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에서 희망의 빛을 보다 - 단군, 환단고기 그리고 주체사관』

[이 책만은 꼭]

이상한 우리 역사학계


한국의 강단사학은 자신들의 ‘역사관’을 마치 종교 교리인 것처럼 만들었다. 그래서 다른 해석은 일체 부정하고, 다른 사료에 대해서는 소위 ‘위서僞書’라고 낙인찍어 언급조차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911년 독립운동가 계연수가 펴낸 『환단고기桓檀古記』를 위서, 즉 조작된 책이라고 결론부터 내리고 접근한 일이다. 이 논란은 지금도 계속 중이다.

『환단고기』는 「삼성기三聖紀 상⋅하」,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라는 시대와 저자가 다른 네 종류의 사료(사서)를 한 권으로 묶은 책이다. 따라서 이를 위서로 단정 짓기 위해서는 위 사료에 대한 교차 검증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생략된 채 공개 시기나 용어 문제 등 몇 가지 지엽적 사항을 가지고 전체를 위서로 결론을 내려 놓고 이 전제에 꿰어 맞춘 연구를 하였다. 자신들의 연구 결과에 맞지 않으니 위서란 것이다. 역사학은 과거 사료를 연구해서 결론을 내는 학문이다. 결코 후대 연구 결과를 가지고 과거를 재단하는 학문이 아니다.

이런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역사학계에 일침을 가하는 책이 나왔다. 바로 『환단고기에서 희망의 빛을 보다』이다. 이 책의 이름은 강희남 목사의 글, 『새 번역 환단고기』의 머리말에서 따왔다.

이 책 발간의 의미



이 책은 기획자인 최진섭과 신학자 원초 박순경(1923~2020) 교수와의 인연을 실마리로 한다. 둘의 첫 만남은 1991년 9월 8일 서울 구치소 접견실이라고 한다. 당시 70세인 박 교수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감 중이었고, 월간 『말』 ‘분단과 사람들’ 주인공으로 선정된 박 교수를 인터뷰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후 다른 인터뷰로 박 교수를 강화도 전등사의 찻집 죽림다원에서 만났다고 한다. 여기에서 박 교수는 예전과 변함없이 민족과 통일을 강조했고, 민족이 이념과 체제보다 우선함을 역설하는 과정에서 『환단고기桓檀古記』를 언급하였다. 90을 맞이한 나이에 STB상생방송을 보면서 『환단고기』를 공부하였다고 한다. 그에 대한 성과를 본문에 싣기도 하였다.

필자(박순경)는 STB 상생방송국의 역사 특강과 상생출판 『환단고기』의 도움으로 수메르 문명권의 원류인 동이족의 12환국, 환인桓因의 나라의 역사성 논증에 접하면서, 12환국에 속하는 수메르 문명권과 구약성서의 창조론-역사-예언과 종말론의 깊은 관련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 책 242쪽


그리고 『환단고기』를 공부하게 된 배경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였다.

“민족 신학, 통일 신학을 연구하면서 우리 민족사에 관심을 갖게 됐고, 우리 민족사의 시원을 밝히는 작업을 하다 보니 『환단고기』를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통일 신학에 주력하기로 마음먹은 1970년대부터 한국 역사책을 찾아봤는데 민족 문제를 제대로 밝힌 역사학자를 찾지 못했어. 우리나라의 진보적인 식자들은 역사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 서구에서 공부를 잘못해서 그럴 거야. 근현대사 연구하는 학자들이 안타깝게도 제국주의 국가들의 민족주의와 피억압 국가의 민족주의를 구별하지 못해. 한국 사학자들도 민족 시원을 잘 몰라. 진보 진영이 걱정할 것은 제대로 된 민족주의가 없다는 것이야. 민족의 과잉이 아니라 민족의 결핍이지.” - 45쪽


이 내용과 관련하여 한암당 이유립 선생의 말씀을 소개한 부분이 나온다.

