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만 기습과 일본의 패망
[사진으로보는역사]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서양 사람에게서 재주를 배워 다시 그들에게 대항하는 것은 배은망덕줄에 걸리나니 이제 판밖에서 남에게 의뢰함이 없이 남모르는 법으로 일을 꾸미노라.” 하시고 “일본 사람이 미국과 싸우는 것은 배사율(背師律)을 범하는 것이므로 장광(長廣) 팔십 리가 불바다가 되어 참혹히 망하리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5:119)
노골화된 세계 정복征服
1939년 독일의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여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자, 일본 역시 크게 고무됐다. 1940년 4월 13일 일본은 소련과 ‘소·일 중립조약’을 체결하여 북쪽의 근심을 없애고, 1940년 9월 23일 중국으로 들어가는 군수물자 지원을 차단한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을 침공했다. 9월 27일에는 독·이·일 삼국동맹이 체결되어 전체주의 국가들의 세계 정복이 노골화되었다. 이 조약의 주 내용은 “일본은 독일과 이탈리아가 유럽에 신질서를 건설하는 것을 확인하고, 독일과 이탈리아는 일본이 아시아에 신질서를 건설하는 것을 확인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자 미국이 강하게 대응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1940년 7월, 일본에 대해 항공기용 가솔린 수출을 제한한 데 이어 9월에는 고철과 철강 수출을 금지시켰다. 일본에서는 ‘전쟁불사론’이 불거졌다. 드디어 이시하라 간지가 ‘세계 최종 전쟁론’에서 예상한 대로 일본과 미국의 최후 결전이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아직 소련은커녕 중국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가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깨고 전격적으로 소련을 침공했다. 하지만 일본의 관동군은 북쪽으로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때부터 일본에는 미·영 선제공격론이 일어났다. 과거 노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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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소련군에 혼쭐난 경험이 있었던 터라 대신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미국과 붙어 볼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미국과 일본의 국력 차이를 보면 1941년 미국의 철강 생산량은 7,500만 톤, 영국은 1,250만 톤인데 비해 일본은 700만 톤에 불과했다. 객관적인 국력상 두 나라의 전쟁은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게임이었던 셈이다. 일본의 중국과 동남아 침략에 대해 미국이 강경하게 원상회복을 요구하자 일본은 두 방면으로 대처했다. 미국과 회담을 진행하는 한편 물밑으로는 전쟁 준비에 나섰다. 1941년 10월 18일 도조 히데키東條 英機 내각이 들어섰다. 그는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전진훈戦陣訓을 만들고 일본 전역을 군대 병영화하였다. 1941년 11월 26일 미국의 코델 헐Cordell Hull 국무장관은 ‘헐 노트’를 일본 측에 전달했다. “중국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의 전면 철수, 미국은 중국에서 장개석 정권만을 인정, 미·일 양국 정부는 중국에서 일체의 치외법권 포기, 제3국과 체결한 협정을 태평양 지역의 평화 유지와 충돌하는 방향으로 발동하지 않을 것” 등이 주요 내용이다. 1931년의 만주사변 이전으로 아시아를 되돌리라는 요구였다.
★노몬한 전투 - 1939년 5월부터 8월까지 몽골과 만주국의 국경 지대인 할하강 유역에서 소련군·몽골군과 일본 제국의 관동군·만주국군 간의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소련군에게 참패한다.
진주만 기습奇襲과 패전敗戰
12월 1일 열린 제4차 어전회의에서 대미 개전 결정이 내려졌다. 12월 8일(미국 시간 7일) 일본 함대는 오전 1시 30분 두 차례에 걸쳐 353대의 비행기를 발진시켰다. 선전포고는 공격 한 시간 후에야 전달했다. 일본군 제1진은 애리조나·캘리포니아·웨스트버지니아호 등을 격침시키고 오클라오마호를 전복시켰다. 제2진은 메릴랜드·네바다·테네시·펜실베이니아호에 큰 타격을 입혔고, 사망자도 2,300명이나 발생했다. 그 밖에도 함선 열여덟 척이 침몰하거나 큰 손상을 입었고, 180여 대가 넘는 비행기가 파괴되었다. 태평양 함대 소속 항공모함 3대는 진주만에 없었기 때문에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12월 7일을 ‘치욕의 날(the day of infamy)’로 명명하고 “일본은 모략을 꾸며 미국을 속였다.”고 비난했다. 그날 상원은 82 대 0, 하원은 388 대 1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결의했다.
