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B다시보기 | 역사대담 4회 - 임나일본부설의 진실(2)
[STB하이라이트]
사회자: 김철수 중원대학교 종교문화학과 교수
대담자: 남창희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지금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의 문제를 넘어서 경제보복까지 진행되고 있는데요. 어떻게 한일관계의 갈등을 극복하고 바람직한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까요. 우리 역사의 참모습을 탐구하는 역사대담에서는 한일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해법을 국제정치학적 관점에서 찾아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Q 김철수 교수: 교수님, 임나의 문제에 대해서 임나의 위치에 대해 밝혀진 부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A 남창희 교수: 임나를 일본어로 읽으면 ‘미마나’라고 읽습니다. ‘미마나’란 의미는 임금의 나라, 왕의 나라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일본 규슈지역에 진출한 가야세력의 뿌리가 경상남도 거창지역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래서 규슈지역 사람들이 봤을 때는 경남지역이 ‘미마나’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의 ‘임나’는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로 임의 나라, 뿌리의 나라, 우리의 고향이란 의미입니다.
임나를 고유명사로 볼 경우에는 『일본서기』에 임나지역으로 특정할 수 있는 사료가 나옵니다. 일본 숭신천황 재위 65년에 해당하는 해의 기록이 나오는데요. 아주 재미있게도 임나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사료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해석을 하면 임나의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任那者去茿紫國(임나거축자국) 二千餘里(이천여리)
임나는 축자국으로부터 2천여 리 떨어져 있다.
-『일본서기』 <숭신천황 65년조>
임나는 축자국으로부터 2천여 리 떨어져 있다.
-『일본서기』 <숭신천황 65년조>
축자국은 후쿠오카를 말합니다. 그런데 축자국으로부터 2천여 리를 어떻게 계산하면 되는지에 대한 좋은 사료가 있습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보면 구야한국에서부터 대마도까지 천리, 대마도부터 일지국까지 천리, 일지국부터 말로국까지 천리라고 나옵니다. 이 중국 사료를 종합해보면 말로국과 축자국의 위치가 비슷하기 때문에 축자국인 후쿠오카에서 바닷길로 2천리 되는 곳은 대마도라는 계산이 딱 나옵니다. 즉 대마도가 임나인 것입니다.
“구야한국에서 뱃길로 천리를 가면 대마도이고 다시 바닷길로 천리를 가면 일지국(잇키섬)이 있고 거기서 또 천리를 가면 말로국(큐슈 북안)에 다다른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왜인전>
그리고 두 번째 사료의 내용을 보면
北阻海(북조해) 以在鷄林之西南(이재계림지서남)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 계림(신라)의 서남쪽에 있다. -『일본서기』 <숭신천황 65년조>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 계림(신라)의 서남쪽에 있다. -『일본서기』 <숭신천황 65년조>
임나는 북쪽으로는 바다에 막혀 있다고 나옵니다. 북쪽이 바다로 막혀 있다는 것은 한반도일 수 없습니다. 섬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후쿠오카 위에 있는 섬이 이키섬과 대마도인데 이키섬은 후쿠오카에서 천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사료를 보아도 역시 대마도가 임나인 것입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단서가 하나 있는데요 이 사료를 보면 임나는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고 나옵니다. 계림은 지금의 경주를 말합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 임나를 얘기하면서 왜 계림을 언급하는 것일까를 생각해보니 임나가 신라의 영향권에 있었기 때문에 계림(경주)을 기준으로 방향을 얘기하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지도를 놓고 보면 정확히 서남은 아니고 서남남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뱃길로 보면 경주에서 형산강을 나와서 남쪽으로 거제도까지 내려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거제도에서 배가 출발해야 해류에 밀리지 않고 대마도에 도착할 수가 있습니다. 즉 경주에서 거제도를 거쳐 대마도까지의 뱃길을 생각해보면 남쪽으로 갔다가 서쪽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뱃길의 방향감각으로 보면 서남이 맞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료에 나와 있는 임나의 방향, 거리, 지형구조가 부합되는 곳은 대마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명약관화하게 임나가 대마도라는 것을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사학계에서는 ‘임나 = 가야’라는 주장을 펴기 위해 사료 내용을 이러저리 비틀면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임나가 대마도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임나일본부설은 뿌리부터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라져야 할 임나일본부설을 살려주고 있는 것이 바로 ‘임나 = 가야’ 학설입니다. 이 학설이 무덤에서 유령을 불러내는 주문처럼 작용하고 있습니다.
Q 김철수 교수: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일본 고대 사서의 기록들을 통해서 반증도 하고, 또 답사를 통해서도 잘못된 학설임을 입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이 참으로 참담하고 개탄스럽습니다. 임나일본부 문제를 이야기할 때 광개토대왕비(광개토호태왕비) 내용과 연결시켜서 설명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A 남창희 교수: 네, 지금 말씀드릴 내용은 너무 재미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영화로 만들어도 재미있겠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임나 = 가야’라고 하는 전제하에 진행되는 임나일본부설에 의하면 고대 동북아사는 야마토 왜가 중심이 되는 동북아사가 됩니다. 또 다른 측면으로 보면 광개토호태왕비를 보면 재미있게도 ‘임나’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정인보 선생은 광개토호태왕비를 해석하시면서 “광개토호태왕비는 광개토대왕의 전공을 선양하기 위한 기록이기 때문에 문장의 주어는 고구려다.”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즉 광개토호태왕비에 따르면 동북아사는 고구려가 중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쓴 책에 고대 동북아의 패권이 임나일본부설이란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야마토가 지배하는 동북아사가 진실이겠냐? 아니면 광개토호태왕비가 말하는 동북아의 패권질서가 진실이겠냐? 하는 것을 대비시켜 놓은 부분이 있습니다.
