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고종 광무제高宗(2)

[도전속인물탐구]

파란과 격동의 시대에서 비상을 꿈꾸다



제국의 황혼, 러일전쟁과 을사늑약


열강의 각축과 중립 선언
대한제국이 광무개혁을 통해 각종 개혁을 추진하고 있던 그 즈음 한반도를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은 더해져 갔다. 1900년에 발생한 청나라의 의화단義和團 사건에 열강들이 개입하면서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은 점점 격화되었다. 우리의 동학혁명과 비슷한 성격을 지닌 의화단 운동은 만주에 있는 러시아 동청철도(東淸鐵道: 러시아가 삼국간섭을 통해 얻은 하얼빈哈爾濱을 중심으로 하여 다롄大連을 잇는 철도 노선)를 파괴하는 등 그 기세가 자못 격렬했다. 러시아는 철도보호를 명분으로 군사를 집결시켰고, 열강은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러시아의 남하를 어떤 형식으로든 막고자 했던 영국과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독점하려는 일본은 각자의 국가적 이익에 따라 동맹을 맺었다. 영국이라는 든든한 후원국을 얻은 일본은 러시아를 상대로 만주와 대한제국을 두고 협상을 벌였지만, 서로가 자국의 이익은 절대적으로 보호하고 상대국의 이익은 제한하려는 태도를 가졌기 때문에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 중에는 한반도 39도 분할 제의도 있었다. 1904년 2월 6일 정식으로 양국은 국교단절에 들어갔고, 일본은 2월 초에 마산포와 원산 등지에 일본군을 상륙시키는 등 전쟁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충돌을 예견하고 이를 피할 방도를 모색하였다. 1902년 5월에 궁내부 특진관 김규홍의 주장으로 두 개의 수도를 마련하자는 필요성에 의해 평양에 이궁離宮을 짓고 군사를 증설하려는 노력을 펼쳤지만 전쟁 와중에 유야무야되었다. 외교적으로 전쟁을 피해갈 방법으로 1903년 8월 현상건에게 국외중립 선언 문제를 러시아와 협의하게 하였지만 지지부진해졌다. 마지막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 등도 고려했다.
하지만 1904년 1월, 일본은 한일의정서 체결을 압박하였다. 러시아와 개전을 염두에 두고, 대한제국 영토를 무시로, 거리낌 없이 활용하겠다는 선포였다. 의정서 체결 압박 속에서 대한제국은 국외중립선언을 발표하였지만, 중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에 상응하는 군사력이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여기에 외교적으로도 이웃 나라들이 이를 수긍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당시는 약육강식 우승열패의 제국주의 시대였다. 1904년 2월 9일 일본은 선발대 지상군 2천 명을 서울에 진주시켰고 이어 2만 명의 군대가 서울을 장악했다.

러일전쟁의 발발
러일전쟁露日戰爭(러시아어: Русско-японскаявойна, 일본어: 日露戦争, 영어: Russo-Japanese War)은 1904년 2월 8일에 발발하여 1905년 가을까지 계속된 일본제국과 러시아제국 간 전쟁으로 만주와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쟁취하려는 무력 충돌이었다. 러일전쟁의 주요 무대는 만주 남부, 특히 요동 반도와 한반도 근해였다. 1868년의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서양의 사상, 기술적인 진보, 풍습 등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였다. 짧은 시간 동안 근대화된 산업국가로 발전하면서 제국주의 국가의 면모를 드러내며 서양 열강과 같은 세력으로 인정받기를 원했고, 부동항不凍港을 얻기 위해 사활을 걸었던 러시아는 동쪽에 대한 야망이 있었다. 서쪽으로는 폴란드에서 동쪽으로는 캄차카 반도까지 영토로 삼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놓으면서 이 지역에서의 영향과 존재를 굳건하게 하려고 했다. 일본과 러시아의 서로 다른 욕망이 한반도에서 충돌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 이전에 고종 광무제의 근왕세력이라 일컬어지는 인물들이 철저하게 배제된 채, 친일파 인물인 외부대신 이지용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에 의해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가 1904년 2월 23일에 강제로 체결되었다. 한일의정서를 조사한 일본의 학자는 이미 이때 ‘보호국’이라고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보호국이라고 진단하고 있다(야마베 겐타로山辺健太朗의 『한일합병사』, 1982년, 범우사 참조). 한일의정서 제1조에 나오는 ‘충고’라는 단어는 국제법상으로 명령과 같은 것으로 상위의 나라가 하위의 나라에게 명령하는 것이며, 4조의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시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도 이미 보호국의 지위라는 것이다. 5조는 일본이 대한제국 외교에 간섭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주장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일본에 휘둘리는 국면을 벗어날 길이 없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을 목적으로 1905년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은 이미 날개 꺾인 한국을 다시 한 번 확인사살하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일본제국은 1904년 2월 10일 러시아제국에 선전포고를 하였지만, 선전포고에 앞서 2월 8일 여순항旅順港에 있는 러시아제국의 극동 함대, 2월 9일에는 제물포항의 전함 두 척을 공격하였다.
(주1)
초기에는 러시아의 압승을 예상했지만, 일본은 1905년 1월 여순에서, 3월에는 만주 봉천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러일전쟁 승패의 분수령은 러시아의 ‘제2 태평양함대’(발트 함대)의 궤멸이었다. 당시 세계 최강이라 알려진 발트 함대는 여순항을 구하기 위해 29,000km를 여행하였으나(일본과 동맹을 맺은 영국은 러시아 함대의 수에즈 운하 통과를 불허하였고, 이에 러시아 함대는 멀리 아프리카 대륙의 희망봉을 돌아서 와야 했다), 이미 여순항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무능한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어서 빨리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전열을 재정비하려고만 했다. 사생결단의 자세로 나온 일본함대와는 다른 자세였다.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경로는 3가지가 있었는데, 한국과 일본 사이의 대한해협을 통과하는 길은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었으나, 일본에 매우 가까워 위험한 길이었다. 일본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는 발트 함대가 극동의 유일한 러시아 항구인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리라는 계획을 알았다. 전투 계획이 세워졌고 여러 군함은 러시아제국 함대를 격멸하고자 수리되었다. 일본의 연합함대는 처음에는 전함 6척으로 구성되었으나 당시에는 4척이 남아 있었으며 순양함, 구축함, 어뢰정은 그대로였다. 제2 태평양함대는 보로디노급 신형 전함 네 척을 포함하여 8척의 전함, 순양함, 구축함, 기타 함선까지 총 38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5월 27일경 제2 태평양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한 여행의 막바지에 있었다. 하지만 승리의 여신은 일본의 편이었다. 러시아 함대의 병원선에서 불빛을 노출하여 일본의 순양함 시나노마루에 발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 해군사령부는 러시아 함대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이 사실은 무선으로 도고 사령부에 알려졌고 일본의 연합함대는 곧 출격을 명령받았다. 여전히 정찰에서 정보를 받으면서 일본군은 러시아제국의 함대 위치를 알 수 있었고 T자형 전술로 러시아 함대를 타격하였다. 러시아 함대는 전멸되었고 전함 8척과 많은 작은 함정, 5천명 이상 인원을 잃었으며, 일본군은 어뢰정 3척과 116명을 잃었다. 러시아군은 함정 3척만 블라디보스토크로 빠져나갔다.

