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삶을 찾아 준 가정도장(조윤정, 조미숙)
[가가도장]
조윤정, 조미숙 성도
예향의 고장으로 알려진 빛고을 광주에는 인생의 아픈 굴곡에서 벗어나 진리를 통해 새 삶을 얻었다는, 그래서 참으로 행복한 신앙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자매 신앙인이 있다. 광주오치도장에서 신앙하는 조윤정, 조미숙 성도는 모습과 성격은 다르지만 상제님 신앙을 대하는 정성과 의지는 한결같이 닮아 피를 나눈 자매가 틀림없음을 말없이 웅변하고 있다. 평탄하지 않은 행로를 걸어오면서도 진리와 신앙의 의미를 늘 되새기며 각기 가족과 함께 건실하게 도방을 가꿔나가고 있는 두 성도의 이야기를 들어 본다.
4월의 두 번째 일요일 오후, 무척 오랜만에 광주光州를 방문했다. 한반도 남서부 호남지방의 중심부에 위치한 광주광역시는 이름 그대로 빛고을로 불리는 고장이다. 이곳이 풍류와 예향의 도시로도 알려져 있기는 하나 세월을 더듬어 보면 그처럼 밝은 흥취만 스며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여느 도시처럼 수많은 사건들이 명멸해 갔지만, 그 중에는 꽤 슬픈 역사의 흔적들이 묻어 있어 사람들에게 구석구석 아픈 여운을 남기고 있는 곳이 광주이기도 하다.
한식寒食도 4일이 지난 늦봄에 광주시 북구 오치동에 자리잡은 도방을 찾았을 때, 주택 인근의 학교 앞쪽에 핀 꽃들의 정경이 예사롭지가 않아서 도방에 모인 가족들을 불러내 기분 좋게 사진 촬영부터 하고서 취재를 시작하는 변칙을 감행했다. 이번 도방의 주인공은 광주오치도장에서 신앙을 하고 있는 조윤정, 조미숙 성도다. 두 사람은 친자매 간으로 언니인 조윤정 성도가 동생인 조미숙 성도를 도문으로 인도해 한 도장에서 도반으로 서로를 배려하며 신앙을 다져나가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가 관심을 끄는 이유는 각기 가정을 꾸려나가면서 겪은 많은 아픔과 고통들을 상제님 신앙을 통해 보란 듯이 승화시켜 삶의 역전을 이룬 심법과 생활의 면면들이 우리에게 감동과 발심을 불러일으키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두 자매가 둔 각자의 딸도 엄마 못지 않게 신앙을 충실히 잘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두 집안의 모녀가 똑같이 가정도장의 주축이자 뿌리 역할을 하고 있는 점도 특별한 사례로 주목해 볼 여지가 있는 것이다.
취재를 위해 들어선 조윤정 성도의 가정도장 모습은 단출하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이사를 한 지 오래 되지 않은 탓도 있지만 복잡한 치장과 구성을 선호하지 않는 조 성도의 성향이 드러난 것이기도 했다. 간명하면서도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하고, 드러난 모습보다 내면의 실익을 우선시하는 성격이 생활과 신앙에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거실에 마련된 천신단은 창문 옆에 자리를 잡아 늘 밝고 소통이 되는 위치였고, 어진과 진영 앞에 놓인 순백색의 청수그릇과 함께 가족들의 청수그릇과 도전 등이 그 옆에 정갈하게 모셔져 있다. 가족의 청수 그릇 중에는 조금은 투박하고 어색해 보이기도 하는 스테인리스 그릇이 있었는데, 이것은 신앙 초기에 처음 마련한 청수그릇이라 의미가 있고 애착이 가서 그대로 사용 중이라고 한다. 신단 옆쪽 벽에는 우주일년과 국통맥 도표가 걸려 있고, 방문 정면에도 천부경과 염표문이 부착되어 있다.
흰색 톤의 벽지에 원목 스타일의 바닥면이 깔끔하게 조화를 이루는 거실 공간에 조윤정 성도와 조미숙 성도, 조윤정 성도의 딸인 이승정 성도(대학생), 조미숙 성도의 딸인 정하영 성도(고등학생), 그리고 조윤정 성도의 도제인 정견 성도까지 함께 둘러 앉아서 그리운 시절의 추억부터 신앙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까지 담담한 그 사연들을 하나씩 들어 보았다.
조윤정 성도는 1999년(도기 129년) 겨울에 입도를 했다. 일반적인 경우처럼 진리를 접할 기회를 만나고 진리공부 과정을 단계적으로 거쳐 입도를 하게 된 게 아니라, 남편이 존경하는 지인을 통해 남편의 권유로 입도를 한 사례이다. 남편이 평소 존경하던 분이 증산도 신앙을 하고 있었고, 그분은 남편의 고향인 완도 지역의 증산도 도장 개창에 참여한 분이기도 했다. 지인으로부터 증산도 진리에 대해 여러 번 들어 이해하고 있었던 남편은 그분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소박한 마음으로 아내인 조 성도를 불러서 갑작스럽게 입도를 권유한 것이다. 조 성도는 당시 증산도 진리에는 무지했지만 사랑하고 믿는 남편이 자신에게 사이비 신앙을 권유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으로 입도를 하였고, 입도한 후에 신앙을 해나가면서 진리와 수행 공부를 하게 되었다. 남편인 이 성도는 증산도 진리를 먼저 알았고 사실상 신앙인이나 다름이 없었기에 아내에게 입도를 권했지만, 정작 자신은 지역사회에서 생업과 더불어 정치에 종사하는 정당인으로 살다 보니 여러 사정들이 얽혀서 입도를 하지 못한 채 반半신앙인으로 살다가, 아내인 조 성도가 2013년 12월에 올린 세 번째 시선조 천도식을 계기로 뒤늦게 정식 입도를 했다.
사실 사상이나 신념 같은 부류는 남이 시킨다고 덜컥 따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하물며 인생의 흐름을 좌우할 수 있는 신앙 문제는 더욱 그럴 것인데, 조 성도는 신앙 권유를 받을 당시에 남편을 굳게 신뢰했기 때문에 두말없이 입도를 결행했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 지금에 이르렀다. 사소한 문제 가지고도 빈번히 다툼을 벌이고 성격 차이라는 편리한 이유를 들어 쉽게 헤어지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버린 세상에서 배우자를 굳게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경지이고 무슨 배경을 갖고 있는 것일까?
