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사관의 진실 | 환단고기가 처음 밝혀 주는 역사 진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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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는 한민족의 역사 경전이면서
동시에 종교 경전이요 문화 경전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우리 역사, 문화의 원형을 밝혀 주는 보배로운 사서이다. 특히 환단고기는 다른 사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역사 사실이 많이 실려 있다. 『환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의 해제 편에서는 ‘환단고기에서만 전해 주는 새로운 역사 진실’이라고 하여 이를 52가지로 정리하여 밝혀 주고 있다. 이를 중심으로 환단고기의 진정한 역사적 가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22 중국 한漢족의 시조 반고를 밝혀 준다. 반고는 환국 때의 실존 인물이다!
時(시)에 有盤固者(유반고자)가 好奇術(호기술)하야
欲分道而往(욕분도이왕)으로 請(청)하니 乃許之(내허지)하시니라
遂積財寶(수적재보)하고 率十干十二支之神將(솔십간십이지지신장)하고 與共工(여공공)·有巢(유소)·有苗(유묘)·有燧(유수)로
偕至三危山拉林洞窟(해지삼위산납림동굴)하야 而立爲君(이립위군)하니 謂之諸畎(위지제견)이오 是謂盤固可汗也(시위반고가한야)라.
환웅께서 동방을 개척할 당시 기이한 술법을 좋아하던 반고라는 인물이 있었다. 반고가 개척의 길을 따로 나누어 가기를 청하므로 환인께서 이를 허락하셨다.
그리하여 반고는 많은 재화와 보물을 싣고 십간十干 십이지十二支의 신장을 거느리고 공공共工·유소有巢·유묘有苗·유수有燧와 함께 삼위산 납림拉林 동굴에 이르러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이들을 제견諸畎이라 하고, 반고를 반고가한이라 불렀다. (『삼성기三聖紀 하下』)
欲分道而往(욕분도이왕)으로 請(청)하니 乃許之(내허지)하시니라
遂積財寶(수적재보)하고 率十干十二支之神將(솔십간십이지지신장)하고 與共工(여공공)·有巢(유소)·有苗(유묘)·有燧(유수)로
偕至三危山拉林洞窟(해지삼위산납림동굴)하야 而立爲君(이립위군)하니 謂之諸畎(위지제견)이오 是謂盤固可汗也(시위반고가한야)라.
환웅께서 동방을 개척할 당시 기이한 술법을 좋아하던 반고라는 인물이 있었다. 반고가 개척의 길을 따로 나누어 가기를 청하므로 환인께서 이를 허락하셨다.
그리하여 반고는 많은 재화와 보물을 싣고 십간十干 십이지十二支의 신장을 거느리고 공공共工·유소有巢·유묘有苗·유수有燧와 함께 삼위산 납림拉林 동굴에 이르러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이들을 제견諸畎이라 하고, 반고를 반고가한이라 불렀다. (『삼성기三聖紀 하下』)
『삼성기 하』의 이 기록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먼저 반고의 정체를 밝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반고를 창세 신화의 시조신으로 받들고 있다.
반고가 가장 먼저 등장한 자료는 삼국 시기 서정徐整이 쓴 「삼오역기三五历纪」이며 이후 양임방梁任昉이 편찬한 「술이기述异记」에서는 반고의 신체가 천지의 각종 물건이 되었다고 하며 「오운역년기五运历年纪」 및 고소설구침古小说钩沉의 「현중기玄中记」 역시 유사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전설에서는 천지가 생성되기 이전 우주는 마치 커다란 계란과 같은 모양으로 혼돈 상태였으며 반고는 이렇게 커다란 계란 속에서 줄곧 깊은 잠에 빠져 약 18,000년 후에 깨어났다고 한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반고는 주변이 암흑 상태임을 발견하고 거대한 손바닥으로 암흑을 내리쳐 커다란 계란을 깨트려 버렸다. 이에 천만년간 지속되었던 혼돈 암흑 상태가 휘돌아 치며 이 중 가볍고 푸른 물질은 천천히 상승하고 점차 널리 퍼지며 푸른 하늘이 되었고 반면 무겁고 혼탁한 물건은 점차 아래로 가라앉으며 딱딱한 토지로 변했다고 한다.
