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B다시보기 | 역사대담 54~55회, 광개토태왕비문과 환단고기의 정합성
[STB하이라이트]
프로그램명 : 역사대담
방송시간: 30분 / 제작: STB상생방송 / 사회: 김철수 중원대학교 교수
정복 전쟁을 통해 가장 강력한 고구려를 만들었던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은 지금도 우리 민족 최고의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업적이 기록된 광개토태왕 비문은 일제의 조작과 왜곡으로 올바른 내용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광개토태왕 비문이 들려주는 동북아 역사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이번 시간에는 대전대학교 한의학과 윤창열 교수님을 모시고 『환단고기』를 통해 광개토태왕 비문의 참모습을 만나보겠습니다.
질문1) 광개토태왕비廣開土太王碑는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한데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개략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광개토태왕을 위대한 공덕을 세운 황제라는 의미로 광개토열제廣開土烈帝라고 호칭합니다. 광개토열제는 고구려 19대 왕인데 412년에 돌아가시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인 장수열제長壽㤠帝가 414년에 수도인 만주 집안集安에 세운 비석이 광개토태왕비문입니다. 광개토태왕비에는 광개토태왕이 18세부터 39세까지 22년의 재위 기간 동안 우리 민족에서 가장 뛰어난 정복 군주로서 남으로는 백제, 신라, 가야를 복속하고 대마도를 거쳐서 일본열도까지 정복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전체 비문의 글자는 1,802글자로 되어 있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군데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고주몽 성제가 고구려를 건국하는 내용과 왕통을 계승해서 광개토열제까지 내려오는 부분입니다. 두 번째는 광개토열제께서 총 여덟 번에 걸쳐서 정복한 과정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묘를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는 연호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질문2) 광개토태왕 비문이 『환단고기』에 실린 내용과 일치한다는 말씀이신데요.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비문의 탁본이 여러 개 존재하고, 비문에 따라 해석하는 게 달라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비문이 발견된 과정을 알아보는 게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비문은 언제 어떻게 발견된 건가요?
광개토태왕비가 발견된 것은 1875년 이후입니다. 이렇게 늦게 발견된 이유는 1668년 청淸나라 강희제가 만주 봉금령을 선포하게 됩니다. 그래서 광개토태왕 비문이 있는 집안현集安縣에는 조선인과 한인들이 드나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200여 년이 지나 청나라 말기인 1876년 광서제 2년에 봉금령이 해제되면서 회인현懷仁縣이 설치됩니다. 당시 회인현 설치에 연관된 인물 중에 ‘관월산關月山’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금속학을 좋아하고 탁본 기술이 뛰어났는데 광개토태왕 비문을 처음 발견하면서 탁본拓本을 떴고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질문3) 414년에 광개토태왕비가 만들어졌으니까 19세기 말이면 상당히 늦게 발견된 건데, 왜 그 전에 비를 발견하지 못한 건가요?
우리나라 문헌을 조사해 보면 비석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습니다. 세종 29년인 1445년에 찬술이 된 용비어천가를 보면 주석에 비석이 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고, 성종 18년인 1487년에 평안감사 성현이 지은 시에 천척이나 되는 크기의 비석이 우뚝 서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비석의 존재를 의미하는 역사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금金나라의 유적으로 알고 금나라 황제의 비석으로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질문4) 광개토태왕비가 있는 건 알았지만 금나라의 것으로 여기고 청나라와의 봉금령으로 인해 실제 들어가서 보지 못했던 거군요. 그럼 봉금제가 무력화된 후인 1875년 이후에 비를 발견하고 처음 탁본을 떴다는 건데요. 그 탁본이 지금도 남아 있나요?
광개토태왕 비문의 탁본은 약 50여 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탁본은 일제가 석회로 비문을 조작한 이후의 탁본입니다. 1889년에 일본에서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란 이름으로 공개되면서 알려지게 됩니다. 그런데 쌍구가묵본은 글자의 테두리를 그리는 형식(사람이 비면에 붙인 종이 너머로 윤곽을 가늠한 뒤 먹을 칠하는 방식)이라 엄밀히 말하면 탁본이 아니며, 또 글자 테두리의 조작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현재 광개토태왕 비문의 탁본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쌍구가묵본입니다.
