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혼이 되는 일심신앙을 하라
[태상종도사님 말씀]
道紀 135년 6월 24일, 포정원 조례
내가 신도를 육성하기 위해서 입버릇처럼 노냥 하는 말이지만, 신앙은 사상신앙을 해야 한다. 사상신앙! 사상신앙이라고 할 것 같으면 진리를 믿는 것이다.
증산도만 사상신앙을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기존 문화권도 다 마찬가지다. 불교는 석가모니 진리를 믿었고, 기독교는 예수를 닮는 신앙을 했고, 유교는 공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을 했다. 그 모든 각색 종교가 교조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것과 같이 역시 우리 증산도도 우리 증산 하나님, 옥황상제님의 진리를 본받아서 그대로를 실천역행을 해야 된다. 그게 사상신앙이다.
사상신앙을 하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이율배반적인 신앙! 다시 말을 하면 서자서아자아(書自書我自我)해서, 글은 글대로 나는 나대로, 진리는 진리대로 내 행동은 내 행동대로 하는 것을 어떻게 신앙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시 한 번 내가 똑똑히 말을 하거니와 우리 상제님은 우주의 주재자(主宰者)시다. 이렇게 입버릇처럼 내가 노냥 강조를 한다. 주재(主宰)라 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임금 주(主) 자, 재상 재(宰) 자, 주재는 주체가 돼서, 주장을 해서 그 문제, 그 일을 현실에 합치가 되도록, 거기에 알맞게 마르개질을 해서 그렇게 만든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게끔, 그렇게 이루어지게끔,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거기에 알맞게 만드는 것, 쉽게 비유를 하면 기성복이 있는가 하면 맞춤복이 있듯이, 그 현실 실정에 맞도록 꼭 그렇게 되도록 하는 걸 주재(主宰)라고 한다.
상제님은 이미 지나간 것도 그렇게 되도록 하셨고, 또 그 지나간 것을 재료로 삼아 앞으로도 꼭 그렇게끔 되도록, 거기에 합치되도록 판을 짜셨다.
더 알아듣기 쉬웁게 천지 대자연은 생장염장(生長斂藏)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그렇게만 둥글어 간다. 주이부시(周而復始)해서 오늘도, 내일도, 금년도, 명년도, 10년 후도, 100년 후도, 열 바퀴, 백 바퀴, 스무 바퀴 그것만 거듭을 한다.
그러면 인사(人事)라 하는 것은 그 자연섭리를 응용을 해서, 그 자연섭리에 합치되도록 하는 것이다. 봄이 됐으면 봄 시점을 맞추어서 파종을 한다. 파종을 너무 이르게 하면 추워서 새싹이 안 틔고, 너무 늦게 하면 가을에 가서 수확을 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청명(淸明), 곡우(穀雨), 입하(立夏) 등 24절기 철에 꼭 맞춰서 과불급(過不及)이 되지 않게, 지나쳐도 안 되고, 미치지 못해도 안 되고 꼭 그 시점을 알맞게 해서 농사를 짓는다는 말이다.
농사꾼이 해를 거듭해가면서 농사를 짓다 보니 “철이 늦으면 어떻더라. 철이 일러도 안 좋더라. 어느 때쯤이 가장 적합하더라.” 하는 걸 아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50년 전~80년 전만 해도 모를 심는데 하지(夏至) 전삼후삼(前三後三), 하지 사흘 전, 하지 후 3일 후에 모를 심었다. 그러니까 하지를 기본으로 해서 그 철에 으레 모를 심는 줄로 알았다. 헌데 지금은 과학적으로 많이 연구를 해서 농사짓는 게 한 달이 일러졌다. 저 비닐하우스를 해서 못자리도 만든다.
상제님은 우주의 주재자이시고 천지 대자연은 생장염장을 한다. 그러면 조화주 옥황상제님, 지고지존한 절대자 옥황상제님이 누군데 어떻게 우주를 주재하시느냐?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상제님께서 전부 다 조절을 하신다. 알기 쉬웁게 춘하추동 사시가 생장염장을 바탕으로 해서 자꾸 둥글어 가면, 사람은 그 자연섭리에 합치를 해서, 그 대자연을 응용을 해서 파종을 하고 거름도 주고, 매사 가꾸고, 물이 많으면 빼 주기도 하고, 물이 부족하면 넣어 주기도 한다. 벼가 패면 결실을 잘 하라고 흙도 좀 말려서 결실을 하는 데 도움도 주게도 한다. 그런 걸 인위적으로 하는 것이다.
대자연은 그저 대자연을 틀로 해서 자꾸 주이부시해서 작년도, 금년도, 10년 후도, 10년 전도 똑같은 방법으로 둥글어 갈 뿐이다. 그것에 합리적으로 적응을 해서 사람이 농사를 짓듯이, 상제님은 그렇게 과거, 현재, 미래 역사를 조성하신다. 다시 묶어서 말하면 인류 역사의 키포인트를 틀켜 쥐고 있는 분이 바로 상제님이다. 조화주 옥황상제님!
다시 알아듣기 쉬웁게 부연을 하면, 상제님께서 공자 석가 예수를 불러 놓고서 “내가 쓰기 위해서 너희들을 내보냈다. 너희들이 세상에 나가서 사람 사는 데에 좋은 노릇을 하라고 했더니, 여태 한 일이 무엇이냐?”고 하셨다. 석가모니에게 “너는 인종 씨를 말리러 달라붙었고…” 등등, 그렇게 기존 성자들을 꾸짖고 나무라셨다.
기존 성자들이 상제님의 명을 받고 나와서 역사 속에서 그 나름대로 노릇을 했지만, 다시 말해 상제님께서 그네들을 내보내셨지만, 그 성자들이 잘 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인류 역사를 조성한 키포인트는 조화주 상제님이 가지셨다는 것이다. 내가 바로 ‘주재(主宰)’를 얘기하는 것이다. 상제님은 그런 우주의 주재자시다.
상제님을 신앙하려 할 것 같으면, 우선 상제님의 위격과 권능부터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상제님은 과연 그런 우주의 주재자이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점은 천지의 알캥이를 추리는 때, 우주의 결실을 하는 때다. 그래서 우주의 주재자이신 상제님께서 직접 인간 세상에 사람의 몸을 받아가지고 임어(臨御)하시게 된 것이다. 임할 임(臨) 자, 상감님 어(御) 자, 옥황상제님 어(御) 자다. 옥황상제님, 그 절대자가 인간 세상으로 임하셨다.