남편인 이주열 성도와 조윤정 성도는 대학교 재학 시절 학생회 활동으로 만나 학생운동을 함께 한 소위 운동권 출신이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힘든 현실 상황들이 많았고 그때마다 도움을 주고 받으며 서로에게 힘이 되었던 두 사람은 마침내 1991년 부부의 연을 맺기에 이르렀다. 이 부부는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사회운동을 계속하고 싶은 생각에 남편의 고향인 완도로 내려와 어민회 활동을 하였고, 이후 큰아이가 태어나자 조 성도는 집에서 아이를 양육하면서 이 성도가 어민회 이후 생활협동조합 운동을 하는 것을 도우며 생활하였다. 일각에서는 운동권 출신에 대한 좋지 않은 시각이 없지는 않지만, 이전까지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던 조 성도는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을 하면서 겪은 집안 문제, 집회나 거리 등지에서 공권력과의 대치를 통한 육체적 정신적 갈등과 어려움들에 맞서 이겨낸 것이 신앙을 하면서 겪게 되는 여러 난관들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또한 외적 압박 속에서 조직의 명을 따르고 실천하고 지켜내는 체험들이 진리의 종통을 지키고 조직을 통한 도정혁신과 행법 우선의 도정활동을 이행하는 데에도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모든 만사가 저마다의 과정은 다르지만 쓰일 곳에 적정하게 쓰여 걸맞는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만 있다면 그 결과는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는 것이 세상 이치다. 조 성도의 지난 얘기를 괜한 선입관을 갖고 바라볼 필요가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조윤정 성도가 남편에 대해 가졌던 두터운 신뢰는 어려움을 함께 공유하고 극복하면서 하나씩 쌓여 온 사람 사이의 진실과 순수의 결정으로 이해하면 되고, 평범하지 않은 험로를 걸은 이력은 자랑이나 비난의 대상으로 다룰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과 의지를 자극해 인성을 바르고 단단하게 만드는 동력이라고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사람은 택국澤國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 태사부님 말씀이 불현듯 떠오른다.
조미숙 성도는 1996년 대학을 졸업하고 그 이듬해 결혼을 했다. 당시 결혼을 전후하여 여러 가지 심난한 일들이 많았다는 조 성도는 가정의 경제적 어려움이 겹치면서 영어 과외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힘든 삶을 이어가던 그 시기에 무척 소중한 인연으로 존경하고 있던 고교 시절의 은사님이 암 투병을 하다가 돌아가시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또 다른 충격으로 다가와 내면의 여러 스트레스와 분노 등으로 중첩이 되어 쌓여가는 심적 고통을 겪게 되었다. 뭔가 탈출구가 필요했던 그때에 고교 시절 인품이 있었던 영어 선생님과 연락이 되어 우연히 대화를 나누다가 그 선생님으로부터 ‘OO진리회’ 신앙을 권유받아 그 단체에 발을 딛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신앙으로 상제님은 알게 되었으나 그곳에 진리는 없었다. 답답하고 궁금한 점이 있어 물으면 신통한 답변 하나가 없었고 자꾸만 감추고 피하기만 하는 행태를 보였다. 얼핏 언니도 비슷한 뭔가를 신앙하고 있다는 생각이 떠올라 언니인 조윤정 성도에게 전화를 했다.
사실을 알게 된 조윤정 성도는 너무나 놀라 동생을 만나기 위해 눈이 너무도 많이 내리던 날에 완도도장 책임자와 함께 광주로 올라와 상무도장에서 동생을 만났다. 설명과 설득이 이어졌으나 조미숙 성도는 인간적으로 등을 돌릴 수 없다는 이유로 버티며 응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자매는 함께 밤을 보내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조미숙 성도는 언니를 거꾸로 포교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우선 대화를 시작한다는 뜻에서 ‘증산도가 뭐냐’는 원초적 질문을 던졌다. 조윤정 성도는 애써서 설명을 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태상종도사님의 진리 말씀을 중심으로 진리의 기본을 그대로 전하는 일에 집중했다. 그 내용들을 다 듣고 난 동생은 짧지만 진심이 담긴 응답을 했다. “증산도가 더 큰 진리네. 해 볼게.”
다음 날 초등학교 딸과 함께 입문을 한 조미숙 성도는 도중에 유산의 아픔도 겪으면서 충분히 도전을 읽을 기회를 갖게 되었고, 정성공부와 진리공부에 박차를 가한 결과 입도시험을 통과해 2006년 드디어 증산도 신앙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도장에서 청포포감으로 봉직을 하며 부지런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이렇듯 자매는 남편과 언니가 전하는 메시지의 의미를 수용했고 진심을 담은 가족의 말을 신뢰하면서 입도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리 여유있는 여건이 아니었던 생활 환경 속에서 두 사람이 신앙에 안착을 하고 가정도장을 건사하기까지에는 많은 어려움과 갈등이 따랐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이에 대해 조윤정 성도는 가슴 아픈 옛 이야기를 담담히 전해 주었다.
그런데, 돌연 집에서 지인 보증을 선 것이 그만 잘못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거친 후폭풍을 불러왔다. 이 일로 인해 2005년 초 운영하던 과일가게를 결국 문을 닫게 되었고, 이후 조 성도는 매번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가장 힘들고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정말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상제님께서 녹 떨어지면 죽는다고 하셨는데, 돈은 고사하고 당장 먹을 쌀도 없어 겨우 하루하루 연명해 나가는 고통이 매일 이어졌습니다..” 덤덤하게 당시를 회상하던 조 성도가 순간적으로 눈시울을 붉히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추스르려 애를 쓰는 모습을 지켜보자니 막막했었을 당시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했다.
“아이들의 끼니를 걱정할 때라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이 정말 고역이었습니다. 자식 딸린 어미라 생목숨을 끊기는 힘들고 매일 밤 잠들 때 ‘내일 아침에 제가 눈뜨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허 포정은 그런 지옥 같은 날에 매일 심방을 와서 진리 말씀을 전해 주고 도장에 나와 수행할 것을 권했다. 처음에는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도장에 나와 수행하라는 것도 귀찮아서 그만 하시라고 반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성은 조 성도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자각이 생겨났고, 스스로 살아야겠기에 매일 집에서 청수를 모시고 수행을 하기 시작했다. 살아내기 위해 유일한 끈으로 잡은 가정신단의 봉청수 수행이 도장으로 나가는 끈이 되었고 지옥의 삶에서 빠져 나오는 탈출구가 되었다. 그동안 너무 바빠 겨우 치성 참석에 급급했던 신앙이 매일 아침 아이들 학교 보내고 도장에 나와 수행을 하고, 저녁식사 후 아이들과 함께 도장에 와서 저녁수행을 하면서 정말로 숨을 쉴 수 있었고, 비로소 살아내는 삶이 아닌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 도장에서 아침 저녁 청수 모시며 수행을 하고, 집에 가서는 아이들 재워 놓고 청수 모시고 수행을 하면서 신앙의 기쁨도 알게 되었다. 또한 허 포정의 도전과 우주변화원리 교육을 통해 상제님 진리에 눈을 뜨며 맹목적 믿음이 아닌 성숙한 신앙을 하게 되었다.
