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천주侍天主 시대를 연 동학東學 교조, 대신사 수운 최제우

[도전속인물탐구]

수운이 아버지께 가는 생명의 길을 동방의 땅에 닦아 놓고 ‘인간으로 강세하시는 천주님’을 모시는 시천주(侍天主) 시대를 선언하였나니 이는 온 인류에게 후천 개벽세계를 여시는 아버지의 대도, 곧 무극대도(無極大道)가 조선 땅에서 나올 것을 선포함이니라. (도전 1편 8장 21~22절)

조선을 비롯한 동양 각국이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폭압에 침몰당해 갈 무렵, 신교 또한 권위를 잃고 그 명맥이 희미해지거늘 하늘에서 동방의 이 땅에 이름 없는 한 구도자를 불러 세워 신교의 도맥을 계승하게 하고 후천개벽(後天開闢)으로 새 세상이 열릴 것을 선언토록 하셨나니 그가 곧 동학(東學)의 교조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대신사(大神師)니라......

이로써 수운이 인류의 새 세계를 알리라는 상제님의 천명과 신교를 받고 도통을 하였나니, 이것이 곧 우주사의 새 장을 열어 놓은 천주님과의 천상문답 사건이라. 이 때 상제님으로부터 “주문(呪文)을 받으라.” 하는 말씀을 듣고 본주문 열석 자와 강령주문 여덟 자를 지으니 그 내용은 이러하니라.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至氣今至 願爲大降 (도전 1편 8장 3~5절, 15~17절)

시천주주(侍天主呪)는 천명을 받는 무극대도(無極大道)의 본원주(本源呪)이니 상제님을 지극히 공경하고 내 부모와 같이 모시라는 주문이라. (도전 11편 180장 5절)

하루는 태모님께서 의통 공사를 보시며 말씀하시기를 “시천주주가 의통 주문이니 너희는 많이 읽어 의통 준비를 잘 해 두라.” 하시고 “상씨름꾼은 곧 시천주꾼이니, 시천주주를 착실히 잘 읽으면 상씨름판에 가서 황소도 따느니라.” 하시니라. (도전 11편 84장 7~8절)


프롤로그- 피폐한 백성, 변혁의 시운時運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신부로 명나라에 와서 선교사로 활동한 마테오리치Matteo Ricci는 지상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 동분서주 활동을 하였다. 동양을 위해 서양의 학문을 소개하고, 서양에 동양의 학문과 사정을 소개하여 동서 문화 교류와 이해와 소통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후 신명神明이 되어서는 진묵대사와 함께 천상문명을 지상에 받아내려 사람들에게 알음귀를 열어줌으로써, 물질문명이 크게 발전하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이런 과학문명의 발전은 빈부의 격차, 살상무기의 발전, 환경 파괴 등의 많은 폐단을 가져왔으며, 정신문화를 잃어버리고 물질제일주의, 배금주의를 낳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기존의 사상과 질서 체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이념과 가치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산업 발달로 자본을 축적하고 많은 물자를 생산하게 된 서양 열강은 제국주의화되어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자국의 식민지로 삼기 시작하였고, 아시아의 맹주였던 청나라는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이후로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이를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고 한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 개혁의 기회를 지녔던 조선은 인조를 비롯한 서인들의 변란으로 인해 변혁의 기운을 상실한 채, 교조화된 주자학에 경도되어 변화하는 정세를 바로 보지 못했다. 인조반정 이후 300년간 노론老論 일당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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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의해 신분체제가 고착화되고 사회는 경직되었으며 사상의 다양성은 상실되었다. 자연재해 및 통치체제의 모순과 더불어 관리와 아전들의 혹독한 수탈 등으로 일반 백성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져만 갔다. 한마디로 “아서라 이 세상은 요순지치라도 부족시오 공맹지덕이라도 부족언이라<몽중노소문답가>”고 할 수 있는, 뭔가 크게 개벽開闢되어야 하는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남원 은적암의 칼노래


1861 신유辛酉년 겨울 전라도 남원 교룡산성蛟龍山城 내 복덕봉福德峰 자락에 위치한 은적암 뜰. 동짓날 밤. 어제 내리던 눈발은 잠들었고, 저 멀리 웅장한 지리산 노고단의 윤곽이 어렴풋하게 보이는 듯. 대밭 사이로 맑은 바람 소리 들리며 달빛이 교교하다. 바람을 검이 가르는 것인가? 검 스스로가 바람을 만들어 내며 우는 것인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알맞은 키에 수려한 30대 후반의 남성이 목검을 들고 칼춤을 추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시호시호時乎時乎 이내 시호時乎 부재래지不再來之 시호時乎로다
만세일지萬世一之 장부丈夫로서 오만년지五萬年之 시호時乎로다
용천검龍泉劍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무수장삼舞袖長衫 떨쳐입고 이칼 저칼 넌즛들어
호호망망浩浩茫茫 넓은 천지天地 일신一身으로 비켜서서
칼 노래 한 곡조를 시호시호時乎時乎 불러내니
용천검龍泉劍 날랜 칼은 일월日月을 희롱戲弄하고
게으른 무수장삼舞袖長衫 우주宇宙에 덮여 있네
만고명장萬古名將 어데 있나 장부당전丈夫當前 무장사無壯士라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身命 좋을시고


금계독립세金雞獨立勢에 이어 맹호은림세猛虎隱林勢를 지나 조천세朝天勢를 취하고 있다. 어느덧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지만, 사내는 더욱 더 흥이 겨워 이제는 정해진 형태가 아닌 기운을 타듯이 노래에 맞추어 검무를 추었다. 이제는 ‘시천주侍天主 조화정造化定 영세불망永世不忘 만사지萬事知 지기금지至氣今至 원위대강願爲大降’의 시천주 주문을 흥이 나게 읽었다. 달빛을 받으며 노래 부르고, 검무를 추며 호협한 기질을 보여준 사내의 이름은 최제우崔濟愚, 호는 수운水雲이었다. 바로 시천주 侍天主 시대의 도래와 다시 개벽, 무극대도 5만년을 전한 동학의 창시자가 바로 그였다.