임나일본부는 일본군 참모본부에서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임나’에 대해 연구하는 과정에서 광개토호태왕비를 발견하고 탁본을 떠보니 임나일본부설과는 정반대의 내용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군사작전수행하듯이 ‘임나’관련 비문의 내용을 정으로 쪼아서 왜곡시킨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소중하게도 당시 광개토호태왕비 근처에 살고 있었던 이유립 선생의 선친이 생전에 광개토호태왕비 탁본을 떠놓은 것을 『대배달민족사』에 실은 적이 있습니다. 이 탁본은 일본에 의해 정으로 쪼아지기 전에 떠놓은 탁본으로 이 원문을 보면 고구려군이 대마도 큐슈를 거쳐서 일본 열도를 완전히 정벌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저는 이 내용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작전 기획을 해본 저의 경험으로 광개토호태왕의 입장에서 봤을 때 백제의 병참기지 역할을 하는 왜를 정벌하지 않으면 작전은 완전히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본 것입니다. 광개토호태왕비를 보면 당시 사해를 평정했다고 칭송하는 내용이 있는데요. 동북아 패권국가를 완성했다는 것은 백제 후방세력인 야마토 왜를 토벌했을 때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구려군이 바다를 건너서 큐슈를 공격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대 동북아 역사는 완전히 뒤집어지게 됩니다.
이런 원문을 확인한 일본군 참모본부는 고대 동북아 역사의 진실을 숨기기 위해 고구려의 큐슈 공략을 숨기고자 광개토호태왕비를 정으로 훼손하고 조작을 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Q 김철수 교수: 광개토대왕이 대마도와 큐슈까지 진출했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렇다면 대마도나 큐슈에 고구려 흔적이 남아 있을까요?
A 남창희 교수: 대마도에 많은 고구려 관련 흔적들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일제가 명치유신 이후로 대마도의 사적들을 많이 지워서 찾기가 어렵고요. 대신 최근에 큐슈에서 아주 흥미로운 발굴성과가 있었습니다. 후쿠오카 밑에 있는 구마모토현에서 아주 독특한 형태의 고분이 발견되었습니다. ‘장식고분’이라고도 하는 벽화고분입니다. 그 고분들은 고구려 벽화고분과는 다르게 내부 벽화문양이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고분과 다른가 싶었는데 몇몇 고분에서 두꺼비를 그렸다든가, 천정에 천문도가 있다든가 하는 고구려 고분의 특징들이 발견이 되었습니다. 이를 확인한 일본 고고학계 일부 학자들도 이 고분이 고구려 문화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점은 이 고분들이 만들어진 시기가 5세기 초~6세기 초입니다. 이 100년의 기간 동안 이 고분의 형태가 큐슈를 중심으로 혼슈까지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러던 중 ‘이와이의 난’이라고 해서 큐슈지역의 호족인데 야마토 왜와 갈등을 하다가 야마토 왜로부터 토벌을 당하는 사건이 생겨나게 되는데요. 이 사건 이후로 고구려풍의 장식고분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와이의 세력이 구마모토 지역에서 성장했다는 점이 심상치 않습니다. 어쩌면 고구려군이 큐슈를 점령하고 나서 후쿠오카가 백제의 후방기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후쿠오카 뒤쪽인 큐슈에 고구려계 세력을 양성하면서 고구려의 전진기지를 만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나라현 아스카 지역에 가면 고구려 풍의 고분인 ‘다카마스 고분’과 ‘기토라 고분’ 이렇게 2개가 발견되었는데요. 고분의 기단부에서 발견된 토기들을 살펴보면 5세기에 만들어진 양식으로 추정이 되고요. ‘다카마스 고분’에 있는 고분벽화의 복식이 5세기에 유행했던 벽화고분의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고구려계가 5세기 전후에 야마토 왕권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거나 실제로 지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이런 내용들을 종합해볼 때 일본 열도에서 고구려 풍의 고분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광개토대왕의 원정 후에 야마토 왕권의 정치 지형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Q 김철수 교수:
교수님께서는 정치학을 전공하시면서 왜 군사 융합고고학을 같이 전공하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연구를 상당히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사실, 광개토대왕이 일본 열도를 정벌했다든가, 대마도가 임나라고 하는 것이 완전히 확증이 된다면 한일 고대사뿐 아니라 고대 동북아 고대사에 대한 역사가 새로 쓰여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남창희 교수님을 모시고 임나일본부의 실체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요. 왜곡된 한일 고대사와 한일관계를 올바르게 정립하는 일은 임나일본부설을 풀어나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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