반고는 이에 대해 매우 기뻐하였으나 다시 하늘과 땅이 결합하여 이전의 상태로 갈 수 있다는 점을 매우 걱정하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밀어내고 양쪽 발로 대지를 디디며 자기의 몸을 매일 1장一丈씩 자라게 하여 하늘과 땅도 그의 몸 크기만큼 하루에 1장씩 높아졌다. 이러한 상태가 일만 팔천 년간 계속되었고 하늘은 점차 높아졌으며 땅은 점차 두터워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반고의 키는 90,000리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반고의 사후 신체의 기관들은 천지 사이에 있는 만물로 변하여 음성은 벼락으로 바뀌었고 왼쪽 눈은 태양, 오른쪽 눈은 달이 되었고 머리털과 수염은 하늘의 별들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신체는 동서남북 4개의 극지와 웅장한 삼산오악三山五岳이 되었고 피는 강과 하천으로 변하였으며 근육들은 도로가 되고 살은 논밭이 되었으며 피부는 대지상의 초목이 되었다고 한다.
- [네이버 지식백과] 반고신화盘古神话 (중국 국가급풍경명승구총람, 2011. 7. 1, 이현국)
전설에서는 천지가 생성되기 이전 우주는 마치 커다란 계란과 같은 모양으로 혼돈 상태였으며 반고는 이렇게 커다란 계란 속에서 줄곧 깊은 잠에 빠져 약 18,000년 후에 깨어났다고 한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반고는 주변이 암흑 상태임을 발견하고 거대한 손바닥으로 암흑을 내리쳐 커다란 계란을 깨트려 버렸다. 이에 천만년간 지속되었던 혼돈 암흑 상태가 휘돌아 치며 이 중 가볍고 푸른 물질은 천천히 상승하고 점차 널리 퍼지며 푸른 하늘이 되었고 반면 무겁고 혼탁한 물건은 점차 아래로 가라앉으며 딱딱한 토지로 변했다고 한다.
반고는 이에 대해 매우 기뻐하였으나 다시 하늘과 땅이 결합하여 이전의 상태로 갈 수 있다는 점을 매우 걱정하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밀어내고 양쪽 발로 대지를 디디며 자기의 몸을 매일 1장一丈씩 자라게 하여 하늘과 땅도 그의 몸 크기만큼 하루에 1장씩 높아졌다. 이러한 상태가 일만 팔천 년간 계속되었고 하늘은 점차 높아졌으며 땅은 점차 두터워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반고의 키는 90,000리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반고의 사후 신체의 기관들은 천지 사이에 있는 만물로 변하여 음성은 벼락으로 바뀌었고 왼쪽 눈은 태양, 오른쪽 눈은 달이 되었고 머리털과 수염은 하늘의 별들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신체는 동서남북 4개의 극지와 웅장한 삼산오악三山五岳이 되었고 피는 강과 하천으로 변하였으며 근육들은 도로가 되고 살은 논밭이 되었으며 피부는 대지상의 초목이 되었다고 한다.
- [네이버 지식백과] 반고신화盘古神话 (중국 국가급풍경명승구총람, 2011. 7. 1, 이현국)
『삼성기』 하에 의하면 반고는 실존 인물이다. 동시에 환웅이 동방을 개척할 당시 환인에게 청하여 따로 개척의 길을 떠났던 인물이다. 이로 볼 때 이미 반고 역시 환국에서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높은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때 반고는 많은 재화와 보물을 지니고 떠났는데 환웅천황이 법통의 상징인 천부天符와 인印 3개를 가지고 동방 개척의 길에 올랐다는 대목과 대비된다. 역사에서 이재理財에 밝은 중국 상인들을 화상華商이라 불러 왔는데 그 화상의 명성이 이때부터 발동되었다 볼 수 있다. 그리고 반고가 십간十干 십이지十二支의 신장神將을 데리고 갔다는 기록을 살펴보면, 지금의 육십갑자六十甲子 개념은 이미 환국 시대부터 그 근원적인 원리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단군세기檀君世紀』와 『태백일사太白逸史』 「신시본기神市本紀」에서는 배달 환웅 때부터 육계六癸를 지어 사용하다가 5세 구을 단군 때부터 계해癸亥 대신에 갑자甲子를 육십갑자의 시작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동이족이 세운 상商나라 때는 임금 이름을 모두 육십갑자를 써서 지었다. 결론적으로 육십갑자 문명은 한국을 뿌리로 하여 태동되고 발달해 온 우리 고유의 문화이다.
