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나를 찾는 도인의 삶 외(권장혁, 박미선, 정연경)
[입도수기]
참된 나를 찾는 도인의 삶
권장혁(남, 75) / 태전도안도장 / 151년 음력 11월 입도
진아를 찾기 위한 꾸준한 여정
저는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부터 불교학생회에 참여하고 불교 수행을 하며 자랐습니다. 대학 졸업 후 군 복무를 마치고 미국 유학을 가기 전에 불현듯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불교도 믿고 기독교도 믿는데 이것은 흡사 등정을 위해 서북 루트, 동남 루트를 찾는 것처럼 산 정상으로 가는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 가족들은 자연스럽게 주말 교회에 나가고 저는 공부하러 학교에 갔습니다. 교회 일정이 끝나면 다시 데려오는 일이 반복되면서 같은 종교를 믿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기독교를 알기 위해 미국과 한국 목사님 세 분으로부터 성경 공부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근본적 의문이 해결되지 않아 의문만 가진 채 귀국하여 교편생활을 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많은 책을 읽었고 불교수련회, 붓다필드, 마음수련 등의 모임을 통해 ‘참나’를 찾는 일은 계속됐습니다. 바쁜 학교생활로 ‘나’를 찾아가는 길은 어려웠지만 노력만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모든 걸 아우르는 진리에 관심이 생겨
어느 날 인천주안도장 책임자 김완주 수호사님이 제 연구실을 방문하셨고,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제가 1990년 전후에 학교에서 증산도 지도교수도 했었다고 이야기하며 증산도 등에 대한 여러 정보들을 알려 주셨습니다.
지금은 『환단고기』를 공부하며 9천 년 한민족사 국통맥을 잇는 삼성조 시대인 환국, 배달국, 조선의 새로운 역사를 자세히 알아 가고 있습니다. 또한 천지개벽에 대한 종도사님의 여러 말씀을 듣고 제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과학적 사실과 부합됨을 알고 증산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그 후 태전도안도장 권영미 포정님이 연락을 주어 ‘병란 개벽문화 북콘서트’와 ‘개천문화 대축제’ 등에 참여하면서 유교, 불교, 기독교를 아우르는 증산도에 더욱 관심이 생겼습니다.
진실한 일꾼이 되기를 기도하며
이후 김완주 수호사님과 권영미 포정님의 권유로 태전도안도장에서 증산도 기본진리 팔관법을 공부하며 상제님 진리를 알아 가게 되었고, 21일 정성 기간 동안 태을주와 시천주주 수행을 했습니다. 태전도안도장 이재룡 수호사님을 비롯해 권영미 포정님 등 많은 분들이 가르침을 주셨고, 21일 정성수행 중 아들로부터 얼굴이 맑아졌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제가 오래전에 해 보았던 명상 수련, 불교 수련 등이 다시 떠올려지며 21일 수행이 끝날 때는 아쉬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한 저는 증산도를 좀 더 공부하고 싶고, 1만 년 동방 신교 정통 수행법을 따라 수행하면서 진리를 배우고자 아침마다 올리는 저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의롭고 진실한 참도인’이 될 수 있도록 해 주시옵고 후천 상생의 조화 선경 세계로 나아가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참일꾼이 될 수 있게 증산 상제님, 수부님, 태상종도사님, 종도사님께서 보살펴 주시고 이끌어 주시옵기를 원하옵니다.”
증산도 입도를 바라오며 이 글을 올립니다. 보은! ◎
제가 찾던 하나님이라서
박미선(여, 53) / 목포옥암도장 / 151년 음력 11월 입도
가정의 불행으로 힘들었던 시간들
저는 신안군 흑산면 홍도 1구라는 작은 섬마을에서 다섯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네 살 때 돌아가셨지만 어머니에게는 이쁨을 받고 성장했습니다. 어린 다섯 남매를 키우시던 엄마는 부엌에서 밥을 하실 때 부뚜막에 물 한 그릇 올려놓고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며 자랐습니다.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생활하며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들 형제를 낳아 열심히 살았습니다. 결혼 후 7년이 지나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홀로 계신 시어머님을 모시기 위해 시골에 내려와 함께 살았습니다. 시골로 내려와 남편은 직장을 다니며 시어머님의 농사일을 거들었고 저 또한 직장을 다녔습니다.