전 해인 1860 경신년에 상제님과의 천상문답사건을 거친 수운은 주변 사람들의 비난과 당국이 뻗친 탄압의 손길을 피해야 했다. 1861년 11월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최중희만을 대동하고 이곳으로 옮겨 와 머물렀다. 산성 내에 위치한 선국사善國寺의 덕밀암德密庵이라는 암자 이름을 스스로 자취를 감춘다는 뜻으로 ‘은적암隱蹟庵’이라고 지었다. 이곳에서 수운은 자신을 돌이켜 보며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동학론’이라고 불리는 <논학문>과 <도수사> <권학가> <수덕문> <몽중노소문답가>와 가장 혁명적인 내용을 띤 <검가劍歌>를 지었다.

조선의 이름 없는 구도자, 최수운


출생 및 사상적 배경 1824 갑신년 10월 28일(양력 12월 18일) 새벽 첫닭이 울 때 경주 구미산 자락인 월성군月城郡 현곡면見谷面 가정리稼亭里 금곡산 안태봉 아래에서 태어난 최수운은 본명이 제선濟宣이고 아명은 북슬(복술福術)이었다. 경주지방에서는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북슬’이라는 아명을 짓는데 이는 삽살개의 별명이다. 수운의 조상은 신라 말기 대학자인 최치원崔致遠 선생이다. 최치원 선생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우리 동방 나라에 도 기운이 서려 있어 나로부터 25세世 후에 반드시 큰 성인이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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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수운의 7대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용맹을 떨쳤던 정무공貞武公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1568~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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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이다.

수운의 부친은 근암近庵 최옥崔鋈(1762~1840)으로 제자백가에 정통하고 성리학을 깊게 연구한 영남학파의 당당한 한 계승자였다. 퇴계 학맥을 이은 기와畸窩 이상원李象遠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다(훗날 근암공의 묘갈명을 퇴계 종손인 고계古溪 이휘녕李彙寧이 써줄 정도로 근암은 퇴계 학통의 종통맥을 이었음을 보여주며, 여기에 유교의 테 밖을 벗어나지 못한 수운의 한계가 드러나기도 한다). 뛰어난 재주를 지녔지만, 경주 최씨 남인 간판으로 벼슬길에 오른다는 것은 막막했다. 이후에는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근암공은 여복도 없었는데, 두 번 장가를 들고 매번 상처하였고, 후사를 보지는 못했다. 이에 재혼할 생각을 버리고 조카인 제환濟寏(1789-1851)을 양자로 들였다. 제환은 근암공의 둘째 동생 규珪의 큰 아들로 수운보다 35세 연상으로 이후 근암공 사후 수운에게 부모 노릇을 하게 된다. 스승의 독거를 안타깝게 생각한 제자들의 간청으로 근암공은 60세에 과부로 있던 30세의 곡산 한韓씨 부인을 재취로 맞이하게 된다. 이를 두고 경주 최씨 문중에서는 족보에 한씨 부인이 정실로 올라와 있지 않았고, 재가녀再嫁女라고 해서 정실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에 수운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서자庶子 취급을 받게 되었다. 당시 조선의 <경국대전>에 의하면 재가녀 자손은 문과에 응시할 기회조차도 없었다.

수운이 6세 때 모친 한 씨는 세상을 떠났다. 60이 넘은 나이에 얻은 혈육에 대한 부친 근암공의 사랑은 깊었다. 직접 글을 가르쳤고, 공부에 전념하게 하였다. 얼굴이 비범하고 신동이라 불렸던 그는 타고난 재주에 더해, 고명한 학자인 부친으로부터 대단히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아 학문이 일취월장했다. 하지만 16세 때 이미 80 노인이 다 된 부친 근암공이 별세를 하게 되었다. 부친의 죽음은 수운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렸다. 3년 상을 치르며 그동안 닦은 학문과 기존의 종교에 대한 회의가 들었고, 혼란스러운 세상사, 그리고 자신의 앞길에 대해 깊은 사색을 하게 되었다. 3년 상을 마친 19세의 수운은 울산 출신의 월성 박朴씨와 혼인을 하게 되었다.

주유팔로의 행각과 을묘천서 사건 그러던 중 20세 때에는 집에 불이나 집과 책이 모두 화마에 사라졌다. 이에 수운은 스스로 신세를 한탄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영남의 유명한 선비 집안에서 선비로 자랐고 상당한 학식을 지녔던 그가 글을 팽개치고 장사치로 나서는 파천황적인 일이 일어난다. 사농공상을 엄격하게 나눈 조선의 신분사회에서, 기존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신분관을 버린 것이다. 이는 기존의 이념에 얽매이지 않았음을 뜻한다. 이후 1844년에서 1854년까지 백목 장사로 전국을 떠돌았다. <도원기서>에서 ‘주유팔로周遊八路’라는 멋진 말로 묘사한 이 행각은 그의 사상 성립에 주요한 자산이 되었다. 활도 쏘고 말 타기도 익히고 장사도 하고 음양복술의 글도 연구하고 의원 노릇도 하고 막일꾼 노릇도 하며, 모든 책들을 두루두루 읽으며 당시 조선 민중의 삶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던 도학자 연담蓮潭 이운규李雲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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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그대는 선도를 계승할 자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10년간 떠돌아다니며 보고 듣고 행하여 보았으나 신통한 방법을 찾지 못한 수운은 처가가 있는 울산으로 돌아와 여섯 마지기 논을 사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였다. 이때 평범한 생활인이었던 수운을 구도자로 변하게 만든 사건이 발생한다. 이른바 1855 을묘년에 있었던 《을묘 천서天書 사건》이다. 울산 유곡면 여시바윗골에서 조그만 초당을 짓고 사색하던 수운에게 금강산 유점사의 선승이 찾아와 자신은 해독할 수 없는(아니면 해석난감한) 책이라 하면서 책 한 권을 전해주고 간 사건이다. 이 책에는 기도의 가르침(祈禱之敎)이 담겼다고 하였다. 이 책이 어떤 책인지는 알 수 없지만-혹자는 이마두 대성사의 천주실의天主實義라고 하고 또는 격암유록格菴遺錄이거나 어떤 종교적 체험이라 말하고 있지만-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도통을 하리라는 자신감을 갖게 되어 집중적인 수도에 들어가게 된다.

