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열전 | 청태조 누르하치와 그 후계자들 (이해영)
[역사인물탐구]
청태조 천명한天命汗 아이신 기오로 누르하치愛新覺羅 奴爾哈赤와 그 후계자들(주1)
*이에 앞서 여진이 요불, 사현 등을 보내 조정에 들어와 이렇게 상주하였다. “옛날에 저희 태사 영가盈歌(금 태조 아골타의 숙부)께서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조종은 대국(고려)에서 출생하였으니 자손 대에 이르러서도 마땅히 귀부함이 옳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태사 오아속烏雅束(여진 완안부의 추장으로 아골타의 형)께서도 역시 대국(고려)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 『환단고기』 「고려국본기」 고려 예종 때인 단기 3442년 가을 동북 9성에서 철수하고 땅을 돌려줄 때 여진 사신의 발언 기록
*장백산長白山(백두산) 동쪽에 포고리호布庫里湖라는 못이 있었다. 옛적 하늘에서 세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즐겼다. 그때 어떤 신작神鵲(까치)이 막내 선녀인 불고륜佛庫倫(퍼쿨런)의 옷에 붉은 과일 씨앗을 물어다 놓았다. 불고륜은 그 씨앗이 마음에 들어 땅에 버리지 못하고 입에 물었는데 문득 배 속으로 들어가 곧 임신을 하였다. 뒤이어 사내아이 하나를 낳았는데 태어나자마자 능히 말을 할 줄 알았으며 자태와 용모가 기이했다. 아이가 커 가자 불고륜은 사연을 알려 준 뒤 그에게 애신각라愛新覺羅라는 성을 내려 주고, 이름은 포고리옹순布庫哩雍順이라고 하였으며, 그에게 버드나무 가지로 묶은 작은 배를 내어 주었다. 다시금 불고륜은 “하늘이 너를 태어나게 한 것은 어지러운 나라를 평정시키기 위한 것이니 어서 가서 나라를 다스리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마침내 하늘로 올라갔다. 당시 백두산 동남쪽에 악모휘卾謨輝 지역에서 서로 추장이 되기 위해 날마다 싸움을 하였다. 이때 포고리옹순을 태운 배가 근처에 멈췄고, 행동거지가 특별하고, 용모가 범상치 않은 그를 본 사람들은 사연을 듣고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였고, 국호를 ‘만주滿洲’로 정하였다. - 『만주원류고 권1』「만주滿洲」
*장백산長白山(백두산) 동쪽에 포고리호布庫里湖라는 못이 있었다. 옛적 하늘에서 세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즐겼다. 그때 어떤 신작神鵲(까치)이 막내 선녀인 불고륜佛庫倫(퍼쿨런)의 옷에 붉은 과일 씨앗을 물어다 놓았다. 불고륜은 그 씨앗이 마음에 들어 땅에 버리지 못하고 입에 물었는데 문득 배 속으로 들어가 곧 임신을 하였다. 뒤이어 사내아이 하나를 낳았는데 태어나자마자 능히 말을 할 줄 알았으며 자태와 용모가 기이했다. 아이가 커 가자 불고륜은 사연을 알려 준 뒤 그에게 애신각라愛新覺羅라는 성을 내려 주고, 이름은 포고리옹순布庫哩雍順이라고 하였으며, 그에게 버드나무 가지로 묶은 작은 배를 내어 주었다. 다시금 불고륜은 “하늘이 너를 태어나게 한 것은 어지러운 나라를 평정시키기 위한 것이니 어서 가서 나라를 다스리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마침내 하늘로 올라갔다. 당시 백두산 동남쪽에 악모휘卾謨輝 지역에서 서로 추장이 되기 위해 날마다 싸움을 하였다. 이때 포고리옹순을 태운 배가 근처에 멈췄고, 행동거지가 특별하고, 용모가 범상치 않은 그를 본 사람들은 사연을 듣고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였고, 국호를 ‘만주滿洲’로 정하였다. - 『만주원류고 권1』「만주滿洲」
■ 누르하치와 대청제국 관련 연표
●1115년 여진족 중 완안부完顔部의 아구타阿骨打가 금을 세우고 북송을 멸망시킴. 이후 1234년 몽골에 망한 후 만주 지역에 부족별로 나눠짐.●1559년 기미 누르하치 태어남. 6대조는 조선 세종 때 여진 건주부 수장 멍거테무르(강철의 용사란 뜻). 조부는 교창가覺昌安, 부친은 타크시塔克世.
●1583년 조부 교창가와 아버지 타크시가 구례성에서 전사함. 누르하치 거병.
●1586년 조부와 아버지를 죽게 한 니칸 와이란Nikan wailan 토멸.
●1587년 허투알라 부근인 퍼 알라에 성을 건축(오늘날 요령성遼寧省 신빈新賓).
●1588년 누르하치 건주여진 통일.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皇太極 태어남.
●1595년 명에 의해 용호장군으로 봉해져, 만주 지역의 패권을 장악함.
●1599년 만주 문자를 만들게 함(누르하치가 고안했다고 함).
●1615년 팔기제도 완성.
●1616년 허투알라성에서 칸에 오름. 국호는 대금大金, 연호는 천명天命.
●1618년 명에 칠대한七大恨 선포, 무순성 함락시킴.
●1619년 사르후 전투 승리. 이후 명은 만리장성 이동으로 넘어오지 못함.
●1625년 심양審陽을 성경盛京이라 칭함.
●1626년 영원성寧遠城 공격 중 홍이포 파편을 맞고 부상당함. 25세부터 전쟁터를 누볐던 누르하치에게 40여 년 만의 첫 패배. 9월 30일 만 67세로 세상을 떠남. 홍타이지 칸 위를 계승함(청태종). 연호는 천총天聰.
●1627년 홍타이지, 조선을 침략함. 정묘호란.
●1629년 홍타이지, 몽골 차하르부 공격, 2개의 몽골 기 편성.
●1633년 명의 공유덕, 경중명 수군이 금에 항복함.
●1635년 여진이란 칭호 대신 만주滿洲를 선포, 몽골 팔기 조직.
●1636년 국호를 대청大淸이라 하고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함. 조선을 침략하여 남한산성에서 인조仁祖의 항복을 받음(병자호란).
●1643년 홍타이지 사망. 아들 복림福臨이 즉위하고 연호를 순치順治라 함. 청태종 이복동생 도르곤이 섭정으로 정권 장악.
●1644년 명 농민 반란군 이자성 대순大順 건국 후 베이징 함락. 명 숭정제 자결. 도르곤, 오삼계와 결탁하여 베이징 진입함. 순치제 베이징 입성.
●1645년 청군, 남경 점령. 통산현 구궁산에서 이자성 피살됨.
●1661년 강희제 즉위(8세) 1667년부터 친정 시작(14세).
●1681년 오삼계 등이 일으킨 삼번의 난 진압, 청조의 중원 완전 지배 성공.
들어가는 글
조선에서 7년간 벌어진 참혹했던 임진왜란은 동양 삼국에 적잖은 상흔을 남겨 놓았다. 수많은 인명 피해뿐 아니라 막대한 전쟁 비용 등으로 왕조와 정권이 바뀌는 대변혁이 있었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하여 중원 대륙을 정복하고 세계사의 주역으로 우뚝 선 이가 있었으니, 바로 동이족 계통의 여진족 부족장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愛新覺羅 奴爾哈赤였다.
우리와 같은 줄기인 여진족은 오랜 기간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왔다. 기후가 거친 북방에서 기마와 사냥을 일상화했던 이들은 우리보다 더 모질고 강인한 성품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경제력은 약했지만 군사 측면에서는 강력한 면모를 보여 주었다. 1115년 아구타阿骨打라는 영웅이 등장하여 대제국 금金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칭기즈칸의 몽골 제국에 의해 나라가 망한 후 여진족은 나라 없는 설움을 톡톡히 맛보며 갈래갈래 찢어져 살았다. 그러던 중 17세기가 열리자마자 뛰어난 지도자가 제시한 깃발 아래 모여 만주에 통일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 몽골과 조선을 굴복시키며 중원 대륙의 주인이 되었다. 이 글에서는 불과 40년 만에 일개 부족장에서 대륙 전체를 석권하게 된 누르하치와 그의 후계자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생애 첫 번째 패배, 영원성 전투
칸 쓰러지다
아비규환이었다. 사방에서 터지는 포탄 아래 병사와 말들이 나둥그러졌다. 사방에서 떨어진 팔다리가 날리고 살점이 튀었다. 비명 소리와 죽어 가는 말들의 신음 소리가 고막을 터트렸다. 전열은 무너졌고, 공포의 그림자는 병사들을 감싸 안았다. 천지를 뒤흔드는 요란한 대포 소리가 날 때마다 무적으로 불리던 후금의 팔기군은 한 무리씩 쓰러졌다. 그러던 중 포탄이 대한大汗의 황룡기에 적중하였고, 그 파편에 누르하치는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 근처에 있던 정백기正白旗 기주旗主 홍타이지皇太極는 서둘러 철군을 명하였다.1626년 정월 중국 본토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영원성寧遠城에서 벌어진 전투의 결과였다. 당초 누르하치는 6만의 팔기군八旗軍을 20만 대군이라 선전하면서 얼어붙은 요하를 건너 영원성으로 진군하였다. 1월 24일 누르하치는 총공격을 명령했다. 후금군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보병들이 선두에 섰다. 이들은 장갑 처리한 방패전차, 즉 견차堅車를 밀고 전진하면서 활과 창, 약간의 총포로 성을 공격하였다. 여기에 선봉에는 2겹으로 된 철갑을 입은 철두자鐵頭子들이 섰다. 후금군의 맹렬한 공격에 영원성에서는 반격 개시의 북소리와 함께 큰 돌을 굴리고, 화약통과 불 뭉치를 던져 후금군 전차를 태워 버렸다. 특히 성벽 계단의 커다란 연석沿石을 파내 성 아래로 떨어뜨리자 후금의 전차들은 짓눌려지면서 많은 병사들이 압살되었다.
이튿날 누르하치는 더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후금군은 성벽 곳곳에 구멍을 뚫었지만 날씨가 추운 때라 성벽이 얼어서 무너지지 않았다. 영원성에서는 회심의 비밀 무기를 사용하였다. 총 11문의 홍이포紅夷砲가 일제히 방포되었고, 곳곳에서 피해가 속출하였다. 홍이포는 서양식 켈버린 대포로 명은 이 무기를 1618년 처음 입수하였고, 1621년에는 자체 제작 기술을 습득하였다. 유효 사거리 700~800미터, 최대 사거리 4킬로미터에 달하는 당시로는 강력한 대포였다. 이 홍이포의 성능과 위력을 알지 못했던 누르하치로서는 아무런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후금군은 밀리기 시작하였고, 결국 누르하치 자신마저 부상을 입고 퇴각하게 되었다.
명의 이순신, 원숭환
당시 영원성을 지키는 명의 장수는 원숭환袁崇煥이었다. 그는 1만여 명의 병력으로 시대의 영웅 누르하치에게 패배의 쓰라림을 안겨 주고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인물이었다. 원숭환은 중국 남방 광둥성 동관 출신으로 대기만성 인재였다. 1619년 36세에 겨우 과거를 통과했다. 그는 문관이지만 늘 병서를 읽고 퇴직한 무장들과 교유하였다. 원숭환의 담력과 지략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나자 명 조정은 그를 병부의 관리로 선발하였다.당시 병부상서는 천계제天啓帝(재위 1620∼1627)의 스승인 태학사 출신 손승종孫承宗이었다. 당시 산해관山海關 일대 방어 책임자 요동경략 웅정필熊廷弼은 후금군의 침입을 잘 막았다. 하지만, 환관 위충현魏忠賢의 수하 왕화정이 그의 전략을 무시하고 후금을 공격하다가 패하고 주요 지역인 광녕廣寧을 빼앗기자 산해관으로 퇴각하였다. 패전의 책임을 지고 웅정필만 처형당하였다.
