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마음의 연구
[이 책만은 꼭]
이성호 / 본부도장
저자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서양철학(칸트)을 공부하고,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서 불교철학(유식)을 공부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음’이라고 여기는 것은 대상을 보고 듣고 아는 견문각지심見聞覺知心이다. 보고 듣고 알기 위해서는 일단 보이거나 들리거나 알려질 대상이 있어야 하며, 마음이 그 대상을 향해 나아가 붙잡아야 한다. 이렇게 대상을 붙잡는 마음을 ‘반연심攀緣心’이라고 한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이 마음을 우리 각자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심리학이나 의학에서 마음을 연구할 때도 바로 이 마음을 연구한다.
불교가 수행을 통해 얻고자 하는 마음은 자신의 대對가 있는 상대적 마음이 아니라, 무대無對의 마음, 대를 끊는 ‘절대絶對의 마음’이다. 이처럼 주와 객, 자와 타의 상대성을 넘어선 절대의 마음을 여래장사상에서는 여래장, 진여, 법신, 일심, 자성청정심, 본원청정심, 원묘명심圓妙明心 등으로 부른다.
우리의 본심인 절대의 마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인간 및 모든 생명체가 현상적 규정성과 제한성을 넘어선 자유의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 점에서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삶의 피로와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힘, 지혜와
자비의 힘, 영성의 힘은 바로 이 절대의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불교는 표층의식보다 더 깊은 심층에서 일체 중생, 모든 생명체는 결국 하나의 생명, 하나의 마음이라고 논한다. 즉 자타분별과 주객분별 없이 일체를 하나로 포용하는 부처님 마음을 증득하여 자신의 본래면목을 자각하는 것, 그리고 그 한마음으로 자타불이의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길을 가로막는 것이 바로 표층의 오온을 나로 알고 집착하는 아견我見과 아애我愛이다.
심층마음의 벽은 무명의 벽이다. 무명은 표층의 의식세계만을 알고 심층마음인 자신의 본래면목을 밝게 알지 못하는 어두움이다. 이 무명의 벽이 무너져 마음바탕이 환히 드러나야 각 중생의 심층마음에 축적된 무량한 종자에너지가 일체 제법을 만든다는 사실, ‘삼계유심三界唯心’을 실감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표층의 나는 나가 아니고 너도 너가 아니며, 우리가 근본에서 모두 하나라는 것, 일심一心이고 진여眞如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표층의 분별을 넘어서서 심층에서 일체를 나와 하나로 느끼는 감정이 바로 자비이다. 자비는 표층의 제6의식 내지 제7말나식에 머물지 않고 그러한 분별을 넘어선 심층으로 마음이 확장되었을 때 일어나는 감정이다.
자비의 감정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마음 한편은 심층에 머물러 일체 중생의 평등한 하나됨, 즉 너와 나가 근본에 있어 다를 바 없는 하나라는 것을 자각하되, 마음의 다른 한편은 표층에 머물러 너와 나의 현상적 차이, 즉 너가 나보다 덜 즐겁고 더 많이 고통받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심층 한마음을 자각하되 현상세계의 차별상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지혜이고 진정한 자비이다. 심층 한마음으로 나아가는 길에서도 지혜와 자비는 상호보완적이다. 지혜가 깊어져야 자비의 폭이 넓어지고, 자비의 폭이 넓어져야 지혜의 깊이가 깊어진다. 이 둘이 모두 심층 한마음으로 나아가는 방식이다. 인간의 마음이 본래 한마음으로서 보편심이라면 자비는 그 본래 마음의 자연스러운 발현이 된다.
불교는 우리가 알고자 하는 절대란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미 본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문제는 그렇게 항상 갖추어져 있는 본각 내지 본심을 마치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착각하는 데 있다. 누구나 절대의 마음으로 무한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다. 그런데 자신에게 본심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부처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바깥에서 마음을 구하고 부처를 구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종도사님께서는
고 말씀해 주셨다. 또한
고 하신 종도사님 말씀처럼, 천지의 이법을 알고 우리의 큰마음을 열 때 우리는 스스로 천지와 한마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눈(안근), 귀(이근), 코(비근), 혀(설근), 몸(신근)의 5근이 있고, 그 각각의 근에 상응하는 색(색경), 소리(성경), 향기(향경), 맛(미경), 감촉(촉경)의 5경이 있다. 감각은 5근이 각각의 대상이 되는 5경을 접하여 일어나는 식(識)이다. 불교는 이 5식을 그것을 일으키는 근의 이름을 따라 각각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이라고 부른다.