조 성도는 이에 대해 깊은 감사의 말을 남겼다. “저는 정말 복 받은 사람입니다. 당시 허 포정님을 통해 상제님 신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광주오치도장으로 옮겨와서는 책임자이셨던 이 수호사님을 통해 신앙이 더 성숙되었으며, 이제는 전 수석포감님을 통해 행동으로 실천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제 신앙의 눈높이에 맞게 그때그때 도장책임자를 보내주신 태사부님 사부님께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이승정 성도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입도한 이후 초 중 고교를 거치며 치성에는 꼬박꼬박 나갔지만 활동은 꾸준히 하지 못했다고 한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어느 날 ‘네 스스로의 신앙을 하라’는 진심 어린 충고를 들은 후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진리 구사 능력을 기르는 것이 필요다는 자각과 함께 신앙을 비롯한 모든 일을 자발적으로 열심히 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고 했다. 실업계 고교에 재학 중인 정하영 성도는 증산도의 실질적인 일꾼으로 필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으며, 기회가 되면 상생방송국에서 봉직할 생각도 갖고 있다고 한다.
조윤정 성도는 완도에서 생업을 영위하며 신앙할 때 지역사회의 여건과 제약 요인들이 많아 포교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지는 못했다. 포교한 대상의 대부분도 아이들과 여동생, 남편 등 가족들이었다. 그러다가 광주로 이사를 하고 오치도장에서 조직적인 활동을 하게 되면서 활력을 얻게 되었는데, 그 정점은 2013년 3월에 있었던 광주환단고기북콘서트 홍보활동이었다. 홍보포스터 부착과 초대장 홍보 활동 등 혼신을 다해 열정적으로 활동을 벌였고, 행사 이후에도 버스정류소, 지하철에 광고 게재를 지속적으로 시행했다. 그 개척활동 결과로 정견 성도님이 2015년 12월 동지대천제 때 입도하게 되었다.
정견 성도는 병원에서 20년을 근무한 분으로, 출퇴근 중 지하철에서 환단고기 광고를 보고서 조윤정 성도와 연락이 되어 도장 세미나에 참석했는데, 치성이나 기도 시에 읽는 ‘심고문’을 발견하고서 증산도의 진리가 유불선을 뛰어넘는다는 진리적 자각을 하였다고 한다. 자신이 지금까지 찾아왔던 진리의 결론을 먼 길을 돌아서 찾게 되었다는 생각에 입도를 하게 되었다.
조미숙 성도도 가족들을 진리로 인도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한계와 틀을 좀 더 확장해서 실천 행법에 주력해야 함을 느끼고 있다. 진리의 큰 틀을 잡으려 노력하는 것 이상으로 활동에 힘을 쏟아야 할 필요를 절감하고 있는 것이다. 과외 교사로 일하는 틈틈이 진리를 전하고 움직일 수 있도록 기도하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가가도장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도방에 대한 자평과 신앙 계획에 대해 물었다. 조윤정 성도는 자신과 가족, 도제에 이르기까지 세세히 거론을 하면서 “도방은 처음에 제게 목숨줄이었고 제 아이의 병원이었습니다. 그런 가가도장이 지금은 너무나 익숙해져 의무감으로 퇴색해져 버린 것은 아닌가 깊은 반성을 해 봅니다. 하지만 가정신단은 앞으로도 우리 가족의 구명줄이고 신앙을 지속시켜 주는 구심점임에 틀림없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너무 협소해 거실에 상제님 어진과 태모님 진영만을 모시고 있지만, 조금이나마 넓은 집으로 이사해 온전히 천신단을 모신 도방을 따로 갖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종도사님께서 하명하신 바대로 천일기도와 활동에 집중하여 완전한 육임 형성을 하고 싶고 남편의 일이 잘 풀려서 가정뿐 아니라 도장에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조미숙 포감이 청포포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6임 완수를 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고 싶고, 정견 성도님도 신앙이 자리를 잡고 가정에서의 신앙 환경이 끌러질 수 있도록 조력을 하고 포교활동에도 최대한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조미숙 성도는 “도장에서 맡고 있는 청포구역이 안정되고 확장되도록 많이 움직이겠습니다. 또 제가 하는 일을 통해 녹줄이 잘 끌러져서 미력하나마 도장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서원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런 과정들을 통해서 포교에 탄력을 받아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의 기본을 잊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라는 각오를 보였다.
이승정 성도는 진리 수행 공부를 기반으로 대포 동아리 활성화를 시키고 많은 사람을 포교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고, 정하영 성도는 자신이 부족한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 진리적으로 성숙을 기하고 도제 2명이 신앙을 잘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으며 아빠를 진리로 인도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기도 했다. 정견 성도는 아내와 자식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이며 시간을 내서 상생방송 채널홍보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
광주는 민주화운동으로 상징이 되는 아픔의 역사를 갖고 있다. 세월이 흐름과 함께 상처는 아물고 매일매일의 삶은 늘 새로운 현실과 만나며 역사를 써 내려간다. 세상의 겉모습은 그렇게 변화하고 발전해 나가지만 그 이면의 본질과 역사마저 임의로 변하고 사라지고 대체되는 것은 아니다.
이번 도방은 삶의 고통스러운 현상에 직면하여 상제님의 진리로서 그 본질을 바로잡고 치유함으로써 새로운 삶으로 반전을 이룬 두 자매의 이야기를 만나보았다. 고난과 아픔의 과정 속에서 진리를 만나고 성숙시켰기에 이들의 신앙은 보다 근본적이고 체험적이며 굳건한 토대를 갖출 수 있었다. 선천 상극의 고통은 언제라도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상제님의 진리로써 근원을 바로잡고 문제를 치유하지 못한다면 그 현실을 극복하거나 승화시키지 못한 채 끌려다니며 계속 부자유하고 불편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종도사님께서는 가정도장이 사람을 살려내고 양육하는 실질적인 또 하나의 도장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조윤정, 조미숙 성도의 도방이 바로 그러한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있는 실제적인 생명의 구명선이 되기를 바라며, 두 분의 가족들이 온전히 도방 중심으로 뭉쳐서 상제님, 태모님과 조상선령신의 가호 아래 천지의 뜻을 성취하는 역군들로 자리 잡기를 기원한다.