이후 원숭환은 산해관 일대를 답사한 뒤,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는 전방에 야전 초소를 설치하여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전략을 제안했고, 손승종은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다. 손승종은 그를 영전병비검사寧前兵備檢事로 임명해 산해관 바깥에 위치한 영원寧遠과 전둔위前屯衛의 군대 지휘권을 주었다. 원숭환은 관외를 지켜야만 관내 방어가 가능하다며 산해관 동북방의 영원에 큰 성을 쌓고 군사를 주둔시켰다. 1624년에 완공된 영원성에 요동에서 피난한 백성들이 모여들고 관내 상인들도 찾아오면서, 상업이 번성하고 요서의 중심 도시로 커졌다. 원숭환이 영원을 방비하는 동안 요하 일대의 전세는 명이 우세한 형국이 되었다. 원숭환은 손승종에게 건의하여 여러 장수들을 각지 요새로 파견하게 하였고, 200여 리를 북진하여 요서 서쪽의 옛 영토를 거의 회복하였다. 상관의 전폭적인 지지로 원숭환은 승승장구하며 동북 전선을 굳건하게 지켜 나갔다. 이런 명의 요하 전선 정비에 누르하치는 수년간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그래서 그는 명의 중앙 정치가 엉망인 점을 파고들었다. 당시 명 황제 천계제는 조정엔 관심이 없고 목공에만 몰두하였다. 그 사이 위충현이 국정을 농단하며 반대하는 인물들을 모두 제거했다. 특히 뇌물을 바치지 않고 강직한 손승중을 눈엣가시로 여겼고, 결국 그를 몰아내고 용렬한 고제高弟란 인물을 요동경략에 임명했다. 고제는 요서 일대에 널리 전개되어 방어선을 폈던 병력을 산해관에 집중시켜 버렸다. 누르하치는 명 조정의 허실과 요동경략 고제의 아둔함, 정권 실세의 눈 밖에 난 원숭환의 처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한 끝에 영원성을 무너뜨리려 했었다.
그러나 원숭환은 영원성을 새로 쌓으면서 방어 체계를 보강하였다. 당시 신무기였던 포르투갈산 홍이포를 전장에 배치하였고, 실전 훈련을 지속하면서 엄정한 군기를 유지하였다. 그와 함께 민심을 다독였고 스스로가 모범을 보여 민관 혼연일체로 강력한 후금군의 공격을 막아냈던 것이다. 또한 1629년 조선의 섬 가도에서 7년간 해적처럼 장난을 치던 모문룡
(주2)
을 처형하기도 하였다. 영원성은 후금에게는 난공불락의 요새였고, 원숭환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마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게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군신軍神처럼 보였던 것과 같았다. 이후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청태종 홍타이지는 이간계로 그를 없애기로 하였다. 원숭환이 모반을 꾀한다는 허위 정보를 유포하였고, 판단 능력이 없던 숭정제는 원숭환을 역적으로 단정하고 그를 1630년 9월 22일 베이징 서시 거리에서 온몸의 살점을 잘라 내어 죽이는 처참한 책형磔刑에 처해 버렸다. 공직에 나간 이후 한평생 한순간도 나라를 위해 일하지 않은 순간이 없는 명장이었고, 명의 최대 버팀목이자 후금에서 극히 꺼려하던 명장은 이렇게 어이없이 뽑혀 나갔다. 그의 죽음은 명의 멸망을 가속화하는 신호탄이었다.
칸이 승천하다
상처를 입은 누르하치는 심양으로 철군한 뒤 이렇게 말했다.“나는 스물다섯 살 때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싸웠는데 이때까지 공격하여 점령하지 못한 성과 요새가 없고 싸워서 이기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영원성만은 점령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거듭된 승리 때문이었을까? 당시 누르하치는 오만과 자만에 찼던 것 같다. 누르하치는 거병 이후 44년을 전쟁터에서 보내면서 불패 신화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광녕을 점령한 뒤, 나이도 많아지고 체력이 약화되면서 전과 같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 따라서 원숭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홍이포와 같은 최신 무기에 대해서 무지하였다. 창칼로 대포를 공격하고 단병기로 장병기를 공격하며 안일한 태도로 지친 병사들을 이끌고 준비된 상태로 기다리는 상대에 도전하는 등 병가의 금기禁忌를 모두 범하였다. 아무튼 생애 첫 패전과 좌절로 인해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누르하치는 1626년 8월 11일 양력 9월 30일 68세로 승천하였다.
청태조, 누르하치
누르하치 이전 금나라 역사
본래 여진은 우리와 형제 민족이다. 고대 읍루邑婁, 숙신肅愼, 물길勿吉, 말갈靺鞨 등으로 불려 온 퉁구스 계통인 그들은 DNA만 놓고 보아도 매우 닮았다.(주3)
역사적으로 그들은 배달국 이래 고구려, 대진국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여진족을 뜻하는 고유어 ‘주르신Jusen(諸申)’은 청 태종 때 만주Manju滿洲가 공식용어로 채택되면서 이내 사라졌다. ‘만주’란 명칭은 라마교를 신봉했던 몽골의 영향으로 불교에서 상투를 틀고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 신앙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문자음운학적으로는 건주여진의 근거지인 파저강婆豬江(압록강 지류로 나중에 동가강佟家江이 됨. 발저강, 포주강, 마저강으로 불림)의 음이 변화해서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여진족의 일부는 12세기 화북으로 진출해 금金을 세웠으나, 만주에 잔류한 대부분의 여진족은 정착 농업을 영위했다. 1234년 금의 패망은 충격이 컸다. 누르하치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들은 여러 아이만aiman(부족)으로 분산되어 살았다. 명나라 시절 여진은 건주建州, 해서海西, 야인野人의 세 무리로 통합되었고, 명은 추장들에게 관직을 하사해 간접 통치를 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건주여진은 압록강과 두만강 북안에 자리 잡았고, 해서여진은 몽골과 가까운 초원 지대와 송화강 주변에, 야인은 흑룡강 하류와 연해주 일대 산림 지대에 살았다. 물자가 부족한 여진족들은 산해관에서 북쪽 개원을 거처 조선의 압록강 유역에 이르기까지 2천 리 정도 되는 요동 일대에 쌓은 담장을 의미하는 요동변장遼東邊牆에서 말을 교역하는 마시馬市를 열어 생필품을 조달하였다.
명은 여진족 거주지에 관할 범위에 따라 100호의 소所와 1000호의 위衛를 두었다. 누르하치가 등장하던 때에는 모두 384개의 소와 24개의 위가 설치되었다. 명은 위소를 관할하는 부족장들에게 세력에 따라 벼슬을 내리고 조공을 허락하였다. 그들에게는 칙서와 인장을 수여했는데, 칙서가 있어야만 교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칙서는 권력과 부의 세습을 보장하는 증명서였다. 누르하치는 초기에 이 칙서를 확보하기 위해 맹렬히 투쟁하였다.
상인에서 장군으로
건주여진은 건주위와 건주좌위, 건주우위로 분화되었는데 1559년 기미년 건주좌위 추장 가문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바로 누르하치이다. 누르하치는 ‘멧돼지 가죽’을 뜻하는 여진어 ‘누허치nuheci’에서 왔다고 한다. 여진족이나 몽골족은 짐승과 관련된 이름이 많다. 병자호란 때 청태종의 충실한 심복 마후타Mafuta馬夫大는 ‘수사슴’이란 뜻이고, 청태종의 이복동생이자 순치제의 섭정으로 명을 멸망시킨 도르곤Dorgon多爾袞은 ‘오소리’란 뜻이다. 하지만 멧돼지 가죽은 동물 이름이 아니다.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비루한 느낌이 드는 의미로 이름을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뒤를 잇는다는 뜻을 지닌 만주어의 어간 ‘누르흐nurh’와 사람을 뜻하는 ‘치ci’가 결합되었다고 해석하는 게 타당하다. 그렇게 보면 누르하치란 뜻은 건주좌위를 창설한 6대조 멍거티무르로부터 조부 교창가, 부친 타쿠시에 이르는 조상의 혈통을 잇는 인물이라는 뜻의 사자嗣子(대를 이을 아들)란 의미가 된다.누르하치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체격이 건장해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에 능했다고 한다. 10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나라씨那拉氏 슬하에서 자랐다. 가정은 화목하지 못하고, 이복형제들도 분가를 종용하였다. 유소년 시절 온갖 고초를 겪었고 19세에 결혼하면서 분가하였다. 백두산 인근에서 인삼을 캐고 버섯을 따며 개암과 잣송이를 주워 팔아 가며 연명했다. 무순撫順의 마시를 왕래하며 제법 규모 있는 무역을 하였다. 이때 폭넓은 사회 경험을 하면서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였다.
25살 되던 1583년 그의 인생을 뒤바꾼 중요한 사건이 터진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명의 장수 이성량李成梁에게 목숨을 잃었다. 이성량은 고조부가 조선 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지원군 사령관 이여송의 부친이다. 이성량은 요동총병을 고수하면서 만주, 요동 일대에 왕처럼 군림한 인물이다. 당시 건주우위 부족장 아타이阿台가 일으킨 반란을 토벌하는 데에 누르하치의 부조父祖가 참전하였다. 그런데 이 아타이의 부인은 교창가의 손녀이자 타쿠시의 조카딸이었다. 누르하치에게는 4촌 누이가 된다. 그래서 누르하치 집안은 이 싸움에 끼어들려 하지 않았으나, 건주좌위와 경쟁하던 숙수후부의 부족장 니칸 와이란Nikan wailan이 이성량을 부추겨 참전을 강요했다. 교창가와 타쿠시는 아타이와의 특수 관계를 내세워 설득하여 투항하게 하겠다며 성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를 모른 채 이성량이 총공격을 가해 성안의 여진족은 모두 살해되었고,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시체로 발견됐다.
부친과 조부가 명에 충성했지만, 결국 죽임을 당한 사건을 목도하면서 누르하치는 격분하였다. 하지만 힘이 약한 처지여서 어설프게 직접적인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다. 이성량은 사죄 및 위로의 차원에서 누르하치에게 교역 허가증에 해당하는 칙서 30통을 주었다. 이는 여진족 추장에게 부여되는 1,500통의 2%에 해당했다. 이는 누르하치가 거병할 때 군자금으로 활용되었다. 얼마 후 이성량의 주선으로 좌도독과 용호장군의 칭호를 받고 상당량의 돈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누르하치는 이를 바탕으로 건주여진을 신속히 통일해 나갔다. 누르하치는 명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았다. 우선 자신의 조부를 죽음으로 내몬 니칸 와이란을 잡아 죽였다. 그 과정에서 다수의 숙련병을 확보하면서 인근 마을을 차례로 세력에 넣었다. 복수전으로 시작한 누르하치의 전쟁은 세력 확대전으로 발전하여 전 만주 땅을 격동시켰다. 내가 먹지 않으면 먹히는 싸움, 가장 강한 자가 전부를 갖는 양보 없는 전쟁이었다.