천상문답사건으로 시천주 시대를 선언하다


간절한 구도의 여정 수운은 1856년 원효가 도를 닦던 양산 통도사 뒤 천성산千星山(원효가 화엄경을 설하여 천 명을 득도케 했다는 데서 유래함) 내원암內院庵에 들어가 49일 수도를 하다가 숙부의 상을 당해 중지했다. 중간에 살림을 위해 철점鐵店을 열기도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듬해 다시 근처 천성산 적멸굴에서 49일 정성 기도를 마쳤다. 하지만 득도에 실패하고 가산은 탕진되고 빚은 산더미같이 쌓였다. 결국 1859년 울산에서 고향인 경주 구미산 밑의 가정리로 귀향하였다. 당시 수운은 두 아들과 두 딸을 거느린 가장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수운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처연하였다. 그 때 심정을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구미용담 찾아오니 흐르나니 물소리요 높으나니 산이로세. 좌우 산천 둘러보니 산수는 의구하고 초목은 함정含情하니 불효한 이내 마음 그 아니 슬플소냐. 오작烏鵲은 날아들어 조롱을 하는 듯고 송백은 울울하여 청절을 지켜내니 불효한 이내 마음 비감회심 절로 난다. 가련하다 이내 부친 여경餘慶인들 없을소냐.” (: 용담가)


그는 부친이 공부하던 용담정에 살림집을 차리고 다시 구도의 결의를 굳혔다. 여기서 우리가 잘 아는 제우濟愚라는 이름과 수운水雲이라는 호를 쓰게 된다. 제우는 어리석은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그의 구도 행각이 자신만의 실존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고 이 세상을 건질 도를 구하겠다는 의미이다. 수운이라는 호도 흐르는 물과 구름처럼 주어진 삶의 테두리에 얽매이지 않고 도를 찾는 구도자의 모습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닐까?

도를 얻기 전까지는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불출산외不出山外)는 굳은 결의를 하고, 이듬해 초에 쓴 입춘서에서는 도기장존사불입道氣長存邪不入 세간중인부동귀世間衆人不同歸라고 하여 결의를 분명히 하였다. 바깥출입을 삼가고 책과 기도에 몰두하였고, 밤에는 나가서 상제님께 수없이 절을 하여 새로 지은 버선이 하룻밤 지나면 버선코가 다 이지러지고 상할 정도로 간절한 구도자의 모습을 보였다. 그의 기도 대상은 상제님이었다. 물론 그때까지는 일반 사람들처럼 막연한 관념만을 가진 상제님이었다. 그렇게 수운이 막연하게 생각하던 상제님께서 인격적인 현현으로 새로운 삶의 길을 내려 달라고 기도하는 구도자 수운의 간절한 성경신에 감복하여 직접 말씀하시게 되니, 그것이 드디어 동학이 세상에 나오게 되는 1860 경신庚申년 4월 5일 천상문답天上問答 사건이다.

“너는 상제를 모르느냐?” 그날은 장조카 맹륜의 생일날로 조카의 생일잔치에 오라는 간곡한 청 때문에 내키지 않았지만 억지로 참석하였다가 몸이 떨리고 한기가 느껴져 집으로 돌아왔다. 이에 대해 《도원기서道源記書》(현존 최고最古 동학 초기 역사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정신이 혼미하고 미친 것 같기도 하고, 술에 취한 것 같기도 하여, 엎어지고 넘어지고, 마룻바닥을 치며 몸이 저절로 뛰어오르고 기氣가 뛰놀아 병의 증상을 알 수 없으며, 말로 형용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공중으로부터 완연한 소리가 있어 자주 귀 근처로 들려오는데, 그 단서를 알 수가 없었다. 공중을 향해 묻기를

“공중에서 들리는 소리는 누구입니까?”하니, 상제上帝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바로 상제이다. 너는 상제를 모르느냐? 너는 곧 백지를 펴고 나의 부도符圖를 받아라.”
“너는 나의 아들이다.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해라.”
선생께서 공경스럽게 가르침을 받아 아버지라고 불렀다.
상제께서 또 일컬어 말씀하시기를
“너의 전후 길흉화복을 내가 반드시 간섭하게 될 것이다. 또한 네가 이 정자에 들어앉아 이름과 호를 고치고 산 밖으로 나가지 아니하며, 소위 입춘시인 도기장존사불입道氣長存邪不入 세간중인부동귀世間衆人不同歸
도의 기운이 오래도록 있으니 사악함이 들어오지 못하고, 세상의 뭇사람들과 한가지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를 써서 벽상에 걸어두고 세상을 조롱하니, 실로 우스운 일이다. 네가 이왕에 사람들을 가르치고 포덕을 하니, 나를 위하여 지극히 섬기면 너 역시 장생하게 되어 천하에 빛을 비추게 될 것이다……. 너는 삼가서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하라.”
하는 말씀을 내렸다.]


이제까지 수운은 기도 대상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막연하게 하늘에, 상제님께 기도를 해 왔다. 그렇기에 직접 말씀을 내려주시는 인격적인 상제님은 낯선 존재였다. 이에 상제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라(勿懼勿恐)”고 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주문을 내려주시니 그게 바로 시천주주侍天主呪이다.

상제님께서 주문을 내려주신 이유를 <포덕문>에서는 다음처럼 설명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각자위심各自爲心하여 불순천리不順天理하고 불고천명不顧天命하였던 것이다.” 즉 사람들이 자신만을 위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명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상제님을 위하도록 초학 주문으로 ‘위천주爲天主’ 주문을 내려 주었다. 상제님께 직접 도를 받은 이는 수운 외에 천 년 전 미륵불이신 상제님을 친견했던 진표眞表대성사가 유일하다.