질문5) 만약 다른 탁본들이 발견된다면 광개토태왕 비문과 관련한 모든 논쟁이 일소될 텐데 아쉽습니다. 처음 탁본을 뜨고 난 1년 후에 일본 육군성의 첩보 장교 출신인 사가와 가게노부酒勾景信 중위가 탁본을 떠서 본국으로 가져간 사건이 발생하죠?
1883~1884년에 일본군 첩보 중위가 광개토태왕비 탁본을 일본으로 가져가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1889년 6월에 일본군 산하 단체의 기관지에서 쌍구가묵본이 발표됩니다. 이후 일본에서 집중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면서 고구려비출토기, 고구려고비석문 등으로 학계에 발표됩니다. 중국과 한국에서 연구되기도 전에 일본에서 연구를 시작한 것입니다.
질문6) 일제의 광개토태왕 비문에 대한 집착이 아주 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제가 이렇게 광개토태왕 비문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일본은 자기들의 군국주의 정치 체계 아래에서 우리나라를 복속하려는 야심이 있었고 이런 연장선상에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도 꾸며 내게 됩니다. 그리고 광개토태왕 비문에 일본과 연관된 신묘년辛卯年 조條 내용(391년 신묘년에 일어난 왜⋅백제⋅신라 사이의 전란에 관련된 내용)을 교묘하게 왜곡합니다. 이런 역사 왜곡의 목적은 일본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질문7) 당시 일본군의 정보 능력이 정말 대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환단고기』를 편찬한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 선생께서 광개토태왕 비문의 탁본을 뜬 게 1898년 무술년이라고 하셨는데요. 그렇다면 계연수 선생도 사가와 가게노부 중위가 탁본을 뜨고 난 지 한참 후에 탁본을 뜬 것이군요.
일본 중위가 일본으로 탁본을 가져가고 약 15년 정도 지난 뒤인 1898년 무술년戊戌年에 계연수 선생께서 탁본을 뜨게 됩니다. 계연수 선생이 1898년 5월에 탁본을 뜨기 위해 출발하려고 하니 오동진 장군과 이용이라는 분이 경비를 지원해 줬다고 나옵니다. 광개토태왕 비문이 있는 집안현에 도착하고 보니 너무 수풀이 우거져서 중국인 장정들을 고용해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 제를 지낸 뒤 탁본을 떴다고 합니다.
탁본을 떠 보니 총 1,802글자 중에 마멸된 글자가 117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1912년 5월에 2차로 가서 탁본을 떴는데 추가로 마멸된 글자가 138자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계연수 선생이 처음 탁본을 뜬 본을 무술등본戊戌謄本이라고 하는데 이 무술등본을 통해 마멸된 138자를 복원하고 해석한 ‘성릉비문결자징실聖陵碑文缺子徵實’을 집필하게 됩니다.
질문8) 지금까지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일제가 광개토태왕 비문을 조작한 게 확실한데요. 그렇게 본다면 계연수 선생께서 일제가 비문을 조작하기 전에 탁본한 무술등본은 광개토태왕 비문의 진실을 밝혀 줄 정말 소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계연수 선생이 탁본한 무술등본을 통해 광개토태왕 비문의 138자가 복원되면서 광개토태왕 비문의 진면목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마멸된 138자 중에서 90글자 정도가 일본과 관련된 글자입니다. 그 내용 속에는 광개토태왕이 대마도를 거쳐서 규슈九州에 상륙을 해서 전 규슈를 초토화하고 오사카 앞에 있는 담로도에 상륙해서 효고현과 동경까지 정벌했다는 내용들인데 이 내용에 해당하는 글자가 모두 마멸이 된 것입니다. 이런 점만 보아도 무술등본에 대한 역사적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운초 계연수 선생은 1920년에 일제의 밀정 감영극甘永極에 의해 참혹하게 돌아가시게 됩니다. 다행히 계연수 선생의 학문을 계승한 단학회 회원들이 1930년에 삼육사三育社라는 단체를 만들게 되는데 계연수 선생의 수제자였던 당시 24살의 이유립 선생이 조직 위원장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1931년 7월에 삼육사 잡지에 계연수 선생의 ‘성릉비문결자징실聖陵碑文缺子徵實’ 글이 게재가 됩니다. 하지만 일제가 이 사실을 알게 되어 관련 사람들은 모두 구속이 됩니다. 그리고 삼육사도 일제에 의해 해산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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