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 의병義兵으로 일어난 이름 없는 독립투사들
[사진으로보는역사]
사실은 순간순간 놓치기 쉽다. 기억으로 붙잡아도 망각의 강으로 스러져간다. 사진은 사실을 붙잡아 두는 훌륭한 도구다. 포착된 사진들은 찰나를 역사로 만들어 준다. 사진 속에서 진실을 찾아보자!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은 천지도수天地度數가 정리되어 각 신명의 자리가 잡히는 때라. 일본 사람이 효孝줄을 띠고 조선에 건너와서 임진란 때에 각 오지奧地에 들어가 죽은 저의 선령신들을 찾아가려 하므로 이제 조선의 의병들이 그 일을 이루어 주려고 산중 깊숙한 곳까지 그들을 이끌고 들어가느니라.” 하시니라. (도전 5편 287장)
의병들의 궐기
의병은 말 그대로 옳을 의義 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천지대의天地大義에 입각해서 일어난 민초들을 말한다. 나라의 국모國母가 외국의 낭인들에 의해 비참하게 시해되었을 때 이 땅의 지식인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내적으로 실력을 기르는 국민계몽운동과 불의를 응징하기 위해 총칼을 들고 적과 맞서 싸우는 무장투쟁의 길이 그것이다.
구한말의 의병은 세 가지 사건을 계기로 크게 일어났다. 을미지변乙未之變과 단발령에 반대해 일어난 ‘을미의병’이 그 시작이다. 이때는 전국의 유생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났다. 1905년 을사년에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무명의 유생들과 농민들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1907년 정미 7조약(한일 신협약)이 체결되고 군대가 해산하자 상당수의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한다. 당시 의병장은 안규홍과 같은 몰락 양반이거나 신돌석과 같은 평민이었다. 특히 1907년과 1910년 사이의 의병 투쟁은 매우 격렬하여서 일본 측의 공식 통계로 볼 때에도 15만여 명의 봉기, 2,851회의 충돌에 1만 6,700명 사망, 부상 3만 6,770명으로 총 5만 3천여 명의 의병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의병의 정신은 가까이는 동학 농민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척양척왜를 외치며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동학 농민군들이 의연히 떨쳐 일어났다. 이 정신은 300년 전 임진왜란 때도 발현되었다. 관군이 속절없이 무너질 때 그나마 최후의 보루로서 일어난 의병들에 의해 나라가 지켜졌다. 평소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분연히 일어나는 의병의 정신은 고구려의 조의선인, 신라의 화랑, 백제의 무절과 비슷하다. 알고 보면 이들은 단군조선 시대 때 조직된 국자랑에서 기원했고 이는 배달 시대 때의 삼랑三郎 제도에 그 맥이 닿고 있다.
의병 항쟁의 금자탑,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무장 독립 투쟁의 역사에서 두 개의 금자탑이 세워졌으니 봉오동鳳梧洞 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그것이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7일 중국 길림성 봉오동 골짜기에서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연합 부대와 야스가와(安川) 소좌가 이끄는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다. 만주 지방에서는 3·1운동 이후 고조되던 항일 열기를 이어받아 무력으로 일제와 싸우려는 분위기가 확산되어 갔다. 이때 동만주 지방에서 무력 투쟁을 주도한 사람은 홍범도로, 그는 대한독립군을 이끌며 안무安武가 이끄는 국민회군國民會軍, 최진동崔振東이 지휘하는 군무도독부군軍務都督府軍과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봉오동 전투도 이러한 와중에서 일어난 싸움이었다.
6월 6일 밤 10시, 한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강양동의 일본군 초소를 공격한 독립군을 추격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온 일본군 부대를 삼둔자三屯子 서북방 봉화리(일명 범진령)에서 기습하였다. 이것이 봉오동 전투의 서곡인 ‘삼둔자 전투’이다. 이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19사단은 야스가와 소좌를 지휘자로 하여 월강추격대를 만들어 독립군을 공격하도록 지시하였다. 월강추격대는 즉각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하다 남봉오동에 도착하였다.
6월 7일 새벽, 홍범도의 지시를 받은 이화일李化日의 독립군은 남봉오동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하며 마치 일본군의 반격으로 퇴각하는 것처럼 속였다. 당시 독립군은 홍범도의 통일적인 지휘 아래 마을 주민을 모두 대피시키고, 북봉오동의 서산에 홍범도의 지휘부가, 동산에 최진동의 부대가, 남산에 신민단의 부대가 각각 매복하고 있었다. 오후 1시경,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포위망 깊숙이 들어오자 홍범도의 신호탄을 시작으로 각처에 매복해 있던 독립군은 일본군을 향해 일제히 사격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150여 명을 살상한 것으로 보고 있다.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홍범도가 지휘하는 연합 부대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이 일본군과 청산리에서 벌인 전투다. 일본군은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후 이를 만회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에 따라 홍범도의 연합 부대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은 월등한 군사력을 갖춘 일본군의 공격을 피하기에는 지형이 험준하지만 독립군들에게는 익숙한 곳이었던 백두산 일대가 적당하다고 보고, 세력을 보존하기 위해 병력을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청산리 전투는 이처럼 독립군이 이동하는 중에 추격해 오는 일본군과 청산리靑山里에서 격돌한 전투였다.