동학의 이름으로 포덕에 나서고 상제님으로부터 사람들을 가르치라는 천명을 받은 수운은 곧바로 포덕을 하지는 않았다. 이는 <수덕문>에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불의포덕지심不意布德之心 극념치성지단極念致誠之端(포덕할 마음은 두지 않고 오로지 치성만을 생각하였다)” 치성은 상제님에 대해 지극히 공경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상제님과 수운과의 수직적 관계일 뿐이었다. 애초에 도를 구하고자 한 목적은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혼란스러운 세상을 구하고 세상에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길을 찾기 위함이었다.

수운의 포덕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가장 첫 번째 신앙인은 부인 박씨였다. 박씨 부인은 물려받은 가산을 탕진한 남편, 계집종을 며느리로 삼은 남편, 여기저기 떠돌아다녀 재미나게 살림 한 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한 남편을 원망하며, 늘 미친 듯이 무엇을 중얼대고 흡사 무당처럼 신이 들린 모습에서 수없이 팔자타령을 하였다. 이런 한스런 심정이 《용담유사》<교훈가>에 나타나 있다.

“한울님도 한울님도 이리 될 우리 신명 어찌 앞날 지낸 고생 그다지 시키신고 오늘이사 참 말이지 여광여취如狂如醉 저 양반을 간 곳마다 따라가서 지질한 그 고생을 뉘로 대해 그 말하며.”

몇 차례나 용담에 빠져 죽으려던 박씨 부인은 마침내 신앙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조카 맹륜이 수운의 기행 이적을 보며 도를 배우기를 청하였다.

약 1년간 수운은 계속해서 수도하며 상제님께 받은 영부 그리는 법, 주문 수행법, 교리 등을 정립한 뒤에 포덕문을 지으면서 포덕을 시작했다. 이제까지 사람들과 담을 쌓고 지내왔으나, 이제는 집의 문을 활짝 열고 도를 듣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 찾아온 이들이 도의 이름을 묻자 “천도天道”라고 대답하였다. 이 천도는 상제님의 “무극대도無極大道”란 뜻이다. 그리고 가르침을 “동학東學”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동학의 ‘동東’은 동방 조선을 뜻하며 ‘학學’은 단순히 세상 학문을 배운다는 게 아니라 도道와 교敎를 배우고 실천한다는 의미이다. 즉 동학은 동방 조선에서 열린 천도(무극대도)를 따르고 실천한다는 의미이지 서학과 단순 대비한 것은 아니다. 상제님께서 열어주신 동방의 무극대도, 모든 진리가 통합되어 열매 맺는 그 천도를 배우고 닦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동학을 믿는다고 하지 않고 동학을 한다고 했고, 수운을 교주라기보다는 큰 선생으로 모셨다고 한다.

교세의 번창, 그리고 좌도난정의 배척 수운은 찾아온 이들에게 득도 과정과 상제님의 가르침, 주문 읽는 방법과 수도법을 가르쳐 주었다. 각지에서 도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6개월 동안 약 3천여 명이 제자가 되었다. 이에 제자들에게 포덕을 명하여, 경주를 넘어 경상도 일대에 널리 동학이 전파되었다. 1863년 12월 수운을 체포하였던 어사 정운구의 장계에 따르면 새재에서부터 경주에 이르기까지 동학이 널리 퍼져 있어 주막집 아낙네도 산골 초동도 주문을 외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주문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고 숨기지도 않았다고 한다.

수운은 교세가 번창해지자 교단의 조직을 만들어 각 지역마다 접소接所를 두었고, 그곳 우두머리인 접주接主가 구역 내 교도를 다스리는 접주제를 두어 1862 임술년 12월 29일 영해 매곡동에서 최초로 16명의 접주를 임명했다(이런 접주제는 철저히 인맥을 통한 연맥제였고, 접에 속한 교도들의 수가 수백 명을 넘으면 포包가 된다. 갑오동학혁명 당시 동도대장인 전명숙全明淑은 김덕명 포의 접주였다). 그리고 주문을 입도한 직후에 읽은 초학주문(위천주 주문)과 평생 읽어야 할 본주문(시천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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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나누었고, 식사 때 상제님께 아뢰는 식고食告, 집을 드나들 때 하는 ‘출입고出入告’가 있었고 입도식 절차도 정했다. 그 외에 천제도 드리고, 강도회講道會를 열어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 도담이 오고 가기도 했다.

하지만 동학이 경상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삼남 지역을, 계층에 불문하고 널리 퍼지자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조직적 동학 배척 운동이 일어났다. 상주 우산서원을 중심으로 한 상주 유생들은 동학도들을 ‘요적妖敵’이라고 부르고 동학은 서학의 다른 말이라며 박멸을 주장하였다. 여기에 정통 양반 집안인 경주 최씨 문중에서도 무당처럼 신이 내렸다고 생각한 수운의 모습을 좋게 보지 않았다. 온갖 험담과 비방을 하였고, 영남 일대 유림들은 동학을 좌도난정左道亂正으로 몰았다. 이에 잠시 남원 은적암으로 피신했던 수운은 생각을 가다듬고, 임술년 9월 경주로 돌아왔다. 운명은 정해져 있었던 것일까? 수운은 예정된 운명을 예감한 듯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순도殉道, 상제님 탄강을 예비하다


운명의 족쇄를 받아들이다 1863 계해癸亥년 여름부터 경상도 지역 유생들의 동학배척 운동은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미 지난 임술壬戌년에도 경주 관아에 체포되었던 수운은 동학도들 수백 명이 스승을 석방해 달라는 요구로 풀려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계해년의 배척 운동은 전국적 네트워크를 이룬 유생들이 연합하여 반동학 여론 조성 운동으로 조정에 압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칼춤을 추며 검가를 부르는 모습에서 역적모의를 한다고 오해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알고 있던 수운은 11월 하순경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을 불러 도통을 전수하고 그동안 지었던 글을 건네주며 간행하라고 명하고, 멀리 도망가라(高飛遠走)고 했다.