그렇게 임어하셔서 역사 속에서 발생한 모든 걸 해원(解寃)을 시키신다. 석가모니가 나와서 잘못했고, 예수가 나와서 상제님 뜻대로 못 했고. 공자가 나와서 상제님 뜻대로 일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지나간 세상의 역사 속에서 그릇돼서 잘못된 신명들, 그걸 전부 다 해원을 시켜서 좋은 세상을 만드셨다.
그런데 지나간 세상은 천지 이법이 상극(相克)이 사배해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석가모니, 예수, 공자만 나무랄 것이 아니라, 천지의 자연섭리가 봄여름은 목장지폐(木長之弊), 큰 나무 아래 있는 작은 나무가 피해를 보듯이, 상극이 사배해서 강자는 약자를 해하게 된다. 자연섭리로 볼 때 그 때가 그런 때다.
그래서 그 상극의 역사 속에서 비뚤어지고 잘못된 것을 상제님이 바로잡으셔서 새 판을 짜셨다. 천지공사(天地公事)로 그런 잘못된 것을 전부 다 이화(理化)하자면 신명조직을 해서 신명공사에서 바로잡는 수밖에 없다.
상제님 진리를 신앙하는 우리 신도들, 또 후천 다음 세상을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다 그걸 알아야만 한다. 상제님을 신앙하는 우리 신도들은 중생을 진리로 교화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상제님 진리를 몸 받아서 그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생활화하고, 체질화해서 중생들에게 ‘상제님을 닮아라! 상제님의 화신인 우리들을 닮아라.’ 이렇게 솔선수범(率先垂範), 거느릴 솔(率) 자, 먼저 선(先) 자, 드리울 수(垂) 자, 법 범(範) 자, 내가 먼저 신도로서 상제님의 혼이 돼서 모범을 보여 줘야 한다. 그래서 그 중생들이, 상제님의 혼이 된 신도들을 따라서 상제님 진리를 신앙하도록 해야 한다. 그게 우리 신도들의 사명이다.
그렇거늘 상제님을 신앙하는 신도 연(然)하고, 그럴 연(然) 자, 신도 같은 듯하면서도 사실은 신앙의 혼이 못 돼서 이율배반적인 신앙을 하면 그건 신도가 아니다. 이렇게 되면 삐꿀어진 신앙이다.
내가 하나 예를 들어서 진돗개 얘기를 해 줄 테니 들어 보아라. 진돗개는 그 종자가 참으로 영특하다. 그런데 진돗개는 처음 태어나 철을 모를 때, 즉 눈이 안 떠졌을 때, 주인인지 주인이 아닌지 식별을 못할 때, 또 저를 낳은 제 에미인지 아닌지 식별을 못할 때 주인을 정해 줘야 주인한테 충성을 한다는 것이다. 진돗개가 식별을 하기 시작한 다음에 다른 주인을 정해 주면 절대로 충성을 하지 않는다. 왜? 본래의 제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억지로 주인을 정해 주면, 그 진돗개가 어떻게든 본래의 제 주인을 찾아온다. 잘 지내다가 3년 만에도 찾아온다는 것이다. 진도(珍島)는 섬이니까 배를 타고 건너가야 되지 않는가. 헌데 어떻게 몰래 배를 타고 오든지, 아니면 오다가 물에 빠져 죽기도 한다. 진돗개는 본래 제 주인이 아니면 절대로 충성을 하지 않는다.
사상신앙을 하지 않는 신도는 만 명이라도 상제님 혼이 돼서 신앙하는 한 사람 턱도 안 되는 것이다. 신앙은 그런 것이다. 예수를 신앙하는 신도 하나가 전부를 다 바쳐서, 유형도 다 바치고 무형도 다 바쳐서 예수의 혼이 된다면, 가식적으로 예수를 신앙하는 사람 만 명이 어떻게 그 사람 하나를 당하겠는가. 형식적인 신도는 바람이 한 번 불어와 사람으로서 견딜 수 없는 경지를 만난다고 하면 다 배반한다. 그런 사람에게는 신앙인의 자격을 줄 수도 없다. 신앙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형식적으로 신앙하는 사람을 ‘신앙인 연(然)한다.’ 고 명칭을 붙인다. 신앙을 하는 것 같은 데 사실은 진리의 혼이 안 되었기 때문에 그건 신앙인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근자에 와서 이런 얘기를 했다. 신앙은 결혼을 하는 것과 같다, 결혼! 남자는 진리와 장가를 드는 것이고, 여자는 진리와 시집을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앙하고 결혼을 한다는 것이다.
후조(候鳥)란 말이 있다. 기후 후(候) 자, 새 조(鳥) 자, 철 따라서 왔다 갔다 하는 새를 후조라고 하지 않는가. 따뜻하면 찾아오고 추우면 도망가는 철새처럼, 약아빠진 상인들 마냥 신앙을 상품화해서, 제게 유리한 듯하면 ‘야, 요거해서 이득이 되니까 한 번 믿어봄 직하다, 믿어 봐야겠다.’ 이렇게 정책적으로 제 이득을 위해서 신앙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불리할 것 같으면 살짝 숨어버리고, 발을 뺀다.
상제님 진리는 자연섭리가 돼서 변질이 되는 진리가 아니다. 다만 시세의 굴곡이 있을 뿐이다 하루에도 밤도 있고 낮도 있듯이, 또 정치도 선정(善政)이 되는 때도 있고 악정(惡政)이 되는 때도 있지 않은가.
신앙은 그 신앙에 살고 신앙에 죽고, 그렇게 신앙을 해야 한다. 그런 참신앙을 하기 위해선 그 진리의 혼이 돼야 한다. 그 진리의 혼! 그게 참신앙이다.
