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생사를 거는 신앙은 거리낌이 없습니다

[가가도장]

오영환 성도님은 1966년 병오생으로 서울에서 출생했다. 중1때 학업을 중단하고 고모님께서 주유소를 오픈하신 강릉에 가서 낮에는 주유소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야간업소에서 라이브 가수로 노래를 하며 생활했다. 1990년도에 SKC선경 영업부 영상비디오분과에 입사하여 강릉지부의 판매영업과 수금 업무를 맡아 매우 능란한 대인관계와 때로는 세게 밀어붙이는 방법을 통해 일을 해결해 나갔다. 짧은 기간 내에 해결을 잘 해내는 수완때문에 회사에서 인정을 받아 승진이 빨랐고 20대 초반의 나이임에도 월수입이 많은 편이었다. 어느 정도 업무를 익히고 영업이 자리 잡을 무렵 강원영서지역 전체 협회에서 SKC 불매 운동이 강력하게 전개되는 바람에 그 지역 담당으로 영서권의 지점인 춘천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거기에서 증산도를 만났고 인생 자체가 완전히 변하게 되었다.

Q1. 처음 증산도를 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 하루는 숙소 욕실 겸 화장실에 갔었어요. 좌변기 물통 위에‘ 한민족과 증산도’라는 책이 있더라구요. 제목에 끌려서 단숨에 그 책을 다 읽었습니다. 춘천에 오기 전 가톨릭Catholic 신앙을 하였는데 그 때 느꼈던 성경의 모순과 의구심이 단번에 해결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고 감동적이었습니다.

Q2. 구체적인 증산도 진리 공부는 어떻게 하셨나요?


- 당시 숙소 맞은편 방에 증산도를 신앙하는 강원대 약학과 학생이 있었습니다. 증산도 내용을 더 알고 싶어 물었더니 그분은 제게 많은 진리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자신은 도를 닦는 사람이라며 저에게 태을주 21독을 읽어 주었고, 말씀테이프 3개를 전해 받았는데 안경전 종도사님의 성음이 담긴 ‘이것이 증산도다’라는 테이프였습니다. 처음 3개의 테이프를 다 듣고 난 뒤 너무나도 충격적이어서 한계령 휴게소에 내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멍하게 허공을 바라다보던 제 모습이 기억납니다. 한 세트가 43~44개로 구성된 종도사님의 테이프를 그 약대생에게 부탁하여 구매했어요. 테이프가 늘어지면 다시 재 구매를 하여 들을 정도로 열심히 들었습니다. 종도사님의 말씀이 담긴 그 때의 테이프는 저의 인생관을 완전하게 바꿔 버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증산도를 만나면서 세상을 별 비전 없이 바라다보던 제 가슴 속에 명확한 목표라는 것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Q3 첫 도장 방문의 느낌은 어떠하던가요


- 처음 도장에 들어 와서 신단을 보니 경외심이 들었습니다. 제대로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에서 수행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를 따라서 서울 세곡동 제7공군 비행장 옆에 위치한 ‘덕암사’라는 절에 갔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동안거 기간이라 10일 동안 그 절에서 같이 수행을 했었는데, 그 때의 기억 때문인지 수행소리가 낯설지는 않았고 오히려 마음이 참으로 편안하였던 것 같습니다. 춘천중앙도장에서 교육을 받고 이듬해인 122년에 입도를 하였습니다.

