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B다시보기 | 한국의 성씨 - 15회 인동 장씨

[STB하이라이트]

우리나라에서 아홉 번째로 큰 성씨가 베풀 장張 자를 쓰는 장張씨입니다. 우리나라에 약 99만여 명이 살고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이 장씨 중 가장 큰 본관인 인동 장씨仁同張氏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장씨의 본관과 귀화 성씨 4본


현재 우리나라 장씨는 30본 내외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중 만 명 이상 되는 본관은 ‘인동 장씨仁同張氏’와 ‘안동 장씨安東張氏’를 비롯해서 10본입니다. 귀화 성씨 4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장씨는 ‘안동 장씨’의 시조인 ‘장정필’로부터 분파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장정필張貞弼은 930년 지금의 안동에서 성주城主인 김선평金宣平, 판관判官 권행權幸과 함께 왕건을 도와 후백제군을 대파한 고려 개국 공신입니다.

귀화 성씨 4본은 덕수 장씨, 절강 장씨, 태원 장씨, 농서 장씨입니다.

덕수 장씨德水張氏는 중국의 소수민족인 위구르에서 유래한 성씨입니다. 아랍계인 시조 ‘장순룡張舜龍’이 고려 충렬왕의 비妃인 제국공주齊國公主※의 호위 무사로 따라온 뒤 고려에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제국공주齊國公主 : 원元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딸


태원 장씨太原張氏의 시조는 중국 섬서성 출신 장문한張文翰입니다. 역사적 인물로는 안견·김홍도와 함께 조선 화단의 3대 거장으로 불리는 장승업張承業이 있습니다.

농서 장씨隴西張氏는 중국 감숙성이 관향이며, 1985년 이후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로 보입니다.

절강 장씨浙江張氏는 시조가 ‘장해빈張海濱’인데 한나라 개국공신 장량의 후손입니다. 정유재란 때 명의 장수로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하여 귀국하지 못하고 경상북도 군위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장삼이사張三李四라 할 정도로 장씨는 흔한 성씨 중 하나입니다. 왕王씨와 이李씨에 이어 세 번째 큰 성씨로 중국에서는 1억 명이 넘게 살고 있습니다.

인동 장씨 현황


귀화 성씨를 제외한 장張씨의 대부분은 ‘태사공 장정필張貞弼’로부터 분파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이전에 장씨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신라의 장보고張保皐와 장웅張雄, 백제의 장무張茂, 대진국(발해)의 장문휴張文休 등이 역사에 등장하고 있으며, 대진국(발해)의 귀족 성씨로 장張씨가 확인되기 때문에 적어도 고구려 시대부터 큰 성씨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장張씨 중에서 가장 큰 본관인 ‘인동 장씨仁同張氏’는 경상북도 구미시와 칠곡군에 위치한 옛 인동仁同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입니다. 인동으로 불리기 전에는 옥산玉山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일부는 ‘옥산 장씨’라고 하는데, 모두 같은 인동 장씨입니다.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약 68만 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데, 전체 장씨에서 3분의 2 이상인 68.5%를 차지할 정도로 큰 성씨입니다.

인동 장씨 두 계통과 계파


인동 장씨는 본관은 같으나 시조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는데 장금용張金用을 시조로 하는 ‘상장군계 인동 장씨’와 장계張桂를 시조로 하는 ‘직제학直提學계 인동 장씨’로 나뉘어 있습니다.

계파를 보면, 상장군계 인동 장씨는 종파宗派(중리파)·남산파南山派·진가파眞佳派·진평파眞坪派·황상파凰顙派를 비롯해서 25개 파가 있으며, 직제학계 인동 장씨는 판윤공파判尹公派·동정공파同正公派·주부공파主簿公派를 비롯해서 6개 파가 있습니다.

인동 장씨 집성촌


인동 장씨는 특히 경상북도 지역에 많이 살고 있는데 천년의 터전이라 할 수 있는 구미시 인동동이 대표적인 집성촌입니다. 이외 집성촌을 살펴보면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연화리, 포항시 흥해읍 초곡리와 보라색 마을로 알려진 전남 신안군 안좌면 반월도 등 전국에 산재해 있습니다.

또한 경기도 고양시 성사동에 있는 집성촌은 400여 년 된 세거지인데 임진왜란 때 무관인 ‘장희한’의 처妻 진주 강씨가 젖먹이 두 아들을 데리고 피신한 곳입니다. 장희한은 황해도 지역에 침입한 왜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지만 패전하여 전사하게 되고 이후 양민 학살을 우려한 ‘장희한’의 처妻는 황해도에서 고양시로 도피하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큰아들이 일곱 살 되던 해 한글로 된 편지 한 통을 남기는데 400년 전에 쓰인 편지 사본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편지를 보면 아들에게 자신의 뿌리를 일깨우고 훌륭하게 자랄 것을 바라는 어머니의 정성이 느껴집니다. 고양시의 인동 장씨는 어린 두 아들의 어머니 진주 강씨에 의해 번창할 수 있었습니다.