1863년 11월 20일 조정은 정운구鄭雲龜를 선전관으로 임명하여 12월 10일 1년 중 가장 추운 소한小寒 일에 잠자던 수운과 가족, 제자 23명을 체포하였다. 조정에서 잡으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전하며 피신하기를 권하던 제자에게 수운은 도는 자신에게서 연유한 것이므로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며 도피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 때 수운은 사다리의 한복판에 얽어매어 두 다리는 사다리 양편 대목에 갈라서 나누어 얽고, 두 팔은 뒷짐을 지웠고, 상투는 뒤로 풀어 사다리 간목間木에 칭칭 감고 얼굴은 하늘을 향하게 해 압송해 갔다. 당시 중죄인을 포박해 갈 때의 상례였다. 체포된 수운은 압송되어 가던 중 철종哲宗 임금의 국상을 당해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당시 경상감사 서헌순은 장계에서 “동학의 무리는 황탄한 생각을 품고 주문을 만들어 요사한 말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삿된 서학을 물리친다고 하였으나 오히려 서학을 답습하였으며, 궁약을 비방이라 속이고 칼춤을 추고 칼노래를 불러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였으며 은밀히 당을 형성하는 한편 귀신이 내려 술수를 가르쳐주었다고 사람들을 속였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조정은 수운을 극형에 처하라는 명을 내린다. 죄명은 대명률大明律 제사편祭祀編 금지사무사술조禁止師巫邪術條 일명 좌도난정지술左道亂正之術. 잘못된 도를 가르쳐 통치에 혼란을 초래한 죄다.

순도 당시의 일화 수운은 1864년 3월 10일 하오 2시경 대구 남문 앞 개울가에 있는 관덕당觀德堂 뜰(현재 대구시 중구 덕산동 일대)에서 참형되었다. 기다란 판자에 수운을 엎어놓고 묶은 다음 목 밑에 나무토막을 받친 후 칼로 목을 내리쳤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이날 참형을 집행하는 현장에서는 형졸이 칼로 수운의 목을 내리쳤지만 칼자국도 나지 않고 목도 멀쩡한 믿기 힘든 일이 발생했다. 이에 경상감사 서헌순을 비롯한 관헌들이 놀라움과 두려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러자 수운은 청수를 가져오게 하여 상제님께 정성스럽게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그 후 형리에게 목을 안심하고 베라고 말하고 나니 비로소 목이 베어졌다고 한다. 수운의 나이 41세. 3일간 효수한 뒤에 가족에 시신을 인도하여, 3월 17일 구미산 자락 대릿골 밭머리에 매장하였다(44년이 지난 1907년 시천교 교단에 의해 가정리 산 75번지로 이장).

참형 집행 이전에 수운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등명수상무혐극燈明水上無嫌隙 주사고형력유여柱似枯形力有餘
등이 물 위에 밝았다. 한 틈의 어둠도 없다. 기둥은 죽어 말랐다. 그러나 그러기에 힘이 남았다.


즉 비록 나를 죽이려고 없는 죄목을 만들어 씌우려 하지만 혐의를 잡을 틈새가 없다. 결국 너희들 손에 죽지만 나의 가르침은 마른 기둥 같으니 그 힘은 여전히 남아 있으리라는 것이다. 또한 “전 40은 내려니와 후 40은 뉘련가. 천하의 무극대도가 더디도다, 더디도다, 8년이 더디도다.”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 조선에 시천주를 선포하고 다시 개벽의 도래를 선언한 수운은 이렇게 짧은 공생애를 마치고 조선 조정에 의해 어이없이 처형되었다. 이후 8년이 지나 1871 신미辛未년에 수운에게 천명을 내리신 상제님께서 우리 동방 땅에 직접 강세하셨고, 30년 후인 1894년에는 후천 개벽을 부르짖은 역사의 대지진인 갑오동학농민혁명甲午東學農民革命이 일어났다.

최수운의 한계와 진리적 사명


수운이 천명을 완수하지 못한 이유 지극한 정성으로 상제님의 천명을 받았던 수운은 천명을 완수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1871년 신미년에 동방 조선 땅으로 강세하신 증산상제님께서는 수운이 유교의 테 밖에 벗어나서 진법을 들춰내어 대도의 참빛을 열지 못했다고 그 한계를 지적하셨다(증산도 도전 2편 30장 14~15절).

수운은 퇴계 학통을 이은 아버지에게서 직접 글을 배웠기에 유교적 소양과 지식을 풍부하게 갖춘 인물이었다. 이런 모습들이 《동경대전》에서 보인다. <수덕문>에서 수운은 동학이 공자의 도와 대동소이하다고 말하고 있고, 같은 글에서 인의예지는 선성先聖이 가르친 것이며 자신이 정한 것은 수심정기修心正氣일 뿐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또한 옛 선비들은 천명에 순종하였으나 후학들은 천명을 잊어버린 것을 자신은 한탄한다고 하면서 동학이 유학의 계승자임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6+)


<포덕문>에서 수운은 성인이 자연에 대한 관찰을 통해 현상계의 일체 변화의 원인과 존재의 근원을 하늘에서 찾아 천명에 대한 공경과 천리에 대한 순응의 근거를 제시하였고 사람이 군자가 되고 학문이 도덕이 되는 길을 밝혀주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박경환 같은 이는 동학은 유학의 사유형식과 지향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했고, 심지어 종교학자 최준식은 동학을 성리학의 새로운 해석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동학을 “중국적인 성리학이 갖고 있던 세계관이 나름대로 철저하게 극복되고 대중적인 실천의 수준에까지 가게 된 높은 사상”으로 높이 평가하면서 ‘개혁유교’, ‘세속화된 유교’로 파악하고 있다.