쓰시마 해전 후, 일본군은 사할린 전체를 점령하였고 러시아제국은 평화회담을 청해야만 했다. 이 러일전쟁 당시 일본은 러시아 군함 감시를 위해 강제로 울릉도와 독도를 시마네 현에 편입하는 시마네 현 고시 제40호를 발표하기도 했다. 1905년 9월 5일, 미국의 주선으로 포츠머스 강화조약Treaty of Portsmouth이 체결되었고, 러시아는 정부의 무능을 드러낸 패전의 영향으로 2월 혁명을 겪는다. 일본은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제국주의의 광풍이 더 심하게 몰아쳤으며 대한제국은 열강의 묵인 속에 을사늑약을 강요당하고 만다.


을사늑약의 체결
더 이상 열강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된 일본은 1905년 을사년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파대사로 파견하여 일방적으로 보호국 조약체결을 밀어붙였다. 이 무렵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権助와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는 일본으로 증원군을 파송받아 궁궐 주변에 물샐 틈 없는 경계망을 펼치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광무제에게 메이지明治 천황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두 제국 간의 결합을 한층 공고하게’ 하자는 내용을 강조하였다. 이미 1904년 8월 이른바 1차 한일협약으로 대한제국의 재정, 외교, 군사, 치안 등에 일본인 고문을 파견하도록 장악한 상태에서 결합을 한층 공고하게 하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도 3~4일의 기한을 정하고서.

고종 광무제는 침묵으로 거부의사를 밝혔다. 당시 언론에서도 황제가 침묵으로써 일제에 저항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대한매일신보). 그러자 일본은 전략을 바꾸어 조정 대신들을 상대로 위협, 매수에 나섰다. 초조해진 이토 히로부미는 하세가와 군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일본헌병 수십 명의 호위를 받으며 궐내로 들어가 노골적으로 협력에 동의하라고 광무제에게 강요했다. 광무제는 생각해보겠다는 말로 이토 히로부미를 달래어 내보냈다. 이토 히로부미는 직접 메모용지에 연필을 들고 대신들에게 가부可否를 따져 물었다. 그때 갑자기 한규설이 소리 높여 통곡을 하기 시작했던지라 별실로 데리고 갔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너무 떼를 쓰는 모양을 하면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아 대신들을 겁에 질리게 하였다.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만이 무조건 불가不可를 썼고,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은 책임을 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의를 표시하였다. 이 찬성한 다섯 명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각료 8대신 가운데 5대신이 찬성하였으니 조약 안건은 가결되었다고 선언하고 궁내대신 이재극李載克을 통해 그날 밤 황제의 칙재勅裁를 강요하였으나 광무제는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같은 날짜로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 간에 이른바 이 협약의 정식 명칭인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 이른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경운궁 중명전重明殿
(주2)
에서 체결되었다. 날씨가 스산하고 쓸쓸하여 ‘을사년스럽게’, 우리 민족에게 큰 상처와 아픔을 준 사건이었다. 을사늑약은 무력을 동원하여 강제와 협박 속에서 진행된 조약체결이고, 대한제국 수석대표인 한규설이 거부하고 불참했으며, 외무부의 관인을 탈취하여 날인했고, 고종 광무제의 비준이 없었다는 점에서, 현재까지도 그 불법성이 논란이 되고 있다.

제국의 마지막 몸부림, 헤이그 특사 사건


을사늑약 이후 정부 고위관료(혈죽血竹으로 유명한 시종무관장 민영환閔泳煥 등)들은 죽음으로 항거하였고,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전개되었다. 을사늑약 당시 침묵으로 항거한 고종 광무제는 이제 외교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보려 했다. 먼저 미국에 기대어보기로 했다. 1882년 조미 수호조약 당시 양국이 어려움에 처할 때 ‘거중조정’居中調整(good offices)하기로 약속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 광무제는 미국의 선의를 끝까지 믿었지만, 이는 고종만의 짝사랑이었다. 미국은 이미 가스라-태프트 밀약The Katsura-Taft Agreement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하고 있었다. 미국은 정식으로 광무제의 부탁과 호소를 외면하고 거절하였다. 이외에도 서양 열강에게 보낸 9통의 친서를 보냈지만 하나도 전달되지 않았다.

고종 광무제는 최측근인 이용익李容翊을 통해 러시아를 방문하여 보호를 요청하였지만, 러일전쟁 패배와 사회주의 혁명의 파고 속에서 러시아는 자신의 운명조차 어찌해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용익은 러시아에 대해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1907년 2월 갑자기 사망하였다. 당시 이용익은 광무제로부터 1907년 6월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Hague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받았었다. 이용익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에 광무제는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李相卨과 전 평리원 검사 이준李儁을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하였다. 그곳에서 을사늑약의 무효를 알리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삼엄한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야 했다.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체류 중인 전 주러 공사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李瑋鍾을 일행에 포함시키며 특사들은 헤이그로 향했다.