청산리 전투의 첫 싸움은 청산리에서 계곡을 따라 10여 리 올라간 백운평에서 10월 21일 아침 야마다(山田) 연대와 김좌진의 부대 사이에 있었다. 먼저 90여 명의 야스가와의 전위부대를 매복해 있던 300여 명의 독립군이 집중 사격하였다. 이후 중무장한 야마다 연대의 주력부대가 몇 차례 돌격을 시도하였으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은폐 사격을 하는 독립군을 이길 수 없었다. 결국 야마다 연대는 100여 명의 병사를 잃은 채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홍범도가 이끄는 연합 부대도 백운평 전투 다음 날인 22일 오전 일본군과 맞닥뜨렸다. 천리봉에 지휘부를 설치한 홍범도는 일본군의 계략을 간파하고 독립군 부대를 둘로 나누어 매복하고 있다가 남북 양측에서 나타나는 일본군을 공격하여 400여 명을 사살하였다.
김좌진과 홍범도 부대는 다시 어랑촌에서 일본군과 조우하였다. 싸움은 22일 오전 9시 300여 명의 김좌진 부대와 아즈마 부대의 일부인 기병 연대 사이에 시작되어 저녁 7시까지 계속되었다. 처음 전투에서는 김좌진 부대가 밀렸으나 홍범도 연합 부대가 천리봉 서북쪽으로부터 싸움에 가세하면서 대규모 공방전이 벌어졌다. 1,700여 명의 독립군과 월등한 화력을 갖춘 1000여 명의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싸움에서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으며, 독립군은 이 틈을 이용하여 소분대로 나누어 이동하였다. 이후에도 23일의 맹개골 전투과 만록구 전투, 24일과 25일의 쉬거우 전투와 천보산 전투, 25일과 26일에 걸쳐 있었던 고동하 전투에서 독립군은 승리를 거두고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두 지역에서 참혹하게 패배한 일본군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대규모 정규군을 간도로 보냈다.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그 지방에 살고 있던 무고한 한국인을 대량으로 학살하였다. 이른바 간도참변間島慘變 또는 경신참변庚申慘變이 일어난 것이다.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간 간도 일대에서 학살된 조선인들은 현재 확인된 수만 해도 3,469명에 이른다. 그 외 확인되지 않은 수효와 3개월에서 4개월에 걸쳐 학살된 수효를 합하면, 추정하건대 피해를 입은 조선인은 적어도 수만 명에 이른다. (참고- 문화콘텐츠닷컴)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 속 명대사
정문 : 폐하, 신도 두렵사옵니다. 허나 신이 가장 두려운 것은 싸워 보지 않고 대한이 일본의 손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한 이방인이 말하기를 “빼앗기면 되찾을 수 있으나, 내어 주면 되돌릴 수 없다.” 하였사옵니다. 이방인의 눈에 지금 대한은 빼앗길 틈도 없이 내어 주고 있나 봅니다. 하여 신은 싸울 것입니다. 쉬이 손에 쥘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줄 것입니다. (20회 고종과의 대화에서)의병 : “이길 수 있을까요?”
황은산: “그렇다고 돌아서겠느냐. 화려한 날들만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질 것도 알고, 이런 무기로 오래 못 버틸 것도 알지만 우린 싸워야지. 싸워서 알려 줘야지. 우리가 여기 있었고, 두려웠으나 끝까지 싸웠다고.”
의병: “예, 그럽시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24회 의병장 황은산과 의병의 대화 중)
천부경을 암송하며 투쟁에 나선 독립군들
환단고기를 편찬하는 데 사재를 털어 지원한 홍범도, 오동진 장군은 평소 천부경 마니아였다. 천부경을 항상 암송하며 인류 최고의 철학과 문화를 가진 배달민족의 자부심을 되새겼다. 그리고 그 정신을 독립 투쟁의 사상 원천으로 삼았다. 그리고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여운형 선생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지도급 명사들과 무명의 독립군들도 수첩에 천부경을 필사筆寫하여 공부하며 우리 민족의 정신을 잃지 않고자 노력하였다.
홍범도洪範圖(1868~1943)
하늘이 베풀고 땅이 굴러, 5와 7이 고리를 이루었다. 1이 쌓여 커지나 다함없는 셋이다. 1의 모습의 진실은 그 근본이 영생이로다. 크도다. 천부여. 만세의 보전이로다.
(天施地轉 環成五七 一積而鉅 无匱而三 一像之眞 根核永生 大哉天符 萬世寶典)
여운형呂運享(1886∼1947)
사이에 오로지 기운이 스스로 가득 차도다. 홀로 이 천부만이 만세의 양식과 같은 지식이 되니 양식이 없으면 굶주리고 지식이 없으면 졸렬해진다. 환웅의 천부경이여 우리 백성들을 족히 풍요롭게 하는구나.
(太虛兩間 惟氣自盈 獨此天符 萬世糧識 無糧而飢 無識而劣 桓雄天經 足富我民)
오동진吳東振(1889~1930)
하늘과 땅의 바른 기운이 배달을 만들었고 천부天符를 주니 장수들을 이끌어 주인 되었다. 웅족과 호족이 교화받기를 원하니 평등하게 혼인을 허락하였다. 인간의 몸을 가탁하여 교화하신 덕은 홍익인간이 되어 널리 이롭게 하고자 한 때문이다.
(乾坤正氣 創成倍達 授符遣往 率將而主 熊虎願化 平等與婚 假化之德 弘益人間)
- 출처 : 안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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