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서 본 우리 역사 | 한국이 발명한 인류 최고의 난방 온돌
[역사X파일]
박찬화 / 종감, 본부도장
온돌은 한국 고유의 독특한 난방 방식이고 온돌 문화는 우리 겨레가 가진 삶의 예지와 숨결이 자리 잡고 있는 우리의 소중한 보물이자 훌륭한 자산입니다. 어릴 적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던 시골 마을을 회상해 보면 솥을 걸고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 불로 방은 뜨끈뜨끈했고 그 안에서의 잠은 정말 편안했던 꿀잠이었습니다. 지금도 어느 시골 마을에서는 전통 온돌방에 불을 피워 놓고 등을 지지러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아궁이 불이 굴뚝을 통해서 연기로 나오는 모습은 멀리서 보면 정말 아름답고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풍광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어렸을 적에는 그냥 그게 좋은 줄만 알았지 그걸 ‘온돌’이라고 하는 것은 나중에 배우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한류 열풍은 케이팝K-Pop뿐만 아니라 드라마에도 미치고 있습니다. ‘대장금’이나 ‘주몽’ 열풍이 불었을 때 외국인 팬들의 온라인 토론장에서는 우리들의 난방 방식에 대해서 토론이 붙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침대에서 자고 벽난로에 불을 피우는데 한국 사람들은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와서 이불을 덮고 자는 모습을 한국 드라마에서 자주 본 겁니다. 온돌은 주택의 실내 온도를 섭씨 13∼16도로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난방 장치이기 때문에 우리는 온돌방에 신체를 최대한 접촉하기 위해서 신발을 벗는 좌식 생활을 주로 했습니다. 그런 거주 문화가 외국인들의 눈에는 신기하게 비쳤던 겁니다.
이는 또한 중국인과 일본인에게도 다르게 비춰졌을 겁니다. 일본의 이로리(いろり) 등은 직접 열을 이용하는 방식인 데 비해 온돌은 구들장과 고래(구들장 밑으로 나 있는 길)를 데워 발생하는 간접 복사열을 난방에 사용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중국 대부분도 마찬가지로 온돌을 하지 않습니다. 중국 동북부와 몽골 일부 지역에서도 온돌과 비슷한 원리로 난방을 했지만 잠자는 부분에만 구들을 설치한 중국 동북부의 ‘쪽구들’ 방식과 게르 바닥에 구들을 놓은 몽골 방식은 방바닥 전체를 데우는 ‘통구들’인 우리 온돌과는 분명 다릅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온돌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온돌은 그야말로 ‘따뜻한 돌’입니다. 구들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요, 구들은 ‘구운 돌’의 약자입니다. 요즘에는 추울 때 핫팩hot pack을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하지만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겨울에 시골에서 학교를 다닐 때 논두렁 밑에서 돌을 구워 주머니에 넣고 다니곤 했습니다. 추운 겨울에 달궈진 돌은 난방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아마도 거주하는 공간의 아래쪽을 달궈야겠다는 생각도 이런 돌을 달구는 것과 같은 작은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온돌 시스템은 아궁이, 방고래, 개자리, 구들, 굴뚝 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한옥의 아궁이에 불을 때면 열기가 아궁이 → 아궁이 후렁이 → 부넘기 → 구들개자리 → 방고래 → 고래개자리를 거쳐 굴뚝으로 빠져나갑니다.
①고래
온돌의 핵심은 ‘고래’에 있습니다. 고래는 방구들을 구성하는 돌 사이의 빈 공간으로 뜨거운 연기가 지나가는 길입니다. 구들은 이 고래 위에 놓이게 됩니다. 방바닥을 데우는 것은 구들을 어떻게 놓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아궁이 쪽이 깊고, 굴뚝 쪽이 얕아 옆에서 보면 꼭 고래등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불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뜨거운 공기가 고래 속을 빙빙 돌아 구들장을 달구는 구조입니다.
아랫목은 뜨거운 연기가 지나는 고래와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윗목에 비해 따뜻합니다. 또한 아랫목에는 두꺼운 돌을 놓습니다 그리고 열의 전달이 미약한 윗목은 좀 더 빨리 달구기 위해서 얇은 돌을 놓습니다.
