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고조선을 어떻게 이어 왔는가
[이 책만은 꼭]
이해영 객원기자 / 서울관악도장
이런 노래가 있었다. 어릴 적 10월 3일에 이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있는데, 우리 집에 있는 중고생들에게 물어보면 이런 노래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위당 정인보 선생이 작사한 ‘개천절開天節’ 노래다. 이 노래가 잊힌 노래가 된 이유는 개인적 생각으로 대통령의 개천절 행사 불참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나라 5대 국경일은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한글날 그리고 개천절이다. 이 중 가장 중요시되는 날은 광복절인데, 우리나라의 건국일이라고 할 수 있는 개천절은 상대적으로 홀대를 받는 측면이 있다.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왜 우리나라 생일인 개천절 행사에 불참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대통령의 개천절 불참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 이후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까지는 대통령이 직접 정부 개천절 행사에 참석했지만, 노태우 대통령부터 참석하지 않고 대통령 명의의 경축사를 국무총리가 대독을 해 왔는데 2011년부터는 이마저도 국무총리 본인 경축사로 격하시키고 말았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는 대통령의 개천절 참석은 헌법상의 의무라고 강조하며 항의하고 있다.
개천절이 이렇게 홀대받는 이유는 아마도 단군왕검檀君王儉님에 대한 인식에 있다는 생각과 함께 우리 민족의 뿌리, 우리 고대사의 왜곡에 있다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가 이른바 ‘곰의 자손’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어린아이 때부터 심어 주고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 「삼성기三聖紀 상上」의 ‘오환건국吾桓建國이 최고最古라. 우리 환족이 세운 나라가 가장 오래되었다.’라는 구절을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우리 민족의 역사는 아무리 못 잡아도 최소한 5천 년 이상이지 않은가? 이에 더하여 그 뿌리를 헤아려 보면 우리의 실제 역사는 1만 년 이상으로, 현 인류의 탄생과 시원을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굳이 이를 부정하고 연대를 내려 잡으려는 이상한 속성을 지닌 집단으로 인해 민족의 역사가, 우리나라의 생일이 우리 자신에 의해서 부정되고 축소 왜곡되고 있다.
이런 즈음에 그나마 단군조선에 대한 문헌 자료가 체계적으로 정리된 책이 나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조선의 역사 연구에 수십 년간 매진해 오고 있는 인하대학교 복기대卜箕大 교수가 그동안 모아 온 방대한 고조선 자료를 묶어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바로 『우리는 고조선을 어떻게 이어왔는가』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단군왕검의 출생 비밀이다. 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과 땅에서 곰이 변한 사람과 결혼하여 태어난 이가 세운 나라가 (고古)조선朝鮮이고 이는 ‘천지인 사상’에 기반하고 있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우리의 건국 이야기인 단군신화를 마치 그리스・로마 신화나 동화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로 만들었고, 전 국민 더 나아가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단군이 신화 속 인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이었으며, 그가 살았던 고조선이 우리의 역사 속에 실제로 존재한 나라였음을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제왕운기帝王韻紀』,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 37권에 이르는 여러 문헌 사료에 기록된 고조선의 자료를 시대별로 정리하였다. 또한 9권의 중국 자료, 2권의 서양 자료를 통해 그들의 고조선 인식이 어떠하였는지도 살펴보았다. 이러한 문헌 사료에 덧붙여 한국사에서 고조선 인식의 흐름을 명쾌하게 정리하였다.
이 책은 전체 6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삼국 시대, 2부는 고려 시대, 3부는 조선 시대 고조선 인식 문헌 사료이다. 4부에는 중국의 고조선 인식 문헌 사료를 수록했다. 5부는 짧지만 유럽의 시각을, 6부는 한국사에서 고조선 인식의 흐름을 분석해 저자의 의견을 제시했다. 전통 시대의 단군 인식에서 출발하여 현대 한국사 교과서에서의 단군과 고조선 인식도 다루었다. 그리고 부록으로 태조 이성계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정리해 두었다. 조선의 연원을 단군에게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사료이다.
1963년 충남 홍성 출신으로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요령 대학교에서 역사계 석사 학위, 길림 대학교에서 고고학계 역사학 및 박물관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사학과 윤내현 교수의 제자로 홍산紅山 문화 발굴에 참여해 우리의 잃어버린 상고사를 복원하는 데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 직접 요서 지역의 유물, 유적들을 답사하고 속속들이 파악하여 석박사 학위를 받아 우리나라에서는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지위와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복기대 교수는 봉니封泥(고대 낙랑군에서 공문서를 봉함하기 위하여 묶은 노끈의 이음매에 붙이는 인장을 눌러 찍은 점토 덩어리)를 발굴하였고, 연나라와 고조선의 경계는 물론 한사군・철령・평양의 위치를 밝혀 식민사학을 극복하는 데에 많이 이바지했다.