하지만 포츠머스 조약으로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인정하고 있던 러시아, 미국, 영국은 특사들과의 면담을 거절했다. 또한 일본제국과 대영제국 등의 방해와 서구 제국들의 방관으로 대한제국 대표들은 회의 참석과 발언을 거부당하고 말았다. 영국은 인도 지배를 묵인받는 대신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인하는 영일동맹에 따라 일본을 지지한 것이었고, 러시아는 러일전쟁의 여파로 일본을 견제할 목적을 가지고 대한제국의 특사 파견을 도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사 일행은 헤이그에서 평화회의와 연관된 행사들이 치러지는 평화클럽(Peace Club)에서 적어도 세 차례의 설명회를 열었다. 여기에는 기자들뿐만 아니라 회의에 파견된 각국 대표자들도 여럿 참석했는데, 이 설명회는 영국 출신의 저명한 언론인 윌리엄 토머스 스테드William Thomas Stead가 주선한 것이었다. 이위종은 유창한 프랑스어, 영어, 러시아어 실력자였다. 그는 평화클럽 설명회에서 대한제국의 비통한 실정을 호소하는 《대한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제목의 프랑스어 강연을 했고, 이외에 역시 스테드의 알선으로 미국에서 한국 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윤용구와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 박사가 영어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지적하는 강연을 했다. 이들의 연설 내용은 세계 각국 언론에 보도되어 주목을 끌었으나 대한제국의 처지를 불쌍히 여길 뿐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이미 제국주의적 질서가 횡행하는 상황에서 강자의 발언만이 세계를 리드해 나가고 있었다. 도덕과 윤리가 있을 리가 없었고 강자의 힘이 곧 법이요, 새로운 질서가 되고 있었다. 을사늑약 당시 주한영국공사와 미국공사는 일본에 축전을 띄우고 있었다. 아쉽게도 광무제는 이런 세계질서의 흐름을 놓치고 있었다.

퇴위退位, 망국亡國, 붕어崩御, 그리고 3·1 대한 광복전쟁


광무제의 퇴위
헤이그 특사 사실은 곧장 이토의 귀에 들어갔다. 이토는 본국의 통지를 받은 후 1907년 7월 3일 광무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음흉한 방법으로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려는 것은 차라리 일본에 대해 당당히 선전포고를 하는 것만 못하다”며 일갈하였고, 농상공부 대신 송병준宋秉畯은 황제에게 “동경에 가서 사죄를 하든가, 대한문 앞에서 하세가와 사령관 앞에 엎드려 예를 취하든가 어느 한 가지를 택하고 그렇지 않으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라”고 힐문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완용과 송병준은 앞장서서 광무제의 양위를 추진하였다. 특히 송병준은 수백 명의 일진회원을 동원하여 궁궐을 에워싸는 등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압박하였다.

죽어도 양위를 할 수 없다고 버티던 광무제는 일제의 압박과 친일 부역배들의 회유 속에서 결국 순종純宗 융희제隆熙帝에게 양위를 하게 되었다.
(주3)
. 1907년 7월 19일, 즉위한 지 44년 만에 타의로 권좌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광무제의 주변에는 믿을 만한 인물이 아무도 없었다. 당시 하세가와長谷川 대장은 지금 남산 1호 터널 자리에 위치해 있던 왜성문 위에 포진을 치고 한국인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이후 서울에 있던 시위대와 지방의 8개 진위대 총 9,000여 병력을 해산시켰다. 8월 1일의 일이다. 군대 해산에 격분한 병정들은 분연히 떨치고 일어섰고, 이후 이어지는 의병투쟁, 그리고 국권 피탈 이후에는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전쟁을 벌이게 된다.

대한제국의 종말
실질적으로 나라가 망한 상태가 되었다. 이런 비분강개하는 분위기 속에서, 개인의 이익을 탐해 나라를 팔아먹은 이들이 들끓었다는 점은 슬픈 일이다. 운명의 경술년 1910년 8월 22일 마지막 어전 회의가 열렸다. 일본군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순종 융희제는 이완용에게 한일 강제병탄조약韓日强制倂呑條約의 전권을 맡기는 위임장을 내어 주었다. 하지만 순종 융희제 역시 침묵시위를 벌였고, 조약에 대해서 비준하지 않았다. 일본은 병자수호조약 이후 계속해서 한국을 병탄하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를 하였고, 대중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병탄’이란 용어 대신, ‘합방’이나 ‘합병’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정도로 신중을 기하였다. 이에 비해 우리는 그들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가.

나라는 망했다. 망국의 황제는 조선의 이태왕李太王이라는 이름으로 9년을 더 살아 있었다. 이 시기에 덕수궁에서 생활하면서 고명딸 덕혜옹주德惠翁主의 재롱으로 망국의 시름을 달랬을 것이다. 아니면 아버지 대원군의 심정을 이해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식민지 조선에서 고종의 일은 매우 단조로웠다. 고종은 보통 새벽 3시쯤 잠자리에 들어 일곱 시간을 자고 오전 10시 전후에 일어났다.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옷을 입은 뒤, 차를 마시고 식사를 했다. 간혹 찾아오는 방문객을 맞아 환담하거나 제사를 올리는 일이 전부였다. 밤에는 산책을 하거나 궁녀들을 찾아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 모든 상황은 창덕궁에 있는 순종 융희제에게 통보되었다. 효성스러운 순종 융희제는 비록 꼭두각시 황제로 있었지만, 부친의 수라 안부와 문안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나라는 망했지만 조선 백성들에게 고종 광무제는 여전히 황제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래서 일제는 형식적으로는 덕수궁 이태왕으로 예우했지만 그 권위와 상징성을 하나하나 제거하기 시작했다. 대한제국의 정궁으로 크게 확장된 덕수궁을 온갖 핑계로 훼손해 나갔다. 정문인 대한문 북쪽 포덕문布德門 구역에는 대한제국 원수부元帥府와 궁내부宮內府가 있었다. 원수부는 광무제의 군사대권을, 궁내부는 황제권을 상징했다. 이를 조선총독부는 1912년 태평로를 개설한다는 명분으로 도로로 만들어 버렸다. 이후 역대 국왕의 어진들을 창덕궁昌德宮으로 옮겨가면서 본래 어진을 모셨던 선원전璿源殿을 해체해 버렸다. 그리고 덕혜옹주까지도 일제의 마수에 걸려 비극적 생을 살아야 했다.