②부넹기(부넘기)
불과 뜨거운 연기는 아궁이에서 ‘부넹기(부넘기)’라는 구멍을 통해 고래 쪽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부넹기는 ‘불이 넘어가는 고개’, ‘불을 넘기는 고개’란 뜻으로 ‘불목’이라고도 불리는데, 방고래가 시작되는 어귀에 조금 높게 쌓아 불길이 아궁이로부터 골고루 방고래로 넘어가게 만든 작은 언덕입니다. 구멍이 작아 열기가 바깥으로 새지 않고 고래로 잘 빨려 들어가게 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③구들 개자리, 고래 개자리
고래를 통과한 열기는 ‘구들 개자리’로 이동합니다. 구들 개자리는 부넘기 너머에 파놓은 골로서 이곳에서 고래로 열기가 균등하게 전해지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열이 고래 전체로 골고루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래 개자리’는 굴뚝과 구들 사이에 있는 벽 바로 안쪽에 깊게 파인 고랑입니다. 개자리는 그 중에서 굴뚝에 이르기 직전에 깊이 판 통로를 말하는데 이것은 열과 연기가 좀 더 오래 머물도록 하며, 재티 등을 걸러 내는 기능을 합니다.
이렇게 구들과 고래가 제대로 놓아져야만 따뜻한 온돌방이 됩니다. 우리 선조들은 열이 이동하는 방향과 가열된 열기의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게 굴뚝을 고안하는 등 과학적인 방식으로 한옥을 지켜 왔습니다. 구들을 놓을 때 아궁이, 고래 구멍 및 굴뚝의 배치는 지역의 바람 방향, 기후 조건에 따라 절묘하게 맞출 수 있는 과학적 슬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것을 잘못 맞추면 굴뚝으로 빠져나가야 할 열과 연기가 거꾸로 아궁이로 되돌아 나오기 때문입니다.
서양에서 발달한 라디에이터radiator(방열기)를 이용한 공기 난방법은 더워진 공기가 위로 올라가는 대류 현상 때문에 바닥을 따뜻하게 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온돌은 바닥을 먼저 데웁니다. 그러므로 머리는 차게 하고 발은 따뜻하게(두한족열頭寒足熱) 하여 인체 면역력을 높여 줍니다. 두한족열이라는 말은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는 말로 달리 쓸 수 있습니다. 수승화강이란 차가운 기운을 올라가게 하고 뜨거운 기운은 내려가게 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한의학의 원리이자 수행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동양은 수승화강水昇火降의 도道적 온돌 문화이지만, 서양은 침대식 화승수강火昇水降 주거 문화입니다.
구들은 불을 지피지 않을 때도 방바닥에 축적된 열이 방 안을 데우는 방식(고체축열식)이어서 에너지 효율적입니다. 또한 실내 온도를 공기 난방에 비해 낮게 유지해도 바닥이 따뜻하기 때문에 외부와 내부의 온도 차를 줄일 수 있습니다. 구들의 재료는 열손실 계수가 낮아 대부분의 가정에서 쓰고 있는 온수 파이프 난방 시스템보다도 훨씬 적은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게다가 물리·화학적으로 안전한 자연 광물질 재질은 거의 영구적입니다.
대체로 서양식 난방은 히터의 난방 열기가 위로 그냥 날아가면서 실내는 여전히 춥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온돌을 제대로 경험해 본 외국인들은 방의 밑에서부터 골고루 열이 위로 올라와서 몸을 덥혀 주는 온돌을 그리워합니다.
서양인들이 온돌을 경험한 기록이 몇 가지 남아 있습니다. 1690년에 발간한 『북과 동 타르타리아지』에서 네델란드의 위트센은 ‘방을 만들 때는 마루 밑으로 15센티미터 정도의 구멍을 뚫고, 그곳으로 문밖에 설치한 아궁이에서 연기를 피워 넣어서 방 안을 따뜻하게 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라고 온돌에 대해서 기록하였습니다.