우리나라 학계의 고조선 연구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은 ‘#문헌 자료가 없어서 연구를 못 한다.#’는 것이 팽배했다. 그러나 이런 인식에 대응이라도 하듯이 고려대 한국사연구소에서 2019년 『역주 고조선 사료 집성』이라는 고조선 관련 자료집을 출판하였다. 많은 연구진이 참여하여 정리하였지만, 필자는 아쉬움을 느꼈다고 한다. ‘왜 우리 관찬 기록을 넣지 않았을까? 왜 이렇게 기자 관련 자료를 많이 넣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전부터 관련 자료집을 펴내려고 하다가 『역주 고조선 사료 집성』이 나오면서 출판을 접었다가, 고려대에서 활용한 자료들은 빼고 거기 없는 자료들만 편집하여 출판하게 된 것이다.
편저자는 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할 때 무엇보다 우리 사서를 먼저 활용한다고 한다. 이웃 나라의 사서가 시대적으로 빠르고 자세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한국 사료를 보완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한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역사학자의 태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기존 한국 역사학계는 국내 사서보다는 외국 자료를 우선시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편저자는 이 책에서 국가에서 편찬한 자료들을 앞에 두고 개인 자료나 외국 자료는 뒤에 두었다고 한다. 이는 국가에서 만든 자료는 여럿이 여러 자료를 모아서 비교 분석하여 만들었을 것이므로 정확도가 높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편저자는 이 책을 만들면서 대부분 자료는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 올라와 있는 것을 기본적으로 사용하였고, 개인 문집 관련은 한국 고전번역원 자료를 활용했다고 한다. 번역문이 없는 부분만 편저자가 번역하였고, 전문가들을 찾아가 번역을 지도받으며 의견을 듣고 정리를 하였다고 한다.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모든 왕조에서는 자신들의 기원과 정통성을 단군조선檀君朝鮮에 두었고, 단군조선의 대표자인 단군왕검檀君王儉에 대해서는 국조國祖로서 깍듯한 예의를 차려 대우하고 있었다. 이런 인식의 계승은 동아시아의 독특한 사고 체계인 ‘역사 근거 주의’에 입각하여 나라별 역사 연구에서 고조선이 한국사의 출발점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고 편저자는 말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승휴가 단군을 어떻게 봤느냐를 눈여겨봐야 한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제왕운기』의 편제를 보면 상편은 ‘중국사’, 하편은 ‘한국사’로 나누어 춘추필법*을 근거하여 지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기자箕子를 언급하면서 ‘소중화小中華’에 대한 자부심을 강조하는 것이 보인다고 했다. 즉 우리 역사에서 가장 고질적인 문제가 되는 ‘소중화 사관’의 시작이 바로 『제왕운기』에서 출판된 것이라고 하였다.
*춘추필법春秋筆法 - 공자가 『춘추春秋』를 쓸 때 사용한 필법으로, 명분에 따라 용어를 구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세 가지 방식은 위국휘치爲國諱恥(중국에 영광스러운 일은 부풀리면서 중국에 수치스러운 일은 감춘다), 존화양이尊華攘夷(중국은 높이면서 주변 나라는 깎아내린다), 상내약외詳內略外(중국사는 상세히 쓰면서 이민족 역사는 간략하게 적는다)이다.
조선을 세운 사대부들은 새로운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분명한 명분을 제시해야 했는데, 그들은 살아가면서 예의를 중시하던 선진先秦 이전이나 한당漢唐 시절의 유학이 아닌, 우주 원리에 따라 세상의 질서를 생각하는 관념적 신유학인 성리학性理學을 새로운 세상의 이념으로 내세웠다.