조윤정 성도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는 가가도장 천신단은 2000년 12월 완도에서 과일가게를 할 때 도와줬던 후배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일이 있은 후 남편 이주열 성도가 나서서 조성을 했다. 후배에 대한 죄책감으로 불면증에 시달리던 남편이 매일 밤 도전을 읽고 수행을 하면서 가정신단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남편이 어진과 청수그릇을 준비하고 신단을 마련하였다.
이 가정신단은 가족도 가족이지만 조 성도에게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해 주고 신앙을 할 수 있도록 해 준 목숨줄이었다. 가정도방 덕분에 생명력을 얻고 지옥과 같았던 삶의 고통과 구렁에서 벗어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정신단은 조상님 제사를 모시는 문화도 바꿔 놓았다. 아이들 교육 등을 위해 2011년 광주로 이사를 온 지금은 집도 너무 좁고 완도와 두 집 살림을 하는 관계로 못하고 있지만, 광주로 이사 오기 전까지는 집에 상제님 태모님을 모시고 있기에 명절날 차례를 지낼 때나 제사를 모실 때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상 좌측으로 상제님 태모님 상을 같이 모셨다. 조 성도는 거실에 제사상 4개를 준비하고 증산도 예법에 맞게 차례와 제사를 모시면 얼마나 뿌듯하고 기쁜지 모른다고 했다. 자신과 남편이 함께 제물을 모두 준비하고 제를 주관해 모시기 때문에 신앙을 하지 않는 시댁 가족들도 별말 없이 따른다고 한다.
도방에서 아이의 병을 고치다
또한 가정도방은 가족의 병을 치유하는 치유공간이 되기도 했다. 완도에서 항상 찬바람을 맞으며 과일장사를 하던 중에 얻은 셋째 아이는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다. 10개월부터는 폐렴과 기관지염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때 도장에서는 병원에 가지 말고 신유를 해 줄 테니 아이를 데리고 오라고 했지만, 확신이 없었던 조 성도는 병원에만 다녔다. 그러다 가게가 어려워져 돈이 없을 때 아이가 갑자기 열이 오르며 아프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도 서울에 가고 없을 때라 응급실 갈 형편도 안 되자 앞이 캄캄했다. 절박해진 조 성도는 상제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반신반의하던 신유를 해보기로 하고 도방 신단에 청수를 모시고서 태을주를 읽기 시작했다. 아이의 가슴에 손을 대고 태을주를 읽는데 가슴에서 나오는 탁기가 손을 자꾸 밀어냈다. 밀려나는 손을 가슴으로 갖다 대면서 태을주를 30분 정도 읽으니 탁기가 어느 정도 가시는 듯해, 펄펄 끓는 머리 위에 손을 대고 다시 태을주를 30분 읽었더니 열이 내리면서 아이가 편히 숨을 쉬며 잠이 들었다. 병원에 입원하면 1주일간 항생제 주사를 맞으며 치료했던 폐렴이 1시간 읽은 태을주로 치유되는 신비를 체험하게 되자 그 뒤로는 병원에 가지 않게 되었고, 아이도 아프면 종도사님 태을주 테이프를 들으면서 신유를 해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가정신단은 가족의 병을 치료해 주는 병원이 되었다.
두 자매가 행복한 이유
조윤정, 조미숙 성도는 둘 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받던 시기에 증산도 진리를 만나 문제를 해소하고 행복을 찾았다고 말한다. 이들은 증산도 신앙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런 정신적 고통을 갖고 있었을 거라면서, “증산도 진리를 만나고서 인생의 커튼이 젖혀지고 투명해졌으며, 그래서 행복하다.”라고 표현했다. 조윤정 성도가 신앙의 고락을 함께한 도방을 ‘생명을 이어준 목숨줄이고 병을 고쳐준 병원이며 가정 제사문화의 중심’이라고 강조한 것은 그러한 신앙의 행복이 도방이라는 원천을 통해 생활 속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조미숙 성도는 이에 더해 ‘도방은 문제해결사이고 6임완수’라는 설명을 추가했다. 가가도장은 실제로 가정과 사회생활에서 생기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고 활로를 뚫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또한 천명포교와 천륜포교의 기지이기도 하므로 도방을 6임완수로 칭할 수 있다고 했다.
예향의 고장으로 알려진 빛고을 광주에는 인생의 아픈 굴곡에서 벗어나 진리를 통해 새 삶을 얻었다는, 그래서 참으로 행복한 신앙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자매 신앙인이 있다. 광주오치도장에서 신앙하는 조윤정, 조미숙 성도는 모습과 성격은 다르지만 상제님 신앙을 대하는 정성과 의지는 한결같이 닮아 피를 나눈 자매가 틀림없음을 말없이 웅변하고 있다. 평탄하지 않은 행로를 걸어오면서도 진리와 신앙의 의미를 늘 되새기며 각기 가족과 함께 건실하게 도방을 가꿔나가고 있는 두 성도의 이야기를 들어 본다.
가족에 대한 신뢰가 이끈 신앙의 길
4월의 두 번째 일요일 오후, 무척 오랜만에 광주光州를 방문했다. 한반도 남서부 호남지방의 중심부에 위치한 광주광역시는 이름 그대로 빛고을로 불리는 고장이다. 이곳이 풍류와 예향의 도시로도 알려져 있기는 하나 세월을 더듬어 보면 그처럼 밝은 흥취만 스며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여느 도시처럼 수많은 사건들이 명멸해 갔지만, 그 중에는 꽤 슬픈 역사의 흔적들이 묻어 있어 사람들에게 구석구석 아픈 여운을 남기고 있는 곳이 광주이기도 하다.