반고가 도착한 삼위산 납림 동굴은 지금의 중국 감숙성甘肅省 돈황현敦煌縣에 있으며 삼묘족의 근거지였다. 원래 삼위산은 금악산, 태백산과 함께 환국의 삼신산이었다. 삼위산 서쪽에는 그 유명한 돈황석굴이 자리 잡고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가장 크고 중요한 석굴은,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불리는 막고굴莫高窟이다. 막고굴 천장에는 고구려의 기마수렵도와 절풍折風의 머리 장식과 고구려식 의상 등 고구려풍의 벽화가 있고, 특히 풍백, 우사, 운사로 해석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로 볼 때 삼위산 지역 역시 환국의 문명권이자 우리 동이족의 주요 근거지였고 이후 배달, 조선을 거쳐 고구려 시대 때까지 우리의 주 활동 무대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이 그들의 시조로 받는 반고가 환국에서 출세하여 역사를 개척한 사실은 중국 역사와 문명의 뿌리가 대한에 있다는 것을 명증明證하는 것이다. 이렇게 환단고기는 중국이 잃어버린 자신들의 시조 역사를 되찾아 주는 귀중한 사서이다.
23 고조선의 일본 평정을 밝혀 준다. 일본 초대 천황의 혈통과 고향을 밝혀 준다.
甲寅三十八年(갑인삼십팔년)이라.
遣陜野侯裵幋命(견협야후배반명)하사 徃討海上(왕토해상)하시니
十二月(십이월)에 三島悉平(삼도실평)이러라.
재위 38년 갑인(단기 1667, BCE 667)년, 협야후 배반명을 보내어 해상의 적을 토벌하게 하셨다. 12월에 삼도三島(일본을 구성하는 세 섬, 곧 규슈, 혼슈, 시코쿠)를 모두 평정하였다. (『단군세기檀君世紀』)
遣陜野侯裵幋命(견협야후배반명)하사 徃討海上(왕토해상)하시니
十二月(십이월)에 三島悉平(삼도실평)이러라.
재위 38년 갑인(단기 1667, BCE 667)년, 협야후 배반명을 보내어 해상의 적을 토벌하게 하셨다. 12월에 삼도三島(일본을 구성하는 세 섬, 곧 규슈, 혼슈, 시코쿠)를 모두 평정하였다. (『단군세기檀君世紀』)
지금으로부터 약 2,700년 전 단군조선에서 일본으로 군대를 보내 삼도를 모두 평정했다! 36세 매륵 단군 때의 이 기록은 지금의 강단사학계에서는 감히 받아들일 엄두조차 내질 못할 것 같다. 중화사관과 식민사관이 이미 골수에 배어 있는 탓에 저도 모르게 반도사관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우리나라 학자들의 입장에서는 천지개벽과도 같은 사고의 전복顚覆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일제 때 일본 학자 중에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가 우연히 환단고기를 입수해 보고 나서 놀라 불태워 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왜 그랬을까? 환단고기에는 고대 한일 관계의 진실이 담겨 있고, 그것이 당시 일본이 선전하던 임나일본부 주장과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환단고기에서는 협야후 배반명 이전에도 일본 평정의 역사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戊午五十年(무오오십년)이라 帝遣將彦波弗哈(제견장군언파불합)하사
平海上熊襲(평해상웅습)하시니라.
재위 50년 무오(단기 1611, BCE 723)년에 임금께서 장수 언파불합을 보내어 바다 위의 웅습熊襲(구마소) 을 평정하셨다. (『단군세기檀君世紀』)
平海上熊襲(평해상웅습)하시니라.
재위 50년 무오(단기 1611, BCE 723)년에 임금께서 장수 언파불합을 보내어 바다 위의 웅습熊襲(구마소) 을 평정하셨다. (『단군세기檀君世紀』)
이는 35세 사벌 단군 때의 일이다. 언파불합이 평정한 웅습(구마소)은 일본 규슈에 있는 지명이다. 본래 규슈 지역에는 곰이 서식하지 않는데도 구마소熊襲, 구마모토熊本, 구마시로熊城, 구마가와熊川와 같은 ‘웅熊’ 자 지명이 숱하다. 이것은 배달국 환웅 시대 웅족의 토템 신앙을 그대로 계승한 ‘단군조선의 부여계’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고대 문명을 건설한 역사적 사실을 생생하게 반증하는 것이다. 35세 단군 때의 언파불합과 36세 단군 때의 협야후 배반명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놀랍게도 『일본서기』를 보면 언파불합과 협야후는 부자父子 관계로 나온다.