그 결과 그동안 이어져 오던 단군檀君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점점 약해져 갔고, 이어 시대적 흐름에 따라 기자箕子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 영조 때 조선학이 부흥되면서 다시 전통 사관이나 사상이 복원되는가 싶었지만, 다시 정조부터 시작된 정신적 사대주의에 따라 약화하면서 이어지는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 자체가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역사 왜곡 작업 중 일제가 첫 번째로 추진한 것이 바로 고조선 역사의 날조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성시되며 멀쩡히 존재하던 역사가 어느 날 갑자기 내용이 과학적이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자기들 마음대로 ‘황당무계’한 허구라고 규정해 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조선은 이 땅, 즉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사에서 다룰 수 없는 역사라고 단정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고조선 역사가 어느 순간 공식 문서에서 사라졌고, 일부 친일 매국노를 제외한 대다수 한국 사람들이 당황하였으며, 이를 지키기 위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어려운 처지에서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른바 민족주의자로 분류되는 많은 사람이 한국사 관련 책을 다수 출간하였는데, 이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한국 상고사上古史 관련 책들이다. 이 책들에 대해서 오늘날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한국 상고사 관련 책들은 거의 위서僞書로 낙인찍어 분류하였으며, 다른 시대사를 다룬 책들은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1974년 국정교과서 전환에 반대하면서 역사 연구자들이 많은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고조선사를 사실로 기록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역사학계에 큰 충돌이 일어났다. 1981년 초대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안호상安浩相 등이 주도한 역사 교과서 파동이 그것이었다(최근 있었던 역사 교과서 파동의 쟁점은 근현대사 인식의 문제였다).
이런 충돌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국정교과서 내용에 반대하는 연구자들은 이른바 ‘재야’라고 낙인을 찍어 분류하였다. 이런 분류는 훗날, 이른바 주류학계, 강단사학계에 반대하는 학설을 주장하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어이없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 대립은 결국 학술적인 논쟁을 넘어 감정 대립으로 번지고 말았다. 그리고 고조선 역사를 없앤 사람들과 이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 간의 지루한 논쟁과 때에 따라 벌어지는 감정싸움은 매우 오랫동안 지속돼 오고 있다. 전자의 주장은 ‘식민사학’으로, 후자의 견해는 ‘민족주의’로 평가받을 정도로 극단적 대립으로 이어지며 심각한 사회 갈등을 낳기도 하였다.
편저자는 한국에서 고조선을 두고 갈등을 빚는 것은 연구자들의 연구 출발점에서부터 많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연구의 출발을 어떤 것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았다. 즉 어떤 사료를 활용하여 연구할 것인가 하는 것부터 제대로 성찰과 고민을 해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학계에서 그동안 단군, 또는 고조선에 관한 연구가 단편적인 사료를 중심으로 진행된 점을 들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한국에는 고조선을 연구할 수 있는 기본 자료들이 많이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책이 그 증거이다. 그런데도 이런 자료들이 제외되고 연구가 시작된 것이 문제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외래 사관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역사에 버젓이 남아 있는 고조선, 단군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정립하는 것은 과학적인 역사 연구와 함께 우리의 뿌리를 제대로 밝히는 일이 될 것이다. ■
특히나 우리 역사학계는 금기 사항이 많다. 현대사는 연구하면 안 된다든지, 고조선의 상한 연도는 청동기 시대에 맞춰서 기원전 10세기 이상을 넘어가면 안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이상한 개념인 ‘원삼국原三國’ 시대가 있어서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은 서기 4세기 이후에나 국가가 형성되었다고 본다든지, 그나마 있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대신에 수많은 내용들이 이미 허구와 조작으로 판명된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인용한다는 걸 보면, 참 이해가 어려운 곳이 우리나라 역사학계, 특히 고대사학계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우리 역사학계가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절대 벗어나지 않으려는 틀에 대해 정리해 보려고 한다.
첫째는 반도사관半島史觀으로, 우리 역사의 강역은 절대 한반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고구려 때 조금, 더 가 봐야 요동반도 근처 정도고 대부분은 한반도 안에서 일어난 것으로 설정해 놓았다. 그리고 모든 지명을 한반도 안에 구겨 넣고 있다.
중국 정사에서 백제가 대륙에 영토를 가진 기록이 있고, 청나라 역시 자신들의 뿌리를 신라라고 하는데도 이에 일제히 침묵하고 있다. 고구려와 수隋나라의 전쟁 때 살수대첩의 장소인 살수薩水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지금의 청천강이라 규정해 놓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는 한반도 안에서만 펼쳐졌다는 틀을 주입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한민족은 독자적인 문명, 국가, 역사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외래, 외국에서 뭐(누)가 오든지 영향을 받아서 문명이 형성되었다는 틀이다. 실제 우리나라에서 공식적 역사를 다루는 공무원 시험이나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의 해답은 그렇게 주어져 있다. 우리의 독자적인 것은 거의 없고 외세의 영향을 받아 국가와 문화가 만들어졌다는 틀이 매우 견고하게 형성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외세는 거의 중국이다.