그래서 증산도 신앙은 그 체제부터도 지킬 수(守) 자, 호위할 호(護) 자, 수호신이 되는 것이다! 영원히 천지와 더불어, 만 년도 10만 년도 진리와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 수호신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증산도의 이권을 옹호하기 위해서 억지로 수호신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상제님 진리는 자연섭리요, 자연섭리가 상제님의 진리다. 그건 아주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상제님을 신앙을 하면 본질적으로 수호신이 되기 싫어도 누구보고 물어보든지 그건 수호신이다. 진리와 더불어 사니까 그건 수호신이 되는 것이다. 이름을 그렇게 붙이는 수밖에 없다. 그 진리를 수호해서 진리와 더불어 영세토록 신앙을 하게 되기 때문에 신명이라는 신(神)자 수호신(守護神)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체제도 수호사(守護師)라고 했다. 수호사! 하늘땅 생긴 이래로 이 천지 안에는 수호사 이상 더 좋은 체제, 더 좋은 이름이 있을 수가 없다. 누가 지어도, 지구에 생존하는 사람들이 다 달라붙어서 이름을 붙여도 수호사 이상이 없고, 후천 오만 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달라붙어서 이름을 붙이라고 해도 수호사 이상 더는 붙일 수가 없다.
그러니까 수호사 체제하에 모든 신도들은 다 수호신이 돼야 한다. 그래서 구호도 ‘상제님의 혼이 되자!’라고 한 것이다. 신도라고 할 것 같으면 조화주 옥황상제님, 우주의 주재자 증산상제님의 혼이 돼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방가위지(方可謂之) 신앙인이라 할 것이다. 모 방(方) 자, 옳을 가(可) 자, 이를 위(謂) 자, 갈 지(之) 자, 방가위지. ‘상제님의 혼이 되고, 증산도의 수호신이 돼야 바야흐로 가히 신도라고 이를 것이다’라는 말이다.
신앙은 그렇게 멋지게 해야 한다. 그게 신앙이다. 왔다 갔다, 조금 하다가 제 볼일 본다고 뒷구멍에서 딴 짓하고, 또 조금 유리할 것 같으면 재입도도 하고, 또 불리할 것 같으면 뒤꽁무니를 쏙 빼고! 그게 무슨 신앙인가. 그러다 또 다시 입도하면 석 삼(三) 자를 붙여서 삼입도(三入道)라고 해야 되는가. 그런 사람이 어떻게 사람값이 나가겠는가. 세상에 그걸 누가 인간이라고 상대를 하겠는가. 인간이라는 품위도 실추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신인(神人)이 공노(共怒)를 한다. 귀신 신(神) 자, 사람 인(人) 자, 한 가지 공(共) 자, 노할 노(怒) 자. 계집 녀(女) 옆에 또 우(又) 하고 밑에다 마음 심(心) 자 하면 노할 노(怒), 성낼 노 자, 화가 날 노 자다. 신명과 사람이 같이 한 가지로 성을 낸다는 말이다. “에이~! 몹쓸 사람이다. 그게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니 그 사람을 누가 믿겠는가?
사람은 이 세상에 잠깐 왔다가는 데 좋게 살다가 가야 한다. 지조와 절개를 지키고, 편안하게 깨끗하게 살면 그 얼마나 좋은가.
상제님 진리대로 신앙을 잘 하다 보면, 상제님 진리를 알고서 보면 누구도 다 확신을 한다. 세상만사라 하는 것은 상제님 진리권 내에 다 들어 있다. 상제님 진리가 세상만사 둥글어 가는 그 틀, 바탕이다. 상제님 진리권 내에 다 들어 있다.
그걸 앎으로써 상제님 진리를 믿고, 상제님 진리를 믿음으로써 안다. 그렇게 알면 확신을 하지 말라고 해도 자기 자신이 확신을 한다. ‘아, 이건 참 진리의 뿌리이고, 진리의 틀이고, 이건 과연 바꿀 수도 없고, 바꿔질 수도 없는 진리의 틀이다, 진리의 뿌리다!’
그러니까 자기 몸뚱이와 같이, 자기 생각과 같이, 자기가 사는 데 신조(信條)가 된다. 믿을 신(信) 자, 조목 조(條) 자. 자기가 생활하고 사는 데 신조가 돼서, 그 신조 그대로 신앙하는 틀 속에서 다 바치고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한 일(一) 자, 들 거(擧) 자, 손 수(手) 자, 한 일(一) 자, 던질 투(投) 자, 발 족(足) 자, 한 번 손을 들고 한 번 발을 던지고, 손 한 번 놀리고 발 한 번 놀리는 것을 상제님 진리에 합치가 되도록 한다. 그게 확신이다. 그렇게 확신이 있는 생활을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내가 생활을 하는 모든 생활권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상제님 진리에 합치가 될 것 아닌가. 상대방도 감화를 받아서 두고두고 봐야 그 사람은 참말로 사리에 합치가 되고, 진실하고, 어디 하나 손색이 없다. 그러니까 자연 그 사람을 믿고 그럼으로써 포교도 된다. 또 자기가 신앙하는 것만큼 확신 있는 신앙 체계도 세워진다. 그런 신앙 교육도 하고, 내가 확신을 함으로써 사람을 길러도 확신이 있는 신도를 기른다.
내 자신이 절름발이 신앙을 하는데, 절름발이 신앙하는 사람이 어떻게 포교를 하는가? 못 한다. 해도 소용이 없다. 포교되는 그 사람도 절름발이 신앙밖에는 또 못 한다. 그런 것을 오합지졸이라고 한다. 그까짓 것 만 명이 모이면 뭘 하는가?
나는 2변 때 많은 사람을 묶어 봤었다. 내가 지나가는 자리는 기독교도 발을 못 붙였다. 내가 참 매우 강력했다. 기독교인들이 암만 말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내 앞에서는 얘기가 안 됐다.
하나 예를 들어서 저 영등포, 지금 여의도 국회의사당 있는 데, 그 끄틈지가 당산이라고 하는 데다. 거기에서 연용범이라고 하는 사람이 신흥양화점을 했다. 그 사람 집이 2층이다. 그때는 2층집이면 아주 굉장했다. 그 당시는 다 단층집이고 2층집이 없었다. 내가 거기 2층을 독점해서 썼는데, 그 당시 그곳을 중심으로 해서 신도가 한 천 명이 됐었다. 헌데 그 옆에 기독교 예배당이 있었다. 내가 마이크를 거기다가 대고서 만날 소리를 질렀다. 신도를 포교하느라고 그랬다. 그 때 나는 대중 포교를 했다.
