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 의사義士 안중근安重根의 하얼빈 의거義擧

[사진으로보는역사]
사실은 순간순간 놓치기 쉽다. 기억으로 붙잡아도 망각의 강으로 스러져 간다. 사진은 사실을 붙잡아 두는 훌륭한 도구다. 포착된 사진들은 찰나를 역사로 만들어 준다. 사진 속에서 진실을 찾아보자!


천지의 일등일꾼 출세 공사

무신년 겨울 상제님께서 대흥리에 계실 때 하루는 청수를 모시고 마루에 쪼그려 앉으시어 내성에게 명하시기를 “내 몸을 결박하라.” 하시니 내성이 겁에 질려 아뢰기를 “차라리 죽을지언정 어찌 감히 당신님의 몸을 묶을 수 있겠습니까?” 하매 말씀하시기를 “내가 명하거늘 어찌 망설이느냐! 단단히 결박하라.” 하시니라.

내성이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명을 받들어 옥체를 꼭 묶으니 상제님께서 다시 명하시기를 “내성아, 큰 몽둥이로 내 몸을 세게 치며 ‘일등방문(一等方文)이 제일이냐, 이등방문이 제일이냐? 일등방문이다!’ 하고 소리쳐라…

내성이 엄명에 눌려 “일등방문이 제일이냐, 이등방문이 제일이냐? 일등방문이 제일이다!” 하고 크게 소리치며 있는 힘껏 옥체를 세 번 내리치니 상제님께서 떼굴떼굴 구르시며 “아이고, 이놈이 나를 죽이네! 이룰 성(成) 자로 이름을 고쳐 줬더니 나를 죽이네!” 하고 비명을 지르시니라.

잠시 후에 상제님께서 껄껄 웃으시며 “이제 되었다. 이등방문이 넘어가니 일등방문인 네가 낫다.” 하시니라.


}}이등박문을 폐하심}}

다시 내성에게 명하시기를 “담뱃대를 들고 나를 향해 총 쏘는 흉내를 내며 꼭 죽인다는 마음으로 ‘탕탕’ 소리를 내라.” 하시니 내성이 명에 따라 총 쏘는 흉내를 내거늘 이에 한 성도가 여쭈기를 “이제 이등박문을 폐하시는데 어찌 내성을 쓰셨습니까?” 하니 말씀하시기를 “안성(安姓)을 썼노라.” 하시니라.
【도전 5편 341장 1~14절】


천지 일등일꾼 내는 공사


상제님과 초대 조선통감 이등박문伊藤博文과의 만남은 1909년 봄, 이등박문이 통감을 사임(1909년 6월)하기 전에 이루어졌다. 당시 조선 팔도에 상제님의 성예聲譽가 널리 퍼진 결과, 많은 지식인들이 상제님을 한 번이라도 친견하고 싶어 했다.

이등박문 역시 여러 차례 만남을 청했는데, 서울 통감부를 찾아가신 상제님의 용안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잠시 후 이등박문이 깨어나자 상제님의 성령을 받은 김형렬 성도가 그의 불의를 꾸짖는다. (도전 5편 365장)

이 만남이 있기 전 무신년(1908) 겨울에 상제님께서는 ‘천지의 일등일꾼 출세 공사’를 보신다. 이 공사에서 상제님은 안내성安乃成 성도로 하여금 당신님의 성체를 단단히 결박하게 하시고 큰 몽둥이로 세게 치게 하셨다. 당신님이 이등방문二等方文이 되시고 안내성 성도가 일등방문一等方文이 되어 상제님을 폐하게 하신 것이다.

충격적이고 놀라운 방식으로 행해진 이 공사는 상제님의 천지대권을 안씨 일꾼에게 전수하는 종통 전수 공사였다. 동시에 상제님의 후대 일꾼들에게 ‘천주 아버지를 이기는 신앙을 하라’는 심법을 전수해 주신 공사이다.

이 공사의 말미에 상제님께서는 안내성 성도로 하여금 총 쏘는 흉내를 내며 꼭 죽인다는 마음으로 총소리를 내게 하신다. 이 공사로 인하여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 의사의 저격을 받아 쓰러진다.

하얼빈에 울려 퍼진 역사의 총성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환영하기 위한 출영객들이 역사驛舍 안팎으로 들어차 혼잡했다. 신변 경호를 위해 러시아 군인들이 호위 삼아 경계를 서고 있었다.

오전 9시 일본 제국의 전 총리이자 제1대 조선통감이었던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가 탄 특별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왔다. 마중 나온 러시아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Vladimir Kokovtsov 일행이 열차 안으로 들어간 후, 두 사람은 약 20분 정도 대화를 나누었다.