고인돌이 만들어진 시대가 청동기 때이고 전 세계 고인돌의 70% 이상이 우리 한반도와 가까운 주변에 있다. 이는 고대 한국이 고인돌의 종주국이라고 충분히 주장할 수 있음에도, 반대로 전 세계 고인돌의 문화를 흡수해서 우리 한반도에 많이 만들어 놨다고 해석하고 있다. 오히려 외국 학자들이 고인돌 문화의 종주국이 우리 한국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 민족 문화는 당연히 외국에서 들어왔을 것이라는 틀에 갇혀 있으면서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고대 유적이 나오면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연구할까? 답은 ‘글쎄요...’이다. 대놓고 묻어 버리고 외면하는 게 현실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역사는 삼국 시대부터 시작됐다는 틀이다. 고조선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마지못해 다루는 정도로 고조선을 기술하고 있다. 2007년 이전까지 우리나라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BCE 2333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로 기술되어 있었다. 건국했다는 말인지, 하지 않았다는 말인지. 남의 나라 역사 기술하듯 말하고 있었다. 2007년 이후에야 겨우 “BCE 2333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로 수정되었다.
이렇게 바뀌는 데 해방 이후 수십 년이 걸렸다. 그러니까 대한민국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기준으로 보자면 2007년에서야 비로소 고조선을 역사로 온전히 인정한 것이 된다. 가장 황당했던 부분은 또 있다.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우리나라 국가의 형성이 청동기 시대와 일치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청동기는 최초로 BCE 10세기경에 나왔으니, 고조선이 BCE 2333년이라고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최초의 청동기 유물이 출현한 BCE 10세기경에 고조선이 부족 국가로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오랫동안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인식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BCE 20세기 이전의 청동기 유물이 발굴되었지만, 여전히 고조선의 성립 연대는 오랫동안 고쳐지지 않았다. 아직도 역사학자들 중에는 고조선을 신화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고, 애써 역사로 인정해도 BCE 10세기 정도에 형성된 부족 국가 정도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고조선 이후 실체도 없는 기자조선, 위만 정권, 소위 한사군을 거쳐 토착 세력들이 한사군을 몰아내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시대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인식이다. 가야는 어디로 갔는지 모를 지경이다.
여기에 북쪽에 한사군漢四郡이 있었고, 남쪽에는 대일항쟁기 일본이 날조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있었다고 신봉하는 학자들도 많다. 지금 대한민국 역사학계는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의 사관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개천절 유감 - 우리나라 생일을 찾아 주세요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이런 노래가 있었다. 어릴 적 10월 3일에 이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있는데, 우리 집에 있는 중고생들에게 물어보면 이런 노래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위당 정인보 선생이 작사한 ‘개천절開天節’ 노래다. 이 노래가 잊힌 노래가 된 이유는 개인적 생각으로 대통령의 개천절 행사 불참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나라 5대 국경일은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한글날 그리고 개천절이다. 이 중 가장 중요시되는 날은 광복절인데, 우리나라의 건국일이라고 할 수 있는 개천절은 상대적으로 홀대를 받는 측면이 있다.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왜 우리나라 생일인 개천절 행사에 불참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대통령의 개천절 불참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 이후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까지는 대통령이 직접 정부 개천절 행사에 참석했지만, 노태우 대통령부터 참석하지 않고 대통령 명의의 경축사를 국무총리가 대독을 해 왔는데 2011년부터는 이마저도 국무총리 본인 경축사로 격하시키고 말았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는 대통령의 개천절 참석은 헌법상의 의무라고 강조하며 항의하고 있다.
개천절이 이렇게 홀대받는 이유는 아마도 단군왕검檀君王儉님에 대한 인식에 있다는 생각과 함께 우리 민족의 뿌리, 우리 고대사의 왜곡에 있다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가 이른바 ‘곰의 자손’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어린아이 때부터 심어 주고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 「삼성기三聖紀 상上」의 ‘오환건국吾桓建國이 최고最古라. 우리 환족이 세운 나라가 가장 오래되었다.’라는 구절을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우리 민족의 역사는 아무리 못 잡아도 최소한 5천 년 이상이지 않은가? 이에 더하여 그 뿌리를 헤아려 보면 우리의 실제 역사는 1만 년 이상으로, 현 인류의 탄생과 시원을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굳이 이를 부정하고 연대를 내려 잡으려는 이상한 속성을 지닌 집단으로 인해 민족의 역사가, 우리나라의 생일이 우리 자신에 의해서 부정되고 축소 왜곡되고 있다.
이런 즈음에 그나마 단군조선에 대한 문헌 자료가 체계적으로 정리된 책이 나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조선의 역사 연구에 수십 년간 매진해 오고 있는 인하대학교 복기대卜箕大 교수가 그동안 모아 온 방대한 고조선 자료를 묶어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바로 『우리는 고조선을 어떻게 이어왔는가』이다.