일본서기에는 ‘언파렴무로자초즙불합존’이 네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네 번째 아들이 협야존 신무神武천황이다. 환단고기에서는 ‘협야후陜野侯배반명裵幋命’이라 하여 협야와 배반명을 동일 인물로 기록했지만 일본서기에서는 도반명稻飯命(배반명의 이두식 표기)이 둘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또 환단고기의 언파불합彦波弗哈은 일본서기에서는 ‘언파렴무로자초즙불합존彥波瀲武鸕鷀草葺不合尊’으로 나온다. 이 정도면 환단고기의 역사적 가치에 박수라도 보내야 하지 않을까?
환단고기에서는 협야노의 먼 조상에 대해 밝혀 주는 기록도 있다. 협야노가 초대 신무천황이라면 일본 천황가의 원고향에 대해 밝혀 주는 셈이다.
戊申十年(무신십년)이라 豆只州濊邑(두지주예읍)이 叛(반)이어늘
命余守己(명여수기)하사 斬其酋素尸毛(참기추소시모리)犂하시니라.
自是(자시)로 稱其地曰素尸毛犂(칭기지왈소시모리)오
今轉音爲牛首國也(금전음위우수국야)라.
其後孫(기후손)에 有陜野奴者(유협야노자)가 逃於海上(도어해상)하야
據三島(거삼도)하고 僭稱天王(참칭천왕)하니라.
재위 10년 무신(단기 161, BCE 2173)년에 두지주의 예읍이 반란을 일으키니 임금께서 여수기에게 명하여 그곳 추장 소시모리의 목을 베게 하셨다.
이로부터 그 땅을 소시모리라 불렀는데, 지금은 음이 변해서 소머리 나라가 되었다. 그 후손에 협야노라는 인물이 있는데, 바다를 건너가 삼도를 점거하고 스스로 천왕이라 참칭하였다. (『단군세기檀君世紀』)
命余守己(명여수기)하사 斬其酋素尸毛(참기추소시모리)犂하시니라.
自是(자시)로 稱其地曰素尸毛犂(칭기지왈소시모리)오
今轉音爲牛首國也(금전음위우수국야)라.
其後孫(기후손)에 有陜野奴者(유협야노자)가 逃於海上(도어해상)하야
據三島(거삼도)하고 僭稱天王(참칭천왕)하니라.
재위 10년 무신(단기 161, BCE 2173)년에 두지주의 예읍이 반란을 일으키니 임금께서 여수기에게 명하여 그곳 추장 소시모리의 목을 베게 하셨다.
이로부터 그 땅을 소시모리라 불렀는데, 지금은 음이 변해서 소머리 나라가 되었다. 그 후손에 협야노라는 인물이 있는데, 바다를 건너가 삼도를 점거하고 스스로 천왕이라 참칭하였다. (『단군세기檀君世紀』)
이 기록은 단군세기 3세 가륵단군 조에 나오는 기록이다. 반란을 일으킬 정도라면 이때부터 상당한 세력을 가진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세력의 기반은 무엇일까? 그것은 일본과의 관계에서 오는 세력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일본과의 무역이나 일본에의 식민지 경략 등이다. 이런 기반이 있었기에 단군조선 초기에 반란을 도모할 수 있었고 그들의 먼 후손 중에 언파불합이 나와서 일본 규슈九州 지역을 평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언파불합의 아들이 삼도三島를 완전 평정하고 스스로 천왕天王이 되었다. 대를 이은 일본 개척의 역사가 바로 소시머리 가문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소시모리, 우수국牛首國은 어딜까? 소머리국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로 신라 경주설이 있다. 소머리산은 경주 근처 소호리蘇湖里를 말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춘천설이다. 춘천에는 우두산이 있고 우두리가 있다. 셋째는 가야산 소머리산 설이다. 경남 합천의 가야산(높이 1,430m) 아래에는 우두산(거창군 가조면, 높이 1,046m) 장군봉이 있다. 이 세 가지 해석 중에서 가야산 소머리산이 제일 역사 기록(『日本書紀』, 『古事記』)과 부합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협야노가 천왕을 참칭했다는 사실이다. 참칭이란 말은 분수에 넘치는 호칭을 스스로 붙일 때 쓰는 단어다. 이미 단군조선 조에서 36세 매륵 단군이 동아시아의 천자로서 천왕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었다. 아무리 삼도를 평정했다고 해도 제후국에 지나지 않는데 이러한 호칭은 당시의 정치 질서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이렇게 일본에서 천왕이 자리를 잡고 나중에 일본 최초의 통일 왕조인 야마토 왕국을 세우게 되는데, 이때부터 일본은 과거 그들의 조상이 한반도에서 도래했음을 숨기고, 한국과 역사를 분리하는 길을 걷게 된다.
