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사관의 진실 | 환단고기가 처음 밝혀 주는 역사 진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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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는 한민족의 역사 경전이면서
동시에 종교 경전이요 문화 경전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우리 역사, 문화의 원형을 밝혀 주는 보배로운 사서이다. 특히 환단고기는 다른 사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역사 사실이 많이 실려 있다. 『환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의 해제 편에서는 ‘환단고기에서만 전해 주는 새로운 역사 진실’이라고 하여 이를 52가지로 정리하여 밝혀 주고 있다. 이를 중심으로 환단고기의 진정한 역사적 가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24 고조선이 나라 이름을 바꾼 사실을 밝혀 준다.
44세 구물 단군께서 도읍을 장당경으로 옮기시고 나라 이름을 대부여로 바꾸셨다!
丙辰周考時(병진주고시)에 改國號(개국호)하사 爲大夫餘(위대부여)하시고
自白岳(자백악)으로 又徙於藏唐京(우사어장당경)하사
병진(단기 1909, BCE 425)년 주周나라 고왕考王 때 나라 이름을 대부여로 바꾸고 도읍을 백악산에서 장당경으로 옮기셨다. (『삼성기』 상)
於是(어시)에 丘勿(구물)이 爲諸將所推(위제장소추)하야
乃於三月十六日(내어삼월십육일)에 築壇祭天(축단제천)하시고
遂卽位于藏唐京(수즉위우장당경)하사 改國號爲大夫餘(개국호위대부여)하시고
이에 구물이 모든 장수의 추대를 받아 3월 16일에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장당경에서 즉위하였다. 44세 구물 단군께서 국호를 대부여大夫餘로 바꾸셨다. (『단군세기』 구물 단군 조)
自白岳(자백악)으로 又徙於藏唐京(우사어장당경)하사
병진(단기 1909, BCE 425)년 주周나라 고왕考王 때 나라 이름을 대부여로 바꾸고 도읍을 백악산에서 장당경으로 옮기셨다. (『삼성기』 상)
於是(어시)에 丘勿(구물)이 爲諸將所推(위제장소추)하야
乃於三月十六日(내어삼월십육일)에 築壇祭天(축단제천)하시고
遂卽位于藏唐京(수즉위우장당경)하사 改國號爲大夫餘(개국호위대부여)하시고
이에 구물이 모든 장수의 추대를 받아 3월 16일에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장당경에서 즉위하였다. 44세 구물 단군께서 국호를 대부여大夫餘로 바꾸셨다. (『단군세기』 구물 단군 조)
국호國號에는 그 나라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 우리 역사에서 국호의 변화 과정을 살피는 것은 역사 변화의 대세를 파악하고 국통맥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단군조선은 초대 단군성조가 개국한 이래 47세의 단군들이 2,096년 동안 다스리면서 세 번 도읍을 옮겼다. 도읍지에 따라 나라를 제1왕조, 제2왕조, 3왕조로 구별할 수 있다.
44세 구물 단군은 43세 물리 단군 때 있었던 우화충의 반란을 진압하고 제위에 오르신 분인데, 등극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변경하는 일이었다. 이는 국정을 쇄신하여 나라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구물 단군은 국호를 ‘대부여大夫餘’로 바꾸었다. 우리말에서 부여는 ‘아침에 어둠이 걷히면서 먼동이 부옇게 밝아 오는 것’을 뜻한다. ‘아침 햇살이 비치는 밝은 땅’이라는 의미의 조선朝鮮과 마찬가지로, 대부여大夫餘라는 호칭에도 우주 광명을 숭상하는 우리 민족의 오랜 철학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규원사화』 「단군기檀君紀」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넷째 아들 부여夫餘를 서쪽 땅에 봉해 그곳을 부여라 불렀던 사실이 있다. 부여의 역사 근원과 문화 연원은 이렇게 단군조선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단군조선의 제3왕조를 연 구물 단군이 초대 단군 시절의 부여를 취하여 국호를 정한 데에는 ‘고조선 초기의 국력을 다시 회복하겠다.’는 국가 재건과 중흥의 의지 표명이 담겨 있다.
단군조선이 망하고 나서 해모수解慕漱가 계승하여 새롭게 세운 나라가 북부여北夫餘이다. 대부여를 계승하여 대부여의 북쪽을 중심으로 나라를 열었기 때문에 국호를 북부여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대부여는 단군조선과 북부여의 연결 고리이다. 단군조선의 역사를 단편적으로 전하는 『삼국유사』 고조선 조에는 ‘조선이 도읍을 평양성에서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고 또 나중에는 장당경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단군조선이 나라 이름을 ‘대부여’로 고쳤다고 명확히 전하는 사서는 『환단고기』가 유일하다.