Q4 신앙과정 중에 극적인 체험을 하신 사례가 있나요


-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는데 회사 차량이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차를 견인해 와야 한다고 저보고 사무실로 나오라는 거예요. 그 때는 정말 나가기가 싫었어요. 치성에 참석해야 했거든요. 회사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직원들과 시덥지 않은 대화 중에 네 차가 더 빠르다는 둥 내 차가 더 빠르다는 둥 옥신각신하다가 그만 사고 난 지점까지 시합을 하게 되었어요. 평소 60km 정도로 달리던 커브 길을 120km를 밟았습니다. 그런데 군용 탱크를 호위하던 대형 선두 차량과 정면 추돌을 하게 된 거예요. 제가 운전하던 승합차는 정확히 반토막이 나버렸고 바퀴 네 개도 모두 빠져버리는 정말 끔찍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차량이 충돌하는 순간 상체를 굽히고 눈을 꽉 감고 있었는데, 차량이 부서지는 부위와 가족들과 도장에서 친분이 두터웠던 성도님들의 얼굴 모습이 한 컷 한 컷 슬라이드 장면처럼 생생하게 지나갔어요. 그 때 순간적으로 여러 조상님들께서 저를 겹겹으로 싸고 같이 엎드려 계신 것을 보게 되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손으로 저를 감싸고 계시더라구요. 덕분에 저는 오른쪽 새끼손가락만 조금 긁히고 전혀 다친 곳이 없이 멀쩡하였습니다. 이후 조상님들께서 항상 저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조상님들에 대한 경외심과 감사함을 진실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Q5 태을주로 영적 체험을 하신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 1995년 음력 6월 중순에 딸 세련이를 낳고 아내가 분만실에서 회복실로 옮겼습니다. 회복실은 병실을 따뜻하게 해놓아서 너무 더워 잠을 자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마침 저녁에 회복실로 산모 두명이 새로 들어온다고 침대 두 개를 배치하길래 그날은 제가 그 침대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잠깐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세 명의 남자가 자꾸 제몸을 칼로 쑤시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순간 잠이 깨었는데 칼에 찔린 그 부위가 마치 실제상황처럼 너무 아픈 거예요. 캄캄한 새벽에 일어나 침대에 앉아서 태을주를 읽고 있었는데 그 침대가 칼에 찔려 사망한 사람이 죽는 순간 사용하였던 침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아침에 영양제를 투약하러 병실에 들어온 간호사에게 어떻게 산모 회복실 침대로 영안실에서 쓰던 것을 쓸 수 있냐고 따져 물었더니 그럴 리가 없다는 겁니다. 한참 후에 간호과장이 와서 저를 좀 보자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신기해했습니다. 그 인연으로 퇴원할 때 ‘증산도의 진리’와 ‘이것이 개벽이다’ 책 열 권을 선물하게 되었습니다.

Q6 도장책임자로 일하시는데, 도장 운영과 활동은 어떻게 하고 계신지?


- 삼척은 관리지역이 넓은 편이예요. 저 아래 울진까지 심방을 가야 합니다. 성도님들이 지역에 골고루 흩어져 계시기에 한 성도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보통 1시간 반에서 2시간 이상을 차로 이동을 해야 합니다. 차량 유지비가 만만치 않지만 성도님들 찾아뵙는 일이라 즐겁게 다니고 있습니다. 활동도 열심히 하려고 노력 중인데, 현재 상생방송 모임을 하나 운영하는 게 있습니다. 열댓 명의 중산층 분들로 이루어져 있고 분위기도 좋습니다. 그 중 리더 격인 한 분이 있는데, 그 분을 포교 중입니다. 리더가 신앙을 하면 그 외 팀원들이 자연스럽게 진리를 받아들이는 경우를 몇 번 체험했습니다.

또 도장 운영과 관련하여 기도의 힘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느끼곤 합니다. 과거에 제가 신앙했던 도장이 여러 문제로 인하여 큰 어려움에 봉착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떻게든 도장을 살리고 싶어서 기도로써 문제를 극복해 보자 생각하고 집중해서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날 꿈에 위엄있는 모습의 신명이 나타나서 애쓴다고 격려를 해주었는데, 그 날 이후로 도장의 문제가 쉽게 풀렸습니다. 저의 기도에 응답해주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Q7 이갑순 성도님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 제가 직장을 다니고 있었을 때 당시 제 아내는 고등학교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좋아하는 눈치가 보였어요. 제가 한번 떠봤더니 그렇다는 거예요. 나이도 어린 게 까분다고 면박을 줬는데, 어느 날 제 방에 갔더니 그 얘가 와있는 거예요. 학교를 졸업하고 저를 찾아왔던 겁니다. 그런데 그 방에서 태을주를 읽고 있는 거예요. 그걸 보고 아 이건 운명이구나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다짐을 받았습니다. 난 어차피 상제님 일을 해야 하니 가정을 돌보지 못한다. 그래도 결혼하고 싶으면 하겠다. 제 아내는 동의를 했고 그렇게 저희들은 가정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Q8 따님이신 오세련 성도에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서요