고종의 독살설
1919년 기미년 1월 21일 묘시 고종 광무제가 덕수궁德壽宮 함녕전咸寧殿에서 68세로 붕어하였다. 평소 건강하였고, 특별한 지병도 없었다. 이를 놓고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가 사인이라는 자연사설과 자살설, 그날 한약이나 식혜, 또는 커피 등을 마신 뒤 음료에 들어 있던 독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 등이 나돌았다. 아직까지 고종의 사망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독살설이 당대에나 오늘날에도 세인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고종 독살설의 근거로는 평소 건강하던 황제가 식혜를 마신 지 30분도 안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 죽었고,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으며, 민영달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안을 닦아내다가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하며, 붕어 직후 2명의 궁녀가 의문사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윤치호 일기 1920년 10월 13일)

당시 고종의 일곱째 아들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과 일본 왕족 나시모토 노미야梨本宮의 장녀 나시모토 마사코李方子의 결혼이 1월 25일로 잡혀 있었는데, 고종은 이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겨 일본은 난감한 처지였다고 한다. 그 밖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강화회의 평화 분위기를 타고 고종이 헤이그 특사와 같은 일을 벌일 것을 일제는 두려워했고, 의병과 독립전쟁의 정신적 구심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을 염려했다고 한다.
(주4)


고종 광무제의 국상이 발표되고, 인산일因山日(국장일國葬日)은 1919년 3월 3일이었다. 바로 이때 일제의 무단강압 통치에 신음하던 한민족은 강력한 항일독립전쟁 의지를 보여주었다. 바로 동경의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2·8 대한광복선언,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중심이 되어 모든 대한인이 함께 일어난 기미년 3·1 대한광복운동이었다. 이는 국내외 대일對日 대한광복전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자주독립의 열망이 모여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4월 13일 상해에서 수립되었다.

이제 국호는 대한제국이라는 황제의 나라에서 국민이 국가의 주인인 나라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전환되었고, 환국, 배달, 단군조선, 북부여로 이어지는 우리 한민족의 국통맥은 조선, 대한제국에서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면면히 이어져 오게 된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대한제국의 주권과 영토를 되찾은광복을 맞이하였고, 1948년 8월 15일 자주독립적인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고종 시대의 다층적 평가
고종 광무제가 재위하던 반세기가 넘는 긴 세월은 파란만장한 우리 근대사였고, 그것은 그대로 그의 일생을 뒤흔들었다. 망국의 황제로 또는 개혁 개명군주로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이후 일제 강점기를 통해서 가장 많은 왜곡과 평가가 엇갈리기도 한 인물이 고종이었다.

고종을 만나본 서양인들은 대체적으로 호의적인 평을 하고 있다. 반면에 즉위 초기에는 대원군의 섭정에 의해, 친정 이후에는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에 의해 국정이 좌지우지되는 것을 막지 못한 점 등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또한 윤치호는 고종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매력적이지만 공인으로서는 신망을 얻지 못한 점에서 영국의 찰스 1세와 비슷하다”고 평하면서 효를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자신의 부모 임종은 커녕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며 패륜을 저지른 왕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또한 매천 황현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국고를 탕진했다는 점과 매관매직을 성행하게 했다는 점을 비판하였다.
(주5)
또 다른 비판은 을사늑약과 경술국치가 단행되었는데도 적극적인 저항(자결 같은)을 하지 않고 망국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으며, 일제강점 시절 일본의 황적에 편입되는 것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일본으로부터 이태왕李太王이라는 직책과 메이지 천황이 주는 은사금까지 수령한 점이 국가지도자로서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고종 광무제는 성리학에 기반을 둔 유교적인 이상사회를 꿈꾼 군주는 아니었으나, 통치 규범과 윤리는 유교의 정신적 가치에 의존하면서 서양문명과 절충을 꾀해 나간 군주였다. 동도東道와 서기西器의 이중적 가치가 혼란스럽게 충돌하던 시기, 유교에 기반을 둔 절대군주의 모습과 서기를 수용하는 개명군주로서의 모습을 이중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에 그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

그동안 우리가 고종 광무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양 극단만 존재했었다. 대단한 개명군주이거나 무능하고 실패한 군주라는 시각 말이다. 대한제국의 광무개혁도, 개화정책도 그 성과가 있느냐 없느냐의 잣대로만 보려 했고, 결국 망국의 군주라는 결과론적 시각에 경도되어 그 동기와 과정에는 관심을 두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이제는 고종 광무제가 다스렸던 44년의 역사를 좀 더 다양하고 총체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1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를 둘러싼 외부적 환경은 그 틀이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 역사를 반추해 볼 때 외세의 틈바구니에서 황제는 대신을, 대신들은 황제를 신뢰하지 못하는 지배층의 적전敵前 분열의 결과가 어떤지 우리는 잘 알고 있기에, 이 시대를 좀 더 깊고 넓게 보는 일은 앞으로 우리가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지에 대한 새삼스러운 고민의 계기가 되리라 본다.


고종의 정치적 동반자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중전(閔中殿)은 각처의 사찰에 빠짐없이 기도하였으나 오직 금산사에는 들지 못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도전 2편 66장 8절)


명성황후 참살사건
1895년 음력 8월 20일 (10월 8일) 오전 8시.

조선 한성부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 인근 녹원鹿園 숲에 한 줄기 검붉은 불기운이 솟아올랐다. 일본 정부가 보낸 흉도에 의해 살해당한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의 유해가 홑이불에 싸여 불태워지고 있었다. 흉도들은 석유를 끼얹고 장작더미를 쌓아 불을 질렀다. 날이 밝은 뒤 궁궐을 순시하던 훈련대장 우범선禹範善은 타다 남은 유골을 우연히 발견하여 연못 향원정에 넣으려고 했으나, 훈련대 참위 윤석우尹錫禹가 혹시 황후의 시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를 수습하여 멀리 떨어진 오운각五雲閣 서봉西峰 밑에 매장했다(뒷날 친일 내각은 윤석우를 비롯한 군부 협판 이주회, 일본어 통역관 박선朴銑 등을 무고하게 반역죄 또는 불경죄로 사형에 처했다). 이때 궁내관 정만조가 이 광경을 목격하여 잘 기억해둔 덕분에 훗날 명성황후의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고종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여걸 명성황후는 45세 중년의 절정기에 일본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당하는 참변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낭인浪人으로 위장한 일본군은 남의 나라 국모를 무참하게 죽이는 일에 가담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은커녕 국가를 위해 충성하는 자부심에 가득 차 있었다.

그날 오전 9시 20분, 주한 일본 공사관 수비대 소속 니이로新納 해군 소좌는 본국(일본제국) 대본영 육군참모부에 전문 한 장을 보냈다. ‘극비極秘’라는 붉은 낙인이 찍힌 이 전문에는 ‘국왕무사 왕비살해國王無事 王妃殺害’라는 문구가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그것은 일본 정부의 공식 라인을 통해 ‘여우사냥’의 성공을 알린 보고서였다. 이런 천인공노하고 역사상 미증유의 흉악한 사건은 현장을 목격한 러시아인 건축기사 사바틴Sabatin과 궁궐 경비를 맡은 시위대 교관인 미국인 다이Dye 장군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포착되었고 조선 주재 외교관들을 통해 일본정부의 야만적인 행위가 세계에 알려졌다.