한 반 년이 되니까 그 기독교 예배당이 문을 닫아 버렸다. 그런데 하루는 목사가 와서 난리가 났다. 예배당 문을 닫았다고 때려죽인다고. 누구보고 그러느냐고 물으니 “아이, 선생님 보고 그럽니다. 선생님을 만나서 때려죽인다고.” “왜?” “아이 예배당 문을 닫게 했지 않습니까!” 그것 참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누가 문을 닫으라고 했는가. 그네들 신도들보고 물어봐야 할 것 아닌가.
기독교 믿는 사람들도 다 추고력도 있고, 비판력도 있고, 그들도 생각하는 게 있잖은가. 나는 만날 앉아서 시도 때도 없이 소리를 질렀다. 그네들은 오늘도 듣고, 내일도 듣고, 모레도 들었다. 그게 기독교를 헐뜯는 얘기도 아니다.
그런데 거기 신도들이야 얼마나 되는가. 안 믿은 사람도 절반은 될 게고, 또 증산도로 들어온 사람도 그렇게 많았다. 그러다 보니 포교도 안 되고 해서 예배당이 문을 닫아 버렸다.
신앙이라 하는 것은 생활화, 체질화가 될 것 같으면 일거수일투족이 전부 상제님 진리 속에서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러면 뵈지 않는 에너지라는 것이 있다. 뵈지 않는 에너지! 비행기도 프로펠러가 막 돌아갈 것 같으면, 그 근처 공기가 전부 다 흡수돼서 바람이 프로펠러 도는 데로 끌려들어간다.
사람은 제 정신을 가지고서 살아야 한다. 그렇게 죽은 사람 마냥 있으면 안 된다. 누구에게나 살아서 움직이는 싱싱한 에너지가 있잖은가.
그러고 내가 구호에 ‘때를 놓치지 말자.’라고 하는 것을 하나 가첨을 했다. ‘상제님의 혼이 되자. 증산도의 수호신이 되자.’ 라고 하되 ‘때를 놓치지 말자.’를 더 했다.
과불급(過不及)이라는 것은 절대로 소용이 없다. 지나친다든지 미치지 못하면 소용없다. 1년 농사를 짓는 데도 과불급은 소용이 없다. 농사를 지어도 제때에 지어야지 시기를 놓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4월에 모를 심어야 되는 데 5월달 6월달에 모를 심으면 되는가. 그건 지나치는 것이다. 또 미치지 못해도 안 된다.
의가(醫家)에도 그런 말이 있다. ‘법(法)은 득중위귀(得中爲貴)요, 불급(不及)은 유어태과(愈於太過)라.’ 법이라 하는 것은 중을 얻는 것이 귀함이 되고, 법 법(法) 자, 얻을 득(得) 자, 가운데 중(中) 자, 중을 얻는 것이, 할 위(爲) 자, 귀할 귀(貴) 자, 법은 딱 그 중을 얻는 것이 귀함이 된다는 것이다. 법(法)은 득중위귀(得中爲貴)요 불급(不及)은 유어태과(愈於太過)라. 아닐 불(不) 자, 미칠 급(及) 자, 미치지 못 하는 것은 유어태과라, 나을 유(愈) 자, 늘 어(於) 자, 콩 태(太) 자를 클 태(太) 자라고도 그러고, 지날 과(過) 자, 지나치는 것보다는 낫다.
사람을 고치는 데에도 법은 득중위귀요, 약도 꼭 적중하게 먹여야 한다. 그러고 불급은 유어태과라. 약을 스무 첩을 먹여야 되는데 열다섯 첩 쯤 먹으면 그건 불급이다. 헌데 30첩을 먹었다면 지나친 게다. 스무 첩을 먹여야 될 거면, 열다섯 첩을 먹었으면 다섯 첩을 더 먹이면 된다. 헌데 서른 첩을 먹였으면 너무 지나친 것이다. 그러면 그건 병약(病藥)이다. 그건 병이 악화가 됐기 때문에 되물를 수가 없다.
밥도 적중하게 먹어야지, 잔뜩 먹고서 어깨 숨 쉬고, 잔뜩 체해서 소화도 안 되면 별별 병이 다 생긴다.
그래서 소식(小食)을 하라는 것이다. 아주 그건 예로부터 첫째로 치는 것이다. 소식(小食), 적을 소(小) 자, 먹을 식(食) 자. 밥은 조금만 먹으라는 말이다. 애들 키우는데도 “연아(憐兒)는 다여봉(多與奉)하고, 예쁜 애는 매를 많이 때려주고, 증아(憎兒)는 다여식(多與食)하라. 미운 새끼는 밥을 많이 주라.”는 게다. 잔뜩 먹으면 미련해질 것 아닌가.
묶어서 일심신앙을 하라는 이야기다. 일심신앙!
“심야자(心也者)는 대어천지(大於天地)라.” 마음이라 하는 것은 천지보다도 크다. 상제님 말씀이다.
옛날에 범준(范浚)이라고 하는 사람이 좌우명(座右銘)에 뭐라고 써 붙였냐 하면 “참위삼재參爲三才하니 왈유심이曰惟心爾로다.” 천지인(天地人), 하늘과 땅, 사람, 그걸 삼재(三才)라고 한다. 석 삼(三) 자 재주 재(才) 자, 삼재. 사람도 하늘땅과 동등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삼재에 참여를 하는데, 그것은 육신이 문제가 아니고 심법, 마음이 있을 뿐이란 말이다. 육신은 마음의 지배를 받는 것이고, 마음이 육신을 지배를 하는 것이다.
심법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차대한 것이다. 정신이 삐꿀어진 사람은 인간 값어치가 없는 것이다. 그건 넋 나간 사람, 정신 나간 사람이다. 한 마디로 그렇게 단정해 버리고 만다.
서전서문(書傳序文)에도 마음 심(心) 자가 핵이다. 상제님께서도 서전서문은 과연 참 좋은 글이라고 하셨다.
정신이 삐꿀어진 사람은 그 질(質)이 삐꿀어져서 잘못됐는데 양(量)으로써 어떻게 질을 개선을 하겠는가. 정신이 삐꿀어진 사람은 신앙을 해서 좋은 사람이 되는 법이 없다. “불의한 사람이다. 마음 심(心) 자, 생각 사(思) 자. 그 사람 심사(心思)가 삐꿀어진 사람이여.” 하면 그걸로 끝나고 만다. 무엇으로 그걸 고치는가.
모두가 다 일심신앙을 해라. 오늘은 이것으로 끝마친다. 이상!
