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과 인물로 본 임시정부 100년

[이 책만은 꼭]

저자
문영숙 잊지 말아야 할 우리 민족의 역사를 어린이와 청소년 독자들에게 알리는 소설을 주로 쓰며, 강연을 통해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역사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널리 알려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가’로 불린다.

대표작으로는 청소년 역사소설 『에네껜 아이들』, 『까레이스키』, 『끝없는 방랑』, 『독립운동가 최재형』, 『글뤽 아우프 : 독일로 간 광부』,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 장편동화 『무덤 속의 그림』, 『궁녀 학이』 등이 있다. 장편소설 『꽃제비 영대』는 영어와 독일어로 출간되었으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실상을 전한 『그래도 나는 피었습니다』는 곧 영어판이 출간된다.

김월배 건국대학교 경제학 박사. 하얼빈 이공대학 외국인 교수(안중근 의사 연구), 한국 안중근 기념관 연구위원, 연세대학교 안중근 사료실 객원 연구원, 하얼빈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객원 연구원, 뤼순 관동법원 관리위원, 뤼순 일아 감옥 구지 박물관 객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안중근은 애국, 역사는 흐른다』, 『안중근 의사 지식문답』, 『돌아오지 않는 안중근』, 『안중근 의사 유해를 찾아라』,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간양록』, 『대한국인, 대한민국을 말하다』 등을 공저하였으며, 『안중근 의사 자서전』, 『안중근 동양평화론』 등의 역서가 있다. 국민포장(2018), 윤봉길 매헌 월진회장상(2017), 안중근 숭모회 이사장상(2016) 등을 수상했으며,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의 당위성과 선양을 알리고 있다.

[들어가면서]


“광복 후, 김구와 임정 요인들은 1945년 8월 17일, 충칭에서 마지막 임시 의정원 회의(제39회)를 마쳤다.” (203쪽)

1910년 총리대신 이완용의 서명으로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에 합병이 되면서 실제로 나라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9년이 흘러 삼일독립만세혁명이 일어나고 이에 힘을 얻은 독립운동가들은 연해주와 상하이, 그리고 서울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각종 항일 단체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났지만 임시정부를 통해서 좀 더 조직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하지만 자금 부족으로 여러 차례

장소를 이동해야 했고, 고달픈 삶을 살아야 했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돌파구를 마련하기는 했지만 파벌과 이념 차이로 늘 갈등의 상황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런 만난을 극복하고 임시정부는 1945년 광복의 그날까지 ‘독립’을 위한 모든 것을 했다. 이런 임정의 노력은 중국인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받았다. 임정은 우리에게 ‘대한’의 이름을 이어 주는 역할을 하였다. 우리에게 ‘대한민국’을 선사해 준 임정의 27년 역사를 들여다보도록 하자.

목차


1. 최초로 탄생한 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
2.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다
3. 임정과 김구의 피난 시절
4. 수로 3,000리 육로 3,000리
5. 임시정부의 황금기
6. 국내진공작전과 일본의 항복

구성


이 책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임시정부 수립 전의 상황
두 번째는 임시정부의 역사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광복 이후의
임시정부이다.

주요 내용


연해주, 독립운동의 영웅들이 모여들다
서양열강들이 제국주의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리던 1860년대, 조선 백성들은 탐관오리의 학정과 굶주림에 시달렸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함경도 도민들은 대거 두만강을 건너 만주와 연해주 쪽으로 옮겨가 황무지를 일구며 살았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더는 국내에서 항일 투쟁을 하기 어려웠던 이들이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거나 망명했다. (11쪽)


연해주로 사람이 모여든 것은 한일병탄 전이다. 이미 먹고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은 해외에서 삶을 찾아야 했다. 연해주는 지금도 땅을 파면 비옥한 땅이다.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다
한일병탄의 소식에 의식 있는 자들은 주저할 수 없었다. 안중근 역시 안창호의 교육을 통하여 세상 소식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안중근은 15가지의 죄악을 들면서 일제 침탈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에 이른다.

일본은 그(안중근)의 무덤이 항일 독립항쟁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했다. (26쪽)


왜 우리는 독립운동사를 잃어버렸는가? 일제는 죽어서도 그 흔적을 없애서 항일의 씨앗을 밟아버리고자 한 것이다. 일제는 그야말로 치밀했다.

의병들은 모두 모여라. 13도의군(1910년): 해외 및 국내 의병통합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로 용기를 얻은 많은 이들이 한데 뭉쳐서 의병통합대를 조직했다. 하지만 일제의 방해 공작으로 이 또한 수포로 돌아간다.