여진족 통합과 만주 독립
1587년 누르하치는 퍼알라Feala佛阿拉(오래된 평평한 언덕이란 뜻)에 근거지를 마련한 뒤 스스로 수러 버일러Sure Beile淑勒貝勒(‘위대한 군공君公’)를 칭했다. 누르하치는 6년에 걸친 노력 끝에 마침내 건주여진의 5개 부족을 통합하였다. 또한 건주여진을 ‘만주 구룬Gurun(구룬은 나라란 뜻)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건주를 평정하고 칙서를 독점하는 등 정치 경제적 통합을 강화하면서 명에 대해서는 여전히 공손하고 충성스런 태도를 보였다. 욱일승천하는 누르하치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으니, 바로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이었다. 조선에 원병을 보내느라 다급한 명은 누르하치가 주도하는 여진족 통합 움직임에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했다. 오히려 누르하치는 조선에 원병을 보내겠다는 정치적 제스처를 보이며 명 조정에 점수를 톡톡히 얻었다. 임진왜란 당시 전쟁 특수를 이용해 탄탄하게 재력도 쌓아올렸다.착실히 세력을 키운 누르하치의 다음 타깃은 해서여진이었다. 우라烏喇, 호이파輝発, 하다哈達, 예허葉赫 등 해서 여진 4부가 한데 뭉쳐 선제 공세를 취했다. 1593년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한창일 때 만주에서도 큰 전쟁이 벌어졌다. 해서여진 4부와 몽골의 코르친科爾沁 부족 등 ‘9개 부족 연합군’ 3만 명이 누르하치를 공격하였다. 누르하치로서는 최대 위기를 맞은 셈이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적의 수는 많지만, 연대는 느슨하였기 때문이다. 누르하치는 험지에 군사들을 배치한 뒤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 각개 격파 전술로 9개 부족을 차례로 박살 내 버렸다. 이후 여진의 여러 부족과 코르친 등 일부 몽골족까지 누르하치를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다. 이들은 훗날 누르하치의 만주 팔기와 몽골 팔기의 단초가 되었다. 건주여진의 구루산古勒山 일대 대회전에서 승패가 갈렸기 때문에 흔히 ‘구루산 전투’로 불린다.
1603년 4월 누르하치는 퍼알라를 떠나 허투알라Hetuala赫圖阿拉로 수도를 옮겼다. 퍼알라는 산으로 둘러싸인데다 성 내부의 높낮이도 다르고, 경사 또한 급해 더 이상 확장할 수 없었다. 허투알라의 허투는 우리말 부사어 ‘허투루’와 어원이 같은 말로 ‘가로橫’라는 뜻이고, 알라는 ‘언덕’이란 뜻이다. 허투알라는 곧 강변의 가로에 놓인 약간 높은 구릉지를 뜻한다. 누르하치는 이곳을 흥경興京으로 명칭을 바꾸어 요양遼陽으로 천도하기까지 19년 동안 여진족 통일과 대명 전쟁을 수행하는 군사 거점으로 삼았다.
1608년 누르하치의 뇌물을 받아먹으며 뒤를 돌봐 주던 이성량이 해임되고 명은 누르하치의 세력 약화를 기도하였다. 그래서 누르하치의 대명對明 무역을 제한하고, 맞수인 예허부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였다. 1615년 명은 황무지를 개척하며 살던 여진족 농민들을 내쫓고 수확을 막는 등 교역 중단과 경작 저지로 경제 기반을 무너트리려 하였다. 여러모로 위기의 상황이었다.
사르후 전투와 위기의 만주국
이제 명과 결전을 치러야 했다. 우선 1616년 1월 1일 누르하치는 마침내 칸(한汗)으로 즉위하였다. 국호는 ‘후금後金’, 연호는 ‘천명天命’이었다. 만주어 정식 명칭은 ‘아마가 아이신 구룬Amaga Aisin Gurun’이다. 금의 개국조 아구타의 위업을 계승할 뜻을 내외에 천명한 것이다. 아마가는 ‘미래’ 또는 ‘후래後來’라는 뜻으로 우리말의 ‘아마도’와 어원이 같다. 금이 망한 지 382년 만의 독립이었다. 그 뒤 1618년 4월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명을 칠 수밖에 없는 7가지 원한(칠대한七大恨)을 명분으로 내걸고 선전포고를 했다. 이윽고 1619년 명의 대군이 허투알라로 진격하였다. 이를 사르후와 심하 등지에서 차례로 각개 격파를 하였다(#사르후 전투#). 이후 명은 요하 서쪽으로 물러나고 다시는 요동으로 나오지 못했다. 이때가 누르하치의 절정기였다.하지만 그 이후 국가 발전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한 채 시행착오에 빠져 있어야 했다. 명은 후금과의 무역을 중단함으로써 계속해서 경제적 압박을 가해 왔다. 비록 요동을 잃었지만 명의 경제력과 군사력, 외교력은 여전히 후금을 압도하고 있었다. 명은 단지 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하지 못했을 뿐이다.
만주와 몽골 등 유목민족 사회는 농경 사회와 물자 교환을 하지 않으면 존속하기 어렵다. 여기에 국가를 수립하면서 여러 가지 경제적 부담은 커져 갔다. 그렇기 때문에 초원의 영웅들은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흥기한 후에는 반드시 경제적 활로를 찾아야 했다. 후금은 생산성 낮은 목축과 수렵, 콩, 수수 위주의 농사로는 적정 수준의 경제 기반을 갖추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1625년 3월 1일 수도를 요양에서 동쪽인 심양瀋陽으로 후퇴하였다. 이제 후금이 살아갈 대안은 요서와 중원으로 진출하는 방법뿐이었다. 그래서 누르하치는 후금 건국 10년을 맞이하여 절박한 심정으로 요하를 넘어 요서 지방 침공에 나섰고, 그 길목을 영원성이 막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이곳에서 생애 첫 패배를 맞으며 좌절해야 했다.
천명칸天命汗 누르하치
누르하치는 분열된 여진족을 통일하여 후금을 세우며 승승장구하였지만, 이후 국가 생존과 발전을 위한 후속 방안을 찾지 못한 채 수년을 보내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경제 자립 방안과 새로운 활로 찾기는 후계자들의 숙제로 넘겨져야 했다. 후계자들은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하고 대청 제국을 열어 갔는지 알아보기 전에 청태조 누르하치가 성공하게 된 비결을 짚고 넘어가 보자.누르하치는 인내와 끈기, 그리고 교묘한 책략을 써서 추종하는 자들을 늘렸고, 적을 서서히 압도해 나갔다. 여기에 극복 대상인 명의 정치 경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고, 동아시아의 힘의 패권이 이동하는 방향과 상황에 대해 항시 주시했다. 천하의 흐름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또한 경제적 기반 확보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조직의 천재다운 면모를 보여, 강력한 군사 조직이자 행정 조직인 팔기제八旗制를 만들고 활용하였다. 목표를 높게 세웠고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으므로, 작은 경제적 실리를 얻는 데 국한시키지 않고 끝내 원하는 목표를 이루어 냈다. 그러기 위해서 결코 주눅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야생의 기질을 가진 대담한 사람답게 과감하게 투쟁하였고, 그의 팔기군 역시 그랬다. 역경을 극복하려는 의지, 이는 누르하치의 힘이었다. 그는 만리장성을 넘어가기로 하였고, 그 뜻은 후대로 이어졌으며, 마침내 실현되었다.
중원을 장악한 조직력, 누르하치의 팔기군八旗軍
누르하치가 남보다 뛰어난 점은 조직 구성과 강화에 있었다. 그는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전쟁을 통해 이웃 부족을 잡아먹는 방식으로 힘을 키워 나갔다. 그렇기 때문에 복속한 세력을 장악하기 위해 강고한 통합 체제를 고안하였다. 즉, 과거의 씨족, 부족 체제를 해체하여 더 효율성 높은 동원 체제로 바꾼 것이다. 자신의 지배하에 들어온 여진 집단을 부족 단위가 아닌 황黃, 홍紅, 백白, 람藍의 깃발로 구분된 4개의 집단, 즉 사기四旗로 재편하였다.
사기의 기원은 전통적인 수렵 제도에서 유래하였다. 여진족은 본래 산림 속에서 수렵을 위주로 생활한 까닭에 매복전과 포위전에 능했다. 짐승 몰이에 동원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효과는 더 커졌다. 부족의 통합은 곧 막강한 군사 집단의 형성을 의미하였고, 짐승 몰이는 곧 군사 훈련이었다. 그래서 팔기군에 관련된 용어는 모두 수렵 용어에서 나왔다.
여진족은 사냥을 하거나 전쟁을 할 때 마을 단위나 부족 단위로 행동했다. 성공적인 사냥 등을 위해서는 참가자들을 효율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리더와 조직 구성이 필수 요소였다. 여진족은 10명을 한 조로 삼고, 각각 화살을 한 대씩 내놓아 그 가운데 제비 뽑힌 화살 임자를 총령總領으로 세우고, 그의 지시에 따라 나머지 9명은 출전 혹은 사냥을 일사불란하게 수행했다. 이 총령을 니루어전Niru-i-ejen(우록액진牛彔額眞)이라고 불렀다. 우록은 큰 화살, 액진은 주인을 뜻하는 말이다. 누르하치는 1601년 니루 조직을 확대 개편하였다. 팔기는 수렵의 기본 단위인 니루에서 시작하였다. 300명을 1니루로, 5니루를 1잘란jalan甲喇, 5잘란을 1구사gusa固山로 했다. 1잘란은 1,500명, 1구사는 7,500명이 된다. 이 구사를 한자로 기旗라고 표현했다.
처음에는 음양오행의 상징인 황, 백, 홍, 남색의 4색으로 깃발을 구분하였다. 각 기의 책임자인 구사어전固山額眞은 귀족을 의미하는 버일러beile貝勒라고 불렀다. 통치 범위가 확장되고 인구와 병사가 늘어나자 1615년에 4기가 보태져 8기八旗가 되었다. 그래서 기존의 4기는 바를 정正자를 써서, 정황기正黃旗, 정백기正白旗, 정홍기正紅旗, 정남기正藍旗라 하였고, 나머지 4기는 홍색의 테를 둘러(홍기에는 백색의 테를 둘렀다) 각기 양황기鑲黃旗, 양백기鑲白旗, 양남기鑲藍旗, 양홍기鑲紅旗라 했다. 만주 8기, 6만 명의 정예병 제도는 이렇게 해서 생겨났고, 이 조직이 대륙을 집어삼킨 것이다.
당시 여진족의 모든 남녀는 이 팔기에 소속돼야 했다. 팔기는 곧 여진족의 호적이었다. 소속원은 국경 밖으로 나가면 병사가 되고, 안으로 들어오면 백성이 되었다. 즉, 팔기제는 군대의 동원과 통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전 부족을 조직화했다. 이는 군민일체軍民一體의 행정 조직으로 세금과 부역을 납부하는 사회 경제 조직체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만주족을 기인旗人이라고 불렀고, 만주족 스스로도 ‘정황기인 사람’, ‘양백기인 사람’하는 식으로 소속을 불렀다. 팔기제는 여진족이라는 소수 집단을 가장 효율적으로 총동원하기 위한 제도로서 청나라가 3백년 가까이 중국 대륙을 통치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평가받고 있다.