증산도만 사상신앙을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기존 문화권도 다 마찬가지다. 불교는 석가모니 진리를 믿었고, 기독교는 예수를 닮는 신앙을 했고, 유교는 공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을 했다. 그 모든 각색 종교가 교조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것과 같이 역시 우리 증산도도 우리 증산 하나님, 옥황상제님의 진리를 본받아서 그대로를 실천역행을 해야 된다. 그게 사상신앙이다.
사상신앙을 하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이율배반적인 신앙! 다시 말을 하면 서자서아자아(書自書我自我)해서, 글은 글대로 나는 나대로, 진리는 진리대로 내 행동은 내 행동대로 하는 것을 어떻게 신앙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주의 주재자, 증산 상제님
다시 한 번 내가 똑똑히 말을 하거니와 우리 상제님은 우주의 주재자(主宰者)시다. 이렇게 입버릇처럼 내가 노냥 강조를 한다. 주재(主宰)라 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임금 주(主) 자, 재상 재(宰) 자, 주재는 주체가 돼서, 주장을 해서 그 문제, 그 일을 현실에 합치가 되도록, 거기에 알맞게 마르개질을 해서 그렇게 만든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게끔, 그렇게 이루어지게끔,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거기에 알맞게 만드는 것, 쉽게 비유를 하면 기성복이 있는가 하면 맞춤복이 있듯이, 그 현실 실정에 맞도록 꼭 그렇게 되도록 하는 걸 주재(主宰)라고 한다.
상제님은 이미 지나간 것도 그렇게 되도록 하셨고, 또 그 지나간 것을 재료로 삼아 앞으로도 꼭 그렇게끔 되도록, 거기에 합치되도록 판을 짜셨다.
더 알아듣기 쉬웁게 천지 대자연은 생장염장(生長斂藏)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그렇게만 둥글어 간다. 주이부시(周而復始)해서 오늘도, 내일도, 금년도, 명년도, 10년 후도, 100년 후도, 열 바퀴, 백 바퀴, 스무 바퀴 그것만 거듭을 한다.
그러면 인사(人事)라 하는 것은 그 자연섭리를 응용을 해서, 그 자연섭리에 합치되도록 하는 것이다. 봄이 됐으면 봄 시점을 맞추어서 파종을 한다. 파종을 너무 이르게 하면 추워서 새싹이 안 틔고, 너무 늦게 하면 가을에 가서 수확을 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청명(淸明), 곡우(穀雨), 입하(立夏) 등 24절기 철에 꼭 맞춰서 과불급(過不及)이 되지 않게, 지나쳐도 안 되고, 미치지 못해도 안 되고 꼭 그 시점을 알맞게 해서 농사를 짓는다는 말이다.
농사꾼이 해를 거듭해가면서 농사를 짓다 보니 “철이 늦으면 어떻더라. 철이 일러도 안 좋더라. 어느 때쯤이 가장 적합하더라.” 하는 걸 아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50년 전~80년 전만 해도 모를 심는데 하지(夏至) 전삼후삼(前三後三), 하지 사흘 전, 하지 후 3일 후에 모를 심었다. 그러니까 하지를 기본으로 해서 그 철에 으레 모를 심는 줄로 알았다. 헌데 지금은 과학적으로 많이 연구를 해서 농사짓는 게 한 달이 일러졌다. 저 비닐하우스를 해서 못자리도 만든다.
상제님은 우주의 주재자이시고 천지 대자연은 생장염장을 한다. 그러면 조화주 옥황상제님, 지고지존한 절대자 옥황상제님이 누군데 어떻게 우주를 주재하시느냐?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상제님께서 전부 다 조절을 하신다. 알기 쉬웁게 춘하추동 사시가 생장염장을 바탕으로 해서 자꾸 둥글어 가면, 사람은 그 자연섭리에 합치를 해서, 그 대자연을 응용을 해서 파종을 하고 거름도 주고, 매사 가꾸고, 물이 많으면 빼 주기도 하고, 물이 부족하면 넣어 주기도 한다. 벼가 패면 결실을 잘 하라고 흙도 좀 말려서 결실을 하는 데 도움도 주게도 한다. 그런 걸 인위적으로 하는 것이다.
대자연은 그저 대자연을 틀로 해서 자꾸 주이부시해서 작년도, 금년도, 10년 후도, 10년 전도 똑같은 방법으로 둥글어 갈 뿐이다. 그것에 합리적으로 적응을 해서 사람이 농사를 짓듯이, 상제님은 그렇게 과거, 현재, 미래 역사를 조성하신다. 다시 묶어서 말하면 인류 역사의 키포인트를 틀켜 쥐고 있는 분이 바로 상제님이다. 조화주 옥황상제님!
다시 알아듣기 쉬웁게 부연을 하면, 상제님께서 공자 석가 예수를 불러 놓고서 “내가 쓰기 위해서 너희들을 내보냈다. 너희들이 세상에 나가서 사람 사는 데에 좋은 노릇을 하라고 했더니, 여태 한 일이 무엇이냐?”고 하셨다. 석가모니에게 “너는 인종 씨를 말리러 달라붙었고…” 등등, 그렇게 기존 성자들을 꾸짖고 나무라셨다.
기존 성자들이 상제님의 명을 받고 나와서 역사 속에서 그 나름대로 노릇을 했지만, 다시 말해 상제님께서 그네들을 내보내셨지만, 그 성자들이 잘 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인류 역사를 조성한 키포인트는 조화주 상제님이 가지셨다는 것이다. 내가 바로 ‘주재(主宰)’를 얘기하는 것이다. 상제님은 그런 우주의 주재자시다.
상제님을 신앙하려 할 것 같으면, 우선 상제님의 위격과 권능부터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상제님은 과연 그런 우주의 주재자이시다.
세상 둥글어가는 틀을 짜신 상제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점은 천지의 알캥이를 추리는 때, 우주의 결실을 하는 때다. 그래서 우주의 주재자이신 상제님께서 직접 인간 세상에 사람의 몸을 받아가지고 임어(臨御)하시게 된 것이다. 임할 임(臨) 자, 상감님 어(御) 자, 옥황상제님 어(御) 자다. 옥황상제님, 그 절대자가 인간 세상으로 임하셨다.