미국의 과학자 퍼시벌 로웰의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1885)에는 “온돌은 겨울철 방 안을 따뜻하게 하는 일종의 화로 역할을 한다. 방 밖엔 난로용 구멍이 있는데 이것을 ‘아궁이’라 부른다. 불을 때면 더운 연기가 벌집처럼 돼 있는 미로를 따라 방바닥에 넓게 퍼진다. 아이디어가 뛰어나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기록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서양에서도 온돌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국립과학기술연구소(CNRS)는 에너지 절약의 일환으로 온돌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온돌을 사용할 경우 입식 생활에 사용되는 강제 환기식 난방 방법보다 약 20% 이상의 에너지가 절약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에서는 자기들 중심으로 이미 바닥 난방 설비의 독자적인 ISO(국제표준화기구) 기준을 만들고 있습니다. 서양에서 지금 한창 연구하는 바닥 난방의 근원이 우리의 온돌임을 정확히 알리고 더 늦기 전에 온돌의 현대화와 산업화를 서둘러야 할 때입니다.
한국인이 온돌을 사용한 것은 매우 오래전부터였습니다. 온돌의 시기는 지금부터 5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회령 오동의 구석기 시대 주거지 유적에서 구들로 추정되는 형태의 바닥과 벽이 발굴됨으로써 그 시기가 구석기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흥륭와興隆窪문화는 BCE 6200년 ~ BCE 5200년 사이의 유물과 유적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홍산紅山문화(요하문명)에 속하는 흥륭와문화는 동아시아 최초로 밭농사와 온돌 문화가 발생한 우리 문화의 기원지입니다. 이 흥륭와에 원시 온돌이 있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영변군 세죽리, 시중군 로남리, 요령성 무순시撫順市 연화보 유적 등에서 고조선 시기의 온돌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같은 온돌 유적은 중국 동북부의 무순시에서도 발견됐습니다. 온돌이 발견되는 지역은 중북 북부이거나 만주 지역인데 이들 지역은 홍산은 물론 고조선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고조선에서 뻗어 나간 흉노족도 온돌을 놓고 살았습니다. 실제 흉노족이 살던 시베리아의 현지 민속박물관을 보면 온돌을 전시해 놓고 있습니다.
북한 자강도 증강군 토성리 유적에서 고구려 초기의 4개의 온돌이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4세기경 황해도 안악 3호분의 고분 벽화에 온돌이 등장하고 안악 고분 3호와 약수리 무덤 벽화에는 한 여인이 부뚜막에 시루를 올려놓고 음식을 만들고 있고 또 다른 여인은 부뚜막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의 「동이전」에는 ‘그 풍속에 의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서 긴 갱坑을 만들어 따뜻하게 난방한다(冬月皆作長坑下然溫火亂取暖)’라는 기록이 있어 고구려인들이 오래전부터 온돌 시설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옥저에도 온돌이 발달했습니다. 기원전 4~3세기 북옥저인들의 주거 유적에서 원시 형태의 온돌을 비롯, 다양한 형태로 발전한 쪽구들이 확인되었습니다. 북옥저인들이 발명한 쪽구들은 고구려 외곽을 거쳐 중심부로 유입됐으며 대진국(발해)의 지배층도 애용했습니다.
온돌이 가옥의 일반적인 구조가 된 것은 고려 시대이며, 전국으로 보급된 것은 조선 시대부터라고 합니다. 온돌이라는 용어도 조선 초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구들을 놓은 방 전체를 온돌방이라 불렀습니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해 고온 다습한 여름과 추운 겨울이 있기 때문에 한옥韓屋은 난방을 위한 온돌(구들)과 더위를 피하기 위한 대청마루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루는 남방적 특징을 갖는 것으로 남쪽 지방에서 발전해 북쪽으로 전파된 반면, 온돌은 추운 북쪽에서 발달해 차츰 남쪽으로 전해진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요소가 합쳐서 한옥 구조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건축에만 있는 구조적 특징이며 자랑입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추운 계절인 설 명절이면 음식을 장만하느라 불을 많이 지펴 따끈따끈한 온돌방 아랫목에 온 식구가 둘러 앉아 오순도순 웃음꽃을 피우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고향집이 이런 온돌 방식을 고수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온돌의 변형 방식으로 보일러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아궁이에 불을 넣어서 방바닥을 데우는 한옥의 전통적인 난방 방법인 온돌이 ‘전통 온돌’이라면, 요즘 우리나라의 아파트나 주택에서 흔히 쓰이고 있는 온수 파이프에 의한 온돌을 ‘개량 온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 아파트뿐 아니라 단독주택도 보일러를 설치하고 방바닥에 파이프나 호스를 매설하여 온수를 순환시키는 방식의 온돌이 널리 사용되고 있으나, 이것 역시 우리 전통의 온돌 난방 방식을 발전시킨 것입니다. 그러면 ‘개량 온돌’은 누가 개발한 것일까요?