환단고기는 이렇게 중국과 일본의 뿌리 역사를 밝혀 준다. 자신들의 뿌리 역사를 숨기고 왜곡하는 입장에서는 무서운 책이겠지만, 고대 역사의 뿌리를 밝혀 현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바로잡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놀랍고 소중한 책이 아닐 수 없다.
일본서기에 나타난 신무천황神武天皇(진무덴노) 기록
彥波瀲武鸕鷀草葺不合尊(언파렴무로자초즙불합존) 以其姨玉依姬爲妃(이기이옥의희위비)
生彥五瀬命(생언오뢰명) 次稻飯命(차도반명)
次三毛入野命(차삼모입야명) 次神日本磐余彥尊(차신일본반여언존) 凡生四男(범생사남)
久之彥波瀲武鸕鷀草葺不合尊(구지언파렴무로자초즙불합존)
崩於西洲之宮(붕어서주지궁) 因葬日向吾平山上陵(인장일향오평산상릉)
언파렴무로자초즙불합존은 이모 옥의희를 비로 삼았다. 언오뢰명을 낳았다. 다음 도반명, 다음 삼모입야명, 다음 신일본반여언존 모두 네 아들을 낳았다. 얼마 후에 언파렴무로자초즙불합존은 서주궁에서 죽었다. 그래서 일향 오평산의 상릉에 장사 지냈다. (『일본서기』)
生彥五瀬命(생언오뢰명) 次稻飯命(차도반명)
次三毛入野命(차삼모입야명) 次神日本磐余彥尊(차신일본반여언존) 凡生四男(범생사남)
久之彥波瀲武鸕鷀草葺不合尊(구지언파렴무로자초즙불합존)
崩於西洲之宮(붕어서주지궁) 因葬日向吾平山上陵(인장일향오평산상릉)
언파렴무로자초즙불합존은 이모 옥의희를 비로 삼았다. 언오뢰명을 낳았다. 다음 도반명, 다음 삼모입야명, 다음 신일본반여언존 모두 네 아들을 낳았다. 얼마 후에 언파렴무로자초즙불합존은 서주궁에서 죽었다. 그래서 일향 오평산의 상릉에 장사 지냈다. (『일본서기』)
一書曰(일서왈) 先生彥五瀬命(선생언오뢰명) 次稻飯命(차도반명) 次三毛入野命(차삼모입야명)
次狹野尊(차협야존) 亦號神日本磐余彥尊(역호신일본반여언존)
所稱狹野者(소칭협야자) 是年少時之號也(시년소시지호야) 後撥平天下奄有八洲(후발평천하엄유팔주)
故復加號曰神日本磐余彥尊(고부가호왈신일본반여언존)
일서一書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먼저 언오뢰명을 낳았다. 다음 도반명, 다음 삼모입야명, 다음 협야존인데 협야존의 다른 이름은 신일본반여언존이라 한다. 협야라는 것은 어릴 적 이름이다. 후에 천하를 평정하여 팔주를 다스렸다. 그러므로 또 이름을 더하여 신일본반여언존이라 한 것이다. ( 『일본서기』 신대神代 하下)
次狹野尊(차협야존) 亦號神日本磐余彥尊(역호신일본반여언존)
所稱狹野者(소칭협야자) 是年少時之號也(시년소시지호야) 後撥平天下奄有八洲(후발평천하엄유팔주)
故復加號曰神日本磐余彥尊(고부가호왈신일본반여언존)
일서一書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먼저 언오뢰명을 낳았다. 다음 도반명, 다음 삼모입야명, 다음 협야존인데 협야존의 다른 이름은 신일본반여언존이라 한다. 협야라는 것은 어릴 적 이름이다. 후에 천하를 평정하여 팔주를 다스렸다. 그러므로 또 이름을 더하여 신일본반여언존이라 한 것이다. ( 『일본서기』 신대神代 하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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