역사는 이날의 만행을 명성황후 암살사건明成皇后暗殺事件 혹은 명성황후 참살사건明成皇后慘殺事件이라고도 부르며, 명성황후 시해참변明成皇后弑害慘變 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明成皇后弑害事件
(주6)
이라고도 한다. 당시에는 을미년의 변(乙未之變) 또는 을미년 팔월의 변(乙未八月之變)이라고 불렀으며 일본의 암호명은 ‘여우사냥’이었다. 그동안 일본은 조선의 분쟁으로 일어난 일본 낭인들이 개입한 사건이라고 주장했지만, 2005년 일본영사 우치다 사다쓰지가 을미사변 사건 두 달 뒤에 작성한 일본 천황이 결재한 보고서가 공개되어, 이 사건은 일본 정부의 조직적인 계획에 의해 일어난 일임을 알 수 있다.

건청궁의 비상사태
때는 1894년 갑오동학혁명 당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청나라와 일전을 준비하였고, 마침내 청일전쟁 승리로 조선을 독식하려고 했다. 하지만 1895년 3월 이후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함께 개입한 삼국간섭의 결과, 일본이 청일전쟁으로 차지한 요동반도를 다시 돌려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의 국제적 지위는 실추되었고, 조선에서는 일본보다 더 강한 나라 러시아에 새로운 기대를 가져보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 중심에 명성황후가 있었다. 명성황후를 비롯한 처족인 민씨 세력은 고종의 집권기 전全 시기에 걸쳐 단단한 집권기반으로 고종이 믿고 의지할 세력이었다. 바로 이 중심에 명성황후가 있었고, 일본의 대 조선정책의 걸림돌도 명성황후였다. 그래서 고종은 자신과 왕비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나름대로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가장 안전한 곳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바로 경복궁 후원에 있는 건청궁乾淸宮이었다. 건청궁에는 장안당長安堂과 곤녕합坤寧閤이 있었는데, 고종은 장안당에서 명성황후는 곤녕합에서 거처함으로써 이곳에서 ‘안녕安寧’하기를 기원했다. 이 지역은 경복궁에서 가장 안녕한 지역이었다. 바로 백악산과 연결되는 산기슭일뿐더러 북쪽 궁성 너머로도 궁궐 후원이 연속되어 외부 공격이 용이치 않았고 비상시 탈출하기에도 용이했다.

또한 궁궐 경비와 관련하여 미국인과 러시아인이 궁궐 내에서 활동하도록 하였는데, 500명 정도 되는 궁중 시위대의 훈련과 지휘를 맡은 미국인 다이(William McEntyre Dye, 茶伊) 장군과 러시아인 사바틴(Середин-Cабатин, 士巴津, Sabatin)이 그들이었다. 다이는 미국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남북전쟁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다. 사바틴은 독립문을 설계한 건축가이며 1894년 이래 다이 장군을 보좌해 궁중 시위대를 훈련하는 임무도 맡았다. 다이의 숙소와 시위대 사령실은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가까이에 있었다. 이는 고종 부부의 거처인 건청궁을 호위하기 위해서였다. 외부 공격을 대비해서 춘생문이나 추성문 쪽은 1차 방어선, 신무문은 2차 방어선, 최후로 다이 장군과 사바틴이 지휘하는 시위대가 최후 보루 역할을 하게 했다.

하지만 이런 준비는 을미년에는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치밀한 일본의 공작으로 시위대가 사용할 총과 탄약이 사라졌고(1894년 갑오개혁 때 일본군이 침입해 몰수함), 친일파 병사들로 시위대를 교체했다. 일본군은 허수아비로 동원한 훈련대 800여 명과 함께 경복궁을 범궐한 것이다. 이에 앞서 임오군란 당시 왕비를 피신시켰던 홍계훈洪啓薰이 저지하려 했지만, 일본군 고이토 대위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와 함께 아다치 겐조安達謙藏(한성신보 사장)가 지휘하는 일본 낭인패들은 건청궁으로 내달렸다. 이를 사바틴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건청궁으로 들어가는 두 문은 일본군이 보초를 선 채 차단하고 있었고, 마당 한가운데는 대략 40여 명의 조선군 훈련대가 무기를 땅에 내려놓고 정렬해 있었다. 그들 앞뒤에는 일본 장교들이 제복 차림으로 그들을 지키고 있었다. 또한 마당에는 사복 차림의 일본인들이 현장을 지휘하고 있었다. 왕비의 거처가 있는 옥호루玉壺樓는 계단이 있었다. 마루에는 스물대여섯 명의 양복 입은 일본인들이 일본 칼을 든 채 점거하고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이 방의 안팎을 뛰어다니며 여인들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나와 마루 아래로 내던져 떨어뜨리고 발로 걷어찼다.”

이를 목격한 순간 달려가 구하려 했지만 일본인들에게 붙들려 묶인 채 심한 폭행을 당했다고 했다. 다이 장군 역시 부상당한 두 명의 조선군 시위대와 함께 감금되었다. 이에 영국 영사 힐리어는 당시 건청궁에 있던 40여 명의 훈련대는 실제 조선인이 아니고 훈련대 복장으로 위장한 일본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1895년 10월 31일자 《노스 차이나 헤럴드North China Herald》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사실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건청궁 앞뒷문을 통해 일본군의 엄호 아래 침입한 민간 복장의 일본인 무리와 조선군 복장을 한 군인들이 경비를 섰다. 궁내에 있던 이경직李耕稙이 왕비에게 급보를 알렸다. 왕비와 궁녀들이 잠자리에서 뛰쳐나오는 순간 흉도들이 왕비 앞에 두 팔을 벌리고 선 이경직을 찔렀다. 왕비는 뜰 아래로 뛰어나갔지만 붙잡혀 넘어뜨려졌고 살해범은 수차례 왕비의 가슴을 짓밟은 뒤에 칼로 거듭 왕비를 찔렀다. 놈들은 실수 없이 해치우기 위해 왕비와 용모가 비슷한 여러 궁녀들도 살해했다. 그때 여시의女侍醫가 앞으로 나와 손수건으로 왕비의 얼굴을 가렸다.”