현대 온돌의 역사를 논한다면 미국의 저명한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1867~1959)를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그는 1916년 일본 도쿄의 제국호텔 설계를 맡아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의 부호 오쿠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郎(1837~1928)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오쿠라는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과 함께 개항된 부산에 들어와 잡화점을 시작으로 금융(다이이치은행 조선 지점), 건설, 압록강 벌목으로 떼돈을 벌어 조선의 문화재를 닥치는 대로 긁어 갔던 인물입니다. 오쿠라는 1914년 총독부가 식민 통치의 치적을 홍보하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궁궐 전각을 헐어 낼 때,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을 구워삶아 세자의 동궁東宮으로 사용되던 자선당資善堂을 뜯어 도쿄에 있는 자신의 집에 다시 세웠습니다.
프랭크는 오쿠라가 자선당을 옮겨 놓은 ‘코리안 룸Korean Room’의 온돌을 운명처럼 접하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온이 갑자기 바뀐 것 같았다. 결코 커피 때문이 아니었다. 마치 봄이 온 듯했다. 우리는 곧 몸이 따뜻해지고 다시 즐거워졌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는데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훈훈함이 감돌았다. 눈에 보이는 난방 시설도 없었고, 이것으로 난방이 되는구나 하고 바로 알 수 있을 만한 그 어떤 것도 없었다. 그건 정말이지 난방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기후적 사건이었다”(Gravity Heat. 1943)
프랭크는 바닥을 데우는 난방 방식을 가장 이상적인 난방 방식으로 보고 태양열보다 좋은 난방이라고 극찬했습니다. 큰 감동과 영감을 받은 프랭크는 미국에 돌아가 1930년대 후반부터 주택을 설계할 때 처음으로 온돌식 난방을 적용하면서 미국의 온돌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프랭크는 자신이 ‘중력 난방(Gravity Heat)’이라고 명명한 이 난방 기술을 자신이 설계한 약 30동棟의 단독 주택에 적용했습니다.
An ondol, also called gudeul (Korean: 구들),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is underfloor heating which uses direct heat transfer from wood smoke to the underside of a thick masonry floor. In modern usage it refers to any type of underfloor heating, or a hotel or sleeping room in Korean (as opposed to Western) style. - Wikipedia -
위키피디아 사전을 보면 처음에 온돌(구들)을 위와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한국 전통의 난방 방식이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한국인의 방은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난방 방식이다. 이것은 태양열을 이용한 복사 난방보다도 훌륭하다. 발을 따스하게 해 주는 방식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난방이다
- 미국의 유명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 -
- 미국의 유명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 -
온돌은 한국 고유의 독특한 난방 방식이고 온돌 문화는 우리 겨레가 가진 삶의 예지와 숨결이 자리 잡고 있는 우리의 소중한 보물이자 훌륭한 자산입니다. 어릴 적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던 시골 마을을 회상해 보면 솥을 걸고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 불로 방은 뜨끈뜨끈했고 그 안에서의 잠은 정말 편안했던 꿀잠이었습니다. 지금도 어느 시골 마을에서는 전통 온돌방에 불을 피워 놓고 등을 지지러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아궁이 불이 굴뚝을 통해서 연기로 나오는 모습은 멀리서 보면 정말 아름답고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풍광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어렸을 적에는 그냥 그게 좋은 줄만 알았지 그걸 ‘온돌’이라고 하는 것은 나중에 배우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왜 방바닥에서 잠을 자나요?