제6의식 : 의식과 사유세계
우리 마음의 활동 중에는 주어진 자료를 받아들이는 감각활동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감각자료에 대해 알아차리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활동도 있다. 감각을 넘어서는 이러한 인식능력을 우리는 ‘사유능력’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지각이나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근을 불교에서는 의意라고 부른다. 의는 제6근으로 지각, 사유, 판단 등의 인식작용을 일으키는 근이다.
제6의식은 사유하는 분별적 의식이다. 감각과 지각, 전5식과 제6의식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객관적 세계라고 인식하는 것은 결국 세계 자체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체계에 의해 가미되고 변형된 산물인 것이다.
의식이 의식된 것만 알고 의식 자체를 알지 못하는 것, 이것이 의식의 근본한계이다. 의식은 결국 자기 활동의 근거를 모르는 허망분별식이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이라고 여기는 것이 바로 이 의식이다.
제7말나식 : 자아식
제6의식은 의근에 의거해서 일체 6경(5경과 법경)을 객관대상으로 아는 대상의식이다. 의근은 제6의식이 의거하는 인식능력으로서의 근根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의식과 구분되는 별도의 식識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의근이 일으킨 자아식을 불교는 의意의 산스크리트어 마나스manas를 그대로 음역하여 ‘말나식末那識’이라고 부른다. 의가 일으킨 자아식, ‘나는 나다’의 자아식이 곧 제7말나식이다. 이 말나식은 제6의식의 사려분별보다 더 깊은 곳에서 작동하는 식이기에 ‘의지意志’라고도 불리고, 무의식적 ‘본능本能’이라고도 불린다.
말나식의 한계는 나라고 집착할 만한 개별적 인식주체인 자아가 없다는 ‘무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말나식은 무명과 아집의 식이다. 우리가 무명으로 인해 무아를 깨닫지 못할 경우 자신을 의식 주체로 착각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 착각을 일으켜 스스로 자아라고 집착하는 식이 바로 제7말나식이다.
제8아뢰야식 : 심식(心識)
오온五蘊(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범주의 요소)이 짓는 일체의 업이 남긴 여력, 업 에너지, 종자는 표층 제6의식이나 말나식보다 더 깊은 심층마음 안에 모두 간직된다. 이 심층마음을 일체 종자를 합장하는 식이라는 의미에서 ‘장식藏識’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제8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아뢰야는 ‘함장하다’는 장臟의 범어 ‘알라야ālaya’의 음역이다.
전체 우주의 정보가 종자로서 아뢰야식에 남겨지고, 그 종자의 에너지와 정보를 따라 다시 우주 전체가 만들어진다. 심층 아뢰야식은 그렇게 허공 속에 현상세계를 만들어내는 마음이다. 아뢰야식은 일체 우주생성의 에너지를 간직한 식이기에 ‘우주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은 현대의 의식론과 현대 의식론에 익숙한 우리가 깨어있음과 대상의식을 동일 차원의 것으로 이해하고 심층마음의 깨어있음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표층의식을 넘어 심층(아뢰야식)을 바탕으로, 심층마음에 대한 동서철학을 비교하고, 심층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제시하며, 심층마음을 강조하는 한국 현대불교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심층을 알면, 우리는 원래 본각(本覺, 중생이 누구나 부처라는 것, 중생이 이미 부처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각각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의 존재, 대등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전체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표층의식(전오식, 의식), 심층(말나식, 아뢰야식)의 개념과 심층의 깊은 뜻에 대해 알아보고, 장애를 넘어 심층으로 나아가는 길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이하 본문 요약정리)
심층을 알면, 우리는 원래 본각(本覺, 중생이 누구나 부처라는 것, 중생이 이미 부처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각각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의 존재, 대등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전체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표층의식(전오식, 의식), 심층(말나식, 아뢰야식)의 개념과 심층의 깊은 뜻에 대해 알아보고, 장애를 넘어 심층으로 나아가는 길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이하 본문 요약정리)
저자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서양철학(칸트)을 공부하고,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서 불교철학(유식)을 공부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음’이라고 여기는 것은 대상을 보고 듣고 아는 견문각지심見聞覺知心이다. 보고 듣고 알기 위해서는 일단 보이거나 들리거나 알려질 대상이 있어야 하며, 마음이 그 대상을 향해 나아가 붙잡아야 한다. 이렇게 대상을 붙잡는 마음을 ‘반연심攀緣心’이라고 한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이 마음을 우리 각자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심리학이나 의학에서 마음을 연구할 때도 바로 이 마음을 연구한다.