이어 코콥초프의 권유에 따라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기 위해 이토가 열차에서 내렸다. 그가 수행원의 안내를 받으며 의장대를 사열하고, 외국영사단 앞으로 가 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안 의사는 러시아 군대 뒤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토가 안 의사와 10보 떨어진 지점에 접어들 찰나, 도열해 있는 군인들 사이로 이토를 겨냥한 안 의사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3발이 이토의 가슴과 흉복부에 명중하였다. 안 의사는 혹시 이토 히로부미가 아닐 것을 대비해 다시 3발로 주위의 수행 비서관 모리(森),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川上), 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田中)를 쏘았다.

저격 직후 러시아 헌병들이 덮치자, 힘에 밀려 넘어졌던 안 의사는 곧장 일어나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Корреа Ура!”(대한 만세)를 삼창하고 순순히 체포됐다. 이때가 오전 9시 30분경이었다.

차내로 옮겨진 이토는 피격 30분 뒤인 오전 10시경 사망했다. 이토 피살에 대한 일본영사관의 전보는 실로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으며,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것은 개인 이토에 대한 단순한 테러가 아니다. 이것은 역사관 전쟁이다. 이토는 이웃 나라 조선을 병합하고 만주를 손안에 넣는 것을 일본 번영의 발판이라고 믿었다. 그는 탐욕스럽고 침략적인 일본의 역사관을 상징한다.

반면에 안중근은 각국이 독립한 상태에서 서로 상생하는 평화의 세상을 지향했다. 안 의사는 의거 후 일관되게 동양 평화를 해치는 원흉으로 이토를 지목했다. 동양 평화라는 대의를 위해 이토를 저격한 것이다.

옥중에서 드러난 안 의사의 진면모


안 의사가 대한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이토를 처단한 동기는 그가 밝힌 이토의 죄악 15개조에 뚜렷이 나타난다. 안 의사는 하얼빈 일본영사관에 구금되어 일본 검찰의 심문을 받던 초기부터 일관되게 이토의 죄상을 설파했다.

이등박문의 죄악 15개조
하나, 한국의 민비 명성 황후를 시해한 죄요
둘, 한국의 고종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셋, 을사보호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요
넷, 독립을 요구하는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다섯, 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정치 체제로 바꾼 죄요
여섯, 철도, 광산, 산림과 농지를 강제로 빼앗은 죄요
일곱, 일본이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여 한국의 경제를 교란한 죄요
여덣, 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죄요
아홉, 민족 교육을 방해한 죄요
열,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키고 식민지화한 죄요
열하나, 한국사를 말살하여 교과서를 압수하고 불태워 버린 죄요
열둘,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열셋,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열넷, 대륙 침략으로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요
열다섯,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다.

이 내용을 보면 안 의사가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사물事物의 본질을 꿰뚫는 깊은 혜안을 가진 인물임을 알게 된다.

안 의사는 거사 전, 천주교 성당에 들러 7발의 총알에 십자가 표시를 새기며 이토의 죄악상을 마음에 되새겼다. 자신이 신앙하는 천주님을 대신하여, 천주님의 마음으로 죄인 이토를 심판하겠다는 결의를 다진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안 의사의 정신과 상제님 천지공사의 정신이 정확하게 주파수가 맞추어졌다.

안 의사는 거사 전, 거사 당시, 그리고 거사 후에도 천주교 신자였다. 죽는 순간까지도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안 의사가 천주교를 만난 것은 16세 때 중앙 관리의 모함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가족들이 천주교 교회당에 피신했을 때였다. 17세 때는 프랑스 선교사인 니콜라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lhelm(한국명 홍석구洪錫九)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아 ‘도마Thomas’라는 세례명을 얻는다. 이후 10년간은 홍 신부와 황해도 일대를 순례하면서 복음 전파에 힘썼다.

또 안 의사에게는 조선 선비의 기품이 짙게 풍긴다. 안 의사 역시 유소시에 여느 양반집 자제처럼 서당에서 9년간 한학을 수학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유묵遺墨들에는 국가에 대한 충忠과 대의大義를 강조하는 내용이 유난히 많다.

안 의사의 글은 지금의 우리들에게 여전히 큰 울림을 주고 있다. 투박한 듯 단정하고, 날카로운 듯 세련된 그의 글씨는 그의 인생과 정확히 합일合一하기에 더욱 감동적이다.