또한 이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만행에 대해서 <에조 보고서>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하고 있다.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를 하였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

內部に 入み王妃を引き出し二三個處刃傷を及し且つ裸體とし局部檢査(可笑又可怒)を爲し最後に油を注ぎ燒失せる茅 誠に之を筆にするに忍びざるなり 其他宮內大臣は頗る慘酷なる方法を以て殺害したりと云う

명성황후 살해범인들
흉도 가운데 황후를 죽인 사람으로 자주 지목되는 사람은 데라자키 다이키치寺崎泰吉이다. 그밖에도 나카무라 다테오中村楯雄, 후지카스藤勝顯, 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 등의 낭인과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 소위, 마키 특무조장 등의 일본 군인도 난입하여 칼을 휘둘렀고, 서로 짠 것처럼 엇갈린 말로 사건을 호도하였다. 이후 국제적인 비난 속에 이루어진 수사는 형식적이었고, 명성황후 모살에 관여된 이들 48명은 전원 기소되어 히로시마 법정에 세워지기는 한다. 하지만 전원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석방되었고, 일약 영웅으로 추앙받고 환대를 받았다.

7인의 초헌법기구 명성황후 살해 사건은 철저하게 일본 정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육군대장과 당시 조선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자타 공인의 거물 정치인이며 조슈번 출신으로 이토의 절친한 친구이자 메이지 천황과도 친근한 관계를 유지한 인물이다)를 위시한 7인의 초헌법적인 기관이 있었다. 이들은 일본 헌법에는 없는 일본 최고 원로 정책결정기구였다. 이 원로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외상-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미우라 고로三浦梧樓-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와 스기무라-일본 첩부부대 겐요사玄洋社와 <한성신보>를 중심으로 한 일본 낭인패들로 이어진 명령체계 아래 이런 참변이 이루어졌다.

조선 공사 미우라 고로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조슈長州번 출신 육군 예비역 중장으로 전문 외교관이 아니었다. 그는 1895년 7월 13일 조선 공사로 부임했다. 부임하기 직전 하버드와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인기 정치 소설가로 후에는 중의원 의원으로 일곱 번이나 당선된 시바 시로柴四郎를 참모로 기용했고, 시바는 일본 우익단체 천우협의 다케다와 첩보조직 겐요사의 스키나리를 끌어들였다. 미우라가 조선에 부임해온 뒤 전임 이노우에는 17일간이나 공사관에서 함께 보냈다. 그러다 이노우에가 귀국한 지 20일 만에 미우라는 명성황후를 살해한 것이다. 이건 단순히 과격한 전직 장성 출신의 공사가 홀로 저지를 수 있는 만행이 아니었다.

미우라는 당시 <한성신보사> 사장 아다치 겐조安達謙藏를 공사관에 초대, 거금 6천 원을 건네며 전위대 조직을 부탁하면서,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의 경비담당 경찰들까지 포함시켰다. 미우라는 이후 일본 추밀원 고문으로 추대되어 만년까지 명예로운 지위를 누렸다. 당시 서울에는 일본 구마모토 현 출신 낭인패 수십여 명이 <한성신보사>를 중심으로 뭉쳐 있었다. <한성신보사>는 일본인 아다치가 발간하고 있는 조선 내 일본 소식지로 일본의 이익을 대변했다. 아다치는 일본 낭인패 우두머리로 후에 일본 체신대신, 내부대신 등이 된다. 편집장으로 있던 고바야카와는 후에 일본에서 신문사 사장이 되었고, 기자였던 기구치는 저술가로 이름을 날렸다. 일본공사 서기관 스기무라는 외무성 통상국장을 거쳐 브라질 공사를 역임하였고, 영사관보 호리구치 구마이치는 동경대 법학부 출신으로 후에 브라질과 루마니아 전권공사로 활약하고, 당시 육군 중좌였던 구스노세는 육군대신까지 승진하는 등 명성황후 살해와 관련된 이들은 3류 낭인이 아니라 고학력 지식인 출신들이었다.

일본군의 황실만행 일본군은 고종과 왕세자까지 협박 모독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그들은 왕세자의 상투를 잡아챘으며 귀 아래 목과 턱 사이를 칼등으로 내려쳐 잠시 의식을 잃게까지 했다. 고종의 어깨를 잡아끌어 의관을 찢기도 하면서 일본도로 협박을 가하였다. 참으로 왕조의 불행이요, 국가적 불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이날 아침 일본 공사 미우라는 서기관 스기무라와 통역관과 함께 궁으로 들어왔고, 이 자리에 흥선대원군도 있었다. 미국 공사 알렌Allen과 러시아 공사 웨베르Waeber도 소식을 듣고 궁으로 오는 도중 살기 띤 일본 흉도 30여 명을 목격했다고 한다. 미우라는 이 사건이 대원군의 왕후에 대한 불만과 조선 훈련대와 시위대의 충돌 등으로 빚어졌다고 호도하였다. 또한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공식적으로 일본 정부와 관계없이 미우라가 독단적으로 계획 실행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당시 상황과 조건으로 볼 때는 일본 정부의 훈령을 충실히 이행한 것이었다. 훗날 안중근安重根 장군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때 첫 번째 죄가 조선 왕비를 시해한 죄를 물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의 주모자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이어 왕후 폐위 조칙을 내리게 하고 김홍집의 친일 내각을 들어서게 했다. 이들은 명성황후 살해 사건에서 방조 또는 묵인한 이들이었다.

고종의 회한 울분과 비탄에 빠진 고종은 기회를 엿보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한 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위에 올랐다. 이와 함께 명성황후의 지위도 올라가게 되었다. 고종은 정치적 곤경과 위기를 함께 겪으며 황후와 동고동락한 사이였다. 친정을 시작한 이후 역사의 고비마다 황후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정치적 미숙함으로 인한 실패와 실정의 화살이 황후에게 돌아간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렇게 의지하고 사랑했던 황후가 비명에 간 뒤 장례조차 제대로 치러주지 못했다. 고종은 황후의 안위를 적극 보호해줘야 함에도 그러지 못한 자책은 사랑이 컸던 만큼 회한으로 작용해, 자신이 황후를 저버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면서 ‘천추의 한’으로 여겼다. 황후에 대한 사랑과 회한의 감정으로 고종은 무덤 속에 묻는 관의 명정銘旌까지 친히 썼다.

1897년 11월 22일 명성황후는 청량리 홍릉에 안장되었다가 이후 광무제 붕어 이후 남양주 금곡 현 자리로 천장되었다. 명성황후를 그리워한 광무제는 1919년 붕어할 때까지 황후를 새로 맞이하지 않았다.