이에 증산상제님은 유교의 테를 벗어나지 못한 동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르침을 제시하여 ‘참동학’이라고 선언하심으로써, 수운의 가르침이 온전히 완성될 수 있도록 해 주셨다(참동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상제님의 말씀과 행적인 담긴 『도전道典』과 안경전 종도사님의 『증산도의 진리』를 참조하길 바란다).

최수운의 공덕과 사명 수운은 상제님께서 오실 길을 예비할 뿐 아니라 앞으로 닥칠 후천개벽의 상황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으로 오시는 증산상제님의 무극대도를 받아서, 상제님을 모시는 길(侍天主)이라고 전했다. 증산상제님께서는 ‘최수운은 내 세상이 올 것을 알렸다’(도전 2편 31장 5절)라는 말씀으로 그의 공덕을 인정하시어 칠성령七聖靈의 한 위位로 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수운을 선도仙道의 종장(도전 4편 8장 2절)과 일본의 명부 대왕(도전 4편 4장 4절)으로 임명하여 우주 통치 사령탑인 천상 조화정부에서 상제님 세상을 건설하는 데 역사하게 하는 위대한 사명을 내려 주셨다.

마지막으로 수운이 간절한 마음으로 후학들에게 시천주 신앙과 도를 잘 닦아 새 세상을 맞이하라고 전한 말씀을 몇 가지 음미해 보며 글을 마치려 한다.

●운수야 좋거니와 닦아야 도덕이라. 너희라 무슨 팔자 불로자득不勞自得 되단 말가 <교훈가敎訓歌>
●성경誠敬(‘성’은 거짓됨이 없이 마음을 다하여 실행하는 것, ‘경’은 옳은 길이라 판단하면 곧 그것을 내 것으로 몸에 배게 하는 것)이자 지켜내어 차차차차 닦아내면 무극대도 아닐런가!
시호시호時呼時呼, 그때 오면 도성입덕道成立德 아닐런가! 급급한 제군들은 인사는 아니 닦고 천명을 바라오니 졸부귀불상猝富貴不祥이라
애달프다! 저 사람은 명명한 이 운수를 다 같이 밝지마는 어떤 사람 군자 되고 어떤 사람 저러한고 우습다 저 사람은 자포자기自暴自棄 모르고서 모몰염치冒沒廉恥 장난하니 이는 역시 난도자亂道者요. 사장師丈 못한 차제도법次第道法, 제 혼자 알았으니 이는 역시 난법자라. 난법난도하는 사람 날 볼 낯이 무엇인고 <도수사道修詞>
●시운詩云 벌가벌가伐柯伐柯 하니 기측불원其則不遠이라 내 앞에 보는 바는 어길 바 없지만은 이는 도시都是 사람이요 부재어근不在於近이라 목전지사目前之事 쉽게 알고 심량心量 없이 하다가서 말래지사末來之事 같잖으면 그 아니 내 한恨인가! <흥비가興比歌>
(객원기자 이해영 / 교무녹사장, 서울관악도장)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諭)詞
일반적으로 한 종교의 창시자는 별도로 경전을 직접 집필한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경전 집필은 후대의 몫이었다. 하지만 동학은 드물게도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가 직접 기록을 남겼다. 이것이 수운의 공생애가 2년 반 정도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교세가 급속하게 확장된 이유일 것이다. 수운은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諭)詞』(수운가사水雲歌詞라고도 함)라는 기본 경전을 남겼다.

『동경대전東經大全』은 ‘동학의 경전을 빠짐없이 모아 엮은 책’이라는 뜻으로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용담유사』는 지식인 뿐 아니라 일반인 특히 부녀자들도 쉽게 가르침을 이해하고 따를 수 있도록 한글 가사체 형식으로 되어 있다.

동경대전에서 문文에 해당되는 편은 천상문답사건과 상제님께 받은 무극대도를 세상에 펴야 한다는 논리가 담겨 있는 <포덕문布德文>, 동학을 논하고 동학의 요체를 밝히고 있는 <논학문論學文>, 도인이 지켜야 할 계율과 동학의 가르침을 행하면 나타나는 수행의 효험 등을 기술한 <수덕문修德文>, 천도의 인식론적 근거를 통찰하여 시천주의 본의를 올바르게 인식하도록 가르침을 펴고 있는 <불연기연不然其然> 등이고 그 외에 <탄도유심급歎道儒心急>, <필법筆法>, <축문祝文>등의 글이 들어 있다. 시詩로는 <입춘시立春詩>, <절구絶句>, <강시降詩>, <좌잠座箴>, <화결시和訣詩>, <결訣>, <우음偶吟>, <제서題書>, <영소詠宵>, <유고음流高吟> 등이 있으며, <주문呪文>과 <팔절八節>과 수운이 제자들에게 보낸 <통문通文>과 <통유通諭>가 각기 한 편씩 있고, 동경대전 판각 당시 해월이 쓴 <발문跋文>,<입도식入道式>, <치제식致祭式>, <제수식祭需式> 등의 의식을 행하는 방법 등을 적은 글이 들어 있다. 즉 동경대전은 수운의 가르침을 담은 글들과 종교의식에 필요한 사항을 적은 글, 수도 절차나 수도를 위해 필요한 내용과 시의 형식을 빌린 잠언과 같은 글 그리고 문학적인 정서를 보여주는 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용담유사龍潭遺(諭)詞』는 초기에는 유사팔편 혹은 가사팔편이라 불렸는데, 수운이 태어나고 자라고 득도한 용담의 내력과 득도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 <용담가龍潭歌>, 당시 정치 사회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불안해하던 부녀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지은 <안심가安心歌>, 득도하기까지 어려운 생활역정과 포덕할 때의 즐거움과 친척들로부터의 괴담흉설로 인하여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수에 대하여 구구절절이 읊고 있는 <교훈가敎訓歌>가 있다.