지금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한류 열풍은 케이팝K-Pop뿐만 아니라 드라마에도 미치고 있습니다. ‘대장금’이나 ‘주몽’ 열풍이 불었을 때 외국인 팬들의 온라인 토론장에서는 우리들의 난방 방식에 대해서 토론이 붙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침대에서 자고 벽난로에 불을 피우는데 한국 사람들은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와서 이불을 덮고 자는 모습을 한국 드라마에서 자주 본 겁니다. 온돌은 주택의 실내 온도를 섭씨 13∼16도로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난방 장치이기 때문에 우리는 온돌방에 신체를 최대한 접촉하기 위해서 신발을 벗는 좌식 생활을 주로 했습니다. 그런 거주 문화가 외국인들의 눈에는 신기하게 비쳤던 겁니다.
이는 또한 중국인과 일본인에게도 다르게 비춰졌을 겁니다. 일본의 이로리(いろり) 등은 직접 열을 이용하는 방식인 데 비해 온돌은 구들장과 고래(구들장 밑으로 나 있는 길)를 데워 발생하는 간접 복사열을 난방에 사용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중국 대부분도 마찬가지로 온돌을 하지 않습니다. 중국 동북부와 몽골 일부 지역에서도 온돌과 비슷한 원리로 난방을 했지만 잠자는 부분에만 구들을 설치한 중국 동북부의 ‘쪽구들’ 방식과 게르 바닥에 구들을 놓은 몽골 방식은 방바닥 전체를 데우는 ‘통구들’인 우리 온돌과는 분명 다릅니다.
온돌의 난방 방식과 구조
그럼 본격적으로 온돌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온돌은 그야말로 ‘따뜻한 돌’입니다. 구들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요, 구들은 ‘구운 돌’의 약자입니다. 요즘에는 추울 때 핫팩hot pack을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하지만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겨울에 시골에서 학교를 다닐 때 논두렁 밑에서 돌을 구워 주머니에 넣고 다니곤 했습니다. 추운 겨울에 달궈진 돌은 난방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아마도 거주하는 공간의 아래쪽을 달궈야겠다는 생각도 이런 돌을 달구는 것과 같은 작은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온돌 시스템은 아궁이, 방고래, 개자리, 구들, 굴뚝 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한옥의 아궁이에 불을 때면 열기가 아궁이 → 아궁이 후렁이 → 부넘기 → 구들개자리 → 방고래 → 고래개자리를 거쳐 굴뚝으로 빠져나갑니다.
①고래
온돌의 핵심은 ‘고래’에 있습니다. 고래는 방구들을 구성하는 돌 사이의 빈 공간으로 뜨거운 연기가 지나가는 길입니다. 구들은 이 고래 위에 놓이게 됩니다. 방바닥을 데우는 것은 구들을 어떻게 놓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아궁이 쪽이 깊고, 굴뚝 쪽이 얕아 옆에서 보면 꼭 고래등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불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뜨거운 공기가 고래 속을 빙빙 돌아 구들장을 달구는 구조입니다.
아랫목은 뜨거운 연기가 지나는 고래와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윗목에 비해 따뜻합니다. 또한 아랫목에는 두꺼운 돌을 놓습니다 그리고 열의 전달이 미약한 윗목은 좀 더 빨리 달구기 위해서 얇은 돌을 놓습니다.
②부넹기(부넘기)
불과 뜨거운 연기는 아궁이에서 ‘부넹기(부넘기)’라는 구멍을 통해 고래 쪽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부넹기는 ‘불이 넘어가는 고개’, ‘불을 넘기는 고개’란 뜻으로 ‘불목’이라고도 불리는데, 방고래가 시작되는 어귀에 조금 높게 쌓아 불길이 아궁이로부터 골고루 방고래로 넘어가게 만든 작은 언덕입니다. 구멍이 작아 열기가 바깥으로 새지 않고 고래로 잘 빨려 들어가게 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③구들 개자리, 고래 개자리
고래를 통과한 열기는 ‘구들 개자리’로 이동합니다. 구들 개자리는 부넘기 너머에 파놓은 골로서 이곳에서 고래로 열기가 균등하게 전해지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열이 고래 전체로 골고루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래 개자리’는 굴뚝과 구들 사이에 있는 벽 바로 안쪽에 깊게 파인 고랑입니다. 개자리는 그 중에서 굴뚝에 이르기 직전에 깊이 판 통로를 말하는데 이것은 열과 연기가 좀 더 오래 머물도록 하며, 재티 등을 걸러 내는 기능을 합니다.
