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사변上海事變과 윤 의사의 훙커우(紅口) 공원 의거
[사진으로보는역사]
사실은 순간순간 놓치기 쉽다. 기억으로 붙잡아도 망각의 강으로 스러져간다. 사진은 사실을 붙잡아 두는 훌륭한 도구다. 포착된 사진들은 찰나를 역사로 만들어 준다. 사진 속에서 진실을 찾아보자!
“중국이 오랫동안 조선의 조공을 받아 왔으니 이 뒤로 25년 만이면 중국으로부터 보은신報恩神이 넘어오리라.” (5편 322장)
상해사변上海事變을 일으킨 일본
만주사변 직후인 1931년 10월, 관동군의 고급 참모 이타가키 세이지로(板垣 征四郎)와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는 상해 영사관의 무관 다나카 유키치(田中隆吉) 중좌에게 만주에 쏠린 세계의 이목을 상해로 돌릴 수 있는 사건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상해는 만주와 달리 각국 열강들의 조계지가 있는 지역이므로 상해에서 사건이 발생하면 서구 열강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1932년 1월 18일 밤, 다나카는 돈으로 매수한 중국인들이 일본인 승려와 신도 셋을 공격하게 한다. 이 사건으로 상해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중국인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이때 다나카의 공작으로 발포 사건이 발생하고 결국 1월 28일 중·일 두 나라 군대가 충돌하게 된다. 이처럼 상해사변 역시 만주사변과 마찬가지로 일본이 침략 명분을 만들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었다.
일본 본토에서는 즉각 대규모 파병을 결정한다. 항공모함 두 척과 구축함 네 척을 포함한 대규모 해군 병력과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이 이끄는 상해 파견군이 상해로 달려갔다. 채정해 장군이 이끄는 상해 근방의 중국 19로군이 맞서 싸웠지만 항공모함까지 동원한 일본군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때 중국 민간인 사망자만 6,000여 명에 달했다.
관동군의 예상대로 영국·미국·프랑스·이탈리아 등이 강하게 정전停戰을 요구하고 나섰다. 일본은 상해에서 전투를 계속하는 한편 1932년 3월 1일 부의溥儀를 집정으로 삼는 만주국滿洲國을 전격 건국했다. 그리고 이틀 후 전투를 중지하고 3월 24일부터 정전협상에 나섰다. 4월 29일에는 홍커우 공원에서 상해 점령 및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었다.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채소 장사를 하던 윤봉길은 1931년 겨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인 김구를 찾아가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김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훙커우(紅口)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일왕의 생일연(천장절天長節)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며, 협의 끝에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는 일본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하는 일본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행사와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행사를 하고 있었다. 아침 7시 50분 윤봉길은 삼엄한 감시를 피해 훙커우 공원에 도착하여 무대 위로 가깝게 접근했다. 9시쯤에 시작된 관병식은 11시 즈음에 끝났으며, 11시 20분경에 2부로 상하이 전승 기념식을 거행했다. 중국 주둔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가 등장해 열병식이 이어졌다.
11시 40분에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きみがよ)가 울려 퍼지는 순간, 윤봉길이 단상으로 접근해 5m의 근거리에서 물통폭탄을 투척, 시라카와 대장과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 사이에 떨어져 폭발하였다. 윤봉길은 또 다른 도시락 폭탄으로 자결하려 했으나 곧바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혔고 일본군 사령부로 끌려갔다.
이 사건으로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가 폭사당했다. 중화민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 葵)는 오른쪽 다리를 잃었고, 우에다(植田謙吉) 중장은 왼쪽 다리를 잃었으며, 노무라 중장은 오른쪽 눈을 실명하였다. 이외에도 많은 주요 인사들이 부상을 입었다.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
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까지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까지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전 세계가 놀란 의거!
이 사건은 1932년 4월 29일, 오후 1시경에 전 세계에 뉴스로 보도되기 시작하여, 전 세계 각국 주요 신문들이 제1면에 대대적으로 이를 보도하면서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1931년 만보산 사건의 여파로 나빠진 한국과 중국의 관계도 이 의거로 인해 회복되면서 중국 영토 안에서 한국 독립운동의 여건이 좋아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또 만주를 삼킨 데 이어 상해를 점령하며 기세 좋게 대륙 침략을 획책하던 오만한 일본의 기운이 크게 꺾이는 전기가 되었다. 당시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제스(蔣介石)는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소식을 전해 듣고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며 감탄하였다. 이 일은 장제스가 조선에 관심을 갖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윤 의사는 폭탄 투척 직후 체포, 곧바로 헌병으로 넘겨지면서 보다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1932년 5월 28일 상해 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32년 11월 18일 일제의 우편수송선 대양환大洋丸 배편을 통해 일본 오사카로 후송되었다. 11월 20일 오사카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2년 12월 19일 새벽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金沢)시 미쓰코지야마 서북 골짜기에서 십자가 모양의 형틀에 묶인 윤 의사는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뒤에 순국했다. 시신은 아무렇게나 수습되어 가나자와 노다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 밑에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사형 집행 전에 미리 파 놓은 2미터 깊이의 구덩이에 시신을 봉분封墳도 없이 평평하게 묻어 놓은 것이다.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는데 이는 윤 의사가 일본군 수뇌부를 섬멸시킨 데 대한 복수였다.
<참고문헌>
『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 전사』 (이덕일, 역사의 아침,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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