또 수운의 출생 성장 득도 과정과 함께 꿈속에서 도사를 만나 깨우침을 얻는다는 내용 및 상원갑에 대한 예언 등이 담겨 있는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 관에 쫓기는 몸이 되어 직접 가르침을 베풀지 못하는 안타까움 속에서 제자들에게 도를 닦는 요체를 설명하고 있는 <도수사道修詞>, 동학을 믿음으로써 다 같이 동귀일체同歸一體 할 것을 권유하는 <권학가勸學歌>, 도덕의 귀중함을 깨우친 노래로 상제님의 조화를 자각 실천함과 성경誠敬 2자를 강조하고 있는 <도덕가道德歌>, 시경의 노래체인 흥興과 비比를 사용하여 도를 닦는 법을 가르친 <흥비가興比歌> 등이 있으며, <검가劍歌>는 갑오동학혁명 당시 동학군의 군가로 애창되어 정치적 변혁을 꾀하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시천주 신앙의 왜곡과 참동학 출현의 당위성
“천(天)은 천이요 인(人)은 인이니 인내천(人乃天)이 아니니라. 손병희가 ‘아이를 때리는 것(打兒)’을 ‘하늘을 때리는 것(打天)’이라고 이르나 아이를 때리는 것은 아이를 때리는 것이요, 감히 하늘을 때린다고 할 수 없느니라. 하물며 사람의 생사와 화복이 하늘에 달려 있거늘 어찌 하늘을 때린다 하리오. 하늘은 억조창생의 임금(君)이요 억조창생의 아버지(父) 되나니 옛 성현들이 하늘을 모시는 도가 지극히 엄숙하고 지극히 공경스러워 통통속속(洞洞屬屬)하고 수운의 하늘을 모시는 가르침이 지극히 밝고 정성스러웠느니라. 큰 근본(大本)이 어지러워지면 만덕(萬德)이 모두 그르게 되느니라.” 하시니라. (도전 5편 233장 9~14절)


최수운 대신사가 대구 장대에서 순도를 당한 이후 동학은 오랫동안 불법화되었다. 동학도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조정의 추적을 피해 도주하거나 인적 드문 곳으로 잠적하였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동학의 조직을 재건하고 끝내는 동학의 세력을 크게 떨친 인물이 2세 교주가 된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1827~1898)이다. 경주에서 출생한 최시형은 35세에 동학에 입교한 뒤 1862년 3월 수운으로부터 포교에 힘쓰라는 명을 받고 경북 일대를 돌며 포교를 하였다. 탁월한 친화력을 바탕으로 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동학으로 인도하여 1863년 7월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에 임명되었고, 8월에 도통을 이어 받았다. 1865년부터 수운의 순도일과 탄신일에 동학교도들의 비밀모임을 가지기 시작하여 ‘사람이 하늘이고 하늘이 사람이다’는 설법을 하여 신분질서를 부정하는 혁명적 가르침을 전했다. 이듬해에는 적서의 차별을 철폐해야 한다는 설법을 하기도 했다.

1878년 접소接所를 열고 교도들에게 접제接制의 통문을 돌려, 도를 펼 것을 알렸다. 1880년 경진 5월 인제군에서 목판본 《동경대전》을 간행했으나 전해지지 않고, 1881년에는 단양 샘골에서 《용담유사》를 간행했다. 이후 《동경대전》은 1883년 경주판이 목활자본으로 나와 현존 최고 경전 판본으로 남아있고, 1888년 인제에서 목판본으로 최초 판본인 경진판 목판으로 중간重刊하였다. 수운 순도 후에도 동학의 교세가 급신장할 수 있었던 것은 가르침을 담은 경전이 인쇄되어 보급되었기 때문이었다.

1892년 7월 호남 접주 서인주(서장옥), 서병학 등이 찾아와 교조 신원운동을 펼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동학의 창시자 수운의 억울함을 벗고 동학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운동이었다. 해월은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그해 11월에 삼례역에서 신도들이 모여, 교조신원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12월에 정부에 상소문을 보내고 이듬해 2월에 상경하여 광화문 앞 복합상소를 올렸다. 1893년 3월 보은집회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2만 명이 모였는데, 이는 단순히 교조 신원만이 아닌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내세우며 정치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때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인물이 동학혁명의 지도부인 전봉준과 김덕명, 김개남, 최경선 등이었다.

1894년 갑오년 1월 전봉준이 주도한 고부봉기를 시작으로 갑오동학혁명이 일어났으나, 해월은 때가 아니라 하며 반대하였다. 그러나 10월 재기포 때에는 전체 동학교도에 총기포總起包령을 내렸다. 1894년 12월 말 동학혁명이 실패하자 피신생활을 하면서 포교에 힘을 기울이다 1898년 3월 원주 송골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6월 교수형을 당하였다.

해월은 탁월한 조직 구성력과 혁명적 가르침과 소박한 인품 등을 갖추고 있어, 신관神觀에서 수운의 본래 가르침을 왜곡하지만 않았더라면 수운보다 더 탁월한 종교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인격적으로 존재하시는 상제님의 존재를 직접 깨달을 수 있는 어떤 영적 체험이 없던 해월은 수운의 시천주 신앙을 왜곡하여, 만물 안에 하느님이 내재하고 있고 그렇게 모실 때 진정한 모심이 이루어진다는 양천주養天主 사상을 제시했으며, 양천주의 대상을 마음이라고 했다. 즉 양천주의 신은 수운이 알리려 했던 인격적인 모습의 천주(상제님)가 아닌 사람의 마음속에서 키울 수 있는 신이다. 해월의 범신론적인 시각은 하느님의 인격적 성격과 주재적 성격을 부인하게 된다. 이는 불교의 ‘모든 만물에 불성이 깃들어 있다’는 얘기와도 혼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 결과 해월은 천주보다는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인시천人是天(사람이 곧 하늘이다), 사인여천事人如天(사람을 섬기되 하늘처럼 섬겨라)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신관은 후일 손병희의 인내천 교리로 이어져 동학의 본래 가르침과는 동떨어지게 되었다.