이 책의 구성
“환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자루와 마늘 20개를 주고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되리라.’ 하였다. 곰과 호랑이가 이것을 먹고 삼칠일 동안 금기를 지키자, 곰은 여자의 몸을 얻었고 호랑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혼인해 주는 이가 없어 항상 신단수 아래서 임신하기를 축원하였다. 이에 환웅이 잠깐 변하여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단군왕검의 출생 비밀이다. 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과 땅에서 곰이 변한 사람과 결혼하여 태어난 이가 세운 나라가 (고古)조선朝鮮이고 이는 ‘천지인 사상’에 기반하고 있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우리의 건국 이야기인 단군신화를 마치 그리스・로마 신화나 동화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로 만들었고, 전 국민 더 나아가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단군이 신화 속 인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이었으며, 그가 살았던 고조선이 우리의 역사 속에 실제로 존재한 나라였음을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제왕운기帝王韻紀』,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 37권에 이르는 여러 문헌 사료에 기록된 고조선의 자료를 시대별로 정리하였다. 또한 9권의 중국 자료, 2권의 서양 자료를 통해 그들의 고조선 인식이 어떠하였는지도 살펴보았다. 이러한 문헌 사료에 덧붙여 한국사에서 고조선 인식의 흐름을 명쾌하게 정리하였다.
이 책은 전체 6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삼국 시대, 2부는 고려 시대, 3부는 조선 시대 고조선 인식 문헌 사료이다. 4부에는 중국의 고조선 인식 문헌 사료를 수록했다. 5부는 짧지만 유럽의 시각을, 6부는 한국사에서 고조선 인식의 흐름을 분석해 저자의 의견을 제시했다. 전통 시대의 단군 인식에서 출발하여 현대 한국사 교과서에서의 단군과 고조선 인식도 다루었다. 그리고 부록으로 태조 이성계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정리해 두었다. 조선의 연원을 단군에게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사료이다.
지은이 복기대
1963년 충남 홍성 출신으로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요령 대학교에서 역사계 석사 학위, 길림 대학교에서 고고학계 역사학 및 박물관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사학과 윤내현 교수의 제자로 홍산紅山 문화 발굴에 참여해 우리의 잃어버린 상고사를 복원하는 데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 직접 요서 지역의 유물, 유적들을 답사하고 속속들이 파악하여 석박사 학위를 받아 우리나라에서는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지위와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복기대 교수는 봉니封泥(고대 낙랑군에서 공문서를 봉함하기 위하여 묶은 노끈의 이음매에 붙이는 인장을 눌러 찍은 점토 덩어리)를 발굴하였고, 연나라와 고조선의 경계는 물론 한사군・철령・평양의 위치를 밝혀 식민사학을 극복하는 데에 많이 이바지했다.
*학력 : 중국 길림 대학교 사학박사 고고학 전공(1995~1998년), 중국 요령 대학교 역사학과 사학석사 고고학 전공(1992~1995년), 단국대학교 문리대학 사학학사(1982~1986년)
*주요 경력 : 인하대학교 대학원 융합고고학전공 교수(2013년-현재),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장, (사)동북아시아 역사연구회 이사장, 중국 사회과학원 북방선사문화연구소 연구원, 한・일 고대사 공동연구 연구책임자
*최근 주요 저서 : 『고구려의 평양과 그 여운』(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 총서 2, 주류성, 2017, 공저), 『홍산 문화의 이해』(우리역사연구재단, 2019), 『韓國 古代史の正體』(日本 出版, 교토, 2018)
*주요 논문 : 「간도 어떻게 볼 것인가?」, 「Acute traumatic death of a 17th century general based on examination of mummified remains found in Korea.」(『Annals of Anatomy』 (SCI), 2009.06)
*주요 경력 : 인하대학교 대학원 융합고고학전공 교수(2013년-현재),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장, (사)동북아시아 역사연구회 이사장, 중국 사회과학원 북방선사문화연구소 연구원, 한・일 고대사 공동연구 연구책임자
*최근 주요 저서 : 『고구려의 평양과 그 여운』(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 총서 2, 주류성, 2017, 공저), 『홍산 문화의 이해』(우리역사연구재단, 2019), 『韓國 古代史の正體』(日本 出版, 교토, 2018)
*주요 논문 : 「간도 어떻게 볼 것인가?」, 「Acute traumatic death of a 17th century general based on examination of mummified remains found in Korea.」(『Annals of Anatomy』 (SCI), 2009.06)
이 책의 특징
우리나라 학계의 고조선 연구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은 ‘#문헌 자료가 없어서 연구를 못 한다.#’는 것이 팽배했다. 그러나 이런 인식에 대응이라도 하듯이 고려대 한국사연구소에서 2019년 『역주 고조선 사료 집성』이라는 고조선 관련 자료집을 출판하였다. 많은 연구진이 참여하여 정리하였지만, 필자는 아쉬움을 느꼈다고 한다. ‘왜 우리 관찬 기록을 넣지 않았을까? 왜 이렇게 기자 관련 자료를 많이 넣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전부터 관련 자료집을 펴내려고 하다가 『역주 고조선 사료 집성』이 나오면서 출판을 접었다가, 고려대에서 활용한 자료들은 빼고 거기 없는 자료들만 편집하여 출판하게 된 것이다.