명청 세력 교체의 분수령, 사르후 전투
전투 발발 배경
1618년 60살이 된 누르하치는 일곱 가지 큰 원한을 하늘에 고하고 공개적으로 명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칠대한七大恨은 조부와 부친을 살해했다는 자신의 혈족에 대한 원한과 명이 다른 부족을 지원하여 여진 통일을 방해한 사실을 비난한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명과 일전을 앞두고 두려움에 떠는 구성원들에게 ‘분노’의 감정을 불어넣음으로써 ‘공포’를 극복하여 항전 의지를 불러일으키려 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를 중원으로 돌아가는 상인들에게 주어 선전전에 나서 줄 것을 당부하였다. 누르하치의 독립 국가 건설은 명이 자초한 일이며, 이 전쟁은 정당한 복수전임을 널리 알리며 명분을 쌓았던 것이다.누르하치는 이어 기병과 보병 2만 명으로 편성된 팔기군을 이끌고 무순을 향해 진격했다. 이 공격에는 누르하치의 몽골인 사위들이 앞장섰다. 궁지에 몰린 무순성의 수장인 유격遊擊(무관직) 이영방李永芳은 기다렸다는 듯이 투항하였다. 그는 누르하치의 손녀사위가 되어 만주국에 충성을 바친 최초의 한족이었다. 이어 청하淸河를 빼앗는 등 누르하치는 요동 변경을 짓밟기 시작했다.
명군 출병
무순 함락에 경악한 명 조정은 더이상 누르하치를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건방진 오랑캐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는 다짐으로 총반격에 나섰다. 그래서 1619년 3월 후금 수도 허투알라의 서쪽, 무순의 동쪽에 위치한 사르후薩爾滸에서 명明과 금金의 국운을 건 전투가 벌어졌다. 사르후는 ‘울창한 숲’을 뜻하는 만주어로 무순 인근의 오지였다.
명군 진용은 화려했다. 국방부 차관에 해당하는 병부시랑 양호楊鎬가 요동경략에 임명되고, 퇴역한 이성량의 아들 이여백을 특별히 기용하여 요동총병에 임명하였다. 이여백은 임진왜란 당시 명군을 이끌고 참전한 이여송의 친동생이다. 여기에 산해관총병 두송杜松, 보정保定총병 왕선王宣, 개원총병 마림馬林, 요양총병 유정劉綎 등으로 명군 내에서 명성을 떨치던 장수들이 포진해 있었다. 주목할 사실은 남로군 유정 휘하에 도원수 강홍립이 지원하는 조선 원군 1만 명이 소속돼 있었다는 점이다.
당초 조선이 누르하치 세력을 강하게 의식케 된 것은 누르하치군이 함경도 국경 지대에 있는 여진족을 제압하고 동해로 연결되는 통로를 확보한 1607년 무렵이었다.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누르하치의 동태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를 지낸 서인의 거두 오성 이항복을 서북면도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로 임명하였다. 이를 계기로 서인에 속한 무인들이 서북변계 무장으로 많이 발탁되었는데 이는 훗날 인조반정의 불씨가 되었다.
질풍노도 팔기군
조선군을 포함한 명군 10여 만 명은 네 갈래로 나누어 후금의 수도 허투알라를 향해 진격하였다. 사로로 나누어 공격하는 방법은 철저한 비밀 유지와 각 부대 공격 시점이 일치해야 하는데 1년 가까이 준비하느라 비밀 유지는 물건너간 상태였다. 이미 1618년 9월 누르하치는 자이판界凡과 사르후 산에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이때 공을 독차지하려는 두송의 독촉으로 서로군은 예정 시간보다 빨리 혼하渾河를 건넜다. 두송은 용맹만으로 전쟁을 결판낼 수 있다고 생각한 단순한 군인에 지나지 않았다. 두송은 1만 명을 이끌고 자이판성으로 향했다. 문제의 1619년 3월 1일. 허투알라에서 이 소식을 들은 누르하치는 전군을 두송의 서로군에 집중하기로 결정한다. 이런 두송의 움직임을 누르하치는 척후를 통해 이미 파악했다. 누르하치는 홍타이지에게 2기의 병력을 주어 자이판성을 구원케 하고, 6기 4만 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사르후에 남아 있던 명군을 공격했다. 사르후의 명군은 후방부대라는 생각에 방심하고 있었다. 이때 흙먼지(매霾, 흙비)가 휘몰아쳐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 명군은 너무 어두워 횃불을 들고 싸웠는데, 이는 표적을 자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이판성으로 향하던 두송의 주력군은 복병을 만나 고전하던 중 사르후의 패전 소식을 듣고 전의를 상실하였다. 이때 사르후에서 승리한 6기군이 들이닥쳤고 반나절 만에 명군은 전멸했다. 두송은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른바 명청 간의 왕조 교체를 결정지은 사르후 전투였다.이 전투 패보를 접한 양호는 곧 각 군에 격문을 띄웠다. 그러나 이는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는 결과가 되었다. 3월 2일 누르하치의 팔기군은 질풍 같은 속도로 개원 쪽에서 진격한 마림의 북로군을 상간하다尙間崖에서 격파하였다. 후속 부대였던 예허족의 지원 부대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철군하였다. 북상해 오는 유정의 동로군에 대해서는 먼저 매복병과 장애물을 이용해 진격을 방해하였다. 두송과 마림군을 격파한 후금군은 심하深河에서 첫 전투를 벌인 후 부차富車 들판에서 조명 연합군을 궤멸시켰고, 유정은 전사하였다. 남로군은 전투를 포기하고서 퇴각했고, 이여백은 자진하였다.
당시 조선군은 갑자기 엄습한 추위와 보급 문제로 고생하였다. 그리고 전공에 눈이 먼 명군의 재촉에 의한 무리한 행군으로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다. 머나먼 타국에서 의미 없는 전쟁을 겪어야 했던 조선군은 선천 군수 김응하, 운산군수 이계종, 영유현령 이유길, 우영천총 김요경, 좌영천총 김좌룡 등이 전사하면서 세 영 중 두 영이 전멸을 당하였다. 중군영의 도원수 강홍립은 항복하였고, 조선군 포로는 대략 4,000명에서 5,000명 정도였다. 대략 8,000명 정도가 전사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 때 조총에 호되게 당해서인지 조총병 양성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조총병에 지나치게 집착했다. 재장전 시간이 최소 30초에서 1분 정도 걸리는 조총병을 제대로 엄호해 주어야 함에도, 워낙 근접전을 싫어했던 탓에 창과 칼로 무장한 살수가 제대로 육성되지 못했다. 총을 한 번 발사한 뒤, 후금의 철기鐵騎가 곧바로 진영 앞에 쇄도해 들어왔다. 일본 같은 경우에도 장창과 대도로 무장한 병사들이 엄호했고, 유럽에서 불패의 명성을 떨친 스페인의 테르시오Tercio 역시 장창병과 총병의 조합으로 대응하였다. 한마디로 무기는 손에 넣었지만, 그에 걸맞은 전술과 운용 방안을 마련하지 못한 결과였다.
명군 패배 원인
조명 연합군은 총병력 수는 우세하였지만, 4개 방면으로 분산돼 공격하는 잘못을 범했다. 누르하치군은 빠른 기동력과 정보력에 힘입어 언제나 우월한 병력으로 ‘흩어진 적’을 각개 격파를 해 버렸다. 전투 결과 후금 전사자는 2백 명에 불과했던 반면 조명 연합군은 4만 6천 명의 병력을 잃고 참패함으로써 요동 지배권을 상실하고 요하遼河 서쪽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국운을 건 전투에서 명군이 패배한 원인은 무엇일까? 조선 지원군까지 동원한 이 전쟁에서 참혹한 패배를 당한 이유는 다음의 몇 가지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첫째로 명군 내부 장수들 간에 일치된 통일 작전이 없었다. 공명심만을 앞세워 전체 작전을 뒤흔드는 두송 같은 인물이 나왔고, 결과만을 중시하는 풍토로 원칙 없는 행동이 나왔다.
둘째로 군의 기강이 해이해져 있었다. 전선에서 명군은 긴장감이 결여되어 있었다. 여기에 병력을 모아야 할 때 분산시키는 전략을 썼다. 즉 언제 군사를 모으고, 언제 펼쳐야 하는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 명군은 만주 팔기군에 대해 병력을 집중해서 대응해야 했지만, 4군으로 분리시켜 힘을 모을 수 없었다. 전쟁이란 자기가 잘해서 이기는 경우도 있지만, 상대가 실수함으로써 승리를 얻게 되는 경우도 있다. 누르하치는 흙비가 불어 주는 등 운이 좋기도 했지만, 운을 부릴 줄 아는 지도자이기도 했다. 운도 전략의 일환인 셈이다.
누르하치의 승리 비결과 얻은 것
그렇다면 누르하치 승리 배경은 무엇일까?첫째로 항상 이길 만한 요소, 즉 승리의 요인을 만들어 놓고 싸웠다. 매복, 전략적 교두보 및 요충지 확보, 상대의 허 찌르기, 심리전, 첩자 파견, 정보전, 정면 공격과 같은 전술적 우위를 확보한 다음에 싸웠다. 여기에 근 20년간 여진 내 각 부족을 통일하면서 터득했던 지형지물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활용함으로써 작전 전개가 용이했다.
둘째로 뛰어난 전략 전술을 구사했다. 사르후 전투에서 누르하치는 병력을 나누어 오는 명군에 맞서 한 방향에서 집중적으로 병력을 투입하며 각개 격파를 하였다. 아군의 주력은 집중시키되, 적의 병력은 흩어지게 해서 깨뜨린다는 전략이었다. 누르하치는 사르후 전투 이후 승세를 타서 1619년 6월 개원開原, 7월에 철령鐵領을 점령하였고, 8월에는 예허 부족을 멸망시켜 여진족 통일을 완수하였다.
후계자 청태종 홍타이지의 천하 통일 전략
공포의 제왕, 청태종 홍타이지 즉위
왕조의 창업 성공 여부는 대부분 2세 때 결정된다. 진秦이나 수隋는 호해胡亥와 양제煬帝 때문에 망했다. 반면 태종太宗이라는 묘호가 붙은 탁월한 2세들이 등장한 왕조는 그 수명을 오래 누렸다. 당태종 이세민이나 조선의 태종 이방원 등은 창업주를 능가하는 탁월한 경영 능력으로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이들은 오직 실력으로 권좌를 차지했기 때문에 골육상쟁을 벌이기도 하였다.청태종 홍타이지 역시 그랬다. 장남도 아니었고, 궁정 내 세력도 별로 없는 외톨이였던 그는 불타는 권력 의지로 차근차근 경쟁자들을 제거하며 지존의 자리에 올랐다. 누르하치가 사망할 당시 홍타이지는 35세였다. 모친은 예허나라葉赫那拉 성씨에 멍구제제孟古姉妹라는 이름을 지닌 여인으로 누르하치의 부인 중 최고 명문 출신이었다. 14살에 누르하치에게 시집간 멍구제제는 17살 때인 1592년 임진년에 홍타이지를 낳았다. 홍타이지는 황태극皇太極 또는 황태자皇太子란 뜻이다. 이후 정실부인이 되었지만 28살에 병으로 숨졌다. 홍타이지는 12살의 어린 나이에 생모와 이별하였다.
