천지 녹지사인 태을랑들이 칭물평시稱物平施의 대동세계를 건설합니다.
* 앞세상에는 신분과 직업의 귀천이 없어 천하는 대동세계大同界界가 되고, 모든 일에 신명이 수종 들어 이루어지며 따뜻한 정과 의로움이 충만하고 자비와 사랑이 넘치리라. (도전 2:65:8~9)
그럼 겸괘의 육효사를 보겠습니다.
初六(초육)은 謙謙君子(겸겸군자)이니 用涉大川(용섭대천)이라도 吉(길)하니라
초육은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이니 (어려운 상황이지만) 대천을 건너야 하더라도 길하니라.
象曰(상왈) 謙謙君子(겸겸군자)는 卑以自牧也(비이자목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라는 말은 (자기를) 낮춤으로써 스스로 기르느니라.
초육은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이니 (어려운 상황이지만) 대천을 건너야 하더라도 길하니라.
象曰(상왈) 謙謙君子(겸겸군자)는 卑以自牧也(비이자목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라는 말은 (자기를) 낮춤으로써 스스로 기르느니라.
겸괘는 자신을 낮춘다는 겸손함을 나타내므로 아래에 있는 효일수록 더 겸손하며, 위쪽에 있는 효일수록 겸손한 마음가짐이 덜합니다. 그래서 겸괘에서 맨 아래에 있는 초육은 유순하고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신출내기라서 ‘겸손에 겸손을 더한’ 가장 겸손한 표현인 ‘겸겸군자謙謙君子’와 ‘낮을 비卑’로 표현한 것입니다. 초육처럼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는 소상전에서 말한 대로 자신을 낮추어 인격을 도야하고 덕 닦기에 힘쓰므로 큰 내를 건너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 닥치더라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 시속에 길성소조吉星所照를 찾으나 길성소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요 덕을 닦고 사람 잘 대우하는 데에 길성吉星이 비치나니 이 일이 곧 피난하는 길이니라. (도전 8:36:4~5)
六二(육이)는 鳴謙(명겸)이니 貞(정)코 吉(길)하니라
육이는 (남들에게) 울려 퍼지는 겸손이니 곧아서 길하니라.
象曰(상왈) 鳴謙貞吉(명겸정길)은 中心得也(중심득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울려 퍼지는 겸손이 곧아서 길하다”는 것은 중심을 얻음이라.
육이는 (남들에게) 울려 퍼지는 겸손이니 곧아서 길하니라.
象曰(상왈) 鳴謙貞吉(명겸정길)은 中心得也(중심득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울려 퍼지는 겸손이 곧아서 길하다”는 것은 중심을 얻음이라.
육이 자리는 중中을 얻고 음효가 음 자리[正]에 있으므로 중정中正입니다. 명겸鳴謙이란 중정하고 겸손한 육이의 명성이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것입니다. 중정한 자리에 있으면서 거기에다 겸손함까지 갖추었으니 굳이 자기 입으로 겸손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기에 길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런 육이의 겸손한 인품이 자연스레 사람들의 마음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고 소상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처럼 한마음
九三(구삼)은 勞謙(노겸)이니 君子有終(군자유종)이니 吉(길)하니라
구삼은 수고로운 겸손이니 군자의 마침이 있으니 길하니라.
象曰(상왈) 勞謙君子(노겸군자)는 萬民(만민)이 服也(복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수고롭고 겸손한 군자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복종하느니라.
구삼은 수고로운 겸손이니 군자의 마침이 있으니 길하니라.
象曰(상왈) 勞謙君子(노겸군자)는 萬民(만민)이 服也(복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수고롭고 겸손한 군자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복종하느니라.
구삼九三은 다섯 개 음효로 둘러싸여 인망人望을 받고 있는 유일한 양효로서 겸괘의 주효主爻입니다. 노겸勞謙이란 다섯 음효들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헌신하는 구삼의 겸손함을 말한 것이며, 이러한 구삼의 모습이야말로 지산겸괘의 키워드인 군자유종君子有終, 즉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는 진정한 군자의 모습이 아닐까요!
사실 누구나 무슨 일이든지 시작하기는 쉽습니다.
‘미불유초靡不有初 선극유종鮮克有終’이란 말이 있습니다.
‘처음은 누구나 노력하지만 끝까지 마무리 짓는 사람은 적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일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거나 혹은 변심하지 않고 처음처럼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초지일관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처음과 끝이 같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로 오직 군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상전에서 유종하는 구삼 군자에게는 모든 백성들이 복종한다고 했습니다.
필자는 겸괘, 노겸의 본보기가 주공周公이라고 생각합니다.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이 어린 세자를 남겨 놓고 갑작스레 죽자 동생인 주공이 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반발한 두 아우가 반란을 일으키자 주공은 이를 제압하고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용상에 오르라는 측근들의 강권도 물리치고 끝까지 왕위에 오르지 않은 채 어린 조카 성왕成王을 보좌하여 주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반석에 올려놓았습니다. 이처럼 끝까지 노겸의 한길을 걸어왔기에 후대에 와서 성인聖人으로 추앙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六四(육사)는 无不利撝謙(무불리휘겸)이니라
육사는 엄지손가락 같은 겸손이니 이롭지 않음이 없으리라.