한암당 선생은 현대의 지성인들이 걸핏하면 국사찾기운동까지도 국수주의적이라는 비방을 하는 것에 대하여, ‘권두언-천하만사 선재지아’에서 “세계주의만 있고 민족주의가 없다 하면, 이로부터 우리에게는 ‘민족의 주체사관과 가치의 정립’이란 아무 소용이 없고 오직 유교의 춘추사관 속에 우리의 조국을 지나支那의 한 군현으로 만들어도 무방한 것이냐.”며 항변했다. 또한 “우리가 말하는 민족주의는 근세기의 구라파에서 일어난 자본 침략이 아니며, 근자의 일본인들이 감행해 온 영토 침략도 아니다.”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 225쪽


소위 『환단고기』 ‘위서론’에 대해 박 교수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기존 학자들은 자기 이론에 갇혀서 다른 학설이 나오면 배제해. 그 사람들은 그게 무슨 역사냐 그러는데, 일제 식민사관에 젖어서, 타성에 빠져서 그런 거야. 시대, 인물, 상황이 구체적으로 나오는 걸 보면 『환단고기』는 결코 위서가 아녜요. 무슨 재주를 부려서 역사적 상상력으로 꾸며낸 책이 아냐.” - 345~346쪽


그러면서 여러 번 읽기를 강권했다고 한다. 학식과 덕망이 높은 분의 추천으로 구입은 했으나, 제대로 읽지 못하다가 2020년 10월 24일 박순경 교수의 부고를 접하면서, ‘진보적 민족주의자는 환단고기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라는 문제의식으로 기획돼서 나온 노력의 일환이 바로 이 책이다.

꼭 읽어야 할 이 책의 특징 세 가지


『환단고기에서 희망의 빛을 보다』에는 이전의 『환단고기』를 다룬 책과 다른 특이한 점이 세 가지 있다.

첫째, 역사관의 재정립이라 할 수 있다. 이덕일과 이매림 등의 글을 통해서 홍범도, 오동진, 안창호, 신채호, 정인보, 김교헌, 조소앙 등 독립운동가들이 단군조선을 중시했고, 이는 『환단고기』의 역사적 인식과 맥을 같이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보이듯 단군조선에 대한 인식이 일제 식민사학과 주체사학 또는 독립운동가의 사관을 가르는 분수령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유립 선생은 민족의 주체사관을 다음처럼 강조하였다.

투철한 민족의 주체사관을 세울 수 있는 민족은 문명 선진의 민족이요. 천박한 민족의 타율사관을 벗어날 수 없는 민족은 야만 열등의 민족이다. 참다운 민족의 주체사관과 가치의 정립이 추구되는 것이라면, 김부식의 역사관과 송시열의 의리관은 단연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 202쪽


평생 통일 운동에 앞장섰던 강희남, 박순경 같은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이 『환단고기』에 관해 쓴 글을 보면 이들 역시 독립운동가들의 단군관과 맥을 같이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둘째는 『환단고기』를 현대에 전수한 #한암당 이유립 선생의 사관史觀, 가치관을 재조명#했다. 사관은 역사의 발전 법칙에 대한 체계적인 견해, 역사적 고찰을 할 때의 일반적 통일 이념을 말한다. 역사가가 과거의 사실들 가운데서 어떤 사실을 선택할 때의 기준, 그것을 해석할 때의 해석 원리, 그 사실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 가치관 등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을 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역사가가 역사를 기술함에 있어 통일성을 결여하게 되면, 단순한 사실의 집적集積이나 연대기年代記가 될 우려가 있다. 대표적인 책이 바로 우리 한국사 교과서이다. 왜곡과 날조 그리고 나열식 목차를 살펴보시라. 학창 시절 한국사 과목은 무조건 암기해야 한다는 경험이 있지 않았는지를 회고해 보면 느껴지는 게 있을 것이다. 역사 서술의 형식과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어떤 형식과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서술 전체를 일관하는 통일된 사상이 필요한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 책은 그동안 간과되어 왔고, 잘못 알려진 한암당 이유립 선생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불식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6장 최진섭의 글과 『한암당이유립 사학총서』를 편집한 전형배와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암당 이유립 선생의 글은 보수적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매체에 실렸고, 국수주의적인 면모가 있었다. 하지만, 『한암당이유립 사학총서』(1983)에 실린 글을 통해서 이유립 선생이 강조하는 ‘민족의 주체사관’을 살펴보면, 그가 국수주의자라기보다는 사대주의를 반대하고 자주적 평화통일을 강조하는 진보적 민족주의자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유립 선생의 글에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다.