누르하치의 여러 부인과 그 소생 16남 8녀는 일가족이긴 했지만, 엄혹한 경쟁 사회였다. 생모도 없고, 동모同母 형제마저 없던 홍타이지는 외톨이였다. 고단한 삶 가운데에서도 어린 홍타이지는 꿋꿋하였다. 죽을힘을 다해 무예를 익히고 글을 배워 스스로 능력과 식견을 키웠다. 어릴 적부터 홀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한 셈이다. 말수가 적고 냉정한 성격의 소유자가 된 것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누르하치의 여러 아들 중 머리가 가장 뛰어나 한문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교양을 갖췄고, 중국 고전을 섭렵한 결과 지략에도 능란했다. 이와 함께 전장에서 공도 탁월하였다. 신중하면서 용맹했던 그는 10대 후반부터 참전하였다. 1619년 사르후 전투 당시 누르하치가 ‘사람들이 홍타이지에게 의지하기가 인체로 말하면 눈과 같다’고 칭찬할 정도로 전공이 컸다.
누르하치는 일찌감치 장남 추잉으로 후계자를 키우려 했다. 하지만 추잉은 아버지 생전에 권력 강화를 시도하다, 큰 불화를 일으켜 부친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미처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만 누르하치가 사망하고 말았다. 자칫 후계 문제로 내분이 일어날 수 있는 위기 상황이었다. 실제로 명은 내심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역사는 이들의 바람과 다르게 진행되었다.
당시 후금의 후계 구도에서 가장 유력한 이들은 소위 ‘4대 버일러’였다. 누르하치의 2자 다이산代善(사르후 전투 당시 조선군을 궤멸시킨 인물)을 비롯해 5자 망굴타이莽古爾泰, 누르하치의 동생 수르하치의 아들 아민阿敏(정묘호란 당시 후금군 총사령관) 그리고 홍타이지였다. 아민은 누르하치의 조카라 아들들에 비해서 영향력은 떨어졌다. 망굴타이는 용맹하였지만 지략이 부족하고 성격이 거칠었다. 다이산은 누르하치의 대비인 아바하이와 내밀하게 접촉한다는 정보에 의해 말년의 누르하치에 의해 견제를 당했다. 이와 관련하여 그러한 정보를 제공하는 정치 공작을 홍타이지가 주도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결과적으로 당시의 엄중한 상황에서 난세를 이끌어 갈 지도자로 홍타이지가 가장 적합하다는 게 중론이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권력 사슬의 맨 윗자리는 권력을 위해 목숨까지 걸겠다는 굳센 성격의 소유자가 차지할 확률이 높다. 결국 반대파를 차근차근 제압한 끝에 홍타이지는 마침내 한汗이 되었다. 위대하고 총명하다는 뜻을 지닌 ‘수러 한’의 칭호를 받은 홍타이지는 부친의 연호 천명天命에 빗대어 천총天總(하늘의 이치에 총명하다는 의미)을 연호로 삼았다. 그는 대청 제국을 실질적으로 창건한 인물이다. 다민족국가 중국이라는 사상적 기초를 마련하였고, 우리 역사상 최대 치욕인 ‘삼전도의 굴욕’을 안겨 준 장본인이자 공포의 제왕이었다.
홍타이지, 체제 정비로 위기를 탈출하다
경제적 어려움에 영원성 패배라는 심적 부담까지 지고 있었기에 홍타이지는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나라 안팎을 꼼꼼히 따져 보았다. 문제의 해답은 언제나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경제는 어렵고 백성들은 굶주리고 있다. 영원성 패배로 군사들은 위축돼 있고, 팔기는 공동의 전략 목표를 세우지 못한 채 제각기 작은 이익에 몰두하는 형국이었다. 제왕의 권위는 높지 않았고, 지시는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내부 정비가 시급했다. 우선 명에 대한 평화 제의로 시간을 벌어야 했다. 스스로 몸을 낮추어 휴전을 제의하였고, 전열을 정비하려는 원숭환도 이를 원해 일시적 휴전이 이루어졌다.홍타이지는 다민족 협화協和 사상을 지녔다. 그의 구상은 만주족만의 나라가 아니라 몽골과 조선, 나아가 명의 한족까지 포괄한 다민족 제국을 그리고 있었다. 민족 차별을 폐지하고, 과감한 포용 정책을 폈다. 그래서 요동 지역 한족들에게 마음놓고 농사를 짓게 하고 일정한 세금만 바치게 하였다. 농업 생산이 회복되어 식량 사정이 개선되자, 상공업도 장려하였다. 그러던 1627년 정묘년에 홍타이지는 조선을 침공했다. 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이었다. 명과 교역이 끊긴 상황에서 식량과 소금, 의복 등을 조선에서 충당하고자 하는 욕구가 침공의 가장 큰 이유였다. 조선이 후금과 활발한 교역으로 그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풀어 주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전쟁이다. 여하튼 홍타이지는 조선으로부터 급한 물자를 확보하였다.
이후 홍타이지는 당시 한의 즉위와 폐위, 군정, 재판, 관리 임명과 상벌, 팔기군 간의 분쟁 해결 등 모든 군국대사軍國大事가 여덟 명 버일러旗主의 합의 대상이었던 것(팔왕공치八王共治)을 폐기해 버렸다. 창업주인 누르하치 자신은 강력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지만, 후계자는 내부 경쟁자들의 견제 속에서 새로운 리더십을 구축해야 했기에 사정이 달랐다. 그래서 누르하치가 팔기의 수장들이 공동으로 지도하는 체제를 유훈으로 남겼을 때, 홍타이지의 권한 행사는 극히 제한돼 있었고, 국가 자원을 총동원하는 데 걸림돌이 많았다. 그래서 맹주 정도에 불과한 한의 권력과 위상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 결심하였다.
신중한 홍타이지는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차근차근 자신의 권력을 키워 나갔다. 황제를 정점으로 잘 조직화된 중국식 관료제를 차용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정황기와 양황기, 정백기와 양백기까지 4기의 지휘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함으로써 군권의 절반을 확보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여러 버일러를 숙청해 나갔다.
항복한 한족 관료와 지식층을 우대하면서 중앙집권 정책을 실현시켜 나갔고, 유교적 관료제를 확립시켰다. 만주족과 몽골족은 물론이고 한족까지 다수 참여한 관료 조직은 황제에 대한 충성을 최우선시하는 조직으로 기능하였다. 홍타이지는 개방된 자세로 선진적이고 필요하다면 적의 제도라도 과감히 수용하여 국가 발전을 가속화시켰다. 그리고 요동에 있는 한족으로 팔기군을 신설하였다. 이들은 훗날 중원 정복 전쟁에서 적극적인 활약상을 보여 주며 상당수가 관직을 받았고, 만주족 최고 지배층과 일반 한족을 잇는 중개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현재 중국의 표준어인 북경어는 이 요동에 있던 한족들의 말을 기반으로 했다는 게 정설이다.
홍타이지는 정치 경제와 군사 분야의 체제 정비와 함께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통합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흩어져 살아온 부족주의 감정을 일소하고 새로운 국가에 대한 귀속감을 형성함으로써 국민적 일체감을 조성하였다. 누르하치 시대부터 진행해 온 만주족 통일 사업이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완성되었다. 아울러 한자에 대응하는 만주 문자의 개량과 라마불교의 적극적 수용을 통해 사상적, 정서적 일체감을 강화시키면서 전통 문화도 계승하는 등 문화 방면에서도 비범한 역량을 보여 주었다. 누르하치가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을 통합했다면, 홍타이지는 흑룡강 유역과 연해주, 사할린 섬 일대까지 후금의 판도 내로 통합하였다. 이들 지역의 여진인들에게도 만주라는 새로운 명칭을 보급하였다. 같은 언어, 즉 만주어를 배워서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만주족이라는 개념을 통해 기존의 여진족을 넘어서는 더 큰 규모의 만주족과 만주민족주의를 형성하고자 하였다.
홍타이지의 무덕武德
내부 정비를 통해 절대 권력자의 입지를 다지고 민족적 자부심을 강화한 홍타이지는 다음 단계로 후금국의 위상을 높이고 동아시아의 패권자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보여 주었다. 우선 기존의 철기鐵騎 군단에 홍이포라는 신식 화기를 확보하였다. 만주의 철기는 팔기제 시행 이후 조직력이 강화되고 그 위력도 배가되었다. 개별 전투 현장에서 각 기旗는 추적조와 포위조, 타격조 등으로 신속하게 임무를 분담해 효율적으로 대적할 수 있었다. 홍타이지는 집권 기간 내내 철기군을 꾸준히 키워 나갔다. 일단 수를 늘리는 일에 초점을 두었다. 1개의 기에는 25개 니루, 즉 7,500명이 소속되었는데, 이 니루를 30개로, 산해관 입관 직전에는 40개로 늘렸다. 그래서 각 기의 평균 병력은 1만 2천명, 즉 1개 사단 정도의 병력 규모가 되었다. 여기에 몽골과 한족 팔기 신설로 후금은 10만의 철기 군단을 유지할 수 있었다.하지만 무적의 철기도 명나라의 원숭환이란 꾀 많은 지휘관이 등장하면서 그 위력이 제한적임이 드러났다. 평야에서 싸움을 피하고 성을 굳게 쌓아 지켜 팔기의 장점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던 것이다. 원숭환은 산해관 바깥에 각종 성채를 건설해 조밀한 방어 체제를 구축한 뒤 홍이포라는 신식 화기로 대응하였다. 성을 함락시키자면 접근이 불가피한데, 다가가면 홍이포의 집중 포화 앞에 병사와 말들은 공포에 질려 전투 의지를 상실했다. 대포에는 대포로 맞서야 하는데 손에 넣을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하늘은 후금의 편이었다. 후금의 홍이포 확보 기회는 명 스스로 넘겨주었다. 1629년 10월 기사년 명을 공격한 후금은 하북성 영평永平에서 홍이포 장인을 찾아낸 것이다. 명은 이 기술이 반드시 지켜야 할 최고 군사 기밀이었음에도 어리석게 지키지 못했다. 기술자들을 우대하는 홍타이지의 정책 때문에 그들은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였다. 1631년 6월 후금은 홍이포를 주조하였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은 이 홍이포의 가공할 파괴력으로 결국 무릎을 꿇었다.
여기에 1629년 원숭환에 의해 모문룡이 처단당하자, 그 부하로 반란을 일으킨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이 후금에 투항하였다. 이들이 거느린 전선 185척과 1만 4천 명의 수군은 모두 후금 차지가 되었다. 이 수군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함락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여 남한산성의 농성전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이제 후금은 기존 철기의 돌파력에 막강한 화력의 홍이포와 수군까지 확보하면서 명과 군사적 균형에서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제 홍타이지는 중원 정복을 더욱 자신하게 되었다. 이제 대포와 군대를 대량으로 확보하는 일이 필요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이에 후금은 전쟁 산업으로 성장해 갔다. 넓은 땅에 많은 인구가 살던 중원은 무한한 약탈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후금은 적의 식량으로 전쟁을 치렀고, 약탈한 물품은 전비보다 수십 배 많았다. 초기 홍타이지의 전쟁은 백성을 확보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면, 후기로 가면서 재물과 포로 확보가 주목적인 약탈전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인 포로가 60만 이상이었다는 건 이런 목적 때문이었다. 포로를 통해 몸값을 확보하거나 부족한 농업 종사자를 벌충하였다.