어느 날 꿈에 시아버님이 시커먼 가죽 재킷을 입고 오셔서 아무 말씀 없이 가만히 서 계시다 사라지셨습니다. 불길한 꿈이라 생각됐지만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날 이후부터 남편에게 자잘한 사고가 생겼습니다. 집 앞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깁스를 했고 교통사고가 나 갈비뼈가 부러져 두 달 동안 병원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 교회 다니시는 시어머님 권유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교회 가기가 싫어 시어머님께 교회에 다니지 않겠다고 말씀드리고 더 이상 나가지 않았습니다. 시골 생활 8년 차 되던 해, 남편이 회사에서 퇴근하다 죽음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은 것처럼 하늘이 깜깜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남편을 보내고 직장을 다니며 쉬는 날에는 무당 집을 찾아다녔습니다. 49제와 100일제를 지냈지만 여전히 믿기지 않아 계속 무당 집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 신을 받는 굿을 하고 법당에 살았지만 점을 볼 수 없어 다시 굿을 했습니다. 뭔지 모르게 가슴 속에서는 산을 찾게 하고 천지신명님과 일월 성신님께 열심히 빌고 살았으나 무당으로는 풀어지진 않았습니다. 산과 바다를 다니며 아들을 위해 열심히 빌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다시 직장을 다니면 또 무당 판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직장을 가면 미련이 남아 봄, 가을에 다시 무당 집에 가 있고 결국 무당 판으로 들어가 굿하며 기도한 생활이 15년이 되었습니다.
참 하나님을 만나고 활력도 얻어
다시는 이러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을 굳게 다지고 직장을 다니며 불교 방송을 시청하다가 어느 날 상생방송을 보게 됐습니다. 상제님을 믿으면 조상님을 찾아 준다는 문구가 제 가슴을 때렸습니다. 그날부터 상생방송을 보게 됐고 저도 도장에 가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상생방송 퀴즈에 참여하게 되었고 안내해 주신 분의 가르침대로 책자를 받고 목포옥암도장에 방문하게 됐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직장에 출퇴근하거나 일을 하면서 틈나는 대로 태을주 주문을 읽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목포옥암도장 수호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도장에서 천도식 행사가 있다며 참석할 수 있으면 오셔서 큰 기운 받으라고 하셨기에, 흔쾌히 가겠다고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도장에 찾아갔습니다.
조상님 천도식에 참석해 보니 낯설지 않고 편안했습니다. 도생님들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저에게 잘 대해 주셔서 도장에도 자주 갔습니다. 동지 맞이 21일 정성 철야 수행이 있다 하여 함께 수행을 하고 자연스레 입도 공부도 하게 됐습니다.
몸도 지치고 우울증 초기까지 갔던 제가 수행 체험을 하고 몸에 활력이 생기면서 하루하루 지내는 마음이 즐거워만 갔습니다. 입도를 빨리 하고 싶어 입도시켜 달라고 재촉을 했습니다. 드디어 12월 12일 음력 11월 9일 갑오일에 입도를 했습니다. 상제님, 태모님, 그리고 태상종도사님, 도모님 감사합니다. 도장에 모셔진 상제님, 태모님 어진이 제가 찾던 참 하나님이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목포옥암도장 수호사님과 도생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수행하고 진리를 공부해서 많은 사람 살리는 도생이 되겠습니다. 보은! ◎
가장 원했던 상생의 길을 찾다
정연경(여, 40) / 인천주안도장 / 151년 음력 11월 입도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라나는 방법은
저는 금실 좋은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오빠와 화목하고 평온하게 자랐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마음의 병을 얻어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그런 아버지를 그리워하시며 오빠와 저를 온 힘을 다해 키우시다 병이 들어 돌아가셨습니다. 오빠와 저는 다행스럽게도 주변 친인척분들이 좋으셔서 엄마와 가장 사이가 좋았던 막내 이모 댁에서 사촌들과 친형제처럼 지내며 보살핌 속에서 성인이 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사람을 도와주는 일에 마음이 갔고 대학 전공을 결정할 때도 인간 복지학을 자연스럽게 희망하였습니다. 엄마는 어린이집 교사와 원장을 하셨기 때문에 항상 따라다니며 배웠었고 아동을 보살피는 일에 소질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므로 아동복지학과로 최종 결정해 공부했습니다.