편저자는 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할 때 무엇보다 우리 사서를 먼저 활용한다고 한다. 이웃 나라의 사서가 시대적으로 빠르고 자세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한국 사료를 보완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한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역사학자의 태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기존 한국 역사학계는 국내 사서보다는 외국 자료를 우선시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편저자는 이 책에서 국가에서 편찬한 자료들을 앞에 두고 개인 자료나 외국 자료는 뒤에 두었다고 한다. 이는 국가에서 만든 자료는 여럿이 여러 자료를 모아서 비교 분석하여 만들었을 것이므로 정확도가 높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편저자는 이 책을 만들면서 대부분 자료는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 올라와 있는 것을 기본적으로 사용하였고, 개인 문집 관련은 한국 고전번역원 자료를 활용했다고 한다. 번역문이 없는 부분만 편저자가 번역하였고, 전문가들을 찾아가 번역을 지도받으며 의견을 듣고 정리를 하였다고 한다.
편저자가 말하는 우리에게서 단군이 멀어진 이유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모든 왕조에서는 자신들의 기원과 정통성을 단군조선檀君朝鮮에 두었고, 단군조선의 대표자인 단군왕검檀君王儉에 대해서는 국조國祖로서 깍듯한 예의를 차려 대우하고 있었다. 이런 인식의 계승은 동아시아의 독특한 사고 체계인 ‘역사 근거 주의’에 입각하여 나라별 역사 연구에서 고조선이 한국사의 출발점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고 편저자는 말한다.
이승휴의 『제왕운기』
이어 편저자는 단군이 우리에게 멀어진 시기를 고려 말, 조선 초로 말하고 있다. 고려 말은 정치적으로 공민왕이 주도한 항원抗元 정책과 사상적으로 정체성이 모호한 성리학으로 인해 고려 지식인들이 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단군을 연구할 때 빠질 수도 빼어 놓을 수도 없는, 자신을 스스로 동안거사라 불렀던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가 나오게 된다. 여기에서 단군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해 놓았다.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승휴가 단군을 어떻게 봤느냐를 눈여겨봐야 한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제왕운기』의 편제를 보면 상편은 ‘중국사’, 하편은 ‘한국사’로 나누어 춘추필법*을 근거하여 지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기자箕子를 언급하면서 ‘소중화小中華’에 대한 자부심을 강조하는 것이 보인다고 했다. 즉 우리 역사에서 가장 고질적인 문제가 되는 ‘소중화 사관’의 시작이 바로 『제왕운기』에서 출판된 것이라고 하였다.
*춘추필법春秋筆法 - 공자가 『춘추春秋』를 쓸 때 사용한 필법으로, 명분에 따라 용어를 구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세 가지 방식은 위국휘치爲國諱恥(중국에 영광스러운 일은 부풀리면서 중국에 수치스러운 일은 감춘다), 존화양이尊華攘夷(중국은 높이면서 주변 나라는 깎아내린다), 상내약외詳內略外(중국사는 상세히 쓰면서 이민족 역사는 간략하게 적는다)이다.
조선 시대 단군에 대한 인식 변화
14세기 후반부터 고조선사는 뜻하지 않은 고난을 겪게 된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朝鮮이 건국하면서 명明나라와 외교적인 문제들이 많이 발생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명나라와 많은 왕래를 하였는데, 이 사신단에 권근權近도 포함되어 있었다. 권근은 당당하게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조선의 유구한 역사를 설명하였고, 주원장 역시 이를 인정하였다.조선을 세운 사대부들은 새로운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분명한 명분을 제시해야 했는데, 그들은 살아가면서 예의를 중시하던 선진先秦 이전이나 한당漢唐 시절의 유학이 아닌, 우주 원리에 따라 세상의 질서를 생각하는 관념적 신유학인 성리학性理學을 새로운 세상의 이념으로 내세웠다.