후금의 포로 확보는 개인 단위의 무절제한 강탈이 아니라, 부대 단위로 치밀한 계획 아래 이루어졌다. 포로를 잡아가더라도 인간적으로 멸시하거나 해치는 행동은 엄격히 금지하였다. 포로는 현금 자산이거나 농사를 맡길 노동력이자 훗날 백성이었기에 일부러 적대감을 키울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부녀자에 대한 겁탈은 강하게 제재하였다. 강간을 저지른 병사는 대부분 사형에 처해졌다. 후금은 강간 행위를 살인죄 다음으로 처벌하였다.
이때 홍타이지의 목표는 땅보다는 사람과 가축과 재물이었다. 이를 통해 무기를 마련하고 군대를 키웠다. 후금을 비롯한 유목민족의 강점은 뛰어난 기마 전술에 있는 게 아니라, 전비戰費 부담이 거의 없게 전쟁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타고난 기마 전사에다 수렵 활동으로 늘 전쟁 훈련을 해왔고, 거친 환경에 익숙해져 적은 양의 식량으로도 긴 시간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여기에 강한 약탈 능력 덕분에 전쟁이 늘 ‘남는 장사’였다는 점이 유리한 국면을 조성한 요인이었다. 후금은 명이나 조선과 다르게 ‘전쟁이란 포로와 재물 약탈을 통해 나라 경제를 키우고 백성을 부유하게 만드는 산업’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결과적으로 명이 망한 근본 원인은 후금의 거듭된 침략에 따른 재정 악화 탓이었다.
대청 제국 창건, 시대 교체를 선포하다
1635년 4월 홍타이지는 내부 정비를 통해 국력을 다진 후 내몽골에서 차하르부 릭단칸을 격파하였다. 이 과정에서 릭단칸의 아들인 에제이가 후금에 항복하면서 1206년 칭기즈칸의 등극에서 시작된 몽골 대칸의 계승이 끊어지고 내몽골이 후금의 판도에 들어갔다. 이때 몽골 제국의 직계 후손에게 전해져 온 옥새가 발견되었고, 이것이 홍타이지 손에 쥐어졌다. 과거 금은 몽골에 의해 멸망당했는데, 이제 후금은 몽골을 자신의 판도 안에 두었다. 여기에 대원 제국의 역대 대칸들이 사용하던 옥새를 얻었다는 사실은, 하늘이 자신에게 천명을 내렸다고 여겼다. 그래서 옥새를 입수한 홍타이지는 하늘에 경건한 제사를 올렸고, 천명을 받았음을 선전하였다. 지도자의 강한 자기 확신은 시대 변화를 이끄는 힘이 되기도 한다. 이 소문에 몽골의 다른 부족들까지 찾아와 복속을 다짐하였다. 그저 만주 독립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겠다는 ‘소박한 꿈’에서 세계 제국 대원大元의 영광을 재현하는 새로운 세계 제국을 창건할 웅대한 꿈을 꾸게 되었다.몽골 초원의 지배자가 된 홍타이지는 새로운 통치술로 몽골족을 단단히 묶어 나갔다. 거친 몽골족을 잘게 나눠 통치하여, 소규모 추장들이 수없이 할거하는 지역이 되게 하였다. 몽골족 지도자들은 연명으로 홍타이지에게 ‘복드 세첸 칸Bogda Sechen Khagan’이라는 존호를 바치며 칭기즈칸의 정통을 승계하는 몽골 대칸으로 공식 인정하였다. ‘성스럽고 현명하고 인자한 칸’이라는 뜻의 이 말은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로 번역된다.
1636년 3월 후금의 수도 성경에서 몽골에서 대칸을 추대할 때 개최하는 부족장 연석회의인 ‘쿠릴타이’가 열렸다. 여기서 만주족과 몽골족, 요동의 한족 유력자들은 홍타이지를 대한大汗이자 황제로 추대하기로 결정하였다. 마침내 45살의 홍타이지는 1636년 4월 11일 황제의 위에 올랐고,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바꾸었다. 또한 제국의 국호도 금金에서 청淸으로 바꾸었다. ‘금’이라는 국호는 한족들에게 남송 정권의 치욕을 떠오르게 했다. 금은 북송의 수도 개봉을 점령하고 당시 휘종과 흠종을 잡아가는 정강의 변을 일으켜 북송은 멸망하고, 남송을 성립하게 했던 역사가 있다. 그래서 중원 정복을 목표로 한 홍타이지는 국호를 바꾸기로 하였다. ‘청淸’이라는 국호를 채택한 이유는 명明은 불(火)을 의미하므로, 불에 녹는 쇠(金)를 버리고(火克金), 불을 이기는 물(水)을 채택해(水克火) 물 수변(氵)이 들어간 청淸을 썼다고 한다. 음양오행 사상이 반영된 국호 변경이었다.
이제 홍타이지는 황제 위에 오르고 국호를 대청으로 변경하여, 여러 민족을 아우르는 ‘다민족 세계 제국’의 출범을 선포하였다. 그러면서 이를 완전 무시한 조선을 정벌하면서 기존의 동아시아 체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새로운 판짜기에 나섰다. 청은 만주 일원에서 벗어나 요동과 내몽골 지배를 기반으로 명과 대등한 국가 체제를 열었다. 이제 명을 얻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8차례에 이를 정도의 대규모 연타連打 공격으로 명의 국력을 쇠약하게 만들었다. 이미 원숭환을 자신들의 손으로 제거한 명은 청군에 맞설 군사 역량과 정신적 자신감을 상실하였다. 여기에 허베이성河北省과 산시성陝西省, 산둥성山東省 등 북중국의 경제 기반이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방어 체계가 무너진 중원의 넓은 빈공간은 이자성 같은 도적떼가 차지하게 되었다. 청군은 중원에서 빼앗은 막대한 포로와 재물을 기반으로 재정의 충실을 기하고 경제를 발전시키며 군사력을 강화해 나갔다. 매 2년 정도의 휴식기를 가지면서 절제된 약탈전을 벌이며 천천히 명 제국을 말려 죽이고 있었다.
1643년 숭덕 8년 경오일(양력 9월 21일) 밤 홍타이지가 사망하였다. 향년 52세로 재위 기간 17년이었다. 비교적 몸집이 좋았고, 뇌출혈 조짐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심혈관 질환이 사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국 건설을 위해 동분서주하느라 건강을 해친 결과로 볼 수 있다. 뛰어난 무장이면서도 수준 높은 교양인이기도 한 그는 문무 양 방면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루었다. 위기에 놓인 후금의 국가 조직을 정비하여 대제국으로 발전시켰고, 여진족 통일 전쟁을 완수하였으며, 조선과 몽골을 복속시키며 중원을 수시로 공략해 명청 교체의 확실한 디딤돌을 놓았다. 청이 멸망하고 중화민국 때 만들어진 청사고淸史稿 태종본기에서는 홍타이지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문무에 능했으며(允文允武), 안으로는 정사를 닦았으며(内修政事), 밖으로는 정벌을 게을리하지 않았다(外勤讨伐) 용병술은 신과 같았고(用兵如神), 가는 곳마다 승전보를 울렸다(所向有功).”
대청 제국의 황제들
1626년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는 10년 만에 대청 제국으로 국체를 확대 변경하고 황제가 되었다. 중원 정복의 대계를 마련한 뒤, 명 패망 1년 전에 승하하였다. 홍타이지 집권 초기 후금국은 군사적으로 명을 제대로 위협하지 못하고 경제 기반이 허약하여 위기를 맞았다. 이런 막막한 상황에서 홍타이지와 만주족은 흔들리지 않았다. 요동의 한인을 설득해 농사를 짓고, 조선을 정벌해 물자를 급하게 확보하고 나라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답답하고 암울한 상황에서도 홍타이지는 대국 명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창업주를 능가하는 창업 정신을 가진 홍타이지였다. 허리 굽혀 살지 않겠다는 굳센 자존심과 투지, 두려움 없는 용기와 수렵민족 특유의 발 빠른 지략, 검약하고 실질을 중시하고 개인보다는 조직을 우선하는 오랑캐 전략을 바탕으로 한 집요한 공세로 중원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청 3세 황제는 천리에 따라 순조롭게 나라를 다스려 대통일을 이룩한다는 의미의 순치제順治帝 복림福臨이다. 즉위 당시 6살이라 당시 실력자인 예친왕 도르곤과 정친왕 지르갈랑의 보좌를 받았다. 1644년 이자성李自成의 반란군이 베이징北京을 점령하고 명의 숭정제崇禎帝는 목을 매고 자결했다. 스스로 대장군에 오른 섭정왕 도르곤은 총 14만 명의 팔기군을 이끌고 산해관으로 진격하였다.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吳三桂는 당초 이자성에게 항복하려 했는데, 자신의 애첩 진원원陳圓圓을 이자성의 최측근 유종민劉宗敏이 납치해 가자, 청군에 항복하고 산해관의 문을 열었다. 역사는 우연한 작은 사건으로 큰 변화가 시작되기도 한다. 틈왕闖王 이자성의 대순군大順軍
(주4)
은 갑자기 눈앞에 가득 찬 만주 철기군에 의해 철저하게 패배하였고, 이자성은 도망치다 시골 농민이 휘두른 괭이에 맞아 죽었다.산해관을 넘어 북중국을 장악하고 상황이 정리된 가을 도르곤은 어린 순치제를 심양에서 베이징으로 모셨다. 가을비 내리던 10월 초하루 자금성에서 황제 등극식을 열어 대륙의 주인이 대청임을 만천하에 알렸다.
순치제 초기 7년은 숙부 도르곤이 실권을 지니고 있었기에, 직접 다스린 친정 기간은 10년 정도였다. 그사이 남명南明의 영력제永曆帝를 잡아와 목을 베어 명의 잔존 세력을 대부분 평정하였다. 그와 함께 명의 적폐를 일소하여 민심의 안정을 기하였다. 순치제는 즉위 18년 1661년 정월 24살에 천연두를 앓고 타계했다. 일부 야사에서는 황제의 총애를 받던 동악비董鄂妃가 병사하자 인생무상을 느껴 황위를 팽개치고 산서성 오대산五臺山의 절로 출가해서 어쩔 수 없이 이미 천연두를 앓았던 현엽으로 뒤를 잇게 했다고 한다.
순치제에 이어 즉위한 셋째 아들 8살 현엽玄燁이 바로 강희제康熙帝다. 총명한 강희제는 14살 때 실권자 오배敖拜를 몰아내고 친정을 시작했다. 19세 때에는 강남의 3분의 2를 점령했던 삼번왕三藩王(청에 항복했던 오삼계, 상지신, 경정충)을 9년에 걸쳐 진압하여, 더욱 강력한 중앙집권화 정책을 펼침으로써 중국 전역을 진정으로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만주족과 한족의 통혼을 금지해 만주족 지배층을 온존시키는 한편, 팔기에 속한 기인旗人으로 기사騎射에 능하지 못하면 엄벌에 처하는 등 상무 정신을 고취시켰다. 여기에 한족 인재 등용을 신중히 하였고, 강희자전康熙字典과 같은 여러 편찬 사업에 한족 지식인을 참여시켜 딴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였다. 강희제는 9번에 걸쳐 강남 지역을 순방하여 지방관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민심을 살폈다. 외정 면에서는 마지막 유목국가인 준가르부를 정복하고,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여 현재와 같은 중국 영토의 틀을 만들어 주었다.