이 일을 알게 된 일제는 러시아에 강력하게 항의하며, 한인들의 항일 활동을 금지시키라고 요구했고, 성명회 핵심 인물들을 체포해 일본에 넘겨 달라고 했다...13도의군은 일본에 의해 강제로 해체된다. (29~30쪽)


권업회, 연해주 한인을 하나로 묶다
연해주에서 차근차근 힘을 모으던 한인들은 권업회를 조직하게 된다. 러시아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인망 있었던 최재형 덕분에 연해주 항일 세력은 점점 그 세를 키우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일제를 의식한 러시아에 의해서 권업회도 해산되게 된다.

권업회는 이러한 모임들을 통해 교육, 산업 진흥, 국권 회복, 단결, 의병 등에 관한 강연으로 연해주 한인들의 항일 민족정신과 애국심을 강하게 고취했다. (37쪽)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러시아는 전시 체제로 돌입했고 일제와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면서 모든 기념행사를 금지했다. 결국 1914년 8월, 권업회는 러시아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38쪽)

권업회의 항일 독립투쟁 의지는 1917년 전로한족회중앙총회 창설과 1919년 대한국민의회 설립의 토대가 되었으며, 대한국민의회는 1919년 9월 11일에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통합했다. (38쪽)


대한국민의회, 최초의 임시정부를 수립하다
삼일운동을 계기로 민중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에 대해서 자신을 얻게 된 독립운동가들은 곳곳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하게 된다. 이 임시정부에서 가장 최초의 임시정부는 연해주를 기반으로 구성된 대한국민의회였다.

임시정부로 제일 먼저 조직된 노령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는 한족회중앙총회를 개편한 것이다. 1919년 3월 17일 <독립선언서>를 반포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일본에 한국의 독립과 정부 승인을 요구했다. 동시에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 일본과 혈전을 벌이겠다는 <결의문>과 함께 정부 ‘각료 명단’을 발표했다. (69쪽)

노령(연해주) 지역의 ‘대한국민의회 정부’,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의 ‘한성임시정부’ 등 3개는 실체가 있는 정부였고, 이름만 있는 정부로 ‘조선민국임시정부’, ‘신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간정부’, ‘고려임시정부’, ‘임시대한공화정부’ 등이 있었다. (69쪽)


안창호, 세 개의 임정을 통합 정부로 만들다
개조안은 1919년 9월 6일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드디어 한성임정, 상하이임정, 노령임정 세 임정이 하나로 통합된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1 운동을 직접 계승하고 정통성을 갖춘 유일한 통합 임시정부가 되었다. (86쪽)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의 수립은 여러 의미가 있다. 전 민족의 독립항쟁인 3.1 운동을 계승하여 일제에 의해 1910년 이후 9년 동안 단절되었던 한민족 정권을 다시 세운 것이다. 군주제를 폐지하고 헌법에 기초한 ‘민주공화제’ 정부였다. (86쪽)


하지만 여러 개의 임시정부를 가지고서 나라의 대표 자격을 얻기는 어렵다는 것을 모두 공감했다. 안창호는 힘써 대표적 세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 상해임시정부, 한성임시정부를 ‘상해임시정부’로 통합시키는 데 성공한다.

임시정부 탄핵 사건
하지만 시작 초기부터 임정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애시당초 각자 이념이나 독립운동 방법에서 견해 차이를 갖고 있었던지라 급기야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을 탄핵하게 된다. 임정의 순탄치 않은 여정을 예고했다.

이승만은 미국에 돌아가 동지회를 조직하고, 임정은 사실상 방치했다. 이후 임정은 조직이나 재정적으로 정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워싱턴 군축회의에 대한 실패 책임으로 1922년 3월 신규식 내각이 총사퇴한 후부터 임정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게 되었다.

임시정부의 파벌 다툼과 이승만 탄핵 사태를 보고 단식으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바로 신규식이다. (98쪽)


한인애국단, 의열투쟁으로 돌파구를 열다
우여곡절 끝에 1926년 12월 김구가 홍진 후임으로 국무령에 취임했다.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좀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제가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가는 길이니, 우리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읍시다”
이 호쾌한 사나이는 바로 이봉창 의사이다. 임정에 문을 박차고 들어갈 때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긴 이 의사는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졌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이 의사의 도쿄의거는 김구에게 한인애국단을 통한 독립운동에 대한 자신감을 얻게 하였고 이후 무력투쟁을 통하여 항일을 하게 된다.