이렇게 구들과 고래가 제대로 놓아져야만 따뜻한 온돌방이 됩니다. 우리 선조들은 열이 이동하는 방향과 가열된 열기의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게 굴뚝을 고안하는 등 과학적인 방식으로 한옥을 지켜 왔습니다. 구들을 놓을 때 아궁이, 고래 구멍 및 굴뚝의 배치는 지역의 바람 방향, 기후 조건에 따라 절묘하게 맞출 수 있는 과학적 슬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것을 잘못 맞추면 굴뚝으로 빠져나가야 할 열과 연기가 거꾸로 아궁이로 되돌아 나오기 때문입니다.
온돌의 효능
서양에서 발달한 라디에이터radiator(방열기)를 이용한 공기 난방법은 더워진 공기가 위로 올라가는 대류 현상 때문에 바닥을 따뜻하게 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온돌은 바닥을 먼저 데웁니다. 그러므로 머리는 차게 하고 발은 따뜻하게(두한족열頭寒足熱) 하여 인체 면역력을 높여 줍니다. 두한족열이라는 말은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는 말로 달리 쓸 수 있습니다. 수승화강이란 차가운 기운을 올라가게 하고 뜨거운 기운은 내려가게 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한의학의 원리이자 수행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동양은 수승화강水昇火降의 도道적 온돌 문화이지만, 서양은 침대식 화승수강火昇水降 주거 문화입니다.
구들은 불을 지피지 않을 때도 방바닥에 축적된 열이 방 안을 데우는 방식(고체축열식)이어서 에너지 효율적입니다. 또한 실내 온도를 공기 난방에 비해 낮게 유지해도 바닥이 따뜻하기 때문에 외부와 내부의 온도 차를 줄일 수 있습니다. 구들의 재료는 열손실 계수가 낮아 대부분의 가정에서 쓰고 있는 온수 파이프 난방 시스템보다도 훨씬 적은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게다가 물리·화학적으로 안전한 자연 광물질 재질은 거의 영구적입니다.
서양에서 인정받는 온돌
대체로 서양식 난방은 히터의 난방 열기가 위로 그냥 날아가면서 실내는 여전히 춥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온돌을 제대로 경험해 본 외국인들은 방의 밑에서부터 골고루 열이 위로 올라와서 몸을 덥혀 주는 온돌을 그리워합니다.
서양인들이 온돌을 경험한 기록이 몇 가지 남아 있습니다. 1690년에 발간한 『북과 동 타르타리아지』에서 네델란드의 위트센은 ‘방을 만들 때는 마루 밑으로 15센티미터 정도의 구멍을 뚫고, 그곳으로 문밖에 설치한 아궁이에서 연기를 피워 넣어서 방 안을 따뜻하게 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라고 온돌에 대해서 기록하였습니다.
미국의 과학자 퍼시벌 로웰의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1885)에는 “온돌은 겨울철 방 안을 따뜻하게 하는 일종의 화로 역할을 한다. 방 밖엔 난로용 구멍이 있는데 이것을 ‘아궁이’라 부른다. 불을 때면 더운 연기가 벌집처럼 돼 있는 미로를 따라 방바닥에 넓게 퍼진다. 아이디어가 뛰어나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기록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서양에서도 온돌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국립과학기술연구소(CNRS)는 에너지 절약의 일환으로 온돌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온돌을 사용할 경우 입식 생활에 사용되는 강제 환기식 난방 방법보다 약 20% 이상의 에너지가 절약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에서는 자기들 중심으로 이미 바닥 난방 설비의 독자적인 ISO(국제표준화기구) 기준을 만들고 있습니다. 서양에서 지금 한창 연구하는 바닥 난방의 근원이 우리의 온돌임을 정확히 알리고 더 늦기 전에 온돌의 현대화와 산업화를 서둘러야 할 때입니다.