그렇게 임어하셔서 역사 속에서 발생한 모든 걸 해원(解寃)을 시키신다. 석가모니가 나와서 잘못했고, 예수가 나와서 상제님 뜻대로 못 했고. 공자가 나와서 상제님 뜻대로 일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지나간 세상의 역사 속에서 그릇돼서 잘못된 신명들, 그걸 전부 다 해원을 시켜서 좋은 세상을 만드셨다.
그런데 지나간 세상은 천지 이법이 상극(相克)이 사배해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석가모니, 예수, 공자만 나무랄 것이 아니라, 천지의 자연섭리가 봄여름은 목장지폐(木長之弊), 큰 나무 아래 있는 작은 나무가 피해를 보듯이, 상극이 사배해서 강자는 약자를 해하게 된다. 자연섭리로 볼 때 그 때가 그런 때다.
그래서 그 상극의 역사 속에서 비뚤어지고 잘못된 것을 상제님이 바로잡으셔서 새 판을 짜셨다. 천지공사(天地公事)로 그런 잘못된 것을 전부 다 이화(理化)하자면 신명조직을 해서 신명공사에서 바로잡는 수밖에 없다.
신앙은 진리와 결혼을 하는 것
상제님 진리를 신앙하는 우리 신도들, 또 후천 다음 세상을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다 그걸 알아야만 한다. 상제님을 신앙하는 우리 신도들은 중생을 진리로 교화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상제님 진리를 몸 받아서 그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생활화하고, 체질화해서 중생들에게 ‘상제님을 닮아라! 상제님의 화신인 우리들을 닮아라.’ 이렇게 솔선수범(率先垂範), 거느릴 솔(率) 자, 먼저 선(先) 자, 드리울 수(垂) 자, 법 범(範) 자, 내가 먼저 신도로서 상제님의 혼이 돼서 모범을 보여 줘야 한다. 그래서 그 중생들이, 상제님의 혼이 된 신도들을 따라서 상제님 진리를 신앙하도록 해야 한다. 그게 우리 신도들의 사명이다.
그렇거늘 상제님을 신앙하는 신도 연(然)하고, 그럴 연(然) 자, 신도 같은 듯하면서도 사실은 신앙의 혼이 못 돼서 이율배반적인 신앙을 하면 그건 신도가 아니다. 이렇게 되면 삐꿀어진 신앙이다.
내가 하나 예를 들어서 진돗개 얘기를 해 줄 테니 들어 보아라. 진돗개는 그 종자가 참으로 영특하다. 그런데 진돗개는 처음 태어나 철을 모를 때, 즉 눈이 안 떠졌을 때, 주인인지 주인이 아닌지 식별을 못할 때, 또 저를 낳은 제 에미인지 아닌지 식별을 못할 때 주인을 정해 줘야 주인한테 충성을 한다는 것이다. 진돗개가 식별을 하기 시작한 다음에 다른 주인을 정해 주면 절대로 충성을 하지 않는다. 왜? 본래의 제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억지로 주인을 정해 주면, 그 진돗개가 어떻게든 본래의 제 주인을 찾아온다. 잘 지내다가 3년 만에도 찾아온다는 것이다. 진도(珍島)는 섬이니까 배를 타고 건너가야 되지 않는가. 헌데 어떻게 몰래 배를 타고 오든지, 아니면 오다가 물에 빠져 죽기도 한다. 진돗개는 본래 제 주인이 아니면 절대로 충성을 하지 않는다.
사상신앙을 하지 않는 신도는 만 명이라도 상제님 혼이 돼서 신앙하는 한 사람 턱도 안 되는 것이다. 신앙은 그런 것이다. 예수를 신앙하는 신도 하나가 전부를 다 바쳐서, 유형도 다 바치고 무형도 다 바쳐서 예수의 혼이 된다면, 가식적으로 예수를 신앙하는 사람 만 명이 어떻게 그 사람 하나를 당하겠는가. 형식적인 신도는 바람이 한 번 불어와 사람으로서 견딜 수 없는 경지를 만난다고 하면 다 배반한다. 그런 사람에게는 신앙인의 자격을 줄 수도 없다. 신앙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형식적으로 신앙하는 사람을 ‘신앙인 연(然)한다.’ 고 명칭을 붙인다. 신앙을 하는 것 같은 데 사실은 진리의 혼이 안 되었기 때문에 그건 신앙인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근자에 와서 이런 얘기를 했다. 신앙은 결혼을 하는 것과 같다, 결혼! 남자는 진리와 장가를 드는 것이고, 여자는 진리와 시집을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앙하고 결혼을 한다는 것이다.
후조(候鳥)란 말이 있다. 기후 후(候) 자, 새 조(鳥) 자, 철 따라서 왔다 갔다 하는 새를 후조라고 하지 않는가. 따뜻하면 찾아오고 추우면 도망가는 철새처럼, 약아빠진 상인들 마냥 신앙을 상품화해서, 제게 유리한 듯하면 ‘야, 요거해서 이득이 되니까 한 번 믿어봄 직하다, 믿어 봐야겠다.’ 이렇게 정책적으로 제 이득을 위해서 신앙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불리할 것 같으면 살짝 숨어버리고, 발을 뺀다.
상제님 진리는 자연섭리가 돼서 변질이 되는 진리가 아니다. 다만 시세의 굴곡이 있을 뿐이다 하루에도 밤도 있고 낮도 있듯이, 또 정치도 선정(善政)이 되는 때도 있고 악정(惡政)이 되는 때도 있지 않은가.
신앙은 그 신앙에 살고 신앙에 죽고, 그렇게 신앙을 해야 한다. 그런 참신앙을 하기 위해선 그 진리의 혼이 돼야 한다. 그 진리의 혼! 그게 참신앙이다.
증산도의 수호신이 되라
그래서 증산도 신앙은 그 체제부터도 지킬 수(守) 자, 호위할 호(護) 자, 수호신이 되는 것이다! 영원히 천지와 더불어, 만 년도 10만 년도 진리와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 수호신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증산도의 이권을 옹호하기 위해서 억지로 수호신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상제님 진리는 자연섭리요, 자연섭리가 상제님의 진리다. 그건 아주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상제님을 신앙을 하면 본질적으로 수호신이 되기 싫어도 누구보고 물어보든지 그건 수호신이다. 진리와 더불어 사니까 그건 수호신이 되는 것이다. 이름을 그렇게 붙이는 수밖에 없다. 그 진리를 수호해서 진리와 더불어 영세토록 신앙을 하게 되기 때문에 신명이라는 신(神)자 수호신(守護神)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체제도 수호사(守護師)라고 했다. 수호사! 하늘땅 생긴 이래로 이 천지 안에는 수호사 이상 더 좋은 체제, 더 좋은 이름이 있을 수가 없다. 누가 지어도, 지구에 생존하는 사람들이 다 달라붙어서 이름을 붙여도 수호사 이상이 없고, 후천 오만 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달라붙어서 이름을 붙이라고 해도 수호사 이상 더는 붙일 수가 없다.