강희제가 재위 61년인 69세에 승하하자, 치열한 황위 경쟁을 뚫고 넷째 아들 윤진胤禛이 황위에 오르니 그가 옹정제雍正帝이다. 성실하고 치밀했던 옹정제는 강희제 말년에 나타난 재정 악화 등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여 태평성세가 이어지게 했다. 특히 그는 엄청난 양의 일 처리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그만 현의 문서에도 황제가 붉은 글씨로 쓴 조칙인 주비硃批가 남아 있을 정도로 꼼꼼한 인물이었다. 13년 정도로 상대적으로 짧은 치세였지만,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강희제와 건륭제 시대를 잇는 아주 뛰어난 제왕이었다.
건륭제乾隆帝는 옹정제의 넷째 아들로 이름은 홍력弘曆이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해 강희제가 가장 총애한 손자였다. 조부 강희제의 재위 기간인 61년을 넘게 재위함을 꺼려 재위 60년에 퇴위하고 태상황제가 되었다. 그로부터 3년을 더 살아 1799년 2월 89세로 승하하였다. 조부 강희제 때부터 이어진 재정적 축적을 계승하여 제국은 안정되었고, 문화적으로도 최고의 성숙함을 보여 주는 등 청 제국 최전성기를 이룩하였다. 초기에는 내치에 힘썼고, 후반기에는 현재의 신장新疆 자치구 지역인 준가르 평정과 위구르, 타이완, 미얀마, 베트남, 네팔 등을 원정하는 10회에 걸친 무공을 세워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불렀다. 국내 순방도 자주 다녔고, 고증학의 번영을 배경으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펴내고 명사明史를 완성하는 등 문화 사업도 활발하게 하였다.
1661년 강희제 등극에서부터 옹정제를 이어 1799년 건륭제가 승하할 때까지 3대 138년을 흔히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한다. 정치 리더십이 확립된 가운데 국내 반대 세력을 완전 제압하고, 재정까지 안정되어 있었다. 3억 이상의 인구와 명 때보다 3배 확장된 영토에 이르기까지 만주족은 대륙 경영에 성공하였다. 청태조 누르하치부터 강건성세까지 만주족인 청의 고속 성장은 무엇보다 ‘탁월한 리더십’을 구축한 덕분이다. 청은 장자 승계 원칙이 아닌 가장 뛰어난 이가 대를 이었다. 그래서 모든 황제들이 지용을 겸비한 비범한 인물들로 제위를 계승하면서 맡은 바 사명을 이루어 냈고,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청조가 멸망한 이후 만주족은 현재 만족滿族이라는 소수 민족이 되었다. 인구는 천여 만 명으로, 조상의 언어와 풍습을 상당 부분 잃었지만, 다수가 중국 주류 사회에 진입한 채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한족들도 만주족을 대함에 있어 과거 지배 민족으로 외경畏敬은 할지언정 하대시하거나 차별하는 법은 거의 없다고 한다.
결론을 정리해 볼 때, 만주족 초기 흥기의 역사, 즉 누르하치의 거병에서 홍타이지를 거쳐 강건성세에 이르기까지 그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상대가 아무리 크고 강해도, 사안이 아무리 위험해도 두렵지 않다는 야성野性의 기백, 스스로의 강약장단强弱長短을 파악해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의 방안을 도출해 내는 지략智略 , 그리고 앞사람의 업적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창업 정신創業精神의 견지堅持 이렇게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 피할 수 있었던 어리석은 전쟁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시속에 중국을 대국(大國)이라 이르나 조선이 오랫동안 중국을 섬긴 것이 은혜가 되어 소중화(小中華)가 장차 대중화(大中華)로 바뀌어 대국의 칭호가 조선으로 옮겨 오게 되리니 그런 언습(言習)을 버릴지어다.”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5편 118장 3∼4절)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중국은 동서양의 오가는 발길에 채여 그 상흔(傷痕)이 심하니 장차 망하리라. 이는 오랫동안 조선에서 조공 받은 죄로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5편 402장 7∼8절)
*하루는 태모님께서 갑자기 허공을 향하여 중국말을 하시므로 성도들은 그 사정을 몰라 어리둥절하여 앉아 있더니 잠시 후에 말씀하시기를 “청국 신명(淸國神明)이 와서 국정(國政)에 대한 음모를 꾸미므로 내가 추방하였노라.” 하시니라. (11편 266장 6∼7절)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중국은 동서양의 오가는 발길에 채여 그 상흔(傷痕)이 심하니 장차 망하리라. 이는 오랫동안 조선에서 조공 받은 죄로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5편 402장 7∼8절)
*하루는 태모님께서 갑자기 허공을 향하여 중국말을 하시므로 성도들은 그 사정을 몰라 어리둥절하여 앉아 있더니 잠시 후에 말씀하시기를 “청국 신명(淸國神明)이 와서 국정(國政)에 대한 음모를 꾸미므로 내가 추방하였노라.” 하시니라. (11편 266장 6∼7절)
청의 조선 정벌 전말기
1635년까지 서쪽(몽골)을 정리한 청태종 홍타이지는 여세를 몰아 이듬해에 동쪽 공략에 나섰다. 바로 조선朝鮮을 정벌한 것이다. 1636년 다른 해에 비해 유난히 추운 12월 압록강을 건넌 청의 12만 8천 만몽한滿蒙漢 팔기군은 채 열흘도 되지 않아 조선의 수도를 장악하고, 조정을 남한산성 안으로 가두어 버렸다. 청군은 겹겹이 에워싼 포위망과 명과의 전쟁에서 숙달된 공성 전술을 십분 활용하여 압박하였다. 추위와 군량 부족, 거기에 강화도까지 함락되는 형편에 이르자, 훗날 조선 국왕 이종李倧은 싸늘한 송파 삼전도 들판에 나와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죄’를 실토하며 항복하였다. 청의 잘 준비된 군력과 치밀한 정보 획득의 결과였다. 이를 조선에서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 기록한다. 조선의 시각에서는 참혹하고 굴욕적인 국난이었지만, 청의 시각에서는 중원 정복을 위한 사전 정비 성격이었다. 이 전쟁은 지금까지 이어 온 ‘명明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근본적으로 전복시킨 결정적 사건이었다.
1368년 대원 제국을 고비사막 이북으로 몰아내고 중원을 차지한 명은 자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국제 정치 시스템을 구축한다. 이른바 대명체제이다. 명은 주변국을 번국蕃國(중심국을 에워싼 울타리 나라란 뜻)이라 하여 명 황제의 책봉을 받아 자국 내에서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대신 내정의 자주성을 보장받게 하였다. 이런 체제는 적잖은 변화를 겪었고, 많은 도전이 있었지만 그런대로 굳건하게 지탱되었다. 여기에는 명의 국력이 강한 이유도 있지만, 주변국들의 적극적 참여와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선은 이런 체제에 가장 열렬한 추종자였다. 1392년 개국한 조선은 이후 동아시아에서 명 다음가는 대국이었지만, 임진왜란의 참화를 겪은 뒤 원래 위격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명의 지원군 파병을 계기로 국익을 무시하는 친명 일변도 외교 노선을 걸었다. 그래서 자국 중심의 새로운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꿈꾸던 청으로선 조선을 먼저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거목을 쓰러트리기 전에 방해가 되는 잡목들을 잘라 내는 전략이다.
1627년 정묘호란으로 청은 조선을 아우로 삼는 데 성공했지만, 양측 관계는 불안정했다. 조선은 여전히 뻣뻣하여 청을 오랑캐로 배척할 뿐, 현실적으로 높아진 위상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이런 조선에 대해 청은 짝사랑에 가까운 호의를 베풀었다. 현실을 인정하고 자신들의 지원 세력이 될 것을 기대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조선은 청의 접근을 극도로 경계하고 경멸하였고, 교류도 소극적이었다.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1636년 4월 홍타이지가 황제로 즉위하였지만, 조선은 ‘오랑캐가 황제를 참칭했다’며 청과 결전을 촉구하여 청을 자극하였다. 여기에 청과 가까운 평안도 앞바다 가도椵島에 명군이 주둔하였다. 뒤가 말끔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조선과 가도의 명군을 그대로 둔 채 중원으로 진출하면 청은 등 뒤에서 칼을 받을 위험이 컸다. 그래서 홍타이지는 전략적으로 조선을 제압해 우군으로 만들고 그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명 정복에 투입한다면, 뒤를 의식하고 돌아보는 위험도 줄이고 정복군의 힘은 배가가 되리라고 판단했다. 여기에 조선을 정벌함으로 해서 대청 제국의 군사력을 과시하고, 새 황제의 덕을 만천하에 보여 주려 했다. 명의 최대 추종국 조선을 순조롭게 항복시킨다면 그 효과는 곧바로 중원으로 확산될 것이다. 이제 명의 시대는 갔고, 청의 천하가 열렸음을 선포하면서 진정한 수명천자受命天子 진성황제眞性皇帝가 누구인지 입증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친정親征
(주5)
이라는 승부수로 1636년 12월 8일 압록강을 건너서 이듬해 1월 30일 조선 국왕을 무릎 꿇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구도대로 전쟁을 치렀고, 원하는 모든 전략적 결과를 획득하였다. 조선군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병자호란은 조선군의 완벽한 전략적 전술적 패배였다. 첫 번째 이유는 청군의 전략 목표와 기동 계획에 대한 완벽한 오판이었다. 청은 조선을 완전 점령하기보다는 조선을 제압하는 전략적 목적이 컸다. 그렇기 때문에 속도를 선택했다. 목표를 조선 국왕을 사로잡는 데 두었다. 그리고 혹시 인조仁祖가 강화도로 피신하면 장기전으로 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청 선발대는 강화도로 가는 길을 막는 데 주력하였다. 반면 조총으로 무장한 보병이 주력인 일본과의 전투만을 기억하고 있던 조선은 전통적인 산성입보 견벽청야堅壁淸野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는 마을과 들판, 도로를 비우고 험한 산에 의지한 산성에 진을 치고서 장기전을 펴는 것으로, 적의 보급을 끊고 후방을 타격할 기마대가 있어야 성공할 수 있는 전략이었다. 그 역할을 원래는 이괄이 지휘하던 평안도 군사들이 해야 했지만, 1624년 발발한 이괄의 난으로 평안도 군사 수가 채 만 명이 되지 않은 상황이라 이 작전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시간과 싸움을 벌이며 남하해야 했던 청군을 오히려 도와주는 꼴이 되어 버렸다.
조선은 강화도 다음 가는 방어지로 남한산성을 선택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의 원래 계획은 이랬다. 청군 진입로에 위치한 평안도 군대는 이괄의 난으로 궤멸되어 있었다. 유능한 지휘관이었던 박엽과 이괄이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사라졌고 병력도 만 명 이하로 줄었다. 그래서 병력을 대거 수도권으로 집중시켜 놓았고, 왕은 강화도로 세자는 남한산성으로 다른 왕자는 삼남 지방으로 가서 근왕병을 모아 수도권에 모인 청군을 일망타진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백성들의 피난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이 모든 계획을 한 방에 깨트린 게 청의 속도전이었다.
남한산성은 천혜의 요새였다. 남한산성 아래에는 충분한 식량도 있었다. 산성 안의 군량은 50일분 정도였다. 청이 평안도 성들을 공격하는 시간에 이 군량을 남한산성으로 옮기면 된다는 생각이었지만, 청의 속공에 군량을 미처 옮길 시간이 없었고, 이 군량은 청의 군량미로 고스란히 활용되고 말았다.