25 단군조선의 멸망 과정을 자세히 밝혀 준다.
고조선 말기 국운이 쇠퇴하고 망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밝혀 준다!
三月祭天之夕(삼월제천지석)에 乃與五加(내여오가)로 議曰(의왈)
昔(석)에 我列聖(아열성)이 肇極垂統(조극수통)하사 種德宏遠(종덕굉원)하사 永世爲法(영세위법)이러니
今(금)에 王道衰微(왕도쇠미)하야 諸汗爭强(제한쟁강)이로대
惟朕凉德(유짐양덕)이 懦不能理(나불능리)하며 無策招撫(무책초무)하야 百姓離散(백성이산)하니
惟爾五加(유이오가)는 擇賢以薦(택현이천)하라 하시고
大開獄門(대개옥문)하사 放還死囚以下諸俘虜(방환사수이하제부로)하시니라
翌日(익일)에 遂棄位入山(수기위입산)하사 修道登仙(수도등선)하시니
於是(어시)에 五加(오가)가 共治國事六年(공치국사육년)이러라
3월 제천을 행한 날 저녁에, 임금께서 오가五加와 더불어 의논하여 말씀하셨다.
“옛날 우리 성조들께서 처음으로 법도를 만들고 국통을 세워 후세에 전하셨노라. 덕을 펴심이 넓고도 멀리 미쳐 만세의 법이 되어 왔느니라. 그러나 이제 왕도가 쇠미하여 모든 왕[汗]이 세력을 다투고 있도다. 짐이 덕이 부족하고 나약하여 능히 다스릴 수 없고, 이들을 불러 무마시킬 방도도 없으므로 백성이 서로 헤어져 흩어지고 있느니라. 너희 오가는 현인을 택하여 단군으로 천거하라.”
옥문을 크게 열어 사형수 이하 모든 포로를 석방하셨다. 이튿날 임금께서 마침내 제위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수도하여 선인이 되셨다. 이에 오가五加가 6년(단기 2096, BCE 238~단기 2102, BCE 232) 동안 국사를 공동으로 집행하였다. (『단군세기』)
昔(석)에 我列聖(아열성)이 肇極垂統(조극수통)하사 種德宏遠(종덕굉원)하사 永世爲法(영세위법)이러니
今(금)에 王道衰微(왕도쇠미)하야 諸汗爭强(제한쟁강)이로대
惟朕凉德(유짐양덕)이 懦不能理(나불능리)하며 無策招撫(무책초무)하야 百姓離散(백성이산)하니
惟爾五加(유이오가)는 擇賢以薦(택현이천)하라 하시고
大開獄門(대개옥문)하사 放還死囚以下諸俘虜(방환사수이하제부로)하시니라
翌日(익일)에 遂棄位入山(수기위입산)하사 修道登仙(수도등선)하시니
於是(어시)에 五加(오가)가 共治國事六年(공치국사육년)이러라
3월 제천을 행한 날 저녁에, 임금께서 오가五加와 더불어 의논하여 말씀하셨다.
“옛날 우리 성조들께서 처음으로 법도를 만들고 국통을 세워 후세에 전하셨노라. 덕을 펴심이 넓고도 멀리 미쳐 만세의 법이 되어 왔느니라. 그러나 이제 왕도가 쇠미하여 모든 왕[汗]이 세력을 다투고 있도다. 짐이 덕이 부족하고 나약하여 능히 다스릴 수 없고, 이들을 불러 무마시킬 방도도 없으므로 백성이 서로 헤어져 흩어지고 있느니라. 너희 오가는 현인을 택하여 단군으로 천거하라.”
옥문을 크게 열어 사형수 이하 모든 포로를 석방하셨다. 이튿날 임금께서 마침내 제위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수도하여 선인이 되셨다. 이에 오가五加가 6년(단기 2096, BCE 238~단기 2102, BCE 232) 동안 국사를 공동으로 집행하였다. (『단군세기』)
「단군세기」에 자세히 기록된 고열가高列加 단군의 사퇴의 변辯을 들으면 당시의 암울했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일찍이 6세 달문達門 단군 때 신지神誌 발리發理는 제천문 ‘서효사誓效詞’를 지으면서 후세에 ‘영보삼한의永保三韓義라야 왕업유흥륭王業有興隆하리라’고 경고했다.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를 길이 보전해야 왕업이 흥하고 번성할 것이라는 의미다.