한식寒食도 4일이 지난 늦봄에 광주시 북구 오치동에 자리잡은 도방을 찾았을 때, 주택 인근의 학교 앞쪽에 핀 꽃들의 정경이 예사롭지가 않아서 도방에 모인 가족들을 불러내 기분 좋게 사진 촬영부터 하고서 취재를 시작하는 변칙을 감행했다. 이번 도방의 주인공은 광주오치도장에서 신앙을 하고 있는 조윤정, 조미숙 성도다. 두 사람은 친자매 간으로 언니인 조윤정 성도가 동생인 조미숙 성도를 도문으로 인도해 한 도장에서 도반으로 서로를 배려하며 신앙을 다져나가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가 관심을 끄는 이유는 각기 가정을 꾸려나가면서 겪은 많은 아픔과 고통들을 상제님 신앙을 통해 보란 듯이 승화시켜 삶의 역전을 이룬 심법과 생활의 면면들이 우리에게 감동과 발심을 불러일으키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두 자매가 둔 각자의 딸도 엄마 못지 않게 신앙을 충실히 잘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두 집안의 모녀가 똑같이 가정도장의 주축이자 뿌리 역할을 하고 있는 점도 특별한 사례로 주목해 볼 여지가 있는 것이다.
취재를 위해 들어선 조윤정 성도의 가정도장 모습은 단출하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이사를 한 지 오래 되지 않은 탓도 있지만 복잡한 치장과 구성을 선호하지 않는 조 성도의 성향이 드러난 것이기도 했다. 간명하면서도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하고, 드러난 모습보다 내면의 실익을 우선시하는 성격이 생활과 신앙에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거실에 마련된 천신단은 창문 옆에 자리를 잡아 늘 밝고 소통이 되는 위치였고, 어진과 진영 앞에 놓인 순백색의 청수그릇과 함께 가족들의 청수그릇과 도전 등이 그 옆에 정갈하게 모셔져 있다. 가족의 청수 그릇 중에는 조금은 투박하고 어색해 보이기도 하는 스테인리스 그릇이 있었는데, 이것은 신앙 초기에 처음 마련한 청수그릇이라 의미가 있고 애착이 가서 그대로 사용 중이라고 한다. 신단 옆쪽 벽에는 우주일년과 국통맥 도표가 걸려 있고, 방문 정면에도 천부경과 염표문이 부착되어 있다.
흰색 톤의 벽지에 원목 스타일의 바닥면이 깔끔하게 조화를 이루는 거실 공간에 조윤정 성도와 조미숙 성도, 조윤정 성도의 딸인 이승정 성도(대학생), 조미숙 성도의 딸인 정하영 성도(고등학생), 그리고 조윤정 성도의 도제인 정견 성도까지 함께 둘러 앉아서 그리운 시절의 추억부터 신앙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까지 담담한 그 사연들을 하나씩 들어 보았다.
남편을 믿고 도문에 들어서다
조윤정 성도는 1999년(도기 129년) 겨울에 입도를 했다. 일반적인 경우처럼 진리를 접할 기회를 만나고 진리공부 과정을 단계적으로 거쳐 입도를 하게 된 게 아니라, 남편이 존경하는 지인을 통해 남편의 권유로 입도를 한 사례이다. 남편이 평소 존경하던 분이 증산도 신앙을 하고 있었고, 그분은 남편의 고향인 완도 지역의 증산도 도장 개창에 참여한 분이기도 했다. 지인으로부터 증산도 진리에 대해 여러 번 들어 이해하고 있었던 남편은 그분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소박한 마음으로 아내인 조 성도를 불러서 갑작스럽게 입도를 권유한 것이다. 조 성도는 당시 증산도 진리에는 무지했지만 사랑하고 믿는 남편이 자신에게 사이비 신앙을 권유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으로 입도를 하였고, 입도한 후에 신앙을 해나가면서 진리와 수행 공부를 하게 되었다. 남편인 이 성도는 증산도 진리를 먼저 알았고 사실상 신앙인이나 다름이 없었기에 아내에게 입도를 권했지만, 정작 자신은 지역사회에서 생업과 더불어 정치에 종사하는 정당인으로 살다 보니 여러 사정들이 얽혀서 입도를 하지 못한 채 반半신앙인으로 살다가, 아내인 조 성도가 2013년 12월에 올린 세 번째 시선조 천도식을 계기로 뒤늦게 정식 입도를 했다.
사실 사상이나 신념 같은 부류는 남이 시킨다고 덜컥 따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하물며 인생의 흐름을 좌우할 수 있는 신앙 문제는 더욱 그럴 것인데, 조 성도는 신앙 권유를 받을 당시에 남편을 굳게 신뢰했기 때문에 두말없이 입도를 결행했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 지금에 이르렀다. 사소한 문제 가지고도 빈번히 다툼을 벌이고 성격 차이라는 편리한 이유를 들어 쉽게 헤어지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버린 세상에서 배우자를 굳게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경지이고 무슨 배경을 갖고 있는 것일까?
남편인 이주열 성도와 조윤정 성도는 대학교 재학 시절 학생회 활동으로 만나 학생운동을 함께 한 소위 운동권 출신이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힘든 현실 상황들이 많았고 그때마다 도움을 주고 받으며 서로에게 힘이 되었던 두 사람은 마침내 1991년 부부의 연을 맺기에 이르렀다. 이 부부는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사회운동을 계속하고 싶은 생각에 남편의 고향인 완도로 내려와 어민회 활동을 하였고, 이후 큰아이가 태어나자 조 성도는 집에서 아이를 양육하면서 이 성도가 어민회 이후 생활협동조합 운동을 하는 것을 도우며 생활하였다. 일각에서는 운동권 출신에 대한 좋지 않은 시각이 없지는 않지만, 이전까지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던 조 성도는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을 하면서 겪은 집안 문제, 집회나 거리 등지에서 공권력과의 대치를 통한 육체적 정신적 갈등과 어려움들에 맞서 이겨낸 것이 신앙을 하면서 겪게 되는 여러 난관들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또한 외적 압박 속에서 조직의 명을 따르고 실천하고 지켜내는 체험들이 진리의 종통을 지키고 조직을 통한 도정혁신과 행법 우선의 도정활동을 이행하는 데에도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모든 만사가 저마다의 과정은 다르지만 쓰일 곳에 적정하게 쓰여 걸맞는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만 있다면 그 결과는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는 것이 세상 이치다. 조 성도의 지난 얘기를 괜한 선입관을 갖고 바라볼 필요가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조윤정 성도가 남편에 대해 가졌던 두터운 신뢰는 어려움을 함께 공유하고 극복하면서 하나씩 쌓여 온 사람 사이의 진실과 순수의 결정으로 이해하면 되고, 평범하지 않은 험로를 걸은 이력은 자랑이나 비난의 대상으로 다룰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과 의지를 자극해 인성을 바르고 단단하게 만드는 동력이라고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사람은 택국澤國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 태사부님 말씀이 불현듯 떠오른다.
