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칼럼 | 생명존중과 상생의 마음으로 살자!
[칼럼]
이재훤 / 녹사장, 완도주도도장
얼마 전 뉴스에 부모가 자식을 때려 숨지게 한 사연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였다. 목사인 친아버지와 계모가 함께 무려 5시간 동안이나 빗자루, 빨래 건조대, 쇠봉으로 아들을 폭행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고 이후 11개월 동안 이웃과 지인들을 속이고 범행을 은폐해왔다고 한다. 아이가 무려 5시간 동안 맞아서 죽었다고 하니 그 고통과 공포가 어느 정도였을까? 요즘 들어 부모가 자식을 때려 숨지게 했다는 뉴스 보도가 부쩍 늘고 있다. 또 거꾸로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사건도 심심찮게 뉴스에 오르내리곤 한다.
영화 〈공공의 적〉에서 재산을 물려받기 위해 부모를 살해하는 사람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의 실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낳아주고 애지중지 길러준 부모를 칼로 50여 차례 찔러 살해한 후에 불을 질러 범행을 은폐시켰다. 자식에게 살해당하는 그 부모의 심정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필자는 이런 끔찍한 사건을 볼 때마다 과연 그들이 어떤 정신 상태였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자고自古로 자식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존재다. 또한 부모는 내 생명을 낳아주고 길러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마운 존재이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을 듣지 않는다고, 돈을 주지 않는다고, 자꾸 나무란다고 부모와 자식이라는 천륜을 저버리고 무자비하게 죽이는 일이 이 사회에서 벌어지곤 하는 것이다.
약 1년 전쯤 우연히 세계 유명 가죽 제조회사에서 뱀 가죽으로 제품을 만들어 파는 것을 보도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뱀의 가죽은 색이 아름답고 가죽이 질겨 많이 사용하며, 잘 사는 나라일수록 뱀 가죽의 수요가 많다고 한다. 주로 동남아 지역의 비단 구렁이를 잡아서 가공을 하는데, 잡아 죽이는 장면이 가히 충격적이다. 마체테Machete라고 불리는 날이 넓고 무거운 칼로 뱀 머리를 쳐서 기절시킨 뒤에 입을 통해 긴 파이프를 넣는다. 이후 이 파이프에 물을 채워 풍선처럼 부풀게 만든 뒤 물이 새어나가지 못하게 몸의 일부를 단단히 묶는다. 그리고 머리는 꼬챙이 등으로 꿰어놓고 그 다음에 머리 부분부터 가죽을 벗겨내는데 그냥 산 채로 쭉 벗겨 내린다. 뱀은 가죽이 다 벗겨지고 나면 극심한 고통으로 인한 쇼크 또는 탈수증으로 죽는다고 한다. 죽음을 당하는 뱀의 입장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당하는 그 고통은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생명을 무시하는 잔인한 마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런 일을 할 수 없으리라!
겨울철에 입는 보온용 패딩 옷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뉴스에 거위나 오리의 털을 뽑을 때, 산 채로 뽑지 말자는 운동을 하는 것을 보았다. 털을 채취할 때 살아있는 거위나 오리의 부드러운 가슴 부위의 털을 뽑아내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호르몬 주사를 놓고 다시 뽑기를 서너 번 정도 더 한다고 한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동물들이 심한 스트레스와 쇼크로 죽는 일도 허다하다. 이런 일들은 모두 나의 생명이 존귀한 만큼 타 생명도 고귀하다는 것을 망각한 생명 경시 사상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 생명이 고귀하고 존귀한 만큼 타 생명도 무엇과 바꿀 수 없이 존귀하고 고귀한 것이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어릴 때부터 호생好生의 덕이 있으시어 나무를 자주 심으셨다. 인간이 아닌 말 못하는 나무도 하나의 생명으로, 그러한 생명을 아끼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다.
자연의 세계에서는 생명을 영위하기 위해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꼭 필요한 경우에, 그것도 최대한 고통을 줄여서 해주는 것이 서로의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일 것이다. 옛날 인디언들은 동물을 사냥하여 먹게 되면 죽은 동물에게 먼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되었으니 영혼이라도 잘되라.’고 기도를 해주고 먹었다고 한다. 인디언뿐만 아니라 지금보다 영성이 발달한 고대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해왔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점점 더 생명을 경시하고 상생의 마음을 잃어가면서 인간과 동물을 죽이는 방법이 무자비하고 잔인해지고 있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파리 죽은 귀신이라도 원망이 붙으면 천지공사가 아니니라.(도전 4편 48장)고 하셨고, 상말에 ‘무척 잘산다.’ 이르나니 ‘척(隻)이 없어야 잘산다.’는 말이니라. 남에게 원억(寃抑)을 짓지 말라. 척이 되어 갚느니라. (도전 2편 103장) 고 하셨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은 영혼(신神)이 깃들어 있는 고귀한 존재이며, 억울하게 죽으면 원한을 품게 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후천 새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상생相生의 마음을 갖고, 서로 원한(척隻)을 짓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 상생은 비단 사람 사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과 자연 만물이 서로의 생명을 존중하고 서로 잘되게 해야 인류 사회에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있다. 증산도의 상생은 서로 잘되게 하자는 소극적 의미 외에도 서로의 생명을 살려낸다는 적극적인 실천의 의미도 있다.
상제님, 태모님께서 말씀하신 우주일가의 세상은 언제쯤 열리게 될까? 상생의 조화 속에 서로 간에 생명 존중의 기운이 무르녹는 후천 세상을 간절히 염원해본다.