삼한관경제는 단군조선의 국가 운영 제도로서 한 분의 대단군이 천자로서 진한眞韓(辰韓)을 다스리고 두 분의 부단군이 각각 번한番韓과 마한馬韓을 다스리며 천자를 보좌하는 제도이다. 이는 동방 한민족의 우주관이요 신관·인간관의 핵심인 삼신三神 사상에서 유래한 제도로 그 바탕에는 삼신상제님에 대한 애틋한 신앙이 깔려 있다.
그러나 43세 물리勿理 단군 때에 이르러 삼한관경제가 완전히 붕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냥꾼 우화충于和冲의 역모가 그것이다. 장군을 자칭한 우화충이 무리를 이끌고 도성을 공격하자, 단군은 피난에 나섰다가 도중에 붕어하고 말았다. 이때 반란군을 평정하기 위해 백민성白民城 욕살 구물丘勿이 장당경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구물은 도성에 큰 물이 들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반란군을 평정하고 44세 단군으로 즉위하였다.
각처 군대의 힘을 빌어 반란을 진압한 구물丘勿 단군은 마한과 번한 왕에게도 병권兵權을 부여하게 된다. 이로써 부단군이 다스리는 번조선番朝鮮과 막조선莫朝鮮도 중앙의 쇠약해진 진조선眞朝鮮과 대등한 관계가 되어 버린다. 이때부터 2천여 년 이상 나라를 지탱했던 삼한관경제는 거의 와해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때부터 고조선은 급속하게 쇠락의 길을 걸었다. 45세 여루余婁 단군 이후 고조선과 국경을 접한 연燕나라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다. 「단군세기」에서는 45세 단군 때만 해도 재위 17년, 재위 32년, 재위 33년에 연나라가 침입했다는 기록이 있고, 재위 47년 상곡 싸움 이후 연나라가 해마다 쳐들어오다가 재위 54년에 연나라와 강화講和를 맺었다는 기록도 있다. 46세 보을普乙 단군 때는 번조선 68세 왕 해인解仁이 연나라 자객에게 시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연나라의 침입이 계속된 것은 내부적으로 국정 혼란과 함께 대외적으로 천자국의 권위가 추락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46세 보을 단군 때는 보위를 찬탈하는 내란까지 발생하였다. 한개韓介가 수유須臾의 군사를 이끌고 궁궐을 점령,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이때 장군 고열가高列加가 내란을 진압하고 추대를 받아 즉위하니, 이분이 바로 고조선의 마지막 단군인 47세 단군이다. 이미 그때는 43, 44세 단군 때부터 시작된 삼한관경제의 와해가 더욱 심화되어 ‘모든 왕들이 세력을 다투는’, 마치 주周나라 말기의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내전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단군조선이 쇠운으로 접어드는 과정에서 36세 매륵買勒 단군 시절에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단군세기」에 의하면 재위 38년(BCE 667년) 해상의 적을 토벌하기 위해 보낸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裵幋命이 삼도三島(일본의 규슈九州, 혼슈本州, 시코쿠四國섬)를 모두 평정하고 나서 스스로 천왕이라 참칭僭稱하였다. 지역의 제후가 천자天子를 참칭했다는 사실 자체가 나라의 국정 기강이 무너졌다는 상징일 것이다.
매륵 단군 시절에는 연燕나라의 요청을 받은 제齊나라가 고죽孤竹으로 쳐들어왔다는 기록도 있다. 아시다시피 제나라의 상국上國은 주周나라이고, 그 주나라는 단군조선을 하늘처럼 섬기던 제후국이었다. 제나라가 상국의 상국인 천자국을 공격했다는 것은 단군조선 전성기 시절에는 꿈도 못 꿀 일이다. 아마도 36세 매륵 단군 시절에 나라가 기울어지는 분수령이 있었으리라. 모르긴 몰라도 삼신상제님에 대한 신앙의 쇠퇴도 큰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의 멸망 과정에서 주목할 점이 있다. 고조선 역사 2,096년은 고조선의 중심 세력인 만주에 있던 진한(진조선)의 역사라는 것이다. 고열가 단군은 퇴위하였지만, 고조선 전체가 한꺼번에 문을 닫은 것은 아니었다. 서쪽의 번조선은 그 후 40여 년(BCE 238~BCE 194)을 존속하다가 위만에게 찬탈당하였다. 오늘날 『환단고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고조선 망국의 전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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