象曰(상왈) 无不利撝謙(무불리휘겸)은 不違則也(불위칙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엄지손가락 같은 겸손이니 이롭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지 않음이라.
육사는 엄지손가락 같은 겸손이니 이롭지 않음이 없으리라.
象曰(상왈) 无不利撝謙(무불리휘겸)은 不違則也(불위칙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엄지손가락 같은 겸손이니 이롭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지 않음이라.
육사 자리는 육오 군왕 아래에 있는 신하의 자리이며 음효로 부드럽습니다. 엄지손가락[撝]은 다섯 손가락 중에서 으뜸 자리에 있으면서도 다른 손가락들과는 달리 네 손가락에 다 닿을 수 있습니다. 이 엄지손가락과 같은 역할을 하는 육사는 신하 중에서도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재상宰相으로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두루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위·아래에서 자신을 낮춰서 처세를 하니 이롭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고, 이런 육사는 법도 또한 어기지 않을 것입니다.
六五(육오)는 不富以其隣(불부이기린)이니 利用侵伐(이용침벌)해도 无不利(무불리) 하리라
육오는 (혼자) 부富하려 하지 않고 이웃으로서 함이니 침벌해도 이로우며 이롭지 않음이 없느니라.
象曰(상왈) 利用侵伐(이용침벌)은 征不服也(정불복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침벌함이 이롭다’는 것은 복종치 않는 것을 치는 것이라.
육오는 (혼자) 부富하려 하지 않고 이웃으로서 함이니 침벌해도 이로우며 이롭지 않음이 없느니라.
象曰(상왈) 利用侵伐(이용침벌)은 征不服也(정불복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침벌함이 이롭다’는 것은 복종치 않는 것을 치는 것이라.
육오는 군왕의 자리입니다. 왕이 자기 혼자만 부를 독식하고 백성들의 민생에 무관심하다면 폭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혼자만 잘 먹고 잘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과 더불어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 보겠다는 군왕의 겸덕에 감화를 받아서 백성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임금의 경우는 아무에게나 다 겸손할 수는 없습니다. 나라의 근간을 파괴하려는 반역의 무리들에 대해서는 단호히 정벌하는 것이 진정한 군왕의 겸덕이라고 소상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도문道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경우는 상제님의 종통을 부정하고 천하사에 대해 훼방을 놓는 무도한 난법난도자亂法亂道者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 나의 도道를 열어 갈 때에 난도자亂道者들이 나타나리니 많이도 죽을 것이니라. 난법난도하는 사람 날 볼 낯이 무엇이며, 남을 속인 그 죄악 자손까지 멸망이라. (도전 6:21:1,3)
겸괘에서 초육은 ‘겸겸謙謙’, 육이는 ‘명겸鳴謙’, 구삼은 ‘노겸勞謙’, 육사는 ‘휘겸撝謙’, 상육은 ‘명겸鳴謙’으로 모두 ‘겸謙’ 자를 언급하고 있지만 특이하게도 육오에게만은 겸손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육오는 군왕인데 임금이 남에게 겸손하기만 해서는 나라를 온전히 다스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上六(상육)은 鳴謙(명겸)이니 利用行師(이용행사)하여 征邑國(정읍국)이니라
상육은 울고 있는 겸이니 군사를 동원해서 읍국을 치는 것이 이로우니라.
象曰(상왈) 鳴謙(명겸)은 志未得也(지미득야)이니 可用行師(가용행사)하여 征邑國也(정읍국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울고 있는 겸’은 뜻을 얻지못함이니 가히 군사를 동원해서 읍국을 치는것이라.
상육은 울고 있는 겸이니 군사를 동원해서 읍국을 치는 것이 이로우니라.
象曰(상왈) 鳴謙(명겸)은 志未得也(지미득야)이니 可用行師(가용행사)하여 征邑國也(정읍국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울고 있는 겸’은 뜻을 얻지못함이니 가히 군사를 동원해서 읍국을 치는것이라.
상육은 겸괘의 가장 끝자리에 있으며 마치 중천건괘의 상구 ‘항룡유회亢龍有悔(너무 높이 올라간 용은 뉘우침이 있다)’처럼 오만해져 스스로는 겸손하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남들은 그렇게 알아주지 않으니 ‘울고 있는 겸’입니다. 그리고 군사를 동원해서 읍국을 친다는 것은 실제 무력을 써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욕심[邑國]으로 인해 겸손하지 못하고 거만을 떨고 있는 자신을 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음 자리에 음효가 있어 제자리에 있으므로 남들도 알아주는 겸덕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소상전에서 ‘뜻을 얻지 못함’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진정한 겸손이 아니므로 마음속에 꽉 찬 욕심들을 없애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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