언니가 전한 대도말씀에 마음을 바꾸고
조미숙 성도는 1996년 대학을 졸업하고 그 이듬해 결혼을 했다. 당시 결혼을 전후하여 여러 가지 심난한 일들이 많았다는 조 성도는 가정의 경제적 어려움이 겹치면서 영어 과외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힘든 삶을 이어가던 그 시기에 무척 소중한 인연으로 존경하고 있던 고교 시절의 은사님이 암 투병을 하다가 돌아가시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또 다른 충격으로 다가와 내면의 여러 스트레스와 분노 등으로 중첩이 되어 쌓여가는 심적 고통을 겪게 되었다. 뭔가 탈출구가 필요했던 그때에 고교 시절 인품이 있었던 영어 선생님과 연락이 되어 우연히 대화를 나누다가 그 선생님으로부터 ‘OO진리회’ 신앙을 권유받아 그 단체에 발을 딛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신앙으로 상제님은 알게 되었으나 그곳에 진리는 없었다. 답답하고 궁금한 점이 있어 물으면 신통한 답변 하나가 없었고 자꾸만 감추고 피하기만 하는 행태를 보였다. 얼핏 언니도 비슷한 뭔가를 신앙하고 있다는 생각이 떠올라 언니인 조윤정 성도에게 전화를 했다.
사실을 알게 된 조윤정 성도는 너무나 놀라 동생을 만나기 위해 눈이 너무도 많이 내리던 날에 완도도장 책임자와 함께 광주로 올라와 상무도장에서 동생을 만났다. 설명과 설득이 이어졌으나 조미숙 성도는 인간적으로 등을 돌릴 수 없다는 이유로 버티며 응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자매는 함께 밤을 보내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조미숙 성도는 언니를 거꾸로 포교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우선 대화를 시작한다는 뜻에서 ‘증산도가 뭐냐’는 원초적 질문을 던졌다. 조윤정 성도는 애써서 설명을 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태상종도사님의 진리 말씀을 중심으로 진리의 기본을 그대로 전하는 일에 집중했다. 그 내용들을 다 듣고 난 동생은 짧지만 진심이 담긴 응답을 했다. “증산도가 더 큰 진리네. 해 볼게.”
다음 날 초등학교 딸과 함께 입문을 한 조미숙 성도는 도중에 유산의 아픔도 겪으면서 충분히 도전을 읽을 기회를 갖게 되었고, 정성공부와 진리공부에 박차를 가한 결과 입도시험을 통과해 2006년 드디어 증산도 신앙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도장에서 청포포감으로 봉직을 하며 부지런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삶의 구렁에서 생명을 건져 준 신앙의 힘
이렇듯 자매는 남편과 언니가 전하는 메시지의 의미를 수용했고 진심을 담은 가족의 말을 신뢰하면서 입도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리 여유있는 여건이 아니었던 생활 환경 속에서 두 사람이 신앙에 안착을 하고 가정도장을 건사하기까지에는 많은 어려움과 갈등이 따랐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이에 대해 조윤정 성도는 가슴 아픈 옛 이야기를 담담히 전해 주었다.
어느 날 닥친 생계의 위협
조 성도가 애초에 증산도 진리에 무지한 상태로 입도를 하였음은 앞서 얘기한 바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도한 날 처음 접한 태을주를 비롯한 주문들이 입에서 술술 나오는 것을 보고 자신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어렸을 때 이모를 따라 몇 번 가본 교회나 성당, 엄마를 따라 가보았던 절과는 달리 도장에서 행해지는 치성과 수행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하면서 스스로를 유물론자라고 칭했음에도 불구하고 수행을 통해 신도 체험을 하면서 신명도 인정하게 되었다. 나름대로 신앙을 느끼고 배우며 점차 적응을 해갔지만 신앙이 확실히 자리잡지는 못하고 있었다. 조 성도가 신앙을 시작했던 완도 지역 도장은 한반도 최남단에 자리한 작은 도장이었고 처음에는 신앙문화가 제대로 공유되고 자리잡히지 못하는 제반 사정들로 인해 신앙의 진전을 이룰 토대가 부족한 상태였다. 더구나 당시는 남편과 같이 과일 도·소매업을 영위하는 바쁜 생활로 치성 참석이나 새벽수행을 겨우겨우 해나가던 시기이기도 했다.그런데, 돌연 집에서 지인 보증을 선 것이 그만 잘못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거친 후폭풍을 불러왔다. 이 일로 인해 2005년 초 운영하던 과일가게를 결국 문을 닫게 되었고, 이후 조 성도는 매번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가장 힘들고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정말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상제님께서 녹 떨어지면 죽는다고 하셨는데, 돈은 고사하고 당장 먹을 쌀도 없어 겨우 하루하루 연명해 나가는 고통이 매일 이어졌습니다..” 덤덤하게 당시를 회상하던 조 성도가 순간적으로 눈시울을 붉히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추스르려 애를 쓰는 모습을 지켜보자니 막막했었을 당시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했다.
“아이들의 끼니를 걱정할 때라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이 정말 고역이었습니다. 자식 딸린 어미라 생목숨을 끊기는 힘들고 매일 밤 잠들 때 ‘내일 아침에 제가 눈뜨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책임자의 정성으로 살 길을 찾다
매일매일이 고통이었던 그때 완도도장 책임자였던 허남현 포정이 매일 심방을 왔다. 그는 아이들 청수그릇을 사다 주며 개인봉청수를 할 것을 권했다. 그때만 해도 청수그릇 하나로만 상제님과 태모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개인 봉청수도 해야 한다면서 아이들 청수그릇을 사다 준 것이다. 매일 심방을 오면서 빈손으로 오는 법도 없었다. 어떤 날은 과자, 어떤 날은 붕어빵, 아이스크림 등 매일 다른 것으로 바꿔가며 사왔는데 그것은 아이들의 유일한 간식거리가 되었다. 조 성도는 정말 부끄러운 치부라고 표현하면서, 당시 포정님보다 포정님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더 반기게 된 것이 진심일 정도였다고 했다. 그만큼 사는 것이 절박했다는 말이다.허 포정은 그런 지옥 같은 날에 매일 심방을 와서 진리 말씀을 전해 주고 도장에 나와 수행할 것을 권했다. 처음에는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도장에 나와 수행하라는 것도 귀찮아서 그만 하시라고 반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성은 조 성도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자각이 생겨났고, 스스로 살아야겠기에 매일 집에서 청수를 모시고 수행을 하기 시작했다. 살아내기 위해 유일한 끈으로 잡은 가정신단의 봉청수 수행이 도장으로 나가는 끈이 되었고 지옥의 삶에서 빠져 나오는 탈출구가 되었다. 그동안 너무 바빠 겨우 치성 참석에 급급했던 신앙이 매일 아침 아이들 학교 보내고 도장에 나와 수행을 하고, 저녁식사 후 아이들과 함께 도장에 와서 저녁수행을 하면서 정말로 숨을 쉴 수 있었고, 비로소 살아내는 삶이 아닌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 도장에서 아침 저녁 청수 모시며 수행을 하고, 집에 가서는 아이들 재워 놓고 청수 모시고 수행을 하면서 신앙의 기쁨도 알게 되었다. 또한 허 포정의 도전과 우주변화원리 교육을 통해 상제님 진리에 눈을 뜨며 맹목적 믿음이 아닌 성숙한 신앙을 하게 되었다.