- 제 딸이 다섯 살 즈음에 기독교 계열 유아원을 다니고 있었던 때입니다. 하루는 선생님과 싸우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세련이가 선생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있다는 거예요. 유아원 선생님이 밥을 먹을 때는 꼭 하나님께 ‘잘 먹겠습니다’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데 세련이가 대뜸 하나님이 아니고 상제님이라고 해야 맞다고 하면서 기도를 하지 않고 있다는 거예요. 선생님은 하나님께 기도를 하지 않으면 밥을 먹을 수가 없다며 서로 옥신각신 하고 있었어요. 유아원 원장님과 친분이 있어 저에게 연락을 주셨더라구요. 재미난 구경 좀 하러 유아원에 빨리 오라고 하여 가 보았더니, 세련이는 기도를 하지 않으면 밥을 안 준다고 하니까 기도를 안 하고 밥도 안 먹으려고 했어요. 제가 유아원에 들어오고 있는 것을 보고 세련이가 속이 상해서 눈물이 글썽글썽해지더니 큰 소리로 “우주1년도 모르는 것이 무슨 선생이냐”고 소리를 빽 지르면서 유아원에 다니지 않겠다면서 거기를 뛰쳐나왔어요.

Q9 신앙의 좌우명이 있다면 소개를 해주시지요


- 제가 좋아하는 성구는 따로 있는데요, 오늘은 이 성구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열풍뇌우불미熱風雷雨不迷”(아무리 열풍과 뇌우가 부는 가혹한 시련과 역경이 닥쳐도 절대 미혹되거나 흔들리지 말라) 신앙이나 도장 운영에 아무리 큰 어려움이 있더라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의지를 갖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또“ 무한유사지불명無恨有司之不明하라”(맡은 바 일을 바르게 처리하지 못해 한을 남기지 마라)는 성구도 깊이 새기는 말씀입니다. 최근 세월호 사건으로 세간이 떠들썩합니다. 많은 어린 영혼들이 목숨을 잃은 이번 사건은 참으로 슬픈 사건입니다. 사건의 중심에 있는 선장의 모습을 통해서 저는 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맡은 바 천하사 소임을 다하는, 한을 남기지 않는 일꾼이 되고 싶습니다.

Q10 끝으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 두 지역에 가가도장과 도방을 열 계획입니다. 처남이 있는 도계지역과 성도님들이 모여 있는 울진지역입니다. 처남과 기미가 맞는 사람들을 엮어서 도방을 열 생각입니다. 울진은 삼척과 거리가 멀어서 꼭 도장이 있어야 하는 곳입니다. 먼저 가가도장을 열어 그쪽 기운을 열고 도방을 세울 계획입니다. 삼척은 인구밀도가 낮은 곳입니다. 이런 지역에서는 원거리에 효과적인 홍보방법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래서 고안한 것이 신문 삽지입니다. 신문은 지역 곳곳에 전달되니 제가 지역을 찾아다니는 수고로움을 덜어줍니다. 직장생활로 개척포교가 힘든 성도님들에게도 진리홍보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10만부의 상생방송 전단지를 홍보할 계획입니다.


내가 보살핀 분이 신앙을 잘하면 나의 신앙이 치유가 돼요
-부인 이갑순 성도님(1972년생, 122년 입도) 인터뷰

Q1 신앙의 시작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 본래 부모님께서 신명을 잘 섬기고 제사를 아주 잘 모시는 분들이셔서, 남편의 권유를 받고 도장에 처음 방문했을 때도 전혀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신앙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Q2 신앙의 보람은 어디서 찾으시나요?
- 입도 후부터 현재까지 신앙의 큰 체험은 별로 없지만 상제님과 태모님 태상종도사님과 종도사님의 은혜와 가르침에 대해 한 치의 의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한 사람 한 사람을 포교하여 입도를 하게 되고 또 그 분들이 신앙을 잘하시는 것을 보면서 저는 큰 기쁨을 얻었습니다. 또 한 사람의 가족이 생겨나고 그분으로 인하여 또 다른 분들이 신앙을 하게 되는 것이 저에게는 최고의 기쁨이고 보람입니다.