“뼈가 있고 피가 있다면 조선의 투사가 되어라.”
윤봉길의 애족정신이 곧 나라 사랑으로 커져 거국적인 일을 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129쪽)


민족을 사랑하지 않고서 어떻게 나라를 사랑할 수 있으랴! 민족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어야 나라를 위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임정의 독립운동에 일대 전환점을 가져다준다. 윤 의사의 의거에 대해서 감동한 장제스蔣介石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만나게 되고 광복이 되는 그날까지 독립운동에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다
중일전쟁으로 임정 역시 대장정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피난길에 오르자, 임정도 생사의 기로에 섰고, 국민당 정부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중일전쟁의 불똥이 고스란히 임정에 튄 셈이었다. (171쪽)


임시정부는 총 7번을 옮겨 다녔다. 상하이(1919~1932년)로부터 시작하여, 항저우(~1935년), 전장(~1937년), 창사(8개월), 광저우(2개월), 류저우(3개월), 치장(7개월), 마지막으로 충칭(1940~1945년)이다. 한 지역에서도 여건이 맞는 곳을 찾아 여러 곳을 옮겨 다녀야 했다.

임정 내 파벌 문제
상하이 임정 내에도 여러 파벌이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의정원회의를 통해 운영되었지만, 이승만 현순 등의 기호파, 안창호 김구 등의 서북파, 신채호 박용만 등의 베이징파, 이동휘 윤해 등의 상하이파, 고려공산당과 문창범 여운형 등의 이르쿠츠파 고려 공산당, 그리고 무정부파인 김원봉 등 불협화음이 무척 심했다. (81쪽)


통합 임시정부 시절 전부터 이미 상해임시정부 내에는 파벌이 존재했었다. 이런 파벌이 광복 전까지 이어졌을 것이란 예상을 하게 된다.

이운환은 왜 총을 난사했을까? 그는 임정 어른들이 자기편 의견만 내세워 진전이 없다며 불평했다고 한다. 항저우에서의 이합집산도 안타까웠는데, 난무팅에서도 서로 화합하지 못했던 것이다. (174쪽)


통합 임시정부 수립에서부터 신규식의 단식사와 이운환의 총기 난사 사건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임정의 불화로 생긴 일들이다. 임정 역사의 또 하나의 어두운 그림자이면서 한민족 정치사의 민낯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당시 생사를 무릅쓰고 일본의 군대에서 탈출해 충칭 임정에 합류한 장준하는 당시의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이런 줄 알았으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떠나고 싶다” 그는 환영회를 빙자해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파벌 간 세력 늘이기를 지켜보면서 실망하고 만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국정식 군대, 한국광복군
장제스와의 대화에서 백범은 군대 양성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게릴라전과 같은 무력 투쟁에서 이젠 조직을 갖춘 군대를 통한 무력 투쟁을 준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수는 너무도 적었고 중국 군대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임정의 여성
감시를 덜 받는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그는 임정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역할을 맡았다. (200쪽)



우리가 독립운동사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이다. 비교적 감시를 덜 받은 여성들의 활약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일 수 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은 독립운동사의 절반을 채우는 일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던져 본다.

36년 만에 조국 땅을 밟은 광복군 국내정진대
미군정에 빌붙어 떵떵거리는 사람들은 거의 다 친일파였다. 친일파들에게 임정 가족을 더 참혹하게 핍박하고 쳐내는 게 이들의 생존전략이었다. (234쪽)


이것이다. 왜 우리가 독립운동사를 잃어버렸는가? 바로 친일파들 때문이다. 독립운동사는 친일파들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 버린다. 독립운동사 발굴이 힘들다는 것은 친일파들의 개입이 그만큼 강하다는 반증이 된다. 독립운동사를 찾는 것 또한 친일의 잔재를 청산하는 일과 직결되는 것이다.

[나오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수립된 후 1945년까지 27년간 존속했다. 1차 세계대전 후 전 세계 여러 약소민족이 수립한 임시정부 및 망명정부나 국내 독립운동 기관과 단체들에 비하면 가장 오랫동안 존속했던 정부였다. (89쪽)


백범 김구는 8월 18일 진공 작전을 앞에 두고서 8.15 광복을 맞은 것을 석연치 않게 생각하였다. 외세에 의한 광복이라는 것을 알았고 자연히 우리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염려하였다. 백범의 예상대로 한반도는 반으로 쪼개지고 우리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동학의 정신을 이어받은 백범에게는 이 같은 상황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자주독립을 통해서 이 땅의 온전한 주인이 되기를 바랐다. 왜곡된 역사에 함몰되어 민족의 주체성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이 땅의 주인을 허락하겠는가? 임정의 역사를 통해서 그들이 그토록 애타게 찾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깨닫고 임정의 후예로서 바른 ‘대한민국’ 만들기에 힘을 써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