조 성도는 이에 대해 깊은 감사의 말을 남겼다. “저는 정말 복 받은 사람입니다. 당시 허 포정님을 통해 상제님 신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광주오치도장으로 옮겨와서는 책임자이셨던 이 수호사님을 통해 신앙이 더 성숙되었으며, 이제는 전 수석포감님을 통해 행동으로 실천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제 신앙의 눈높이에 맞게 그때그때 도장책임자를 보내주신 태사부님 사부님께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진리로 자유로워진 삶
조미숙 성도의 경우는 안팎으로 깊은 고통과 좌절에 허우적대던 자신을 건져 진정한 자유를 선물한 상제님 진리에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한다. 암울한 기운을 벗어던지고 삶의 가치와 함께 현재와 미래를 새롭게 바라보는 눈이 생겼기 때문이다. 때문에 살면서 조금 힘이 들어도 ‘나에게는 상제님이 계시고 조상님이 계신데 무슨 걱정인가, 기도하고 노력하면 반드시 들어주시겠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고 한다. 남편은 증산도 신앙을 한 후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신앙에 별다른 관여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입문 당시 둘째 아이를 유산하는 아픔을 겪고서 시간을 내 도전을 통독할 기회를 가진 것은 지금까지 든든한 신앙의 밑천이 되고 있으며 도훈을 입체적으로 받드는 바탕이 된다고 했다. 특히 도훈 말씀들을 통해 심법이 많이 열리는 체험을 한 것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값진 재산이라는 말에는 자신감마저 묻어 있었다.이승정 성도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입도한 이후 초 중 고교를 거치며 치성에는 꼬박꼬박 나갔지만 활동은 꾸준히 하지 못했다고 한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어느 날 ‘네 스스로의 신앙을 하라’는 진심 어린 충고를 들은 후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진리 구사 능력을 기르는 것이 필요다는 자각과 함께 신앙을 비롯한 모든 일을 자발적으로 열심히 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고 했다. 실업계 고교에 재학 중인 정하영 성도는 증산도의 실질적인 일꾼으로 필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으며, 기회가 되면 상생방송국에서 봉직할 생각도 갖고 있다고 한다.
조직적인 활동으로 포교의 열매를 맺다
조윤정 성도는 완도에서 생업을 영위하며 신앙할 때 지역사회의 여건과 제약 요인들이 많아 포교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지는 못했다. 포교한 대상의 대부분도 아이들과 여동생, 남편 등 가족들이었다. 그러다가 광주로 이사를 하고 오치도장에서 조직적인 활동을 하게 되면서 활력을 얻게 되었는데, 그 정점은 2013년 3월에 있었던 광주환단고기북콘서트 홍보활동이었다. 홍보포스터 부착과 초대장 홍보 활동 등 혼신을 다해 열정적으로 활동을 벌였고, 행사 이후에도 버스정류소, 지하철에 광고 게재를 지속적으로 시행했다. 그 개척활동 결과로 정견 성도님이 2015년 12월 동지대천제 때 입도하게 되었다.
정견 성도는 병원에서 20년을 근무한 분으로, 출퇴근 중 지하철에서 환단고기 광고를 보고서 조윤정 성도와 연락이 되어 도장 세미나에 참석했는데, 치성이나 기도 시에 읽는 ‘심고문’을 발견하고서 증산도의 진리가 유불선을 뛰어넘는다는 진리적 자각을 하였다고 한다. 자신이 지금까지 찾아왔던 진리의 결론을 먼 길을 돌아서 찾게 되었다는 생각에 입도를 하게 되었다.
조미숙 성도도 가족들을 진리로 인도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한계와 틀을 좀 더 확장해서 실천 행법에 주력해야 함을 느끼고 있다. 진리의 큰 틀을 잡으려 노력하는 것 이상으로 활동에 힘을 쏟아야 할 필요를 절감하고 있는 것이다. 과외 교사로 일하는 틈틈이 진리를 전하고 움직일 수 있도록 기도하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도방을 구심점으로 천하사에 집중할 터
가가도장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도방에 대한 자평과 신앙 계획에 대해 물었다. 조윤정 성도는 자신과 가족, 도제에 이르기까지 세세히 거론을 하면서 “도방은 처음에 제게 목숨줄이었고 제 아이의 병원이었습니다. 그런 가가도장이 지금은 너무나 익숙해져 의무감으로 퇴색해져 버린 것은 아닌가 깊은 반성을 해 봅니다. 하지만 가정신단은 앞으로도 우리 가족의 구명줄이고 신앙을 지속시켜 주는 구심점임에 틀림없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너무 협소해 거실에 상제님 어진과 태모님 진영만을 모시고 있지만, 조금이나마 넓은 집으로 이사해 온전히 천신단을 모신 도방을 따로 갖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종도사님께서 하명하신 바대로 천일기도와 활동에 집중하여 완전한 육임 형성을 하고 싶고 남편의 일이 잘 풀려서 가정뿐 아니라 도장에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조미숙 포감이 청포포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6임 완수를 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고 싶고, 정견 성도님도 신앙이 자리를 잡고 가정에서의 신앙 환경이 끌러질 수 있도록 조력을 하고 포교활동에도 최대한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조미숙 성도는 “도장에서 맡고 있는 청포구역이 안정되고 확장되도록 많이 움직이겠습니다. 또 제가 하는 일을 통해 녹줄이 잘 끌러져서 미력하나마 도장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서원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런 과정들을 통해서 포교에 탄력을 받아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의 기본을 잊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라는 각오를 보였다.