인동 장씨의 시조, (1)장금용


인동 장씨는 시조가 다른 두 계통이 있습니다. 먼저, 상장군계 시조인 ‘장금용張金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는 고려 초에 삼중대광三重大匡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지낸 인물입니다. 경북 구미시 인의동에는 시조 장금용의 향사를 지내는 사당인 옥산사가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인동 장씨가 ‘안동 장씨’에서 분적한 성씨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상장군계 인동 장씨 측에서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시조 장금용의 윗대를 고증할 수 있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안동 장씨’에서 분적했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상장군계 인동 장씨 인물


①장안세와 장중양
고려 말 조선 초 인물로 인동 장씨가 자랑하는 절신節臣, 장안세張安世와 그의 아들 장중양張仲陽이 있습니다. 장안세는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이며, 장중양 또한 태조 이성계가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의 벼슬을 제수하고 회유했으나 절의를 지켜 다시는 벼슬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장안세는 목민관으로도 명성을 떨쳤는데, 특히 함흥부사로 10여 년 동안 재임하며 누구도 하지 못한 갈한천乫罕川 수해를 해결하고 목판으로 길이 70간間이나 되는 ‘만세교萬世橋’라는 다리를 놓는 선정을 펼쳤다고 합니다. 그의 노력으로 고을의 백성들은 해마다 겪는 홍수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상장군계 인동 장씨 인물 ②장현광
“사물은 왜 모두 땅으로 떨어질까요?
그리고 사물이 땅으로 떨어진다면
정작 땅은 어디로 떨어지는 것일까요?”
“이 큰 땅을 하늘의 대기가 버텨 주고 있다는데
그렇다면 대기는 또 어디에 붙어 있는 것일까요?”
- 답동문答童問※


조선 시대에 뉴턴처럼 고민을 했던 인물이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입니다. 퇴계와 남명, 율곡에 이어 17세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조선 성리학 7대가로 꼽힐 만큼 뛰어난 인물입니다.

구미 인동 출신인 그는 류성룡 등의 천거로 대사헌, 공조판서 등 20여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지만 모두 사양하고 보은현감만 잠시 출사했을 뿐 오직 학문 연구에만 몰두했습니다.

이理⋅기氣가 둘이 아니고 체體와 용用의 관계에 있음을 주장하는 ‘이기경위설理氣經緯說’은 퇴계와 율곡의 논의를 뛰어넘는 학문적 성과로 평가받고 있으며 역학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저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그의 ‘역학도설易學圖說’은 당대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과 자연, 그리고 우주를 아우르는 방대한 학문 체계를 정립한 그는 과학사상가로도 인정받는데 한국을 빛낸 과학자 열여섯 분에 선발되기도 했습니다.

여헌旅軒은 ‘성리설’, ‘역학도설’, ‘우주설’ 등을 비롯해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그의 문하에서 허목許穆⋅김응조金應祖⋅김식金湜 등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습니다.
※ 답동문答童問 : <우주설>에 실린 부록


인동 장씨의 시조, (2)장계
인동 장씨에는 또 다른 계통인 직제학계 인동 장씨가 있습니다. 이들은 상장군계 인동 장씨와는 달리 ‘안동 장씨’의 시조인 장정필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직제학계 인동 장씨의 시조는 장계張桂인데 그는 고려 말 진현전직제학進賢殿直提學을 거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오른 인물입니다.

상장군계 인동 장씨 인물, 장말손
장말손은 1459년(세조 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463년 승문원박사를 거쳐 한성참군⋅사헌부감찰⋅함길도평사를 역임하였습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예조좌랑으로서 진북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을 따라 반란 평정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녹훈되고, 내섬시첨정에 임명되었습니다.

1470년(성종 1년)에는 장악원부정을 거쳐 행부사직⋅첨지충추부사⋅행사직을 역임하고, 1479년 해주목사에 임명되었으며, 1482년 연복군延福君에 봉하여졌습니다. 시호는 안양安襄입니다.

장말손 할아버지는 저희 인동 장씨의 16대조 불천위 선조가 되십니다. 조선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에 책봉되시고 연복군의 봉군을 받으신 어른입니다. 이 종택은 연복군 선조님의 현손 되시는 분이 지으셨습니다. 이 어른의 조부님이 서른에 돌아가시면서 아랫대에 유언을 하셨습니다. ‘너는 부디 벼슬하지 말고, 부자하고 혼인하지 말고, 남 앞에 나서지 말고, 은둔 생활을 하면서 조상 보존, 자손 보존되는 터를 찾아서 살아라.’라는 유지를 받들고 이 꽃계花溪에 입향하게 됐습니다. 입향한 원인은 임진왜란 때 서울 창동 집에 불이 나서 사당까지 다 타 버려, 선대 고향인 경북 영주로 오게 되었고 영주에는 삼촌이 살고 계셨습니다. 삼촌을 의지 삼아 내려오셔서 꽃계에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 인동 장씨 연복군(장말손) 16대 종손 장덕필


장씨의 시원


우리나라의 장씨는 고려 이전에도 역사 속에 장씨가 다수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장씨의 도시조라고 볼 수 있는 장정필 이전에도 장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증할 수 있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시조 이전의 역사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장씨는 유래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성관전고姓貫典考」 등의 여러 문헌에 의하면 고대 중국의 제왕, 황제헌원黃帝軒轅에게는 아홉째 아들 청사靑賜(또는 靑陽)가 있었다고 합니다. 청사靑賜는 아들 휘揮를 낳았는데 활을 만드는 관원官員인 궁정弓正으로 삼았습니다. 휘揮는 활과 화살 모양을 한 호시성弧矢星을 관찰하여 처음으로 궁시弓矢를 만들고 궁신弓神에게 제사 지내는 일을 주관하였으므로 이로써 장씨張氏가 되었다고 합니다.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황제헌원의 손자 휘揮가 활과 화살을 만들고 궁신弓神에게 제사 지내는 일을 주관했으므로 이로써 장張씨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국의 장씨와 우리의 장씨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현재로선 알기 어렵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장張씨 중에서 가장 큰 성씨인 인동 장씨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한국 성씨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시간, <한국의 성씨> 많은 시청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