진주만 습격에 성공한 일본군의 진격 속도는 눈부시게 빨랐다. 1941년 12월 10일 루손섬에 상륙했고, 11일에는 괌, 23일에는 웨이크, 25일에는 홍콩, 1월 2일에는 마닐라를 점령했다. 일본은 1942년 2월 7일 영국군이 지키고 있던 싱가포르를 공격하여 8일 만에 함락시켰다. 제국은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일본이 중국과 전 세계를 점령할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자신의 처지를 깨닫는 데는 그로부터 넉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1942년 6월 5일 미드웨이 해전이 일어났다. 태평양까지 전선을 확대한 일본은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미드웨이를 점령해서 중간 기지로 삼으려 했다. 미국 항공모함 세 척, 일본 항공모함 여섯 척이 맞붙은 미드웨이 해전은 미·일 양군이 서로의 작전을 인지하고 맞붙은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다. 결과는 일본 해군의 궤멸이었다. 이 패전으로 일본은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어 1943년 2월 과달카날 전투에서의 패배로 일본은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그 이후의 기간은 유년군사학교 출신의 전쟁 기계들이 자국의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몰면서 발악한 시간에 불과했다. 1945년 일본 군부는 전투 능력이 없는 민간인을 군인으로 마구 편제하여 본토本土 결전決戰을 다짐했다. 1945년 7월 중순 미국에서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했다. 7월 말경 태평양의 일본 해군은 모두 궤멸되었지만 일본의 전쟁 기계들은 모두 같이 죽자는 ‘1억 옥쇄玉碎’를 전략이라고 내세웠다.
7월 26일 해리 트루먼, 윈스턴 처칠, 장개석, 스탈린이 베를린 근교의 포츠담에서 “군국주의를 일소하고, 연합국이 일본을 점령하며, 한국을 해방시키고, 대만과 만주국은 중국에 반환하며, 남사할린을 소련에 반환하고, 전쟁범죄자를 처벌하고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확립한다.”는 선언을 했다. 사실상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한 것이었다. 일본의 도조 정부는 이를 묵살했다.
그해 8월 6일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했다. 원자폭탄이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했고 일본이 그 첫 대상이 되었다. 이어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다시 원폭이 투하됐다. 이날 소련은 전격적으로 대일전에 참전했다.
8월 10일 일본은 천황제 유지를 조건으로 항복 의사를 전달했다.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8월 12일 일본 군부는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히로히토는 종전을 결심했다. 히로히토는 8월 14일 어전회의서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다. 8월 15일 히로히토는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을 깊이 생각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하고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국에 대해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하였다.”면서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로써 만주사변(1931)으로부터 14년, 진주만 기습으로부터 4년간 계속된 전쟁이 끝을 맺었다. 한국은 해방되었지만 일제 식민 통치의 후유증은 분단과 전쟁의 아픔으로 이어진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한국 정복(征韓論)을 발판으로 대륙으로 진출하였다.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거의 10년 마다 전쟁을 국가 정책으로 추진했다. 20세기 전반기에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 6차례에 걸쳐 전쟁을 일으키거나 관여했다. 상제님께서 일본에게 천하 통일의 기운을 붙여 주신 결과, 일본은 진주만 기습 후 불과 3개월 만에 동남아시아 대부분을 집어삼키고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이로써 일본은 아시아에서 서양 세력을 물리치고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이 근대 문명을 전하여 개화를 이끈 스승의 나라, 미국을 집어 삼키려 달려든 것은 신도에서도 결코 용납하지 않는 배은망덕한 행위였다. 조선 역시 고대로부터 문화를 전수해준 스승국으로서 일본과는 ‘사제 관계’로 맺어져 있다. 일본의 오만함이 극에 달한 시점에 상제님은 일본의 죄를 배사율로 다스려 참혹히 망하게 하셨다.
<참고자료>
『잊혀진 근대, 다시읽는 해방 전사』 (이덕일 지음, 역사의 아침, 2013)
『동아시아 근현대사』 (우에하라 카즈요시 외 지음, 한철호·이규수 옮김, 옛오늘, 2011)
『증산도의 진리』 (안경전 지음, 상생출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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