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南京 대학살
[사진으로보는역사]
사실은 순간순간 놓치기 쉽다. 기억으로 붙잡아도 망각의 강으로 스러져간다. 사진은 사실을 붙잡아 두는 훌륭한 도구다. 포착된 사진들은 찰나를 역사로 만들어 준다. 사진 속에서 진실을 찾아보자!
“일본은 너무 강렬한 지기(地氣)가 모여 있어 그 민족성이 사납고 탐욕이 많으며 침략열이 강한지라 조선이 예로부터 그들의 침노(侵擄)를 받아 편한 날이 적었나니 그 지기를 뽑아 버려야 조선도 장차 편할 것이요 저희들도 또한 뒷날 안전을 누리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 지기를 뽑아 버리기 위해 전날 신방죽 공사를 본 것인데 신방죽과 어음(語音)이 같은 신호에서 화재가 일어난 것은 장래에 그 지기가 크게 뽑혀질 징조니라.” (도전 5편 295장)
中日戰爭(중일전쟁)의 擴散(확산)
중일전쟁 이후 일본의 군부가 브레이크 고장 난 기관차처럼 폭주하게 된 계기가 1936년에 일어난 2·26 사건이다. 일본 군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정계와 언론계를 협박했다. 이후 일본 사회는 극도로 위축된다. 군부는 일본을 병영국가로 몰고 갔고 마치 불나방처럼 전쟁에 뛰어들었다. 1937년 7월 노구교蘆溝橋 사건으로 중화민국과 일본 사이에 무력 충돌이 터지면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에 일본군은 북경, 천진 등 북부 주요 도시들을 손쉽게 점령했다. 진격에 진격을 거듭한 일본군은 수도 남경을 점령하면 중국 국민당 정부에서 항전을 단념할 것으로 오판했다. 하지만 일본군에 대해 전 국민적 분노가 일면서 동아시아 역사를 바꾸는 제2차 국공합작(1937. 9. 22.)이 일어난다. 일본군은 전혀 다른 중국 정세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일본군은 거세진 중국군의 저항을 받으면서 1937년 11월에야 항주만杭州灣에 대병력을 상륙시켜 겨우 상해를 점령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상해의 오송吳淞 전투에서 무모한 작전을 펼치다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은 중국군과 중국인들에 대한 적개심에 악이 받칠 대로 받쳐 있는 상태가 된다. 일본인은 상해를 점령하고, 통첩도 없이 곧바로 남경을 향해 진격을 한다. 일본군이 남경으로 진격하는 동안 중화민국 정부는 남경을 포기하고 한구漢口를 임시 수도로 삼아 중앙 기관을 이전했다. 이와 함께 중경中京 천도를 선언했다.
일본군은 공군의 폭격까지 수반한 대공세 끝에 12월 7일, 남경 외곽의 저지선을 돌파하고 12월 9일 남경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남경을 삼면에서 좁혀 들어오는 일본군의 포위 속에 중국 국민당 주요 관리와 부유층들은 재빨리 손을 써서 도시를 빠져나갔고, 중일전쟁 이전에 약 110만 명에 육박했던 남경은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시민들과 일본군을 피해 도시로 들어오는 피난민 등이 뒤엉켜 아수라장이었다.
12월 13일, 일본군은 남경을 점령하고 남경성 안으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피난 가지도 못한 채 남아있던 남경 시민들과 군인들은 공황 상태 속에서 6주간 일본군에 의해 처참한 학살을 당한다. 그 이전부터 주변 촌락에서 일본군의 살상 행위가 보고됐는데, 남경 점령 후 6주간에 걸쳐 무자비한 학살극이 벌어진 것이 남경학살이었다.
虐殺(학살)을 遊戲(유희)처럼 즐긴 일본군
일본군은 백기를 들며 항복한 중국군 포로뿐만 아니라 젊은 남자들을 색출하여 닥치는 대로 끌고 가 성 외곽 밖이나 양쯔강 하구에서 기관총 세례를 퍼부어,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만여 명이나 되는 단위로,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 남자들은 일본군의 총검술 훈련용으로 되거나 목 베기 시합 희생물이 되기도 했다. 여기에 적지 않은 중국인들은 총알을 아끼려는 일본군에 의해 산 채로 파묻혀서 생매장당하거나 칼로 난도질당했다.
난징의 한 광장에서는 천여 명의 사람들이 몇 개 단위의 열로 구분되어 세워졌는데, 이들 가운데는 여자들과 어린아이 등 수많은 민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이들에게 석유를 쏟자마자 곧바로 기관총을 난사했다. 총탄이 사람들의 몸을 꿰뚫을 때 석유에 불이 붙었고, 시체 더미는 산을 이루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남경대학살에 참가한 어느 일본군의 일기가 발견되었는데, 일기 내용에서는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면서 “산 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기도 했다.”고 적혀 있었다. 즉, 일본군들은 군인 포로들이나 민간인들 가릴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잔인하게 학살을 하였다. 이렇게 잔인한 ‘인간 사냥’이 극에 달하면서 일본군은 이른바 ‘선간후살先姦後殺(먼저 강간하고 다음에 죽임)’로 여성을 성 노리개로 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강간 후 참혹하게 살해했다. 그 대상은 10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어린이부터 60, 70대 노파까지 그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최소 30만 명의 民間人(민간인)이 살육되다
1938년 1월, 일본 외무대신 히로타 고키(廣田弘毅)가 주미 일본대사관에 보낸 비밀 전문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믿을 만한 목격자들의 직접 추산과 신뢰도 높은 일부 인사들이 보내온 편지에 따르면 일본군이 저지른 모든 행위와 폭력 수단은 아틸라왕과 흉노족을 연상시킨다. 최소 30만 명의 민간인이 살육됐고, 많은 수는 극도로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방식으로 살해됐다. 전투가 끝난 지 수주가 지난 지역에서도 약탈과 아동 강간 등 민간에 대한 잔혹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
학살 규모에 대해 중국 측은 30만 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일본의 동맹통신사東盟通信社에서 1938~39년 발간된 《시사연감時事年鑑》 등에는 “적방敵方(중국 측) 유기 사체 8만 4천, 포로 1만 5백”이라고 적시하고 있어 일본 측 주장을 따르더라도 엄청난 학살극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독일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보다 그 숫자는 작지만 학살의 잔인성과 악마성은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
참고자료
이덕일, 『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 전사』, 역사의아침, 2013
존 틀런드 지음, 박병화·이두영 옮김, 『일본 제국 패망사』, 글항아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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