Q3 신앙의 고비가 있을 때 이겨내는 방법은?
- 남편을 내조하면서 재정적으로 힘든 일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수록 더욱 더 상제님과 태모님 태상종도사님과 종도사님께 기도하고 또 매달리면서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오직 근본신앙의 힘으로써만 모든 신앙의 고비를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4 신앙에 대한 극적인 체험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셔요
- 10년 전 일입니다. 당시 저는 동해시 천곡동에 위치한 꽤 규모있고 소문난 횟집에서 일을 하면서 녹록치 않은 한 달 월급으로 어려운 살림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에게 한 사람은 전적으로 상제님 일만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면서 (사실은 20년 전부터 거의 2~3년 빼고는 도장 일만 해 왔지만) 남편에게 도장 일만 하기를 권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횟집 주인 아들이 저에게 회 뜨는 기술을 배우라고 하는 거예요. 당시 회 뜨는 일을 배우려면 짧아도 족히 2~3년은 걸리고 비용도 만만치 않고 해서 대부분 엄두를 잘 내지 못하는데 주인 아들이 전폭 지원해 주겠다는 거예요. 그런 계기로 저는 회 뜨는 기술을 쉽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때 신도세계의 조상님들이 남편이 오로지 사람 살리는데 전념하라고 무한한 지원을 해주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감사했습니다. 그 후로 수입은 2배 이상 늘게 되었습니다.

Q5 오세련 성도님이 방송국에 지원한다고 했을 때 어떠셨는지요?
- 딸아이가 스스로 상생방송국에 지원서를 제출하고 봉직을 한다고 했을 때 너무도 고마웠고 지금까지 서원을 하여 온 소원 하나가 이루어져서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부디 자기 자리를 잘 지키면서 큰 일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큰것을 받았고 진실로 낳고 기르면서 해 준 것도 별로 없는데, 그저 철없는 어린 아이로만 봐 왔는데, 큰 변화 없이 순수하게 잘 자라나서 상제님의 혼이 되고 증산도의 수호신이 되겠다고 다짐할 때는 너무도 고마웠고 대견했습니다. 그저 힘들어도 진실한 참 일꾼으로 늘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증산도 문화권에서 꼭 필요로하는 일꾼으로 성장하기를 두 눈을 감고 가슴 속 깊이 두 손을 꼭 모아 기도할 뿐입니다.


지금도 태상종도사님 성음의 태을주 주문을 따라 읽으면 저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립니다.
-처남 이경순 성도님(1967년 정미생, 131년 1월 입도)의 신앙수기

1990년경 삼척시 도계읍에서 어느 날 집으로 가는 골목길에 누가 이사를 갔는지 버려진 몇 가지의 짐들 옆에 책들이 보였습니다. 평소 책을 모으던 습관이 있어서 그 중 읽을 만한 약 열 권을 골라 집으로 가져왔는데, 그 책들 속에『 이것이 개벽이다』라는 책 두 권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 책의 주인은 서울잠실도장 이○○ 포감님이셨습니다. 당시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소재의 도계여중학교 교사이셨고 제 여동생의 담임선생님이셨습니다. 포감님이 이사를 가시는데, 여러 책들과 더불어『 이것이 개벽이다』를 미처 챙겨가지 못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개벽이다』책을 보면서 앞으로 이 세상에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는구나, 앞으로 개벽이라는 일이 벌어지는구나, 옥황상제님께서 증산이라는 도호를 가지고 이 땅 전라북도에 육신의 옷을 입으시고 친히 강세하셨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도장이 어디 있는지 몰랐고, 감히 찾아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가 몇 년이 지난 후 매제 될 사람이 집에 인사를 온다고 해서 만나게 되었는데 글쎄 이 사람이 증산도를 신앙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후로 춘천에서 동생 내외가 가끔 집에 오면 매제와 여동생은 제게 진리에 대한 얘기를 장시간 동안 해주었습니다. 도계읍 사무소 앞 큰 다리 위에 서서 진리를 전해 들으면서 밤을 새웠던 기억이 새롭기만 합니다.

늘 입도할 마음은 있었지만 눈치만 보고 있다가 동생 내외의 끈질긴 권유로 131년 1월에 입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이 증산도 신앙을 잘 이해하지 못하여 10년 가까이 도장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동생 부부의 권유로 141년 5.18 대천제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때 태상종도사님의 말씀을 받드는데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정말 혼이 났었습니다.

갑오년 올해에는 육임 천명을 근본으로 하여 도계읍에 꼭 가가도장 또는 도방을 개창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의 가장 커다란 꿈은 사람을 많이 살려내는 충직한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꼭 천명완수를 이루는 일꾼이 되어 상제님의 진리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