그 결과 그동안 이어져 오던 단군檀君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점점 약해져 갔고, 이어 시대적 흐름에 따라 기자箕子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 영조 때 조선학이 부흥되면서 다시 전통 사관이나 사상이 복원되는가 싶었지만, 다시 정조부터 시작된 정신적 사대주의에 따라 약화하면서 이어지는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 자체가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일제강점기
20세기에 들어와서 무력으로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침공한 일본은 점령군 사령부를 세우자마자 대한제국의 역사부터 조작하기 시작했다. 1915년 7월 중추원中樞院에서 한국사를 날조하기 위하여 ‘조선반도사朝鮮半島史 편찬編纂’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는 ‘조선사 편수회朝鮮史編修會’ 사업을 위한 첫 단계였다. 이는 한국인이 자부심을 품고 있는 한국의 역사를 일본보다 못한 것으로 만들어야 대한제국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역사 왜곡 작업 중 일제가 첫 번째로 추진한 것이 바로 고조선 역사의 날조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성시되며 멀쩡히 존재하던 역사가 어느 날 갑자기 내용이 과학적이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자기들 마음대로 ‘황당무계’한 허구라고 규정해 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조선은 이 땅, 즉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사에서 다룰 수 없는 역사라고 단정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고조선 역사가 어느 순간 공식 문서에서 사라졌고, 일부 친일 매국노를 제외한 대다수 한국 사람들이 당황하였으며, 이를 지키기 위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어려운 처지에서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른바 민족주의자로 분류되는 많은 사람이 한국사 관련 책을 다수 출간하였는데, 이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한국 상고사上古史 관련 책들이다. 이 책들에 대해서 오늘날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한국 상고사 관련 책들은 거의 위서僞書로 낙인찍어 분류하였으며, 다른 시대사를 다룬 책들은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해방 이후
그러나 문제는 타의에 의해 형성된 한국사관, 특히 일제에 의해 집중적으로 왜곡 날조되고 세뇌된 사관이 1945년 대일 승전 이후에도 계속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74년 국정교과서 체제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만 하여도 국사는 자율적으로 기술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학자들은 어떤 견해라도 자신의 의견을 서술하고, 배우는 사람들은 골라서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국정으로 전환이 되자 한국 초・중・고 교과서에서 고조선은 신화적인 내용으로 언급되며 사실상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역사 전쟁 - 단군조선 인식의 중요성
1974년 국정교과서 전환에 반대하면서 역사 연구자들이 많은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고조선사를 사실로 기록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역사학계에 큰 충돌이 일어났다. 1981년 초대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안호상安浩相 등이 주도한 역사 교과서 파동이 그것이었다(최근 있었던 역사 교과서 파동의 쟁점은 근현대사 인식의 문제였다).
이런 충돌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국정교과서 내용에 반대하는 연구자들은 이른바 ‘재야’라고 낙인을 찍어 분류하였다. 이런 분류는 훗날, 이른바 주류학계, 강단사학계에 반대하는 학설을 주장하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어이없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 대립은 결국 학술적인 논쟁을 넘어 감정 대립으로 번지고 말았다. 그리고 고조선 역사를 없앤 사람들과 이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 간의 지루한 논쟁과 때에 따라 벌어지는 감정싸움은 매우 오랫동안 지속돼 오고 있다. 전자의 주장은 ‘식민사학’으로, 후자의 견해는 ‘민족주의’로 평가받을 정도로 극단적 대립으로 이어지며 심각한 사회 갈등을 낳기도 하였다.