불교가 수행을 통해 얻고자 하는 마음은 자신의 대對가 있는 상대적 마음이 아니라, 무대無對의 마음, 대를 끊는 ‘절대絶對의 마음’이다. 이처럼 주와 객, 자와 타의 상대성을 넘어선 절대의 마음을 여래장사상에서는 여래장, 진여, 법신, 일심, 자성청정심, 본원청정심, 원묘명심圓妙明心 등으로 부른다.
심층마음
절대를 잊고 사는 현대인
불교는 우리의 마음을 절대의 마음으로 여기고 상대적 현상세계를 환幻이라고 여기므로, 그 절대의 진여심을 증득하여 윤회를 벗고 해탈하고자 수행을 강조한다.우리의 본심인 절대의 마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인간 및 모든 생명체가 현상적 규정성과 제한성을 넘어선 자유의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 점에서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삶의 피로와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힘, 지혜와
자비의 힘, 영성의 힘은 바로 이 절대의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심층마음 : 무아를 아는 마음
우리의 일체 분별의식의 바탕에는 무한의 심층마음이 작용하고 있다. 우리가 심층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대상으로만 향해 있고 차이와 분별에만 민감할 뿐, 분별의 기반이 되는 무분별과 동일성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기 때문이다. 나를 공으로 자각하는 것은 빈 바탕이 되고 빈 마음이 되는 것이다. 현상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빈 바탕 내지 빈 마음이 될 때 비로소 나는 나 자신이 현상세계 너머의 마음이며, 현상세계는 그 마음 안에 그려진 가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분별 너머 바탕으로, 빈 마음으로 돌아가면 일체가 하나이다. 자신의 공성 그리고 세계의 공성을 자각하는 마음은 분리된 개별자의 마음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마음, 하나의 마음, 일심이다.표층과 심층 사이
불교는 표층의식보다 더 깊은 심층에서 일체 중생, 모든 생명체는 결국 하나의 생명, 하나의 마음이라고 논한다. 즉 자타분별과 주객분별 없이 일체를 하나로 포용하는 부처님 마음을 증득하여 자신의 본래면목을 자각하는 것, 그리고 그 한마음으로 자타불이의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길을 가로막는 것이 바로 표층의 오온을 나로 알고 집착하는 아견我見과 아애我愛이다.
심층마음의 벽은 무명의 벽이다. 무명은 표층의 의식세계만을 알고 심층마음인 자신의 본래면목을 밝게 알지 못하는 어두움이다. 이 무명의 벽이 무너져 마음바탕이 환히 드러나야 각 중생의 심층마음에 축적된 무량한 종자에너지가 일체 제법을 만든다는 사실, ‘삼계유심三界唯心’을 실감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표층의 나는 나가 아니고 너도 너가 아니며, 우리가 근본에서 모두 하나라는 것, 일심一心이고 진여眞如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심층마음을 실현하는 길
표층의 분별을 넘어서서 심층에서 일체를 나와 하나로 느끼는 감정이 바로 자비이다. 자비는 표층의 제6의식 내지 제7말나식에 머물지 않고 그러한 분별을 넘어선 심층으로 마음이 확장되었을 때 일어나는 감정이다.
자비의 감정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마음 한편은 심층에 머물러 일체 중생의 평등한 하나됨, 즉 너와 나가 근본에 있어 다를 바 없는 하나라는 것을 자각하되, 마음의 다른 한편은 표층에 머물러 너와 나의 현상적 차이, 즉 너가 나보다 덜 즐겁고 더 많이 고통받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맺음말
심층 한마음을 자각하되 현상세계의 차별상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지혜이고 진정한 자비이다. 심층 한마음으로 나아가는 길에서도 지혜와 자비는 상호보완적이다. 지혜가 깊어져야 자비의 폭이 넓어지고, 자비의 폭이 넓어져야 지혜의 깊이가 깊어진다. 이 둘이 모두 심층 한마음으로 나아가는 방식이다. 인간의 마음이 본래 한마음으로서 보편심이라면 자비는 그 본래 마음의 자연스러운 발현이 된다.