그러니까 수호사 체제하에 모든 신도들은 다 수호신이 돼야 한다. 그래서 구호도 ‘상제님의 혼이 되자!’라고 한 것이다. 신도라고 할 것 같으면 조화주 옥황상제님, 우주의 주재자 증산상제님의 혼이 돼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방가위지(方可謂之) 신앙인이라 할 것이다. 모 방(方) 자, 옳을 가(可) 자, 이를 위(謂) 자, 갈 지(之) 자, 방가위지. ‘상제님의 혼이 되고, 증산도의 수호신이 돼야 바야흐로 가히 신도라고 이를 것이다’라는 말이다.
진리와 합치되는 신앙
신앙은 그렇게 멋지게 해야 한다. 그게 신앙이다. 왔다 갔다, 조금 하다가 제 볼일 본다고 뒷구멍에서 딴 짓하고, 또 조금 유리할 것 같으면 재입도도 하고, 또 불리할 것 같으면 뒤꽁무니를 쏙 빼고! 그게 무슨 신앙인가. 그러다 또 다시 입도하면 석 삼(三) 자를 붙여서 삼입도(三入道)라고 해야 되는가. 그런 사람이 어떻게 사람값이 나가겠는가. 세상에 그걸 누가 인간이라고 상대를 하겠는가. 인간이라는 품위도 실추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신인(神人)이 공노(共怒)를 한다. 귀신 신(神) 자, 사람 인(人) 자, 한 가지 공(共) 자, 노할 노(怒) 자. 계집 녀(女) 옆에 또 우(又) 하고 밑에다 마음 심(心) 자 하면 노할 노(怒), 성낼 노 자, 화가 날 노 자다. 신명과 사람이 같이 한 가지로 성을 낸다는 말이다. “에이~! 몹쓸 사람이다. 그게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니 그 사람을 누가 믿겠는가?
사람은 이 세상에 잠깐 왔다가는 데 좋게 살다가 가야 한다. 지조와 절개를 지키고, 편안하게 깨끗하게 살면 그 얼마나 좋은가.
상제님 진리대로 신앙을 잘 하다 보면, 상제님 진리를 알고서 보면 누구도 다 확신을 한다. 세상만사라 하는 것은 상제님 진리권 내에 다 들어 있다. 상제님 진리가 세상만사 둥글어 가는 그 틀, 바탕이다. 상제님 진리권 내에 다 들어 있다.
그걸 앎으로써 상제님 진리를 믿고, 상제님 진리를 믿음으로써 안다. 그렇게 알면 확신을 하지 말라고 해도 자기 자신이 확신을 한다. ‘아, 이건 참 진리의 뿌리이고, 진리의 틀이고, 이건 과연 바꿀 수도 없고, 바꿔질 수도 없는 진리의 틀이다, 진리의 뿌리다!’
그러니까 자기 몸뚱이와 같이, 자기 생각과 같이, 자기가 사는 데 신조(信條)가 된다. 믿을 신(信) 자, 조목 조(條) 자. 자기가 생활하고 사는 데 신조가 돼서, 그 신조 그대로 신앙하는 틀 속에서 다 바치고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한 일(一) 자, 들 거(擧) 자, 손 수(手) 자, 한 일(一) 자, 던질 투(投) 자, 발 족(足) 자, 한 번 손을 들고 한 번 발을 던지고, 손 한 번 놀리고 발 한 번 놀리는 것을 상제님 진리에 합치가 되도록 한다. 그게 확신이다. 그렇게 확신이 있는 생활을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내가 생활을 하는 모든 생활권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상제님 진리에 합치가 될 것 아닌가. 상대방도 감화를 받아서 두고두고 봐야 그 사람은 참말로 사리에 합치가 되고, 진실하고, 어디 하나 손색이 없다. 그러니까 자연 그 사람을 믿고 그럼으로써 포교도 된다. 또 자기가 신앙하는 것만큼 확신 있는 신앙 체계도 세워진다. 그런 신앙 교육도 하고, 내가 확신을 함으로써 사람을 길러도 확신이 있는 신도를 기른다.
내 자신이 절름발이 신앙을 하는데, 절름발이 신앙하는 사람이 어떻게 포교를 하는가? 못 한다. 해도 소용이 없다. 포교되는 그 사람도 절름발이 신앙밖에는 또 못 한다. 그런 것을 오합지졸이라고 한다. 그까짓 것 만 명이 모이면 뭘 하는가?
진리를 생활화·체질화 하라
나는 2변 때 많은 사람을 묶어 봤었다. 내가 지나가는 자리는 기독교도 발을 못 붙였다. 내가 참 매우 강력했다. 기독교인들이 암만 말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내 앞에서는 얘기가 안 됐다.
하나 예를 들어서 저 영등포, 지금 여의도 국회의사당 있는 데, 그 끄틈지가 당산이라고 하는 데다. 거기에서 연용범이라고 하는 사람이 신흥양화점을 했다. 그 사람 집이 2층이다. 그때는 2층집이면 아주 굉장했다. 그 당시는 다 단층집이고 2층집이 없었다. 내가 거기 2층을 독점해서 썼는데, 그 당시 그곳을 중심으로 해서 신도가 한 천 명이 됐었다. 헌데 그 옆에 기독교 예배당이 있었다. 내가 마이크를 거기다가 대고서 만날 소리를 질렀다. 신도를 포교하느라고 그랬다. 그 때 나는 대중 포교를 했다.
한 반 년이 되니까 그 기독교 예배당이 문을 닫아 버렸다. 그런데 하루는 목사가 와서 난리가 났다. 예배당 문을 닫았다고 때려죽인다고. 누구보고 그러느냐고 물으니 “아이, 선생님 보고 그럽니다. 선생님을 만나서 때려죽인다고.” “왜?” “아이 예배당 문을 닫게 했지 않습니까!” 그것 참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누가 문을 닫으라고 했는가. 그네들 신도들보고 물어봐야 할 것 아닌가.