온돌의 시기는 훨씬 오래전
한국인이 온돌을 사용한 것은 매우 오래전부터였습니다. 온돌의 시기는 지금부터 5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회령 오동의 구석기 시대 주거지 유적에서 구들로 추정되는 형태의 바닥과 벽이 발굴됨으로써 그 시기가 구석기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흥륭와興隆窪문화는 BCE 6200년 ~ BCE 5200년 사이의 유물과 유적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홍산紅山문화(요하문명)에 속하는 흥륭와문화는 동아시아 최초로 밭농사와 온돌 문화가 발생한 우리 문화의 기원지입니다. 이 흥륭와에 원시 온돌이 있었습니다.
고조선 온돌
북한에서는 영변군 세죽리, 시중군 로남리, 요령성 무순시撫順市 연화보 유적 등에서 고조선 시기의 온돌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같은 온돌 유적은 중국 동북부의 무순시에서도 발견됐습니다. 온돌이 발견되는 지역은 중북 북부이거나 만주 지역인데 이들 지역은 홍산은 물론 고조선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고조선에서 뻗어 나간 흉노족도 온돌을 놓고 살았습니다. 실제 흉노족이 살던 시베리아의 현지 민속박물관을 보면 온돌을 전시해 놓고 있습니다.
고구려와 옥저의 온돌
북한 자강도 증강군 토성리 유적에서 고구려 초기의 4개의 온돌이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4세기경 황해도 안악 3호분의 고분 벽화에 온돌이 등장하고 안악 고분 3호와 약수리 무덤 벽화에는 한 여인이 부뚜막에 시루를 올려놓고 음식을 만들고 있고 또 다른 여인은 부뚜막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의 「동이전」에는 ‘그 풍속에 의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서 긴 갱坑을 만들어 따뜻하게 난방한다(冬月皆作長坑下然溫火亂取暖)’라는 기록이 있어 고구려인들이 오래전부터 온돌 시설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옥저에도 온돌이 발달했습니다. 기원전 4~3세기 북옥저인들의 주거 유적에서 원시 형태의 온돌을 비롯, 다양한 형태로 발전한 쪽구들이 확인되었습니다. 북옥저인들이 발명한 쪽구들은 고구려 외곽을 거쳐 중심부로 유입됐으며 대진국(발해)의 지배층도 애용했습니다.
고려를 거쳐 조선에서 대중화
온돌이 가옥의 일반적인 구조가 된 것은 고려 시대이며, 전국으로 보급된 것은 조선 시대부터라고 합니다. 온돌이라는 용어도 조선 초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구들을 놓은 방 전체를 온돌방이라 불렀습니다.
온돌과 한옥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해 고온 다습한 여름과 추운 겨울이 있기 때문에 한옥韓屋은 난방을 위한 온돌(구들)과 더위를 피하기 위한 대청마루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루는 남방적 특징을 갖는 것으로 남쪽 지방에서 발전해 북쪽으로 전파된 반면, 온돌은 추운 북쪽에서 발달해 차츰 남쪽으로 전해진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요소가 합쳐서 한옥 구조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건축에만 있는 구조적 특징이며 자랑입니다.
전통 방식의 온돌에서 개량 온돌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추운 계절인 설 명절이면 음식을 장만하느라 불을 많이 지펴 따끈따끈한 온돌방 아랫목에 온 식구가 둘러 앉아 오순도순 웃음꽃을 피우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고향집이 이런 온돌 방식을 고수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온돌의 변형 방식으로 보일러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아궁이에 불을 넣어서 방바닥을 데우는 한옥의 전통적인 난방 방법인 온돌이 ‘전통 온돌’이라면, 요즘 우리나라의 아파트나 주택에서 흔히 쓰이고 있는 온수 파이프에 의한 온돌을 ‘개량 온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 아파트뿐 아니라 단독주택도 보일러를 설치하고 방바닥에 파이프나 호스를 매설하여 온수를 순환시키는 방식의 온돌이 널리 사용되고 있으나, 이것 역시 우리 전통의 온돌 난방 방식을 발전시킨 것입니다. 그러면 ‘개량 온돌’은 누가 개발한 것일까요?