두 번째로는 인조와 조정이 머뭇거리는 바람에 강화도로 몽진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물론 날씨도 궂었고, 청 선발대가 정말 바람처럼 달려왔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는 있다. 1636년 12월 8일 청 선봉대가 의주를 통과했고, 도원수 김자점의 청군 침략을 알리는 최초 장계는 13일에 올라왔다. 다음 날 청 선봉대는 한양 서쪽 근교 개성에 도착하였다. 예상 밖의 청 진군 속도에 놀란 인조는 강화도 파천에 실패하고 남한산성에 입성하게 되었다. 이에 임금을 속히 구하지 못한다는 책망을 두려워한 지방의 감사와 그 병력들은 무리하게 진군하였다. 보급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서둘러 이동한 탓에 전체적인 전략을 조율할 여유가 없었고, 남한산성 부근에서 각개 격파를 당하고 말았다. 반면 남한산성이라는 확실한 미끼를 문 청군은 기다리며 조선군을 하나씩 격파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에서 벌어진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은 보급에 허덕였고, 물자 부족으로 인해 승리한 전투(수원 광교산 전투 등)에서도 퇴각해야만 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청은 명이 심양을 공격할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고, 신속하게 한양을 점령하기 위해 급하게 이동하느라 보급에 문제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컸다. 남한산성 구원이라는 절체절명의 부담감이 없었다면 조선군은 좀 더 유연하게 작전을 벌였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라도 인조가 무릎을 꿇고 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삼전도 치욕의 3대 장본인
병자호란에서 인조를 왕위에 올린 서인西人 집단은 제대로 왕을 보필하지 못했다. 제대로 국방 대책을 세워 청의 공격을 제대로 막아 내거나 아니면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역사상 우리 임금이 외국의 임금에게 항복하는 치욕을 안겨 주었다. 그 치욕에 대한 대가는 오롯이 국왕과 일반 백성들에게 지워졌다. 그래서 당시 전란 극복의 책임이 있던 인물 중 가장 큰 잘못을 한 3명을 꼽아 보기로 하겠다. 이는 개인이나 어떤 집안을 흠잡기 위함이 아니다. 역사에 있어서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인물이 그 책임을 방기하거나 다하지 못할 때 벌어지는 참혹한 결과에 대한 경계의 의미에서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 영의정 겸 팔도도체찰사 김류金瑬(1571∼1648)이다. 본관은 순천이며, 아버지는 임진왜란 당시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과 함께 전사한 김여물이다.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서인 정권의 안위만을 좇는 인물이었다. 최명길은 그를 ‘신중하지만 큰 식견은 없다’고 평가했다. 그는 전란 극복의 총책임자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평시의 잡일에는 능했지만, 급박한 상황에서는 옹졸하고 무능했다. 대표적으로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는 중에, 홍타이지가 이끄는 본군이 당도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습을 주장하여 정예병 300명을 잃게 했고 피해 규모를 허위로 보고하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돌리는 졸렬한 모습을 보였다. 이는 조정과 병사들로 하여금 더 이상 싸울 의지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임진왜란 당시 국난을 극복하는데 총사령관 역할을 한 서애 류성룡이 그리워지는 대목이다.
다음은 그의 아들인 김경징金慶徵(1589∼1637)이다. 병자호란 당시 그의 직책은 강화도 검찰사로, 강화도의 수비 책임자는 강화유수 장신張紳이었다. 김경징의 본래 임무는 세자빈 강씨와 세손 이백李栢
(주6)
, 봉림대군(훗날 효종) 일행을 강화도로 모시고 경호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인조의 명으로 삼도 수군을 징집하여 강화도에 집결시키는 임무도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당초 세자빈과 세손, 봉림대군 일행을 강화도로 모실 때 큰 불경을 저질렀다. 왕실 일행을 사흘 동안이나 나루터에 머물게 하여 세자빈이 통곡하게 하였다. 그때 그는 자신의 일가친척과 재물만을 챙겨 옮겨가도록 했다. 그 뒤 왕실 일행을 강화도로 보낸 다음 백성들이 따라 건너는 걸 허용하지 않아 그를 따라 피난을 온 백성들이 청군에게 희생되도록 만들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그를 원망했다. 게다가 청군이 강화도를 함락시켰을 때 왕실 일행을 피신시키지 못하고 제 한 몸만 건져 육지로 달아나 버렸다. 그 결과 왕실 일행은 청군의 포로가 되었고, 이는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와 조정에 항복을 강요하는 가장 큰 압박 요인으로 작용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이러한 그를 실록에서는 광동狂童, 즉 미친 녀석으로 평가했다. 강화도가 함락된 뒤 만주족은 군율이 잡혀 있어서 약탈을 자제했지만, 몽골병이나 한병漢兵은 강도나 다름없었다. 곳곳을 약탈하고 여자들을 잡아갔다. 반항하는 사람은 도륙하고 집에는 불을 질렀다. 당시 강화도는 시체가 쌓여 들판에 깔리고 피는 강물을 이루는 등 참혹한 지옥도가 펼쳐졌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이는 도원수 김자점金自點(1588∼1651)이다. 그는 사육신의 단종 복위 거사를 고변하여 출세한 쌍곡 김질의 5대손이며 백범 김구 선생의 방조傍祖다. 본관은 (구)안동이며, 병자호란 당시 직책은 군 최고 책임자인 도원수였다. 청군의 급속한 남하를 저지해야 함에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쳐다만 보고 있었다. 전방의 급보를 받고도 무시하고 제대로 조정에 알리지 않았다. 덕분에 청군은 의주에 도착한 다음 날 평양에 나타나고 이틀 뒤 황해도 한복판에 나타나는 등 도깨비 군대가 되었다. 그는 수도 방위군인 어영청 군대와 조선 최정예 함경도군軍이 포함된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군의 배후를 압박하지 않았고 어떤 전략적 움직임이나 지시를 하지 않았다. 고립된 인조가 군사적 명령을 내릴 수 없는 상황에서, 외부에 있던 그가 적절하게 그 일을 수행했어야 했다. 그 뒤 그는 임경업을 모함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자들이 마땅히 그 소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음으로 해서 벌어진 미증유의 대참사는 임금에게 치욕을 안겨 주고, 나라 위신의 한없는 추락을 초래했으며, 일반 백성들의 자긍심을 송두리째 앗아 가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병자호란이 조선에 끼친 영향
애당초 만주족 지도부는 조선을 자신들과 손잡을 수 있는 잠재적 동지라고 여겼다. 겉으로는 명을 섬기지만 속마음은 다를 것이다. 그래서 만주와 몽골이 힘을 합쳐 중원을 정복하는 과정에 조선이 동참하거나 중립을 지켜 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조선은 반대로 행동했다. 조선의 지배층은 청의 원시성과 역동성, 숭무 기풍, 기동성 등을 오랑캐 풍속이라고 천시하며 얕잡아 보았다. 반면 청의 지도부에서 본 조선은 중원의 왕조에 굴종하여 같은 동이족을 적대시하는 한심한 나라였을 것이다. 조선의 허례허식, 모화사상, 사대주의, 문약함을 경멸하였다. 배달국 이래 단군조선과 고구려라는 같은 하늘에서 갈라져 나온 두 동이 족속 간의 상반된 세계관은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이런 화해할 수 없는 인식의 격차는 결국 힘의 논리에 의해 한쪽은 깨어져 나가야만 했다. 그렇게 하여 발생한 병자호란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죽고 포로로 끌려갔다. 조선은 삼전도의 굴욕을 갱생의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끝내 견고한 성리학의 벽을 넘지 못했고, 결국 국권을 상실하였다. 남한산성의 쓰디쓴 경험이 국가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못한 셈이다. 그저 북벌이라는 비현실적인 정치 구호와 정신 승리만 난무했을 뿐 이를 교정하려는 시도는 구체화되지 못하고, 사회는 서서히 붕괴되어 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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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1616년 1월 1일 누르하치는 스스로 한汗의 지위에 오르고,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했다. 그래서 천명한天命汗이라고 하였다. 아이신기오로Aisin Gioro 애신각라愛新覺羅라는 누르하치 가문의 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아이신愛新’은 만주어로 황금을 뜻하고, 기오로覺羅는 우리의 민족, 겨레라는 뜻으로 황금씨족이이라는 의미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애신각라’라는 한자에 주목하여 ‘신라를 사랑하고, 신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12세기 초 금金을 세운 아구타 가문이 신라 김씨의 후예란 사실은 금사金史에도 나온다. 그래서 금을 계승하여 국호를 대금大金으로 삼은 것은 자신들의 뿌리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후대 건륭제 시대에는 만주 황실이 중국화되면서 뿌리 의식이 약화되었을 때도, 자신들의 뿌리는 삼한과 이어지고 신라의 후예라는 점은 인식하고 있었다. 참고로 청이 망한 뒤 아이신기오로씨 가운데 김씨로 성씨를 바꾼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이 부분의 진실에 대해 좀 더 연구해 볼 가치는 있어 보인다.[주2]
모문룡毛文龍 - 명의 장수로 만주 지역과 조선 북부에서 활동하면서 후금에 대항하였다. 수군 운용에 뛰어났고, 화포 제작과 포격전에 능했으나 후금 정벌보다는 개인적인 이익에 몰두하여 실제 전공은 별로 없었다. 그의 사후 휘하에 있던 수군 부장들이 청에 귀순하면서 청은 막강한 수군을 거저 얻게 되었다. 그는 조선을 상대로 행패를 부려 악명이 높았다. 조선 조정에 후금을 친다는 명목으로 수탈하였고, 조선 사람들을 살육하고, 머리를 깎아 여진족의 목이라고 바쳐 군공을 탐했다. 그 수가 1만에 달했다. 조선 서해안을 약탈하거나 조운선이나 지방 관아를 공격하여 관곡을 털어갈 정도였다. 원숭환은 조선으로 하여금 청을 치게 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동맹국이어야 할 조선에 대한 그의 패악질을 보기 힘들어 그를 처형하였다. 당시 상황으로 보면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명 조정(위충현 등 환관 무리들)은 이를 트집 잡아 원숭환을 죽였다. 모문룡은 노략질한 재물을 당시 실권자인 위충현에게 뇌물로 바쳐 왔기 때문이다.[주3]
체질인류학 연구에 따르면 우리 한민족은 앞뒤가 짧은 머리에 속하는데, 전 세계에서 만주족만 우리와 닮았다. 귀에서 정수리까지 머리뼈 높이도 평균 14㎝로 극히 유사하다고 한다. [주4]
대순大順 - 틈왕闖王 이자성은 1644년에 국호를 대순大順이라 하면서 황제로 즉위했다. 틈闖은 ‘사나운 말이 문을 박차고 나와 돌진하는 것’으로 매우 난폭하다는 의미가 있다. [주5]
청태종의 친정親征 - 청의 침략에 대해 만약 조선이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장기전으로 끌고 갔다면, 청태종은 당태종의 전철을 밞아 오히려 조선에 항복했었을 수도 있었다. 이는 과거 수, 당과 거란, 몽골이 한반도 정복을 시도하였다가 철저히 실패하거나 수십 년의 전쟁 끝에 간신히 입조를 받은 역사에서도 보여 주는 사실이다.[주6]
이백李栢 - 아명이 돌쇠, 즉 석철石鐵이며 소현세자의 큰아들이다. 모친 민회빈 강씨가 인조의 수라에 독을 탔다는 의혹을 받고 사사된 뒤, 제주도에 유배된 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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