기독교 믿는 사람들도 다 추고력도 있고, 비판력도 있고, 그들도 생각하는 게 있잖은가. 나는 만날 앉아서 시도 때도 없이 소리를 질렀다. 그네들은 오늘도 듣고, 내일도 듣고, 모레도 들었다. 그게 기독교를 헐뜯는 얘기도 아니다.
그런데 거기 신도들이야 얼마나 되는가. 안 믿은 사람도 절반은 될 게고, 또 증산도로 들어온 사람도 그렇게 많았다. 그러다 보니 포교도 안 되고 해서 예배당이 문을 닫아 버렸다.
신앙이라 하는 것은 생활화, 체질화가 될 것 같으면 일거수일투족이 전부 상제님 진리 속에서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러면 뵈지 않는 에너지라는 것이 있다. 뵈지 않는 에너지! 비행기도 프로펠러가 막 돌아갈 것 같으면, 그 근처 공기가 전부 다 흡수돼서 바람이 프로펠러 도는 데로 끌려들어간다.
사람은 제 정신을 가지고서 살아야 한다. 그렇게 죽은 사람 마냥 있으면 안 된다. 누구에게나 살아서 움직이는 싱싱한 에너지가 있잖은가.
때를 놓치지 마라
그러고 내가 구호에 ‘때를 놓치지 말자.’라고 하는 것을 하나 가첨을 했다. ‘상제님의 혼이 되자. 증산도의 수호신이 되자.’ 라고 하되 ‘때를 놓치지 말자.’를 더 했다.
과불급(過不及)이라는 것은 절대로 소용이 없다. 지나친다든지 미치지 못하면 소용없다. 1년 농사를 짓는 데도 과불급은 소용이 없다. 농사를 지어도 제때에 지어야지 시기를 놓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4월에 모를 심어야 되는 데 5월달 6월달에 모를 심으면 되는가. 그건 지나치는 것이다. 또 미치지 못해도 안 된다.
의가(醫家)에도 그런 말이 있다. ‘법(法)은 득중위귀(得中爲貴)요, 불급(不及)은 유어태과(愈於太過)라.’ 법이라 하는 것은 중을 얻는 것이 귀함이 되고, 법 법(法) 자, 얻을 득(得) 자, 가운데 중(中) 자, 중을 얻는 것이, 할 위(爲) 자, 귀할 귀(貴) 자, 법은 딱 그 중을 얻는 것이 귀함이 된다는 것이다. 법(法)은 득중위귀(得中爲貴)요 불급(不及)은 유어태과(愈於太過)라. 아닐 불(不) 자, 미칠 급(及) 자, 미치지 못 하는 것은 유어태과라, 나을 유(愈) 자, 늘 어(於) 자, 콩 태(太) 자를 클 태(太) 자라고도 그러고, 지날 과(過) 자, 지나치는 것보다는 낫다.
사람을 고치는 데에도 법은 득중위귀요, 약도 꼭 적중하게 먹여야 한다. 그러고 불급은 유어태과라. 약을 스무 첩을 먹여야 되는데 열다섯 첩 쯤 먹으면 그건 불급이다. 헌데 30첩을 먹었다면 지나친 게다. 스무 첩을 먹여야 될 거면, 열다섯 첩을 먹었으면 다섯 첩을 더 먹이면 된다. 헌데 서른 첩을 먹였으면 너무 지나친 것이다. 그러면 그건 병약(病藥)이다. 그건 병이 악화가 됐기 때문에 되물를 수가 없다.
밥도 적중하게 먹어야지, 잔뜩 먹고서 어깨 숨 쉬고, 잔뜩 체해서 소화도 안 되면 별별 병이 다 생긴다.
그래서 소식(小食)을 하라는 것이다. 아주 그건 예로부터 첫째로 치는 것이다. 소식(小食), 적을 소(小) 자, 먹을 식(食) 자. 밥은 조금만 먹으라는 말이다. 애들 키우는데도 “연아(憐兒)는 다여봉(多與奉)하고, 예쁜 애는 매를 많이 때려주고, 증아(憎兒)는 다여식(多與食)하라. 미운 새끼는 밥을 많이 주라.”는 게다. 잔뜩 먹으면 미련해질 것 아닌가.
일심신앙을 하라
묶어서 일심신앙을 하라는 이야기다. 일심신앙!
“심야자(心也者)는 대어천지(大於天地)라.” 마음이라 하는 것은 천지보다도 크다. 상제님 말씀이다.
옛날에 범준(范浚)이라고 하는 사람이 좌우명(座右銘)에 뭐라고 써 붙였냐 하면 “참위삼재參爲三才하니 왈유심이曰惟心爾로다.” 천지인(天地人), 하늘과 땅, 사람, 그걸 삼재(三才)라고 한다. 석 삼(三) 자 재주 재(才) 자, 삼재. 사람도 하늘땅과 동등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삼재에 참여를 하는데, 그것은 육신이 문제가 아니고 심법, 마음이 있을 뿐이란 말이다. 육신은 마음의 지배를 받는 것이고, 마음이 육신을 지배를 하는 것이다.
심법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차대한 것이다. 정신이 삐꿀어진 사람은 인간 값어치가 없는 것이다. 그건 넋 나간 사람, 정신 나간 사람이다. 한 마디로 그렇게 단정해 버리고 만다.
서전서문(書傳序文)에도 마음 심(心) 자가 핵이다. 상제님께서도 서전서문은 과연 참 좋은 글이라고 하셨다.
정신이 삐꿀어진 사람은 그 질(質)이 삐꿀어져서 잘못됐는데 양(量)으로써 어떻게 질을 개선을 하겠는가. 정신이 삐꿀어진 사람은 신앙을 해서 좋은 사람이 되는 법이 없다. “불의한 사람이다. 마음 심(心) 자, 생각 사(思) 자. 그 사람 심사(心思)가 삐꿀어진 사람이여.” 하면 그걸로 끝나고 만다. 무엇으로 그걸 고치는가.
모두가 다 일심신앙을 해라. 오늘은 이것으로 끝마친다. 이상!
©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