대정치인으로서의 안 의사의 면모는, 그가 옥중에서 저술한 미완의 「동양평화론」에서 잘 드러난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미완의 동양평화론
‘일본이 빼앗은 여순항을 중국에 돌려주고 이곳을 영세중립지대로 만든다. 그곳에 아시아 각국에서 정부를 대표하는 사람을 보내어 아시아 평화를 위한 상설위원회를 만든다. 각국은 여기에 일정한 재정을 제공하여 개발은행을 설치한다. 이 위원회가 동쪽 끝에 있는 점을 감안하여 로마 교황청도 이곳에 대표를 파견케 한다. 한·중·일 3국의 청년들을 모집하여 연합군대를 만들고 이 군대에서는 2개 국어를 가르치게 한다.’

오늘날 유럽에 EU(유럽 연합)가 생기고 태평양 연안 국가들은 APEC(아시아 태평양 경제 협력체)을 결성해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안 의사는 이미 100여 년 전에 이런 구상을 했던 것이다.

중화민국 초대 총통 쑨원孫文은 안중근 의사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높이 평가했다.

“공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나니
백세百世의 삶은 아니나 죽어서 천추千秋에 드리우리.
약한 나라 죄인이요 강한 나라 재상이라.”


또한 시인 조지훈은 이런 찬시讚詩를 바쳤다.

“당신이 아니더면 누가 민족의 의기를 천하에 드러냈을까.
당신이 아니더면 하늘의 뜻을 누가 대신하여 갚아 줬을까.”


내 유해를 고국으로!


망국의 한으로 온 나라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안 의사의 의거는 나라 안팎 사람들에게 크나큰 경각심을 주었고, 항일 의식의 국민적 확산은 물론이려니와 뜻있는 분들의 독립운동을 가열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나라를 잃고서도 어쩔 줄 모르던 국민들 가슴속에 자주독립을 외칠 수 있는 의지와 용기를 불어넣어 민족정기를 소생시켰다.

안 의사는 사형 집행 전 국내외 동포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삼 년 동안 해외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에 도달치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遺恨이 없겠노라.”


2천만 동포에게 남긴 이 유언은 안 의사 순국 전날인 1910년 3월 25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됐다. 그리고 사형 집행 직전, 두 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최후의 유언을 받아쓰게 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 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러나 안 의사의 유해는 두 동생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인도되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안 의사의 유해가 밖으로 나갔을 때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나라가 해방된 지 74년째, 안 의사의 유해는 아직도 여순 감옥 죄수 묘지에 묻혀 있어 그 정확한 위치도 모른 채 여전히 고국으로 송환되지 못하고 있다. 빼앗긴 조국을 위해 목숨 바쳐 이 나라의 역사와 민족혼을 세계만방에 당당히 보여 준 안 의사의 정의의 총, 진실의 총을 기억하자.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하얼빈은 단군왕검이 나라를 연 곳이며, 옛 조선의 수도였다. 안 의사의 의거는 우리의 뿌리역사 복원, 민족정기의 부활을 상징하는 거사였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중국과 일본 등에 의한 악의적인 한국사 왜곡과 더불어 그 허상에서 탈피하지 못한 채 정신문화가 질곡에 빠져 있는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 지금은 일제가 씨를 뿌려 놓은 식민사학의 밑동을 뿌리째 드러내고 진정한 광복을 향한, 진정한 통일을 위한 제2의 독립운동이 필요한 때이다. 역사를 잃어버리면 미래에 희망이 없다. 제2, 제3의 안중근이 나와야 하고 우리 모두 안중근 의사가 되어야 한다.

안중근安重根의 일생
1879년 9월2일 순흥 안씨 안태훈安泰勳 공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황해도 해주부에서 탄생하다.
1894년 16세 동학을 빙자하여 양민을 괴롭히는 무장 폭도들을 진압, 김아려金亞麗 양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다.
1895년 17세 천주교에 입교하여 홍석구(빌렘Willhelm)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도마Thomas라는 세례명 받음. 이후 홍 신부와 함께 황해도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하다.
1906년 3월 28세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로 이사한 후 가산을 정리하여 삼흥三興학교와 돈의敦義학교를 설립하고 구국 영재를 양성하다.
1907년 가을(29세) 진남포를 떠나 북간도 각 지방을 시찰한 후 노령露領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함, 이범윤, 김두성, 엄인섭, 김기룡 등과 의군을 양성, 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이 되다.
1909년 2월(31세) 노령 ‘카리’에서 11명의 동지와 단지斷指혈맹, 이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大韓獨立’ 4자를 쓰고 조국과 민족을 구하기로 천지에 맹세하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동양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의 원흉, 일본의 이등박문을 사살하다.
1910년 3월 26일 의거 후 152일이 되는 이날 상오 10시에 사형이 집행되다. 어머니(조마리아 여사)께서 보내온 한복을 갈아입고 여순 감옥 형장에 임하여 “나는 동양 평화를 위하여 한 일이니 한일 양국은 동양 평화를 위하여 서로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는 간곡한 부탁을 남기고 순국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