명성황후의 가계
고종의 비妃이면서 정치적인 동반자였던 명성황후 민씨는 철종 2년인 1851년 신해년 음력 9월 25일 경기도 여주시 근동면近東面 섬락리蟾樂里(현재의 여주시 능현동 250-1)에서 민치록閔致祿(1799~1858)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민치록은 숙종 비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5대손이다. 문음門蔭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사도시 첨정僉正(종4품)직을 끝으로 황후 9세때 사망한다. 어머니는 좌찬성 이규년의 딸인 한산 이씨다. 형조와 병조 판서를 역임한 민승호閔升鎬(1830~1874)가 입양되어 가계를 이었으나, 대원군이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폭약상자를 열다가 생모 이씨와 함께 폭사하였다. 이는 명성황후와 대원군 사이가 더 나빠지는 계기가 되었다. 어릴 때 이름은 자영紫英(玆暎), 정호貞鎬 등으로 알려져 있으나 명확한 사료 근거는 없다. 다만 “태어날 때 자줏빛이 비치면서 이상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 찼다”는 고종이 쓴 <어제행록>의 내용을 근거로 하거나, 동렬 사촌들의 호鎬자 항렬을 따라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왕비 간택 어릴 때 부친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본래 명석하고 총명하며 기억력이 비상하였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특히 치란과 국가의 전고典故에 밝았다고 한다. 또한 효성과 덕성이 있어서 고종의 기분이 언짢은 것 같으면 상의할 일이 있어도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할 정도로 지혜를 지닌 여성이었다.

이후 부친이 죽은 뒤 감고당感古堂(숙종의 비인 인현왕후의 생가, 본래는 인현왕후의 부친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묘지를 지키기 위해 지은 묘막집으로 이후 후손들이 관리하였다)으로 옮겨 살았다. 의지할 바가 전혀 없었던 점이 당시 대원군의 마음에 들어 왕비로 간택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입궁할 무렵, 15세의 남편 고종은 이미 후궁 귀인 이 씨를 총애하고 있었다. 가례를 올린 첫날에도 고종은 왕비의 처소가 아닌 영보당 이 씨의 처소에 들었다. 1868년 영보당이 완화군 선墡을 낳자 대원군과 고종의 총애는 더했다. 황후는 순종을 낳기 전에 1남 1녀를 낳았으나 모두 일찍 사망하였고,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대원군의 지지를 업은 영보당 이씨와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다.

이후 안전과 세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민승호 등 일가친척,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실각시킨 풍양 조씨의 조영하, 안동 김씨의 김병기, 대원군의 형인 흥인군 이최응, 서원 철폐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유림의 거두 최익현 등과 제휴하여 고종의 친정을 유도하였다. 최익현은 1873년 10월, 임금은 고종이고 이미 성년에 달했는데도 대원군이 섭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원군 계열의 탄핵을 받고 해임당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최익현의 뒤를 지원하였고, 최익현은 당상관인 정3품 통정대부 돈령부 도정으로 올랐으며 최익현을 제거하려는 대원군 계열의 음모를 막아내기도 했다. 고종과의 논의 끝에 1873년 11월엔 운현궁에서 궁궐로 출입하는 대원군의 전용 문을 폐쇄하였다. 이로써 대원군의 11년간의 간섭은 종결되었다. 대원군은 양주 시둔면 곧은골直谷로 물러났으나, 은퇴 이후에도 대원군은 끊임없이 복귀를 꿈꾸었고 명성황후 및 민씨 일족과 수시로 갈등하였다.

왕세자 책봉 1874년 2월에는 둘째 아들 이척(李坧, 훗날의 순종)을 낳았으며, 이듬해 2월 이척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왕세자는 태어날 때부터 건강하질 못했다. 어려서 두창을 앓았고, 까닭 없이 자주 신열이 올랐다. 이후 2명의 왕비를 두었으나 후사를 보지 못해 남성으로서 생식기능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장하면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과 일본 흉도에 의해 어머니가 비명에 쓰러지는 것을 직접 목격하면서 그때마다 받은 정신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한제국 시기 김홍륙金鴻陸의 사주로 황제 요리사인 김종화가 다량의 아편이 들어 있는 커피를 올렸는데 이를 마시고서 치아가 모두 망실되고 며칠간 혈변을 누는 등 심한 몸살을 앓았다고도 한다. 이런 아들을 바라보는 황후는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왕위의 대통을 이을 왕세자가 아닌가? 이를 위해서 무당을 수소문하여 궁궐로 불러들이기도 하고, 절에 바치는 시주도 점점 늘려갔다.

여성의 정치참여 조선은 초기부터 국사당國師堂(본래 남산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인왕산으로 옮겨가 있다)이라는 공식 굿당과 성수청星宿廳이라고 하는 관청을 두었고, 국가와 왕족들의 안녕을 기원하여 왔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당시 기독교 신앙을 하던 서양인들이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들은 조선의 전통적인 무속신앙과 불교를 미신으로 여기고 있었고, 여성의 정치참여에 대해 부정적인 당시 유학자들 역시 무속을 사교邪敎라 여기는 가운데 이런 신앙에 빠진 명성황후에 대해서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든 도가 지나치면 비난을 받는 법이다. 또한 권력의 최상위에 있을수록 언행을 삼가야 하는데, 황후와 관련된 소문이 과장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이 부분 때문에 일반 백성들이 등을 돌리는 지경까지 되었다면 이는 어머니로서의 사랑과 모성이 잘못 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황후의 친족인 민씨들의 부정부패와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측면 등은 여지없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
명성황후에 대한 주변의 평판은 어떠했을까. 당대의 수구적인 위정척사파나 친일적인 급진개화파 그리고 일본 측까지 모두가 좋지 않은 평을 하고 있었다. 이는 명성황후의 정책 노선이 그만큼 보수와 진보, 외세와의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었다는 반증이다. 일본을 제외한 외국인들은 대체적으로 좋게 평가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이해관계에 예민하지 않은 민간인들의 기록이 그러하다. 그들은 다 같이 명성황후가 영리한 판단력과 뛰어난 외교력을 지닌 교양 있는 여성이라고 전하고 있다.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이기도 한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은 저서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에서 명성황후와 흥선 대원군의 정치적 대립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명성황후를 “호리호리한 몸매에 까만 머리칼과 흰 피부가 인상적이었고, 날카롭게 재기에 번쩍이는 눈은 지성적이었으며 미소를 머금은 창백한 얼굴에는 애수가 깃들인 듯했다. 대화 내용에 흥미를 가지게 되면 눈부신 지성미로 얼굴이 빛나는 지식인이자 우아한 자태를 가진 귀부인”으로 묘사하였다. 또한 명성황후 어의였던 릴리어스 언더우드Lillias H. Underwood 여사의 기록에서는 “창백한 얼굴에 날카로운 용모였으며 두 눈에서는 위력과 지성과 개성을 읽을 수 있었고 순박하면서도 뛰어난 기지와 매력을 지닌 분으로 서양 기준을 놓고 볼 때도 완벽한 귀부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미국 공사관 서기를 역임한 윌리엄 프랭클린 샌드William Franklin Sands는 “명성황후는 뛰어난 학문과 지성적인 강한 개성과 굽힐 줄 모르는 의지를 지녔으며 시대를 초월한 정치가이자 외교가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쓴 분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명성황후 사후 고종 광무제는 고립무원 속에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근대화를 위한 마지막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만약 명성황후가 살아서 그 옆을 지켜주고 함께하였다면 대한제국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진실로 명성황후의 죽음은 조선 멸망의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에조 보고서