편저자는 한국에서 고조선을 두고 갈등을 빚는 것은 연구자들의 연구 출발점에서부터 많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연구의 출발을 어떤 것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았다. 즉 어떤 사료를 활용하여 연구할 것인가 하는 것부터 제대로 성찰과 고민을 해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학계에서 그동안 단군, 또는 고조선에 관한 연구가 단편적인 사료를 중심으로 진행된 점을 들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한국에는 고조선을 연구할 수 있는 기본 자료들이 많이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책이 그 증거이다. 그런데도 이런 자료들이 제외되고 연구가 시작된 것이 문제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외래 사관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역사에 버젓이 남아 있는 고조선, 단군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정립하는 것은 과학적인 역사 연구와 함께 우리의 뿌리를 제대로 밝히는 일이 될 것이다. ■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세 가지 틀에 갇혀 있다
우리나라 역사학계처럼 자신의 역사를 편협하게 보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더 축소해서 볼 것인지만 연구하고, 더 이상의 연구는 없는 것 같다. 자국에 대한 역사를 알고 싶어 하는 일반 사람들의 바람은 더욱 커 가지만, 역사학계에서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특히나 우리 역사학계는 금기 사항이 많다. 현대사는 연구하면 안 된다든지, 고조선의 상한 연도는 청동기 시대에 맞춰서 기원전 10세기 이상을 넘어가면 안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이상한 개념인 ‘원삼국原三國’ 시대가 있어서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은 서기 4세기 이후에나 국가가 형성되었다고 본다든지, 그나마 있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대신에 수많은 내용들이 이미 허구와 조작으로 판명된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인용한다는 걸 보면, 참 이해가 어려운 곳이 우리나라 역사학계, 특히 고대사학계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우리 역사학계가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절대 벗어나지 않으려는 틀에 대해 정리해 보려고 한다.
첫째는 반도사관半島史觀으로, 우리 역사의 강역은 절대 한반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고구려 때 조금, 더 가 봐야 요동반도 근처 정도고 대부분은 한반도 안에서 일어난 것으로 설정해 놓았다. 그리고 모든 지명을 한반도 안에 구겨 넣고 있다.
중국 정사에서 백제가 대륙에 영토를 가진 기록이 있고, 청나라 역시 자신들의 뿌리를 신라라고 하는데도 이에 일제히 침묵하고 있다. 고구려와 수隋나라의 전쟁 때 살수대첩의 장소인 살수薩水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지금의 청천강이라 규정해 놓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는 한반도 안에서만 펼쳐졌다는 틀을 주입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한민족은 독자적인 문명, 국가, 역사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외래, 외국에서 뭐(누)가 오든지 영향을 받아서 문명이 형성되었다는 틀이다. 실제 우리나라에서 공식적 역사를 다루는 공무원 시험이나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의 해답은 그렇게 주어져 있다. 우리의 독자적인 것은 거의 없고 외세의 영향을 받아 국가와 문화가 만들어졌다는 틀이 매우 견고하게 형성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외세는 거의 중국이다.
고인돌이 만들어진 시대가 청동기 때이고 전 세계 고인돌의 70% 이상이 우리 한반도와 가까운 주변에 있다. 이는 고대 한국이 고인돌의 종주국이라고 충분히 주장할 수 있음에도, 반대로 전 세계 고인돌의 문화를 흡수해서 우리 한반도에 많이 만들어 놨다고 해석하고 있다. 오히려 외국 학자들이 고인돌 문화의 종주국이 우리 한국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 민족 문화는 당연히 외국에서 들어왔을 것이라는 틀에 갇혀 있으면서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고대 유적이 나오면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연구할까? 답은 ‘글쎄요...’이다. 대놓고 묻어 버리고 외면하는 게 현실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역사는 삼국 시대부터 시작됐다는 틀이다. 고조선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마지못해 다루는 정도로 고조선을 기술하고 있다. 2007년 이전까지 우리나라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BCE 2333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로 기술되어 있었다. 건국했다는 말인지, 하지 않았다는 말인지. 남의 나라 역사 기술하듯 말하고 있었다. 2007년 이후에야 겨우 “BCE 2333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로 수정되었다.
이렇게 바뀌는 데 해방 이후 수십 년이 걸렸다. 그러니까 대한민국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기준으로 보자면 2007년에서야 비로소 고조선을 역사로 온전히 인정한 것이 된다. 가장 황당했던 부분은 또 있다.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우리나라 국가의 형성이 청동기 시대와 일치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청동기는 최초로 BCE 10세기경에 나왔으니, 고조선이 BCE 2333년이라고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최초의 청동기 유물이 출현한 BCE 10세기경에 고조선이 부족 국가로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오랫동안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인식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BCE 20세기 이전의 청동기 유물이 발굴되었지만, 여전히 고조선의 성립 연대는 오랫동안 고쳐지지 않았다. 아직도 역사학자들 중에는 고조선을 신화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고, 애써 역사로 인정해도 BCE 10세기 정도에 형성된 부족 국가 정도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고조선 이후 실체도 없는 기자조선, 위만 정권, 소위 한사군을 거쳐 토착 세력들이 한사군을 몰아내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시대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인식이다. 가야는 어디로 갔는지 모를 지경이다.
여기에 북쪽에 한사군漢四郡이 있었고, 남쪽에는 대일항쟁기 일본이 날조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있었다고 신봉하는 학자들도 많다. 지금 대한민국 역사학계는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의 사관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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