셋째, 최근(2021년)에 #북한 학자가 『환단고기』에 관해 언급한 글을 함께 게재#했다. ‘10장 단군 관계 비사 『환단고기』에 반영된 력사관’이다. 이 글에서 북한 역사학자 림광철은 무턱대고 위작이라고 보는 것은 편협한 견해라는 의견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군 관계 비사 『환단고기』에 대하여 아주 엄밀한 사료적 검토를 진행하여 거짓을 벗겨 내고 진짜 알맹이를 골라 취사하여야 할 것이라고 본다. 다시 말하여 근대 시기 혹은 그 이전 시기에 손을 댄 흔적들을 말끔히 벗기고 분석하여 보면 원래의 사료로 만들 수 있으리라고 본다. 지난 시기 학계에서는 단군 및 고조선 문제를 심화시키면서 이러한 단군 관계 관련 도서들에 반영된 단군조선 왕조의 47대 왕력이나 단군 8가 같은 것을 분석하고 실재한 력사적 사실로 인정하였다. 최근에는 단군 관계 비사들에 기초하여 전조선과 후조선의 왕세계도 합리적으로 밝혀내었다. 이처럼 『환단고기』는 내용 서술에서 비록 주관적이고 과장 확대해 놓은 부분 그리고 근대에 만들어 낸 부분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일정한 력사 사료에 근거하여 우리 민족사관을 옳게 정립 재개하려고 한 긍정적인 측면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 341~342쪽


목차와 책의 주요 내용 정리



여는 글 “사대유교인 김부식 해독은 이완용보다 심해”
1장 환단고기에 담긴 주체적 역사관과 독립운동가 - 이덕일

2장 기자조선 정통성 주장한 조선 왕실의 단군 사료 파기 - 김종성
조선 왕실이 불교보다 고조선과 신선교에 관한 서적들을 더 억압했고 그 때문에 관련 서적들은 자취를 감췄다고 썼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한국 상고사 지식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와 함께 단군이 나오는 『삼국유사』와 같은 사료들이 금서에서 제외된 이유는 “고조선 역사의 진상을 알려 주기에 불충분했거나 고조선 역사의 진상과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펴며, 이런 사서는 오히려 비판적으로 인식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제기했다.

3장 대일항쟁기 독립운동가, 한국사 국통을 바로 세우다 - 이매림

한국사가 식민사관이 아닌 독립운동가의 사관, 임시정부의 사관으로 다시 바로잡혀야 함을 역설했다. 그는 독립운동가 홍범도, 오동진, 안창호, 신채호, 정인보, 김교헌, 조소앙 등의 예를 들면서 이들이 단군, 밝달(배달)의 역사를 중시했으며, 시민 역사학자를 중심으로 이를 계승해 하루속히 조선총독부 사관의 올무를 벗어던지고, 독립운동가의 가슴과 피와 정신에 녹아 있었던 ‘단군’을 다시 한국사의 중심에 바로 세워야 한다고 썼다.