개량 온돌 난방을 처음 적용한 미국의 건축가
현대 온돌의 역사를 논한다면 미국의 저명한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1867~1959)를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그는 1916년 일본 도쿄의 제국호텔 설계를 맡아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의 부호 오쿠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郎(1837~1928)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오쿠라는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과 함께 개항된 부산에 들어와 잡화점을 시작으로 금융(다이이치은행 조선 지점), 건설, 압록강 벌목으로 떼돈을 벌어 조선의 문화재를 닥치는 대로 긁어 갔던 인물입니다. 오쿠라는 1914년 총독부가 식민 통치의 치적을 홍보하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궁궐 전각을 헐어 낼 때,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을 구워삶아 세자의 동궁東宮으로 사용되던 자선당資善堂을 뜯어 도쿄에 있는 자신의 집에 다시 세웠습니다.
프랭크는 오쿠라가 자선당을 옮겨 놓은 ‘코리안 룸Korean Room’의 온돌을 운명처럼 접하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온이 갑자기 바뀐 것 같았다. 결코 커피 때문이 아니었다. 마치 봄이 온 듯했다. 우리는 곧 몸이 따뜻해지고 다시 즐거워졌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는데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훈훈함이 감돌았다. 눈에 보이는 난방 시설도 없었고, 이것으로 난방이 되는구나 하고 바로 알 수 있을 만한 그 어떤 것도 없었다. 그건 정말이지 난방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기후적 사건이었다”(Gravity Heat. 1943)
프랭크는 바닥을 데우는 난방 방식을 가장 이상적인 난방 방식으로 보고 태양열보다 좋은 난방이라고 극찬했습니다. 큰 감동과 영감을 받은 프랭크는 미국에 돌아가 1930년대 후반부터 주택을 설계할 때 처음으로 온돌식 난방을 적용하면서 미국의 온돌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프랭크는 자신이 ‘중력 난방(Gravity Heat)’이라고 명명한 이 난방 기술을 자신이 설계한 약 30동棟의 단독 주택에 적용했습니다.
우리의 훌륭한 문화 유산 세 가지를 들라 하면 ‘한글’과 ‘금속활자’ 그리고 ‘온돌’이라고 합니다. 우리 민족은 계속적으로 온돌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한옥이나 궁궐의 온돌을 살펴보면 놀라운 과학적 발명품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과학적인 온돌 문화를 우리 조상들은 이미 수천 년 전에 발명하여 사용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 문화 속에 출발한 이 온돌 문화를 더욱 발전시켜야 하는 것도 현대를 사는 우리의 몫입니다. 인류의 주거 문화 개선을 위해서도 온돌 문화를 알리고 계승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고유의 난방 방식 온돌(ondol)
온돌은 세계 문화사에서 보기 드문 형태의 겨울 난방 구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치’와 더불어 ‘온돌’은 한국 문화 관련 용어로는 처음으로 브리태니커Britannica 백과사전에 등록되기도 했습니다. ‘Ondol’이라는 우리말 발음 그대로 세계 사람들이 발음하고 배우는 것입니다.An ondol, also called gudeul (Korean: 구들),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is underfloor heating which uses direct heat transfer from wood smoke to the underside of a thick masonry floor. In modern usage it refers to any type of underfloor heating, or a hotel or sleeping room in Korean (as opposed to Western) style. - Wikipedia -
위키피디아 사전을 보면 처음에 온돌(구들)을 위와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한국 전통의 난방 방식이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알류샨 열도에서 발견된 3천년 전 온돌
알래스카 알류샨Aleutian 열도 아막낙 섬에선 온돌이 발견됐습니다. 아막낙 섬은 알류샨 열도 가운데서 두 번째로 큰 언알래스카Unalaska 섬에 북동쪽으로 가까이 붙어 있는 위성 섬입니다. 이곳에서 3천 년 전의 한국 전통 온돌이 발견되었습니다. 모두 4개의 온돌 구조가 발굴된 아막낙 섬의 고대 유적지들은 서기전 800~1000년 사이의 유적들로 알려졌습니다. 이들은 한반도 인근 해안에서 캄차카Kamchatka 반도를 거쳐 오랜 역사 동안 바다 생활에 연결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알류샨 열도의 아막낙 섬에서 온돌이 발굴됨으로써 북미 원주민은 이 해안선을 따라서 이주했다는 설에 힘이 실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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