이승정 성도는 진리 수행 공부를 기반으로 대포 동아리 활성화를 시키고 많은 사람을 포교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고, 정하영 성도는 자신이 부족한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 진리적으로 성숙을 기하고 도제 2명이 신앙을 잘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으며 아빠를 진리로 인도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기도 했다. 정견 성도는 아내와 자식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이며 시간을 내서 상생방송 채널홍보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
광주는 민주화운동으로 상징이 되는 아픔의 역사를 갖고 있다. 세월이 흐름과 함께 상처는 아물고 매일매일의 삶은 늘 새로운 현실과 만나며 역사를 써 내려간다. 세상의 겉모습은 그렇게 변화하고 발전해 나가지만 그 이면의 본질과 역사마저 임의로 변하고 사라지고 대체되는 것은 아니다.
이번 도방은 삶의 고통스러운 현상에 직면하여 상제님의 진리로서 그 본질을 바로잡고 치유함으로써 새로운 삶으로 반전을 이룬 두 자매의 이야기를 만나보았다. 고난과 아픔의 과정 속에서 진리를 만나고 성숙시켰기에 이들의 신앙은 보다 근본적이고 체험적이며 굳건한 토대를 갖출 수 있었다. 선천 상극의 고통은 언제라도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상제님의 진리로써 근원을 바로잡고 문제를 치유하지 못한다면 그 현실을 극복하거나 승화시키지 못한 채 끌려다니며 계속 부자유하고 불편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종도사님께서는 가정도장이 사람을 살려내고 양육하는 실질적인 또 하나의 도장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조윤정, 조미숙 성도의 도방이 바로 그러한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있는 실제적인 생명의 구명선이 되기를 바라며, 두 분의 가족들이 온전히 도방 중심으로 뭉쳐서 상제님, 태모님과 조상선령신의 가호 아래 천지의 뜻을 성취하는 역군들로 자리 잡기를 기원한다.
도방은 생명줄이자 치유공간
구명줄이자 제사문화의 중심인 도방조윤정 성도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는 가가도장 천신단은 2000년 12월 완도에서 과일가게를 할 때 도와줬던 후배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일이 있은 후 남편 이주열 성도가 나서서 조성을 했다. 후배에 대한 죄책감으로 불면증에 시달리던 남편이 매일 밤 도전을 읽고 수행을 하면서 가정신단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남편이 어진과 청수그릇을 준비하고 신단을 마련하였다.
이 가정신단은 가족도 가족이지만 조 성도에게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해 주고 신앙을 할 수 있도록 해 준 목숨줄이었다. 가정도방 덕분에 생명력을 얻고 지옥과 같았던 삶의 고통과 구렁에서 벗어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정신단은 조상님 제사를 모시는 문화도 바꿔 놓았다. 아이들 교육 등을 위해 2011년 광주로 이사를 온 지금은 집도 너무 좁고 완도와 두 집 살림을 하는 관계로 못하고 있지만, 광주로 이사 오기 전까지는 집에 상제님 태모님을 모시고 있기에 명절날 차례를 지낼 때나 제사를 모실 때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상 좌측으로 상제님 태모님 상을 같이 모셨다. 조 성도는 거실에 제사상 4개를 준비하고 증산도 예법에 맞게 차례와 제사를 모시면 얼마나 뿌듯하고 기쁜지 모른다고 했다. 자신과 남편이 함께 제물을 모두 준비하고 제를 주관해 모시기 때문에 신앙을 하지 않는 시댁 가족들도 별말 없이 따른다고 한다.
도방에서 아이의 병을 고치다
또한 가정도방은 가족의 병을 치유하는 치유공간이 되기도 했다. 완도에서 항상 찬바람을 맞으며 과일장사를 하던 중에 얻은 셋째 아이는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다. 10개월부터는 폐렴과 기관지염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때 도장에서는 병원에 가지 말고 신유를 해 줄 테니 아이를 데리고 오라고 했지만, 확신이 없었던 조 성도는 병원에만 다녔다. 그러다 가게가 어려워져 돈이 없을 때 아이가 갑자기 열이 오르며 아프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도 서울에 가고 없을 때라 응급실 갈 형편도 안 되자 앞이 캄캄했다. 절박해진 조 성도는 상제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반신반의하던 신유를 해보기로 하고 도방 신단에 청수를 모시고서 태을주를 읽기 시작했다. 아이의 가슴에 손을 대고 태을주를 읽는데 가슴에서 나오는 탁기가 손을 자꾸 밀어냈다. 밀려나는 손을 가슴으로 갖다 대면서 태을주를 30분 정도 읽으니 탁기가 어느 정도 가시는 듯해, 펄펄 끓는 머리 위에 손을 대고 다시 태을주를 30분 읽었더니 열이 내리면서 아이가 편히 숨을 쉬며 잠이 들었다. 병원에 입원하면 1주일간 항생제 주사를 맞으며 치료했던 폐렴이 1시간 읽은 태을주로 치유되는 신비를 체험하게 되자 그 뒤로는 병원에 가지 않게 되었고, 아이도 아프면 종도사님 태을주 테이프를 들으면서 신유를 해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가정신단은 가족의 병을 치료해 주는 병원이 되었다.
두 자매가 행복한 이유
조윤정, 조미숙 성도는 둘 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받던 시기에 증산도 진리를 만나 문제를 해소하고 행복을 찾았다고 말한다. 이들은 증산도 신앙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런 정신적 고통을 갖고 있었을 거라면서, “증산도 진리를 만나고서 인생의 커튼이 젖혀지고 투명해졌으며, 그래서 행복하다.”라고 표현했다. 조윤정 성도가 신앙의 고락을 함께한 도방을 ‘생명을 이어준 목숨줄이고 병을 고쳐준 병원이며 가정 제사문화의 중심’이라고 강조한 것은 그러한 신앙의 행복이 도방이라는 원천을 통해 생활 속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조미숙 성도는 이에 더해 ‘도방은 문제해결사이고 6임완수’라는 설명을 추가했다. 가가도장은 실제로 가정과 사회생활에서 생기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고 활로를 뚫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또한 천명포교와 천륜포교의 기지이기도 하므로 도방을 6임완수로 칭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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