불교는 우리가 알고자 하는 절대란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미 본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문제는 그렇게 항상 갖추어져 있는 본각 내지 본심을 마치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착각하는 데 있다. 누구나 절대의 마음으로 무한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다. 그런데 자신에게 본심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부처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바깥에서 마음을 구하고 부처를 구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종도사님께서는
“증산도의 진리에서 관음은 심통心通을 주장하는 불교 마음공부의 핵심이자 결론이다. 관음은 불교에서 깨달은 진리의 열매로서 ‘세상의 모든 소리를 본다’는 뜻이다. 우주 참마음의 실상을 보는 것으로서, 사람들의 참마음을 보고, 동시에 세상의 슬픈 소식, 기쁜 소식을 다 듣고 자비를 베푸는 것을 말한다”
고 말씀해 주셨다. 또한
“진정한 마음 법 공부라는 것은 바로 천지의 이법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 마음법이 열린다”
고 하신 종도사님 말씀처럼, 천지의 이법을 알고 우리의 큰마음을 열 때 우리는 스스로 천지와 한마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표층에서 심층으로
전5식 : 감각과 감각세계우리에게는 눈(안근), 귀(이근), 코(비근), 혀(설근), 몸(신근)의 5근이 있고, 그 각각의 근에 상응하는 색(색경), 소리(성경), 향기(향경), 맛(미경), 감촉(촉경)의 5경이 있다. 감각은 5근이 각각의 대상이 되는 5경을 접하여 일어나는 식(識)이다. 불교는 이 5식을 그것을 일으키는 근의 이름을 따라 각각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이라고 부른다.
제6의식 : 의식과 사유세계
우리 마음의 활동 중에는 주어진 자료를 받아들이는 감각활동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감각자료에 대해 알아차리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활동도 있다. 감각을 넘어서는 이러한 인식능력을 우리는 ‘사유능력’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지각이나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근을 불교에서는 의意라고 부른다. 의는 제6근으로 지각, 사유, 판단 등의 인식작용을 일으키는 근이다.
제6의식은 사유하는 분별적 의식이다. 감각과 지각, 전5식과 제6의식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객관적 세계라고 인식하는 것은 결국 세계 자체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체계에 의해 가미되고 변형된 산물인 것이다.
의식이 의식된 것만 알고 의식 자체를 알지 못하는 것, 이것이 의식의 근본한계이다. 의식은 결국 자기 활동의 근거를 모르는 허망분별식이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이라고 여기는 것이 바로 이 의식이다.
제7말나식 : 자아식
제6의식은 의근에 의거해서 일체 6경(5경과 법경)을 객관대상으로 아는 대상의식이다. 의근은 제6의식이 의거하는 인식능력으로서의 근根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의식과 구분되는 별도의 식識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의근이 일으킨 자아식을 불교는 의意의 산스크리트어 마나스manas를 그대로 음역하여 ‘말나식末那識’이라고 부른다. 의가 일으킨 자아식, ‘나는 나다’의 자아식이 곧 제7말나식이다. 이 말나식은 제6의식의 사려분별보다 더 깊은 곳에서 작동하는 식이기에 ‘의지意志’라고도 불리고, 무의식적 ‘본능本能’이라고도 불린다.
말나식의 한계는 나라고 집착할 만한 개별적 인식주체인 자아가 없다는 ‘무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말나식은 무명과 아집의 식이다. 우리가 무명으로 인해 무아를 깨닫지 못할 경우 자신을 의식 주체로 착각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 착각을 일으켜 스스로 자아라고 집착하는 식이 바로 제7말나식이다.
제8아뢰야식 : 심식(心識)
오온五蘊(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범주의 요소)이 짓는 일체의 업이 남긴 여력, 업 에너지, 종자는 표층 제6의식이나 말나식보다 더 깊은 심층마음 안에 모두 간직된다. 이 심층마음을 일체 종자를 합장하는 식이라는 의미에서 ‘장식藏識’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제8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아뢰야는 ‘함장하다’는 장臟의 범어 ‘알라야ālaya’의 음역이다.
전체 우주의 정보가 종자로서 아뢰야식에 남겨지고, 그 종자의 에너지와 정보를 따라 다시 우주 전체가 만들어진다. 심층 아뢰야식은 그렇게 허공 속에 현상세계를 만들어내는 마음이다. 아뢰야식은 일체 우주생성의 에너지를 간직한 식이기에 ‘우주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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