얼마 전 뉴스에 부모가 자식을 때려 숨지게 한 사연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였다. 목사인 친아버지와 계모가 함께 무려 5시간 동안이나 빗자루, 빨래 건조대, 쇠봉으로 아들을 폭행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고 이후 11개월 동안 이웃과 지인들을 속이고 범행을 은폐해왔다고 한다. 아이가 무려 5시간 동안 맞아서 죽었다고 하니 그 고통과 공포가 어느 정도였을까? 요즘 들어 부모가 자식을 때려 숨지게 했다는 뉴스 보도가 부쩍 늘고 있다. 또 거꾸로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사건도 심심찮게 뉴스에 오르내리곤 한다.
영화 〈공공의 적〉에서 재산을 물려받기 위해 부모를 살해하는 사람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의 실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낳아주고 애지중지 길러준 부모를 칼로 50여 차례 찔러 살해한 후에 불을 질러 범행을 은폐시켰다. 자식에게 살해당하는 그 부모의 심정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필자는 이런 끔찍한 사건을 볼 때마다 과연 그들이 어떤 정신 상태였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자고自古로 자식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존재다. 또한 부모는 내 생명을 낳아주고 길러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마운 존재이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을 듣지 않는다고, 돈을 주지 않는다고, 자꾸 나무란다고 부모와 자식이라는 천륜을 저버리고 무자비하게 죽이는 일이 이 사회에서 벌어지곤 하는 것이다.
약 1년 전쯤 우연히 세계 유명 가죽 제조회사에서 뱀 가죽으로 제품을 만들어 파는 것을 보도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뱀의 가죽은 색이 아름답고 가죽이 질겨 많이 사용하며, 잘 사는 나라일수록 뱀 가죽의 수요가 많다고 한다. 주로 동남아 지역의 비단 구렁이를 잡아서 가공을 하는데, 잡아 죽이는 장면이 가히 충격적이다. 마체테Machete라고 불리는 날이 넓고 무거운 칼로 뱀 머리를 쳐서 기절시킨 뒤에 입을 통해 긴 파이프를 넣는다. 이후 이 파이프에 물을 채워 풍선처럼 부풀게 만든 뒤 물이 새어나가지 못하게 몸의 일부를 단단히 묶는다. 그리고 머리는 꼬챙이 등으로 꿰어놓고 그 다음에 머리 부분부터 가죽을 벗겨내는데 그냥 산 채로 쭉 벗겨 내린다. 뱀은 가죽이 다 벗겨지고 나면 극심한 고통으로 인한 쇼크 또는 탈수증으로 죽는다고 한다. 죽음을 당하는 뱀의 입장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당하는 그 고통은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생명을 무시하는 잔인한 마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런 일을 할 수 없으리라!
겨울철에 입는 보온용 패딩 옷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뉴스에 거위나 오리의 털을 뽑을 때, 산 채로 뽑지 말자는 운동을 하는 것을 보았다. 털을 채취할 때 살아있는 거위나 오리의 부드러운 가슴 부위의 털을 뽑아내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호르몬 주사를 놓고 다시 뽑기를 서너 번 정도 더 한다고 한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동물들이 심한 스트레스와 쇼크로 죽는 일도 허다하다. 이런 일들은 모두 나의 생명이 존귀한 만큼 타 생명도 고귀하다는 것을 망각한 생명 경시 사상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 생명이 고귀하고 존귀한 만큼 타 생명도 무엇과 바꿀 수 없이 존귀하고 고귀한 것이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어릴 때부터 호생好生의 덕이 있으시어 나무를 자주 심으셨다. 인간이 아닌 말 못하는 나무도 하나의 생명으로, 그러한 생명을 아끼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다.
어리실 때부터 호생好生의 덕이 많아 마당 구석에 화초를 심어 아담하게 가꾸시고 밭둑에 나가 나무를 즐겨 심으시며, 또 자라나는 초목을 꺾지 않으시고 미물 곤충이라도 해치지 않으시며 위기에 빠진 생명을 보면 힘써 구하시니라. (도전 1편 18장)
자연의 세계에서는 생명을 영위하기 위해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꼭 필요한 경우에, 그것도 최대한 고통을 줄여서 해주는 것이 서로의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일 것이다. 옛날 인디언들은 동물을 사냥하여 먹게 되면 죽은 동물에게 먼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되었으니 영혼이라도 잘되라.’고 기도를 해주고 먹었다고 한다. 인디언뿐만 아니라 지금보다 영성이 발달한 고대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해왔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점점 더 생명을 경시하고 상생의 마음을 잃어가면서 인간과 동물을 죽이는 방법이 무자비하고 잔인해지고 있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파리 죽은 귀신이라도 원망이 붙으면 천지공사가 아니니라.(도전 4편 48장)고 하셨고, 상말에 ‘무척 잘산다.’ 이르나니 ‘척(隻)이 없어야 잘산다.’는 말이니라. 남에게 원억(寃抑)을 짓지 말라. 척이 되어 갚느니라. (도전 2편 103장) 고 하셨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은 영혼(신神)이 깃들어 있는 고귀한 존재이며, 억울하게 죽으면 원한을 품게 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후천 새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상생相生의 마음을 갖고, 서로 원한(척隻)을 짓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 상생은 비단 사람 사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과 자연 만물이 서로의 생명을 존중하고 서로 잘되게 해야 인류 사회에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있다. 증산도의 상생은 서로 잘되게 하자는 소극적 의미 외에도 서로의 생명을 살려낸다는 적극적인 실천의 의미도 있다.
이제 천하를 한집안으로 통일하나니 온 인류가 한가족이 되어 화기和氣가 무르녹고 생명을 살리는 것을 덕으로 삼느니라. (도전 2:19:4~5)
상제님, 태모님께서 말씀하신 우주일가의 세상은 언제쯤 열리게 될까? 상생의 조화 속에 서로 간에 생명 존중의 기운이 무르녹는 후천 세상을 간절히 염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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