이후 인간이 행복해지는 길, 특히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라나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하여 아동 심리 치료로 진로를 결정하려 하였으나, 우연히 접한 학원에서의 생활을 보고 아르바이트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곳에서 아이들의 변화 모습을 보며 아이들과 학교 성적, 학업은 뗄 수 없는 것이고 오히려 자신의 일, 즉 공부를 잘하면서 자신감, 성취감을 올려 주고 인성을 교육해 주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런 경험으로 인해 교육심리학에 관심이 생기고 대학원에 들어갔습니다, 연구직에서 일하다 보니 단순히 논문을 쓰고 책을 보는 것은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 당시 유행했던 자기주도학습법을 현실에서 성공시킨 프랜차이즈 교육업체를 알게 돼 지점에 입사하여 학습 매니지먼트 일을 했습니다.
무언가 깨달음을 얻고 싶은 마음에
지점을 새롭게 차려 직접 운영할 계획도 했으나 결혼한 오빠가 이혼하게 되는 과정에서 하나뿐인 조카를 보살피게 되어 잠시 일을 접었습니다. 조카 엄마 쪽에서 양육권을 포기했었고, 저는 당연히 제 일보다 조카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빠의 이혼 과정은 생각보다 어렵고 힘들었으며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 지속되는 와중에 결혼을 약속했던 사람과의 관계도 틀어져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무리해서 학원도 열어 봤지만 코로나 상황이 악화되고 함께 하기로 했던 원장님과의 갈등 등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주변 사람들과의 갈등이 끊임없이 지속되어 해결해 보려 했지만 점점 더 안 좋아져 갔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그때 가장 강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인간관계에서의 어려움에 스스로 무언가 깨달음을 얻고 싶었던 마음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다른 사람을 도우며 살고 싶어
평소 관심이 많아 공부해 보고 싶던 명리학이 생각났습니다. 이런저런 책을 찾아보던 중 ‘긍정 명리학’이라는 책을 접했습니다. 다른 사주 공부 방식이 많겠지만 인생 사계절 내용이 가장 마음에 와닿아 책을 쓴 저자에게 연락해 명리학 초보 강의를 들었습니다. 끝까지 마치고 싶다는 생각에 그분의 스승이 계신 동국대 동양 미래예측학과에 등록했고, 그러던 중 그 학과를 운영하고 있던 사무국에 입사하여 일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결혼을 약속한 사람과의 급한 상견례 및 결혼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갈등이 시작됐습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의 병을 얻어 몸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그런 와중에 교수님 제자분이셨던 이애춘 선생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단순 우울증이 아니라 신기가 강해 몸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저런 방법을 다 동원하여 신기든 우울증이든 극복해 보고자 했으나 쉽게 되지 않았고, 특히 내가 하고자 했던 학습 매니지먼트로 사람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이 계속 좌절되는 것 같아 스스로 무력감에 더 빠지게 됐습니다.
결국 결혼 진행은 중단되고 그 사람과 헤어지게 되면서 3년 동안 일어났던 일에 대해 뒤돌아보게 됐습니다. 법륜 스님의 유튜브를 보게 됐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교훈을 받아 깨달음의 세계에 대해 점점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이애춘 선생님께서 득도한 스님께 저를 데리고 갔고, 그분을 통해 저에게도 이애춘 선생님과 비슷한 기운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애춘 선생님과 많은 이야기를 하다가, 진심으로 힘들어하는 다른 사람을 도우며 인생을 살고 싶다는 것이 내가 가장 하고자 하는 일이라는 걸 다시 한번 강하게 깨닫고 몸을 회복하는 일부터 집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제 건강은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을 만큼 회복이 됐고, 이애춘 선생님의 인도로 지금은 증산도 진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증산도를 만나게 해 준 이애춘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런 작은 경험들이 모여 내린 결론은 증산도 진리를 배웠을 때 자연스럽게 와닿았고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계속 공부해 보고자 하는 마음과 확실한 미래의 진리인 증산도에 힘이 되는 일에 함께하고 싶어 입도를 결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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