‘에조英臟 보고서’는 명성황후 참살에 가담한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라는 일본인이 작성해 일본 정부에 보낸 편지 형식의 보고서이다. 에조는 당시 20대로 조선정부 내부 고문관이었다. 1988년 『민비암살(閔妃暗殺)』을 발간한 일본의 전기작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 여사도 에조를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으로 서술하여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목격자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었다.
이시즈카 에조는 1895년 10월 9일 전직 상사인 법제국장관 스에마쓰 가네즈미末松謙澄에게 별도로 장문의 비밀보고서를 보냈다. 이는 명성황후 모살 사건의 현장 총지휘자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조선주재 일본공사의 재가를 받지 않았다. 이 보고서는 현재 〈일본국립국회도서관日本國立國會圖書館 헌정자료실憲政資料室 ‘헌정사편찬회문서憲政史編纂會文書’>에 보관 중으로 (1)발단 (2)명의 (3)모의자 (4)실행자 (5)외국사신 (6)영향 등의 소제목이 붙어 있는 6개의 장에 목차와 서문을 포함해 모두 12쪽 분량으로 철저하게 숨겨져 있었다.

이 보고서는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健太郞(1905∼1977)가 1964년 《코리아 평론》 10월호에 ‘민비사건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으며, 1966년 2월 『일한병합소사日韓倂合小史』를 발간하면서 “1895년 10월 7일 밤부터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걸쳐서, 대원군이 훈련대에게 호위되어 있는 동안 일본 수비대와 대륙 낭인의 무리가 칼을 빼 들고 경복궁으로 밀고 들어가서 민비를 참살하고, 그 사체를 능욕한 뒤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라고 기술하여 최초로 명성황후 ‘사체 능욕’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에 대해 작가 김진명 씨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모든 한국인들은 명성황후가 난자당해 죽은 걸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다만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접한 극소수의 일본인과 한국인 학자들만이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뒤 시간屍姦된 걸로 주장하고 있다. 나조차도 그런 기존의 해석에 따라 『황태자비 납치사건』에서 시간으로 묘사했다.
명성황후 최후의 장면을 기록한 유일한 문서인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명성황후가 시해 직전 즉 살아 있는 동안 능욕당하고 불태워지면서 죽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명성황후는 시간屍姦을 당한 것이 아니라 강간强姦을 당한 것이다. 보고서 어디에도 살해한 뒤 능욕을 했다는 논리의 근거가 없다. 이 주장은 역사학자들이 야마베 겐타로의 해석을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따른 것에 불과하다.
겐타로는 1966년 보고서 전문을 소개하지 않은 채 이 부분만 따로 떼어내 소개한 뒤 ‘사체를 능욕했다’고 해석해 버렸고, 이것이 역사학자들 사이에 그대로 정설로 통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사람을 죽였을 때는 반드시 살해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뒤에 나오는 ‘궁내부 대신 살해’라는 대목이 결정적인 방증이다. 일부 증언자들의 주장은 그들이 최후의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아니다. 나중에 궁녀 등에게 전해들은 얘기를 다시 전달한 것에 불과하다. 더욱이 〈에조 보고서〉 이외의 어떤 기록에도 능욕 부분은 나오지 않는다.“
(이 부분은 신문기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77403 :2002년 6월 4일 최향기 기자 기사와 김진명 작가 인터뷰 등 참조)


주1.
선전포고 이전에 적의 주력부대를 공격하는 것은 일본의 전쟁 패턴이다. 청일전쟁 때도, 중일전쟁 때도 미국의 진주만 습격 때도 늘 이렇게 비겁하게 먼저 치면서 전쟁을 했다.

주2.
중명전의 명자가 특이하게 눈 목目와 달 월月로 쓰여 있다. 밝을 명이라는 의미는 같고 눈을 크게 뜨고 밝게 정사를 살피라는 의미

주3.
이에 대해 당시 양위 현장에는 고종이나 순종 둘 다 나오지 않았고, 전통적으로 조선은 왕세자에게 정무를 처리하게 하는 대리청정 제도가 있었기에 고종과 순종은 그런 개념으로 받아들였다는 의견도 있다

주4.
이미 1918년 우당 이회영을 중심으로 해서 고종 망명계획이 있었고, 1919년에는 반일 독립 성향을 지닌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의 상해 망명 기도 사건이 있었다

주5.
이 점에 대해서 국고를 탕진했다는 다른 자료는 없고, 명성황후가 전국을 다니며 제사를 지낸 비용은 왕실 개인 재산인 내수사 비용이었다는 점에서 잘못된 비판을 하고 있다.

주6.
‘시해弑害’란 단어는 자식이 부모나 직계존속을, 백성이나 신하가 왕이나 왕비를 살해했다는 의미로 그들을 질책하기 위한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이 단어는 적절하지 못하다는 의견이 있다. 또한 이 단어를 쓰면 일본인들이 대원군과 훈련대를 동원하여 자신들의 행위를 희석시키려 한 의도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고도 한다. 정확한 호칭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겠다.

<참고문헌>
『증산도 도전』(대원출판, 2003)
『천지의 도 춘생추살』(안운산, 대원출판, 2007)
『증산도의 진리』(안경전, 상생출판, 2014)
『고종시대의 재조명』(이태진, 태학사, 2000)
『새롭게 읽는 명성황후 이야기』(유홍종, 현대문학, 2000)
『고종황제 역사 청문회』(이태진,김재호 외9인, 푸른역사, 2005)
『고종 44년의 비원』(장영숙, 너머북스, 2010)
『우리 궁궐의 비밀』(혜문, 작은숲출판사, 2014)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신명호, 위즈덤하우스,2014)
『매천야록』(황현지음, 허경진 옮김, 서해문집,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