해월의 순도 이후 동학의 3세 교주가 된 사람은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1861-1922)다. 손병희는 청주관아의 서리인 손두흥의 아들로 서자였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면서 일본 신문에 낸 광고에서 종지宗指는 인내천人乃天(사람이 곧 하늘)임을 천명하였다. 또한 천도교 초기의 주요 교리서인 <대종정의大宗正義>에서도 인내천 사상이 천도교의 핵심교리임을 밝혔다. 이는 수운의 원래 가르침이 왜곡된 것이었다. 동경대전을 비롯한 그 어떤 경전에서도 인내천이란 말은 찾을 수 없으며, 인격적 상제님을 인정하지 않는 성리학의 주장과 유사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본래의 동학과 지금의 천도교가 과연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으며, 더불어 수운이 전한 상제님의 강세와 후천개벽 및 무극대도의 출세라는 메시지에 대해 본연의 전거를 세워 이를 올바르게 전하고 집행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임을 확인하게 된다. 나아가 이러한 사실은 왜 이 시대에 참동학 증산도가 출현해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참고문헌
『증산도 도전』(대원출판, 2003)
『천지의 도 춘생추살』(안운산, 대원출판, 2007)
『역주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동경대전』(윤석산, 동학사, 2001)
『용담유사』(대원출판, 2000)
『동학의 창도자 최수운』(김현일, 상생출판, 2013)
『전봉준 장군과 동학혁명』(김철수, 상생출판, 2011)
『동서양 성자들이 전한 증산상제님 강세소식 2』(세종출판기획, 증산도 본부, 2004)

『녹두전봉준 평전』(김삼웅, 시대의 창, 2007)
『도올심득-동경대전1』(김용옥, 통나무, 2004)
『사상기행1』(김지하, 실천문학, 1999)
『동학이야기』(김지하, 솔, 1996)
『이이화의 못다한 한국사 이야기』(이이화, 푸른역사, 2002)
『한국의 종교,문화로 읽는다 2』(최준식, 사계절 출판사, 1998)
『표영삼의 동학이야기』(표영삼, 모시는 사람들, 2014)
『동학1-수운은 삶과 생각』(표영삼, 통나무, 2004)

*1)
노론 일당 정치- 조선 후기를 장악했던 노론 세력은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친일 민족반역자로, 해방 이후에는 친미 사대주의자로 변신하여 현재도 우리 사회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다. 해방 후 이들에 대한 단죄 시도였던 반민특위反民特委는 이승만과 친일 경찰, 친일파 세력들에 의해 좌절되었다. 또한 일제의 식민사관을 주입시킨 두계 이병도李丙燾의 매국사학은 현재도 우리 국사학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

*2)
이광순, <수운선생과 동학창도>《한국사상(10)》, 한국사상연구회, 1972

*3)
최진립崔震立- 경주 최씨 시조인 고운 최치원 17세손이 수운 최제우의 조상인 최진립이다. 최진립은 사성공파 시조로 그의 아들 최동량 대에 터전을 이루고, 손자인 최국선(1631~1682)으로부터 28세손인 최준(1884~1970)에 이르는 약 300년 동안 부를 누렸다. 그 유명한 경주 최 부자집 이야기이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독립자금을 지원했으며 마지막 부자인 최준은 1947년에 대부분의 재산을 영남대학교 설립에 기부했다.

*4)
연담蓮潭 이운규李雲圭(1804-?)- 정역을 지은 김일부와 오방불교의 창시자 김광화의 스승이다. 세종대왕의 아들인 담양군의 13세손으로 과거 급제 후 흥선대원군과 친밀한 사이였다고 한다. 연담은 전통적인 유교를 벗어나 유불선 삼교를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였는데 역학에 바탕을 둔 선후천 교역 사상을 갖고 있었다. 이런 가르침은 김일부를 통해서 유교적인 색채가 짙은 영가무도교로 발전하게 되고, 불교적 색채를 띤 김광화의 오방불교(남학南學)로 발전하게 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연담은 최수운에게 쇠퇴해 가는 선도의 부흥을, 김광화에게는 불도를, 김일부에게는 유교를 각각 부흥시키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5)
초학주문- 위천주爲天主 고아정顧我情 영세불망永世不忘 만사의萬事宜 상제님을 위하면 내 사정을 돌보아 주시고 영원토록 상제님을 잊지 않으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다.
강령주- 지기금지至氣今至 원위대강願爲大降 상제님 기운이 크게 내릴 것을 바라는 주문
본주문- 시천주侍天主 조화정造化定 영세불망永世不忘 만사지萬事知
이 주문에 대해 증산도 안운산 태상종도사님은 “하나님을 모시고 조화를 정하니 만사지 문화를 개창해서 좋은 세상 만들어주는 은총을 후천 5만년 영세토록 잊지 못한다는 말이다”라고 정명해 주셨다.
또한 수운은 <논학문>에서 ‘시侍’를 ‘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 일세지인一世之人 각지불이各知不移’라고 풀이하였다. 마음으로는 상제님의 영을 접하고 밖으로는 기화의 작용이 있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변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정定’을 풀이하기를 “그 덕에 합하고 그 마음을 정하는 것”이라고 하여 천주를 지극히 모시면 저절로 하느님의 덕과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지知’는 “그 도를 알고 그 지혜를 받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6)
수덕문修德文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천도지상天道之常이요 유일집중惟一執中은 인사지찰人事之察이라 고故로 생이지지生而知之는 부자지성질夫子之聖質이요 학이지지學而知之는 선유지상전先儒之相傳이라 수유곤이득지雖有困而得之한 천견박식淺見薄識이라도 개유어오사지성덕皆由於吾師之盛德이요 불실어선왕지고례不失於先王之古禮니라.
원과 형과 이와 정은 천도의 떳떳함이요, 오직 한결같이 중도를 잡는 것은 인사의 살핌이니라. 그러므로 나면서 아는 것은 부자(공자)의 성스러운 바탕이요, 배워서 아는 것은 먼저 선비들이 서로 전해오는 것이니라. 비록 힘들여 얻은 천박한 견식과 지식이라도 모두 우리 스승의 성덕에 말미암음이요. 선왕의 옛 예의를 잃지 않음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