4장 남북한 중·고등 역사 교과서의 단군 및 고조선 서술사 연구 - 김명옥


해방 이후 최근까지 남과 북의 교과서가 단군과 고조선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비교 분석했다. 1993년 단군릉 발굴 이전과 그 후의 북한 역사 교과서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평양은 단군과 고조선의 중심지가 되었고, 단군을 왕의 호칭에서 실존한 역사 인물이자 조선 민족의 원시조로 확정했다. 건국 시기도 서기전 3000년경으로 끌어올렸다. 단군은 하나의 이념이 되었으며 ‘조선민족제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반면 남한 교과서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단군부정론을 여전히 계승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단군은 역사 속 실존 인물이 아닌 신화로 서술된다.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단군신화의 역사성’이란 말은 단군을 역사로 인정하는 것 같은 뉘앙스지만 실제로는 단군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단군은 고려 때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고, 만들어진 단군이 민족의 위기 때마다 가령 조선과 대한제국 말기에 다시 호명되어서 민중을 하나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한 것, 이것을 ‘단군신화의 역사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5장 평양 단군릉과 기자릉 파묘 현장 답사기 - 최재영(NK vision 2020 설립자, 대북사역자)

2014년 10월 개천절 행사 참석을 위해 평양 단군릉을 찾았는데, 북이 단군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관해 적었다. 그리고 2015년 방북했을 때 평양 모란봉 기자箕子 묘지 위에 세운 송가정을 참관했는데, 이때 동행한 북한 민족학연구소 소장에게 들은 기자묘의 파묘 배경도 상세히 적었다. 김부식은 “기자로 인하여 우리 역사가 시작됐다.”라고 했는데, 최재영은 “이는 김부식의 생각만이 아닌 그 시대 지배층들의 보편적 인식을 반영한 것”이라 썼다. 중화주의적 유학자들에 의해 떠받들어진 기자의 실제 무덤은 평양이 아닌 중국 허난성河南省의 옥수수밭 한가운데 있다고 한다.

6장 환단고기 전수자 이유립과 민족의 주체사관 - 최진섭


『한암당 이유립 사학총서』, 『이유립 평전-백년의 여정』(양종현), 『환단고기』(안경전 역주)의 해제를 참조하여 이유립의 삶과 역사관을 정리했다. 평북 삭주 출신인 이유립은 부친 이관집이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오동진, 이상룡 등과 같은 독립운동가를 보고 자랐으며, 『환단고기』의 편찬자 운초 계연수를 자주 접하며 학문적 영향도 받았다.

이유립은 유학자들의 중화 사대주의 노예사관을 비판했으며, 이에 맞서 민족의 주체사관을 바로 세우려 했다. 그는 김부식의 신라 중심주의 사관을 부정하고, 고구려 중심주의 사관을 제시했다.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신채호의 역사관을 계승한 이유립은 이병도의 실증사관을 숭명 사대주의 잔존사관, 식민사관을 계승한 양두羊頭사관이라 비판했다.

굴종적 사대주의를 배격한 이유립은 해방 이후에 민족의 주체성과 함께 평화적 자주통일을 역설했다. 부가적으로 『한암당 이유립 사학총서』편집자 전형배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7장 환단고기와 구약성서 창세기로 읽는 우주론 - 박순경
8장 환단고기에서 희망의 빛을 보다 - 강희남


강희남은 『새번역 환단고기』 서문에서 “내가 무엇 한 가지 쓸 만한 것을 찾아볼 수가 없는 세월을 살다가 어두운 밤길에 작은 반딧불을 만난 것처럼 한 가닥 희망의 빛을 본 것이 있으니 곧 『환단고기』라는 책이다.”라며 『환단고기』를 접했을 때의 심정을 밝혔다. 그는 『환단고기』에서 “뚜렷한 주체사관을 발견하고 ‘여기에 우리 민족의 갈 길이 있구나.’ 하고 홀로 기쁨에 잠겼다.”라고 썼다.

9장 나에게는 피신할 ‘고구려’ 땅도 없다 - 강희남


10장 단군 관계 비사 환단고기에 반영된 력사관 - 림광철


후기 박순경, 강희남, 이유립과의 인연과 환단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